1. 개요
폴란드 그룬발트(타넨베르크)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3개의 전투가 있었다.2.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
자세한 내용은 그룬발트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독일에서는 1차 타넨베르크 전투라고 부르는 반면, 폴란드 역사학계와 영미권 기준으로는 '그룬발트 전투'로 표기하는게 더 일반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타넨베르크가 폴란드로 넘어가고 폴란드 중심의 역사관이 서양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으면서 그룬발트 전투란 이름으로 명칭이 많이 변경되었다.
3.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벌어진 독일 제국군과 러시아 제국군의 전투.
1410년도 전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실제 전투가 일어난 곳은 타넨베르크로부터 동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1]
3.1. 배경
1차 대전 초기 독일 제국군 육군은 프랑스 등 서부전선을 먼저 이긴 뒤, 전쟁동원능력이 떨어지는 러시아 동부전선은 다음에 공격한다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대부분의 육군 병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은 미흡한 병력동원 및 군수장비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신속하게 동프로이센 지역에 공세를 취했다.[2] 러시아군 총사령부는 사전에 수립한 계획에 의거하여 총 80만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북서전선군을 동프로이센 방면으로, 남서전선군은 헝가리 갈리시아 일대로 진격하도록 지시하였다.8월 15일, 30개 보병사단, 8개 기병사단 총 40만의 북서전선군은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마수리안 호수를 기준으로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진격했다. 또한 제10군이 예비대로서 합류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은 동프로이센 지역에 육군 11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16만의 육군 제8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프로이센 전역을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력이었기에 주요 요충지 중심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8월 17일 독일 제8군 소속 제1군단은 러시아 제1군을 스탈루포넨 일대에서 격퇴했다. 그러나 제8군 사령관 프리트비츠는 오히려 1군단의 괴멸을 걱정하여 철수 명령을 내린다. 게다가 겁을 먹은 나머지 참모총장 몰트케에게 찡찡대면서 증원요청만 줄기차게 하며 후퇴만 생각한다. 그동안 러시아군은 굼비넨까지 진격하여 8군의 측방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굼비넨을 내준 프리트비츠는 동프로이센 전체를 포기하고 비스툴라 강 서안으로 철수하여 그곳을 방어거점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동프로이센은 명목상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이곳을 포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적어도 독일 본토에서 증원 병력이 추가 동원되어 오기 전까지는 버텨야 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프로이센을 사수해야만 했던 독일군 수뇌부는 프리트비츠를 날려버리고 신임 사령관에 퇴역장군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참모장에 개전 초 리에주 공략전에서 활약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임명한다.
제8군은 전임 사령관을 제외하고는 지휘부가 딱히 패배했다는 분위기에 지배당하지 않았고, 신임 사령관 착임 전의 공백기를 활용해 제8군 작전참모 막스 호프만 일반참모 중령은 후속 작전계획을 짜놓게 된다. 언뜻 보면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작전계획으로, 1개 사단으로 북부의 러시아 제1군을 막는 동안 나머지 병력으로 남방의 제2군을 때려잡는다는 것이다.
이 무모해보이는 계획은 "'예상보다는 빨랐지만 어찌되었든 러시아군의 동원 속도가 매우 느린건 틀리지 않았다'''는 통찰을 바탕으로 수립된 것이다. 이미 러시아 제1군은 초전의 압승 이후 전과 확대는 커녕, 그대로 굼비넨 지역에 눌러앉아 진격을 멈추고 있었고, 러시아 제2군은 호수 남방의 소택지에서 정체되어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3] 이것은 러시아군이 신속 대응에만 성공했을 뿐, 전면 전투에 나설 수 있는 동원을 완료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근거였고, 때문에 과감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러시아군이 명령문을 대놓고 유출해버린 덕분에,[4] 해당 명령을 입수한 전선 저 뒤편의 독일 제 8군 사령부에서도 비슷한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명령문은 힌덴부르크에게 전달되었고 힌덴부르크는 지체없이 작전을 승인했다. 루덴도르프는 전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작전계획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도착하고 나니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작전이 이미 실행 준비까지 완료되어 있었다.
