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7:11:54

휘종(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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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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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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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태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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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北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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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제8대 황제
휘종 | 徽宗
파일:lossy-page1-1280px-Seated_Portrait_of_Emperor_Song_Huizong.tif.jpg
출생 1082년 11월 2일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즉위 1100년 2월 23일
북송 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
(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사망 1135년 6월 4일 (향년 53세)
오국성
(現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의란현)
능묘 영우릉(永祐陵)
재위기간 북송 황제
1100년 2월 23일 ~ 1126년 1월 18일
북송 태상황
1126년 1월 18일 ~ 1127년 3월 20일
서명
파일:휘종(송)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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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e8b57><colcolor=#ece5b6> 성씨 조(趙)
길(佶)
부모 부황 신종
모후 흠자황후
형제자매 14남 10녀 중 11남
배우자 현공황후, 현숙황후, 명달황후
명절황후, 현인황후
자녀 35남 34녀
작호 영국공(寧國公) → 수녕군왕(遂寧郡王)
→ 단왕(端王) → 혼덕공(昏德公)
묘호 휘종(徽宗)
별호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
존호 계천흥도부문성무예명황제
(繼天興道敷文成武睿明皇帝)
시호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
(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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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중화(重和, 1118년 ~ 1119년)
선화(宣和, 1119년 ~ 1125년)
절일 천녕절(天寧節)
}}}}}}}}} ||
1. 개요2. 생애
2.1. 내력과 출생2.2. 형의 사망과 계승권 논쟁2.3. 채경의 만행2.4. 국가를 파탄내다2.5. 반란과 몰락의 징조2.6. 정강의 변2.7. 죽음
3. 사후 평가
3.1. 정치적 평가3.2. 예술적 재능
3.2.1. 연산정3.2.2. 도구도
4. 여담5. 미디어 믹스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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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의 제8대 황제이자 금나라의 혼덕공. 묘호는 휘종(徽宗), 시호는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휘는 길(佶). 도교에 심취하여, 재위 중 존호로 옥청교주휘묘도군황제(玉淸敎主徽妙道君皇帝)가 올려졌는데 흔히 사서에 송 도군(道君) 혹은 도군황제라 하면 이 사람이다. 대단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위정자로서의 능력은 최악이라 중국 역사의 수많은 암군 폭군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인물이다. 송 제국이 영토의 절반을 잃어[1] 후세 사람들이 송나라를 북송 남송이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만든 원흉이나 다름없다.

2. 생애

2.1. 내력과 출생

6대 황제 신종의 11남이며 생모는 흠자황후(欽慈皇后)에 추존된 진귀인(陳貴人)이었고 7대 황제 철종의 이복동생이다. 황자 시절에는 단왕(端王)으로 불리었다. 그는 황제와 항렬이 멀었다. 즉, 원래라면 제위 계승권이 없었을 것이다.

철종이 붕어할 당시, 그의 살아있는 동복, 이복 동생 중에서 신왕 조필에 이어서 두번째 연장자였고, 철종의 친동생인 간왕 조사가 멀쩡히 살아있고 개인적인 흠결도 없어서 즉위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신종의 생존한 아들들 중에서도 제위 계승권 상 휘종 앞에 2명이나 있었고, 앞에 있는 두명이 무슨 불상사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황제 자리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더해 철종의 아들인 조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제위 계승 자체를 꺼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2.2. 형의 사망과 계승권 논쟁

그러나 철종의 외아들인 헌민태자 조무가 요절하고 철종 본인도 일찍 붕어하자 후계를 세워야 했다. 당시 황태후였던 흠성헌숙황후는 '누구는 황제 친동생이라서 예법상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반대, 철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신왕 조필은 눈병이 있는데 황제 업무 보기 힘들 것이라고 반대했는데 당시 신왕 조필의 눈병이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왕은 심한 안질로 거의 앞에 있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거의 장님 수준이었다고 한다.[2] 황태후 상씨(상태후)[3]가 단왕을 직접 차기 제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따라서 철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 지명 당시에도 장돈 등 신하들 사이에서는 '그분 노는 걸 너무 좋아하지 않나? 적장자라면 몰라도 황족 자제를 지명하는데 꼭 그분이어야만 하나?\'라는 여론이 있었다. 상태후가 회의에서 황실 예법을 무시하고 단왕을 후계로 지명하자, 장돈이 "단왕께서는 성품이 가벼워 황제로선 불가합니다." 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래 상태후와 그 측근들은 유독 단왕을 좋게 보았다고 한다. 평소 행실과 달리 단왕은 황궁을 들러 상태후를 뵐 때 예의를 갖추고 상태후의 비위를 워낙 잘 맞춰 다른 왕들과 달리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상태후는 자신에게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행동하는 단왕의 예술적 재능을 칭찬하고 멋쟁이인 데다 외모 역시 단정하다고 하여 단왕을 좋게 보았다.

이런 까닭에 상태후는 "내가 정실임에도 불운하여 후사가 없고, 신종의 자제들이 모두 서출이라서 모두 내겐 똑같다."라고 말하며, '공평하게' 연장자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눈병이 있어서 일찌감치 참석자 모두에게 황제 후보에서 탈락한 신왕 다음 연장자인 단왕을 지지한 것이다. 더해 '단왕 조길의 외모가 잘생기고 단정하며, 신종께서도 생전에 단왕이 인자하고 효행도 있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다.’는 주장까지 펼쳤고, 평소 같은 신법당파였지만 재상 장돈을 시기한 증포[4][5]
장돈은 저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태후마마 의견이 맞습니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채변[6], 허장상이
태후마마의 의견이 맞사옵니다. 이대로 해야 합니다.

라고 합세하면서 그대로 상태후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단왕 조길은 상태후의 수렴청정 아래 철종의 뒤를 잇게 됐다. 이후 즉위를 반대하던 장돈은 장지로 가는 상여꾼들이 철종의 관을 진흙탕 위에 올려놓고 잠시 유숙한 것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대파들에게 꼬투리를 잡혀서 탄핵받고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는 당시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당쟁,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도 관련 있었다. 즉 신종의 정처[7]와 철종의 모후[8]가 사이가 나빴다는 점과 선인태후 고씨 사후 상태후를 중심으로 재편된 구법당파와 신종의 정책을 계승한 철종과 장돈 등 신법당파의 향후 헤게모니 다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간왕, 신왕 대신 단왕이 선택된 것이다.[9] 따라서 철종 사후 철종의 유지와 장돈 등 신하들이 예법대로 동복동생 간왕, 생존한 신종의 아들 중 철종 다음으로 연장자인 신왕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모두 무시되고 휘종이 옹립됐다.

2.3. 채경의 만행

신종 사후 어린 철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했던 선인태후 고씨가 구법당을 복권시켰던 원우연간 시기와 철종 친정기인 소성,원부 연간의 기간 동안 장돈 등 신법당파가 집권한 이후 북송의 당쟁은 점점 심해져갔다. 따라서 철종 사후 휘종을 수렴청정한 상태후는 구법당과 신법당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구법당의 한충언, 신법당의 증포를 재상으로 하여 국정을 운영했다.[10] 하지만 이런 구도는 오래 가지 못하고 증포와의 대립 끝에 한충언이 사퇴하면서 증포가 모든 국정을 쥐게 된다.

그런데 상태후가 얼마 안 가 갑자기 죽고 채경이 등장하자 정국은 다시금 요동쳤다. 평소 그림 그리기와 회화첩을 좋아한 휘종에게 총애를 받은 환관 동관이 휘종의 명으로 항주로 가서 회화첩을 가지러 올 때마다 그 옆에서 비위를 잘 맞추던 채경은 신법당이었지만 장돈 등 당시 집권 대신들이 신용 없는 인사로 평가하여 파직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휘종의 측근 환관인 동관의 추천과 평소 채경과 친했던 휘종의 후궁 유씨의 도움으로 채경이 다시금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후 채경은 증포의 도움과 추천을 통해 대명부지사를 시작으로 계속 승진했으며 휘종의 신임을 얻어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16년 동안 재상으로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증포를 시작으로 자신에 반대된다면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모조리 몰아내버렸다.

증포를 탄핵할 때 채경은 “재상 증포가 부정한 뇌물들을 받고 황제가 내려야 할 하사품 등을 마음대로 측근들에게 줬습니다.”라고 휘종과 증포를 포함한 대신들 앞에서 대놓고 그의 부정을 폭로했다. 당연히 자신 면전 앞에서 모욕을 받고 탄핵당한 증포는 얼굴까지 빨개져 휘종 앞임에도 크게 화를 내며 이성마저 잃어가면서 채경을 논박하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대신들은 증포의 무례함을 지적했고, 휘종 역시 증포가 앞뒤 안 가라고 황제마저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당연히 증포는 조사를 받은 뒤 채경의 폭로가 사실로 드러나자 파면되어 지방으로 쫓겨났고 잠시 명예를 회복했으나 지방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윤주에서 사망했다. 이외에도 채경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면 신구법 인물에 상관없이 약 300여 명을 모조리 몰아내고 나아가 그 자손들까지 연좌제로 과거응시금지 등 불이익조치를 취하는 조치 등을 무기 삼아 반대파를 제거하여 조정 전체를 장악했다.

2.4. 국가를 파탄내다

우선 선대 황제였던 신종과 철종이 왕안석, 장돈 등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국고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놨는데, 이걸 고귀하신 황제께서 예술활동한다는 이유로 파탄내버렸다. 그러자 채경 등 신하들이 나서서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둔다거나, 소유문제가 애매한 토지들을 일괄적으로 국고에 환수시키는 방식으로 파탄난 국고를 채워나갔다.
파일:external/www.chinaculture.org/xinsrc_480704031435582659826.jpg
기암괴석을 그린 송 휘종의 그림.

그리고 휘종은 예술품을 좋아하여 예술품 수집을 위해 명금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전국의 진귀한 예술품들을 수집하게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집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행패가 극심했는데 그들은 황제가 예술품을 원한다는 명목으로 부자들과 백성들의 예술품을 강탈하는것은 물론이고 황제의 새로운 정원을 꾸민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마구잡이로 부과하여[11] 강제로 징발해 일을 시키면서 숲을 밀어버리고 운하를 따라 기석들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가는데 집이 있으면 집을 무너트리고 논과 밭을 뒤엎고 길을 내기도 했다. 워낙 이 기암괴석을 싣고 가는 배가 많아서 '화석강(花石綱)'이라고도 불렀다.[12][13] 이 정도면 말 그대로 암군.

게다가 새로운 정원과 별궁을 짓기 위해 개봉부 '북동쪽' 성벽을 헐어버려서 이후 정난의 변 당시 개봉이 금나라에 의해 함락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관련 링크 이 별궁과 정원이 아래에서 후술하는 만수산이다.

2.5. 반란과 몰락의 징조

결국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다 못한 민중들이 폭발하여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대표적으로는 수호전의 주인공인 송강과 최종보스격인 방랍이 있다. 방랍의 난이 점점 격화되고 방랍이 아예 독립 국가를 세우는 수준에 이르자 요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조성하였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그 결과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지만[14], 송나라의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백성들 민심을 수습하고자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화석강 수집을 그만 두었으나, 방랍의 난이 진압된 지 두 달도 안 되어서 또 화석강 모으기를 시작하였다.

