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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각 사례의 순서는 반드시 시기순이다.2. 서기 500년 이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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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 VS
무와탈리 2세 -
카데시 전투 (기원전 1247년)
이집트 신왕국의 명군이자 명장인 람세스 2세가 중동 일대에 정복전쟁을 벌여 현재의 시리아까지 도달했으나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에게 패배한 전투. 람세스 2세는 성급하게 선봉대만 이끌고 나가다 무와탈리 2세에게 포위되어 병력만 잃은 채 간신히 빠져나갔다. 그러나 무와탈리 2세가 얼마 못가 병사하고 히타이트 왕위계승권을 두고 내부가 불안정해져 히타이트는 이집트가 남부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차지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맺게 된다. -
백기 VS
염파 -
장평대전 (기원전 262년-기원전 260년)
진의 무패장군과 조의 백전노장의 전투. 장평의 조군이 공격을 버텨내자 진이 사령관 교체를 단행, 전국시대 최강의 무장 중 하나이자 필승카드인 백기를 투입하여 둘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두 장수간 대결은 끝내 승패가 갈리지 못했다. 염파의 우주방어로 장평을 지키던 조가 진의 이간계에 넘어가 조괄로 지휘관을 바꿨기 때문이다. 이후 조군은 급격하게 무너져 패배한다. 이 전투는 전투 후 포로 학살로 세계전사의 전설로 남았다. 자세한 것은 장평대전 문서 참고. -
왕전 VS
항연 - 진의 통일 전쟁
진의 장수 이신의 20만 대군을 상대로 승리한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과 60만 대군으로 재차 침입한 진 통일전쟁 1등공신 왕전의 충돌. 왕전이 승리하면서 초는 멸망한다. 따로 문서가 없으므로 진(통일왕조)/통일 과정 문서를 참고할 것. -
프톨레마이오스 4세 VS
안티오코스 3세 -
라피아 전투 (기원전 21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명장 안티오코스3세는 이집트로 출병해 4차 시리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라피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패전시켰다. 전투의 초반은 체구가 더 큰 셀레우코스의 시리아코끼리 부대가 왜소한 이집트의 북아프리카숲코끼리 부대를 압도했으나 보병전에서 이집트군이 우세를 점해 끝내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승리했다고 한다. -
항우 VS
유방[1] -
팽성대전(기원전 205년)
56만의 한나라군이 3만의 초나라군에게 궤멸한 전투. 비록 항우의 초군이 기병 위주에다 기습을 가했음에도 전력비가 무색하게 초나라가 압도적 승리를 취했고 유방은 살기 위해 두 아들을 수레 밖으로 던지기까지 했다. -
한니발 바르카 VS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
자마 전투 (기원전 202년)
국력, 병력, 보급이 모두 열세인 상황에서 로마를 멸망 위기까지 몰아붙인 한니발과 그 한니발의 본진을 털어버린 스키피오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최후의 전투. 맞대결에서는 스키피오가 승리했으나 이 두 명장의 비교는 당대 로마서부터 22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야깃거리이다. -
항우 VS
유방,
한신 -
해하 전투 (기원전 202년)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전이었던 초한전쟁의 종결.[2] 이 전투의 끝으로 중국의 기틀을 마련한 한나라 400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유방 VS
묵돌 -
백등산 포위전 (기원전 200년)
항우를 이기고 중국의 패자가 된 유방이 흉노의 묵돌선우에게 패배한 전투. 유방의 군세에는 진평과 하후영, 주발 등 다수의 초한전쟁의 공신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유방은 백등산에서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쳐야 했다. 이 전투로 흉노는 한무제 이전까지 중국의 통일 제국보다 우위에 섰다.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VS
안티오코스 3세,
한니발 바르카 -
마그네시아 전투 (기원전 190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서방의 패자가 된 로마 공화국의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동방의 패자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가 격돌한 전투. 안티오코스 3세는 이 전투에서 대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패배한다.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VS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
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49년)
" 주사위는 던져졌다" 한 마디로 시작된 내전. 로마에서 쫓겨났으나 끝내 카이사르가 승리하면서 독재 체재를 구축하게 된다. - 조조 VS 원소 - 관도대전 (2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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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VS
안량 -
관도대전 중 백마 전투
뭔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원래 명장의 정의는 지휘력이 뛰어난 장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용맹이든 지휘력이든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뛰어나서 유명세를 떨치는 장수를 말한다. 관우야 더 말할 것 없고 안량 역시 사서 삼국지의 저자가 인정한 명장이다.[본문] 물론 일반적인 지휘력 대결이 아닌 무력 대결이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다. -
유비,
주유 VS
조조 -
적벽대전 (208년)
중국사에 남은 수많은 명장전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반드시 꼽히는 대전. 이 전투로 인해 조조의 천하통일은 물건너가버리고 유비와 손권의 세력은 제국의 기반을 다질 정도로 성장한다. -
조조 VS
마초 - 동관 전투 (211년)
적벽의 패전을 극복한 조조는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려 했으나 서량의 군벌을 자극해 마초와 한수, 10명의 제장이 연합해 조조와 벌인 전투로 적벽과 한중이 뼈아픈 패전이면 동관 전투는 조조가 마초에게 죽을뻔한 전투였다. 그러나 가후의 이간책으로 서량의 군벌들이 분열되고 차례로 격파한 조조가 승리해 아직 세력의 건제함을 알렸다. -
장료,
이전,
악진 VS
손권 -
합비 공방전 (215년)