그만큼 당시 러시아군의 통신 보안은 매우 열악하고 안이한 수준이었고, 독일군의 작전계획 수립 속도는 무지막지하게 빨랐다(참고: 존 키건 1차 세계대전사).
3.2. 전개
호프만의 계획을 들은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지친 상태인 러시아 제2군을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핵심 지역을 점거한 제1군만이 소극적 진격 후 대기한다는 명령을 하달받은 상황에서 제2군은 훨씬 가치가 떨어지는 지역에서 감감무소식이었으니, 제1군만 전투가 가능한 상태이고 제2군은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파악할 수 있었다.
제1기병사단이 러시아 제1군을 견제하는 사이 제1,3 예비군단이 남하해 제20군단과 합류하여 러시아 제2군을 남쪽에서 포위하고, 동시에 제1, 17군단이 북쪽을 틀어막는 거대 포위망을 은밀히 형성하였다.
8월 28일, 제2군이 포위망으로 들어오자 독일군은 계획대로 제2군을 때려부수기 시작한다. 2군사령관 알렉산드르 삼소노프는 1군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1군 사령관 파벨 폰 렌넨캄프는 이를 그대로 거부했다.[5] 진격하는 러시아군을 그 지역 출신의 예비군들로 구성된 독일 제20군단이 저지하는 동안 양 측면을 포위 후 섬멸한, 이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에서 참패한 러시아군은 병력손실 12만 5천명, 야포 손실 500문, 포로 9만 명에 달하는 피해를 입었다. 삼소노프는 휘하 참모들과 함께 말도 타지 못한 채 도보로 전장을 탈출하다가 상황을 비관하여 자살했다.
2군을 휩쓴 독일 제8군은 기수를 렌넨캄프의 러시아 제1군쪽으로 돌렸다. 8군은 숨 돌릴 새 없이 굼비넨에 머무르고 있던 1군을 마수리안 호수로 밀어붙여 다시 한 번 대 포위를 완성하였다. 여기서도 러시아군은 12만의 병력과 500문의 대포를 잃었고 6만은 포로가 되면서 처참히 무너졌다.
전투 진행 도중 러시아 제1군이 언제 개입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루덴도르프는 주력부대였던 기병사단의 이동에 사사건건 개입하하고 있었다. 마침 정찰기에서 제1군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수신되자(사실 이건 오보였다) 기병사단의 기동을 취소하려 한다. 그러나 기병사단 지휘관은 그 지시를 싸그리 거부하고 제2군의 포위 섬멸전에 그대로 참여했다.
루덴도르프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대박의 기운이 펑펑 나는 상황이라지만, 독일 동부에 있는 병력이라 할 것 자체가 없다시피한 상황이었으므로 제1군 개입으로 손실을 보는 것에 극도로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오판이었다. 이후 루덴도르프 본인도 호쾌하게 기병사단 지휘관의 조치를 인정했다.
루덴도르프의 명령을 거부하고 기병사단 지휘관이 기존 계획대로 작전을 속행하여 오히려 손실을 피한 것은, 호프만 중령의 주도로 이루어진 신속한 작계 수립과 함께, 독일의 일반참모제와 그에 따른 임무형 지휘가 그 우수함을 뽐낸 상황이지만, 다르게 평가하면 그만큼 대전략적 통찰을 무시하던 당시 독일 군사 교육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제 1군은 이미 돈좌 상태이니 어떤 선택을 해도 답이 없었고, 독일군 입장에서 오히려 제1군이 정치적 요충지인 굼비넨에서 스스로 떠나주면 그건 그것대로 이익, 아니 오히려 최상의 이익이었다.[6] 하지만 당시 기병사단 지휘관이나 루덴도르프나, 여기서 기병사단이 기동을 취소하는 것은 절대로 하면 안되는 행동 1위인 기동 방해라는 것, 그리고, 제1군은 어차피 오나마나라는, 정확하지만, 약간 부족했던 통찰이 한계였다.
