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0:36:46

오자서

당 추봉 후작
惠侯 | 혜후
<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북송 추봉 왕작
英烈忠淸王 | 영렬충청왕
파일:attachment/S0D20120926074846MT352428.jpg
시호 영렬충청왕(英烈忠淸王)
봉호 혜후(惠侯)
성씨 오(伍)
운(員)
자서(子胥)
부친 오사(伍奢)
생몰 ? ~ 기원전 485년

1. 개요2. 생애
2.1. 배경 및 전반기2.2. 복수2.3. 황혼
3. 후대의 평가4. 창작물에서5. 여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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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이름은 운(員)[1]이고 잘 알려진 자서는 인데, 이름보다 자가 훨씬 더 유명하다.[2]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라 자신의 가족을 죽인 초나라에 잔혹한 복수를 행했고, 자신을 받아준 데다가 복수를 도와준 오나라에겐 비록 배신당하고 버림받았어도 최후까지 충성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춘추시대의 영웅호걸이다.

역사에서도 길이 남을 복수를 제대로 성공시킨 복수귀이자 살아있는 무협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3] 게다가 그 파란만장한 일생 때문에 가히 고사성어 제조기 수준으로 여러 고사성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자서 자신에게 직접 유래한 것만 치면 동병상련, 굴묘편시, 일모도원, 부관참시, 도행역시, 심복지환(心腹之患)으로 6개,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나 그가 영향을 미친 와신상담을 포함하면 7개, 고사보다는 비유적 표현에 가깝기는 하나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오월동주[4]까지 합치면 무려 8개다. 중국 역사 전체를 봐도 한 인물에게 이 정도나 되는 고사가 엮인 경우는 초한전쟁 때의 항우 한신 외에는 없다시피 하다.

2. 생애

2.1. 배경 및 전반기

오자서의 가문은 대대로 초(楚)나라의 국왕을 측근의 위치에서 보필한 명문가로서 패자였던 초장왕의 용장이자 필 전투의 영웅인 오삼(伍參)를 배출했고, 오자서의 할아버지는 초영왕의 충신이자 명신으로서 춘추시대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떨치게 만든 오거(伍擧)였으며, 아버지 오사(伍奢) 역시 조정의 고관으로서 태자 웅건의 스승 겸 보좌 역인 태부 벼슬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성왕이 터를 닦고 목왕 장왕이 그 위에 쌓아올린 강대한 초나라의 패업도 공왕때의 언릉 전투 이후에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왕실의 내분은 일상사가 되었고, 어질고 총명한 왕으로 촉망받던 평왕[5] 역시 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간신을 가까이 하고 국정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왕실의 인척들은 속국들에게 가혹한 뇌물을 요구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등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또한 초나라가 내부로 썩어가는 와중 동쪽 해안 부족들의 국가 오(吳)나라 월(越)나라가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아 당시에도 강대국 소리를 듣던 진(秦)나라의 힘을 빌려 초나라를 안정시키려는 계획이 입안되었고, 그 계획에 따라 양국은 초나라의 태자 웅건과 진나라의 공주를 혼인시켜 동맹을 맺는 것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큰 사태가 터졌으니, 바로 며느리 될 진나라의 공주 맹영[6]이 굉장한 미인이라 시아버지인 평왕이 홀딱 반해버린 것이었다. 평왕의 측근이었던 비무기(費無忌)[7]는 오히려 왕을 부추겨 결국 왕이 며느리를 가로채게 만들었다. 대신 태자 건에게는 공주를 따라온 제나라 출신의 시녀를 공주라고 속여 어찌어찌 혼인을 시켜버렸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가정 면에서는 이미 충분한 파국이었으나 엮인 사람들이 왕과 왕자다 보니 파국은 당연히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평왕과 맹영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날 즈음 비무기는 늙은 평왕이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을 태자 건이 자신이 평왕을 꼬드긴 걸 알고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해[8] 평왕을 부추겨 태자와 그 후견인인 오사 및 명문가로 유명한 오씨 집안 자체를 뿌리 뽑고자 했다.

평왕은 처음엔 태자를 건들 생각은 없었으나 비무기의 지속된 간언에 넘어가[9] 건을 죽이고자 했고 이런 음모를 눈치챈 태자 건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일찍이 정나라로 도주했다.

상술했듯 숙청의 칼날은 자연스레 오씨 삼부자에게도 향했는데, 《춘추좌씨전》과 《사기》의 기록이 조금 다르다.
  • 《춘추좌씨전》: 해당 기록에 따르면 오사가 불린 시기는 태자 건이 아직 초나라를 벗어나기 전으로, 오사는 평왕이 비무기의 간언에 완전히 넘어간 걸 알았는지 자신들이 간다 해도 죽을 걸 알았으나 《사기》처럼 충심 탓인지 아니면 시간을 끌어주기 위해서인지 오자서에게 태자와 왕손을 보필해 초나라를 탈출하도록 시킨 뒤 장남인 오상(尙)과 둘이서 평왕의 부름에 답해 왕성으로 향했고 이내 처형당했다.
  • 《사기》[10]: 태자 건이 가솔들을 데리고 도주한 뒤 평왕은 오사를 인질로 잡고, 두 아들들에게 두 명이 희생하면 아버지를 살려주겠다는 교지를 보냈다. 당연히 이들 형제가 바보도 아니고 이게 거짓말이라는 건 바로 간파했으며 오자서는 형에게 이대로 가봤자 개죽음밖에 안 된다며 우리도 태자처럼 피신해 복수를 하자며 부르짖지만 형인 오상은 오자서에게 자신의 몫까지 복수를 맡기고[전문] 그대로 왕성으로 떠나 아버지와 같이 처형당한다.
전형적인 '고지식한 충신'이었던 오사는 아들들에게 딱히 복수를 바라지도 않았고, 처형당하기 직전까지도 일체의 두려움이나 억울함은 가지지 않았지만, 둘째 아들의 심리와 재능을 꿰뚫어 보고 충언인지 경고인지
오자서가 살아 도망쳤으니 초나라는 앞으로 큰 환란을 겪게 되리라
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당연히 평왕도 오자서를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오사 생전부터 문무겸비에 강직한 데다가 의지가 강한 인물로 소문난 오자서가 그저 도망치고 끝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의 복수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자객을 풀었지만, 오자서는 평왕이 보낸 추격을 죄다 떨쳐내고 그대로 인접국인 정나라로 향했다.