유비는 당양에서, 조조는 동관에서 생사가 오갔다면 손권이 죽을 뻔한 곳이 합비였다. 합비성 인근에 상륙해 정비를 취하던 새벽에 장료가 800명의 정예 기병대를 선두지휘해 손권의 진영에 급습을 가해 대장기까지 도달했다. 장료의 기세에 눌린 손권은 퇴각하나 자신은 최후미에 남겠다며 고집을 부리는데 이틈을 놓치지 않고 장료와 악진, 이전은 총출동해 손권군을 개박살내버리는 전공을 세우고 동오에 장료의 악명이 떨치게 된다. -
장비 VS
장합 -
한중 공방전 탕거 전투 (216년)
한중 공방전의 서막이 되는 전투. 한중 근처 거점을 소개하던 장합을 장비가 지리의 이점을 이용해 공격하여 장합을 패퇴시킨다. 여기서 장비가 승리하면서 유비가 한중을 손에 얻을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 -
황충 VS
하후연 -
한중 공방전 정군산 전투 (219년)
한중 공방전의 하이라이트로 조조가 한중을 포기하고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 하후연의 군대는 정예로 이루어졌지만 황충은 이에 개의치 않고 적의 군세를 꺾어 어김없이 전진하며 한 번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斬)하고 하후연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
유비 VS
조조 -
한중 공방전 (219년)
이 둘은 수십년 간 여러 차례 맞붙었지만 제대로 힘과 힘으로 정면대결을 했던 건 한중 공방전이 유일했다. 한중 방면을 지휘하던 하후연을 패사시키고 한중을 손에 넣은 유비의 끈질긴 버티기와 조조의 공세 끝에 한중을 얻는데 병력 소모에 비해 득이 없다고 여긴 조조가 스스로 한중을 포기하면서 유비의 판정승이 된다.[4][5] -
관우 VS
조인,
만총,
서황,
우금,
방덕,
여몽,
육손 -
형주 공방전 (219년)
관우와 조인이 대치한 상황에서 폭우와 홍수로 인해 조인을 지원하러 온 우금, 방덕이 수몰되고 관우는 이들을 포로로 잡는다. 관우가 양양과 번성을 포위한 사이 위군의 증원이 집결하고 관우는 서황에 의해 격퇴당한다. 그럼에도 관우는 양양 포위를 유지하였으나, 오랜 시간 형주 수복을 노리던 오의 장군 여몽의 기습과 관우 휘하 고관들의 단체 이반으로 관우는 지키던 형주를 잃고 병력은 싸우지 못하고 와해된다. 관우는 장교진들과 도주를 시도하나 오군에게 살해당한다. -
유비 VS
육손 -
이릉대전 (221년)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유비가 총 8만 군세로 오를 공격한다. 유비는 상당히 무리한 포진을 펼쳤으며, 오의 장군 육손은 포진의 약점을 간파, 화계를 펼치고 여러 부대들을 각개격파하고 모든 영토를 수복하며 유비를 백제성까지 추격한다. 촉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실의에 빠진 유비는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백제성에서 사망한다. 육손의 공으로 인해 형주는 오의 멸망까지 오의 영토로 귀속된다. -
제갈량 VS
사마의 -
제갈량의 북벌 (227년)
사실상 삼국지 후반부를 다 차지하는 두 지략가들의 치열한 전략 싸움. 전투에서는 장합을 전사시키는 등 제갈량의 승리이나, 제갈량이 사망하기까지 촉이 실질적인 북벌의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여 전쟁은 사마의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
강유 VS
곽회,
진태,
등애 - 강유의 북벌 (253년~258년)
비의 사후 북벌을 지휘한 강유는 수년동안 조위를 공략하려 했으나 대촉 전문가인 세 명에게 번번히 막혔다. 특히 단곡에서의 등애에게 당한 패전으로 강유의 정치 입지가 좁아져 대규모의 정벌을 시도하기 어렵게 되어 제갈량의 염원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
양호 VS
육항 - 서릉 전투 (272년)
삼국지 후반부를 장식하는 두 지략가들의 치열한 전략 싸움. 서릉 전투에서는 육항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후에도 양호와 육항은 서로 대치하면서 교분을 나누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육항이 존재하는 한 오나라는 건재했고, 육항이 병으로 죽자 양호는 오나라를 칠 적기를 예측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양호도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후 양호의 의지를 이어받은 두예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
독발수기능 VS
사마준,
문앙,
마륭 -
독발수기능의 난 (270년~279년)
서진이 오나라 정벌을 밀어붙이지 못한 원인 중 하나. 당시 서진에게 불만을 품은 선비족의 수령 독발수기능이 주변 이민족을 규합하여 서량 방면에서 거병을 하였는데, 서진에서도 초반에 이들의 반란을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독발수기능의 기세는 심히 대단하였고, 호열, 견홍, 양흔 등 유능한 장수들이 독발수기능에게 맞서 싸우다가 되려 크게 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또한 이들을 포함하여 8명이나 되는 토벌군 지휘관들이 줄줄이 죽거나 파직되었으니, 아무도 독발수기능을 막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독발수기능의 규모가 더 커지기 전에 사마준과 문앙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었다. 하지만 사마준이 중앙으로 불려간 사이, 독발수기능은 남은 잔당을 긁어모아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였다. 이후 최소 1만 명의 군대로 서량을 다시 점거하였으나, 35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온 마륭에 의해 독발수기능은 완전히 토벌되었다. -
모용수 VS
환온 - 환온의 북벌 (369년)
동진의 환온이 전연을 정벌하러 5만의 군사를 일으켜 연전연승하였고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수도를 버리고 달아날 생각까지 했지만, 전연의 명장 모용수가 나서서 동진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전진에서 구원군이 와서 환온은 퇴각하게 되었다. 모용수는 퇴각하는 환온의 동진군을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
광개토대왕 VS
모용희 -고구려-후연 전쟁 (400~407년)
후연의 모용성은 모용희를 보내어 고구려를 침공하며 2개 성과 700리의 영토를 차지한다. 하필 백제 연합군과 싸우느라 주력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에 있던 광개토대왕은 분노해 2년 후 후연을 침공해 빼앗긴 영지를 탈환하며 2년 후 다시 후연을 정벌해 치욕을 청산한다. 405년 모용희는 고구려의 요동성을 공격하다 실패하고 같은 해 말 다시 고구려의 목저성을 침공했으나 참패하고 만다. 그 후 고구려와 후연은 서로 대립했으나 모용희가 암살되고 후연이 고구려에게 숙여 승자는 광개토대왕이 되었다. -
아틸라 VS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
카탈라우눔 전투 (451년)
로마 제국과 게르만 족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훈족의 왕 아틸라와 서로마 제국 최후의 명장 아에티우스의 맞대결. 아틸라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갈리아 공략을 단념한다.
