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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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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抗
육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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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시호 무후(武侯)[1]
작위 강릉현후(江陵縣侯)
최종직위 대사마(大司馬) 겸 형주목(荊州牧)
성씨 육(陸)
항(抗)
유절(幼節)
생몰기간 226년 ~ 274년
고향 양주 오군 오현(吳縣)

1. 개요2. 정사
2.1. 자손들
3. 연의4. 평가5. 여담6.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손오의 정치가 겸 장군이며 는 유절(幼節).

육손의 차남. 태어날 당시 아버지 육손의 나이가 이미 마흔 넷으로 거의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에 비견될 정도의 늦둥이였다. 어머니는 손책의 딸 손씨. 손책에게는 외손자가 된다. 실제로 정사 삼국지에서도 육항은 손책의 외손자라고 못박아뒀다. 다만 육항의 외조모가 대교일지 아닐지를 두고 가끔 설왕설래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손책은 대교를 납치하여 아내가 아닌 첩으로 삼았으며, 무엇보다 납치혼 1년 후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아내는 장승의 딸 장씨로 손화의 정실부인 장비(張妃)의 여동생이다. 즉 장소의 두 손녀가 각기 손화와 육항에게 시집 간 것. 장비 자매의 어머니는 제갈근의 딸이므로 육항은 제갈근의 손녀사위가 된다.

2. 정사

육연(陸延)은 요절했기 때문에 육손이 죽고 난 뒤 그 뒤를 이어 건무교위가 되었다. 당시 손화 손패가 태자 자리를 다투던 와중 육손이 손화를 편들다 손권의 의심을 사 분사한 직후라 신변이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는데, 상주 자리에서조차 육손에게 붙은 혐의 20여가지를 힐문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육항은 그 힐문에 동요 없이 침착한 태도로 조목조목 반박해 손권의 의심을 가라앉혔으며, 태자문제가 매듭지어진 뒤 임지에서 요양을 위해 건업에 돌아오자 손권은 그를 붙들고 울면서 '지난날 짐은 중상모략을 믿고 그대 부친의 신의를 저버리고 말았다. 경에게 의심을 품은 일도 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바, 그간 책망했던 서찰들을 모두 불태워 없던 일로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

246년에 육항은 입절중랑장으로 승진하여 제갈각을 대신해서 시상에 주둔한다. 제갈각은 시상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제갈각이 떠난 이후 "매우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임지에 도착한 육항은 모든 성벽을 다시 보수하고 집과 담장을 수리하며 오두막집에 살면서도 과일 나무와 뽕나무조차 훼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훗날 제갈각이 시상을 다시 방문했을 때 모든 것이 달라보여서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257년에는 제갈탄의 반란과 연계하여 수춘에서 전공을 올렸고, 259년에는 형주에 주둔하여 군사와 관련된 일을 관장한다. 그 후로 분위장군, 정북장군, 진군장군, 진군대장군 등 고위 장군직을 역임하며 주적과 함께 형주 일대를 방위했다.[3] 263년, 손오의 동맹국인 촉한이 멸망하자 손오는 264년에 촉한과 동맹관계였던 것을 구실삼아 보협을 시켜 원군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영안을 공격했지만 나헌에게 패퇴당했다. 이에 손오는 성만, 유평 등과 함께 육항을 원군으로 3만 군사를 이끌고 보협을 지원하게 하였지만, 나헌의 방어를 6개월 간 뚫지 못하였고, 이 후 사마소가 곧 형주에 주둔하던 호열을 원군으로 삼아 보냈기 때문에 영안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로서 형주는 기준에 방어하던 북쪽과 동시에 익주 방향인 서쪽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되었고 육항은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에 임명되어 이를 막게 되었다. 270년에 시적(주적)이 죽자 시적의 군진 영역까지 맡아, 형주 방위선을 모두 총괄하게 되었다.

