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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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BCDED,#0E0F37>전쟁 |
교전세력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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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세력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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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세시티 요새 전투 ,1754년 7월 4일, |
프랑스 식민지 군 | 영국 민병대 | ||||
머농거힐라 전투 ,1755년 7월 9일, |
프랑스 | 영국 | ||||
조지 호수 전투 ,1755년 9월 8일, |
영국 | 프랑스 | ||||
메노르카 해전 ,1756년 5월 20일, |
프랑스 | 영국 | ||||
로보지츠 전투 ,1756년 10월 1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캘커타 전투 ,1757년 2월 4일, |
영국 | 벵골 | ||||
라이헨베르크 전투 ,1757년 4월 21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프라하 전투 ,1757년 5월 6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콜린 전투 ,1757년 6월 18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
플라시 전투 ,1757년 6월 23일, |
영국-벵골국 | 프랑스 | ||||
하스텐베크 전투 ,1757년 7월 26일, |
프랑스 | 영국- 프로이센 | ||||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 ,1757년 8월 30일, |
러시아 | 프로이센 | ||||
모이 전투 ,1757년 9월 30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
카프-프랑수아 해전 ,1757년 10월 21일, |
프랑스 (무승부) | 영국 (무승부) | ||||
로스바흐 전투 ,1757년 11월 5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브레슬라우 전투 ,1757년 11월 22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
로이텐 전투 ,1757년 12월 5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쿠달로르 해전 ,1758년 4월 29일, |
프랑스 | 영국 | ||||
루이스버그 전투 ,1758년 6월 8일, |
영국 | 프랑스 | ||||
크레펠트 전투 ,1758년 6월 23일, |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프랑스 | ||||
돔슈테트 공습 ,1758년 6월 30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
카리용 요새 전투 ,1758년 7월 8일, |
프랑스 | 영국 | ||||
잔더스하우젠 전투 ,1758년 7월 23일, |
프랑스 | 헤센 | ||||
네가파탐 해전 ,1758년 8월 3일, |
영국 | 프랑스 | ||||
미어 전투 ,1758년 8월 5일, |
프랑스 |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
조른도르프 전투 ,1758년 8월 25일, |
프로이센 (무승부) | 러시아 (무승부) | ||||
생 카스 전투 ,1758년 9월 11일, |
프랑스 | 영국 | ||||
토르노프 전투 ,1758년 9월 26일, |
프로이센 | 스웨덴 | ||||
페흐벨린 전투 ,1758년 9월 28일, |
스웨덴 | 프로이센 | ||||
1차 루텐베르크 전투 ,1758년 10월 10일, |
프랑스 | 영국-하노버 | ||||
호크키르히 전투 ,1758년 10월 14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
구스토우 전투 ,1758년 11월 18일, |
프로이센 | 스웨덴 | ||||
베르겐 전투 ,1759년 4월 13일, |
프랑스 |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
카이 전투 ,1759년 7월 23일, |
러시아 | 프로이센 | ||||
보포르 전투 ,1759년 7월 31일, |
프랑스 | 영국 | ||||
민덴 전투 ,1759년 8월 1일, |
프로이센-하노버 | 프랑스-작센 | ||||
쿠너스도르프 전투 ,1759년 8월 12일, |
오스트리아- 러시아 | 프로이센 | ||||
라구스 해전 ,1759년 8월 18일, |
영국 | 프랑스 | ||||
조라우 전투 ,1759년 9월 2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지나 전투 ,1759년 9월 8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프리셰스 하프 해전 ,1759년 9월 10일, |
스웨덴 | 프로이센 | ||||
퐁디셰리 해전 ,1759년 9월 10일, |
영국 | 프랑스 | ||||
아브라함 평원 전투 ,1759년 9월 13일, |
영국 | 프랑스 | ||||
코르비츠 전투 ,1759년 9월 21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호이어스베르다 전투 ,1759년 9월 25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막센 전투 ,1759년 11월 20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
키브롱 만 해전 ,1759년 11월 20일, |
프로이센 | 스웨덴 | ||||
풀다 전투 ,1759년 11월 30일, |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뷔르템베르크 | ||||
마이센 전투 ,1759년 12월 3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
완디와슈 전투 ,1760년 1월 22일, |
영국 | 프랑스 | ||||
생트푸아 전투 ,1760년 4월 28일, |
영국 | 프랑스 | ||||
란트슈트 전투 ,1760년 6월 23일,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
코르바흐 전투 ,1760년 7월 10일, |
프랑스 |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
