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역전( 逆 轉)이란, 정상적으로 가다가 형세가 반대로 뒤집히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역전하다'는 지다가 이기는 것, 즉 '역전승'을 의미한다.역전승은 통쾌하기는 하지만 일반론으로 볼 때 애초에 역전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손자병법 형편(形篇)에서 보면 아예 처음부터 불리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 先 勝 求 戰, 선승구전: 이겨놓고 싸우는) 방법을 최선으로 여긴다.
2. 반응
영화와 만화 등을 비롯한 매체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이다. 그도 그럴 것이 ' 주인공이 이리저리 당한다 → 역전! → 적들은 이미 죽었다'의 과정에서 독자(관객, 시청자 등등)들이 즐거움을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단 액션물뿐 아니라 로맨스에서도 자주 보인다. 그러나 너무 남발하면 식상해질 우려가 있다.반대로 주인공이나 독자, 관객, 시청자들이 응원하던 쪽이 역전패를 당하는 경우라면 역전승과는 달리 큰 불쾌감을 느낀다. 현실의 대표적인 역전패로는 마라카낭의 비극을 들 수 있다.
3. 예시
3.1. 실제
3.1.1. 정치
3.1.1.1. 선거
3.1.1.1.1. 공통
- 모든 선거의 경합지역에서의 선거: 실제로 양당 체제가 강한 곳에선 경합지역에서 역전이 많이 일어나는데, 보수진영이 먼저 앞서다가 진보진영이 역전, 반대로 진보진영이 앞서다, 보수진영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3.1.1.1.2. 대한민국
- 제5대 대통령 선거: 본래는 윤보선 후보가 앞서고 있었지만 개표 후반에 남부 지방(영남, 호남)에서 몰표가 쏟아지면서 박정희 후보가 역전에 성공하였다.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 국회의원 선거: 7대 총선은 민주공화당의 압승이었는데 이 지역에서도 성동구 을이 꽤 하이라이트 지역이었다. 성동구 을은 개표 초반과 중반에는 홍용준 후보가 앞섰지만 개표 후반에 박준규 후보가 앞서면서 당선되었다.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 격전 지역: 8대 총선의 경우는 민주공화당이 안정 과반을 지켰지만 신민당 역시 개헌저지선을 확보한 선거인데 이 선거에서도 꽤 격전 지역이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개표 초반에 민주공화당 후보가 앞서다가 개표 후반에 신민당 후보가 역전을 하는 경우가 있었고 반대로 개표 초반에 신민당 후보가 앞서다가 개표 후반에 민주공화당 후보가 역전을 하는 일이 있었다.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 격전 지역: 민주정의당이 원내1당을 지켰지만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약진을 했고 이 선거에서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후보들끼리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하는 일이 있었다.
- 1990년 재보궐선거 진천군-음성군 국회의원 선거: 본래 자정 전까지는 개표에서 민주자유당 민태구 후보가 앞서고 있었지만 자정 이후 무소속 허탁 후보가 앞서면서 역전에 성공한다.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본래는 민주자유당의 압승으로 예측이 되었지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창당을 한 통일국민당 돌풍이 불면서 민주자유당은 과반수를 확보하지는 못하였고 통일국민당이 의석을 꽤 가져갔다. 하지만 민주자유당이 원내1당을 지키는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일부 지역구들의 경우는 역시 후보들 간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고 역전에 재역전을 반복하는 일이 있었다.
- 제14대 대통령 선거 중에 일부 격전 지역: 당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넉넉한 표차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부 격전 지역에서는 김영삼, 정주영, 박찬종이 접전을 벌이면서 1위 후보가 뒤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 1993년 재보궐선거 명주군-양양군 국회의원 선거와 춘천시 국회의원 선거와 대구직할시 동구 을 국회의원 선거: 먼저 6월 11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지역 중에 명주군-양양군 국회의원 선거는 김영삼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로 본래 민주자유당 김명윤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 보였지만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 최욱철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8월 12일에 진행된 춘천시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에는 초반에 민주당 유남선 후보가 앞섰지만 일반투표함이 열리면서 민주자유당 류종수 후보가 역전에 성공하면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대구직할시 동구 을 국회의원 선거는 본래 민주자유당 노동일 후보의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그걸 뒤엎고 무소속 서훈 후보가 당선되었다.