물론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고 백성들도 반발하였으나 송휘종은 암석 모으기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유배 보내고 백성들 반발을 억눌렀다. 특히 송나라 관군이 진압 도중 남부의 백성들을 300만 명이나 학살했고 당연히 송의 남부지역은 송왕조와 조정에 반감이 심했다. 이는 정강의 변 이후 남송의 고종이 북벌하는데 간접적으로 방해요소가 된다. 불과 몇 년 전에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라 언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후방이었던 것. 오죽하면 악비를 죽인 권신 진회가 재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불안한 남부지역을 폭압적이기는 해도 안정시킨 공이 인정되기 때문일까?.

이 와중에 금나라가 건국되자 이이제이책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박살낸 후에 또 요나라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박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힘 및 자신의 세력의 규모 정도는 확인하고 이이제이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머리가 나쁜 휘종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고, 역시나 요나라 마지막 황제로 여기저기 도망치던 천조제가 결국 패하여 붙잡히면서 이런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게다가 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15]

2.6. 정강의 변

이를 알고 분노한 금태종이 군대를 파견하자 휘종은 깜짝 놀라 적장자이자 황태자인 조환( 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어 현실의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긴 뒤, 자신은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동관, 채경 등을 데리고 장강 이남의 안전한 남쪽으로 도망쳐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려 하였다.[16] 결국 금나라와의 화의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흠종은 영토할양, 배상금 지급 등의 요구를 수용해서 황실종친, 절 등에서 금은보화를 각출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태수습을 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쳤던 휘종을 개봉으로 다시 데려오는 바람에, 휘종은 결론적으로 위험한 개봉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휘종은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예술활동을 하며 연회를 즐기고 후궁들과 어울리는 등 평상시와 같은 생활을 했다.

하지만 금군이 물러가자마자 주전파 신료들이 일제히 강화 반대를 외쳤는데,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흠종은 주전파 신료들의 의견을 덜컥 수용해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금나라는 다시금 송나라를 침공했다. 그리고 금나라한테 박살나고 수도 함락 직전까지 몰린 송나라의 군사력이[17]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복구될 리는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금군한테 깨끗하게 갈려나갔다. 수도 개봉에는 수비군으로 금군(禁軍) 3만 명이 있었지만 그네들조차 형편없다보니 금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방비하기는커녕 대부분이 도망갔기에, 개봉 또한 손쉽게 금나라 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피신하지 못한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혀 황후, 후비, 황자, 황녀, 친왕, 왕비 등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녘의 금나라 영토로 끌려갔다. 자세한 내용은 정강의 변 문서로.


끌려간 황족들 중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 같은 이들의 첩이 되었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졌는데 이는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원래 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거주하던 황족들 대부분이 금나라로 끌려갔을뿐더러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했다. 그리하여 남송에서는 송 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를 내려 조롱하였다.

다만 남송이 멸망하면서 송이 실질적으로 망한 애산 전투에서는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의 송말삼걸을 시작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가 10만 명에 달했다. 북송이 무너질 때 그런 이가 얼마 없던 이유는 남송이 아직 건재하여 금과 계속 맞서고 있기에 충신들과 인재들이 남송으로 탈출해 싸운 것도 있지만, 휘종이 워낙 한심한 암군이었기에 그런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봄이 적절할 것이다.

2.7. 죽음

결국 금나라의 땅 오국성[18]에 끌려가 한 칸짜리 방에 수감되어 살다가 1135년에 죽었다.[19] 그나마 아들 고종이 협상 끝에 유해를 송환받을 수 있었다. 남송으로 송환된 휘종의 유해는 고종이 황릉 지대로 정한 소흥 일대에 마련한 영우릉에 묻혔다. 고종 역시 이 일대에 묻혔으며, 이 후 도종까지 남송의 역대 황제, 황후, 후비, 제왕 등 황족들은 대대로 이 지역에 묻혔다.

휘종의 무덤인 영우릉은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 세조때 다른 남송 황릉과 함께 라마승이었던 강남(중국) 석교 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황야에 버려졌고 , 뼈와 함께 섞여 상자에 담겨져 진남탑(鎭南塔)[20] 아래에 묻혔다.[21]

그 후 폐허가 된 소흥의 남송 황릉 지역은 명나라 주원장이 복구를 명했고, 청도 전 왕조를 계승하는 측면에서 이를 존중했지만 나라가 개판이 된 청나라 말기에는 다시 폐허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파괴가 한번 더 있었고 이때 석재를 사용하기 위해 명나라 시기에 복구된 석물의 석재를 빼내가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구릉 일대가 밭이 되었다. 그나마 1989년이 돼서야 낙양 근처 공현 일대의 북송 황릉 지역과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다. 그나마 북송 황릉은 봉분이라도 남아 있는데 비해 남송 황릉은 개간되어 봉분의 흔적이 거의 남질 않았다.

3. 사후 평가

3.1. 정치적 평가

송나라 중엽의 재앙은 장돈 채경이 원흉이었고, 조양사가 재앙의 근원을 이었다. 그러나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휘종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장돈은 휘종의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 천하를 아래에 두는 임금으로써는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요나라 천조제가 패망하고 장각(張覺)이 평주(平州)를 바치며 귀순해오자, 조양사는 장각을 거두어들이면 금나라의 신용을 잃어버리고 반드시 외국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장돈과 조양사의 계책을 행하여, 송나라가 휘종을 세우지 않았거나 장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금나라가 비록 강성하였으나 어찌 틈을 노려서 송나라를 정벌할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변고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비록 소인도 역시 능히 알 수 있었지만, 군자는 어느 정도 능히 막지 못하였다.

휘종이 나라를 잃은 이유를 상고해보면, 만약 진나라 혜제의 어리석음과 오나라 손호의 폭정이 없었고 또한 조조 사마의의 찬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휘종은 특히 그 사사로운 지혜와 잔꾀를 믿으며 한편으로 치우치며 마음을 썼고, 의로운 선비를 멀리하고 물리쳤으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 하였다. 이에 채경이 경박하고 교묘하게 아첨하는 자질로, 휘종의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탕하게 노는 뜻을 도왔다. 허황된 것을 맹신하고, 꾸미며 노는 것을 숭상하여,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력이 곤궁하여 없어졌다. 임금과 신하가 멋대로 즐기고 놀며 서로 방종하여, 국정을 게을리 하여 돌보지 않았고, 하루 종일 터무니없는 짓을 행하였다. 동관이 권력을 잡자, 다시 전쟁과 예술에 탐닉하여, 재앙을 초래하여 혼란을 가속시켰다. 훗날 나라가 무너지고 몸에 치욕을 당하여, 결국 석진 석중귀와 같은 죄를 저질렀으니, 어떤 핑계를 셈할 수 있겠는가?

옛날 서주 시기에 나라를 새로 만들면서, 소공은 오히려 무왕에게 무익한 해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유익하게 하였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도 쓸 물건이 아니라면 천하게 여겼다. 하물며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치며 송나라를 다스려야 하거늘, 희녕(熙寧)·원풍(元豐)·소성(紹聖) 연간의[22] 정치를 경계로 삼아야 하거늘, 휘종 또한 두 일의 폐단을 몸소 행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임금이 놀면서 뜻을 잃고 욕망을 좇아 법도를 무너뜨리면 망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는데, 휘종은 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특별히 저술하여 경계로 삼는다.

- 『 송사

주 유왕, 한 영제, 유자업, 유욱, 소소업, 해릉양왕, 수 양제, 당 의종, 만력제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군주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군주로, 예술에 심취해 나라를 말아먹었기에 조선 포함 후세의 성리학자들이 군주의 예술 활동을 반대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됐다. 명나라 만력제의 스승인 장거정은 '황제는 글씨만 쓸 줄 알면 됐지. 예술에 심취하면 송 휘종처럼 될 수 있다.'며 만력제의 예술활동을 반대했다. 문제는 만력제에게 파업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는 점은 생각을 못한 것. 이는 중국만 아니라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미쳐 조선 성종도 시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휘종이다! 휘종이 하던 짓이다!'라고 비판받아야 했다. 연산군이 예술에 좀 심취하긴 했지만 말로는...

물론 취미생활을 즐기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린 군주들도 얼마든지 있다. 정치가로서 일을 열심히 하고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조조가 있다. 또한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을 뿐더러 나름대로 명군으로 평가받는 선덕제라든지 예술에 심취했거나 사치가 심했지만 십전무공이라는 공적으로 강건성세를 완성한 건륭제, 셀주크 제국을 세운 토그릴 베그,[23] 수학과 천문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고 치정에도 재능을 보인 티무르 왕조 울루그 베그,[24] 역시 팔방미인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같은 군주들처럼. 하지만 휘종은 명나라 말에 취미 생활로 국정을 내팽개친 천계제 프리퀄 격으로 천재 예술가인 동시에 역대급 암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휘종의 업적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는데, 휘종 시기의 북송과 이후의 남송의 미술은, 미술사학적으로 중국 미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휘종의 예술 사랑은 궁내 도화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고, 재야 미술가 발굴과, 송나라 이전 미술품들의 평가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북송 시기에 이성과 범관 등 걸출한 미술가는 물론, 휘종 자신도 서예 뿐만 아니라 그림에 능해, 미술가로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때문에, 송나라의 그림은 중국 미술사에 남을 걸작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중원의 황제는 일개 제후국의 왕과는 다르다. 한 마디로 산이 생기고 없어지는 와중에, 그는 그 막강한 힘을 예술과 사치품에만 쏟았다. 그의 예술사랑은 북송은 물론이거니와, 남송 대에 풍부한 예술자원과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며, 중국이 자랑하는 도자기 문화도 그 기법이 완숙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산과 개봉의 불야성과 송의 막대한 경제력에도 한 몫했을 것이다. 중국의 다양한 레시피도 송 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만큼, 문화적으로 완숙된 시기였으며, 현대에도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으나, 그것은 곧 ' 사치'를 의미하며, 사치는 언제나 망국에 다다르는 요소 중 하나였다. 송 휘종은 중국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그는 동방을 아우르는 천자였다. 중국 미술과 문화의 활로를 열었지만, 북송의 망국의 길도 열어버린 황제이다. 대국적인 경영과 경제 측면에서 고려한 문화 융성이 아닌, 개인의 단순히 취미와 사치를 위해, 대륙을 뒤엎는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결국 휘종은 북송을 망국으로 몰아간 대가로 역대제왕묘에 배향되지 못했다.

3.2. 예술적 재능

파일:attachment/송휘종/Example.jpg
휘종의 수금체[25]
휘종은 문인이자 예술가로서 확실히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시서(詩書)에 능한 인물이었다. 휘종이 개발한 서체인 수금체(瘦金體)는 자획을 가늘고 길게 뽑아 날렵하면서도 우아하며 가냘픈 것이 특징인데, 후대의 역사가나 감정가에게 '글자에 기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약한 서체'라고 까이기도 한다. 물론 이런 평은 그가 암군으로 역사에 남았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한 것이다. 만약 휘종이 명군이 됐다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체'라고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북송을 무너뜨린 금나라 황제들과 상류층들조차 휘종의 수금체를 애호했다. #, #

그림 실력이 출중하고 도자기 수집, 또는 가끔 조각도 했다. '계산추색도' 같은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후대에 고서화 수집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악명 높은 청나라 건륭제의 손에 들어가 큼지막한 도장이 여기저기 찍히고[26][27], 좌측 상단부에는 엉터리 시까지 적히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사실 건륭제가 예술활동을 한답시고 망쳐놓은 고서화가 한둘이 아니다.

