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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디와슈 전투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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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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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1월 20일 인도 타밀 나두주의 완디 와슈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영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프랑스가 인도 진출을 포기하게 만들고 벵골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한다.

2. 배경

1760년 1월 인도 벵골 주 방면의 프랑스군을 지휘하고 있던 롤리 백작 토마 아르튀르는 본국으로부터의 해군 및 자금 지원이 끊겨버리는 바람에 갈수록 전력 유지가 힘들어지자 타밀 나두주의 완디와슈 요새를 공략함으로써 어떻게든 불리한 상황을 만회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롤리 백작은 1월 14일 군대를 이끌고 트리바토어를 떠나 완디와슈를 향해 행진했다. 한편 영국군 지휘관 에어 쿠테 중령은 같은날 저녁 프랑스군이 출격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1월 15일 완디와슈를 향해 직행로를 따라 행진했다.

롤리 백작은 영국군이 도착하기 전에 완디와슈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1월 15일 아침 그곳을 방어하는 소규모 영국군 분견대를 요새로 몰아놓고 포대를 설치했다. 1월 17일, 쿠테 중령이 이끄는 영국군이 완디와슈에서 북동쪽으로 24km 떨어진 아웃마로어에 도착했다. 쿠테 중령은 프랑스군이 요새를 공격할 준비가 될 때까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기로 하고 상황을 살펴봤다. 1월 20일 프랑스군 포대가 완디와슈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을 접한 쿠테 중령은 1월 21일 완디와슈에서 11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이후 1월 22일, 양측은 완디와슈 일대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사령관: 에어 쿠테 중령
  • 병력: 유럽인 1,980명, 세포이 용병 2,100명, 인도 기병대 1,250명, 대포 14문, 곡사포 1문

3.2. 프랑스군

  • 사령관: 롤리 백작 토마 아르튀르
  • 병력: 유럽인 1500명(보병 1,350명, 기병 150명), 프랑스 동인도회사 병사 1,300명, 마라타 기병대

4. 전투 경과

프랑스군 진영은 완디와슈 요새에서 동쪽으로약 3km 떨어진 지점에서 2개의 대열로 편성되었다. 그들의 좌측면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고 좌측 전선 앞에는 또다른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또한 마라타 기병대는 프랑스 포대 좌측에 배치되었다. 쿠테 중령은 1월 22일 오전 6시에 그의 군대에게 좌측으로 행진할 것을 지시했다. 인도 출신 기병대 200명을 제외한 모든 기병대와 세포이 5개 부대는 선두에 배치되었고 인도 출신 기병대 200명과 세포이 3개 부대는 후방에 있는 보급품들을 지켰다. 첫번째 대열은 5개의 세포이 부대와 제79 드레이퍼 보병대(우익), 윌리엄 고든 소령 휘하의 제84 쿠테 보병대(좌익), 그리고 로버트 고든 소령 휘하의 마드라스 유럽인 연대(중앙)으로 구성되었다. 영국군은 모자와 터번 위에 타마린드 나무의 녹색 가지를 고정시켜서 적과 구별되게 했다.

1월 22일 오전 6시, 쿠테 중령은 기병대와 함께 적진을 정찰하기 위해 전방으로 나아가면서 나머지 군대더러 따라오게 했다. 오전 7시경, 영국군 경기병대가 프랑스 기병대 선두 대열과 충돌했다. 두 기병대는 곧바로 서로에게 총격전을 벌였다. 쿠테 중령은 기병대 지휘관 바세롯 남작에게 그의 기병 분대를 전투 순서대로 편성하라고 명령했다. 바세롯 남작은 5개의 세포이 부대와 야전 대포 2문의 지원을 받았다. 뒤이어 쿠테 중령은 자신의 기병대 뒤를 따라오고 있던 2개 세포이 부대를 이끌고 진격했다. 이때 프랑스군 기병대가 평야로 몰려들어 이들을 저지하려 했으나 쿠테 중령은 이들을 격퇴했다. 이후 영국군 기병대가 전진하자, 프랑스군과 마타라 군대가 대열을 결성해 맞서 싸우려 했다.

적과 200미터 남직까지 이르자, 쿠테 중령은 그의 기병 분대를 좌측과 우측으로 돌렸다.이에 그의 기병 분대는 세포이 부대의 각 측면에 형성되었다. 프랑스군은 그런 적의 움직임을 보고 퇴각 준비를 하려 한다고 오인하고 섣불리 앞으로 나아갔다가 야전 대포들로부터 포도탄 세례를 얻어맞고 세포이 부대의 일제 사격에 직면하자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그 동안 프랑스 기병대는 굳건히 버텼지만 영국군 포병대가 그들에게 맹포격을 퍼붓자 어쩔 수 없이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다.