물론, 이것도 못하는 장교가 차고 넘치는 판에, 이 정론을 낼 수 있던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고, 그걸 루덴도르프가 호쾌히 인정한 것은 매우 높이 사야할 점이긴 하지만, 국가의 입장에서 보는 대전략적 관점에서는 부족했다. 기병사단 지휘관은 몰라도 고위 지휘관인 루덴도르프만은 전투 후 이 점을 따져봐야했을텐데 그랬다는 근거는 딱히 없다. 전투 이후 벌어진 독일군 고위 지도부의 오판을 막지 못한 것을 따지면, 루덴도르프는 동프로이센이 가지는 무지막지한 정치적 영향까지는 생각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고위 사령부의 삽질을 막을 만큼의 정치적 역량까지는 없었던 것이다.[7]
3.3. 결과
타넨베르크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당대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신속한 초기 동원 달성에 완전히 실패하여 시작부터 돈좌당한 꼴이 되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독일에 위협을 가하기는 커녕 박살난 병력을 수습하고 후속 동원과 후속 보급을 세월아 네월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덕분에 동부전선이 순식간에 붕괴할 위기가 지나가고, 러시아군의 압력이 굉장히 오래 해소되게 됨에 따라, 독일군은 양면 압박에서 탈출하여 서부전선에 집중할 기회를 얻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정말 교과서적인 대승인데, 이렇게 잡은 기회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독일군 고위 지도부는 치명적인 오판을 했다. 동프로이센이 가지는 정치적, 전략적 중요성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이 지역이 러시아에게 점령당하고 그대로 동부가 통째로 붕괴하는 참사로 이어질 뻔했는데 천운으로 막았다"는 인식에 집착해버리게 된 것이다.
독일군 고위 지도부는 "천만다행으로 막아내었으니, 방심하지 않고 동프로이센을 확실히 방어한다"는 판단을 했는데, 현실은 러시아의 제 1, 2군이 현재 동원 가능한 전력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 제 1, 2 군은 깔끔하게 소멸했다. 즉, 애초에 적이 동프로이센에서 아예 말끔히 사라져버린 상황이라 병력이고 뭐고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신속대응 가능한 조기 동원 병력이 통째로 소멸함에 따라 러시아는 동원 징후를 노출하지 않고 급습을 가할 역량을 완전히 박탈당한 상황이었으므로, 기존의 판단대로 동부를 그냥 두는게 정답이었다.
결국 독일군 고위 사령부는 서부전선에서 무려 1개 군단을 냅다 차출해 동부전선으로 급파해버렸다. 고위 사령부의 이 어처구니 없을 만큼 쓸데없는 "친절한 지원"에, 루덴도르프 본인조차 어처구니없어하며, "제때 도착할리도 없고 필요도 없는 지원군"을 즉각 거부했으나, 동프로이센를 점거당했다는 패닉에 아수라장이 된 고위 사령부는 막무가내로 제발 보내지 말라는 증원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서부의 전장에서 비보를 듣고 급히 차출되어 군단 규모로 집결, 그대로 한달 가까이 걸려서 기차를 타고, 독일 본토를 열심히 횡단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구원하러" 독일의 장병들이 동부전선에 도착해보니, 정작 도착한 장소에는 위기는 커녕 파리만 날리고 있는 황당한 장관이 펼쳐졌다. 완전히 안전해진 동부전선에는 1개 군단이나 되는 대군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되려 보급이 아까울 판이었으므로, 비장하게 급파된 군단 규모 대병력은 그대로 다시 한달 가까이 기차를 타고 독일 본토를 열심히 횡단하여 서부전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물론 독일군의 고위 사령부가 저런 막대한 패닉에 빠진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동프로이센은 독일 본토와 거리가 멀리 떨어졌지만 발트해, 폴란드 방면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동프로이센이 밀리면 자연 방어선이 없는 서프로이센, 포메른, 포젠이 금방 뚫려 수도 베를린이 위협받는 것은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동프로이센의 일부라도 러시아군에 내준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렇다할 자연방어선도 없는 평야밖에 없는데 40만의 적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아군 16만이 슈퍼플레이를 해서 이겨주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했다. 저 16만이 잡아먹히기라도 하는순간 그대로 베를린 레이스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대참사가 벌어진다. 양면전선이란 게 괜히 악몽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동프로이센 방어가 중요했다고 하더라도 제1전역인 서부전선의 병력을 차출한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농업 경제 지역이었던 동프로이센과 달리 프랑스와 맞닿은 서부전선은 루르 공업 지대로 대표되는 독일 경제의 핵심 권역이었고 주요 대도시들도 서부에 몰려 있었다. 따라서 전략적 가치는 서부전선이 여전히 더욱 컸다.