엠스도르프 전투 ,1760년 7월 16일, |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프랑스 | ||||
바르부르크 전투 ,1760년 7월 31일, |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프랑스 | ||||
리그니츠 전투 ,1760년 8월 15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스트레일라 전투 ,1760년 8월 20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클로스터 캄펜 전투 ,1760년 10월 16일, |
프랑스 | 영국- 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
토르가우 전투 ,1760년 11월 3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랑엔잘차 전투 ,1761년 2월 15일, |
프로이센-하노버 | 프랑스-작센 | ||||
그륀베르크 전투 ,1761년 3월 21일, |
프랑스 | 프로이센-하노버 | ||||
빌링하우젠 전투 ,1761년 7월 16일, |
영국- 프로이센-하노버 | 프랑스 | ||||
되벨른 전투 ,1762년 5월 12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빌헴스타흘 전투 ,1762년 6월 24일, |
영국- 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프랑스 | ||||
부르케르스도르프 전투 ,1762년 7월 21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2차 루텐베르크 전투 ,1762년 7월 23일, |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 프랑스-작센 | ||||
라이헨바흐 전투 ,1762년 8월 16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프라이베르크 전투 ,1762년 10월 29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colcolor=#fff> 토르가우 전투 Battle of Torgau Schlacht bei Torga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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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BCDED,#0E0F37> 시기 | 1760년 11월 3일 | |
장소 |
토르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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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rowcolor=black> 프로이센 (공세)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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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수세)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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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인물 |
지휘관 프리드리히 대왕 치텐 백작 |
지휘관 다운 백작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 |
병력 |
프로이센군: 48,500명 - 보병: 35,000명 - 기병: 13,500명 대포: 280문 |
오스트리아군: 51,900명 - 보병: 35,000명 - 기병: 16,900명 대포: 400문 |
피해 | 사상자: 16,600명 |
사상자: 15,200명 포로: 7,000명 대포: 49문 깃발: 31개 |
결과 |
프로이센의 승리 -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략적 목표 달성 - 프로이센군의 막대한 피해로 인한 전투의 어려움 |
|
영향 | 프로이센의 수세 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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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11월 3일 작센 선제후국의 토르가우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긴 했지만 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공세를 포기하고 수비에 전념한다.2. 배경
1760년 8월 15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을 침공한 오스트리아군과 리그니츠 전투를 치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대왕은 베를린을 잠시 점령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몰아낸 뒤 작센에 주둔하고 있는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고자 병사들을 이끌고 작센으로 진격했다. 11월 2일, 대왕은 토르가우에서 남쪽으로 약 11km 떨어진 실다우를 향해 진격하면서 병력을 추가로 모집했다. 이때 다운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그로즈비히와 진나 사이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다.프리드리히 대왕은 정찰대로부터 적의 진지 주변의 지형 정보를 전달받고는 남쪽 방면은 가파르고 늡지대가 많아 희생이 클 테니 상대적으로 완만한 북쪽으로부터 적을 공격하기로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병력을 둘로 나눴다. 41개 보병대대와 48개 기병대대는 돔미츠셔 하이데 방면으로 거의 18km를 시계 방향으로 돌아간 후 북쪽 방면에서 다운 백작의 진지를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21개 보병대대와 54개 기병대대는 치텐 백작 한스 요아힘의 지휘하에 남쪽에서 적의 퇴로를 막고 있다가 북쪽 방면에서 아군이 공격을 개시했을 때를 맞춰 수프티츠 고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11월 2일 오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치텐 백작에게 구두로 지시를 내렸다.