열국지》에 따르면 몇몇 자객들이 따라잡았으나 오자서가 죄다 로 쏴 죽여 버렸다는데, 그 상황에서 굳이 한 명을 살려 보내면서
"(평)왕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전해라"
고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어버리는 바람에 도피 행각이 더욱 고달파졌다고 한다. 다친 채로 돌아온 자객에게 이걸 전해 들은 평왕은 이젠 진짜로 오자서를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12] 그리고 정나라로 탈출한 태자 웅건을 만나 그의 부하가 되었다. 당시 정나라에는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자산이 있어서 강력한 외교 카드로 활용 가능한 초나라의 태자를 섭섭지 않게 대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불운하게도 오자서가 정나라에 입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산이 병사하고, 그 뒤 정나라는 내적으로 큰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이 혼란은 얼마 못 가 친 초평왕 세력의 집권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정공과 집권 세력은 태자 웅건의 일행을 계속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복수와 권력에 눈이 먼 태자는 이 와중에 정나라 공작위를 찬탈한 뒤 정나라 군대를 동원해 초나라를 쳐 왕위를 되찾는다[13]는 어이·상식·양심을 쓰리쿠션으로 날려먹는 계획을 세웠다. 오자서는 결사반대하며 이런 이유를 들었는데
1. "정나라는 힘이 약해 도저히 초나라를 칠 수 없습니다. 애초에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눈치나 보던 정나라입니다."
2. "무엇보다 떠돌이 거지 꼴인 태자를 받아주고 국빈으로서 후한 대우를 하며 은혜를 베푼 정공을 배신하는데 천하가 우리를 따르겠습니까? 정공을 차지한다고 해도 반감이 심해 결국 뒤엎어지는 일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나라를 차지한다는 헛된 생각을 버리십시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이유를 들어 막으려 했지만 태자 건은 기어코 이걸 묵살해 버렸다. 결국 이 계획을 첩보를 통해 들은[14] 정공은 제대로 분노해 그대로 태자 웅건과 그의 아내를 처형해 버렸다. 오자서는 한발 앞서 태자의 아들인 웅승을 데리고 도주한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초나라에 이어 정나라에서까지 지명 수배를 당해버렸다.

오자서는 무사히 도주하긴 했지만 그 앞날이 밝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가족의 복수는 물론이요, 자신이 맡게 된 태손 '승'도 훌륭히 키워야 할 의무를 짊어진 셈이었는데, 당장의 처지는 도망자 신세에, 급하게 나오느라 여비가 될만한 귀중품도 챙겨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오자서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15] 한창 위세를 떨치는 오(吳)나라에 의탁하기로 했다.

초나라로의 입국 자체는 마침 수비대장을 맡고 있었던 친우 신포서의 배려로 성공했으나 이후 무일푼으로 횡단하느라 때로는 사냥꾼으로, 때로는 구걸하는 거지로, 때로는 뱃사람으로 위장하며 근근이 하루하루 버텨가면서 가까스로 초·오 국경 지대에 도착했다. 그러나 한창 분쟁이 심한 오나라와의 국경 지대의 방비는 엄청 견고했기 때문에 오나라로 밀입국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이 최대의 고비를 기적적으로 넘긴 오자서는 마침내 그리도 바라던 오나라에 입국하는 데 성공한다. 오자서는 원체 기골이 커서 체형만으로도 들키기 쉬웠으며, 초나라에 입국할 때와 달리 주변에 도와줄 지인도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을 고심하느라 하룻밤 새 머리가 희게 세어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오자서 본인도 무예가 제법 있어서 추격자들을 어찌 상대할 숫자라면 홀로 모두 베어버렸지만 두 나라로부터 막대한 상금이 걸린 그를 노리려던 추격자도 워낙 많은데다가 태손 웅승을 돌봐야하는 점 때문에 무턱대고 싸울 수도 없었으므로 되도록이면 싸움을 피해야 했다.