이전 문서에서 동프로이센이 독일 제국 융커들의 근간이자 독일의 발원지라는 식으로 표기된 적이 있었는데 이는 프로이센의 기원을 튜튼 기사단에서 찾는 오류로 인해 벌어지는 잘못된 서술이다.[8]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발원지는 현대 독일에 속해있는 브란덴부르크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다스리던 호엔촐레른 가문 본가의 요한 지기스문트가 안스바흐 분가의 친척이자 장인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공작이 1618년 사망하여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으면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설립되었다. 요한 지기스문트의 손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쾨니히스베르크의 신분제 의회를 베를린 신분제 의회로 강제통합하는 한편 프로이센 공국 출신 융커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여 씨를 말려버렸다. 독일 제국 선포 이후, 융커들은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 출신이 제일 많았는데 두 지역이 독일 제국의 기원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핵심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의 중심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국왕을 칭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 바깥에 있던 프로이센 공국의 프로이센이라는 이름만 빌려와 국호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9] 게다가 프리드리히 대왕은 1768년 남긴 정치적 유언에서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슐레지엔만 국가의 실질적 본체로 구성되면 충분하며 동프로이센은 적대행위가 시작되자마자 버려야 한다(강철왕국 프로이센 p.340)고 언급하기도 했을 정도로 동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수뇌부에게 중요도가 떨어졌다. 독일 군부가 아닌, 독일의 지도부에게 제일 중요했던 지역은 언제나 수도 베를린과 위성도시 포츠담이었다. 다만 베를린과 포츠담 등이 중요하다고 해서 동프로이센의 입지가 밑바닥이었던 것은 절대 아니며 지휘부의 판단에서 정치적 패닉과 전략적 패닉이 얼마나 되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라 볼만하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왕이 동프로이센은 적대행위가 시작되어 지킬 수 없다면 영토 유지를 포기하고 버리라고 판단했다는 것은 결국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 또한 과대평가되었음을 의미했다. 분명 동프로이센은 확보하고 있을 때의 전략적 가치가 엄청나고, 자연방어선이 없는 베를린으로 쇄도하는 적을 지연시킬 수 있는 중요한 완충지대이지만, 한산한 동프로이센은 어차피 동원 불능 지역이므로, 브란덴부르크 등 독일 본토 지역 영토에서 즉각 동원해서 근처에서 방어하는 것이 훨씬 먼 동프로이센까지 가는 것보다 유리했다.[10]
결과적으로 이 뻘짓으로 인해 서부전선에는 2달간 병력 공백이 발생했고, 서부전선에서의 조속한 승리를 목적으로 한 슐리펜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동원 속도의 우위를 가정한 계획인데 그 동원을 말아먹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서부전선의 양군은 참호전의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이 전투를 계기로 독일 제국의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루덴도르프는 대전 말 독일군 참모총장에 오르게 되고, 힌덴부르크는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까지 선출되었다.[11] 한편 막스 호프만은 작전의 주역이었지만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에게 포커스를 빼앗겨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12] 호프만은 종전 후 전투 지역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에게 힌덴부르크가 묵었던 숙소를 안내하며 '여기는 전투 전, 여기는 전투 중에 그리고 여기는 전투 후에 주무시던 침대입니다.'라고 말하며 디스를 하기도 했다.[13]
