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1:05:35

백기(전국시대)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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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전파목(起翦頗牧)
백기 왕전 염파 이목


파일:백기.jpg
봉호 무안군(武安君)
(蹇) 혹은 공손(公孫) 혹은 미(芈)
(白)
(起)
최종직위 상장군(上將君)
고향 섬서성 미현(郿縣)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57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중기2.3. 역사에 길이 남은 대학살
2.3.1. 포로 학살은 진나라에 이득이 되었는가?
2.4. 몰락
3. 사후4. 평가5. 대중매체에서
5.1. 게임
5.1.1. 삼국지 시리즈
5.2. 만화5.3. 드라마5.4. 소설

[clearfix]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의 무장. 《 전국책》(戰國策)에서는 이름이 공손기(公孫起)로 기록되어 있다.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명장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수없이 많은 적과 포로를 죽여 학살자로 불리기도 하는 인물이다.[1][2]

백기는 두개골의 정수리 부분이 뾰족한 모양이라서 '예두장군'(銳頭將軍)이라고 불리었는데, 아마도 태어날 때 모친의 골반이 좁아서 두개골이 짓눌렸던 것이 끝내 복구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2. 생애

2.1. 초기

섬서성 미현(郿縣)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역사서에 다르게 기록되었는데, 《 신당서》 <재상세계표>(新唐書 宰相世系表)에서는 진목공(秦穆公)의 부하 장수인 백을병(白乙丙)[3]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나라의 시인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자기 자신의 조상의 기록이 담긴 <고공현령백부군사장>(故鞏縣令白府君事狀)에서는 백기의 선조를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의 왕족인 백공 승(白公勝)으로 보고 있다. 복수의 화신으로 유명한 오자서의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이 왕손 웅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산책하던 중에 초나라 왕실에 어떻게 복수할지 골몰하다가 짚고 있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리는 바람에 피를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이다. 웅승은 초혜왕이 불러들여 초나라로 귀환한 후, 공의 지위에 올라 '백공'(白公)으로 일컬어지며 나름 대우를 받으며 살았으나 훗날 아버지인 웅건의 복수를 위해 정나라를 치고자 했지만 혜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끝끝내 초나라의 왕위를 빼앗아서라도 정나라를 쳐 부친의 복수를 완수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심제량에 의하여 반란이 진압되면서 자살했다. 백공의 반란이 실패한 뒤에 백공의 자손들은 진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후손들은 백(白)을 씨로 삼았고, 진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백공 승은 초평왕의 태자였던 웅건의 아들이었므로 백거이의 기록이 맞다면 백기는 초평왕의 후손이 된다.[4]

백기는 상앙의 변법 이후, 장의의 연횡책과 범수의 원교근공책을 받아들인 진나라가 삼진(三晉)[5]을 지속적으로 압박할 때 두각을 나타낸 장군이었다.

그는 당시 진나라의 왕이었던 소양왕 대신 권력을 휘두르던 소양왕의 외숙부, 위염의 천거로 장군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훗날 진나라의 재상인 범수가 백기를 견제했다고 한다. 범수는 위염과 그 일파를 쳐내면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다. 백기의 칭호인 무안군(武安君)의 의미부터 싸우면 지지 않고, 병사를 잘 길러 나라를 평안하게 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칭호인데, 즉 불패의 명장이었다는 뜻이다.[6]

역사적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판단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기록상, 종군한 30여 년 동안 대략 165만 명을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의 인구가 2,000 ~ 3,000만 명 남짓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싸울 수 있는 장정의 20% 가량을 몰살시켰다는 결론이 나오지만, 아직 국가제도가 제대로 완비되려면 한참 남았을 시기라 사실 정확한 기록이라고 볼 수는 없다.[7] 현실적으로 볼 때 학살되었다고 기록된 165만 명은 탈주병과 필요에 의한 부풀림 등이 포함된 수치였을 수도 있고, 상대해 깨뜨린 적군의 규모를 합산한 숫자일 수도 있다. 물론 100만명은 아니라도 수십만 명을 죽인 것은 거의 사실로 인정되는 분위기이다.[8]

2.2. 중기

사기》<백기왕전 열전>에서는 백기의 전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 백기가 참수 혹은 익사시킨 사람 수만 44만 명에 이른다. 또한 점령한 기록만 있고 참수한 사람 수, 점령한 성 수는 나오지 않은 기록도 많으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군공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진나라 다음으로 강건했던 초나라의 수도 영을 포함해서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지 않는 연나라 제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를 상대로 승리했고 그 땅을 점령했다.

