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의 대외 전쟁·분쟁 | |||
{{{#!wiki style="color: #fff;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D1D1D; margin: -6px -1px -11px" |
전쟁·전투 | 교전국 | |
<colbgcolor=#004DB1>
몽골-서하 전쟁 ,1205 ~ 1227, |
서하 | ||
몽골-금 전쟁 ,1211 ~ 1234, |
<colbgcolor=#004DB1>
오사보 전투·야호령 전투·회하보 전투 ,1211, |
금나라 | |
대창원 전투 ,1229, |
|||
도회곡 전투 ,1231, |
|||
삼봉산 전투 ,1232, |
|||
몽골-호라즘 전쟁 ,1219 ~ 1221, |
파르완 전투 ,1221, |
호라즘 왕조 | |
칼가강 전투 ,1223, |
|||
여몽전쟁 ,1231 ~ 1259, |
|||
레그니차 전투 ,1241, |
|||
모히 전투 ,1241, |
헝가리 왕국 | ||
몽골-남송 전쟁 ,1235 ~ 1279, |
단평의 입락 ,1234, |
남송 | |
악주 전투 ,1258, |
|||
조어성 전투 ,1259, |
|||
정가주 전투 ,1275, |
|||
양양 공방전 ,1235~1273, |
|||
애산 전투 ,1279, |
|||
삼별초의 난 ,1270 ~ 1273, |
|||
아인 잘루트 전투 ,1260, |
|||
일본 원정 ,1274, 1281, |
|||
베트남 원정 ,1257, 1284, 1287, |
쩐 왕조 | }}}}}}}}} |
1. 개요
1221년 아프가니스탄의 파르완주에서 호라즘 왕조의 제8대 술탄 잘랄 웃 딘 밍부르누와 쿠투쿠(忽都忽)[1]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맞붙은 전투로, 몽골-호라즘 전쟁에서 몽골군의 유일한 패배이자, 호라즘 왕조가 승리를 거둔 유일한 전투였다.
2. 상세
1219년 여름, 복수심에 불타는 칭기즈 칸 휘하 200,000명의 대군이 호라즘 왕조에 쳐들어왔다. 호라즘 제국은 4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제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고, 몽골군의 압도적인 기동력과 전투력, 탁월한 전략 및 전술로 인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파죽지세로 삽시간에 무너졌다. 호라즘의 제7대 술탄이었던 무함마드 2세는 수도인 사마르칸트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서쪽으로 도망을 갔지만 칭기즈 칸의 4구에 속했던 베수드 제베와 우량카이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 추격대 30,000명에 쫓겨 멀리 방황하다가 카스피 해의 외딴 섬에서 1220년 씁쓸히 병사했다.이무렵 본거지인 가즈니가 있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피신한 잘랄 웃 딘 밍부르누는 부왕의 비참한 사망 소식을 듣고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호라즘 왕조의 새로운 술탄이 되었다. 그는 명장 테미르 말레크 및 직속부대와 호라즘군의 패잔병들, 가즈니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그의 장인 니뮤의 군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부족들을 포섭하여 6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모았다.
얼마 후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 30,000명이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었던 호라즘의 잔존 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잘랄 웃 딘의 호라즘군은 이들과 맞서기 위해 카불에서 북쪽으로 50마일 떨어진 파르완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1221년 여름, 파르완의 좁은 골짜기에서 양군이 마주쳤다. 좁은 계곡에 100,000명에 가까운 대규모 병력이 대치했기 때문에, 기병이 자유롭게 이동하기에는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잘랄 웃 딘은 우익에 배치된 튀르크 기병대에게 몽골군 좌익 부대쪽으로 가서 화살 세례를 퍼붓게 했다. 몽골군도 이에 맞서 화살을 쐈지만, 미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선제 공격을 가한 튀르크 기병대쪽이 더 많은 피해를 몽골군에게 입혔다.
사실 잘릴 웃 딘은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고 보고, 화살비를 퍼부어 몽골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힌 뒤 철수하려 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몽골군의 규모가 생각만큼 크지 않고, 전력 손실이 크다는 것이 확인되자 잘랄 웃 딘은 철수하는 대신 몽골군에 접근하기로 했다. 호라즘군이 접근해오자, 쿠투쿠는 우익 기병대에게 적 좌익을 향해 화살을 퍼붓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 훈련된 아프가니스탄 궁수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상황이 안 풀리자, 쿠투구는 전군을 이끌고 호라즘군에게 돌격해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호라즘군이 수적 우위와 유리한 지형을 앞세워 화살비를 퍼붓자, 몽골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다가 칭기즈 칸이 침략 전쟁을 개시한 이래 처음으로 규율이 무너져 후방으로 달아났다. 잘랄 웃 딘은 기회를 포착하고 전군에 추격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말을 몰아 달아나는 몽골군을 살육했다. 이 파르완 전투에서 몽골군의 사상자는 절반이 넘었으며, 많은 병사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칭기즈 칸은 이 소식에 분노하여 친히 50,000명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격했다. 이 와중에 바미얀 지역에서 포위전을 펼치던 도중 칸이 아끼던 손자 무투겐[2]이 독화살을 맞고, 전사하면서(1221. 9) 칭기즈 칸과 몽골군의 전의를 불태웠고, 무자비하게 호라즘 전역을 유린했다. 이렇게 되자 파르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궁지에 몰리며 연패를 거듭한 잘랄 웃 딘은 잔여 세력을 규합한 뒤 인도로 피신하기 위해 인더스강으로 향했지만, 강을 건너기 전에 몽골군에게 따라잡혔다.(인더스강 전투)
몽골군에 의해 삼면에서 포위당한 잘랄 웃 딘과 테미르 말레크는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지만,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이들을 가차없이 쓸어버렸다. 테미르 말레크는 생포되었고, 잘랄 웃 딘은 폭우로 인해 20척 깊이까지 불어난 인더스 강에 말을 탄 채로 뛰어든 뒤 기적적으로 강을 건넜다. 그 장면을 본 칭기즈 칸은
"
저런 아들을 둔 아비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로다."
라며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칭기즈 칸은 후환이 될 잘랄 웃 딘을 잡기 위해 노예 왕조의 술탄 일투트미쉬가 지배하고 있었던 북인도로 추격대를 보냈지만, 병사들이 무덥고 습한 인도의 날씨를 견디기 힘들어하고 병장기마저 쓸모가 없어지자 돌아오도록 했다. 이후 잘랄 웃 딘은 호라즘 왕조를 재건하기 위해 호라산,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을 전전하며 수년 동안 힘을 기울였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국가들인 룸 셀주크 왕조 및 아이유브 왕조와 마찰을 빛은 끝에 1231년 쿠르드계 아이유브 무슬림 제후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