탈출 과정을 다룬 대표적인 일화로는 자신이 추격대에게 쫓기던 와중 강 때문에 도주로가 가로막히자 결국 포기하려던 찰나, 어느 늙은 뱃사공이 배에 태워 강 너머로 보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자서는 이 뱃사공에게 은혜를 갚고자 자신의 보검을 넘겨주려 했으나, 이 뱃사공은
"지금 오자서란 사람을 잡으면 1,000금을 준다던데 그깟 보검이 뭐 대수냐."[16]
며 받기를 거부했고, 이름이라도 알고자 하는 오자서에게
"둘 중 하나가 잡히면 다른 한 명이 이름을 안 불 거라고 확신해? 그냥 모른 채로 가자"
며 쿨하게 떠났으며 오자서는 이런 그에게 무릎을 끓고 감사를 표한 뒤 본인도 길을 떠났다. 어느 한 야사에서는 위의 일화와 정반대로 구해준 뒤에도 오자서가 세 번을 그를 의심하며 질문하자 이에 빡친 뱃사공이 '죽음으로 믿음을 증명하면 되겠느냐'며 그대로 강에 뛰어들어 익사했고 이에 오자서가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오자서가 검을 끌러 보답을 하려 했다고 하여 이 일화를 기리기 위해 후대에 만든 해검정(解劍亭)이라는 정자가 지금도 남아있다.

《열국지》에서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의 묘사가 더 추가되었다. 오자서는 우연히 동고공이라는 노인의 도움을 얻게 되었다. 이때 동고공이 한 가지 묘책을 고안해 주었다. 동고공의 지인인 황보눌을 변장시켜서 관문의 병사들이 오자서로 오인하게 만들고 그 혼란을 틈타 빠져나가게 한 것이다.[17] 이로 인해 오자서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 오자서가 복수에 성공한 후 동고공에게 보답하기 위해 거처를 방문했으나, 이미 동고공은 어디론가 떠나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그리고 어부가 오자서를 살려 보냈다는 설화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먼 훗날 오자서가 오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헌공이 온 나라에 SOS를 발령했는데, 한 젊은 어부가 '내가 하는 걸 보라'며 나서더니 배 젓는 노 하나를 들고서 오자서의 도피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부르며 오나라 군영으로 혼자 들어갔다. 이 젊은 어부는 바로 사공의 아들이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섬찟한 오자서는 어부가 진 노가 옛날 그 사공이 쓰던 노임을 알아보고 "그때의 일이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터… 분하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군사를 물리겠다."며 정말로 진격을 중지했다. 정헌공은 이 어부를 대부로 모셨으니 사람들은 그를 '어대부'(漁大夫)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2.2. 복수

고생 끝에 오나라에 도착한 오자서는 나름대로 환대를 받았다. 초나라의 명문이었던 '오'씨 가문의 명성은 신흥 국가인 오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상태였고, 심지어 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도주한 뒤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음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나라는 이런 오자서를 환영했으나 오자서는 이 환영을 순수히 즐기지 않고 한동안은 태손 승을 보살피며 조용히 농사일을 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인내의 끝에 오자서 자신이 원하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다름이 아니고 우연이 겹친 끝에 오나라에서 왕위 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오나라의 선선선대 군주인 수몽의 재위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몽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으며 딱히 누구를 찬밥 취급 하진 않았으나, 재능이 뛰어난 넷째 '계찰'을 유독 총애해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기를 바랬고, 계찰의 세 형들도 권력욕이 약했는지 아니면 계찰을 그만큼 아끼고 인정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수몽의 뜻에 일심동체로 동의했다.

그러나 정작 계찰은 나이도 어리고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거절했고, 어쩔 수 없이 일단은 맏형인 제번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제번과 둘째인 여제, 셋째인 여매 모두 자신의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며 어떻게든 계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계찰은 제번, 여제, 여매까지 차례로 죽어버린 뒤에도[18] 끝끝내 왕이 되길 거절했고 결국 셋째인 여매의 아들 가 왕위를 승계했다.

수몽의 장남 제번의 아들이자 훗날 합려라 불리게 될 광은 당연히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이를 숨겼다. 그러나 오자서는 이런 광의 본심을 꿰뚫어 봤고, 야심가인 데다가 능력은 확실하나 입지가 불확실한 그를 지원하는 게 자신의 복수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여겨 그의 측근으로 들어가 그를 보좌하며 쿠데타를 성공시켰다.[19] 스스로 오나라의 왕위에 오른 광은 자신을 합려(闔閭)라 칭하게 되었고, 당연히 옹립의 최대 공신인 오자서를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최측근으로 삼았다.[20]

이리하여 화려하게 재상 자리에 취임한 오자서는 본격적으로 초나라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다. 오나라는 이민족의 나라라 할지언정 상당한 위세를 자랑하며 성장하던 유망주였고, 거기에 중원에서 이름이 높은 오자서까지 전면에 나서자 각국에서 인재들이 몰려왔다. 이 중에서 특히 유명한 두 명이 훗날 손자병법을 만들며 현재까지 최고의 군략가로 꼽히는 손무와 내정의 명인인 백비[21]였다. 오나라는 이런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급속도로 성장을 거듭해 수년 만에 초나라와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기원전 506년, 손무와 오자서가 함께 이끄는 오군이 주변 동맹국의 군대와 함께 초나라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들의 쾌속 진격 앞에 초군은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았고, 영윤 낭와와 사마 심윤술( 심제량의 아버지)이 이끄는 초군은 백거 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불과 3개월 만에 수도 코앞까지 오군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초나라의 수도는 초문왕 시대에 건설되어 난공불락으로 유명했던 영(郢)(삼국지에 나오는 강릉이다)이었으나 손무의 수공(水攻)에 허무하게 함락되어[22] 왕과 몇몇 대신들만이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그후 수도 영에 오군이 입성한 이후 대규모의 방화· 약탈· 강간이 이루어졌다.