3. 501년부터 1500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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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세스 VS
토틸라 -
타기나이 전투 (552년)
동로마 제국의 명장 나르세스와 동고트 왕국 최후의 명군이자 명장 토틸라의 맞대결. 나르세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토틸라를 전사시킴으로서 20년 가까이 지속된 고트 전쟁을 마무리하고 이탈리아를 석권한다. -
을지문덕 VS
우중문,
우문술 -
살수대첩 (612년)
고구려-수 전쟁을 종결지은 한국사 최대의 승리 중 하나. 우중문과 우문술은 수나라 통일에 큰 기여를 해 우대받던 유능한 명장들이었다. 하지만 을지문덕의 지략에 농락당해 별동대 병력의 99%가 몰살당하는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
로스탐 파로흐자드 VS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 -
까디시야 전투 (636년)
사산 왕조 최후의 명장 로스탐 파로흐자드와 이슬람 제국의 명장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가 맞붙은 사산 왕조의 국운을 건 전투. 무려 3일 연속 평지에서 양국의 군대가 뒤엉켜 싸워 "웅성거리는 소음의 밤"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치열하게 벌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4일째 아침에 페르시아군 쪽으로 강력한 모래바람이 불자 기회를 잡은 이슬람 제국이 공세를 퍼부은 끝에 로스탐 파로흐자드가 전사함으로써 이슬람 제국이 승리를 거둔다. -
안시성주 VS
당 태종 -
안시성 전투 (645년)
중국 최고의 황금기를 열었던 당의 황제, 태종 또한 수많은 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둔 인물인데, 그 인물이 거느린 대군을 성 하나가 좌절시킨 것이다. 결국 패배한 당 태종은 퇴각하던 중 진창에 빠진 수레를 직접 밀어야 했고 등창에 걸리는 등 비참한 굴욕을 맛보았다. -
김유신 VS
계백 -
황산벌 전투 (660년)
신라 최고의 명장과 백제 최후의 명장의 격돌. 한국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장전이다. -
연개소문 VS
소정방,
정명진 -
사수 전투 (662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기세가 올라 두번째 고구려 침공을 벌였으나 고구려에는 아직 연개소문이 있었다. 결국 당나라는 당 태종의 굴욕을 씻지 못하고 오히려 처참한 대패를 다시 당하고 만다. -
왕건 VS
견훤 -
나주 공방전 (903년, 909~914년, 929년),
공산 전투 (927년),
고창 전투 (930년),
운주성 전투 (934년)
후삼국시대 시기 삼한의 패권을 둘러싼 두 영웅의 격돌. 왕건은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견훤과 수많은 격전을 치렀고 도중에 목숨이 위험한 적도 있었지만 끝내 승리하여 삼한일통을 달성한다. -
사무일 VS
바실리오스 2세 -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986년)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이끈 명군이자 명장 바실리오스 2세와 그의 숙적인 불가리아 제1제국의 황제 사무일의 대결. 이 전투에서 사무일은 바실리오스 2세를 압도적으로 털어버리고, 바실리오스 2세는 죽을 위기를 겨우 넘겼다. 이 전투의 패배로 다시금 귀족들의 지지를 잃은 바실리오스 2세는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을 겪게 된다. -
양규,
김숙흥 VS
요 성종 -
애전 전투 (1011년)
강조의 본대를 대파한 요 성종의 대군이 개경으로 남하하자 강동 6주의 양규와 김숙흥은 후방을 기습하여 지원군을 끊고 포로와 영지를 탈환하였다. 이에 성종은 군대를 돌려 현재의 평안북도 선천군인 애전에서 양규와 김숙흥의 군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은 결사항전으로 덤벼 전멸했으나 성종의 본대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6] 이마저도 압록강을 건너다 고려군의 습격을 당하게 큰 손실을 입게 되며 강감찬이 3차 여요전쟁을 대비할 시간을 벌게 해주었다. -
바실리오스 2세 VS
사무일 -
클레이디온 전투 (1014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2세와 불가리아 제1제국의 황제 사무일의 마지막 대결. 로마의 압도적인 국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사무일의 분전으로 양측은 이미 30여년이 넘게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바실리오스 2세는 마침내 사무일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사무일이 사망하면서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에게 정복당하게 된다. -
강감찬 VS
소배압 -
귀주 대첩 (1019년)
고려의 명장 강감찬과 요나라의 명장 소배압이 맞붙은 전투.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야전이자 청야전술-유격전-포위섬멸로 이어지는 고려의 교과서적인 승리의 대미를 장식한 전투이다. 고려는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여요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
윤관,
척준경, 이관진,
허재 VS
완안아골타,
사묘아리 -
여진 정벌(1차:1104년, 2차:1107~1109년)
여진족들이 강성해지자 고려는 윤관을 필두로 17만의 원정대를 보내어 한달만에 동북 9성을 쌓고 여진족을 몰아내려 했으나 여진족들은 과거의 말갈과 달리 이미 매우 크게 성장한 세력이었기에 완안부의 여진 본대가 남하하며 전투는 2년동안 18번이나 벌어질 정도로 치열해졌다. 고려는 갈라수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여진 역시 인간병기 척준경의 활약과 길주성 전투의 실패, 그리고 모든 영토가 초토화되어 버린 손실로 인해 고려와 여진은 동북 9성의 반환으로 화친을 맺게 되고 후에 금나라의 멸망까지 두 세력은 분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히 지내게 된다. -
사묘아리,
태조(금) VS
한세충,
오린, 오개, 강민 - 화성원 대첩 (1131년)
아골타( 금나라 태조)가 금군 40만명을 이끌고 사묘아리와 함께 남송의 영토를 침략, 침입을 했을때 다른 남송군들과 남송의 수비병들은 패배와 패주를 잇달아 하였지만 남송의 명장들인 강민과 한세충 오린 오개가 남송군 5만을 이끌고 금군 13만명을 대파시킨 대첩이다. -
살라흐 앗 딘 VS
보두앵 4세 -
몽기사르 전투 (1177년) 외 여러 전투
이슬람의 위대한 지도자와 예루살렘 왕국의 '나병왕'이 맞붙은 전투들
역사학자 버나드 해밀턴은 보두앵이 말을 타거나, 신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가마를 타면서 살라딘과 실제로 많은 성공적인 전투를 벌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시리아에서 그의 이득을 강화하려는 살라딘의 빈번한 시도는 보두앵과 다른 프랑크 지도자들 때문에 전복되었다.[7] -
살라흐 앗 딘 VS
콘라드 1세[8] - 티레 공성전 (1187년)
이슬람의 위대한 지도자와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될 몬페라토의 콘라드의 전투 [9] -
살라흐 앗 딘 VS
리처드 1세 -
제3차 십자군 전쟁 중 야파 전투 (1192년)
이슬람의 위대한 지도자와 잉글랜드의 사자심왕이 맞붙은 전투.