고려 예종이 지은 안화사에 친필로 편액을 써서 보내준 적이 있다. 또한 '직접' 국서를 써서 사신편에 전달한 적도 있다. 고려에 송나라의 아악인 대성악과 음악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악기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 대성아악은 고려시대에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도 근근이 유지되다가 조선 세종이 다시 대대적으로 정비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휘종은 한국의 국악 발전에도 상당한 도움을 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인종 때 화가 이령(李寧, ?~?)의 예성강도를 보고 그 솜씨를 극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천수사남문도'를 그리기도 한 이령은 전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인종 때 추밀사 이자덕을 따라 송나라에 갔을때 휘종을 만났다. 이때 휘종은 한림대조 왕가훈, 진덕지, 전종인, 조수종 등에게 명을 내려 고려에서 온 이령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하면서 이령에게 고려 예성강을 그리게 했는데, 이령이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휘종에게 바쳤다. 휘종이 이 그림을 감상한 뒤 "근래 사신을 따라온 고려 화공이 많았지만 이령의 솜씨가 가장 뛰어나다." 하고 감탄하고는 이령에게 술과 음식 및 화려한 비단옷과 명주실로 짠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28] 여러모로 예술과 연관이 많은 임금.

하여간 중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 암군이긴 하지만 시서화, 음악 등 동양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만능 예술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휘종의 일화로 유명한 일화 중에 '황실 예술 아카데미를 세워 손수 후학들을 가르쳤다.'는 것이 있다. 왕희맹 같은 명화가도 휘종에게 그림을 배워서 천리강산도 같은 명작을 남겼다. 이렇게 꼭 휘종의 직계 제자가 아니더라도 북송~남송 초에 이름을 날린 화가, 서예가 대부분은 휘종이 커리큘럼을 세운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다례에서 만든 점다법(點茶法)의 규범은 이후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식 다도와 말차로 발전했고, 수석의 감정기준을 세웠으며, 도자기 공납 기준을 바꿔서 업체별 경쟁체제를 중국사 최초로 확립하여 중국 도자기의 품질을 증진시킨 것 등, 정말로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만큼은 통치력과 본인의 예술적 재능의 모조리 쏟아부었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이 때문에 중국 쪽에선 북송이 망하지 않고 휘종이 후원한 예술이 계속 발전했다면 중국에서 리얼리즘 화풍이 자생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if 놀이도 할 정도라고 한다.

시서화에 다 능하였음은 물론 원림 조경 쪽에서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한번은 휘종이 만수산[萬歲山, 후에 간악(艮岳)이라 다시 명명]이란 원림을 세웠던 적이 있었는데, 워낙 잘 만들어서 너도나도 만세산을 모방하였다. 이 덕분에 중국의 원림 조경은 송휘종의 만세산 이전 / 이후로 세대가 나뉜다. 사물의 배치, 기암괴석의 감별, 산수의 형세 등등 그냥 기준점을 새로 세웠다고 보면 된다. 명나라의 서원(현재 중난하이)과 청나라 이화원도 저 영향력에서 못 벗어날 정도이다. 그리고 악기 '제작' 쪽에서도 미학적 재능이 빛을 발했는지 송석간의(松石間意)라는 고금을 만들었는데, 천하의 명금이라 송나라 황제들은 물론이고 후대 왕조 내내 전승되면서 보물 취급을 받았다.[29] 아무리 봐도 황제가 아니라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나거나 돈 많고 잘 놀면서 예술을 후원하는 황족 겸 예술가로 태어났어야 하는 인물이라는 평이 딱 적절하다.

황족이나 왕족은 반란의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론 공직에 나가지 못하고 명예직이나 받아서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조비의 두 동생인 조식과 조창은 출중한 능력과 야망에도 그의 즉위 이후 출세길이 끊겼다. 그러나 휘종처럼 시 쓰고 그림이나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뿐더러, 그 누구도 이런 (통치자로서) 무능력자를 추대하지 않을 것이므로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굳이 가치부전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유쾌한 당대의 풍류인으로만 기억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계승권 논쟁 문단에서 적은 대로, 휘종은 황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서 원래대로라면 황제가 될 일이 없었을 사람이었다. 휘종은 태자가 요절하고 선황도 일찍 붕어하는 바람에 후계를 급하게 세워야 해서 세운 황제였고, 당시에도 "어차피 예법상으로도 어긋나고, 그분 노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황제로 세워야 합니까?"라는 말이 나왔는데도 태후가 억지로 옹립한 황제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이런 (통치자로서) 무능력자를 추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깨져버린 것. 당시 상황으로도 휘종은 황제가 되면 안 되었고, 그냥 부유하게 살면서 예술을 후원하며 놀고 먹는 편이 당사자에게도, 송나라에도 좋았다.

3.2.1. 연산정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 휘종이 지은 연산정(燕山亭).
裁剪冰绡 새하얀 비단 마름하여
打叠数重, 사뿐히 몇 겹을 접어서
冷淡胭脂匀注。 가볍게 연지를 골고루 칠한 모양
新样靓妆, 새로운 유행의 화장이라도 했는가
艳溢香融, 한껏 예쁜 자태 향기 감돌고
羞杀蕊珠宫女。 예주궁의 선녀가 무색하구나
易得凋零, 그렇지만 이 꽃은 시들고야 말겠지
更多少无情风雨。 또 몇 번이나 모진 풍우 겪어야 하겠는지.
愁苦。 아, 이 괴로움!
问院落凄凉, 이 처량한 뜨락엔
几番春暮。 봄이 몇 번이나 지났던가.
凭寄离恨重重, 겹치고 겹친 상실의 서러움 전하고 싶지만
这双燕, 이 제비 한 쌍이
何曾会人语? 사람의 말을 어찌 알 수 있으랴
天遥地远, 멀고먼 하늘 저 멀리
万水千山, 첩첩한 산과 강을 건너서
知他故宫何处? 예전의 궁궐 그 어디에 있는가
怎不思量, 어찌 생각이 나지 않으랴
除梦里有时会去。 깨어서도 몇 번이나 가보았건만
无据。 이제는 의지할 데 없구나.
和梦也新来不做。 어이하여 요즘은 꿈에도 보이질 않느냐.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된 휘종의 심란함이 드러나는 시. 절절하기 그지없다.

3.2.2. 도구도

파일:external/www9.wind.ne.jp/hato.jpg
휘종이 그린 도구도(桃鳩圖). 복숭아 꽃과 녹색비둘기를 그린 그림이다.
화가로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실제로 휘종이 그린 그림들을 보면 단순히 황제가 그려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게 아니라 진짜로 그림을 잘 그렸다. "답화귀거마제향 踏花歸去馬蹄香"(뜻: 꽃을 밟고 돌아가는데 말발굽에 향기난다)이라는 제목을 화제로 내걸었더니 다른 화가들이 모두 어리둥절할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림을 그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이 시절 이야기.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을 따르는 나비의 구도는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은 예술가가 아니라,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할 황제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유능한 이를 등용해서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예술을 즐겼거나, 나라를 평안케 한 뒤에 노후에 소일거리로 즐기는 정도에서 끝냈다면 상관이 없었겠지만 휘종은 국정은 외면하고 예술활동에만 심취한 나머지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게다가 그냥 예술활동에 심취하기만 했다면 모를까 저걸로 백성들 등골까지 빨아먹었다. 훗날 명나라의 천계제와 비견될 만한 행보이지만, 천계제는 목수질에만 심취했을 뿐 예술품 수집 등으로 사치를 부리지는 않았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휘종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30]

4. 여담

  • 전설에 따르면 휘종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 신종의 꿈에 휘종과 마찬가지로 예술가 황제로 유명한 남당의 3대 황제 이욱이 나타나 신종을 알현하였다고 한다.
  • 휘종이 황자 시절 고모 촉국공주[31]의 집에서 살았는데, 이때 촉국공주의 남편이자 영종의 부마였던 고모부 왕선을 흠모하고 존경했다. 왕선에게는 세 가지의 두드러진 개성이 있었는데 우선 금기서화(琴棋書畫)[32]에 능하고 한 번 읽은 것은 모두 기억할 정도로 문예적 기질이 뛰어났다. 실제로 당시의 장원 정해는 왕선의 글을 읽고 "니가 쓴 글은 문장이 멋지다. 훗날 반드시 출세하겠구나." 라고 감탄했고, 북송의 문학가인 황정견 역시 그의 시서화를 후생가외(後生可畏)라면서 극찬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가지의 개성이 문제인데, 사치를 좋아하고 여색을 밝혔다는 것이다.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무녀(무희)까지 집에 둔 인물이기도 했다. 좋게 표현하면 풍류남아, 나쁘게 표현하면 문화건달.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여읜 채 고모네 집에 머물던 10대의 휘종은 고모부를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면서 모든 것을 복사판처럼 따라하고 가르침을 구했다.

    이에 40살이나 연상인 고모부 왕선 역시, 자신을 흠모하고 자신의 재능과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려 하는 처조카를 아끼며 몸소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스승이자 보호자로서 함께 했다. 그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기원인 힐방루로 휘종을 데리고 가 몸소 침대 위에서의 모든 스킬들을 알려주고 여자와 노는 법, 유흥을 즐기는 법들을 세세히 알려줬다고 한다.

    그 결과 이미 10대 초반의 나이에 휘종은 수도 내 홍등가들을 돌아다니며 글공부보다는 주색잡기, 유흥, 축국(공놀이), 미술에만 몰두했고, 주변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래사 철종이 승하한 뒤 후계 논의가 벌어졌을 때, 이런 사정을 알던 장돈 등 반대파 조정대신들은 단왕(휘종)은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면서 철종의 뒤를 이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 어린 시절부터 여색을 무척 좋아했던 만큼 황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황제가 된 이후에도 황후들과 100명이 넘는 비빈들에게 자녀를 계속 얻었다. 그래서 역대 중국 황제들 중에서도 자녀가 많기로 유명한 황제가 바로 휘종이다. 송사 <종실전>과 <공주전>에 따르면 휘종은 황제 및 태상황으로 있는 동안 아들 31명과 딸 34명 등 자녀 총 65명을 황후 및 비빈들에게 얻었다고 한다. 훗날 금나라에 끌려가 혼덕공으로 불리며 포로생활을 할 동안에도 다시 6남 8녀를 더 얻어서, 죽기 전까지 자식 총 80명을 뒀다고 한다.
  • 휘종은 피휘에 매우 엄격해서, 황실의 시조 조현랑의 이름자 현(玄)[33], 황제를 상징하는 용(龍), 천(天), 군(君), 옥(玉), 제(帝), 상(上), 성(聖), 황(皇)의 여덟 자로 이름이나 자호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미 지은 이름과 자호도 고치게 했다. 명군이나 하다못해 능군이었으면 이런 조치도 욕을 크게 먹진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암군인 휘종이라...그래서 수호전에서 이규 등 여러 양산박 호걸이나 반란군이 송 휘종의 휘를 막 부른다.
  • 한국 음악사에 족적을 하나 남겼는데 고려에 대성아악에 쓰이는 악기와 무용 등을 전수해주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송나라가 있던 중국에서는 아악이 소실되고 고려에서 쭉쭉 이어진 한국에서 문묘제례악만이라도 살아남았기에[34] 어떤 의미로는 아악이 살아남는데 기여한 셈이다.