이후 쿠테 중령은 세포이 2개 부대와 함께 천천히 전진하여 작은 저수지를 확보했다. 그 후 그는 병력을 규합한 뒤 평원을 가로지르면서 2개의 전투 대형을 편성해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오전 9시 경, 쿠테 중령의 군대는 적이 버리고 간 초소에 도달했다. 그후 그의 군대는 30분 동안 휴식했고 쿠테 중령은 프랑스군의 위치를 정찰했다. 곧 그는 프랑스군이 더 많은 기병대를 동원해 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오전 9시 30분, 쿠테는 완디와슈 요새로부터 북쪽으로 약 3km 떨어져 있고 프랑스군 전선에서 5km 떨어진 언덕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쿠테는 전방에 있던 자신의 기병대에게 좌우 측면을 돌면서 두번째 대열 뒤에 서도록 지시했다.

곧 선두 부대가 기병으로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험한 지형에 이르자, 쿠테는 프랑스 전선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 곳에서 멈춰선 뒤 전방을 향해 진구나면서 보급품과 경호부대를 후방의 작은 마을에 배치시켰다. 롤리 백작이 이러한 영국군의 움직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쿠테는 전군에게 프랑스군 좌편향에 위치한 산을 따라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그는 군 좌익을 산 인근에, 우익은 요새 포대의 사정거리 안에 배치함으로서 적과의 교전 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또한 요새 수비군과 연락하면서 그들이 프랑스군의 후방을 위협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군대 배치가 완료되기도 전에 롤리 백작이 급히 군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진군했다. 쿠테 중령은 프랑스군 전체가 움직이는 것을 관찰한 후 계획을 변경해 부대 전체를 적을 향해 비스듬하게 배치하게 했다. 롤리는 그런 적에 맞서 사전에 준비된 위치를 포기하고 전방을 동쪽에서 북동쪽으로 변경하고 영국군의 대형에 평행하게 대치하기 위해 군대를 오른편으로 전진시켰다.

쿠테의 군대는 3개의 대열로 배치되었다. 첫번째 대열은 4개의 유럽인 보병대대로 구성되었고 양쪽 측면에는 1개의 세포이 보병대대가 배치되었다. 두번째 대열 중앙엔 유럽인 척탄병 대대가 배치되었고 각 측면에는 야전 포대와 세포이 분대가 배치되었다. 세번째 대열 중앙인 유럽인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인도인 기병대는 양쪽 측면에 배치되었다.

정오, 롤리 백작은 그의 유럽인 후사르 부대를 파견해 영국군 제3대열의 기병대 좌측면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쿠테 중령은 즉시 세포이 분대와 2문의 대포로 하여금 기병대를 지원하고 적을 향해 포격을 퍼붓게 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적을 향해 질주하다가 대포 2문의 포격에 직면했고 뒤이어 영국 기병대의 공격을 받았다. 양측은 잠시 치열한 접전을 치렀으나 프랑스 기병대가 패퇴했고, 이후 롤리 백작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영 후방으로 멀리 달아나 다시는 집결하지 않았다. 한편 프랑스 보병대는 적을 향해 포도탄을 마구 쐈지만 사정거리가 닿지 않아서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이후 쿠테의 영국군은 저수지를 좌측면에 둔 프랑스군을 향해 진격했다. 롤리 백작은 당초엔 제 위치를 사수하면서 다가오는 적을 향해 역습하려 했지만 부하들이 매우 초조해하자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적이 진군해오자, 쿠테 중령은 1,2전선의 유럽인들을 제외한 전 병력을 정지시키고 프랑스 정규병들을 패주시키려 했다. 그는 적이 사정거리 이내에 들어왔을 때 일제사격을 가하려 했으나, 영국군 대열에 섞여 있던 몇몇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별다른 지시를 받지도 않은 채 총격을 가했고, 쿠테 중령은 이 혼란이 전선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선 우측에서 좌측으로 질주하다가 두 세발의 총탄을 얻어맞았으나 옷에 구멍이 뚫렸을 뿐 부상당하지 않았다.