6만 2천의 군대로 야파 요새를 함락 직전까지 간 살라딘의 군대에 리처드 1세와 100명도 안되는 병력이 돌격, 승리한 희대의 무쌍. 놀랍게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양측 자료에서 교차검증이 되는 전투다. -
테무진 VS
자무카 -
몽골통일 전쟁
칭기즈 칸이 되기 이전의 테무진과 그의 친우 자무카의 십수년에 걸친 패권 다툼. 칭기즈칸의 인생에서 자무카만큼 그를 몰아붙인 상대는 그 누구도 없었다. 형제나 다름 없던 친구이자 협력자였던 두 사람은 몽골 고원을 두고 사투를 벌였다. 최대의 라이벌임에도 서로를 형제로 대하며 존중하던 둘의 싸움은 1206년 테무진이 승리를 확정짓고 칭기즈 칸이 되며 끝났다. -
완안진화상, 도단항,
오희(남송) VS
한탁주 -
개희북벌 (1207년)
금나라의 명장 도단항은 명장 진화상하고 같이 남송의 공세를 막기위해 곧장 남쪽을 향해 진격했다. 처음 몇달 동안은 남송의 명장 오희에게 밀렸다. 하지만 도단항을 보좌해주던 진화상이 나름 성과를 냈었고 도단항이 위기에 빠져 구출요청을 할때마다 혼자서 말을 타고와 그 어린나이에도 도단항을 구출해주었다. 그후 전선이 교착화가 되고 남송의 정세가 시시각각 불리하게 돌아가자 오희는 금나라 정부에 투항하였고 괴뢰국을 세워 남송군의 북상 전진을 막았고 남송군은 전의를 상실하였고 한탁주는 후퇴했다. -
제베,
칭기즈 칸,
수부타이 VS
알라 웃딘 무함마드,
잘랄 웃딘 - 몽골-호라즘 전쟁 (1219년)
처음에 잠깐 막아내나 싶었지만 제베, 수부타이를 포함한 총 3방향에서 요새들을 각개격파하는 몽골군 덕에 인구로 천혜의 지형이고 뭐고 그냥 두들겨 맞았다. 호라즘은 첫 전쟁에서만 인구 5분의 4가 갈려나갔다. 몽골군은 3000km를 달리고 세계의 지붕을 넘고도 질주에 가까운 일방적인 학살을 보여줬다고.... -
다이순 VS
완안진화상 -
대창원 전투 및 공성전 (1226년)
무칼리의 뒤를 잇는 명장 다이순과 금나라의 명장 완안진화상이 대창원에서 맞붙은 전투
다이순이 몽골군 8000기를 이끌고 대창원 평원으로 침입을 하였지만 당시 금군 사령관이자 충효군 총령인 완안진화상이 충효군 1개 연대 즉 500기로 막아낸 대전이다 거의 500기의 16배의 8000기를 이끌고 왔으니 대첩 수준일수도. -
수부타이 VS
완안진화상-
도회곡 전투 (1231년)
수부타이 인생에 유일한 패전 -
오고타이 칸 VS
완안진화상 -
삼봉산 전투 (1232년)
몽골제국의 명장인 툴루이가 금나라를 침공하였다 금나라의 명장 완안진화상이 삼봉산에서 송몽연합군을 막아보려 하였지만 툴루이의 지휘력과 노련한 성격에 천하의 진화상도 삼봉산에서 대패를 하였다. -
오고타이 칸, 다이순,
아리크부카 VS 완안합달,
완안진화상 - 균주성 전투 (1232년)
몽골의 명장들인 오고타이와 툴루이 다이순과 금나라의 명장인 합달과 진화상의 사실상 금나라 땅에서의 마지막 전투이다. 이과정에서 이랄포아의 실수로 금나라의 대부분 병력 15만이 전사하고 금군은 3000명으로 싸워야 했으니 금방 졌다. 그후 합달은 대도에서 처형당하고 합달 사후 진화상도 대도에서 최후를 맞는다. -
조범,
조규 VS
오고타이 칸 -
단평의 입락 (1234년)
조범과 조규 형제가 이끄는 남송군은 북송때 있었던 여러개의 화북주를 금나라 균주성 전투가 끝나고 수복을 하여 남송 조정은 재빨리 그지역으로 관리들을 파견시켰으나 오고타이 칸의 몽골군이 수복된 화북주에서 남송 군대를 기습하여 사실상 몽골과 남송의 첫전투가 시작된다. 초반에는 남송의 군대가 기세좋게 결사항전을 하였지만 몽골제국 본토에서 파견된 정예부대 10만과 일반부대 5만 기병부대 5만 툴루이가 20년이상 훈련시킨 4만의 군과 그의 부하 명장 다이순의 구원군 1만의 뛰어난 지략과 공략 공세로 인해 남송군은 빠르게 남쪽을 향하여 패배하고 패주하였다. -
맹공, 왕견,
수부타이, 다이순,
아리크부카,
오고타이 칸 VS
곽하마 - 채주 전투 (1234~1236년)
남송군의 총사령관 맹공, 부사령관 왕견과 몽골군 측의 총사령관인 오고타이 칸이 직접 연합을 결성하여 수부타이 아리크부카 다이순과 함께 금나라의 수도 채주를 포위하고 처들어가자 당시 완안진화상 부하이자 금군 사령관이던 곽하마가 2년동안 결사항전을 하였다. 하지만 맹공의 화력에 이기질 못한 곽하마는 부하들과 함께 불길속에 들어가서 최후를 맞이한다. -
바얀,
아리크부카 VS
왕견,
장각 - 2차 송몽전쟁 中 조어성 대전 (1258년)
바얀과 아리크부카는 몽케 칸의 명령으로 남송의 조어성을 침공 하라는 조서를 받고 몽골군 30만 대군으로 급하게 2차 송몽전쟁을 시작한다. 이때 왕견이 악조양 방어선 수비를 맡고 있었다. 여기서 몽골군은 양양성전투 초반처럼 또 다시 심야기습을 하려는 작전을 세웠으나 지난번의 일을 경험삼아 이번엔 기병부대원들을 5000명을 선발하여 선방을 칠려 하는 작전으로 내세웠다. 왕견은 전략대로 즉시 조어성 외곽의 후방에 기공병부대원 3만명을 배치시키고 새벽에 몽골군 5천이 처들어 오자 매복하던 남송군 3만이 기습을 한다. 바얀은 즉시 퇴각을 하고 아리크부카는 저번의 양양성 때의 일을 생각하고 대대적인 침략으로 응징을 하려 했다. 아침이 되어 아리크부카가 돌발행동으로 몽골군 15만을 이끌고 조어성으로 처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송군 사령부가 소식을 듣고 즉시 40만 대군을 편성하여 조어성 구원에 나서기 시작한다. 아리크부카는 바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격하지만 일대에 집결한 왕견이 이끄는 남송의 대군이 몽골군 13만을 몰살해버려 몽케 칸이 소식을 듣자 아리크부카를 몽골제국에서 추방시켜버렸다.[10] -
바얀, 장홍범 VS
장세걸 - 해풍오파령 전투(1275년), 애산전투 (1279년)
바얀과 장홍범은 몽골군 20만을 이끌고 남송의 수도 근처 해풍오파령으로 진격을 하여 문천상이 겨우 모은 의용군 1만을 2000명씩이나 죽이고 장세걸이 총사령관으로 있던 남송의 11만 대군이 반격을 하였으나 열세라서 후퇴하였다. 이과정에서 문천상은 대도(베이징)로 압송되고 총사령관 장세걸은 나머지 10만 대군을 이끌고 더더욱 남하하였다.
