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23:41:23

오왕 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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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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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吳)나라 23대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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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왕 료
吳王 僚
희(姬)
고발(姑發)
료(僚) / 주우(州于)
아버지 오왕 여매(吳王 餘昧)[1]
종형제 오왕 합려(吳王 闔閭, 闔廬)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15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26년 ~ 기원전 515년 (12년)

1. 개요2. 생애
2.1. 왕위 계승2.2. 왕위 계승 뒤의 행적2.3. 고발광에게 시해당하다2.4.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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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의 제23대 군주이자, 제5대 왕. 고발여매의 아들. 고발경기의 아버지. 고발광의 사촌 동생.[2] 아버지의 유언으로 그 뒤를 이었으나 사촌 형 고발광에게 살해당했다.

2. 생애

2.1. 왕위 계승

고발여매가 죽으면서 아버지 고발수몽의 유언대로 고발계찰을 세우려 했으나 고발계찰이 끝끝내 거절하면서 달아났다. 이에 고발여매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아들 고발주우를 왕으로 세웠고 '고발주우'는 자기 이름을 '고발료'로 개명하니 그가 오왕 료이다.

문제는 오왕의 계승위는 제번의 형제승계법 제정 이래 형제순으로 이어젔으므로 맏형 고발제번의 아들 고발광이 유력했으나 고발여매의 아들 고발료가 왕이 됨으로써 왕위 쟁탈전의 씨앗이 탄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2.2. 왕위 계승 뒤의 행적

오왕 료 2년(기원전 525년), 고발료는 공자 고발광에게 초(楚)나라를 치게했다. 그러나 패해 배[3]를 잃었다. 그러나 고발광이 꾀[4]를 써서 초나라 군대를 기습해 배를 되찾아 돌아왔다.[5]

오왕 료 5년(기원전 522년), 초나라에서 오운이 오나라로 망명했다. 그는 고발광에게 의탁하니 고발광은 오운을 상빈으로 대우했다. 그리고 고발광은 원래 자기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한다면서 유능한 선비를 맞아들이며 고발료를 처치하고 왕이 될 야심을 품었다.[6]

오왕 료 8년(기원전 519년), 고발료가 고발광과 함께 초나라를 쳤다. 이때 초나라는 7개국[7]이 연합한 대군이었지만 영윤 양개가 죽어서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고, 고발료가 고발광의 계책을 채택하여 초군을 크게 이기고 태자 웅건의 가족을 격(郹)에서 오나라로 옮겼다[8]. 그리고 진(陳)나라 채나라를 쳤다.

오왕 료 9년(기원전 518년), 초나라 비량읍의 처녀와 오나라의 변경 읍의 처녀가 뽕나무를 가지고 다투어 초나라가 오나라의 변경을 치니 고발료가 크게 노해 고발광을 보내 초나라를 치게 해 거소와 종리 땅을 빼앗았다.

2.3. 고발광에게 시해당하다

오왕 료 12년(기원전 515년), 초평왕이 죽었다. 이에 고발료는 공자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을 보내 유읍과 첨 땅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고발계찰을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고발광은 고발료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같은 해 4월 병자일 고발광은 고발료를 잔치에 초대했고 고발료가 참석한다. 고발광은 고발료와 같이 식사하는 도중 자기는 다리를 다친 척 하면서 숨고는 자객 전제(專諸)를 시켜 오왕 료에게 생선 구이 요리를 바치게 했다. 그리고 전제가 고발광에게 미리 지시받은대로 생선 구이 요리 뱃속에 있는 어장검을 꺼내 요리를 먹으려던 고발료를 척살했다.[9] 이 여파로 전제는 근위병들에게 죽었지만 고발광이 대기시켜놓은 군대로 공격하여 그 근위병들을 쓸어버리거나 항복을 받아내고 왕이 되고 이름을 '고발광'에서 '고발합려'로 개명하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다.

2.4. 사후

그 아들 고발경기(姑發慶忌)가 용맹하고 몸이 날랬다. 그래서 오왕이 된 고발합려가 그를 두려워해 오운이 추천한 요리를 시켜서 그를 척살하게 하여 고발경기가 사망하고 고발료의 무리는 사라지게 되었다.
[1] 달리 이매(夷昧)이라하기도 한다 [2] 보통 고발제번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고발여제의 아들로도 알려져 있다. [3] 오나라 선대왕들이 타던 배로서 그 이름은 여황(餘皇)이다. [4] 여황을 잃었으니 돌아가도 모두 죽은 목숨이라고 부하들의 전투의지를 고양시킨 후 야밤에 침투시킨 초나라 행색의 첩자를 이용하여 배의 3면에서 초나라의 수비병들을 유인하고 적은 수비병이 지키는 배를 탈취했다. [5] 이 일로 초나라에서는 공자 고발광을 주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6] 사실은 진작부터 품었지만, 이때 와서 확실하게 그 마음을 굳혔다고 보면 되겠다. [7] 초(楚), 돈(頓), 호(胡), 심(沈), 채(蔡), 진(陳), 허(許) [8] 초평왕의 태자 웅건의 생모가 오나라의 길잡이를 했다고 한다 [9] 칼로 찔러서 죽였으니 {刺殺}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