5. 미디어 믹스

  • 시대적 배경이 되는 수호전에도 등장한다. 바탕은 선량한데 놀기만 좋아하는 탓에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나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순진한 황제로 나오다가 개봉부에 잠입해 이사사와 의남매가 된 낭자 연청을 통해 양산박 호걸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이들을 용서하고 장군으로 임명하는 대인배로 등장. 하지만 이들이 각지의 난을 평정한 뒤에는 이들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나중에 이를 알고는 크게 슬퍼하며 그들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준다. 휘종보다 그 주변에서 국정을 농단하던 간신 4명( 고구, 채경, 동관, 양전)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에 불과하고, 북송 멸망의 중심은 애시당초 휘종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4명의 간신들도 모두 휘종이 어리석은 것을 이용하여 국정을 농단한 것이다. 본래 송나라는 황제권이 막강했기에 황제의 의도에 따라 정국을 운영하고 관직을 편성하는게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채경 등 간신들을 등용하고 지나친 예술 탐닉과 사치로 국정을 파탄낸 1차 책임은 휘종 자신에게 있기에 수호전에서 지나치게 휘종을 옹호한 면이 있다. 수호전 외전인 수호후전에서 역사대로 정강의 변으로 금에 끌려가면서 양산박 호걸들을 만나고 호걸들은 초라하게 금으로 끌려가는 송휘종에게 황감과 노자돈을 바치며 황제에 대한 예우를 지킨다.
  • 코에이 전략시뮬레이션 수호전 시리즈에는 이벤트에만 등장하며 역사와는 전혀 다르게 나라 걱정을 하며 고구를 해치우길 바라는 모습으로 미화되어 나온다. 이 게임에서 최종목표인 고구 척결을 달성하려면 명성치를 모아서 이 인물에게 칙령을 받아야 한다. 이벤트에만 등장하는 까닭에 아쉽게도 능력치가 안나오는데 나왔다면 F4급의 환상적인 능력치가 나왔을듯 하다.
  •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이나 고우영 수호지에서 휘종은 희대의 멍청이로 나온다. 고우영 수호지의 리메이크작인 고우영 수호지 2000에선 초반 빼고 아예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송 휘종을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다라고 소개하면서 문제는 그가 황제라는 점이다. 황제가 예술한답시고 나라를 안 돌보고 간신배들에게 나라 맡기고 예술이나 하고 있으니 나라 저렇게 말아먹어요~라는 투로 소개할 뿐.
  • 2013년 드라마 " 정충악비"에 등장한다. 정강의 변으로 금에 끌려가면서도 수석과 그림만 챙기는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 이를 한심하게 본 금나라 장군 올출이 수석들은 모두 황하에 버리고 서화는 모두 태워버린다. 그리고 금태조의 명으로 송휘종은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같이 지내게 되는데 물론 역사적 고증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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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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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태후 · 효혜황후 · 효명황후 · 효장황후 · 숙덕황후 · 의덕황후 · 명덕황후 · 원덕황후 · 장회황후 · 장목황후 · 장헌명숙황후 · 장의황후 · 장혜황후 · 소정귀비 · 곽황후 · 자성광헌황후 · 온성황후 · 소절귀비 · 소숙귀비 · 양덕비 · 풍현비 · 선인성렬황후 · 흠성헌숙황후 · 흠성황후 · 흠자황후 · 임현비 · 혜목현비 · 소자성헌황후 · 소회황후 · 현공황후 · 현숙황후 · 의숙귀비 · 현인황후 · 교귀비 · 명달황후 · 인회황후 · 헌절황후 · 헌성자열황후 · 반현비 · 장현비 · 유귀비 · 유완의 · 장귀비 · 성목황후 · 성공황후 · 성숙황후 · 채귀비 · 이현비 · 자의황후 · 황귀비 · 공숙황후 · 공성인열황후 · 사도청 · 전황후 · 양숙비
244·245·246·247권 「종실전(宗室傳)」
조정미 · 조덕소 · 조덕방 · 조원좌 · 조원희 · 조원분 · 조원걸 · 조원악 · 조원칭 · 조원엄 · 조원억 · 조우 · 조윤양 · 조호 · 조군 · 조필 · 조오 · 조사 · 조무 · 조해 · 조추 · 조기(趙杞) · 조허 · 조체 · 조악 · 조식 · 조진(趙榛) · 조심 · 조훈(趙訓) · 조부 · 조거 · 조기(趙愭) · 조개(趙愷) · 조순 · 조횡 · 조자칙 · 조자숭 · 조자력 · 조자지 · 조자주 · 조자숙 · 조사이 · 조희언 · 조희역 · 조사오 · 조사요 · 조사궁 · 조사천 · 조불군 · 조불기 · 조불우 · 조불백 · 조선준 · 조선예 · 조여술 · 조숙근 · 조숙향 · 조언담 · 조언숙 · 조언유
248권 「공주전(公主傳)」
진(秦)국대장공주 · 위(魏)국대장공주 · 노국대장공주 · 진(陳)국대장공주 · 서국대장공주 · 빈국대장공주 · 양국대장공주 · 옹국대장공주 · 위(衛)국대장공주 · 형국대장공주 · 장혜국공주 · 승국대장공주 · 주진국대장공주 · 진로국대장공주 · 곤국대장공주 · 연서국대장공주 · 서국대장공주 · 위초국대장공주 · 위국대장공주 · 한위국대장공주 · 주국장공주 · 당국장공주 · 담국장공주 · 서국장공주 · 진국공주 · 진국장공주 · 가덕제희 · 영덕제희 · 순숙제희 · 안덕제희 · 무덕제희 · 수숙제희 · 안숙제희 · 숭덕제희 · 가국공주 · 문안공주 · 화정공주 · 제안공주 · 안강군주 · 기국공주 · 주한국공주
249권 「범질등전(范質等傳)」 250권 「석수신등전(石守信等傳)」
범질 · 왕부 · 위인포 석수신 · 왕심기 · 고회덕 · 한중윤 · 장령탁 · 나언괴 · 왕언승
251권 「한령곤등전(韓令坤等傳)」 252권 「왕경등전(王景等傳)」
한령곤 · 모용연쇠 · 부언경 왕경 · 왕안 · 곽종의 · 이홍신 · 무행덕 · 양승신 · 후장
253권 「절덕의등전(折德扆等傳)」 254권 「후익등전(侯益等傳)」
절덕의 · 풍계업 · 왕승업 · 이계주 · 손행우 후익 · 장종은 · 호언가 · 설회양 · 조찬 · 이계훈 · 약원복 · 조조
255권 「곽숭등전(郭崇等傳)」
곽숭 · 양정장 · 송악 · 상공 · 왕언초 · 장영덕 · 왕전빈 · 강연택 · 왕계도 · 고언휘
256권 「조보전(趙普傳)」 257권 「오정조등전(吳廷祚等傳)」 258권 「조빈등전(曹彬等傳)」
조보(趙普) 오정조 · 이숭구 · 왕인섬 · 초소보 · 이처운 조빈(曹彬) · 반미 · 이초
259권 「장미등전(張美等傳)」
장미 · 곽수문 · 윤숭가 · 유정양 · 원계충 · 최언진 · 장정한 · 황보계명 · 장경
260권 「조한등전(曹翰等傳)」
조한 · 양사 · 당진(黨進) · 이한경 · 유우(劉遇) · 이회충 · 미신 · 전중진 · 유정한 · 최한
261권 「이경등전(李瓊等傳)」
이경(李瓊) · 곽경 · 진승소 · 이만초 · 백중찬 · 왕인호 · 진사양 · 초계훈 · 유중진 · 원언 · 기정훈 · 장탁 · 이만전 · 전경함 · 왕휘
262권 「이곡등전(李穀等傳)」
이곡 · 잠거윤 · 두정고 · 이도(李濤) · 왕역간 · 조상교 · 장석 · 장주 · 변귀당 · 유온수 · 유도 · 변광범 · 유재(劉載) · 정우(程羽)
263권 「장소등전(張昭等傳)」 264권 「설거정등전(薛居正等傳)」
장소(張昭) · 두의(竇儀) · 여여경 · 유희고 · 석희재 · 이목 설거정 · 심륜 · 노다손 · 송기 · 송웅
265권 「이방등전(李昉等傳)」 266권 「전약수등전(錢若水等傳)」
이방(李昉) · 여몽정 · 장제현 · 가황중 전약수 · 소역간 · 곽지 · 이지 · 신중보 · 왕면 · 온중서 · 왕화기
267권 「장굉등전(張宏等傳)」 268권 「시우석등전(柴禹錫等傳)」
장굉 · 조창언 · 진서 · 유식(劉式) · 유창언 · 장계 · 이유청 시우석 · 장손 · 양수일 · 조용 · 주영 · 왕계영 · 왕현
269권 「도곡등전(陶穀等傳)」
도곡 · 호몽 · 왕저 · 왕우(王祐) · 양소검 · 어숭량 · 장담 · 고석
270권 「안간등전(顏衎等傳)」
안간 · 극가구 · 조봉 · 소요 · 고방 · 풍찬 · 변후 · 왕명 · 허중선 · 양극양 · 단사공 · 후척 · 이부(李符) · 위비 · 동추
271권 「마영종등전(馬令琮等傳)」
마영종 · 두한휘 · 장정한 · 오건유 · 채심정 · 주광 · 장훈 · 석희 · 장장영 · 육만우 · 해휘 · 이도(李韜) · 왕진경 · 곽정위 · 조연진 · 보초
272권 「양업등전(楊業等傳)」
양업 · 형한유 · 조광실 · 장휘 · 사초
273권 「이진경등전(李進卿等傳)」
이진경 · 양미 · 하계균 · 이한초 · 곽진(郭進) , 우사진, · 이겸부 · 요내빈 · 동준회 · 하유충 · 마인우
274권 「왕찬등전(王贊等傳)」
왕찬 · 장보속 · 조빈(趙玭) · 노회충 · 왕계훈 · 정덕유 · 장연통 · 양형 · 사규 · 전흠조 · 후지 · 왕문실 · 적수소 · 왕신(王侁) · 유심경
275권 「유복등전(劉福等傳)」
유복 · 안수충 · 공수정 · 담연미 · 원달 · 상사덕 · 윤계륜 · 설초 , 정한 조도, · 곽밀 , 부사양 이빈(李斌), · 전인랑 · 유겸
276권 「유보훈등전(劉保勳等傳)」
유보훈 · 등중정 · 유반 · 공승공 · 송당 · 원곽 · 번지고 , 곽재, · 장병(臧丙) · 서휴복 · 장관 · 진종신 · 장평 · 왕계승 · 윤헌 · 왕빈(王賓) · 안충
277권 「장감등전(張鑒等傳)」