이후 1279년 남송의 운명을 결정지을 처절한 애산전투가 일어났다. 장세걸은 최후의 방법으로 함선들에 진흙을 뭍혀 불이 타지 않게 하고 쇠사슬로 묶어 남송의 마지막 군사들이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고 함께한다는 전우애로 결사항전을 벌였다. 결국 애산 전투 후 송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최영 VS
이성계 - 개경 공방전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벌어진 고려 말기의 두 명장 간의 내전. 이성계가 승리하면서 역성혁명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
무라드 1세 VS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 -
1차 코소보 전투 (1389)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계속 확장하려는 오스만 제국과 그를 막으려는 세르비아 공국 간의 대결. 라자르는 스테판 두샨 사후 공중분해된 세르비아 제국의 여러 지방 세력가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쌓아올렸던 인물로[11], 이 이전까지 오스만군을 수차례에 걸쳐 격퇴하여 오스만의 확장정책에 빨간불이 들어오게 만든 사람이었다. 이에 전투라면 자신이 있었던 술탄 무라드가 직접 나서기로 하고 라자르도 이에 응하여 대전이 벌어졌는데, 라자르는 전사하고 무라드는 전사 또는 전후 암살당하는 등 사실상 무승부로 끝났다. 다만 오스만에게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주둔시켜 두었던 군대가 남아 있었던 반면 세르비아는 이 한 번에 모든 것을 걸었었기에 결과적으로는 오스만이 이겼으며, 이후 세르비아는 라자르의 아들 스테판 라자레비치 때 중세 마지막 번영기를 맞기도 했지만 오스만과 헝가리 사이를 오가다가 메흐메트 2세 때 오스만에 의해 정복, 합병된다. -
바예지트 1세 VS
티무르 -
앙카라 전투 (1402년)
한창 잘 나가던 오스만 제국의 뇌제(雷帝) 바예지트 1세와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티무르의 맞대결. 바예지트 1세는 이 전투에서 패한 후 티무르에게 사로잡히는 수모를 겪다 결국 사망했고, 오스만 제국은 티무르군에게 짓밟힌데다 10여 년간 바예지트의 아들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져 멸망을 눈앞에 둔 제국 말기를 제외하고는 6백년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
무라드 2세 VS
후녀디 야노시 -
바르나 전투 (1444년)
군사적으로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술탄 무라드는 동남부 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후녀디를 비롯한 기독교 세력에게 밀려 불리한 조약을 체결,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이유로 어린 아들 메메드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기독교 측은 폴란드 왕 겸 헝가리 왕이었던 브와디스와프 3세(헝가리 왕으로는 울라슬로 1세)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후녀디를 사실상의 사령관으로 삼아 공격해 왔는데, 아직 경험이 부족했던 메메드는 은퇴한 아버지 무라드를 급히 불러 적을 막게 했다. 이에 벌어진 싸움이 바르나 전투로, 여기에서 오스만이 승리하여 한동안 헝가리가 공세로 나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한동안" 에 1453년의 사건도 포함되어 있기에, 의의가 크다. -
무라드 2세, 메메드 2세 VS
스컨데르베우 - 알불레나 전투(우여바르다 전투, 1457)을 비롯한 스컨데르베우의 봉기 (1443~1468년)
오스만 측에서는 잘 정복된 줄 알았더니 반란을 일으킨 알바니아를 진압하려는 전쟁이었고, 알바니아 측에서는 오스만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투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스컨데르베우는 세력 면에서는 그야말로 아득할 정도로 유리한[12] 오스만에 맞서 21전 19승 2패라는 빛나는 전적을 거두었으며[13], 오스만은 스컨데르베우 사후 10년도 더 지난 1479년에야 알바니아를 평정할 수 있었다. 당시 오스만의 역사가였던 아시크파샤자데는 알바니아 최후의 보루였던 슈코더르가 함락된 것에 대해 "이탈리아로 가는 길이 드디어 열렸다!" 라는 식으로 기록했으며, 같은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 메메드는 이듬해인 1480년에 이탈리아 반도 남동부의 오트란토에 군대를 보내 점령했다[14]. 한편 알바니아 측으로서는 비록 끝내 패했지만 이제껏 한 번도 같은 깃발 아래 모인 적이 없었던 알바니아인들의 민족 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위대한 항쟁으로 평가하며, 그 주역인 스컨데르베우는 당연히 국가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현대 알바니아의 국기가 스컨데르베우 가문의 문장에서 유래한 것이 한 예. -
메흐메트 2세 VS
후녀디 야노시 -
베오그라드 공방전 (1456년)
오스만 제국의 정복군주 메흐메트 2세와 당대 헝가리의 섭정이자 군사령관이었던 후녀디 야노시의 맞대결. 메흐메트 2세는 이 전투에서 패한 뒤 음독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으며, 이후 오스만은 후녀디의 아들로서 왕으로 즉위한 마차시 1세가 간간이 국경을 넘어오는데도 불구하고 헝가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다. 이후 오스만이 헝가리 정복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70년 가까이 지난 쉴레이만 1세 때다.
4. 1501년부터 1900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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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림 1세 VS
이스마일 1세 -
찰디란 전투 (1514년)
여섯 차례에 걸쳐 벌어졌던 오스만-사파비 전쟁의 서막을 장식한 전투. 당시 사파비 제국에서는 이쪽은 시아파, 저쪽은 수니파라는 종교적 이유도 있고 현실적으로도 꽤 위협이 되는 이웃이고 하여 오스만 내부에 반란을 부추기는 등의 공작을 펼쳤는데, 현명하고 부지런한 황제였지만 노쇠하여 예전만 같지 않던 바예지드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셀림 1세는 국정을 일단 안정시킨 뒤 곧바로 페르시아로 친정에 나섰다. 전투는 오스만 측의 승리로 끝났는데, 전투에 나름 자신감이 있었던[15] 이스마일이 전투는 정정당당하게를 모토로 내걸고 "한참 진군하느라 지친 적을 공격해야 한다" 는 측근의 조언을 뿌리친데다 총과 대포 등 당시의 최첨단 병기를 아낌없이 사용한 오스만 측에 비해 사파비 측은 기병을 위주로 한 전통적인 전술을 썼기 때문. 이후 사파비 제국의 수도를 점령, 약탈하는 등 기선을 제압한 셀림 1세는 여세를 몰아 이집트 정복에 나서 맘루크 왕조를 멸하고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반면, 패배에 큰 충격을 받은 이스마일은 정사를 완전히 내팽개치고 술독에 빠진 채로 사망했다. -
하이르 앗 딘 VS
안드레아 도리아 -
프레베자 해전 (1538)을 비롯한 지중해 패권 경쟁
당대 이슬람 세계 최강국이었던 오스만 제국[16]과 기독교 세계 최강국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격돌인 동시에, 이슬람 세계 최고의 해군 지휘관과 기독교 세계 최고의 해군 지휘관 사이의 대결. 다만 안드레아의 재능이 하이르 앗 딘에 비해 아래였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거느린 세력의 차이가 현저했기에, 대체로 안드레아가 하이르 앗 딘의 독주에 제동을 거는 식이었다. -
다케다 신겐 VS
우에스기 겐신 -
카와나카지마 전투 (1553년, 1555년, 1557년, 1561년, 1564년)
전국시대 시나노 지역을 놓고 벌인 전투. 보통 좁은 의미로는 1561년에 치른 네 번째 전투를 가리킨다. 양자가 10년 넘는 세월동안 승패를 가르지 못하면서 오다 노부나가가 비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다케다 신겐 VS
도쿠가와 이에야스 -
미카타가하라 전투 (1573년)
가이와 시나노의 명장 다케다 신겐이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했던 이에야스에게 한 수 가르쳐 준 전투.[17] 이에야스는 이 전투를 교훈으로 삼아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명장으로 거듭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VS
도쿠가와 이에야스 -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1584년)