매우 아이러니한 것은 손무는 《 손자병법》에서 민심을 얻는 것을 강조했으나, 정작 본인이 참전한 전쟁에서는 학살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살로 인해 초나라의 민심을 잃은 것 때문에 대초 전쟁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것은 그만큼 오자서의 집념이 손무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겠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묘사된 굴묘편시.
파일:굴묘편시.jpg
한편 이때 오자서의 일가를 몰살시킨 초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23] 평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오자서는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하지만 오자서는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았고, 영성을 함락시킨 뒤 평왕의 능을 찾아가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찾아낸 뒤 구리 채찍으로 수백 대[24]를 쳐 시체가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25] 겨우 매질을 그쳤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고사다. 가족을 잃은 지 16년 만에 이룬 복수였다.

이때 신포서는 산속에서 피난 중이었는데 오자서가 초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채찍질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 사람을 보내
"아무리 복수라지만 시체 훼손은 인간된 도리로서 차마 못 할 짓이 아니오!"
라고 호되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 말에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길이 멀어서( 일모도원),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했다( 도행역시)."
라고 답변했다. 즉,
'어차피 오나라의 국력만으로는 초나라를 그리 오래 점령하지 못하니까, 지금은 비록 잔혹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놓는다.'
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오(吳)나라도 안심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몰래 탈출한 초소왕을 대신해 공자 신은 일종의 분조를 이끌며 지방에서 게릴라를 조직하여 오나라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오기 시작했고, 오자서에게 실망한 신포서도 서방의 강대국이었던 진(秦)나라 사신으로 가 원군을 얻어냈다.[26] 본래 오자서는 함께 망명했던 왕손 승(王孫勝)을 초나라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은 초나라의 재상에 취임하여 초나라를 오나라의 속국으로서 재건하려 했으나, 초나라의 부귀에 맛을 들인 오왕 합려는 초나라의 본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시간을 질질 끌다 반격을 허용하게 되었고, 드디어 진(秦)·초 연합군과 오군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손무는 이에 오나라로 회군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백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같은 생각이었던 오왕 합려도 백비에게 10,000명의 군사를 주어 진·초 연합군을 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진나라의 명장 화련에게 된통 당하고 손무가 파견한 전의 장군의 구조로 귀환하게 되는데, 이러한 만만치 않은 대패의 결과로 합려의 동생이었던 부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 등 몇몇 장수들을 남겨 지키게 하고 부개의 모반을 평정하러 원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손무의 뛰어난 전술 및 전략으로 초나라를 대파하여 깨뜨렸지만, 연이어 쏟아지는 연승의 쾌진격과 그 단맛에 오왕 합려가 방심하고 손무의 진언을 어겨가며 과욕을 부리다가 일을 말아먹고 끝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탓에, 작금의 초나라를 멸망시켜 오나라에 복속 혹은 왕손 승을 이용한 괴뢰국으로 재편하여 오나라의 속국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오자서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은 대승이라, 오나라는 결국 본토로 철수하는 대신 초나라가 막대한 재물을 오나라에 매년 바치기로 한 조공의 약조와 왕손 승을 백공(白公)으로 세워 초나라에 맞아들이는 것으로 화의를 맺게 되었다.

오자서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이 왕손 웅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일설로는 산책하던 중에 초나라 왕실에 어떻게 복수할지를 골몰하다가 짚고 있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려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승은 초나라로 귀환한 뒤엔 나름 대우받으며 살았으나, 훗날 아버지인 태자 웅건의 복수를 위해 정나라를 치고자 했다. 그러나 초혜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초나라의 왕위를 빼앗아서라도 정나라를 쳐 복수를 완수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심제량에게 저지당하자 자살했다.[27]

2.3. 황혼

당초의 목표인 초나라를 완벽하게 복속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사실상 초나라 군대를 괴멸시켰고, 이를 통해 오나라는 중원 진출도 넘볼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했음을 천하 열국에 보여줬다. 이에 따라 오왕 합려의 자신감도 자연스럽게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런 자신감도 얼마 가지 못했다. 오나라와 초나라 양국이 싸우는 동안 묵묵히 성장하던 월(越)나라를 계속 눈여겨본 합려가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일으켜 월왕 구천을 정벌코자 친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월나라의 책략가였던 범려의 계략에 넘어가 대패하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오나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승하했다. 합려에겐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후계 문제가 불거졌고 오나라의 실세나 다름없었던 오자서가 합려의 차남[28] 부차를 지지함으로써 그대로 부차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부차는 재임한 직후부터 아버지 합려의 원한을 갚겠다며 국력을 키워 월나라에게 복수하고자 했고, 오자서도 같은 복수귀 동지끼리 통한게 있었는지 이번에는 부차의 친정을 막지 않고 오히려 자신까지 따라갔다. 만반의 준비를 한 데다가 방심도 하지 않는 오나라 군대는 지난번의 승리로 오만해진 월왕 구천의 군대를 가볍게 깨부수고 압승했으나 범려의 모략으로 구천이 부차 앞에 무릎을 꿇어가며 사정사정했고, 결국 부차는 월나라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였다.

