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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db1> 이름 | 몽골표기 | ᠵᠠᠮᠤᠭ ᠠ / Жамуха[1] |
한글표기 | 자무카 | |
영문표기 | Jamukha | |
한문표기 | 札木合[2] | |
생몰기간 | 1158년 ~ 1206년 |
1. 개요
몽골에서 검은 뼈 씨족[3]으로 분류되는 자다란 부족의 지도자이자, 칭기즈 칸의 초원 통일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자 애증 관계를 이룬 인물이었다. 훗날의 서하든 호라즘 왕조든 금나라든 어떤 세력이든 자무카만큼 칭기즈 칸을 몰아붙인 적은 없었다.[4] 호라즘 왕조의 잘랄 웃 딘이 칭기즈칸 과 어느 정도 맞서긴 했으나 나라 자체가 폭삭 망해가는 과정에서 분전한 정도일 뿐, 칭기즈칸 을 여러 번 생사의 갈림길로 밀어붙인 자무카와 비교할 정도는 못 된다.[5] 그래서인지《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의 저자인 르네 그루세는 자무카를 가공할 적이라고 표현했다.[6]2. 생애
2.1. 테무진과 나눈 친분과 갈등
본래는 칭기즈 칸의 자리의 오르기 전의 테무진과 안다의 맹세[7]를 나눌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실제《 원조비사》의 기록에서 테무진과 자무카는 적으로 만나는 상황에서조차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 정치적으로는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그들은 인간적으로 서로를 끝까지 형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테무진이 메르키트족에게 아내 보르테를 납치당했을 때 함께 메르키트족을 쳐서 되찾아온 일도 있었다.기록에 따르면 자다란 수장 카라 카다안의 아들이였는데 카라 카다안을 시기한 노얀(귀족)들에게 아버지를 잃고 본인도 도망쳐서 메르키트의 노예로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세력들을 모으고 자다란의 내전에서 승리해 자다란족의 수장자리에 오른다. 이때 자무카는 자신의 부친 카라 카다안을 죽이고 자신을 내쫓은 노얀들을 말뚝에 박아 잔인하게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테무진의 세력이 급속하게 성장하자, 자무카는 그에게 위협을 느끼고 결별하게 된다. 몽골비사에서는 자무카의 동생인 타이차르가 말을 훔치다 테무진의 부하인 조치 다르말라에게 살해되자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치닫는다. 야사에서는 쏘기 전에 타이차르란 걸 알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처형했다가는 자무카와 척을 지게 될 것을 알았으나, 말 도둑질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처형했다고 한다.[8]공격해왔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테무진과 자무카의 관계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되었으며 몽골 고원의 패권을 둘러싼 거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자무카와 테무진이 각자의 연합세력을 이끌고 충돌하게 되는 13익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도 이 시기다.(1190년) 당시에는 자무카도 구르 칸이 아니었고, 테무진의 세력도 막 자무카에게서 독립한 수준이었다. 덕분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13익 전투에서 자무카는 보기 좋게 테무진을 압살해버렸는데, 어지간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는지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친 테무진은 4년간의 공백기를 보낸다.[9] 아마 13익 전투의 패배 이후 테무진은 4년간 금나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무카는 13익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면서 테무진 편을 들었던 치노스족의 모든 남자들을 죄다 삶아죽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전사들의 시신을 말에 매달아 끌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치노스족은 몽골 선조들의 직계 혈족에 해당하는 명예롭고 권위있는 씨족이었고,[10] 이들을 욕보인다는 것은 그들과 관련이 있는 다른 몽골 부족들과의 관계도 악화시킬 수 있는 매우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결과적으로 자무카는 민심을 크게 잃는다.
라이벌을 제거하고 초원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자무카 입장에서는 옛날의 고루한 권위를 제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적의 편을 들기까지 했으니 그들의 세력을 축소시키는 것 자체는 자무카 입장에서 충분히 시도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몽골인들에게 상징으로 인식되는 씨족을 영혼까지 욕보이는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했으니, 사람들이 등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었다. 전근대시대에는 신앙이나 상징물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11][12] 몽골에서도 선조들의 직계 혈통과 그 상징성에 대해 사람들의 믿음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아무리 실력자여도 칸이 되기 힘들었다. 북원 시대를 비롯한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이라트의 에센처럼 칭기즈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칸을 노렸다가 몰락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결국 이방인들은 권력을 차지하더라도 대부분 실권만 차지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것.
