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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요아힘 폰 치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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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Joachim von Zieten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의 삶

1. 개요

프로이센의 기병대 지휘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대표적인 부관으로서 맹활약한 명장이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치텐 백작은 1699년 지역의 융커인 요아힘 마티아스 폰 치텐과 일자베 카타리나 사이에서 7명의 자식 중 3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1715년, 치텐 백작은 슈벤디 장군의 보병 연대에 자원병으로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보병으로서 10년간 복무하는 동안 네 번이나 진급 요청을 했지만 키가 매우 작았기 때문에(160cm) 거인들로 구성된 근위대를 둘 정도로 키 큰 청년들을 중용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철저하게 외면받아서 번번히 좌절되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치텐 백작은 1724년 군직을 떠났다가 1726년 우테나우 장군의 프로이센 드래곤 연대 중위로서 군 경력을 재개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도발한 중대장과 다투다가 급기야 결투를 벌여 요새에 1년간 감금되었고, 풀려난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또다시 상관과 결투를 벌이는 바람에 결국 불명예 전역해야 했다.

1730년, 치텐 백작은 새로 결성된 베네켄도르프 후사르 연대에 가까스로 들어왔다. 그는 곧 기병으로서 재능을 보여줬고 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때 프랑스에 대항하는 라인 강 방면 전역에 참가해 오스트리아의 바로네 장군 휘하에서 대대장을 지냈다. 이후 1736년 1월 소령으로 진급한 치텐 백작은 1741년 프로이센군의 슐레지엔 침공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으로 출세 가도를 밟는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슐레지엔 침공 작전에 참가한 치텐은 중령으로 승진했고 5월 17일 몰비츠 전투에서 후사르 600명의 선두에 서서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바로네 장군의 기병대와 맞붙어 상당한 역량을 발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활약상을 눈여겨 보고 그에게 무공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치텐 백작은 7월 24일 새로운 후사르 연대[1]의 대령으로 부임했고 1742년 2월 모라비아를 향한 정찰을 지휘해 빈에서 4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해 상당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또한 치텐 백작은 제1차 슐레지엔 전쟁과 제2차 슐레지엔 전쟁 사이의 짧은 평화 기간 동안 후사르 연대를 철저하게 훈련시켜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기병대로 육성시켰다.

1744년 9월 24일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이 발발하자, 치텐 백작은 소장으로 진급한 뒤 게릴라 전술을 적극적으로 시행해 오스트리아군을 괴롭혔다. 1745년, 치텐 백작은 500명의 후사르 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부대로 위장한 채 상부 슐레지엔의 얀게른도르프 쪽으로 이동하는 오스트리아 드래곤 연대의 후미를 따라가며 적진을 순찰했다가 도중에 정체가 발각되자 즉시 탈출하여 얀게른도르프에 도착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3명의 전사자와 20명의 부상자, 그리고 2명의 실종자를 상실했으나 얀게른도르프에 주둔하고 있던 슈베트 후작은 치텐 백작이 가지고 온 정보를 토대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 본군과 연락을 취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를 적절하게 활용해 6월 4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치텐 백작은 제2차 슐레지엔 전쟁 말기에도 슈트리가우 전투와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기병대 재편성 임무를 맡아 프로이센 기병대가 유럽 최강의 기병대로서 명성을 날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2.3. 7년 전쟁

7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756년 8월 12일, 치텐 백작은 중장으로 진급했다. 1757년, 치텐 백작은 라이헨베르크 전투 프라하 전투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프로이센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는 좌익 기병대를 이끌었고, 아군이 이 전투에서 패배를 면치 못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부대만이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또한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도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 프로이센군의 대승을 이끌어냈다.

1758년 6월, 치텐 백작은 4,000대의 보급 마차를 호송해 올로모우츠 요새를 포위한 프로이센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돔슈테트 전투에서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에게 습격당해 4,000대의 호송 마차 중 불과 250대만 건지는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 하지만 1760년 8월 15일 리그니츠 전투에서 라우돈 남작의 오스트리아군 격파에 기여함으로서 복수에 성공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를 기병대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또한 1760년 11월 3일 토르가우 전투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본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고전해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려 있던 상황에서 별동대를 이끌고 고지 점령에 성공한 뒤 적에게 포격을 퍼부어 적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유도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공적을 세웠다.

2.4. 이후의 삶

1763년 7년 전쟁이 끝난 뒤, 치텐은 은퇴해 베를린에서 평온한 삶을 살았다. 1778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았으나 당시 그의 건강이 나빠서 이에 응하지 못했다. 그 후 말년을 조용하게 보내던 치텐 백작은 1786년 1월 26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향년 87세.
[1] 일명 치텐 후사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