272년에 서릉(적벽대전 당시의 이릉)독 보천이 반역해 서진에 투항했다. 당시 서릉이 넘어가면 서진은 익주에서 삼협을 거쳐 서릉을 통해 형주 북부의 양번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하여 손오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육항은 오언, 좌혁, 채공과 함께 급히 군사를 이끌고 서릉으로 향했다.[4] 일찍이 육항은 서릉의 지리를 익혀두었기 때문에 쉽게 함락하기 어려운 것을 간파하고, 본격적인 공성전을 벌이는 대신 그 포위망에서 또다시 바깥쪽을 향한 방어선을 구축해 성 주변에 이중으로 성벽을 쌓게 해서 안으로는 반군, 밖으로는 진의 원군에 대비하게 했다.

얼마나 서둘러 재촉하였던지 병사와 백성들이 대단히 고된 작업이라 고통스러워했고 또한 휘하 장수들도 반발하여 서진의 구원병이 오기전에 보천을 속전속결로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니 백성들과 군사들을 굳이 괴롭히는 이런 포위망은 필요없다고 하자 육항은 서릉은 지세가 견고하고 식량 또한 충분하며 방비는 육항 본인이 갖춘 것이라 바로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어 그 전에 북쪽의 구원병이 틀림없이 도달할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뇌담이 간곡히 청하자 단 한번 공격을 허락했는데, 맹공을 퍼부어도 낙성되지 않자 이후로 휘하 장수들은 아무 불평없이 육항의 명에 따르게 되었다.

곧이어 육항의 예측대로 진의 거기장군 도독 양호가 구원병으로 도착했으나 육항의 방어태세가 워낙 튼튼했던 탓에 감히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해 공략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계책을 써서 육항을 속이려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육항이 적절하게 대응했기에 결국 양호는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양호가 강릉을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제장들이 강릉 수비를 위해 철수를 제안했지만 이때도 '강릉은 식량이 넉넉하고 방비가 굳건해 쉽게 떨어지지 않으며, 설령 점령해도 적이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반면 서릉은 빼앗기면 이남의 이민족들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지니 강릉을 버려서라도 서릉을 차지해야 한다.'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양호는 물길을 이용해 군량을 나르려 했으나, 육항은 일찍이 이를 예상하고 둑을 무너뜨려 물길을 막아놓았기 때문에 진(晉)군은 군량 수송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양호에 이어 형주자사 양조까지 구원에 나서자 투항하는 장수까지 생길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혀 동요함 없이 이중 포위망을 유지해, 결국 진군은 구원을 단념하고 물러났다. 물러나는 진군을 들이쳐 전과를 거둔 다음 서릉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마침내 낙성에 성공했다. 주모자인 보천과 그 일족을 비롯한 반란의 주역들은 참했으나 그 이하 장졸들은 모두 사면해 주었고, 군공을 세웠음에도 이를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항을 따르고 존경하는 이들은 전보다 더욱 늘게 되었다.

273년에 대사마 겸 형주목을 맡아 오의 군권을 한데 통솔하게 되었지만 274년에 향년 48세로 병사했다. 죽기 전에 표를 올려 국경 방비와 모병에 대한 의견을 내놓아 서릉과 건평의 방비를 착실히 하며 국정을 평안하게 할 것을 상주했다.

손성의《진양추》, 습착치의《한진춘추》등에는 양호와 나눈 우의가 서술되어 있어, 서로 적의 입장이면서도 술과 약을 주고받을 정도의 교분을 유지했다고 나온다. 진수는 육항을 평해 '그 몸을 잘 다스려 육손의 유풍을 계승했다. 행동에서 약간 뒤떨어지는 면은 있었으나 훌륭하게 가업을 다했다'라고 적었다. 양호와의 우의관계에 대해선 양호 항목 참고.[5]