결론적으로 이 사건 때문에 오로오드족, 망구드족 등의 유능한 세력들이 자무카의 세력에서 탈퇴하고 테무진 쪽으로 돌아섰다.[13] 이때부터 자무카와 테무진의 세력은 서로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게 된다. 야사 중에서는 자무카가 서쪽의 나이만족과 손잡았을 때, 이미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초원의 통일은 자신이나 테무진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테무진의 가능성이 훨씬 커졌기 때문에 일부러 테무진의 통일을 도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테무진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결집시켜 한꺼번에 소모시키면 칭기즈칸이 초원을 완전하게 통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2. 구르 칸, 몽골의 지배자
테무진과 옹 칸이 재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여러 부족들이 연맹을 결성하여 이들에게 대항하기로 했다. 그리고 1201년 자무카를 모든 부족의 군주로 추대하면서 그는 이때 구르 칸[14]의 자리에 즉위하기에 이른다.그리고 이들 연합과 테무진 연합이 전투를 벌였는데 오논 강 근처에서 최초의 전투를 치른 후[15] 쿠이텐이라는 평원에서 대규모 회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쿠이텐 전투에서 테무진 연합이 승리하게 되었고[16] 자무카가 결성한 연합은 순식간에 붕괴하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테무진이 타이치우트와 타타르 등의 부족을 정복하고 다니는 사이, 자무카는 케레이트의 군주 토그릴 칸의 아들 셍굼의 편에 서서 토그릴 칸이 테무진을 배신하게 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자무카의 연합군은 카라칼지트 사막 전투에서 테무진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되었고[17] 이때 참패한 테무진은 몽골 초원의 가장 끝인 발주나 호수로 피신했는데 그의 병력수가 2,600 ~ 4,6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2.3. 최후
한편 자무카는 이틈에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토그릴 칸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이에 실패하여 나이만에게로 도망쳤고[18] 연합이었던 토그릴 칸은 세력을 회복한 테무진에게 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멸망했다. 이후 테무진이 나이만을 공격하자 자무카는 중간에 나이만에게서 빠져나왔고,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의 대패로 나이만이 패망한 이후에는 도망다니다가 부하의 배반으로 생포되었다.[19]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자무카는 자기 부하들에게 사지가 붙들려 잡혀오자마자 칭기즈 칸에게 "친구여, 이놈들은 주인인 나를 배반하여 붙잡아왔다. 이런 배신자들을 넌 용납하지 않겠지?"라고 말했는데,[20] 칸의 대답은 더더욱 걸작. "물론이고 말고. 자기 주인을 배신해서 적에게 팔아넘기는 쓰레기들을 내가 받아줄 리 없지." 그 뒤 칸은 자무카를 잡아 온 그의 부하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렸다. 이것은 칭기즈 칸이 대체적으로 적들에 대해서 항복하면 살려주고 저항하면 죽인다는 원칙을 고수했지만[21] 주인을 배신해 팔아넘기는 행위에는 오히려 예외적으로 더 가혹했다는 것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은 후 자기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동족들도 자신을 해치려 한 타이치우트족을 제외하고는[22] 대부분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학살과 관용이라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칭기즈 칸의 대외정책은, 자신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명확히 구분하는 당시로서는 '근대적'인 사회 계약의 결과물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여튼 자무카의 재능이 아까웠던 칭기즈 칸은 어릴 적 맹우였던 그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자무카는 이를 깨끗이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전승 등을 보면[23] 이제 막 몽골의 권위자가 된 친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마지막 우정의 표현으로 죽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24] 칭기즈 칸은 자무카에게 "이제 하나로 함께 지내며 자신이 잊은 것을 서로 일깨워주며 함께 지내세."라며 설득을 했지만 자무카가 《 원조비사》에서는 꽤나 자학적인 어조로 얘기하며 자신을 살려두면 칭기즈 칸이 밤이고 낮이고 안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자무카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천하가 이제 자네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데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오히려 자네 옷깃의 이, 자네 옷깃 아래의 가시가 될 것이네. 자네가 허락해 나를 빨리 떠나게 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지. 나를 죽일 때 피가 나오지 않게 죽이면 내 유골이라도 높은 곳에서 영원히 자네의 후손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가호해 주고 축복할 것이네."