2.3. 역사에 길이 남은 대학살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조군 40만 명과 진군 수십만 명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백기가 아닌 왕흘이 대장이 되어 승상 범수의 명령을 받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략했는데, 왕흘도 진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장이었으나 조나라의 명장 염파 지구전에 말려들어 불리한 상황이었다. 왕흘은 3번의 전초전에서 승리하면서 기뻐했지만, 이는 애초에 진나라군을 장기전으로 끌어들이려는 염파의 계책이었고, 이후 실제로 우주방어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진나라군이 아무리 조나라군을 도발해도, 조나라 왕이 나가 싸우라고 갈궈도, 염파는 이들을 전부 가볍게 씹고 버텼다.

그러자 범수는 반간계를 써 염파를 모함해 실각시키고 젊고 경솔한 조괄을 조나라 대장으로 세우게 만들었다. 동시에 조나라 몰래 백기를 진나라 대장으로 임명했다. 내심 백기를 정적으로 취급했으나, 범수로서는 대국적인 차원에서 필승의 카드를 꺼낸 셈이었다.[14]

백기는 불리한 전황과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나라군을 도발하여 진지에서 끌어냈고, 진나라군을 후퇴시켜 도망치는 것처럼 꾸며 조나라군을 유인하는 한편 조나라군의 뒤쪽에 매복시켰던 별동대로 조나라군을 진지로부터 갈라놓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병력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었던 조나라군은 그 자리에 요새를 만들었는데, 백기는 이것도 포위하고 사마근 기병을 이용해 조나라군의 후방 보급도 끊어버린 채 말려죽이려고 했다. 결국 46일 동안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진 조군 40만 명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서 싸우다가 참패해 항복하며, 조괄은 이 과정에서 전사하니 이것이 바로 전국시대의 향방을 결정지은 장평대전이다.

전후 백기는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년병 240명을 제외한[15] "모든 적병을 구덩이에 파묻고 전후로 포로 45만 명을 참수했다."(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 이러한 대학살의 이유는, 그 많은 포로를 수용할 여력도 감시할 여력도 없으므로 진나라에 데려갈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풀어주자니 다시 무기를 들고 진나라에 맞서 싸울 것이 뻔하므로 그럴 수도 없었던 데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진나라의 군공수작제에 따르면 죽인 적의 머리를 갖고 가야 신분 상승이 되는데, 잡은 포로들을 풀어주는 순간 진나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전부 죽였다는 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기의 포로 학살은 흔히들 생각하는 피에 굶주린 학살자들과 달리,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저지른 전략적인 학살로 볼 수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그것이 포로 45만 명을 학살한 사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상 흔치 않은 수준의 인류에 대한 범죄를 옹호하는 정당한 논리가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나치 독일이 어떤 논리와 근거를 들고 와도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일단 위에 기록된 추측을 떠나,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백기는 이러한 이유를 들어 학살을 저질렀다고 한다.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 땅을 점령했을 때, 상당의 백성은 진나라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에 의탁했다. 조나라 병사는 줏대가 없어 언행을 이랬다저랬다 한다.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난을 일으킬까 두렵다."(前 秦已拔上黨 上黨民 不樂爲 秦而歸趙. 趙卒反覆 非盡殺之. 恐爲亂)
사기》, < 열전>, - 백기-

2.3.1. 포로 학살은 진나라에 이득이 되었는가?

고대 ~ 중세 시기에는 포로 학살이 빈번한 것이었고, 백기의 입장에서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당나라에서 배향한 명장 75인에도 당당히 뽑혔으니, 고대 ~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백기의 학살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고대 ~ 중세에도 장평대전의 학살은 계속해서 비판받아왔다. 삼국지》로 유명한 하안도《백기론》이라는 저서에서 백기의 학살을 대놓고 깔 정도였는데, 논지는 "이렇게 학살을 하면 대체 누가 항복을 하냐?"라는 것이었다. 또한 진나라는 호랑지국(虎狼之國)[16]이라 불리며 강대국인 것은 둘째치고 다른 국가들에게 힘만 센 오랑캐 취급을 받았는데,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자국민을 법가 사상으로 가혹하게 통치하는 것과 더불어 장평대전과 같은 잔혹한 전쟁 때문이었다.