일설에는 일본군이 단기 결전에 대한 집착, 보급에 대한 무관심, 정신력에 대한 광신 등 현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들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 이 전투에서 기인한다는 주장이 있다. 요약을 하자면 일본군은 일단 현대전의 요소가 군수 보급의 물량과 화력, 과학 기술에 달려 있다는 것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일본이란 국가 자체는 이를 감당할 만한 역량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 타넨베르크 전투를 통해 일본군은 양적 열세를 포위 섬멸을 통한 단기 결전으로 해소할 수 있고, 양적 열세를 '정신적 우세로 물질적 위력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더 이상의 자세한 반자이 돌격은 생략한다. 다만 다른 일설에는 중일전쟁 전 자국군을 확대개편할 때 예산이 부족해 화력과 차량을 사람과 말로 때우면서 어쩔 수 없이 내세운 것이었다는 말이 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때우는 방법"을 골랐지만 어쩔 수 없이 고른 선택을 시행하려고 개발한 논리에 자기 자신이 매몰됐다는 점은 같다.
사실 타넨베르크 전투는 단순히 포위 섬멸로 이긴건 아니었다. 러시아군은 숫자는 많았지만 병사들의 훈련도 및 사기가 그리 높지 않았으며,[14] 당시 지휘관들 간의 불화도 있었을 뿐더러, 통신보안도 제대로 이루어지 않는 등 허점이 많았으므로 독일군에게 포위 섬멸을 당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 관련된 일화로 흔히 '러시아 1군 사령관 렌넨캄프[15]와 2군 사령관 삼소노프가 러일전쟁 당시 봉천 전투의 패전 책임을 두고 주먹다짐을 벌였는데, 이를 관전무관으로 파견되었던 독일군 호프만 중령이 목격하여 렌넨캄프가 삼소노프를 도우러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두 장군의 찌질한 모습들과, 이를 정확히 짚은 호프만의 능력이 대비되는 점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먼저 두 장군이 봉천에서 주먹다짐을 했다는 가능성 자체가 낮다. 봉천 전투 직후 렌넨캄프는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호프만 중령이 관전무관으로 파견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러시아가 아닌 일본군 측의 관전무관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 진영에는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출처는 바로 호프만 본인의 자서전이라서 호프만이 자신의 전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창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열세에 놓인 2군을 1군이 지원하지 않은 것도, 당시 러시아군의 통신 연락망의 수준이 매우 열악해 서로의 위치조차 잘 모를 정도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벌어진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상급 지휘부에서 렌넨캄프에게 지원 명령을 내렸고 렌넨캄프도 이를 수행하려 했지만, 그때까지도 1군에선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병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동하는 등 시간을 잡아먹고 결국 모든게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자 후퇴한 것이다.
여담이지만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 건데, 이 전투는 사실 타넨베르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전장 대부분은 타넨베르크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독일이 패배했던 1번 항목의 타넨베르크 전투와 대조하기 위해서 이런 이름을 끌어다가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타넨베르크 전투에 고려인, 즉 조선인 의병들이 대거 참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KBS 취재진이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가족들을 취재하던 도중, 대한제국의 참령이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인 김인수[16]를 비롯하여 구한말 일본군에 맞서 두만강 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 나라가 망하자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사단에 몸을 의탁했던 조선인 의병들의 행적을 밝혀내어 보도하기도 했다. 러시아군 대령이 된 조선인 의병, 김인수
3.4. 번외편 타넨베르크의 한국인들
1915년에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롭스크의 한인 3,000명이 국적 취득 및 현역군 입대의사를 밝혔다.