2.1. 자손들

아들로 육안, 육경, 육현, 육기, 육운, 육탐이 있는데 육안과 육경은 진 침공시 종군해 전사했고, 육기와 육운은 장화에게 발탁되어 서진 정권에 출사했는데, 둘 다 뛰어난 문재를 지녀 망나니로 이름났던 주처[6]가 개심했을 때 나이가 더 어렸던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 둘과 막내아들 육탐은 훗날 팔왕의 난에 휘말려 일가가 멸족당했기 때문에 육손 일문은 후손이 끊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을 이를 두고 앞서 육항이 보천을 죽일 때 어린 아이까지 죽였는데 이 때 "육항의 후세들은 필히 그 재앙을 만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결국에 육운이 죽게 되고 육씨의 세가족이 후세가 없어지며 사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다만 다른 시대 사람들이 이 비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찾을 수 있고, 실제로도 자세히 보면 이러한 비판이 부당한 면이 없잖아 있다. 이 때 오의 황제는 손호였고, 손호는 반란 혐의가 보이는 자는 물론 의심되는 자도 거리낌없이 삼족을 멸했다. 오히려 반역에 직접 관련된 보천 일가를 제외한 장수들은 사면한 것을 보면, 이것은 육항이 희생을 최소화시키려 노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육항의 후손들이 이후 서진 시대에 완전히 멸족된 것 역시 서진 팔왕의 난 시대의 개판을 생각하면 끼워맞춘 부분이지 않나 하는 시각도 충분히 있을수 있다. 육항 사후 팔왕의 난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임을 생각하면 자식 한 두명이 아닌 육항의 후손이 완전히 멸절한 것이 당대 혼란한 시대상을 시사하는 바는 있으나 팔왕의 난을 시작으로 한 오호십육국시대에 멸족당하는 집안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육손과 육항의 후예가 없어졌다고 이를 육항의 잘못으로 소급하는 것은 그다지 온당한 비판은 아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120회 때 손호가 육항을 의심해 좌천시켜 병권을 빼앗아 손기에게 주고, 그 때문에 실의 속에서 병사했다고 언급되나[7] 정사에는 손호가 힐문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대신 여러 상주문을 지어 올렸으나 '손호는 듣지 않았다.'라는 구절만 그 다음에 계속 이어진다.

사실 손호 입장에서는 육항을 좌천할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오는 호족들의 입김이 강한 지역이고, 그중에서도 으뜸인 육씨 가문[8] 소속이며 대체적으로는 오군 손씨의 충실한 외척인데다가 군권까지 가진 육항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손호는 육항이 본격적으로 군권을 총괄하기 이전인 260년대 후반에도 그를 경계했었다는 언급이 있다. 손호가 육개를 마음같아서는 죽여버리고 싶은데, 육항 때문에 그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4. 평가

손오 최후의 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의만 본 팬들 기준으로는 양호와 대치한 것만 나오고, 정작 최대의 전공인 서릉 전투 때의 활약 등이 나오지 않아, 아버지 잘 둔 덕분에 칭호를 거저먹은 느낌이 강하게 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서릉 전투 때 보여준 그의 공성 능력은 뛰어난 수준이다. 더구나 손오가 망국의 길을 걷는 와중에 보기 드물게 압도적 대국인 서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방어를 해낸 장군임은 감안하면 손오 말기의 최후의 명장이라는 칭호와 같은 전장에서 딱 50년 전에 유비의 대공세를 막아낸 아버지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진서 하충전을 보면 하충이 "육항이 존재하면 손오가 존재하고 육항이 죽으면 손오는 멸망한다."고 했으며 서진 양호도 육항이 죽은 뒤에야 손오를 칠 기회라고 했다. 실제로는 서진의 내부의 문제 때문에 그 사후에도 6년은 더 갔지만.

또한 나헌 촉나라의 마지막 명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나헌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난 육항의 능력에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역으로 나헌이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격퇴한 상대가 바로 이 육항이였기 때문임이 타당하다.