여기에 눈여겨볼 점은 호왈백만으로 불린 숫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무려 45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백기의 뜻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진왕이었던 소양왕이나 재상인 범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벌인 학살인데, 학살에 대해서는 왕과 범수도 문책하지 않았으며[17] 사서에서는 "진나라 사람들이 백기는 죄가 없었다고 여기며 제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진나라 사람들은 백기의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당대 진나라 지도부와 사람들의 마인드는 전선 지휘관이 포로 수십만 명을 학살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큰데, 이런 진나라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학살들이 단기적으로 진나라에게 이득을 가져왔을지언정, 훗날 있을 초한쟁패기 신안대학살의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신안에서의 대학살도 결국 대상만 달랐지, 결국 대학살이라는 점에서 당대나 현재나 욕을 먹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진나라가 해왔던 학살이 항우의 증오심을 키웠다는 것이며, 또한 초나라군에서 이러한 학살에 반발한 자들이 극히 적었고, 지시를 군말없이 따랐다는 것을 보면 항우가 유독 잔인한 학살자이긴 하나, 그러한 학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에게 당한만큼 갚아주자!!!"는 심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항우의 측근 중에서 머리가 잘 돌아갔다는 평을 듣는 범증도 신안대학살과 그 이후 함양에서의 학살을 제지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항우를 따르던 자들 대부분은 진나라에 대한 증오심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19]

장평대전과 같은 전쟁들이 과연 전국칠웅의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그리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도 타국의 국민들을 어떻게 보았을지, 이것을 생각한다면 진나라가 통일을 하고 나서도 빠르게 멸망한 이유를 이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진나라는 포로 학살을 통하여 단기적인 이득은 볼 수 있었으나, 장기적으로는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4. 몰락

장평대전 이후로 백기는 몰락하게 된다. 장평대전 직후 백기는 바로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자고 주장했지만 범수는 정적인 백기[20]가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 되어 장차 있게 될 정치적 보복을 염려했고, 결국 조나라의 세객인 소대[21]의 설득에 넘어가 백기가 공을 쌓지 못하도록 소양왕을 설득해 몇 개월 후 한단을 공격할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의 상황은 《사기》 <백기왕전 열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한나라와 조나라가 두려워하며 소대(蘇代)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진나라의 재상인 응후 범수를 달래게 했다. "무안군이 마복군의 아들을 잡았습니까?"(韓·趙恐 使'蘇代' 厚幣 說 秦相 應侯 曰 "武安君 禽 馬服子乎?")
응후 범수가 말했다. "그렇소."(曰 "然.")
또 소대가 말했다. "바로 한단을 포위할 것입니까?"(又 曰:"卽 圍邯鄲乎?")
응후 범수가 말했다. "그렇소."(曰 "然.")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이 될 것입니다. 무안군이 진나라를 위해 싸워서 이기고 일흔 남짓 재를 쳐서 뺐었고, 남쪽으로 언·영·한중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조괄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으니, 비록 주공단· 소공석· 태공망의 공적도 이것 만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조나라가 망하고 진왕이 천하의 왕이 되면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그대는 그보다 낮은 자리를 참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찍이 한나라를 공격해 형구(邢丘) 땅을 포위하고 상당 땅을 곤궁하게 했을 때, 상당 땅의 백성들은 모두 조나라로 갔으니 천하가 진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싫어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 땅은 연나라로 들어가고, 동쪽 땅은 제나라로 들어가며, 남쪽 땅은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그대가 얻을 백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쪽이 낫습니다."[22]("趙亡 則 秦王 王矣 武安君 爲三公. 武安君 所爲 秦 戰勝攻 取者 七十餘城, 南定鄢·郢·漢中, 北禽趙括之軍, 雖 周·召·呂望之功 不益於此矣. 今 趙亡, 秦王 王, 則 武安君 必爲三公, 君 能爲之下乎? 雖 無欲爲之下 固不得已矣. 秦 嘗攻韓 圍邢丘 困上黨 上黨之民 皆反爲趙 天下 不樂 爲秦民之日久矣. 今 亡趙, 北地入燕 東地入齊 南地入韓·魏, 則 君之所得 民亡幾何人. 故 不如因而割之, 無以爲 武安君功也.")
이에 응후 범수가 소양왕에게 말했다. "진나라 병사는 지쳤으니, 한나라·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화친을 맺어 우선 병사들을 쉬게 하십시오."(於是 應侯 言 於秦王 曰 "秦兵勞 請許 韓·趙之割地以和 且休士卒.")
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원옹(垣雍)과 조나라의 성 6개를 나누어 받고 화친했다.(王聽之 割 韓垣雍 ·趙六城 以和.)
정월, 병사를 모두 불러들였다. 무안군이 이를 듣고 이 일 때문에 응후 범수와 사이가 나빠졌다.(正月, 皆罷兵. 武安君聞之 由是 與應侯 有隙.)