- (러시아 외무성 일지 1915년 12월 7일)
- (러시아 외무성 일지 1915년 12월 7일)
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군에 소집된 조선인 수는 장교 약 100명과 하사관 및 사병 4,034명이었다.
-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 보고서)
-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 보고서)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의 후손 100년 만에 나타나다
노르망디의 한국인은 사실 여부에 관해서 논란이 많지만 이와 유사한 경우가 실제로 1차세계 대전 당시에 존재하였다. 약 100년 전 세계 1차 대전 당시에 러시아군 소속으로 폴란드 타넨베르크 전투에 참전하여 독일군에게 포로가 된 고려인들의 자료를 독일 훔볼트 대학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계1차 대전 당시인 1914년 8월 러시아군이 독일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폴란드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었고, 1916년 3년째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중 여러 기록들을 남겼다.
생생한 자필 신상카드, 군복차림의 각종 사진들, 더구나 100년 전 우리의 노래와 수수께끼 등을 담은 음반도 무더기로 발견되었으며, 그들의 노래는 100년 전 우리 노래가락을 생생히 들려주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이들은 연해주의 짜레찌예 출신의 고려인이며 구한말 일본군에 맞서 두만강 변에서 의병투쟁을 벌이다 나라가 망하자 러시아 시베리아 보병사단에 몸을 의탁했던 베테랑 전사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4,000명의 고려인들이 세계 1차 대전 당시 러시아군에 입대하여 독일전선에 참전한 기록들도 찾아냈다는 내용도 있다. '노르망디의 한국인 포로'는 논란이 많지만(정확히 고려인인지 아니면 다른 중앙아시아계 인물인지 알 수 없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제정 러시아군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한 수 많은 조선계 병사들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들 중에는 1차세계 대전 이후 연해주에서 계속 항일의병투쟁을 한 경우나 또는 재불 독립운동가인 홍재하처럼 러시아군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이후에도 러시아가 아닌 타국에서 독립운동에 계속 투신한 경우 또는 고종의 시종무관 출신으로 고종의 명에 따라 항일에 투신하였다가 망국 이후 러시아 여성과 결혼하여 러시아 제국군의 대령으로까지 진급한 케이스들도 존재한다. '잊혀진 독립운동가' 홍재하, 프랑스 동포들이 찾아냈다 고려인 동포 이야기⑧ 고종의 시종무관 김인수 참령 <시민의 소리>
4. 1944년 타넨베르크 전투
정확히 말하자면 타넨베르크 선 전투다. 독소전쟁 후반기인 1944년 7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 에스토니아의 타넨베르크 방어선 일대에서 벌어진 독일 국방군의 방어전이다.
독일군은 1944년 1월 14일 에스토니아 나르바에 소련군을 막을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 방어선을 방어하던 독일 병력의 대부분은 무장 SS 소속 외국인 의용부대였다. 특히 에스토니아, 헝가리 의용병을 주축으로 하는 독일군이 약 6개월간 소련군의 공격을 저지하며 격렬한 전투를 치른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반고로드 강을 통해 공격하여 독일군을 두 개로 분리시키자 독일군은 타넨베르크 선으로 방어선을 옮긴다. 나르바 16km 서쪽에 위치한 청색 고지(Sinimäed Hills)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69.9 고지, 척탄병 고지(Grenadier Hill), 고아원 고지(Orphanage Hill) 3개의 전략적 고지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무장친위대 제3기갑군 예하 제20무장척탄병사단은 1944년 7월 27일부터 고아원 고지(Orphanage Hill)에서 7월 29일까지 3일 동안 소련군 전차 113대를 격파하며 지켜낸다. 그들과 전투를 벌인 소련군 중에는 1940년 6월 에스토니아를 침략 합병한 이후 강제 징집한 에스토니아인으로 구성된 '제 8 에스토니아 소총군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4년 9월 19일 독일군은 에스토니아에서 철수했고, 소련군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겠다는 에스토니아 의용부대원들을 해산한다. 이후 해산된 에스토니아 의용부대원들은 소련군에 대항하여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에스토니아 영화인 1944에서 이 전투를 다룬다. 에스토니아인 병사들이 후퇴하면서 다른 친위대사단 소속 패잔병들( 제11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소속이었다)과 마주치고 함께 후퇴한다. 후퇴 도중 전차를 몰고 오는 소련군들과 마주치고 교전하지만 알고보니 그 소련군들도 에스토니아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려 서로 사격을 멈추고 말 없이 서로 갈 길을 가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1]
크리스토퍼 클라크(2006/번역 2020), 강철왕국 프로이센, 811쪽.