특히 서릉 전투는 육손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유비를 격파하고 손오를 지켜낸 바로 그 장소에서, 휘하장수들이 반대했으나 그들을 억누르며 자신의 전략을 관철하여 승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적군의 기책을 적절한 대책으로 막아냈다는 것조차 같다. 제갈각이 망쳐놓은 시상을 복구하는 등 내정에도 재능을 보였으며 아버지처럼 외지에서 국경을 지키며 황제에게 국정에 대한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하필이면 당시 황제가 폭군 손호여서 받아들이지 않아 문제였기에 그가 죽고 6년 후 손오의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독발수기능의 난 때문에 6년이나 더 걸린거라고 봐도 무방하며, 그를 비롯해 주적, 정봉 등 손오의 국방을 지탱하던 사령관급 명장들이 전부 대체자 없이 죽은 후에는 손오의 멸망은 기정 사실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육항의 아들 육기 역시 손호의 폭정보단 명장들이 죽고 난 이후 육항이나 다른 사령관을 대체할만한 사령관급의 인재에 잠시 공백이 생긴걸 손오 멸망의 최대 원인으로 보았다.

5. 여담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선조 백의종군 하고 있던 이순신에게 파직시킨 것을 사과하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인 사명훈유교서(使命訓諭敎書,기복수직교서)[9]에서 육항이 인용되었다.
(중략)
손오 때의 장수 육항이 국경의 강 언덕을 두 번째 맡아 군사 임무를 완수했으며
또 저 왕손(명나라 관리)이 죄수의 몸으로 능히 적을 소탕하는 공을 세운 것 같이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를 구하기 바라는 나의 소원을 이뤄주기를 바라며
이에 조칙을 내리노니 그렇게 알지어다.
손권이 육손 사후에 육항을 의심한것을 후회했다는 것처럼 선조도 이순신을 의심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으로 내린 교지다. 육항이 1300년 뒤 조선에서도 무관이라면 이름을 알 정도의 명장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사실 당나라 시기(782년) 안진경이 제시한 초기 무성왕묘에 배향된 64인의 명장 중에서 맞수인 양호나 오나라의 이름난 명장들인 주유, 여몽, 육손과 함께 육항도 배향되었기에 육항 역시 오래전부터 오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동아시아사에 알려져 있었다고 봐야한다.

형주의 방어를 중시했고 이후 남송 명장 맹공이 그의 말을 인용해 양번 지역의 방어를 중시한다.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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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항의 아들인 육운이 쓴 조고송(祖考頌)이 출처이다. [2]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이 일화에서 손권이 잘못은 뉘우칠지언정 증거물들을 없애려했다며 옹졸한 면을 보였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것들은 손권보다는 육항에게 두고두고 약점이 될 수 있으니, 손권이 육항을 배려해준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이후 손호가 신하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대던 시절에도 육항은 숙청되거나 좌천되는 일이 없었는데, 만약 저 편지들이 그대로 있었다면 손호가 어떻게든 핑계삼아 제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3] 관등으로는 주적의 아래에 있었다. [4] 보천은 서릉은 아버지 보즐, 형 보협에 이어 3대째 이어받은 땅으로 집안의 영지 같은 곳으로 여긴 모양이다. 그런 상황에서 별 이유도 없이 손호 같은 폭군이 딴 곳으로 옮기라고 했으니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손호 입장에선 유력호족 보씨 가문을 견제하거나 촉한의 멸망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해진 이릉을 수비하는데 보천이 못 미더웠을 수도 있다. [5] 하지만 저 우의관계를 진지하게 믿으면 안 된다. 서로를 높이 평가했던 정도만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이들은 당시 심리전을 벌이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 였다. [6] 석정 전투에서 육손과 함께 조휴를 물리친 주방의 아들로 조문석개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인데, 주처가 20살 이상 나이가 더 많은 것을 고려하면 이 일화는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7] 삼국지 10에서는 이벤트로도 있지만 최후반에나 등장하므로 보기 어렵다. [8] 특히 육항의 아버지 육손이 오에서 가지는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안하면 더욱더 말이다. [9] 선조가 이순신에게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하고 자책하는 걸로 알려진 그 교서. 왕이 신하에게 이 정도로 대놓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문화재보호법 상 보물 (국보와 보물의 번호가 폐기되기 전에는 1564-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