일본의 패권을 둘러싼 두 군웅의 대결. 전술적으로는 이에야스가 완승을 거뒀으나 전략적으로는 이에야스와 연합했던 오다 노부카츠를 회유한 히데요시가 승리했다. -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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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 VS
가토 기요마사 -
북관대첩 (1592년)
파죽지세로 조선 반도로 북상하던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과 의병장 정문부의 충돌. 이 전투에서 정문부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일본군의 함경도 진출 북상을 저지할 수 있었다. -
이순신 VS
와키자카 야스하루 -
한산도 대첩 (1592년)
용인 전투에서 1,600명으로 5만 명을 격파하는 맹활약을 선보인 야스하루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
김시민,
곽재우 VS
우키타 히데이에,
호소카와 타다오키,
카스야 타케노리 -
1차 진주성 전투 (1592년)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지나가는 관문인 진주성에서 벌여진 전투. 조선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보호하기 위해 막아야 하며 일본 역시 전라도를 치기 위해 진주성을 공략해야 했다. 그러나 김시민이 대비한 수성 전술과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의 후방 기습으로 일본군은 지휘관 급이 3백 명, 병사가 1만여 명을 잃게 되는 큰 손실을 당해 후퇴하여 일본의 전라도 진출을 막게 되었다. -
권율,
황진 VS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
이치 전투(1592년)
엄청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은 목숨을 걸고 전라도의 관문인 이치 고개를 지켜내 왜군이 물러나 마침내 전라도를 보호하게 되어 임진왜란 승리의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
권율,
선거이 VS
우키타 히데이에,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킷카와 히로이에,
모리 히데모토,
모리 히데카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
행주대첩(1593년)
3천의 병력에 이중 목책 방어선, 그리고 많은 화약 병기들로 3만의 대군을 막아낸 전투. 일본은 이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한양 북쪽을 넘지 못하고 퇴각해버린다. -
황진 vs
우키타 히데이에,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모리 히데모토,
쵸소카베 모토치카,
오타니 요시츠구,
구로다 나가마사,
다테 마사무네 -
2차 진주성 전투
단일 전투 기준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이며 1차 진주성 전투의 보복을 목적으로 벌여졌던 전투,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진주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했으나 이 전투에 대해 일본군을 따라와 조선에 머물던 한 왜승(倭僧)은 "조선의 용감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었다."는 글을 남겼을 만큼 일본으로서도 간담이 서늘했던 전투였다. -
이순신 VS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후사,
간 마사카게,
모리 다카마사 -
명량 해전 (1597년)
정유재란 내내 육군에게 보급하여 한양을 점령하고 삼남을 정벌하겠다는 기존 전략을 택한 일본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명량수도에서 이순신과 맞붙은 결전으로, 일본측 장수들은 상당히 유능한 다이묘들이었으며 이들의 전선을 합쳐 300여 척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 울돌목의 급류와 돌아온 성웅 이순신이 이끄는 불과 13척[18]의 판옥선을 당해 내지 못하고[19] 처참하게 박살났다. -
권율 VS
가토 기요마사 -
울산성 전투 (1598년)
일본군이 건축한 울산성을 점령하고자 벌어졌던 전투. 이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조명 연합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으나, 사상자 수가 너무 많아 싸울 수 있는 병사가 남아나지 않고 가토 본인도 굶주림 때문에 할복을 고민했을 지경이 되었다. -
이순신 VS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타치바나 무네시게 -
노량 해전 (1598년)
히데요시 사후 조선에 도망치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전투 중 이순신은 전사했고 일본의 장수들은 도주에 성공했으나 일본의 전함 300여척 중 200여척이 침몰되고 50여척만 도주하였다. -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VS
원숭환 -
영원성 전투 (1626년)
여진족을 통일해 후금을 건국하고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 대군을 섬멸하여 기세를 한껏 끌어올린 누르하치와 산해관 외곽의 변두리 성 수비를 맡은 문관의 대결. 원숭환은 16만 대 2만이라는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영원성을 끝내 사수했고, 후금은 원숭환 생전엔 영원성을 도모하지 못한다. -
구스타브 2세 아돌프 VS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
30년 전쟁 시기 스웨덴 최고의 명군이자 명장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신성로마제국의 명장 틸리 백작을 격파한 전투. 그 동안 신성로마제국에게 내내 밀렸던 신교 세력은 이 전투 후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연합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한다. -
구스타브 2세 아돌프 VS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
뤼첸 전투 (1632년)
스웨덴의 명군 겸 명장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의 맞대결. 전투 자체는 스웨덴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구스타프가 전투 중에 전사했기에 실익은 신성로마제국 측이 취했다고 볼 수 있다. -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VS
오삼계,
홍승주 - 산해관 전투 (1644년)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였던 홍승주와 오삼계 청나라의 예친,섭정왕이자 팔기군 정백기 수장인 도르곤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산해관에서 전투한 명청 마지막 전투였다. 단 하루밤사이에 청나라군이 이기고 명나라군은 이자성의 반란군 때문에 북경으로 가서 진압하려다가 청군이 산해관을 뚫고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켰다는 소식과 명장이였던 오삼계와 홍승주가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조회를 열고 유언을 남긴뒤 자금성 뒤쪽 산 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다. 숭정제 사후 명나라는 멸망을 한다. -
표트르 대제 vs
칼 12세 -
대북방전쟁 (1700~1721년)
서쪽의 발트해로 진출하려는 정복군주 표트르 대제와 이를 저지하려는 스웨덴의 마지막 별 칼 12세의 전투. 전쟁의 초중반은 칼 12세가 연승을 거두어 유리했으나 모스크바를 치기위해 러시아 본토로 쳐들어갔다가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대제에게 결정적인 패전을 당하고 너무 깊게 들어온 바람에 스웨덴에 돌아가지 못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
존 처칠 말버러 공작,
사부아 공자 외젠 VS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공작 -
말플라케 전투 (1709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시기 벌어진 명장들 간의 충돌. -
나디르 샤 VS 토팔 오스만 파샤 -
사마라 전투,
키르쿠크 전투 (1733년)
나디르 샤가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여 바그다드를 포위했으나 토팔 오스만 파샤가 8만 대군을 이끌고 티그리스 강으로 남하하자 나디르 샤 역시 7만 병력을 데리고 오스만군과 치열하게 맞붙었다. 그러나 질병, 더위, 피로가 중첩된 페르시아군은 오스만의 공격으로 낙마한 나디르 샤가 죽었다는 오보를 듣자 사기가 떨어지고 지휘 체계도 무너지고 말아 결국 나디르 샤는 후퇴했으나 토팔 오스만 파샤 역시 전투로 인한 손실이 컸다.
