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발수기능의 난 | 禿髮樹機能之亂 | ||
시기 | 270년 여름 7월 ~ 279년 겨울 12월 | |
장소 | 관중 일대 | |
원인 | 서진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 | |
교전국 | 서진 | 선비족 |
군주 | 황제 사마염 | 수령 독발수기능† |
지휘관 |
진주자사
호열†[1] 양주자사 소유† 장군 유기 기독 경염 사마량[2] 도독농우제군사 석감[3] 분위호군 전장 진주자사 두예[4] 정서대장군 사마준 양주자사 견홍†[5] 양주자사 양흔†[6] 서역무기교위 마순 평로호군 문앙 토로호군 겸 무위태수 마륭 몰골능(沒骨能)[7] |
약란니(藥蘭泥)† 백호문(白虎文) 걸문니(乞文泥)† 토돈(吐敦)† 아라다(阿羅多) ← 후탄발(侯彈勃) ← 길가라(吉軻羅) ← 후금다(侯金多) ← 열경(熱冏) ← 졸발한(猝跋韓) ← 차만능(且萬能) ← 불명의 거수인 선비족 대인† |
결과 | 독발수기능의 패배 | |
영향 | 서진의 오나라 정벌 추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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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말진초 서기 270년부터 279년에 걸쳐 선비족 독발부의 수령 독발수기능이 서진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서진의 진주, 양주 일대[9]에서 전개되었다.
2. 전개
2.1. 반란 이전
269년 서진은 양주와 익주의 군현 일부를 떼어내 진주를 설치하였다. 사마염은 진주자사로 양주 안정군 출신인 호열을 임명했는데, 대사마 진건이 호열과 견홍에 대해용기가 있으나 지모가 없어 스스로 쓸모있다고 억지를 부리니 변방을 안정시킬 재목은 되지 못하고 장차 나라의 수치거리가 될 것이라며 만류했으나 사마염은 듣지 않았다.2.2. 270년 ~ 271년
이듬해인 270년, 독발부 수장 독발수기능을 중심으로 만곡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주자사 호열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고, 도독옹량제주군사인 사마량은 유기와 경염을 파견해 호열을 돕도록 했다. 그러나 호열은 수세에 몰렸고, 유기는 관망만 할뿐 호열을 돕지 않은 탓에 호열은 끝내 독발수기능에게 패하여 전사했다. 때문에 유기는 군법대로 참수형에 처해져야 했지만 사마량의 변호로 면직으로 끝났다. 한편, 독발수기능은 금산에 있던 양주자사 소유까지 격파해 소유를 죽였다.진나라 조정은 석감을 안서장군, 도독진주제군사로 임명하고 두예를 진주자사에 제수하고 동강교위, 경거장군으로 삼아 관농 지역으로 파견했다. 이번에는 진나라군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는데, 석감은 두예를 출전하라고 명했으나 두예는 ‘적군은 병사가 강하고 말들이 살쪘는데, 아군은 역량이 궁핍하니 힘을 모아 기다리다가 봄이 되면 진군해서 토벌하자‘면서 신중론을 펼쳤다. 이처럼 의견을 달리 내자 점차 둘 사이의 갈등이 생겼고, 석감은 두예를 무고로 탄핵해 중앙으로 돌려보냈으며, 두예는 황실과 친인척이였기에 죽음은 면했으나 후작이 박탈당하면서 평민이 되었다.[10]
그러나 석감마저 독발수기능에 패하고, 반란 진압에 실패하자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은 진나라는 대오전선에 있던 사마준을 도독옹량주제군사(都督雍涼等州諸軍事)로 삼고, 전사한 소유의 후임으로 견홍을 양주자사로 파견해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하게 했다.
271년, 견홍은 북지의 이민족들이 금성을 침공하자 이들을 공격했으나 그때까지 관망을 하던 이민족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키면서 금성의 후방에 있는 청산까지 밀리게 되었다. 청산에서 포위된 견홍은 전사해버렸고, 사마준은 견홍의 패배를 이유로 면직되어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2.3. 272년 ~ 278년
시중 임개는 가충을 사마준의 후임으로 추천해 그를 중앙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했으나, 가충이 가남풍을 사마염의 아들 사마충(훗날 혜제)과 혼인시키면서 가충은 도독옹량주제군사로부임하지 않고 중앙에 남았다.가충의 옹량주행이 무산되면서 진나라는 다시 사마준을 파견했다. 사마준은 독발수기능과 직접 대결을 피하고 둔전을 실시하면서 장기전을 도모하는 한편 아직 독발수기능에게 호응하지 않았던 이민족들과 회친을 맺으면서 독방수기능의 세력확대를 막았다.
사마준은 274년 금성을 공격한 걸문니를 죽인 것을 시작으로 275년 강족 + 독발수기능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반격을 시작했다. 같은해 서역무기교위(西域戊己校尉) 마순을 파견해 독발수기능에게 호응한 이민족 수령들을 토벌하도록 명했다.
276년 이민족 수령 토돈, 아라다가 양주를 공격했으나 사마준에게 전사했다.
277년, 입지가 좁아진 독발수기능은 후탄발과 함께 진나라의 둔전병들을 위협했다. 이때 사마준은 문앙을 선봉으로 세워 옹량주 군사들을 이끌고 독발수기능을 격파했다.
이 싸움의 패배로 독발수기능은 휘하 20부에게 각각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라고 명령하고 반발한 후탄발을 군문에서 면박했고, 독발수기능을 중심으로 뭉쳤던 선비족 연맹이 와해되었다.