- 1994년 재보궐선거 경주시 국회의원 선거: 본래는 개표에서 민주자유당 임진출 후보가 앞서고 있었지만 밤 11시 이후 용황동 제2투표함을 열면서 역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개표율 80%에 이르면서 민주당 이상두 후보가 역전에 성공하였다.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본래는 신한국당의 압승으로 예측이 되었지만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으면서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수도권과 부울경 등지에서 크게 이기면서 제1당을 지켰고 자유민주연합의 경우는 대경권, 충청권, 수도권 일부 지역을 석권하면서 크게 선전했다. 그리고 지역구 선거에서는 후보들 간에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 제15대 대통령 선거 : 출구조사에서는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치열한 경합으로 나왔고 이인제 후보도 꽤 많은 표를 가져가는 것으로 나왔는데 초반에는 TK 등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개표되면서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앞섰지만 수도권에서 개표가 시작되면서 표차가 줄어들더니 밤 9시 50분 경에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앞서면서 역전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인제 후보도 무려 19%를 가져갔다.
- 1998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문경시 예천군 국회의원 선거 및 의성군 국회의원 선거: 이 당시 재보궐선거에서 문경시 예천군 국회의원 선거와 의성군 국회의원 선거가 접전이었는데 문경시 예천군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초반에 신영국 후보가 신국환 후보에게 앞섰지만 밤 10시 30분에 신국환 후보가 역전을 하였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자 다시 역전이 되어서 신영국 후보가 신국환 후보를 재역전하였다. 의성군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에는 초반에 김상윤 후보가 앞섰지만 밤 11시30분 이후 막판에 정창화 후보가 역전에 성공하였다.
- 1998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광명시 을 국회의원 선거 및 수원시 팔달구 국회의원 선거: 이 당시 재보궐선거에서는 수원시 팔달구와 광명시 을에서 접전이 펼쳐졌는데 광명시 을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극초반에 조세형 후보가 전재희 후보를 불과 1% 차이로 앞서다가 이후 전재희 후보가 조세형 후보를 역전해서 앞섰으나 개표 18.4%에서 조세형 후보가 다시 전재희 후보를 역전하였고 이후 전재희 후보가 표차를 좁혔지만 조세형 후보가 다시 표차를 약간 벌리면서 2% 가량 리드를 유지했고 수원시 팔달구의 경우 초반에 박왕식 후보가 앞섰으나 이후 남경필 후보가 역전에 성공했다가 다시 박왕식 후보가 재역전했으나 이후 다시 남경필 후보가 재재역전을 했고 이후 또다시 박왕식 후보가 재재역전을 했지만 1분도 못 되어서 남경필 후보가 재재재역전을 한 뒤 남경필 후보가 계속 앞서나갔다.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광역시장 선거: 당시 출구조사에서는 무소속 김기재 후보가 경합우세를 기록했고 개표 초반에도 김기재 후보가 줄곧 앞서갔지만 개표 중반을 거치면서 격차가 줄어들더니 한나라당 안상영 후보가 개표 후반에 역전을 하면서 앞서기 시작했고 안상영 후보가 부산광역시장에 당선되었다.
- 1999년 재보궐선거 고양시장 선거: 초반에는 이성호 후보가 앞섰지만 오후 8시부터 일산 지역 아파트 투표함들이 개표되면서 황교선 후보가 역전에 성공했다.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 격전 지역: 선거 전체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제1당을 지키면서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 선거 때도 격전지역이 꽤 있었는데 여기서도 접전을 펼치면서 후보들이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하는 일이 꽤 있었다.