군대는 내일 6시 30분에 공세를 개시할 것이다. 우리의 좌익은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할 것이다. 따라서 장군은 상호 지원을 위해 제한된 공세를 가하라.전선 사이의 거리는 250걸음일 것이다. 적을 언덕에서 축출한 뒤 중포 진지를 배치하고 대대들을 집결하라. 가능한 한 많은 분대를 요구대로 전진시켜야 할 것이다.
한스 요아힘 폰 치텐 백작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폐하께서는 장교들의 솜씨에 자신이 있으시며 완전한 승리를이루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의심치 않으십니다.
이렇듯 장군들에게 작전 계획을 설명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음날인 11월 3일 오전 6시 30분경에 공세를 개시한다.
3. 전투 경과
3.1. 전초전
11월 3일 오전 6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보병 제1열을 출발시켰다. 그 뒤를 이어 뮐센 장군이 보병 제2열을 이끌고 갔다. 기병 제3열은 프린츠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홀슈타인-고토프 공작 프린츠 게오르크 루트비히의 지휘하에 그 뒤를 따랐다. 한편 치텐 백작이 이끄는 군대는 작전 대로 전장을 빙돌아가다가 전장 남쪽으로 진군했다. 이윽고 치텐 백작이 이끄는 군단은 오전 6시 30분 경에 크로이츠 초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반격에 나섰다. 라시 장군은 기병대를 급파하는 한편 보병 9개 대대를 남쪽 전선에 배치해 적의 공세를 저지하게 했다. 치텐 백작은 곧 적이 수트비치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다는 걸 눈치채고 원래 계획대로 수트비츠를 공격하지 않고 에일렌부르크-토르가우 방면 도로를 따라 공세를 가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공세 역시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보병 여단의 반격으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라시 장군은 남쪽 방면의 적이 그다지 공격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적의 주요 공세는 남쪽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적이 후퇴하는 걸 내버려두고 자신은 본대로 돌아가 적의 주요 공세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북쪽 방면의 방비를 강화하게 했다. 이후 치텐 장군은 오후 2시까지 숲을 빠져나온 병력을 재편성하고 적에게 포격을 가할 뿐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전 6시에 군대를 출발한 이래 6시간 동안 숲을 헤맸다. 그는 진로를 잘못 판단해 원래 계획해둔지점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는 실수를 범했다. 그렇게 헤매던 중 오스트리아군 정찰대가 그들을 목격하자마자 사격을 가했다. 프로이센군은 이에 응사해 대부분의 오스트리아군 정찰병들을 사살했지만, 다운 백작이 프로이센군의 주력군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는 걸 막지 못했다. 다운 백작은 즉시 리드 장군에게 위덴하인-그로즈비히 도로를 따라 아군의 좌익 측면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3.2. 대왕의 공격과 실패
오후 1시경, 프리드리히 대왕은 마침내 숲을 벗어나 스트라이바흐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먼저 제3열이 아직도 숲길을 헤매고 있어서 병력 배치에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은 사전에 적이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해두고 있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원래 계획은 오스트리아군의 위치가 진나의 동쪽이라는 가정에 기초했고, 진나 동쪽 지역은 넓고 평탄해 그의 기병대를 제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진나 동쪽이 아닌 서쪽까지 대규모 진지를 구축해두고 있었다. 이 진나 서쪽에는 뢰트리히라고 불리는 작은 연못과 여러 구릉이 있었으며 땅이 질퍽하고 깊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세를 펼치기에 부적절했다. 이러니 프리드리히 대왕으로서는 전술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오후 2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크로아츠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대포 소리를 듣고 치텐 백작이 이미 오스트리아군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고 잘못 판단했다. 또한 그는 오스트리아군 보급대가 엘베강 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자칫하면 다운 백작이 양면 공격으로 전멸하는 걸 회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 좌익으로 공격 축을 변경하여 보병 만으로 즉각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오후 2시 15분, 슈터하임 여단의 10개 대대가 에셜론의 숲에서 나와 겨우 800보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스트리아군 진영을 공격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군 포병대가 즉각 응사했고, 두 여단 지휘관들이 이 포격으로 인해 부상당했다. 첫번째 공세는 곧 좌절되었고, 슈터하임 여단은 거의 절반이 죽거나 부상당한 후 후퇴했다.