범수의 모함 이후 한단 공성전이 실패로 끝나자, 소양왕은 다시 백기에게 지휘를 맡기려고 했으나 백기는 계속 병을 핑계로 전쟁에 나가질 않았다. 이 와중에 백기는
"진나라가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
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분노한 소양왕은 그를 귀양보내고 자결을 명령했다.
진소양왕 50년 ( 기원전 257년 11월)
秦昭王與應侯群臣議曰:
진소양왕이 응후 범수 및 여러 신하와 의논했다.
"白起之遷,其意尚怏怏不服,有餘言."
"백기가 유배를 가면서 오히려 불만을 품고 복종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秦王乃使使者賜之劍,自裁。
진소양왕이 사자를 보내 검을 주면서 자결하라고 했다.
武安君引劍將自剄,曰:
무안군이 검을 받아들고 스스로 목을 베려다가 말했다.
"我何罪于天而至此哉?"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良久,曰: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我固當死。長平之戰,趙卒降者數十萬人,我詐而盡阬之,是足以死."
"나는 죽어 마땅하구나. 장평 땅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내가 속이고,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야 한다."
遂自殺。
마침내 자결했다.
武安君之死也,以秦昭王五十年十一月。
무안군이 죽으니 진소양왕 50년 11월의 일이다.
死而非其罪,秦人憐之,鄉邑皆祭祀焉。
백기가 죽었으나 죄가 없었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사기》 <백기왕전 열전>

결국 백기는 진나라의 전쟁 영웅이자, 중국사를 넘어 세계사에 길이 남을 학살자로 남았다.

이 유언이 진심이든 아니든 이는 훗날 환관 조고에게 살해되는 몽염
"내가 이렇게 비명횡사하는 건 만리장성을 지으며 지맥을 많이 끊었기 때문이다."
는 유언과 항우
"내가 이 꼴이 된 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는 유언[23]과 비교돼, "그래도 자기 잘못은 뉘우치고 죽었다."고 그나마 나은 평가를 받고 있다.[24][25]

3. 사후

진나라 백성들에게는 전쟁 영웅이라서 그런지 민중들은 그의 죽음을 동정하여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진나라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가 외국인들을 많이 죽이든 말든 알 바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때 어느 가 벼락에 맞아 죽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소에 '백기'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기가 사람을 많이 죽인 죄로 소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벼락을 맞아 다시 죽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당시의 상당 지역은 오늘날의 산서 성 고평(高平) 일대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에는 '바이치러우'라는 음식이 있다. 물론 백기의 고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두부 요리인데, 이 바이치러우를 한자로 쓰면 白起肉. 즉, 백기의 고기라는 의미이다. 허연 두부를 백기의 뇌수를 상징한다고 생각하며 삶아 먹어 장평의 학살에 복수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백기는 옛 조나라 땅의 민중들에게 잔혹한 학살자이자 원수로 수천 년 동안 기억되어 온 듯하다. 고기처럼 네모지게 잘라 이것을 구운 뒤 다시 삶아 먹는 식의 요리로, 현지에서는 노점에서 제법 흔한 모양이며, 이름에 얽힌 피비린내나는 역사도 유명하다.[26]

백기의 전공은 중국사 최고의 명장들 중 한 명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지만, 민심을 헤아리지 않고 과도한 대학살을 빈번히 자행해서 백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위인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고 대학살자, 잘 쳐줘도 전쟁병기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백기가 죽은 뒤 50여 년 후에 진나라는 백기가 벌였던 일과 비슷한 참사를 당하는데, 진나라 병사 20만 명이 항복한 뒤 결국 신안(新安)에서 초나라의 무장인 항우에 의해 불시에 습격을 받아 태반이 죽고 살아 남은 자들도 모조리 생매장을 당한 신안대학살이 그것이다.

하지만, 장평대전에서 벌어진 학살에서 그 대상은 포로가 된 군인들만이었지만, 신안대학살은 전쟁포로 는 물론이고 수도 함양으로 쳐들어간 뒤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포함되며, 거기다가 여러 이유로 끌려온 외국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초나라 출신도 있었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 항우를 비판할 때 반드시 언급했을 정도였다.