-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전광역시장 선거: 선거 전체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수도권, 충청도, 대경권, 부울경 모두 한나라당이 승리를 했다. 그런데 대전광역시장 선거의 경우에는 치열한 경합이 펼쳐졌는데 출구조사에서는 염홍철 후보가 앞서는 걸로 나왔고 초반에는 염홍철 후보가 홍선기 후보를 앞섰지만 중반에 홍선기 후보가 염홍철 후보를 역전해서 앞섰다. 하지만 이후 다시 염홍철 후보가 홍선기 후보를 재역전해서 앞서면서 대전광역시장에 당선되었다.
- 2002년 재보궐선거 북제주군 국회의원 보궐선거: 이 선거 역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었던 선거이지만 북제주군 선거구의 경우 출구조사에서는 양정규 후보가 홍성제 후보에게 앞서는 걸로 나왔지만 개표 초반과 중반에 모두 홍성제 후보가 앞서다가 개표 후반에 양정규 후보가 역전을 한다.
- 제16대 대통령 선거 : 초반엔 부산광역시 동래구를 시작으로 경상도 지역부터 개표되면서 이회창의 득표율이 50%를 넘으면서 노무현 후보를 앞섰지만, 수도권에서 개표되면서 표차가 줄어들더니 2002년 12월 19일 20:42 개표 34.5%에 역전에 성공하였다.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 격전 지역: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인해 열린우리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격전 지역들의 경우에는 열린우리당이 앞서다가 한나라당이 역전하는 경우도 있었고 한나라당이 앞서다가 열린우리당이 역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 200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200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는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일부 지역의 경우는 접전 현상이 벌어졌는데 대전 유성구청장의 경우는 진동규 후보가 김성동 후보에게 앞섰으나 중반 이후 김성동 후보가 진동규 후보를 역전했지만 개표 말기에 진동규 후보가 김성동 후보를 다시 재역전했다. 대전 동구청장의 경우는 박병호 후보가 다른 후보에게 줄곧 밀렸지만 개표율 98% 이후 역전에 성공했다.
- 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영천시 국회의원 선거: 선거 전체적으로는 한나라당의 압승이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도 보수정당 최강세 지역인 영천시에서 의외의 접전이 벌어졌는데 개표 초반에는 정동윤 후보가 정희수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섰지만 밤 11시 즈음에 정희수 후보가 정동윤 후보를 역전하면서 앞서기 시작한다.
- 2005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광주시 국회의원 선거: 이 선거 역시 전체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압승을 했다. 그런데 광주시 선거구에서는 정진섭 후보, 홍사덕 후보, 이상윤 후보끼리 접전을 펼쳤는데 각각 후보끼리 역전을 반복했다.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선거 및 대전광역시장 선거: 선거 전체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수도권, 충청도, 대경권, 부울경 모두 한나라당이 승리를 했다. 그런데 대전광역시장 선거의 경우에는 치열한 경합이 펼쳐졌는데 처음엔 여론조사에서 염홍철 후보가 앞서다 박근혜 피습 사건의 "대전은요?"로 한마디에 전세가 역전되었고, 결국 결과는 박성효 후보의 역전승으로 끝났다.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선거의 경우는 현명관 후보가 김태환 후보를 앞서다가 김태환 후보가 역전하여 현명관 후보를 앞섰고 그러다가 또다시 현명관 후보가 재역전하여 김태환 후보를 앞서고 또다시 김태환 후보가 현명관 후보를 또 재역전하여 앞서면서 접전 양상이 지속되었고 김태환 후보가 접전 끝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보수 무소속 후보와 한나라당 후보간에 접전을 펼치면서 역전에 재역전을 반복하는 일이 있었다.
- 제17대 대통령 선거 중에 일부 격전 지역: 당시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 후보가 압승을 거두었지만, 일부 격전 지역은 접전을 벌이다가 1위 후보가 뒤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중에 일부 지역: 이명박 정부 초반이라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었고 실제로도 한나라당이 승리를 하였다. 하지만 일부 지역의 경우는 접전이 펼쳐지기도 하거나 인물론으로 인해 통합민주당 후보들이 앞서나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경우에도 초반에 통합민주당 후보가 앞서나가다가 후반에 한나라당 후보가 앞서나가면서 역전하는 경우가 있었고 한나라당 후보가 앞서다가 후반에 통합민주당 후보가 앞서나가면서 역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 2009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시흥시장 선거 및 부평구 을 국회의원 선거: 시흥시장 선거에서는 본래 민주당 후보와 진보신당 후보가 같이 나오면서 노용수 후보의 어부지리 승리가 예측되었고 실제 개표에서도 초반에 노용수 후보가 상당히 앞섰지만 개표 중반 이후부터 점차 표차가 줄여지더니 김윤식 후보가 역전을 하면서 앞섰고 시흥시장에 당선된다. 부평구 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본래 이재훈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앞섰지만 본선에서는 홍영표 후보가 이를 뒤집고 당선되었다.