강화의 결과로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왔지만, 온갖 아첨과 뇌물을 총동원하여[29] 오왕 부차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후 끝내는 월나라로 귀환, 오나라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다.[30]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이 종식된 뒤 당연하게도 오자서는 월나라의 견제를 집중적으로 받게 되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월나라를 뿌리 뽑아야 한다며 강경하게 주장하던 이 노신(老臣)을 남겨두었다가 혹시나 부차가 오자서의 말에 혹해버리면 그대로 월나라가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나라의 범려와 대부 문종은 당시 오나라의 조정에서 오자서 못지 않은 지위를 갖고 있었던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갖다 바쳐 조정 내에서 오자서의 영향력을 조금씩 갉아먹는 한편, 오자서를 어려워하던 오왕 부차와 오자서 사이를 이간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잇따른 승리로 교만해진 오왕 부차는, 중원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패자에 오르겠다는 헛된 야망을 품었고, 이를 반대하는 오자서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오자서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 꺼림직했던 부차는 제나라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협박장을 써서 오자서에게 들려보냈다. 제나라의 손으로 오자서를 죽이게 하고 이를 구실로 제나라를 침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제나라는 오히려 오자서를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는데 결국 이를 참지 못한 오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屬鏤)를 내려 자결을 명령했다.[31]

어쨌든 오자서는 그 자리에서 한바탕 간신 백비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내가 죽으면 (부차의 관짝을 짜도록) 무덤에 가래나무를 심고,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두 을 뽑아 동쪽 성문에 걸어두라"
는 한맺힌 유언을 남긴 다음 촉루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물론 이 유언을 전해듣고 부차는 대노하여 이런 불충한 자에게 무덤 같은 것은 필요없다며 그 시체를 가죽 부대에 넣은 채로 장강에 던져버려 찾지 못하도록 해 유언이 실행되지 못하는 바람에 저승에서도 결코 편히 쉴 수 없는 꼴로 만들었지만, 주민들은 오자서를 불쌍히 여겨 시신을 수습하고 그가 던져진 장강 근처에 사당을 지어 그를 위로해 주었다.

이후 월나라의 신하였던 범려는, 구천이 오나라 정벌에 성공한 이후 구천의 성격을 간파하여 문종 등의 공신들을 주살하기 전에 하야하여 제나라로 건너갔고, 숙적이었던 오자서의 비극적인 최후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오자서 사후 10년이 지나지도 않아 그의 유언대로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결국 제나라를 굴복시킨 부차가 패자로 인정받고자 회맹을 벌이던 와중 월나라가 오나라의 수도인 고소를 말 그대로 빈집털이해 버린 것이었다.[32] 부차는 이를 전해 들은 후, 급하게 군대를 이끌고 귀환해 월나라군에 맞섰지만 처참하게 패배한 뒤 포위당해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후 구천은 부차에게
"너도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나도 한 번 정돈 못 살려줄 것이 없다. 100호 정도의 장으로 봉한다."[33]
고 말했으나 오히려 부차는 이를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는 말만 남긴 채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뒤 자결했다. 여담이지만 오자서의 최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백비는 오나라가 멸망하자마자 월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간청했으나 오히려 구천에게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간신배'라는 이유로 공개 처형 당했다.[34]

이렇게 오자서는 죽었지만 그걸로 오자서와 초나라의 악연이 끝난게 아니었다. 오자서가 세운 백공 승은 소왕 다음인 혜왕 대에 반란을 일으켰다 죽었고 도왕 대의 재상인 오기는 왕이 죽자 자신을 시기하던 귀족들의 화살에 맞아 죽기 전 왕의 시신에 엎드려 죽었는데 그 이유인즉 오자서가 굴묘편시한 여파로 초나라에서는 왕은 설령 시신이라도 상해를 입히면 사형에 처하는 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오기는 이를 노리고 일부러 왕의 시신에 엎드려 함께 화살을 맞았고 오기의 의도대로 도왕의 시신에 해를 입힌 귀족들이 대거 처형된다.

여담이지만 먼 훗날 삼국시대 동오의 권신이었던 손침이 오자서의 사당을 훼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서는 자신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당한 셈이다. 그 후 손침은 경제 손휴에게 암살당했고, 손휴도 5년 뒤에 있다가 요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자서의 사당을 훼손한 손침이 속했던 오나라 역시도 오자서을 죽인 부차의 오나라와 한자까지 같은 국호를 사용했다.

오나라의 멸망 후 서시의 행적에 대한 가설 중, 서시가 오자서를 원래 사모했던 까닭에 임무를 마친 후 죄책감에 자결했다는 설이 있다.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서 이 설을 채용했다.[35]

3. 후대의 평가



유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복수를 위해 충(忠)을 버린 사람이다.'라는 혹평과 '폭군을 몰아내는 것은 충(忠)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다.'라는 호평이 상존한다. 사실 오자서가 과거부터 비판을 받은 이유는 왕을 들이받아서가 아니라 시체를 훼손한 것이 훨씬 컸다. 그러나 워낙 이룬 업적이 업적인 데다가 인생역정에 비장미가 넘치다 보니 후대에도 그 이름을 널리 전하고 있다. 또 유교라고 해서 왕에게 무조건 굴종하는 것을 '충'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 맹자》에도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易位'
(임금이 큰 잘못을 저지르면 간언을 하고, 반복해도 듣지 않으면 군주의 자리를 바꾼다.)
<만장 하>
라고 나와 있듯이 자격이 없는 왕은 왕이 아니라고 하며 오자서의 고사를 드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오자서가 신포서를 만났을 때 복수를 위한 집념을 절대 단념하지 않겠다고 한 표현인 '일모도원'(日暮途遠)[36]은 순리와 역리를 가리지 않는 의지 관철의 위험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굴욕을 참았다는 부분에서 나름 동질감 및 동경심을 느꼈는지 사마천이 유독 높게 평가한 인물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 사기》의 <열전>은 여러 인물이 엮여서 하나의 <열전>이 되지만 오자서의 경우 단독으로 <열전>을 편찬했으며 그 내용도 타 <열전>에 비하면 상당히 알차다.