뒤이어 불로우 장군 휘하의 10개 대대가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했지만 적의 거센 반격에 직면했다. 이후에도 많은 프로이센 병사들이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적 진지로 돌진했지만, 그때마다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이 그들을 밀어냈다. 그 과정에서 최전방에서 군대를 직접 지휘하던 다운 백작이 다리에 총탄을 맞았고, 프리드리해 대왕은 근처에 떨어진 포탄의 충격으로 말에서 굴러 떨어졌지만 다치지 않았다. 전체적인 상황은 오스트리아군에게 매우 유리했고, 프로이센군은 패주하는 과정에서 5개의 깃발을 빼앗겼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때까지 치텐 백작의 공격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못했으며 치텐 백작에게서 어떤 메시지도 전달받지 못했다. 그는 그저 치텐 백작이 공세를 퍼붓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병사들이 현장에 도착하는 대로 전투에 투입시켰다. 그러다가 오후 4시경에 마침내 기병대가 도착하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들을 즉시 적의 측면에 투입시켰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 라이드 경기병대가 이들의 측면을 갑작스럽게 공격했고, 보병대 역시 수적으로 우세한 적의 맹렬한 역습으로 고전했다. 결국 프로이센군의 공세는 실패했고 불로우 장군을 비롯한 많은 장교와 부하들이 포로로 잡혔다.
오후 5시, 대왕은 모든 공세가 실패하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전군에 스트라이바흐로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만 그는 철수는 고려하지 않았고 전 부대에게 항상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밤새도록 무장하게 했다. 그는 여전히 오스트리아군이 큰 손실을 입은 것에 동요해 밤중에 그들의 위치를 포기하기를 바랐다. 한편, 다운 백작은 다리에 입은 총상으로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전투가 끝났으며 아군이 이겼다고 확신한 채 본진으로 가서 피로 가득찬 장화를 벗었다. 그는 지휘권을 상급 장교 오도넬에게 넘기고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아군이 승리했다는 보고서를 보냈다. 그러다가 라시 장군으로부터 치텐 백작이 남쪽으로부터 수프티츠를 공격했으나 아군의 저항으로 패퇴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운 백작은 전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걸 알게 되자 라시에게 본군 제2선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는 치텐 백작과의 전투는 조만간 종결될 거라고 확신했다.
3.3. 치텐 백작의 공세
한편, 치텐 백작은 오후 2시부터 적군에게 포격을 가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후 3시 30분경, 그는 자신의 군단을 슈퍼티츠 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가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낸 전령들에 의해 공세를 펼치기로 한 것인지, 치텐 혼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걸 감지하고 내린 결정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 공세 역시 오스트리아군의 맹렬한 반격에 직면했고 비록 슈퍼티츠 마을을 공략하긴 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오후 6시 30분, 오스트리아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던 뫼렌도르프 중령은 샤프테헨에서 슈퍼티츠까지의 능선이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이 정보를 자신의 여단 사령관인 살데른 장군에게 넘겨줬다. 이에 살데른 장군은 군대를 좌측으로 이동시켜 그 능선을 공략하기로 했다.이 회심의 일격은 성공했고 프로이센군은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포를 포획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은 더 많은 병력을 보내 그들을 밀어내려 했지만, 프로이센군은 탈취한 포를 적에게 마구 퍼부으며 결사 항전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고지를 되찾지 못하고 패퇴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점점 커지는 소음과 불타는 마을의 빛을 감지하고 스트라이바흐에 집결한 군대에게 다시 공세를 개시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탈진해버린 그들은 적을 밀어내지 못하고 패퇴했다. 한편 치텐 백작의 군대 역시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고전하느라 탈진해버려서 추가 공세를 감행하지 못했다.
오후 9시경,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혹독하게 추운 11월의 밤이 전장에 쓰러진 병사들을 덮쳐 많은 이들을 동사시켰고 많은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의 소지품들이 약탈당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더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자정이 지날 무렵 엘베 강을 도하해 본국으로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 라시 장군의 부대는 주력군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엘베 강의 좌측 강둑에 남아 있다가 드레스덴 방향으로 후퇴했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추격할 기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