하지만 세 달 후 키르쿠크 전투에서 나디르 샤의 기병대가 오스만 군의 주력부대를 치며 전세는 기울어졌고 토팔 오스만 파샤도 무너지고 있던 오스만군을 지휘하다 전사하며 나디르 샤는 사마라 전투의 치욕을 씻었다. -
프리드리히 대왕 VS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
콜린 전투 (1757년),
호크키르히 전투 (1758년),
토르가우 전투 (1760년),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 (1762년)
7년 전쟁 시기 프로이센 왕국 최고의 명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과 오스트리아의 명장 다운 백작의 맞대결. 전쟁 내내 다운 백작에게 고전한 프리드리히 대왕이었지만, 전쟁 말기 러시아의 표트르 3세의 갑작스런 친프로이센 정책에 힘입어 마침내 승리했다. -
프리드리히 대왕 VS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1759년),
리그니츠 전투 (1760년)
다운 백작과 함께 오스트리아군의 핵심이었던 라우돈 남작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맞대결. 프리드리히 대왕은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연합한 라우돈 남작에게 완패했지만 리그니츠 전투에서 복수했다. -
제임스 울프 VS
루이 조제프 드 몽캄 -
아브라함 평원 전투 (1759년)
영국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명장이 북미 식민지의 패권을 놓고 퀘벡의 아브라함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 두 명장 모두 전사해버린 이 전투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프랑스는 이로 인해 북미 식민지를 영국에게 모조리 넘겨줘야 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VS
카를 루트비히 -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바그람 전투 (1809년)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운명을 건 두 명장의 맞대결. 나폴레옹은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선 가장 친한 친구이자 유능한 부하였던 장 란을 상실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지만, 바그람 전투에서는 가까스로 승리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VS
미하일 쿠투조프 -
보로디노 전투 (1812년)
러시아 원정의 대미를 장식한 프랑스 최고의 명장과 당대 러시아의 명장간의 맞대결. 전투 자체는 나폴레옹이 승리했지만, 이후 동절기를 이겨내지 못해 몰락한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VS
아서 웰즐리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
워털루 전투 (1815년)
유배지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프랑스로 귀환한 나폴레옹과 당대 영국 최고의 명장 아서 웰즐리가 맞붙은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전투.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 방어선이 붕괴되기 직전,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그루시의 프랑스군보다 일찍 도착해 전투를 종결지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완전히 몰락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다. -
율리시스 S. 그랜트 VS
로버트 E. 리 -
남북 전쟁 (1864년)
실제로 직접 격돌한 적도 세 번 있었으며, 리가 그랜트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혔음에도 물량공세를 바탕으로 버티고 몰아붙인 그랜트에게 끝내 패배하게 된다. -
헬무트 폰 몰트케 VS 루트비히 폰 베네딕 -
보오전쟁 (1866년)
베네딕은 몰트케도 인정한 명장이었고, 부하 장군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였다. 정작 베네딕은 오스트리아군의 전력상 질게 뻔하니 별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
타탕카 이요탕카 VS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
리틀 빅혼 전투 (1876년)
과거 남북전쟁에서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로버트 E. 리의 부대를 격파한 미합중국의 명장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가 수족과 벌인 전투. 그러나 커스터는 인디언을 깔보고 포위섬멸전을 펼치다 역으로 타탕카 이요탕카에게 각개격파당해 커스터의 기병연대는 전멸해버린다.
5. 1901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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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VS
체스터 니미츠 -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2차
미드웨이 해전 (1942년)
진주만 공습을 통해 승승장구하고 사기가 크게 오른 일본군의 몰락을 알리기 시작한 전투.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와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의 첫 전투로 부족한 전력을 이끌고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4척을 격파하여 연합군의 승기를 안겨다 준 전투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일본은 해군 전력의 대다수를 상실하고 태평양에서의 전선을 고착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그리고 훗날 이소로쿠는 전선을 시찰한다는 정보가 유출되어 시찰 중 미 육군 항공대의 급습으로 사망하였다. -
에르빈 롬멜 VS
버나드 로 몽고메리[20] -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1942년)
사막의 여우 VS 사막의 생쥐. 거침없이 공격해오는 독일군을 상대로 물자와 병력을 축척하며 방어로 일관하던 몽고메리가 일시에 반격에 나선 전투다. 사실 롬멜은 당시 본국으로 휴가를 가 있었기에 직접적인 맞대결은 아니다. 몽고메리의 물량 공세에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붕괴되었고, 롬멜이 돌아왔을 땐 이미 손을 쓸수 없는 상태였기에 독일군은 기나긴 패주를 시작한다. 이 전투에서 사막의 생쥐가 승리하면서 아프리카 지역에서 독일군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
게오르기 주코프 VS
발터 모델 -
제2차 세계 대전 중
르제프 전투 (1942년-1943년)
모스크바 방어 성공 직후 소련군이 독일군을 모스크바로부터 수백km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공세를 가한 전투. 전투 초기 소련군은 승승장구하며 독일군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하였으나, 독일의 지휘관이 2차대전 최강의 방어전 사령관 발터 모델로 교체된 후 전황이 뒤집혔다. 모델은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와 포위 속에서 사방에서 공세를 시도하는 소련군을 모조리 격퇴하고 역습함으로써 기세가 올라있던 소련에게 충격적인 대패를 안겼다. -
에리히 폰 만슈타인 VS
게오르기 주코프 -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승리로 독일 남부집단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혀 기세등등해진 소련군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엔 만슈타인이 있었고 그는 퇴각하던 독일군을 수습, 하르코프까지 진격한 소련군을 뛰어난 기동전과 수비술로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서 독일은 전선붕괴라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했고, 쿠르스크 돌출부가 형성되어 아래에서 기술하는 쿠르스크 전투로 이어진다. -
게오르기 주코프 VS
에리히 폰 만슈타인 -
제2차 세계 대전 중
쿠르스크 전투 (1943년)
소련군 최고의 명장과 독일군 최고의 명장이 맞붙은 역사상 최대 규모급 전투. 소련군의 지역방어에 북쪽을 맡은 발터 모델은 일찌감치 퇴각하였으나, 남쪽을 맡은 만슈타인은 돌파에 성공해 소련군을 위기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후방에서 달려온 소련 전차부대와 격전을 벌인 끝에 독일은 공세 능력을 상실하고 퇴각한다. 막대한 손실만 입은 나치 독일은 이후 소련군을 일시적으로 붙잡을 뿐 대규모 공세를 개시할 능력을 잃었다. 즉, 이 전투로 소련은 자신들의 우위를 완전히 굳히는 데 성공했다. -
버나드 로 몽고메리 VS
발터 모델 -
제2차 세계 대전 중
마켓 가든 작전 (1944년)
롬멜을 격파한 영국군의 명장과 '방어의 사자'의 맞대결. 몽고메리는 1944년 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며 호기롭게 작전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부실한 작전 계획, 발터 모델의 엄청나게 신속했던 역습으로 인해 패색이 짙어졌으며, 영국 공수부대의 처절한 저항에도 전략적 목표 달성에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 성공 후 폭풍 같았던 기세가 한풀 꺾여 연합군은 독일을 향한 공세를 이듬해로 미룬다. -
펑더화이 VS
매튜 B. 리지웨이 -
한국 전쟁 중
지평리 전투 (1951년)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펑더화이의 중공군과 순직한 월튼 워커의 후임으로 지명돼 신임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의 대결. 이 전투에서 리지웨이는 철저한 지역방어로 37도선으로 남하하는 펑더화이의 중공군을 틀어막는 데 성공하여 남한 땅을 대부분 탈환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6. 실현되지 못한 명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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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VS
감녕 -
익양대치 (211년)
형주의 영토 문제로 유비군과 손권군이 무력충돌로 번질뻔한 사건. 관우가 5천 병력으로 강을 넘어 공격하려 하자 이를 방비하는 이가 감녕이라는 걸 알자 도하를 멈췄다고 한다. 그리고 때마침 조조가 한중을 치려해 유비와 손권은 화친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
고노자 VS
모용외 (296년)
293년 고구려를 침공한 모용외는 봉상왕을 사로잡기 직전 고노자의 강습에 밀려 물러났지만 296년에 다시 침공해 서천왕의 왕릉을 도굴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 봉상왕이 고노자를 모용부와 근접한 신성의 태수로 임명한 이후부터 모용외의 고구려 침공은 멈췄다고 한다. -
영락제 VS
티무르 (1404년)
오스만을 꺾은 패자 티무르와 명나라의 정복군주 영락제가 조공 문제로 외교가 악화되어 전운이 감돌자 티무르는 직접 명나라 정벌을 기획했으나 140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 둘의 드림매치는 일어나지 않았다. -
이순신 VS
가토 기요마사 (1597년)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온다라는 첩보를 받은 선조는 이순신을 동래로 출전을 명했다. 그런데 풍랑때문에 이순신은 가토를 놓칠 수 밖에 없었지만 69척의 함대로 부산진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희대의 똥별,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뻘짓으로 이순신은 도중에 파직되어 결판을 끝맺지 못하게 되었다.