사론에서도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
라고 높이 평가했다.[37] 후술했듯이 오자서가 유교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마냥 위인으로 떠받들기에는 뭣한 인물임에도 이 정도로 편애한 걸 보면 시대를 앞서나간 덕질 수준이다. 사상이나 저술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 아니라 직접 행동하는 인물상에 방랑, 성공, 몰락을 모두 겪어봤던 만큼 흥미로운 일화가 넘쳐나 《사기》의 <열전>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볼만한 대목이다.

이후에도 오자서에 대한 칭송은 이어져 사후 1,000년 후 송나라 시대에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장쑤성 쑤저우(소주: 蘇州)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사당인 오상사(伍相祠)가 있다.
파일:d3802615aa.jpg
오자서 사당 '오상사'

4. 창작물에서

  • 《오자서전》: 오자서의 일대기를 다룬 조선 시대의 국문 고전소설로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오자서실기》라고도 한다.
  • 소설 《 손자병법》(정비석 作)[38]
  • 《동주 열국지》: 후일담이 붙는다. 부차에 의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혼령으로 남아 고소성을 지키지만, 범려의 설득(우리는 모두 각자의 주군에게 충성하지만 당신은 혼령이고 나는 살아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이기는 법은 없다)으로 단념하고 저승으로 떠난다. 이후 구천이 백비를 죽이며 "이것은 오자서의 복수다"라고 한다.
  • 독보건곤》(용대운 作)
  • 웹툰 작가 금요정이 그린 《 복수귀, 오자서