4. 평가

그리고 초나라의 땅은 사방 수천 리에 무장한 병사가 100만 명에 이르는 큰 나라였으나 백기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와 싸워서 첫 번째에 언(鄢), 영(郢)을 함락시키고 이릉(夷陵)을 불살랐으며, 두 번째에는 촉(蜀)나라와 한중(漢中)을 합병했습니다. 또 한나라와 위나라를 넘어 강한 조나라를 쳐서 북방에서 마복군(馬服君)의 아들을 생매장시키고 40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모조리 장평성(長平城) 아래에서 죽이니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고 울부짖는 소리는 하늘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하여 진나라의 제업(帝業)을 위한 기초를 세웠습니다.
원래 초나라와 조나라는 천하의 강국으로 진나라의 원수였지만 이로부터 초나라와 조나라는 모두 굴복하고 감히 진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니 이는 백기의 위세 때문이었습니다. 백기는 몸소 70여 개의 성을 정복하는 공업을 이루었으나 끝내 왕의 명을 받고 두우(杜郵)에서 자살했습니다.
《사기》 < 범수 채택 열전>
진나라가 당대 중국의 국가들 중 최강이었으니 진나라의 통일은 시간문제였고, 백기는 거기에 묻어간 것일 거란 평도 있으나, 《사기》의 기록과 진나라인들의 백기에 대한 평가를 보면 백기는 의심의 여지 없이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명장들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상앙의 변법으로 인하여 진나라의 국력이 전국칠웅 중 최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기》<열전>에서 채택 범저에게 언급하기를 백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인 초나라"땅이 사방 수천 리나 되며 100만 명의 군사가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강대한 나라였다.[27] 그런 초나라에 백기는 원정군을 끌고가서 수도 영을 점령하고, 초나라 역대 왕들의 왕릉을 약탈했다. 다만 초나라는 오기의 일화로도 알 수 있듯이 너무나 강력한 귀족들의 권력과 역대 왕들의 실책 때문에 가진 국력을 온전히 쓰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또 다른 강국인 조나라 초나라 진나라를 치지 못 한 것도 백기 때문이었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백기는 6국을 상대로 73번 이상의 공성전을 치렀으나, 그동안 단 한 번도 패배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도 위나라 한나라 연합군을 이궐의 대전투에서 대패시키고, 위나라의 전 수도 안읍 함락,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초나라 수도를 점령, 조나라 군사들을 수공으로 수장, 한나라 군사들을 참수, 장평대전에서 조나라 군사 45만 명을 생매장하는 등 엄청난 전과를 거두고 무안군으로 책봉되는 영예를 누린 대단히 뛰어난 명장임은 분명하다. 이 와중에 대학살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당장 천자문에서도 함께 언급되는 염파 이목,[28] 왕전[29] 등의 뛰어난 명장들이 있으며, 기전파목과 별개로 춘추전국시대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꼽히는 악의, 전단, 사마양저 등과 손자병법을 쓴 손무, 오자병법을 쓴 오기 등이 있기 때문에 백기를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이라 쉽게 부르기는 어렵다.

또한, 시야를 중국사 전체로 넓힌다면, 뛰어난 일신의 무력과 지휘력으로 중국의 통일을 목전에 뒀던 항우나 천재적인 전략, 전술로 그 항우를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신, 더 후대에는 흉노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곽거병 위청, 후한 광무제, 유송 무제 유유, 진경지, 곽자의, 악비, 맹공, 홍무제, 서달 등 중국사에는 기라성 같은 명장들이 많아[30] 단순히 백기를 중국사 최고의 명장의 반열에 올리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5. 대중매체에서

5.1. 게임

파일:조온_백기.png
고대무장으로 등장. 병종은 전차계고 성우는 박상훈이다. 성능면에서 평가는 좋지 않은 편. 근엄하고 중후하게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하다가 갑자기 소름끼치게 웃으며 돌변하는 사이코패스 컨셉으로 녹음되었다.
2015년 게임 왕자영요에 탱커 영웅으로 등장한다. 흡혈이 있어서 탱킹 능력이 높다.

5.1.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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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14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통솔력 100을 위시로 뛰어난 전투력과 이에 반비례한 정치, 매력을 보유한 S급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그러니까 정치가 거의 곽사 수준으로, 매력이 거의 양의 수준으로 각각 처참한데, 이는 애꿎은 사람 45만 명을 생으로 학살했기 때문이다.

삼국지 10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100/무력 87/지력 70/정치 6/매력 42. 전체 무장을 통틀어서 한신과 함께 둘 뿐인 통솔력 100 보유자 이지만, 무력을 제외한 나머지 능력치에서의 차이가 너무 크고, 결정적으로 군사 특기가 없어서 효용은 많이 쳐진다. 그래도 통솔력이 워낙 중요한 삼국지 10이고, 고무를 제외한 모든 전투 특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훌륭한 무장.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00/무력 88/지력 70/정치력 3/매력 39에 특기가 투신인 전투형 무장이다. 병과 적성도 극병 A/창병, 노병, 기병은 S로 통솔력, 적성, 특기는 최상급. 대신 압도적인 통솔력과 무력 빼고 다른 능력치가 평범하거나 처지는데, 사실 지력 말고는 납득할 만한 수준이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00/무력 88/지력 70/정치력 14, 병종은 궁병, 전법은 강습이다.[31] 삼국지 12에서는 삼국지 11 때에 비해 전법이 최상급은 아니라서 약화됐다. 그래도 공격력만큼은 매우 좋다.