2.4. 278년 ~ 279년
독발수기능 세력이 거의 진압된 상태에서 진나라는 문앙과 사마준을 불러들였다.이듬해인 278년, 양주자사 양흔이 강족 약라발능과 맺은 화친을 깨버리고 약라발능을 공격했다가 전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기회를 틈타 독발수기능이 재기하는데 성공했고, 양주를 다시 공격해 점령해버렸다.
이때 마륭은 사마염에게 호기롭게 용사 3천명만 있으면 독방수기능을 토벌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사마염은 마륭에게 토로호군 겸 무위태수로 삼아 독발수기능을 진압하도록 했다.
양주에 도착한 마룽이 온수(溫水)(무위현 동쪽)를 건너자, 독발수기능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지형에 의지해 후방을 끊으려고 하였다. 마륭은 팔진도를 참고해 편상거를 만들어 독발수기능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진격해 무위에 이르렀다.
무위에 도착한 마륭에게 선비족 대인 졸발한, 차만능이 무리 1만명을 이끌고 항복했으며, 융족 몰골능은 아예 마륭의 편에 서서 독발수기능에게 맞섰다. 279년 12월, 마륭은 독방수기능과 크게 싸워 패퇴시켰고 패배한 독발수기능은 부하의 배신으로 목이 잘려서 진나라로 보내지면서 독발수기능의 난은 진압되었다.
3. 교전 세력
3.1. 서진
3.2. 독발수기능 세력
- 독발수기능 † : 279년 12월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했다.
- 약란니(藥蘭泥)† : 선비족 대인. 전장에게 토벌되었다.
- 백호문(白虎文) : 선비족 대인.
- 걸문니(乞文泥)† :선비족 대인. 274년 음력 8월 사마준에게 사망.
- 토돈(吐敦)† :선비족 대인. 276년 음력 5월 사마준에게 사망.
- 아라다(阿羅多) : 선비족 대인. 276년 음력 7월 마순에게 투항했다.
- 후탄발(侯彈勃) : 선비족 대인. 사마준에게 투항했다.
- 길가라(吉軻羅) : 선비족 대인. 안정군에서 사마준에게 투항했다.
- 후금다(侯金多) : 선비족 대인. 북지군에서 사마준에게 투항했다.
- 열경(熱冏) : 선비족 대인. 금성군에서 사마준에게 투항했다.
- 졸발한(猝跋韓): 선비족 대인. 무위군에서 마륭에게 투항했다. ‘졸발한차만능’ 1인으로 보기도 한다.
- 차만능(且萬能): 선비족 대인. 무위군에서 마륭에게 투항했다. ‘졸발한차만능’ 1인으로 보기도 한다.
- 이름을 알 수 없는 거수인 선비족 대인이 275년 6월 마순에게 사망하기도 했다.
3.3. 강족
3.4. 기타
- 영호풍(令狐豊)•영호굉(令狐宏) 형제: 276년 돈황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양흔한테 진압당했다.
4. 결과와 영향
10년 가까이 진행된 독발수기능의 난은 279년 12월 마륭의 군대에 의해 독발수기능이 대패한 후 부하들의 배신으로 사망하면서 종결되었다. 이후 296년 - 299년 사이에 일어난 제만년의 난 이전까지 농서 지역이 안정화되었다.독발수기능의 난은 삼국시대의 역사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독발수기능의 난 뿐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진나라는 서북의 독발수기능의 난을 비롯한 여러 반란들의 토벌로 인해 동남의 손오에 병력을 집중할 수는 없었고 촉한의 멸망( 촉한멸망전)으로 삼국의 한축이 무너진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오나라는 잠시 여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10년 동안 유지하던 손오는 진나라가 지방의 여러 반란을 제압하고 소규모의 병력으로 독발수기능의 발을 묶는 결단을 내려 병력을 집중하자 결국 멸망당하고 마침내 삼국은 통일된다.
독발수기능 사후 독발부 대인은 독발수기능의 종제( 사촌 동생) 독발무환이 계승했다. 독발무환의 후손 독발오고는 오호십육국시대 때 드디어 남량을 건국했다.
5. 대중매체에서 독발수기능의 난
최훈의 만화 삼국전투기에서 독발수기능의 난에 대해 다루었다. 최훈은 이미 막장으로 달려가서 언제 망해도 이상할게 없는 손오를 서진이 잠시 놔두었던 이유가 독발수기능의 난으로 몸살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1]
270년 만곡퇴 전투에서 전사.
[2]
호열이 위기에 처하자 유기, 경염 등을 파견해 지원했으나 유기가 관망한 탓에 호열이 전사해버렸다. 조정에서 유기를 죽이려고 하자 변호해주었고, 직위를 박탈당했다.
[3]
공을 허위로 논한 것이 연좌되어서 해임당했다.
[4]
석감의 모함으로 인해 부임하지도 못하고 중앙으로 돌아왔다.
[5]
271년 청산 전투에서 전사.
[6]
278년 강족 수령 약라발능과의 전투에서 전사.
[7]
융족 출신으로 미륭의 군대와 함께 독발수기능 세력과 싸웠다.
[8]
본래 독발수기능의 난 때 책임자로 파견갔어야 했으나
진나라 황실과 사돈을 맺으면서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
[9]
서량, 오늘날
감숙성 지역이다.
[10]
과거에도 두예가 하남윤으로 재직할 때 석감이 묵은 감정으로 그를 탄핵해서 면직시켰던 전적이 있던 점으로 보아 둘 사이 감정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