[1]
초한지의 영향과 이후에도 항우와의 전투에서 매번 깨져서 평가절하당하지만 상대가 항우여서 그럴 뿐 역사속의 유방은 명백히 명장이었다.
[2]
초한전쟁 바로 이전의 최초 통일 국가였던 진나라가 통계한 인구 현황이 약 2000만 명이었는데, 유방이 통일한 후에 낸 인구 통계에서는 고작 500만 명이었다. 물론 난민, 행정 붕괴로 인하여 인구 파악이 힘들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당시로서는 국가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싸운 셈이다. 실제로, 역사서 사기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시체가 즐비했던 당시 초한전쟁의 상황을 인외마경이라고 칭했다.
[본문]
안량,
문추 모두
원소의 명장이었는데 두 차례 싸움에서 모두 격파되자 원소군이 크게 동요하였다.
[4]
단순히 한중을 차지한 지리적 이점뿐만이 아니라, 한중 땅을 기반으로
한중왕을 선언함으로써 황족이라는 이점을 한 고제와 연결시키는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다.
[5]
거기다 유비는 여기에 형주를 방어하던 관우를 제외한 자신이 가진 거의 대부분의 장수들(장비, 마초, 조운, 황충, 위연 등)을 투입했다.
[6]
병사, 말과 낙타, 무기와 깃발까지 성한 게 없었다고 한다.
[7]
참고로 보두앵 4세는 아래의 리처드 1세의 당숙부이다.
[8]
이슬람 연대기 작가 이븐 알 아티르는 도시를 통치하고 방어하는 능력을 가진 화신한 악마이며, 비상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그를 평가했다. 또한 이슬람의 기록에 따르면 프랑크인들 가운데 가장 책략이 뛰어나고 용맹스러운 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9]
티레는 함락 직전까지 갔다. 포위 공격 끝에 티레 시민들은 결국 항복하기로 결정했고, 협상도 끝이 나서 살라딘은 성벽 위에 게양할 자신의 깃발까지 보냈다. 그러나 그때 콘라드 1세가 도착했다. 그의 실력과 용맹함은 지중해를 건너 예루살렘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티레의 수비를 맡아 항복을 철회한 다음 직접 살라딘의 깃발을 시궁창에 버렸다. 살라딘은 다시 티레를 공격해온다. 살라딘은 콘라드의 아버지를 포로로 잡고 있었기에, 그는 콘라드에게 그가 도시를 자신에게 넘긴다면 아버지를 풀어주고 큰 선물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 굴리엘모 5세는 이집트인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을 때에도 아들에게 굳건히 위치를 지키라고 하였으며, 콘라드는 아버지가 충분히 살았다고 선언하며 직접 석궁으로 아버지를 겨누었다. 콘라드는 도시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으며, 1188년 굴리엘모 5세는 토르토사에서 석방되어 아들에게로 돌아왔다. 얼마 후 콘라드는 살라딘의 해군을 새벽에 급습하여 많은 선단을 나포한다. 살라딘은 해전에 티레 수비군이 관심이 쏠려 있다고 여기고 다시 티레를 공략했지만 콘라드는 부하들을 이끌고 다시 성 밖으로 나가 적을 격파한다. 살라딘은 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0]
아리크부카를 아끼고 보호하는 몽케지만 이번일은 매우 화가 나서 추방을 시킨것 같다.
[11]
세르비아 민담에서 인기 있는 인물 중 하나이며, 생전에는 왕도 아니고 공밖에 칭하지 못했음에도 "라자르 황제" 라고 부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12]
현대로 치면 거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수준이다.
[13]
어차피 패배는 패배라는 점에서는 달라지는 게 없지만, 이 2패도 전투가 여러날 씩 길어지자 잠시 다른 일을 보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당한 것이다. 즉 적어도 스컨데르베우 자신이 오스만군 앞에서 등을 돌리고 달아난 적은 없다.
[14]
당시 교황청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으며, 교황과 로마 주민들을 이탈리아 밖으로 피신시키려는 계획도 수립되고 "튀르크 놈들" 을 몰아내자는 십자군도 호소되고 했다. 헝가리와 스페인, 심지어 지중해나 이탈리아와 그닥 깊은 관련이 없던 포르투갈 등이 이에 응했는데, 오스만 측에서는 이듬해에 메메드 2세가 승하하면서 원정군을 물린 탓에 도시는 어렵지 않게 기독교 측에 함락되었다.
[15]
그도 그럴 것이, 1501년에 사파비 제국을 세우고 불과 10년 만에 오늘날의 이란과 그 주변을 모조리 제패한 사람이다.
[16]
다만 오스만 제국은 지배층이 이슬람을 믿었을 뿐이지 이슬람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도 폭넓은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오스만을 이슬람으로 못박는 건 부적절하다.
[17]
이에야스가 학익진을 사용했으나 신겐이 어린진으로 학익진을 파훼시켰다.
[18]
이순신의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의 내용 때문에 오해를 할 수가 있는데, 이순신이 저 장계를 쓸 상황에는 배설로부터 인수한 판옥선 12척이었다. 장계를 보낸 이후 전라 우수사 김억추의 판옥선 1척이 더 추가된 것. 그래서 명량 해전 개시 기준으로는 13척이다.
[19]
게다가 전투 초반에는 조선 군선들 중 이순신의 기함이 홀로 전속력으로 적을 향해 돌격하여 적선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20]
논란이 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