삼국지 13에서의 삼국지 12 때와 같다. 특기는 훈련 8, 순찰 5, 신속 9, 분전 8, 연전 8, 공성 9, 견수 7, 일기 3, 귀모 7에 전수특기는 위풍이다. 전법은 관우와 같은 군신. 병과적성 S를 하나라도 가진 무장이 매우 드문 이번 작에서 기병, 궁병, 창병 3개가 모두 S로 고대무장까지 통틀어서 유일하다.

삼국지 14에서 능력치는 통솔력 100/무력 90/지력 72/정치 12/매력 46 으로 11에 비해 최대치인 통솔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상향하였다. 개성으론 황금개성 투장 그외 개성으로 용장, 위풍, 일심 그리고 병사들을 많이 죽인 것을 반영해서 악명이라는 나쁜 개성을 부여 받았다. 전법으로 만인적, 돌격, 화시, 경파, 대갈, 투석으로 같은 황금개성과 전법을 보유한 장비에 비하면 사용하기 편한 S급 무장이다.

5.2. 만화

킹곤타의 달인전에서는 명실상부한 초반의 주인공 중 하나이자 최종보스 겸 작중 최강자 중 하나. 장평에서 도중 강판된 염파와의 우열은 알 수 없으나 직접적인 전투를 통한 일인의 무용을 과시한 횟수가 백기가 더 많다. 한 창 전성기인 나이도 있고. 상당한 미남자로 나오며 킹곤타가 작가의 말에서 작품 내 백기를 최고의 미남으로 설정하고 그렸다고 언급하고 있다.[32] 흰색 갑옷을 입거나 검은색 도포를 주로 입고 전투에 임한다. 장평에서의 대학살은 변덕+심통이 섞여서 발생한 백기의 독단적인 결정.

조괄을 죽일때도, 일부러 듣보잡 졸병에서 얼굴도 조금 못 생긴 병사를 골라 명령을 내린다. 병사들 가운데. 활도 좀 쏘는 병사를 찾아서 고른 건데 조괄을 쏴죽이면 금 100관이라는 거액(무게가 다르지만 거의 200~300킬로그램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다.)과 장교 특별진급이라는 포상을 내리겠지만, 실패할 경우 강제 노역만 하는 노역병으로 고생만 할 것이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 졸병은 성벽에 기대어 두근거리며 조괄을 기다리는데, 조괄이 선봉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화살 2방을 날려 쏴죽이는데 성공한다. 백기는 그 졸병에게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약속대로 포상을 내린다고 말해 졸병이 기뻐한다.

하지만, 결국 그도 역사대로 억지로 자결해야 했고 쓴웃음지으며 자결한다.
수색의 검 코어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기전파목(起翦頗牧) 최강의 명장'. 장평대전에서의 포로 학살이 모티브가 되어 백기가 사용하는 기술들은 살해, 또는 죽음과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거나 네크로맨서처럼 시체들을 다루는 것들이다.

5.2.1. 킹덤(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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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드라마

2015년 드라마 미월전 18화부터 등장한다. 늑대무리에서 발견된 야생아로서 양을 훔쳐 먹다가 잡혔고 선태후에게 소랑(小狼)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다. 선태후와 의남매를 맺지만 포로신분인 선태후가 반환되면서 헤어지게 된다.

44화에 오랜만에 등장하나 사회화가 덜 되어서 말이 서툴다. 선태후의 이부동생 위염과 무예를 겨루고 의형제가 된다. 소랑이라는 이름은 멋있지 않다는 위염의 의견 때문에 선태후는 소랑에게 백기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66화에 다시 등장하는데 의거국 왕의 호위무사를 맡고 있으며 병서를 많이 공부해 사자성어를 쓰기도 한다. 암투로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매는 선태후를 구출했다.

68화에서 의누나 선태후가 태후가 되어서 백기도 고귀한 신분이 되고 드디어 야만인의 복장이 아닌 진나라의 의복을 입는다.
중국 드라마 대진제국 2편 종횡에서 젊은 시절을 다뤘으며 훗날 양후가 되는 위염과 단짝으로 나오는 등 비중 있게 등장한다. 3편 굴기에는 주인공 소양왕 다음으로 선태후와 같이 드라마에서 제일 큰 주역으로서 장평대전 등 그의 최후까지 다룬다.
  • 드라마 대송전기지조광윤
백기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송태조는 무묘에서 백기와 손빈의 위패를 치우도록 명령했다. 대신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송태조는 백기는 포로 40만명을 생매장한 의롭지 못한 사람이라 무묘에 모시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5.4. 소설