5. 여담

  • 당나라의 시인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자기 자신의 조상의 기록이 담긴 <고공현령백부군사장>(故鞏縣令白府君事狀)에서는 백기의 선조를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의 왕족인 백공 승(白公勝)으로 보고 있다. 복수의 화신으로 유명한 오자서의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이 왕손 웅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산책하던 중에 초나라 왕실에 어떻게 복수할지 골몰하다가 짚고 있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리는 바람에 피를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이다. 웅승은 초혜왕이 불러들여 초나라로 귀환한 후, 공의 지위에 올라 '백공'(白公)으로 일컬어지며 나름 대우를 받으며 살았으나 훗날 아버지인 웅건의 복수를 위해 정나라를 치고자 했지만 혜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끝끝내 초나라의 왕위를 빼앗아서라도 정나라를 쳐 부친의 복수를 완수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심제량에 의하여 반란이 진압되면서 자살했다. 백공의 반란이 실패한 뒤에 백공의 자손들은 진나라로 망명했다. 이후 후손들은 백(白)을 씨로 삼았고, 진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백공 승은 초평왕의 태자였던 웅건의 아들이었므로 백거이의 기록이 맞다면 백기는 초평왕의 후손이 된다.
    이렇게 보면 오자서의 복수는 장장 몇백년을 흘러 그를 박해했던 열국들을 박살낸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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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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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員은 보통 '원'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람 이름으로 쓸 때는 雲과 동음으로 운으로 읽는다. [2] 중국사에서 명(名)보다 자(字)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인물들은 관이오(관중), 고숙(고장공), 항적(항우), 이촬(이목), 조운(조자룡), 제갈량(제갈공명), 나본(나관중), 장중정(장개석) 등 시대를 가리지 않고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런 경우 굳이 名으로 표기를 교정하기보다는 그냥 더 널리 알려진 字를 그대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북조시대의 저작인 《 천자문》에서도 기전파목 중 이목 혼자만 名이 아닌 字로 적혀있는 것을 보면 중국이라고 딱히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삼국시대의 유명한 장수인 여포, 장비, 관우, 장료들을 포함해 장수/책사 등을 안가리고 이름이랑 자 둘 다 기억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과 비교하면 신기한 케이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名과 字 양쪽이 모두 유명한 삼국시대 인물들이 특이한 케이스고, 보통은 한쪽만 유명하다. 예를 들어 모택동 등소평이라고 하면 누군지 다 알지만 모윤지 등희현이라고 하면 그게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3] 실제로 그가 오나라까지 도주하는 과정을 읽다 보면 야사가 아니냐는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엄연한 정사다. 동시대에 편찬된 《춘추좌씨전》은 물론이요 여러 사료를 대조해 작성되었을 《사기》에도 엄연히 기록된 부분이다. [4] 게다가 이 말을 남긴 손무는 오자서와도 친분이 있었다. [5] 쿠데타를 일으켜 영왕을 시해하고 즉위했으나, 즉위 이후 백성들을 편안히 쉬게 하고 관리들에게 공정하게 상과 벌을 내렸으며, 국경의 방비도 튼튼히 했다. [6] 孟嬴, 백영(伯嬴)이라고도 함 [7] 《사기》 <오자서 열전>기준이며,《 춘추좌씨전》에는 비무극(費無極)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자서의 아버지인 오사 다음가는 태자의 스승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상의 자리였고, 태자를 직접 가르칠 권한은 없었다. [8] 태자 건이 이에 대해 앙심을 품었는지는 미지수이나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대신 결혼한 그 시녀와 금슬은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물론 아니꼬워할 순 있지만 좋은 인연을 만난 입장에서 지나치게 적대했을 거라 보긴 힘들었으니, 비무기는 도둑이 제 발 저린 나머지 오버한 것이다. [9] 《춘추좌씨전》에는 비무기가 평왕에게 건의하여 태자 건과 오사를 성보에 보내어 초나라의 북방을 방비하도록 해서 건과 오사가 성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주변국들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비무기가 모함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0] 제66권(<오자서 열전> 제6권) [전문] 我知往終不能全父, 然恨父召我以求生而不往, 後不能雪恥, 終爲天下笑耳. 可去矣, 汝能報殺父之讎, 我將歸死. 해석하면 이미 아버지가 붙잡힌 시점에서 아무도 가지 않으면 자신들에게는 한이 될 것이며 대외적으로는 불효로 남을 것이고, 둘 다 가버리면 이 치욕을 씻을 수 없으므로, 자신이 한을 풀고자 아버지에게 향할 테니 오자서에겐 치욕을 씻을 복수를 맡긴 것이다. [12] 1990년대 중순쯤에 한국에서 정발된 바 있던 전국시대를 다룬 대만 역사 만화 1권짜리에서도 오자서에 대하여 그렸는데, 여기서도 이게 나온다. 자객들을 다 죽이고 하나만 부상 입힌 채로 살려 보낸다. 다친 채로 일어선 그 자객이 "네놈, 정신이 멀쩡한 거냐? 한나라의 군주를 상대로 곧 죽인다고 협박한다고?"라고 외치자 길을 가던 오자서가 쓱 뒤돌아보며 "나는 반드시 해낼 것이니 이 말도 전하거라."라고 말한다. 이 자객에게 보고를 들은 평왕은 덜덜 떨며 "그놈은 분명히 해낼 거다.... 다른 나라를 선동하여 쳐들어와 과인을 반드시 죽일 거다!"라고 하면서 놈의 목에 금 100관(약 330Kg)과 넓은 영지와 높은 벼슬을 내리겠다라고 명령한다. 그리하여 오자서는 이 상금을 노리는 현상금 사냥꾼들에게도 쫓기게 되었다. [13] 정확히는 정나라의 백작위에 오른 다음 그 군사력으로 초나라를 치겠다는 것이었다. 《 열국지》에 따르면 진나라가 상술한 계획대로 태자가 움직여 준다면 같이 호응해 주겠다는 약조를 했다는 언급이 있지만, 다른 사료에서는 언급되지 않아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도 진나라가 후원하겠더고 약조하지만, 실상은 지금 정공보단 태자 웅건을 써서 진나라 졸개로 만들어 정나라를 꼭두각시 나라로 만들려던 속셈이었다고 나온다. [14]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태자 웅건의 노예가 몸이 아파 제대로 일하지 못했는데 태자가 구타하려고 하기에 달아났다가 이걸 들었던 걸 고했다고 나온다. 정공은 '거지 같은 놈을 환영하고 후하게 대우했더니 내 나라를 빼앗겠다고?'라며 격노했고, 여기서는 태자가 정나라 병사들에게 등짝에 칼이 박혀 끔살당했다. 마침 웅승을 데리고 피한 오자서는 이 현장을 보고 " 소탐대실!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착잡하게 말한다. 소설 오자서에선 정공이 첩보를 통해 알아내고 아무렇지 않게 웅건과 아내를 불러와 식사를 하는 듯 하더니만 갑자기 얼굴을 확 바꾸어 일갈한다. 