그 말대로 칭기즈 칸은 마지막 우정의 표현으로 그를 자루 속에 넣어 끈으로 목을 졸라 피를 보지 않고[25] 죽게 해주었다.[26][27] 자루 속에 넣어 목 졸라 죽인 건 죽은 걸로 위장하려는 것뿐으로 사실은 살려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게 해줬다는 전승도 있다. 어찌보면 제베가 이름을 바꾸게 된 것[28]과 비슷한 경우다. 그외 '척추를 꺾어 죽였다'는 설도 있고, 사실은 정반대로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원해서 능지형으로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몽골인들의 사후관이나 그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감안해보면 이는 칭기즈칸, 나아가 몽골족의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말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원했다면 끓는 기름에 빠뜨려 죽여달라고 원했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능지형으로 처형당한 전승에선 칭기즈 칸이 결국 죽이라고 명령은 했으나 의형제가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29] 자리를 비우면서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가 독단적으로 능지형으로 죽였고, 이를 계기로 둘의 사이가 살짝 벌어지면서 훗날 카사르가 멋대로 움직이고 이를 칭기즈 칸이 경고 먹이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물건은 젊은 시절, 메르키트 정복 때 서로 교환하여 얻은 칭기즈 칸의 허리띠였다.[30] 그러니까 그 허리띠를 칭기즈 칸과 적대하는 사이가 된 뒤로도 계속, 죽을 때까지 평생 가지고 다닌 것이다. 개인사적인 측면에서는 칭기즈 칸에게나 그에게나 참으로 비극적인 대목이다. 이렇듯 진실성은 둘째 치더라도, 전승에서든 기록에서든 자신을 배신하고 적대한 인물은 살려두지 않은 칭기즈칸이 유일하게 자신과 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기는커녕 회유하려 한 인물이니 칭기즈 칸이 자무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31]
자무카는 후에 세계 제국이 된 몽골 황실에서 두고두고 제삿밥을 얻어먹는 웃어른으로 대우받았다.
3. 능력
군사 지도자로서의 실력 및 휘하 세력의 역량은 칭기즈 칸과 대등했다. 특히 13익의 전투 때는 압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쿠이텐의 전투에선 옹칸과 칭기즈 칸의 연합세력에 자무카의 연합세력이 완패. 이후 케레이트에 빌붙어 카라칼지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이간책과 습격으로 칭기즈 칸이 승리하자 나이만으로 도망쳤지만 여기서도 자무카는 패배하게 된다.그리고 자무카는 어린시절부터 대범한 능력을 가졌다고 추측할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무카가 자신의 부친을 죽이고 내전을 일으킨 귀족들의 내전을 평정시킨 것이다. 게다가 자무카는 이들을 말뚝에 꿰어 잔혹하게 처형하였다. 치노스족 학살처럼 이때부터 자무카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여담으로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는 쿠라사이차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자무카를 잡기위해 대군을 동원했으나 패배한다.)
위의 설명에서처럼, 뛰어난 전략과 전투 기술로 전쟁에서는 칭기즈 칸과 대등했지만 결국 그를 패배하게 한 것은 정치였다. 칭기즈 칸과 마찬가지로 초원의 통일이라는 대세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지만, 칭기즈 칸이 모든 구성원들이 인종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과 기여도로 평가받는 근대적인 사회 체제를 제시[32]한 데에 비해, 본인의 카리스마와 칭기즈 칸의 안티테제라는 측면 외에는 이렇다 할 정치적인 자산은 갖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잔혹함은 앞에서 언급한 치노스 팽형의 경우처럼, 오히려 칭기스칸 측을 돕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또한 설사 치노스 씨족을 처형한 게 자기에게 대항한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로 치고 넘어가더라도[33], 반대로 자기와 손잡은 자들에게 베풀기도 하는 모습이 필요했는데, 이후에 자무카는 자기 씨족 사람들만 챙겼다. 심지어 연합한 부족을 '이용하고 버리는 장기말' 정도로 생각하는 행보를 보였다.[34] 이러니 정치적으로 계속해서 공격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반감을 샀다면 만회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자무카는 그런 정치적 노력을 게을리했다. 전반적인 자무카의 행보를 보면 딱히 정치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앞의 카라칼지드 전투에서 패배한 칭기즈 칸이 19명의 전사들만으로 시작해 몇 달 만에 재기[35]하여 케레이트를 급습할 수 있었던 것과 반대로, 본인은 결국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부하들에게 배반당해 칭기즈 칸에게 끌려 오고 말았다. 능력과 카리스마는 뛰어났지만 결국 사람의 마음을 끌지 못한 것이 그의 패인이었다.