김성한의 진시황제에서는 역사대로 잔혹한 명장으로 나오는데, 이후 한단 공방전이 참패로 돌아갈 때 급히 그를 파견하려 했으나 아프다고 거절하면서 이미 실패한 전투니 어서 전쟁을 접으라고 간하지만 소양왕은 씹는다. 작중에선 정말로 중병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왔으나 소양왕이 꾀병으로 의심한다. 백기가 위나라와 초나라가 한단을 구원하러 오자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한탄한 것을 두고 꾀병 부리며 왕을 기만한 죄로 졸병으로 강등하고 은밀로 귀양을 가게 된다. 완전히 패한 후 노한 소양왕이 조회를 열고 책임추궁을 위해 신하들을 족치자 신하들이 살기 위해 이게 왕릉과 왕홀을 죽여야 한다고 주청한다. 이에 소양왕은 장수가 그래서야 나라의 기강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고 조회를 폐하는데, 사실 그는 백기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소양왕이 백기가 어찌 하고 있는가를 묻자 아직도 아파서 누워있단 말에 귀양보낸지가 3개월 전인데 아직도 함양에 있냐면서 격노, 들것에 실어서 귀양을 보낸다. 근데 진나라 백성들이 이게 다 백기 말 안들어서 망한 것이라고 소양왕이 머리가 돈 것 같다고 원망하자 소양왕은 백기가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죽여야 한다고 조정을 선동하는데, 범저가 약삭 빠르게 죽여야 한다고 청하자 옛정 때문에 차마 그렇겐 못하겠다고 시치미를 뗀다. 그러자 간신들이 자결하라고 명령하면 된다고 꼬시자 묘안이라고 칼을 하사한다. 겨우 10리길을 간 백기를 하급장교가 따라잡아서 예전같으면 눈도 못 마주쳤을 말단 주제에 백기에게 꾀병 부리지 말고 호통을 치며 핍박하곤 자결하란 명을 전달한다. 백기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 생각해보다 장평에서 조나라 청년들을 40만이나 속여서 죽였으니 죽어도 싸다고 마지막 힘을 내어 자결한다. 백성들은 모두 슬퍼하며 몰래 백기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6국의 사람들은 진나라가 미쳐서 백기도 자기 손으로 죽인다고 기뻐서 날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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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담이 아닌 것이,《 사기》 <백기왕전 열전>에서 장평대전이 자세히 언급되기 전까지 그에 관한 내용은 사람 수만을 죽였네~ 성 수개를 공략했네~로 간략하게 도배되어 있다. [2] 천자문》에는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이라 하여 백기, 왕전, 염파, 이목을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네 명의 장수로 꼽은 바가 있다. [3] 성은 건(蹇), 이름은 병(丙), 자는 백을(白乙)인데, 자와 이름을 합쳐서 백을병이라고 부른다. [4]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초나라 왕족 출신인 백기가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하며 선조의 복수를 해낸 셈이다. 오자서의 유산이 진나라의 천하통일에까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이다. [5] 진(晉)나라의 영토였던 조(趙), 위(魏), 한(韓)을 말한다. [6] 이 무안군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전국시대에 총 3명인데, 백기를 제외한 나머지 2명은 이목 소진이다. [7] 수많은 문서가 남아있는 홀로코스트조차 학살의 규모에 대한 논의가 아직까지 이뤄지고 있으며, 그나마도 학자에 따라 크게 견해가 갈린다. [8] <열전>에서 세세하게 적어낼 정도면 당시 사람들 기준으로도 좀 심하다는 관념은 있었던 것 같다. 동시기에 살았었고, 전공면에서 백기와 비슷했던 염파 악의, 왕전의 열전을 보더라도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적어내지는 않았다. [9] 승패 여부나 전공은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이듬해 바로 승진하고, 출정한 걸 보면 군공을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10] 이십등작상 2등급 승진. [11] 전국책》에 따르면, 당시 백기의 진나라 군사는 적군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나, 위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불신하는 것을 이용하여 격파했다고 한다. [12] 고대 진나라 최고 등작. [13] 당시 초나라의 군세는 100만 명이었는데, 백기는 단 수 만 명의 병력만을 이끌었기 때문에 정면공격 대신 수공을 이용해 격파했다고 한다. 《수경주》에 따르면, 이 수공으로 인해 초나라에서는 작은 연못이 생겼는데 시체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14] 이때 백기와 염파가 교체된 순서는 불분명하다. 《사기》에서는 우선 염파가 경질되고 나서 백기가 부임했다고 전한다. [15] 이것도 순수하게 인도적인 의도가 아니라 조나라 본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참상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16] 호랑이와 이리의 나라라는 뜻으로, 포학한 강대국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최강국이었던 진(秦)나라를 지칭한 데서 유래되었다. [17] 심지어 당시 범수와 백기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범수가 백기를 학살로 비난했다는 말은 《사기》를 비롯하여 어느 저서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18] 항우의 멍청함을 상징하는 속담인 금의환향이 나온 일화마저 진나라인을 학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항우에게 한 조언이 아니다. 