- 2009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수원시 장안구 국회의원 선거: 선거 초반 여론조사에서는 박찬숙 후보가 이찬열 후보를 앞섰고 개표 초반에도 박찬숙 후보가 이찬열 후보를 앞섰지만 개표 중반을 지나면서 이찬열 후보가 박찬숙 후보를 역전하는 데 성공했으며 손학규의 지원을 받은 이찬열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 및 인천광역시장 선거 및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전체적인 선거 결과는 민주당의 낙승으로 민주당은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 호남권,충청권은 물론 경상남도에도 민주당계 무소속 후보가 들어오고, 부산광역시에서도 45%로 선전하는 등 승리였고, 심지어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도 민주당이 앞섰다. 하지만 서울특별시장 만큼은 역전의 상황에 맞는데. 여론조사에서는 오세훈 후보의 낙승 및 안상수 후보의 승리로 예측했지만 출구조사에서 오세훈 후보와 한명숙 후보가 접전으로 나왔고 안상수 후보는 인천에서 송영길 후보에게 지는 걸로 나왔다. 이후 개표 초반에는 오세훈 후보가 여유롭게 앞섰지만 8시 이후부터 격차가 좁혀지더니 개표 중반부터 한명숙 후보가 앞서기 시작했고 막바지까지만 해도 한명숙이 10만표 이상 앞섰다가, 강남3구의 몰표로 오세훈이 역전승했다. 인천광역시장 선거의 경우를 보면 개표 초반에는 안상수 후보가 앞서갔지만 밤 9시에서 밤 10시 즈음을 지나면서 민주당 송영길 후보와의 표차가 좁혀지더니 밤 11시 즈음에 송영길이 역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도 초반에 한나라당이 앞서다가 후반에 민주당이 앞서는 경우가 있었고, 초반에 민주당 후보가 앞서다가 후반에 한나라당 후보가 앞서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봐도 민주당의 역전승인데, 선거 이전만 해도 천안함 피격 사건이란 안보 사건으로 한나라당에게 유리했지만, 노풍이 불면서 민주당이 상황을 뒤집으면서 민주당이 낙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 2010년 재보궐선거 강원도 철원시,화천군,양구군,인제군 국회의원 선거: 초반에는 정만호 후보가 앞서나갔지만 철원군 지역의 몰표로 인해서 밤 10시 20분 즈음에 한기호 후보가 역전에 성공한다.
-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강원도지사 선거 및 김해시 을 국회의원 선거: 강원도지사 선거의 경우에는 본래 엄기영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유리했지만 출구조사에서 최문순 후보가 유리하게 나오면서 역전에 성공했고 개표 결과도 최문순 후보에게 유리하게 나오면서 최문순 후보가 강원도지사가 되었다. 반대로 김해시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본래는 이봉수 후보가 개표 초반에 앞장섰지만 개표 후반에 김태호 후보가 역전을 하여 앞서면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 초반에는 민주통합당이 우세한 듯 싶었지만 김용민 막말 논란 및 새누리당의 쇄신으로 새누리당이 승리를 하였다. 다만 민주통합당도 강남3구와 PK에서 약진을 하였다. 그리고 일부 지역의 경우는 초반에 민주통합당이 앞서나가다가 후반에 새누리당이 역전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초반에 새누리당이 앞서나가다가 후반에 민주통합당이 역전한 경우도 있다.
- 제18대 대통령 선거 일부 지역: 초반에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우세였다가, 후반에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우세로 전환된 지역이 일부 있다.