군략에 뛰어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특징은 그의 활동에서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자무카는 항상 다른 세력의 인력과 물자를 이용하며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자무카의 뛰어난 군사 운용 능력을 이용하고자 타타르족, 메르키트족, 타이치우드족[36], 케레이트 족[37], 나이만족 등이 손을 내밀었는데, 자무카는 항상 이들을 역으로 이용했다. 칭기즈 칸에게 수차례 패배하면서도 자무카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으로, 자무카가 이끄는 자다란 부족은 숱한 패전 속에서도 동맹 부족을 방패삼아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자무카는 언제나 의심을 받았고 그 정치적 입지 또한 대단히 축소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전인 차키르마우트 전투를 치를 때까지 다른 군주들의 러브 콜이 쇄도하고 있었다. 자무카의 군략이 대단히 출중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4. 대중매체에서
2005년 한국의 지상파에서 방영된 적 있었던 드라마《 칭기즈 칸》에서는 투석기처럼 생긴 기계를 만들어서 찢어 죽이는 것[38][39]으로 나오지만... 몽골의 사후관을 생각하면 고증 오류로 보인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도 몽골인들이 피를 보이고 죽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숱하게 언급되었다. 앞서 나온 자무카를 잡아온 부하들은 더러운 피를 뽑아 죽였다고 되어 있으며, 칭기즈 칸이 저 기계를 만든 이유가 자무카의 피를 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더빙 명칭으론 '차무하'라는 이름으로 나왔다.영화《 몽골》에서는 대머리[40]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등장. 테무진과는 절친한 의형제였지만 어긋나서 적대한뒤 결국 후반부에 패배하고 테무진에게 잡혀 와 자신을 회유하는 테무진에게 내가 자네라면 나를 죽일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테무진에게 풀려난다. 이에 자무카는 말을 타고 떠나기 전 테무진에게 "자네는 적을 돌려보내주고 있어."라고 말하나, 테무진은 뒤로 돌면서 "나는 적이 아니라 형제를 보내주는 거네."라고 말한다.
《 징기스칸 3 원조비사》에서는 정치력, 무력, 통솔력, 매력 모두 B로 나온다. 테무진의 세력에 비해 국력은 강하지만 부하가 무능한 동생 다이차르 하나뿐이고 테무진보다 무력, 통솔력이 쳐져서 테무진보다 플레이가 힘든 편이다. 때문에 인재 등용을 돌려서 무카리를 등용하는 것이 중요하고, 배신을 절대 안하는 다이차르[41]에게 본토를 맡긴 뒤 정벌을 나서는 플레이가 일반적이다. 무카리와 함께 주변 지역을 점령해 제베, 수베테이 등의 용장들을 등용하면 점차 정예부대를 육성할 수 있다. 아내와의 관계가 시원찮다는 기록을 반영해서인지 시작시에 데리고 있는 아내의 오르도 성공률이 바닥을 긴다.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삼국지 12, 14 |
허영만의 만화 《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선 테무진을 제치고 진 주인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중 있게 나왔다. 여기에서는 허리를 꺾여 죽는 전승을 채택했다. 이미지는 거의 베르세르크의 "흑화 되기 전" 그리피스.
[1]
발음은 '자모하'에 가깝다.
[2]
찰목합.