진나라인을 실컷 학살하고 나서 폐허가 된 함양을 버리고 떠나는 항우를 만류하면서 나온 고사다. [19] 물론 그렇다고 항우의 신안대학살이 당시에도 통쾌한 복수만으로 여겨진 것은 절대 아닌 것이, 유방을 비롯한 항우와 조금 거리를 둔 자들은 이 학살에 경악하여 항우를 극렬히 비판했다. 시간이 흘러 초한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그나마 복수의 대상이라 여겨진 진나라가 아닌 다른 국가의 포로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나서 항우는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적어도 항우의 곁에 있었던 측근들과 휘하의 초나라 병사들은 진나라인을 학살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진나라가 다른 나라에 엄청난 원한을 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통일 이후 진시황이 붕어하자 마자 벌떼처럼 군웅이 봉기하고, 강대하던 진나라가 빠르게 무너진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20] 범수는 백기의 은사로 진나라의 재상이었던 양후 위염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재상이 되었다. [21]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의 동생으로, 위키에 항목은 없으나 형 못지 않게 활약한 인물이다. 이 사람이 한 말이 그 유명한 어부지리이다. [22] 여기서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라는 말은 단순히 관직을 뜻하는 것이 아닌, 백기가 삼공이라 불리는 문공(주), 소공석, 태공망과 같은 급의 공을 세운다는 중의적 의미라 한다. 전국시대의 펀치라인이라고 보면 될 듯. [23] 사실 유언이라기보다는 마지막 해하 전투를 앞두고 부하들에게 한 말이다. 진짜 유언은 유방에게로 간 자기 부하 여마동에게 한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1,000금과 10,000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한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노라."였다. [24] 몽염은 "몽염의 죄는 진시황의 폭정을 간언하여 말리지 않은 거지 지맥 탓을 하며 잘못을 회피한다."고 사마천에게 마구 까였다. 항우는 일개 장군이 아닌 통치자로서 현대는 물론 고대에서조차 납득 못 할 대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다녔다는 점에 사마천이 "제 잘못도 모르고 하늘 탓을 하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했으며, 당대의 사학자들에게서도 정신승리 취급을 받는다. 물론 백성을 하늘로 본다면 정말 하늘이 망하게 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긴 하다. [25] 다만 몽염은 백기나 항우와 비교되긴 억울한 점도 있다. 분명 공을 세운 건 사실이고, 백기 만큼 대학살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항우는 가는 곳마다 학살을 저질렀고, 아무 죄 없는 민간인까지 적군 병사들 만큼이나 죽여댔다. 한편 백기의 장평 학살 역시 포로들을 생매장한 점에서 민간인 학살과 조금도 다를 바 없고 그 희생자도 항우의 신안 대학살보다 훨씬 많다는 점에서 항우에 비해선 전혀 나을 게 없다 [26] 공원국이 쓴 《춘추전국이야기》에는 백기를 먹는다는 뜻의 '츠바이치'(吃白起)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작 바이두 백과에는 바이치러우라는 이름으로만 등록되어 있고, 저런 이름은 한국 웹에서밖에 검색되지 않는다. 책의 정보도 상당부분 현지의 실제 요리 정보와 다르다. # # [27] 이 100만의 군사 운운하는 것은 말 그대로 호왈백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백기가 그만큼 대단한 활약을 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자. [28] 이목은 별다른 손실없이 흉노족 10만 기를 일방적으로 몰살시켰고, 망해가는 조나라를 붙잡은채 왕전과 같은 진나라의 명장들을 상대로 조나라를 지켰다. 결국 진나라는 매국노 간신인 곽개를 통해 이간질로 이목을 경질시키고 나서야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29]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의 주역이며, 진나라 다음 강대국인 초나라의 대군을 1년 여에 걸친 지구전으로 격파했다. [30] 정복왕조까지 포함할 경우 더 많은 명장들을 꼽을 수 있다. 북위의 기틀을 마련한 태무제, 요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금나라를 건국한 태조(금), 명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대제국 청의 기틀을 마련한 천명제등도 손꼽히는 명장이라 할 수 있다. 거기다 몽골제국의 전쟁 영웅들을 포함시키면 ...... [31] 40초간(지력에 따라 연장가능) 자신의 공격력(80), 기동력(50%)이 상승, 전 병과에 특수공격을 부여. [32] 사실 작가의 그림체 탓인지 전작인 창천항로 조조의 젊은 시절과 약간 닮았고, 나이가 들어 턱수염을 기른 후에는 창천항로 제갈량과도 은근히 비슷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