장감(張鑒) · 요탄 · 삭상 · 송태초 · 노지한 · 정문보 · 왕자여 · 유종 · 변곤 · 허양 · 배장 · 우면 , 장적, · 난숭길 · 원봉길 · 한국화 · 하몽 · 신지례
278권 「마전의등전(馬全義等傳)」
마전의 · 뇌덕양 · 왕초(王超)
279권 「왕계충등전(王繼忠等傳)」
왕계충 · 부잠 · 대흥 · 왕한충 · 왕능 · 장응 · 위능 · 진흥 · 허균 · 장진 · 이중귀 · 호연찬 · 유용 · 경전빈 · 주인미
280권 「전소빈등전(田紹斌等傳)」
전소빈 · 왕영 · 양경(楊瓊) · 전수준 · 서흥 · 왕고 · 이중회 · 백수소 · 장사윤 · 이기 · 왕연범
281권 「여단등전(呂端等傳)」 282권 「이항등전(李沆等傳)」 283권 「왕흠약등전(王欽若等傳)」
여단 · 필사안 · 구준 이항 · 왕단 · 상민중 왕흠약 · 임특 · 정위 · 하송
284권 「진요좌등전(陳堯佐等傳)」 285권 「진집중등전(陳執中等傳)」 286권 「노종도등전(魯宗道等傳)」
진요좌 · 송상 진집중 · 유항 · 가창조 · 양적 · 풍증 노종도 · 설규 · 왕서(王曙) · 채제
287권 「양려등전(楊礪等傳)」 288권 「임중정등전(任中正等傳)」
양려 · 송식 · 양사종 · 이창령 · 조안인 · 진팽년 임중정 · 주기 · 정림 · 강준 · 범옹 · 조진(趙稹) · 임포(任布) · 고약눌 · 손면
289권 「고경등전(髙瓊等傳)」 290권 「조이용등전(曹利用等傳)」
고경 · 범정소 · 갈패 조이용 , 손계엄, · 장기(張耆) · 양숭훈 · 하수은 · 적청 , 장옥 손절, · 곽규
291권 「오육등전(吳育等傳)」
오육 · 송수 · 이약곡 · 왕박문 · 왕종
292권 「이자등전(李諮等傳)」
이자 · 정감 · 하후교 · 성도(盛度) · 정도 · 장관 · 정전 · 명호 · 왕요신 · 손변 · 전황
293권 「전석등전(田錫等傳)」
전석 · 왕우칭 · 장영(張詠)
294권 「장우석등전(掌禹錫等傳)」
장우석 · 소신 · 왕수(王洙) · 서언 · 유식(柳植) · 섭관경 · 풍원 · 조사민 · 장석 · 장규 · 양안국
295권 「윤수등전(尹洙等傳)」
윤수 · 손보 · 사강 · 엽청신 · 양찰
296권 「한비등전(韓丕等傳)」
한비 · 사항 · 장무직 · 양호 · 양휘지 · 여문중 · 왕저 · 여우지 · 반신수 · 두호
297권 「공도보등전(孔道輔等傳)」
공도보 · 국영 · 유수 · 조수고 · 곽권 · 단소련
298권 「팽승등전(彭乘等傳)」
팽승 · 혜영 · 매지 · 사마지 · 이급 · 연숙 · 장당 · 유기(劉夔) · 마량 · 진희량
299권 「적비등전(狄棐等傳)」
적비 · 낭간 · 손조덕 · 장약곡 · 석양휴 · 조사형 · 이수 · 장동 · 이사형 · 이부(李溥) · 호칙 · 설안 · 허원 · 종리근 · 손충 · 최역 · 전유 · 시창언
300권 「양해등전(楊偕等傳)」
양해 · 왕연(王沿) · 두기 · 양전(楊畋) · 주담 · 서적(徐的) · 요중손 · 진태소 , 마심 두증, · 이허기 · 장부 · 유헌경 · 진종역 · 양대아
301권 「변숙등전(邊肅等傳)」
변숙 · 매순 · 마원방 · 설전 · 구감 · 양일엄 · 이행간 · 장빈 · 진염 · 이유 · 장병(張秉) · 장택행 · 정향 · 곽진(郭稹) · 조하(趙賀) · 고적(高覿) · 원항 · 서기 · 장지 · 제곽 · 정양
302권 「왕진등전(王臻等傳)」
왕진 · 어주순 · 가암 · 이경(李京) · 여경초 · 오급 · 범사도 · 이현 · 하중립 · 심막
303권 「장온지등전(張昷之等傳)」
장온지 · 위관 · 등종량 · 이방(李防) · 조상 · 당숙 · 장술 · 황진(黃震) · 호순지 · 진관(陳貫) · 범상 · 전경
304권 「주위등전(周渭等傳)」
주위 · 양정(梁鼎) · 범정사 · 유사도 · 왕제 · 방해 · 조영숙 · 유원유 · 양고 · 조급 · 유식(劉湜) · 왕빈(王彬) · 중간
305권 「양억등전(楊億等傳)」 306권 「사필등전(謝泌等傳)」
양억 · 조형 · 유균 · 설앙 사필 · 손하 · 주태부 · 척륜 · 장거화 · 악황목 · 시성무
307권 「교유악등전(喬維岳等傳)」
교유악 · 왕척 · 장옹 · 동엄 · 위정식 · 노염 · 송단 · 능책 · 양담 · 진세경 · 이약졸 · 진지미
308권 「상관정등전(上官正等傳)」
상관정 · 노빈 · 주심옥 · 배제 · 이계선 · 장단 · 장후 · 장길
309권 「왕연덕등전(王延德等傳)」
왕연덕 · 상연신 · 정덕현 · 우연덕 · 위진(魏震) · 장질 · 양윤공 · 진희 · 사덕권 · 염일신 · 근회덕
310권 「이적등전(李迪等傳)」 311권 「안수등전(晏殊等傳)」
이적 · 왕증 · 장지백 · 두연 안수 · 방적 · 왕수(王隨) · 장득상 · 여이간 · 장사손
312권 「한기등전(韓琦等傳)」 313권 「부필등전(富弼等傳)」 314권 「범중엄등전(范仲淹等傳)」
한기 · 증공량 · 진승지 · 오충 · 왕규 부필 · 문언박 범중엄 · 범순인
315권 「한억전(韓億傳)」 316권 「포증등전(包拯等傳)」 317권 「소항등전(邵亢等傳)」
한억 포증 · 오규 · 조변 · 당개 소항 · 풍경 · 전유연
318권 「장방평등전(張方平等傳)」 319권 「구양수등전(歐陽修等傳)」 320권 「채양등전(蔡襄等傳)」
장방평 · 왕공진 · 장변 · 조개(趙槩) · 호숙 구양수 · 유창(劉敞) · 증공 채양 · 여진 · 왕소(王素) · 여정 · 팽사영 · 장존
321권 「정해등전(鄭獬等傳)」
정해 · 진양(陳襄) · 전공보 · 손수 · 풍직 · 여회 · 유술 · 유기(劉琦) · 전의 · 정협
322권 「하담등전(何郯等傳)」
하담(何郯) · 오중복 · 진천 · 왕렵 · 손사공 · 주맹양 · 제회 · 양회 · 유상 · 주경(朱京)
323권 「울소민등전(蔚昭敏等傳)」
울소민 · 고화 · 주미 · 염수공 · 맹원 · 유겸 · 조진(趙振) · 장충 · 범각 · 마회덕 · 안준 · 상보
324권 「석보등전(石普等傳)」 325권 「유평등전(劉平等傳)」
석보 · 장자 · 허회덕 · 이윤칙 · 장항 · 유문질 · 조자 유평 · 임복 · 왕규 · 무영 · 상역 · 경부 · 왕중보
326권 「경태등전(景泰等傳)」
경태 · 왕신(王信) · 장해 · 장충 · 곽은 · 장절(張岊) · 장군평 · 사방 · 노감 · 이위 · 왕과 · 곽자 · 전민 · 시기서 · 강덕여 · 장소원
327권 「왕안석등전(王安石等傳)」
왕안석 · 왕안례 · 왕안국
328권 「이청신등전(李淸臣等傳)」
이청신 · 안도 · 장조(張璪) · 포종맹 · 황리 · 채정(蔡挺) · 왕소(王韶) · 설향 · 장절(章楶)
329권 「상질등전(常秩等傳)」
상질 · 등관 · 이정(李定) · 서단 · 건주보 · 서탁 · 왕광연 · 왕도 · 왕자소 · 하정신 · 진역
330권 「임전등전(任顓等傳)」
임전 · 이참 · 곽신창 · 부구 · 장경헌 · 두변 · 장괴 · 손유 · 허준 · 노사종 · 전상선 · 두순 · 두상 · 사린 · 왕종망 · 왕길보
331권 「손장경등전(孫長卿等傳)」
손장경 · 주항 · 이중사 · 나증 · 마중보 · 왕거경 · 손구 · 장선 · 소심 · 마종선 · 심구 · 이대림 · 여하경 · 조무택 · 정사맹 · 장문 , 진순유 악경 유몽, · 묘시중 · 한지 · 초건중 · 장힐 · 노혁
332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등원발 · 이사중 · 육선 · 조설 · 손로 · 유사웅 · 목연
333권 「양좌등전(楊佐等傳)」
양좌 · 이태(李兌) · 심립 · 장섬 · 장도 · 유충 · 유근 · 염순 · 갈궁 · 장전 · 영인 · 이재 · 요환 · 주경(朱景) · 이종 · 주수륭 · 노사굉 · 단후 · 양중원 · 여양굉 · 반숙
334권 「등원발등전(滕元發等傳)」
서희 , 이직(李稷), · 고영능 · 심기(沈起) · 유이 · 웅본 · 소주 · 도필 · 임광
335권 「충세형전(种世衡傳)」 336권 「사마광등전(司馬光等傳)」 337권 「범진전(范鎭傳)」
충세형 사마광 · 여공저 범진
338권 「소식전(蘇軾傳)」 339권 「소철전(蘇轍傳)」 340권 「여대방등전(呂大防等傳)」
소식 소철 여대방 · 유지 · 소송
341권 「왕존등전(王存等傳)」 342권 「양도등전(梁燾等傳)」
왕존 · 손고(孫固) · 조첨 · 부요유 양도 · 왕암수 · 정옹 · 손영
343권 「원강등전(元絳等傳)」 344권 「손각등전(孫覺等傳)」
원강 · 허장 · 등윤보 · 임희 · 장지기 · 육전 · 오거후 · 온익 손각 · 이상(李常) · 공문중 · 이주 · 선우신 · 고림 · 이지순 · 왕적 · 마묵
345권 「유안세등전(劉安世等傳)」
유안세 · 추호 , 전주 왕회(王回) 증탄, · 진관(陳瓘) · 임백우
346권 「진차승등전(陳次升等傳)」
진차승 · 진사석 · 팽여려 · 여도 · 장정견 · 공결 · 손악 · 진헌 · 강공망 · 진우 · 상안민
347권 「손고등전(孫鼛等傳)」
손고(孫鼛) · 오시 · 이소기 · 오사례 · 왕한지 · 황렴 · 주복 · 장순민 · 성도(盛陶) · 장형 · 안복 · 손승 · 한천 · 공정신 · 정목 · 석단 · 교집중
348권 「부즙등전(傅楫等傳)」
부즙 · 심기(沈畸) , 소복, · 서적(徐勣) · 장여명 · 황보광 · 석공필 , 장극공, · 모주 · 홍언승 · 종전 · 도절부 · 모잠 · 왕조도 · 장장 · 조휼
349권 「학질등전(郝質等傳)」
학질 · 가규 · 두순경 · 유창조 · 노정 · 연달 · 요시 · 양수 · 유순경 · 송수약
350권 「묘수등전(苗授等傳)」
묘수 · 왕군만 · 장수약 · 왕문욱 · 주영청 · 유소능 · 왕광조 · 이호 · 화빈 · 유중무 · 곡진 · 유격 · 곽성 · 가암 · 장정(張整) · 장온 · 왕은 · 양응순 · 조륭
351권 「조정지등전(趙挺之等傳)」
조정지 · 장상영 · 유정부 · 하집중 · 정거중 · 안요신 · 장강국 · 주악 · 유규 · 임터 · 관사인 · 후몽
352권 「당각등전(唐恪等傳)」
당각 · 이방언 , 여심 설앙 오민 왕안중 왕양 조야 조보(曹輔) 경남중 왕우(王㝢),
353권 「하율등전(何㮚等傳)」
하율 · 손부 · 진과정 · 장숙야 · 섭창 · 장각(張閣) · 장근(張近) · 정근 · 우문창령 · 허기 · 정지소 · 공원 · 최공도 · 포유
354권 「심수등전(沈銖等傳)」
심수 · 노창형 · 사문관 · 육온 · 황식 · 요우 · 누이 · 심적중 · 이백종 · 왕해 · 하상 · 엽조흡 · 시언 · 최단우 · 유율 · 채의
355권 「가역등전(賈易等傳)」