[3]
칭기즈칸의 출신인 보르지긴 씨족과 같은 하얀 뼈 씨족처럼 몽골의 칸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 씨족이었다. 사실 자무카가 속한 자다란 부족도 보돈차르의 후손인건 맞았지만 칭기즈 칸의 조상은 보돈차르의 정실부인에서 나온 후손이었으나 자다란 부족의 조상은 그렇지 못했기에 같은 보돈차르의 후손임에도 칸위에 오를 수 있냐 없냐가 갈린 것. 칭기즈 칸의 아들들 중에서 보르테의 아들들에게만 계승권이 있었던걸 생각하면 쉽다.
[4]
그나마 비견되는 정도가 케레이트의
옹 칸인데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에서 몽골족 병사 1,000명만이 살아돌아갈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옹 칸은 칭기즈 칸에게 낚여 더 추격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칭기즈 칸은 곧 세력을 회복했기에, 옹 칸은 자무카만큼의 위기를 안겨주지는 못했다.
[5]
파르완 전투에서 몽골군 3만을 격퇴하긴 했으나 칭기즈칸이 직접 군을 이끌고 공격하자 잘랄 웃 딘은 단 한 차례의 승리도 거두지 못하고 패주했다. 물론 자무카와 싸울 때는 징기스칸의 전력이 온전하지 않았긴 했다.
[6]
사족으로 자무카 못지 않게 칭기즈 칸과 끝까지 끈적한 관계였던 케레이트의 옹 칸에 대한 평가는 2류 군주였다. 실제로 칭기즈 칸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싸우게 된 것도 그 자신의 실책이니.. 물론 그 실책 이후에는 빛의 속도로 몰락했다. 다만 그 옹 칸도 아래에서 서술하겠지만 한때는 자무카와 연합해 벌인 카라 칼지드 사막 전투에서 승리하여 칭기즈 칸에게 13익 전투 이래 최대 위기를 안겨주기도 했다.
[7]
'안다의 맹세'는
의형제를 맺는 의식인데, 그것도 세 번에 걸쳐서 맺었다.
[8]
몽골인에게 말은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어린 시절부터 말과 함께 자라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가족인 것. 따라서 말 도둑질은 중죄 중의 중죄이며, 말 도둑을 발견한 경우 그 자리에서 죽여도 된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였다.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서도 타이차르를 사살한 부하가 테무진 앞에서 말을 훔치는 것은 자신의 어머니를 범하는 것과 같다고 항소하며 태무진도 이를 알고 뭐라 말하지 못했다.
[9]
테무진은 이 전투에서 패하고 나서 어떤 기록에서도 등장하지 않다가, 4년이 지나서야 다시 사서에 이름을 드러낸다. 영화 등 현대 작품에선 이때 노예로 팔려가 고초를 겪었다는 식의 각색도 하는 모양. 사실 기록이 없기 때문에 상상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10]
'치노'가
늑대라는 뜻이니 치노스족은 우리말로 하면 늑대 씨족이 된다. 말하자면 몽골의 상징 그 자체인 것이다.
[11]
일본의 예를 보면 제아무리 강대한 세력을 손에 넣은 실력자들조차
덴노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또한
유럽에서도
교황은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국가 간 분쟁에서 중재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12]
사실 이는 근현대에서도 정도만 약해졌지 신성모독을 하거나 국민적 정서를 건드리는 일 혹은 상징적인 인물을 건드릴 경우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경우는 볼 수 있다.
[13]
능지형으로 처형된 전승에선 이때의 잔혹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걸 각오했다고 말하며 당당히 능지형을 받았다.
[14]
사해(四海)의 칸, 즉 온 세상의 왕이라는 뜻이다. 다만 이 칭호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 칭호는 칸들에 의해 추대된 칸, 즉 초원의
왕중왕을 뜻하는 일반명사에 가까운 단어로, 과거에는 물론 그 시점에서 자무카 말고도 구르 칸의 칭호를 받은 자는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금나라 황제의 다른 칭호이기도 했으며,
서요의 황제도 구르 칸을 칭했다.
토그릴 칸의 숙부 역시 구르 칸이라 칭해진 바 있었다.
[15]
어느 쪽이 승리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16]
《몽골비사》에 이 전투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데, 자무카 연합이 주술을 일으키는 '자다'라는 돌을 가지고 비바람을 불러 승리하려 했지만, 오히려 비바람이 본인들에게 휘몰아쳐서 흩어져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현대 관점에서 보자면 그냥 당시 기상현상이 테무진에게 유리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17]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때 자무카가 테무진에게 케레이트족 군대의 배치와 전열에 관해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에 관하여 테무진이 재기할 수 있게 여유를 두어 테무진과 토그릴 칸이 계속 싸우는 사이 어부지리를 노렸다는 설도 있다.