[2]
사실, 러시아는 전면전에 대비하여 포병을 육성하고 유사시 동원령을 통해 120만의 병력을 모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는데 독일이 러시아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다.
[3]
인력 자체는 동원되었으나, 보급이 따라가지 못해 제대로 장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4]
러시아 제1군이
쾨니히스베르크를 포위 공격하기 위해 진격하다가 얼마간 떨어져 있는 지점에서 대기한다는 내용을 평문으로 발신했다.
[5]
동프로이센을 석권할 수 있는 전략 거점인 굼비넨을 격전 끝에 점령한 이상 이를 포기하고 물러나긴 곤란했다. 게다가 병력이 제대로 동원된 상태도 아닌지라 굼비넨에서 벗어나면 이후 굼비넨으로 돌아가기도 곤란한 상황. 원론적으로, 이 상황에는 필히 후방의 예비대인 10군이 지원을 왔어야 했다. 그러나 10군은 기초적인 동원조차 마무리하지 못한 상황인데다 모인 전력조차 민병대 수준의 병사로 구성되었기에 와봤자 인명피해만 늘었을 것이다.
[6]
만약 그랬다면 타넨베르크 전투 이후 독일군 최고 지위부에서 뜬금 없이 올 필요도 없고 올 수도 없는 지원군을 보낸다고 서부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보내는 치명적 실책을 벌일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동프로이센은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지역이었다.
[7]
독일의 지도부 또한 자신들의 우수한 군사 체계가 만들어낸 우수한 장교진을 제대로 활용할 역량이 없었던 것이 된다.
[8]
독일 역사를 피상적으로 연구한 과거
영미권과 구
소련의 학자들이 이러한 오류를 많이 범했다.
[9]
그래서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전까지는 대외적으로 프로이센이 아니라 브란덴부르크로 더 많이 언급되었다.
[10]
그리고 이 판단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가져갔다. 연합국의 일원이던 소련과 폴란드는 독일이 차지하던 동프로이센 지역을 북부는 소련, 남부는 폴란드가 합병함으로써 이 문제를 완전히 제거해버렸고, 결과적으로 독일이 동프로이센이라는 역사적 짐덩이에서 해방된 꼴이 되기까지 했다.
[11]
다만 두 사람 다 참모총장, 대통령으로서 업적은 최악으로, 특히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좌파/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하는 희대의 인사를 단행한다.
[12]
큰 공을 세웠는데도 승진이 늦었다. 1915년 8월에야 대령으로 진급했고, 2년 뒤인 1917년 10월에서야 별을 달고 소장이 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의 독일군 소장은 지금의 준장과 계급이 같다.
[13]
물론 나중에 호프만이 퇴역한 후 힌덴부르크와 개인적으로 만나 화해를 하긴 했다.
[14]
심지어 기본이자 필수적인 무기인 총조차 없어서 그냥 몽둥이를 들고 참전한 병사들도 있었을 만큼, 러시아군의 무장과 보급 상태도 엉망이었다.
[15]
참고로
독일계 러시아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에스토니아 태생
발트 독일인.
[16]
조선에서 고종 황제의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중 러일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로 탈출하였고, 러시아군 대령이 되어 러시아 황제로부터 최고 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김인수의 후손들은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김인수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숨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