가역 · 동돈일 · 상관균 · 내지소 · 엽도 · 양외 · 최태부 · 양급 · 여가문 · 이남공 · 동필 · 우책 · 곽지장
356권 「유증등전(劉拯等傳)」
유증 · 전휼 · 석예 · 좌부 · 허돈인 · 오집중 · 오재 · 유병 · 송교년 · 강연명 · 채거후 · 유사명 · 장정(蔣靜) · 가위절 · 최언 · 장근(張根) · 임량 · 주상
357권 「하관등전(何灌等傳)」 358·359권 「이강전(李綱傳)」
하관 · 이희정 · 왕운 · 담세적 · 매집례 · 정진(程振) · 유연경 이강
360권 「종택등전(宗澤等傳)」 361권 「장준전(張浚傳)」
종택 · 조정(趙鼎) 장준(張浚)
362권 「주승비등전(朱勝非等傳)」 363권 「이광등전(李光等傳)」
주승비 · 여이호 · 범종윤 · 범치허 · 여호문 이광 · 허한 · 허경형 · 장각(張愨) · 장소(張所) · 진화 · 장유(蔣猷)
364권 「한세충전(韓世忠傳)」 365권 「악비전(岳飛傳)」 366권 「유기등전(劉錡等傳)」
한세충 악비 유기(劉錡) · 오개 · 오린
367권 「이현충등전(李顯忠等傳)」 368권 「왕덕등전(王德等傳)」
이현충 · 양존중 · 곽호(郭浩) · 양정(楊政) 왕덕 · 왕언 · 위승 · 장헌 · 양재흥 · 우고 · 호굉휴
369권 「장준등전(張俊等傳)」 370권 「왕우직등전(王友直等傳)」
장준(張俊) · 장종안 · 유광세 · 왕연(王淵) · 해원 · 곡단 왕우직 · 이보 · 성민 · 조밀 · 유자우 · 여지 · 호세장 · 정강중
371권 「백시중등전(白時中等傳)」
백시중 · 서처인 · 풍해 · 왕륜(王倫) · 우문허중 · 탕사퇴
372권 「주탁등전(朱倬等傳)」
주탁 · 왕륜(王綸) · 윤색 · 왕지망 · 서부 · 심여구 · 적여문 · 왕서(王庶) · 신병
373권 「주변등전(朱弁等傳)」 374권 「장구성등전(張九成等傳)」
주변 · 정망지 · 장소(張邵) · 홍호 장구성 · 호전 · 요강 · 이태(李迨) · 조개(趙開)
375권 「등숙등전(鄧肅等傳)」 376권 「상동등전(常同等傳)」
등숙 · 이병 · 등강 · 장수 · 부직유 · 풍강국 상동 · 장치원 · 설휘언 · 진연 · 위강 · 반량귀 · 여본중
377권 「상자인등전(向子諲等傳)」
상자인 · 진규(陳規) · 이릉 · 노지원 · 이구(李璆) · 이박 · 왕상 · 왕의 · 진각
378권 「위부민등전(衞膚敏等傳)」
위부민 · 유각 · 호순척 · 심해 · 유일지 · 호교수 · 기숭례
379권 「장의등전(章誼等傳)」
장의 · 한초주 · 진공보 · 장학 · 호송년 · 조훈(曹勛) · 이직(李稙) · 한공예
380권 「하주등전(何鑄等傳)」
하주 · 왕차옹 · 범동 · 양원 · 누소 · 구룡여연 · 설필 · 나여즙 · 소진
381권 「범여규등전(范如圭等傳)」
범여규 · 오표신 · 왕거정 · 안돈복 · 황귀년 · 정우(程瑀) · 장천 · 홍의 · 조규(趙逵)
382권 「장도등전(張燾等傳)」 383권 「진준경등전(陳俊卿等傳)」
장도 · 황중 · 손도부 · 증기 · 구도 · 이미손 진준경 · 우윤문 · 신차응
384권 「진강백등전(陳康伯等傳)」 385권 「갈필등전(葛邲等傳)」
진강백 · 양극가 · 왕철 · 엽의문 · 장패 · 엽옹 · 엽형 갈필 · 전단례 · 위기 · 주규 · 시사점 · 소수 · 공무량
386권 「유공등전(劉珙等傳)」 387권 「황흡등전(黃洽等傳)」
유공 · 왕린 · 황조순 · 왕대보 · 금안절 · 왕강중 · 이언영 · 범성대 황흡 · 왕응진 · 왕십붕 · 오패 · 진량한 · 두신로
388권 「주집고등전(周執羔等傳)」 389권 「우무등전(尤袤等傳)」
주집고 · 왕희여 · 진양우 · 이호 · 진탁 · 호기 · 당문약 · 이도(李燾) 우무 · 사악 · 안사로 · 원추 · 이춘 · 유의봉 · 장효상
390권 「이형등전(李衡等傳)」
이형 · 왕자중 · 가원 · 장강 · 장대경 · 채광 · 막몽 · 주종 · 유장 · 심작빈
391권 「주필대등전(周必大等傳)」 392권 「조여우전(趙汝愚傳)」
주필대 · 유정 · 호진신 조여우
393권 「팽귀년등전(彭龜年等傳)」
팽귀년 · 황상 · 나점 · 황도 , 주남, 임대중 · 진규(陳騤) · 황보 · 첨체인
394권 「호굉등전(胡紘等傳)」
호굉 · 하담(何澹) · 임율 · 고문호 · 진자강 · 정병 · 경당 · 사심보 · 허급지 · 양여가
395권 「누약등전(樓鑰等傳)」
누약 · 이대성 · 임희이 · 서응룡 · 장하 · 왕원 · 왕질 · 육유 · 방신유 · 왕남
396권 「사호등전(史浩等傳)」 397권 「서의등전(徐誼等傳)」
사호 · 왕회(王淮) · 조웅 · 권방언 · 정송 · 진겸 · 장암 서의 · 오렵 · 항안세 · 설숙사 · 유갑 · 양보 · 유광조
398권 「여단례등전(余端禮等傳)」 399권 「정각등전(鄭瑴等傳)」
여단례 · 이벽 · 구화 · 예사 · 우문소절 · 이번(李蘩) 정각 · 왕정수 · 구여 · 고등 · 누인량 · 송여위
400권 「왕신등전(王信等傳)」
왕신(王信) · 왕대유 · 원섭 · 오유승 · 유중홍 · 이상(李祥) · 왕개 · 송덕지 · 양대전
401권 「신기질등전(辛棄疾等傳)」 402권 「진민등전(陳敏等傳)」
신기질 · 하이 · 유재(劉宰) · 유약(劉爚) · 시중행 · 이맹전 진민 · 장조(張詔) · 필재우 · 안병 · 양거원 · 이호의
403권 「조방등전(趙方等傳)」 404권 「왕약해등전(汪若海等傳)」
조방 · 가섭 · 호재흥 · 맹종정 · 장위 왕약해 · 장운 · 유약(柳約) · 이순신 · 손봉길 · 장영(章穎) · 상비경 · 유영 · 서방헌
405권 「이종면등전(李宗勉等傳)」 406권 「최여지등전(崔與之等傳)」 407권 「두범등전(杜範等傳)」
이종면 · 원보 · 유불 · 왕안거 최여지 · 홍자기 · 허혁 · 진거인 · 유한필 두범 · 양간 · 전시 · 장복 · 여오
408권 「오창예등전(呉昌裔等傳)」 409권 「고정자등전(高定子等傳)」 410권 「누기등전(婁機等傳)」
오창예 · 왕강 · 진복 · 왕정 고정자 · 고사득 · 장충서 · 당린 누기 · 심환 · 조언약 · 범응령 · 서경손
411권 「탕숙등전(湯璹等傳)」 412권 「맹공등전(孟珙等傳)」
탕숙 · 장중진 · 모자재 · 주비손 · 구양수도 맹공 · 두고 · 왕등 · 양섬 · 장유효 · 진함
413권 「조여담등전(趙汝談等傳)」 414권 「사미원등전(史彌遠等傳)」
조여담 · 조여당 · 조희관 · 조언눌 · 조선상 · 조여환 · 조필원 사미원 · 정청지 · 사숭지 · 동괴 · 엽몽정 · 마정란
415권 「부백성등전(傅伯成等傳)」
부백성 · 갈홍 · 증삼복 · 황주약 · 원소 · 위진(危稹) · 정공허 · 나필원 · 왕수(王遂)
416권 「오연등전(吳淵等傳)」
오연 · 여개 · 왕입신 · 상사벽 · 호영 · 냉응징 · 조숙원 · 왕만 · 마광조
417권 「교행간등전(喬行簡等傳)」 418권 「오잠등전(呉潛等傳)」
교행간 · 범종 · 유사 · 조규 · 사방숙 오잠 · 정원봉 · 강만리 · 왕약 · 장감(章鑑) · 진의중 · 문천상
419권 「선증등전(宣繒等傳)」
선증 · 설극 · 진귀의 · 증종룡 · 정성지 · 이명복 · 추응룡 · 여천석 · 허응룡 · 임략 · 서영수 · 별지걸 · 유백정 · 김연 · 이성전 · 진위 · 최복
420권 「왕백대등전(王伯大等傳)」
왕백대 · 정채 · 응요 · 서청수 · 이증백 · 왕야 · 채항 · 장반 · 마천기 · 주습 · 요호신 · 대경가 · 피룡영 · 심염
421권 「양동등전(楊棟等傳)」
양동 · 요희득 · 포회 · 상정 · 진종례 · 상무 · 가현옹 · 이정지
422권 「임훈등전(林勳等傳)」
임훈 · 유재소 · 허흔 · 응맹명 · 증삼빙 · 서교 · 도정 · 정필 · 우대년 · 진중미 · 양성대 · 이지효
423권 「오영등전(吳泳等傳)」
오영(吳泳) · 서범 · 이소 · 왕매 · 사미공 · 진훈 · 조여주 · 이대동 · 황순 · 양대이
424권 「육지지등전(陸持之等傳)」
육지지 · 서록경 · 조봉룡 · 조여등 · 손몽관 · 홍천석 · 황사옹 · 서원걸 · 손자수 · 이백옥
425권 「유응룡등전(劉應龍等傳)」
유응룡 · 반방 · 홍근 · 조경위 · 풍거비 · 서림 · 서종인 · 위소덕 · 진개 · 양문중 · 사방득
426권 「순리전(循吏傳)」
진정 · 장륜 · 소엽 · 최립 · 노유개 · 장일 · 오준로 · 조상관 · 고부 · 정사맹 · 한진경 · 엽강직
427·428·429·430권 「도학전(道學傳)」
주돈이 · 정호 · 정이 · 장재 · 소옹 · 유현 · 이유 · 사량좌 · 유초 · 장역 · 소병 · 윤돈 · 양시 · 나종언 · 이동 · 주희 · 장식 · 황간 · 이번(李燔) · 장흡 · 진순 · 이방자 · 황호
431·432·433·434·435·436·437·438권 「유학전(儒學傳)」
섭숭의 · 형병 · 손기 · 왕소소 · 공유 · 공의 · 최송 · 윤졸 · 전민 · 신문열 · 이각 · 최이정 · 이지재 · 호탄 · 가동 · 유안(劉顔) · 고변 · 손복 · 석개 · 호원 · 유희수 · 임개 · 이구(李覯) · 하섭 · 왕회(王回) · 주요경 · 왕당 · 진양(陳暘) · 소백온 · 유저 · 홍흥조 · 고항 · 정대창 · 임지기 · 임광조 · 양만리 · 유자휘 · 여조겸 · 채원정 · 육구령 · 육구연 · 설계선 · 진부량 · 엽적 · 대계 · 채유학 · 양태지 · 범충 · 주진 · 호안국 · 진량 · 정초 · 이도전 · 정형 · 유청지 · 진덕수 · 위료옹 · 요덕명 · 탕한 · 하기 · 왕백 · 서몽신 · 이심전 · 엽미도 · 왕응린 · 황진(黃進)
439·440·441·442·443·444·445권 「문원전(文苑傳)」
송백 · 양주한 · 주앙 · 조인기 · 정기 · 곽욱 · 마응 · 화현 · 풍길 · 고적(高頔) · 이도(李度) · 한부 · 국상 · 송준 · 유개 · 하후가정 · 나처약 · 안덕유 · 전희 · 진충 · 오숙 · 황이간 · 서현 · 구중정 · 증치요 · 조간 · 요현 · 이건중 · 홍담 · 노진 · 최준도 · 진월 · 목수 · 석연년 · 소관 · 소순흠 · 윤원 · 황항 · 황감 · 양파 · 안태초 · 곽충서 · 매요신 · 강휴복 · 소순 · 장망지 · 왕봉 · 손당경 · 당경 · 문동 · 양걸 · 하주 · 유경 · 포유 · 황백사 · 황정견 · 조보지 · 진관(秦觀) · 장뢰 · 진사도 · 이치 · 유서 · 왕무구 · 채조 · 이격비 · 여남공 · 곽상정 · 미패 · 유선 · 예도 · 이공린 · 주방언 · 주장문 · 유엄 · 진여의 · 왕조 · 엽몽득 · 정구 · 장얼 · 한구 · 주돈유 · 갈승중 · 웅극 · 장즉지