[18]
《
원사》 참조, 참고로 《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때 테무진이 셍굼, 자무카, 토그릴 칸, 자신의 부하였지만 배신하고 자무카에게 간 귀족 알탄과 후차르에게 서한을 보내서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고 했다.
[19]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 때 자무카가 테무진을 돕기 위해 나이만의 타양 칸을 겁먹게 하고, 이같은 사실을 테무진에게 전갈을 보내어 알려주었다고 되어 있다. 반면에 《집사》에는 자무카가 테무진의 새로운 전투 대형을 보고 나이만족이 승리하지 못하리라 판단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튀르크계 나이만족과 몽골족간의 인종적, 종교적 차이가 너무나 현격했기 때문에 자무카의 추종자들과 부족민들이 나이만 편에 서서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우기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실 어느 쪽이든 자무카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다른 건 몰라도 나이만족의 지도자인 타양 칸이 전쟁을 잘 할 줄 모르고 결정적으로 겁쟁이였다. 한때는 13익 전투로 칭기즈칸을 개박살내보기도 하고 검은 뼈 씨족 출신으로서 칸위에도 오를 정도로 나름 구르고 굴러본 자무카가 저런 지도자가 칭기즈 칸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해도 이상할 건 없다.
[20]
칭기즈 칸과 오랜 친구인 만큼 칭기즈 칸의 성격을 잘 알았을 것이다.
[21]
사실 웬만한 정복자들은 대부분 이 원칙을 고수했다. 이것을 넘어선 이들은 대체로
학살자란 호칭이 붙게 된다.
[22]
그나마도 귀족층 한정. 평민층 이하는 포용했으며, 사준사구 중에서도 타이치우트족인 제베와 티라운이 있다.
[23]
칭기즈 칸 사후 《
원조비사》가 쓰여지기 전까지 몽골의 역사는 정식 기록 없이 입에서 입으로 서사시 형태를 가지고 이어져 왔다. 그 때문에 전승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들이 나온다.
[24]
무슨 소리냐면 이전까지 자무카의 행적을 보면 그는 반(反) 칭기즈 칸의 수장격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칭기즈 칸이 살려준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건재하므로 칭기즈 칸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여전히 그를 정신적 지주처럼 생각할테고 칭기즈 칸에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자무카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칭기즈 칸과 싸우게 되는 입장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친구에게 지워질 짐이 돼버릴까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지금 와선 모든 게 추측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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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는 사람의 피에 영혼이 깃든다고 생각했으며, 피를 온전히 하여 죽으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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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조르는 게 아니라 자루에 넣어진 후에 달리는 말로 밟혀 죽었다고도 한다. 또 어떤 서술에는 큰 카페트에 돌돌 말려 죽었다고도 한다. 여튼 이러한 가설들의 공통점은 생전 자무카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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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자무카가 자신이 죄목을 말해달라고 청했고, 이에 칭기즈 칸이 하나씩 읊다가 "그만. 그 정도면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해."라며 제지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자무카를 교수형시키는 것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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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바꿈으로서 칭기즈 칸의 적이었던 '지르고가타이'는 없어지고 칸의 신하인 '제베'로 새로 태어났다는 상징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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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이전에 자신과 갈등을 빚던
이복 형을 죽인 적이 있었는데 이 일로 어머니 호엘룬으로부터 크게 힐난당하면서도 본인도 대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의 트라우마가 있는 칭기즈 칸으로선 자무카가 비록 자신을 적대하는 세력에 있긴 했고, 의형제니 피 한 방울 안 섞인 처지였으나 그래도 차마 죽이기 싫은 심정이었을 순 있다. 마지막까지 회유하려고 들었던 걸 보면 진짜 죽이기 싫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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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허리띠는 문화적으로 남성기를 암시한다고 한다. 《말무사》에서는 보르테에 대한 순정을 강조하기 위해 그녀가 어릴 적 칭기즈 칸에게 전달해줄 것을 부탁한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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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자무카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자무카가 막무가내였기 때문에 '아무 죄가 없던' 자무카가 아주 오래전에 저지른 잘못(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13익 전투를 일으킨 것과 치노스족 남자들을 인간곰탕으로 끓인 것)을 핑계로 죽음을 내렸다는 말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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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세계 최초의 근대적 시스템을 구축한 국가라는 평도 있으나, (이런 평가는 칭기즈 칸에 대한 노골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매체들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딴지일보의 '테무진 to the 칸' 시리즈 등.) 