은혜를 베풀었더니 배신하냐며 즉각 끌고가 참수해버린다. [15] 정나라는 초나라 북쪽( 정저우시)에 위치한 나라였고, 오나라는 초나라 남동쪽( 쑤저우시)에 위치한 나라였다. 한마디로 초나라를 통째로 가로질러야 했다. 사료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대충 지명 수배를 당한 와중에 의정부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걸어서 돌파해야 하는 셈이었다. [16]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정나라 장병들이 그 그 배에 혹시 덩치 큰 사내랑 어린 사내아이가 타지 않았느냐? 라며 뱃사공을 불렀지만 못 듣은 척하고 그냥 배를 몰고 지나갔다. 배에 탄 오자서는 그냥 '사공이 나이가 많아 귀가 먹어 못 들었구나'라고 마음놓았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지금 돈이 한푼도 없으나 이 칼이라도 팔면 100냥은 충분할테니 이거라도 받으시오."라고 오자서가 칼을 주지만 뱃사공은 "지랄!" 이라고 외치고 "그깟 보검이 탐났으면 영지랑 천금을 받았지."라고 뱃사공이 배를 몰며 돌아가면서 중얼거리는 걸로 각색됐다. 분위기상 뱃사공도 그가 오자서이고 세손을 데리고 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보내준 듯하다. [17] 이때 동고공이 황보눌을 데려오는 사이에 동고공의 집에서 기다리던 오자서는 동고공이 초나라 군사를 데리고 올까 봐 고심하다가 머리가 세었다고 저술한다. [18] 전쟁통이라 다들 그리 오래 재위하지 못했다. [19] 쿠데타의 자세한 내막은 어장 문서 참조. [20] 이 와중에 사실상 왕권 분쟁의 발단이 된 계찰은 내란이 터질 때 아무 진영도 편들지 않고 그대로 외국으로 튀었다가 내란이 끝난 뒤 귀국해, 합려의 즉위 합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죽은 폐왕 료의 무덤을 찾아가 곡을 하는 극도의 처세술을 발휘했다. [21] 오자서와 비슷한 처지로, 초나라의 중신인 백주리의 손자였으나 비무기의 참소로 조부를 포함한 일가가 몰살당하고 혼자 오나라로 도망쳐 왔다. 이때 관상을 볼 줄 알았던 피이라는 사람이 백비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으나 오자서는 동병상련을 내세워 듣지 않았다. [22] 정사가 아닌 소설《 열국지》의 내용이다. 영 근처를 흐르는 장강 한수는 너무 큰 강이라 수공을 가하기엔 난이도도 높고 시간도 많이 든다. [23] 연전연패로 초나라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영윤 낭와는 비무기를 역적으로 몰아 그 집안을 멸족시켰다. 이때 백성들이 좋아하면서 침을 뱉었다고 한다. [24] 《사기》 <오자서 열전>에는 300대로 기록되어 있다. [25] 십팔사략》에서는 평왕의 시체에 수은을 칠해서 그다지 썩지 않았기에 오자서는 더 기뻐하며 두 눈을 후벼 파고,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 [26] 이때 신포서는 진나라에 가서 구원군을 애원했다. 하지만, 진애공은 "그 나라는 자업자득이다. 평왕이란 자부터가 아들의 아내를 빼앗고 벌인 일이다.(애당초 평왕이 취한 며느리가 진애공이 각별히 아꼈다고 알려진 누이였다.... 늙은 평왕이 애공의 누이를 취한 것도 단단히 분노할 일이었는데 평왕은 이를 들키지 않겠다고 정비가 아닌 측실로 삼아 진나라 공실을 모욕하는 행위를 했다.) 망하던 말던, 괜히 내 나라 병사들 피를 흘리기 싫다."며 거부했다. 그러고는 다시 애원하던 신포서를 신하들을 시켜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럼에도 궁궐 문 앞에서 신포서는 1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청하니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하던 진애공도 신포서의 충심에 감격하여 "저런 충신이 있는 나라는 아직 망할 때가 아니다."라며 군사를 내주었다고 한다. 또한 초소왕은 바로 위에서 말했던 진애공의 누이 맹영과 초평왕 사이의 아들, 즉 외조카였던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27] 그러나 백공 웅승의 이야기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살아남은 웅승의 후손들은 서쪽의 진(秦)나라로 망명해 선조의 봉호를 따라 백(白)씨를 칭했는데, 200여 년 뒤 초나라의 수도인 영성을 정복한 진 소양왕 때의 명장 백기가 그 후손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이 내용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당나라 때의 명시인이었던 백거이였다.) 초나라를 향한 오자서의 복수심이 먼 훗날 진나라의 천하 통일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었다. [28] 부차가 차남이 맞는지는 역사서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장손이라거나 장남이라고 서술한 책도 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손이라는 주장은 부차와 합려의 생몰을 추정해 봤을 때 믿기 어렵다. 오히려 오강과 태자가 결혼한 뒤, 운우지락을 알지 못하는 나이에 태자비가 요절하고 태자가 오강을 그리워하다가 그 뒤를 따랐다는 이야기로 봤을 때, 부차가 차남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29] 이때 부차의 똥 맛을 보면서(!) 건강을 살펴주었고,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유명한 미녀인 서시를 바쳤다. [30] 여기서 구천이 패배의 굴욕을 되새기고자 곰 쓸개를 핥았다는 일화와 부차가 원한을 잊지 않고자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는 일화가 묶여 '와신상담'(臥薪嘗膽)이 탄생하게 되었다. [31] 여기에는 숨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타국인 제나라의 유력 가문이었던 포씨에게 오자서가 자신의 아들을 맡긴 것이 오나라에 알려진 게 컸다. 한마디로 '더 이상 자신을 지켜줄 나라도 가족도 없다(=가족은 죽을 것이며, 나라는 망할 것이다)'를 예측하고 아들을 맡겼던 상황이라 안 그래도 패자가 되겠다며 자만심에 찌들었던 부차가 더더욱 열이 뻗칠 만했다. 《사기》의 판본에는 정확한 일화가 소개되지 않았으나 오자서가 제나라의 명문가에 자신의 아들을 맡겼다는 말을 들은 백비가 부차에게 '선왕과 달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부차에게 앙심을 품고 배신하려고 한다'며 참소한 게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32] 심지어 이때 쓴 방법은 오나라가 초나라의 수도 영을 털었을 때와 거의 동일한 수공이었다. [33] 까놓고 말하면 너에게는 100호 정도가 딱 어울린다는 소리였다. 왕이었던 자에게 이런 소리는 능욕이나 다름없었다. [34] 다만 이는 《사기》 <열전> 기준이며, 그 이전의 역사서들은 백비가 여전히 등용되었다고 했다. [35] 이외에도 서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모살당했다는 설도 있고,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반대로 범려가 제나라로 튈 때 구천보다 선수를 쳐서 서시를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 [36]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37] 사마천 본인도 궁형을 당한 후에 치욕을 감내하며 동서고금을 통틀어 위대한 사서로 추앙받는 '《사기》'를 집필한 것을 미루어, 상당히 후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처럼 역경을 이겨내고 합려를 패자로 옹립했다는 데 의의를 두었을지도 모른다. [38] 제목은 《손자병법》이지만, 주인공 오자서와 손무 둘 중에서도 활극의 중심에 있는 오자서의 비중이 더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