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육군 소장 막스 호프만 Max Hoff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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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Carl Adolf Maximilian Hoffmann 카를 아돌프 막시밀리안 호프만 |
출생 | 1869년 1월 25일 |
북독일 연방 홈베르크 | |
사망 | 1927년 7월 8일 (향년 58세) |
독일국 바트라이헨할 | |
복무 | 독일 제국 육군(1887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소장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푸르 르 메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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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군의 육군 장교로, 최종계급은 소장. 힌덴부르크의 공으로 알려진 타넨베르크 전투를 사실상 계획한 뛰어난 군인이다.2. 생애
호프만은 1869년 지방 법원의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79년부터 1887년까지 체육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후 입대하였고, 1888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1895년부터 3년간 프로이센 전쟁 사관학교에 다녔고,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어를 공부하였다. 1901년 그는 대위로 진급하여 5군단의 참모장교로 임명되었다.2.1.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령이자 일반참모과정을 밟고 있었던 호프만은 제 8군의 참모장으로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동부전선에 전세는 이미 러시아군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때 이미 러시아 2군에게 동프로이센의 일부를 내어준 상태였고,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프리트비츠는 사실상 패배했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제8군은 전 사령관을 제외하고는 지휘부가 딱히 패배했다는 분위기에 지배당하지는 않았고, 신임 사령관 착임 전의 공백기를 활용해 제8군 작전참모 호프만은 후속 작전계획을 짜놓게 된다. 언뜻 보면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작전계획으로, 1개 사단으로 북부의 러시아 제1군을 막는 동안 나머지 병력으로 남방의 제2군을 때려잡는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타넨베르크 전투이라는 전세를 뒤집을만한 작전을 세웠다. 보통 힌덴부르크의 공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호프만이 계획하였다. 여기서 에리히 루덴도르프[1]가 힌덴부르크의 작전을 버리고 호프만의 작전을 사용한 것도 관여했다. 그렇게, 호프만의 계획으로 빼앗긴 프로이센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이후 호프만과 함께 타넨베르크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제9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제9군에서도 그들은 동프로이센의 빼앗긴 영토를 다 찾아왔고, 호프만은 힌덴부르크를 전쟁영웅으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이 과정서 본인의 공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은 탓에 종전 후에 전적지를 안내할 때 힌덴부르크가 묵은 숙소를 소개하며 이 침대가 전투 전에도, 전투 중에도, 전투 후에도 주무신 침대라며(즉, 전투에서 한 것도 없이 잠만 잤다는 말이다.) 힌덴부르크를 디스하기도 했다. 그래도 호프만이 전역하고 나서 서로 화해를 했다고 한다.
호프만은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와 함께 에리히 폰 팔켄하인을 참모총장자리에서 해임시키려는 장성 중 한명이었다. 힌덴부르크의 후임으로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이 임명되었을 때, 호프만은 제8군의 참모장 자리에 남았고, 일반참모 과정을 거친 뒤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동부전선에서 승리 이후, 호프만은 잠깐의 휴식기를 가졌다.
2.2. 전후
전후 잠깐 국가방위군에 남았지만, 결국 1920년 3월 은퇴하고, 베를린에서 살았다. 이후 호프만은 회고록을 썼고, 1927년, 7월 8일에, 바트라이헨할에서 죽었다.3. 평가
호프만은 최고의 참모장교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1]
참고로 루덴도르프는 호프만과 이웃으로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