446·447·448·449·450·451·452·453·454·455권 「충의전(忠義傳)」
강보예 · 마수 · 동원형 · 조근 · 소함 · 진전서 · 첨량신 · 이약수 · 유겹 · 부찰 · 양진 · 장극전 · 장확 · 주소 · 사항 · 손익(孫翊) · 곽안국 · 이연 · 이막 · 서규 · 진구 · 조불시 · 조령성 · 당중 · 서휘언 · 상자소 · 양방예 · 증고 · 유급 · 정양 · 여유성 · 곽영 · 한호 · 구양순 · 장충보 · 이언선 · 조립 · 왕충식 · 당기 · 이진 · 진구도 · 최종 · 임충지 · 등무실 · 위행가 · 염진 · 조사가 · 역청 · 호빈 · 범왕 · 마준 · 양진중 · 고가 · 조우문 · 진인 · 허표손 · 진륭지 · 왕익 · 이성지 · 진원규 · 장순 · 범천순 · 우부 · 변거의 · 진소 · 윤옥 · 이불 · 윤곡 · 조묘발 · 당진(唐震) · 조여석 · 조회 · 조양순 · 강재 · 마기 · 밀우 · 장세걸 · 육수부 · 서응표 · 진문룡 · 등득우 · 장각(張珏) · 고민 · 경사충 · 왕기 · 장흥조 · 곽호(郭滸) · 오혁 · 이익 · 조사륭 · 진쉬 · 황우 · 학중련 · 유유보 · 우호 · 위언명 · 유사영 · 적흥 · 주필 · 공즙 · 이긍 · 능당좌 · 양수중 · 강예 · 곽선 · 사마몽구 · 임공재 · 황개 · 손익(孫益) · 왕선 · 오초재 · 이성대 · 도거인 · 고영년 · 국사복 · 손소원 · 증효서 · 조백진 · 왕사언 · 설경 · 손휘 · 송창조 · 이정(李政) · 강수 · 유선 · 굴견 · 정담 · 요흥 · 장기(張玘) · 왕공 · 유태 · 손봉 · 유화원 · 호당로 · 왕주 · 유안(劉晏) · 정진(鄭振) · 맹언경 · 고담 · 연만부 · 설양현 · 당민구 · 왕사도 · 조시상 · 조희계 · 유자천 · 여문신 · 종계옥 · 경세안 · 정보 · 미립 · 후핍 · 왕효충 · 고응송 · 장선옹 · 황신 · 진달 · 소뇌룡 · 추붕 · 유사소 · 진동 · 구양철 · 마신 · 여조검 · 양굉중 · 화악 · 등약수 · 진보 · 모겸지 · 서도명
456권 「효우전(孝友傳)」
이린 · 서승규 · 유효충 · 여승 · 나거통 · 제득일 · 이한징 · 형신류 · 허조 · 호중요 · 진긍 · 홍문무 · 역연경 · 동도명 · 곽종 · 고흔 · 주태 · 성상 · 진사도 · 방강 · 방천우 · 유빈 · 번경온 · 영서민 · 기위 · 하보지 · 이빈(李玭) · 후의 · 왕광제 · 강백 · 구승순 · 상진 · 두의(杜誼) · 요종명 · 등중화 · 모안여 · 이방(李訪) · 주수창 · 후가 · 신적중 · 학인 · 지점 · 등종고 · 심선 · 소경문 · 태형 · 앙흔 · 조백심 · 팽유 · 모순 · 양경(楊慶) · 진종 · 곽의 · 신세녕 · 구여령 · 왕주(王珠) · 안후 · 장백위 · 채정(蔡定) · 정기
457·458·459권 「은일·탁행전(隱逸卓行傳)」
척동문 · 진단 · 충방 · 만적 · 이독 · 위야 · 형돈 · 임포(林逋) · 고역 · 서복 · 공민 · 하군 · 왕초(王樵) · 장유(張愈) · 황희 · 주계명 · 대연 · 진열 · 손모 · 유역 · 강잠 · 연서 · 장찰 · 유여상 · 양효본 · 등고보 · 우문지소 · 오영(吳瑛) · 송강어옹 · 두생 · 순창선인 · 남안옹 · 장여 · 서중행 · 소운경 · 초정 · 왕충민 · 유면지 · 호헌 · 곽옹 · 유우(劉愚) · 위섬지 · 안세통 · 유정식 · 소곡 · 서적(徐積) · 증숙경 · 유영일
460권 「열녀전(列女傳)」
주아 · 학절아 · 진당전 · 여양자 · 동팔나 · 한희맹 · 모석석
461·462권 「방기전(方伎傳)」
조수기 · 왕처눌 · 묘훈 · 마소 · 초지란 · 한현부 · 사서 · 주극명 · 유한 · 왕회은 · 조자화 · 풍문지 · 홍온 · 소징은 · 정소미 · 조자연 · 하란서진 · 시통현 · 견서진 · 초연 · 지언 · 회병 · 허희 · 방안시 · 전을 · 지연 · 곽천신 · 위한진 · 왕노지 · 왕자석 · 임령소 · 황보탄 · 왕극명 · 사의도인 · 손수영
463·464·465권 「외척전(外戚傳)」
두심기 · 하영도 · 왕계훈 · 유지신 · 유문유 · 유미 · 곽숭인 · 양경종 · 부유충 · 시종경 · 장요좌 · 왕이영 · 이소량 · 이용화 · 이준욱 · 조일 · 고준유 · 상전범 · 장돈례 · 임택 · 맹충후 · 위연 · 전침 · 형환 · 반영사 · 오익 · 이도(李道) · 정흥예 · 양차산
466·467·468·469권 「환자전(宦者傳)」
두신보 · 왕인예 · 왕계은 · 이신복 · 유승규 · 염승한 · 진한 · 주회정 · 장귀숭 · 장계능 · 위소흠 · 석지옹 · 등수은 · 양수진 · 한수영 · 남계종 · 장유길 · 감소길 · 노수근 · 왕수규 · 이헌 · 장무칙 · 송용신 · 왕중정 · 이순거 · 석득일 · 양종길 · 유유간 · 이상(李祥) · 진연 · 풍세녕 · 이계화 · 고거간 · 정방 · 소이섭 · 뇌윤공 · 염문응 · 임수충 · 동관 · 양사성 · 양전(楊戩) · 소성장 · 남규 · 풍익 · 마거위 · 진원 · 감변 · 왕덕겸 · 관례 · 동송신
470권 「영행전(佞幸傳)」
미덕초 · 후막진리용 · 조찬 · 왕보 · 주면 · 왕계선 · 증적 · 장설 · 왕변 · 강특립
471·472·473·474권 「간신전(姦臣傳)」
채확 · 형서 · 여혜경 · 장돈 · 증포 · 안돈 · 채경 · 조양사 · 장각(張覺) · 곽약사 · 황잠선 · 왕백언 · 진회 · 묵기설 · 한탁주 · 정대전 · 가사도
475·476·477권 「반신전(叛臣傳)」
장방창 · 유예 · 묘부 · 두충 · 오희 · 이전
478권 「남당세가(南唐世家)」 479권 「서촉세가(西蜀世家)」 480권 「오월세가(吳越世家)」
이경(李景) 맹창 전홍숙
481권 「남한세가(南漢世家)」 482권 「북한세가(北漢世家)」 483권 「호남·형남·장천·진세가(湖南荊南漳泉陳世家)」
유창(劉鋹) 유계원 주행봉 · 고보융 · 유종효 · 진홍진
484권 「주3신전(周三臣傳)」
한통 · 이균 · 이중진
485·486·487·488·489·490·491·492권 「외국전(外國傳)」
서하 · 고려 · 교지( 정조 전여조 이조 진조) · 대리 · 점성 · 진랍 · 포감 · 막려 · 삼불제 · 도파 · 발니 · 주련 · 단미류 · 천축국 · 우전 · 고창 · 회골 · 대식국 · 층단국 · 구차 · 사주 · 불름국 · 유구국 · 정안국 · 발해 · 일본 · 당항 · 토번
493·494·495·496권 「만이전(蠻夷傳)」
계동만 · 매산동만 · 성주만 · 휘주만 · 남단주만 · 무수주만 · 황원주만 · 여동만 · 환주만 · 서남이 · 여주만 · 공부천 · 풍파만 · 보새만 · 미강만 · 동만 · 석문부 · 남광만 · 보패만 · 무주부 · 유주만 · 검주만 · 시주만 · 고주만 · 육수만 · 준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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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나라가 화북을 정복하면서 강남(중국)으로 밀려나 남송이 되었고, 이후 몽골 제국에 멸망하는 순간까지 다시는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다. 또한 한족 역사상 3대 굴욕 중 하나인 정강의 변을 당한 황제이기도 하다. [2] 이는 유교 예법상으로도 적장자로 태어났어도 상속받지 못하는 사유에 속한다. 제사를 올리려면 제문을 읽고 절을 해야하는데 장님과 앉은뱅이는 제주의 역할을 할수 없기에 동생이나 자식에게 장손지위를 넘겨야 하는 것. [3] 신종의 정실 부인이자 황후였던 흠성황후 상씨로 명재상 상민중(向敏中)의 증손녀이다. 신종과의 사이에서는 주국장공주(周國長公主)를 낳았지만 11세 나이에 요절했고 이후 자녀를 얻지 못했다. 상씨는 철종과 휘종에게 친어머니가 아니지만 아버지의 정실 부인이므로 '어머니'였다. 당시 황실 어른 중에서도 가장 어른이기도 했다. [4] <송사> 간신편에 증포 역시 수록되었다. 그는 장돈이 재상이 되었을 때 철종 앞에서 장돈을 잘 대해주고 계속 칭찬하면서 내심 장돈이 자신을 칭찬해주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부터 매몰차고 정치적 계략을 잘 쓰고 알던 장돈은 평소처럼 사심 없이 일을 처리할 뿐 증포를 추천하지 않아 증포가 원한을 품었다. [5] 증포는 철종 친정기 때 원우당인 사건이 일어나자 평소 자신과 처남에게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라고 찍힌 구양비를 원우당인이라고 모함해 지방지주로 좌천시키고, 장돈 역시 '황제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장돈을 두려워하니까 내가 탄핵한다.'고 주장해 공격했다. 하지만 이때 장돈은 철종에게 사마광 등의 위훈, 명예, 묘비 등을 파괴하면 아니된다고 주장해 관철시키고, 여러 명사들을 추천해 등용케 했기에 증포의 이런 주장은 동의를 받지 못했다. [6] 채경의 친동생이자 왕안석의 사위. 신법파였으며 철종 친정 당시 구법파와 상당히 대립하고 원우당인 사건에서도 구법파 탄압에 앞장선 까닭에 구법파 관료들에게 원성을 많이 들었다. 그는 형 채경과 마찬가지로 서예가로도 유명했지만 형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7] 흠성황후 상씨(欽聖皇后 向氏) [8] 흠성황후 주씨(欽成皇后 朱氏)로 당시에는 덕비 주씨라고 불렸다. 따라서 덕비의 아들 철종은 적자가 아닌 서자였다. [9] 물론 상태후 생전에는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균형적 인사 속에서 재상으로 증포가 선택되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 [10] 여담이지만 한충언은 키가 크고 증포는 키가 광장히 작았다고 한다. [11] 부역은 그 자체가 세금의 일부이다. 따라서 세금에도 세율이 있듯이 부역에도 정도가 있어서 매년 일정 일수까지만 부과하고, 이보다 더 부과할 경우 다른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제도적 보완책이 있었다. 