오후 1시경 혼란이 수습되어 명령체계가 제대로 자리잡자, 쿠테 중령은 전선 좌측의 연대를 직접 지휘하고 다른 부대는 부하들에게 맡겼다. 이후 양측은 200m 이내에서 멈춰서서 서로에게 일제 사격을 가했다. 롤리 백작은 프랑스군 우측의 로레인 보병대에게 총검돌격을 명령했다. 쿠테 중령은 그런 적의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적이 50m 이내에 도착할 때까지 사격을 보류한 후 적이 50m 이내에 들어오자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로레인 보병대는 큰 손실을 입었지만, 그들은 이러한 손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을 향해 달려들어 육탄전을 벌였다. 그러나 제84 쿠테 보병대는 이들과 격투를 벌인 끝에 제압했고, 로레인 보병대는 결국 패주했다. 병사들이 그들을 추격하려 하는 걸 저지한 쿠테 중령은 우측에 배치된 제79 드레이퍼 보병대의 상황이 어떤지를 보기 위해 그쪽으로 달려갔다.

쿠테가 도착했을 때 좌측 전선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곳에 배치된 영국 포대가 쏜 포탄 하나가 프랑스군 탄약 마차에 절묘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당시 프랑스군 우익을 이끌고 있던 체발리에 드 푸에테 장군을 비롯한 80명의 장교들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이 상황에 경악한 프랑스군 병사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도망쳤고 후방에 있는 인도인 병사들도 뒤따랐다. 쿠테는 이 상황을 보고 제79 드레이퍼 보병대에게 프랑스군 좌익 부대를 향해 공세를 가해 그들 역시 패주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프랑스군 좌익은 아군 우익이 패주하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군대를 편성한 후 롤리 보병대를 투입시켜 제79 드레이퍼 보병대의 측면을 위협하게 했다. 적이 이렇듯 침착하게 대처하자, 쿠테 중령은 제2 전선의 우측에 있던 제79 드레이퍼 보병대 소속 척탄병 부대에게 자신들의 연대를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척탄병들은 명령을 받들어 영국군 포병대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제79 드레이퍼 보병대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이 척탄병들과 제때에 합류하지 못했고, 프랑스군은 이 틈을 타 적의 측면을 강타했다. 브레튼 소령은 제79 드레이퍼 보병대를 지휘하던 중 치명상을 입었지만 부관들은 그를 후방으로 후송시킨 뒤 병사들에게 계속 전진하도록 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급히 좌익에 추가 병력을 투입해 이들의 공세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사기가 꺾인 프랑스군 병사들은 마구 밀어붙이는 적의 기세에 동요했다.

좌익 프랑스군 지휘관 버시는 그런 그들을 독려하며 어떻게든 전황을 바꾸려 애썼지만 그가 이끄는 부대를 제외한 다른 프랑스군은 죄다 패주하거나 적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윽고 적 대포 2문이 아군에서 멀지 않은 지점에 포진하자, 그는 몸소 기병대를 이끌고 이 대포들을 탈취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을 따르는 기병대가 고작 20명 뿐이라는 걸 깨달았고 얼마 안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포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지휘관이 이렇듯 허무하게 붙잡히자 롤리 보병대 전체는 도주하거나 적에게 항복했다.

한편, 양측 중앙 대대는 전투 내내 멀리 떨어져서 대치했다. 그러다가 프랑스군 양익이 모조리 무너지자, 마라타인들은 전세가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달아났다. 오후 2시경 롤리 백작에게 남은 군대는 몇몇 프랑스 기병 분대에 불과했다. 롤리 백작은 이들을 이끌고 그의 군대를 구하기 위해 전방으로 향했다. 로레인 보병대의 몇몇 병사들은 이에 용기를 얻어 그들을 지원했고, 영국군 드래곤 분대가 이들을 저지하려 했으나 곧바로 격파되었다. 이에 쿠테 중령은 인도인 기병대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롤리 백작은 병사들을 수습한 뒤 숙영지를 불태운 후 전장에서 물러났다. 이리하여 완디와슈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은 완디와슈 전투에서 200명이 전사했고 200명이 부상당했으며 16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또한 대포 22문이 포획되었고 미처 불태우지 못한 모든 천막과 보급품들도 적에게 빼았겼다. 반면 영국군은 63명이 전사하고 141명이 부상당했다.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대패한 뒤 더 이상 인도에서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고, 영국군은 이듬해인 1761년 프랑스의 인도 거점 도시인 퐁디셰리를 점령함으로서 인도에서의 전쟁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