세계 최초라고 보기엔 어렵다. 몽골 초원에서라면 혁신적이었을지 몰라도, 농경 문명을 기반으로 한 정주 국가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근대적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칭기즈 칸의 몽골국이 가지는 근대적 특징으로 주목받는 요소들은 '씨족과 부족의 집합을 넘어선 국가 단위의 정체성 형성', '씨족과 부족의 관계를 넘어 보다 체계적인 규범에 근거해 구축된 권력과 사회 구조', '사회 복지(공적 부조) 개념의 도입' 등이며, 이들은 한 사회가 부족 체제에서 탈피해 '국가'를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특징들이다. 당장 저것들은 기원전의 로마 공화정에서도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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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후 10여 년 뒤 그는 몽골 귀족들의 귀순 및 그들과의 연합으로 칸 자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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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칭기즈 칸은 밑의 부하들에게 보상은 확실하게 제공했다. 그리고 약속한 것보다 더 충성을 바치면 그만큼 더 보답했다. 즉,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원칙을 세우고 지킨 것이다. 심지어 칭기즈 칸은 몇번이고 친족들에게 배신당해서 그런지 친족들보다 신뢰하는 부하들을 더 믿고 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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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재출현에 몽골 초원의 여러 부족이 무조건적인 지지를 표하여 순식간에 그 군세가 전투 이전보다 늘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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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세 부족은 칭기스칸과 대립했고, 반(反) 칭기즈 칸 연맹의 수장으로 삼기 위해 자무카를 구르 칸에 즉위시켰다. 그러나 쿠이텐 전투에서 패배한 후 세 부족은 멸망의 길을 걷는다. 그나마 칭기즈 칸과 마찬가지로 몽골족에 속한 타이치우드는 비교적 관대히 포섭되었지만, 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를 죽인 타타르와 아내 보르테를 빼앗아갔던 메르키트는 용서가 없었다. 타타르는 수레바퀴 크기 이상의 성인 남자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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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에서 칭기즈 칸 측을 배신하여 승리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흡수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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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기계틀에 사지를 따로 묶은 후 적당히 당겨서 거꾸로 공중에 매단 다음(이는 사후 대소변이나 정액을 흘리지 않게 하기 위함인 듯?), 큰 돌이 묶인 줄을 목에 걸어 놓고 돌을 아래로 떨어뜨림으로서 목을 부러뜨려 처형한 것으로 찢어죽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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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당시 몽골에는 공중에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이 없었다는 점에서 약간은 고증 오류이긴 하다. 몽골은 중국을 정복한 이후에도 중국에서 북위 이래로 유지되어오던 교수형을 폐지해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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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대머리는 아니었으나, 동생이 죽임 당하고 칭기즈 칸과 척을 지는 과정에서 결의를 다지는 의미로(?) 확 깎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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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이 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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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AI 몽고가 고르고낙을 뚫는데 성공한다면 곧바로 초강대국으로 자라나는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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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4편 전까지 작품에서의 아내는 라찌가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은 외모의 여인이었다. 초기 애정도가 높은(...) 라찌와는 정반대로 자무카에 대한 초기 애정도는 낮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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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100%는 아니다. 첫턴 째에 등용으로 등장하는데, 무카리의 위치가 애매한 탓인지 오논으로 들어가서 칭기즈 칸의 부하가 되어버리는 자무카 입장에서는 절망할만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경우라면 자무카측 장수는 제베와 자무카를 제외하면 연사 하나 믿고 줄치다이를 주력으로 사용해서 일단 최대한 빨리 오논을 공략하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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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오논과 고르고낙은 모두 평지에 방어력이 낮아서 초반 1년 내에 전력으로 밀어버리는 것이 가장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