그런데 벼슬아치들이 황제의 새로운 정원을 꾸민답시고 그 기준을 넘겨서 마구잡이로 부역을 부과했기에 문제가 된 것. 즉 현대 기준으로 말하자면 '별로 긴급하지도 않은 이유로 임시추가과세를 마구 때렸다' 정도로 보면 된다. [12] 여기서 강(綱) 자는 '벼리 강'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벼리란 그물의 위쪽 코를 꿰는 줄을 가리킨다. 벼리를 잡아야 그물을 펴고 거둘 수 있다. 여기서 의미가 파생하여 '요점'이란 뜻으로도 쓰였고, 당송시대에는 어떤 물품을 일괄배송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러니까 화석강(花石綱)이란 '꽃과 돌을 왕창 (황제 계신 수도로) 보낸다.', 또는 그렇게 보내는 물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13] 수호전의 등장인물 양지도 화석강 운반 감독이었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했는데, 이때 감히 황제폐하의 돌을 가라앉혔다(...)는 죄목으로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녔다. 이후 사면령이 내려져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임충과 충돌하는 것이 작중에서의 첫 등장. 당연하지만 이 화석강을 운반하면서 많은 백성들은 일당도 받지 못하고 다치거나 죽는 것과 동시에 집과 논밭 등 생계터전도 잃어버린다. [14] 다만 이때 송나라 군대는 심하게 약화된터라 방랍의 반군을 제대로 진압못하고 반군에게 패하고 말아서 다시 진압군을 보낸터라 진압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 [15] 비록 송왕조가 문치주의로 군사력이 약하기도 해도 황제가 있는 수도가 적들에게 두번이나 쉽게 점령될 정도는 아니었고 경제력도 풍부하였으나 송휘종의 실정으로 국경은 커녕 수도와 황궁을 지킬 군사력도 없었고 국가재정은 바닥이었기에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자원도 동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송휘종과 조정에 대한 민심이 최악이라서 의병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악비나 한세충 등 의병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도 송고종이 남송을 재건하면서 가능했다. [16] 당시 휘종은 수도가 함락되면 자신이 다시 제위에 복귀하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17] 송나라 군대가 문치주의 영향으로 약하기도 했지만, 1120년 방랍의 난을 진압하는 데 정예군을 많이 소모한 터라 가뜩이나 약한 송의 군사력이 더욱 약화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휘종이 국가재정을 파탄내어 송은 병력과 자원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18] 오늘날의 한반도 북부, 함경북도 회령시 회령역 자리라는 설이 있지만, 정설은 오늘날 하얼빈 이란현 부근이라는 것이다. [19] 다만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은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20] 남쪽, 즉 남송의 기운을 진압한다는 주술적인 의미의 탑으로 도굴한 것은 양련진가가 남송의 부활을 막기 위해 건의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도굴이었고, 진남탑 축조는 혹여나 죽은 황제들과 황후들이 자신에게 해를 입힐까 봐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정복 왕조라 할지라도 이전 왕조를 계승했다고 보고 정당성을 부여했기에, 양련진가의 행위는 원나라 조정 내부에서도 당연히 문제가 되어 결국 양련진가는 주살되었고 수하 승려들은 같이 주살당하거나 부장품 분배를 가지고 싸우다가 이미 죽거나 병으로 갑자기 모두 죽었다고 한다. 당시 원 세조는 양련진가가 도굴한 보물들을 몰수해서 대도에 절과 탑을 지았다고 한다. [21] 진남탑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고 진남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이와 비슷하지만 대치되는 기록이 있다. 양련진가에 의해 황릉이 비참한 피해를 입자 이를 비통하게 여긴 그 일대 주민들이 황야에 버려진 역대 황제와 황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상자에 담고 비단으로 싸서 감람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 대신 소뼈와 말뼈를 황야에 흩어놨고 이걸 자기가 버린 황제의 유해인지 알았던 양련진가는 완벽하게 속았다. 그런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감람나무를 찾을 길이 없다. 8백년 가까이 됐는데 그 나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22] 각각 북송 신종과 철종 때의 연호이다. 이 시기에 왕안석 일파인 신법파가 집권하였다. [23] 990~1063.천문학과 시나 온갖 글에도 재능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갓 세우면서 전쟁도 연전연승해 국토도 넓힌 군주. [24] 1392~1449. 8자리 소수까지 계산하는 수학 재능과 같이 각종 천문대를 만들고 천문학에서도 재능을 보이던 인물이다. 심지어 코페르니쿠스보다 더 정확하게 항성 간 거리를 측정하는 등 수학과 천문학에 보이던 기록과 재능은 서구 천문학자들까지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독일 천문학자 폰 마들러(1794~1874)는 울루그벡을 칭송하며 자신이 발견한 달에 난 분화구를 울루그벡이라고 이름지어 그를 기렸다. 황제로 제위한 건 겨우 2년뿐이고 일생 대부분을 선황 샤루 흐(1377~1447)가 오래 살아서 지방 영주로서 있으면서 영지를 잘 다스리면서도 저런 천문학과 여러 연구도 한 걸 보면 치정에서도 무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슬림인 울루그벡이 종교적으로 세속적인 정책을 취하자 아들이 극단파랑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참수당하고 만다. 하지만 아버지와 많은 형제를 죽이고 제위한 아들 압달 라티프 미르자는 애비를 죽인 패륜아라는 명분으로 친척들이 일으킨 반란에 겨우 6달 만에 똑같이 무너져 나이 서른에 아버지처럼 참수당해 죽고 말았다. [25] 천지현황의 현玄자를 원元으로 쓴 것은 송 황실의 시조인 조현랑의 이름자 중 玄을 피휘한 것이다. [26] 중국 문화권에서는 고서화를 수집한 주인들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과시하기 위해 감상인이라는 인감을 찍었다. 보통은 그림의 운치를 망치지 않기 위해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세심하게 위치를 선정해가며 찍었다. 그런데 건륭제는 인감 찍기가 취미였는지 도장 여러 개를, 그것도 큼지막한 도장을 그림 한 가운데에 떡 하니 찍곤 하였다. [27] 건륭제는 송나라를 박살내고 휘종 자신을 타지로 잡아간 금나라 여진족의 먼 후손인데다 건륭제와 휘종의 취미가 비슷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다만 능력과 업적 측면에서 보면 건륭제가 송 휘종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건륭제는 사고전서와 같은 문화사업도 하고 십전무공 같은 영토확장에 성공해 후대 중국에 남겨주기도 했고, 내정도 말년에만 좀 엉망이었지 초중반에는 옹정제와 다를 바 없었다. [28] 『고려사』권122, 「열전」35 '방기' 이령 [29] 참고로 청나라 건륭제는 여기까지도 기어이 자신의 친필을 남겼다. [30] 남당의 마지막 황제인 이욱도 예술에 심취한 망국의 군주였지만, 정치를 팽개친 휘종과는 달리 인재를 등용하고 조세 제도를 개편하며 법령을 개선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남당의 국체 유지를 위해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때문에 그가 독살당하자 남당의 옛 백성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31] 영종과 선인성렬황후 고씨의 둘째 딸이자 신종의 누이동생. 일반적으로 보안공주, 위국대장공주라고도 부른다. 남편 왕선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1명을 얻었다. 하지만 아들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촉국공주 자신 역시 1080년 불과 29세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다. [32]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 [33] 이로 인해 당 현종은 송대 이후로 묘호인 현종대신 시호인 당명황(唐明皇)으로 많이 지칭된다. [34] 심지어 이마저도 당시의 문묘제례악이 주나라식과 맞지 않다며 박연이 고증대로 복원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