-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광역시장 선거 및 경기도지사 선거 및 강원도지사 선거 및 충청북도지사 선거 및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및 교육감 선거: 인천광역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는 본래 유정복 후보가 송영길 후보에게 열세를 보였지만 출구조사 결과 유정복 후보의 초박빙우세로 드러났고 개표를 하면서 유정복 후보가 당선되면서 당초 유정복 후보가 불리했던 여론조사 결과를 뒤집고 유정복 후보가 인천시장에 당선되었다. 경기도지사도 여론조사에선 김진표 후보가 우세를 접했으나, 실제로는 남경필 후보가 앞섰다. 강원도지사 선거에서는 최흥집 후보와 최문순 후보가 혼전을 벌였고 출구조사에서는 최문순 후보 초박빙으로 나타났지만 개표 초반에는 최흥집 후보가 최문순 후보에 앞서나갔다. 하지만 개표 중반에 격차가 좁혀지더니 최문순 후보가 최흥집 후보를 역전하였다. 그러나 이후 또다시 최흥집 후보가 최문순 후보를 재역전하였지만 이내 최문순 후보가 최흥집 후보를 다시 재역전하여 최문순 후보가 강원도지사에 최종 당선되었다. 충청북도지사 선거에서는 개표 초반에는 윤진식 후보가 앞섰지만 개표 중반부터 이시종 후보가 앞서면서 당선되었다.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본래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렸지만 선거결과에서는 새누리당 후보가 기초자치단체장에 당선되면서 역전하는 사례도 있었고 개표 초반에는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우세했지만 개표 후반에 새누리당 후보가 역전을 하는 사례가 있었으며 반대로 개표 초반에는 새누리당 후보가 우세했지만 개표 후반에는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역전하는 사례도 있었다. 서울교육감 선거의 경우는 본래 여론조사에서 보수후보가 우세를 했었지만 보수후보 간의 분열로 인해서 여론이 급변을 하기 시작했고 진보후보인 조희연 후보가 당선되었다.
-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선거 전에는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세월호 참사 등의 연이은 악재로 인해서 영남 지역 2곳만 얻고 다 참패할 것이란 전망에서 출발하였으나 야당의 공천 파동, 권은희 후보 전략공천 논란, 김형식 서울시의원 살인사건,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의 지지부진한 단일화 협상, 동작을 단일화 과정에서의 잡음 등으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슬슬 불리해지기 시작했고 이에 반사이익을 얻은 새누리당이 호남 지역을 뺀 곳에서 모두 우위를 점했고 보수 혁신 및 민생공약으로 선거운동을 하면서 새누리당이 더욱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유병언 검거 실패로 인해서 세월호 심판론이 떠오르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으나 한편 우위를 점한 지지율은 내려가지 않았고 순천,곡성의 이정현 후보 역시 역전에 성공하면서 새누리당이 호남 지역 3곳을 뺀 다른 지역에서 전원 승리한다. 그리고 순천,곡성의 이정현 후보는 역전 타이틀을 쓰면서 18년만에 호남에서 당선된 보수정당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도 얻게 되었다.
-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본래는 통합진보당 해산 등으로 인해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선거 직전에 여당에 불리한 악재가 터지면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유리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아졌으나, 야권 분열 및 표 분산 등으로 인해서 여당인 새누리당에 다시 유리하게 돌아섰고 결국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를 탈환했으며 민주당계 정당의 철옹성인 관악구 을도 새누리당이 차지했다.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야권 분열로[1] 여당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이를 능가하는 실책이 연이어 터지면서 여소야대는 물론, 여당이 원내 1당까지 내주고 말았다. 물론 당시 텃밭 지역이었던 부산, 울산, 경남에서 합쳐서 8석이 더불어민주당, 정의당에게 넘어간 건 물론, 대구에서도 2석을 빼앗겼다.
- 제19대 대통령 선거 중 일부 지역( 철원군, 화천군, 의창구, 진해구 등): 초반에는 홍준표 후보의 우세였다가, 동·읍 지역과 재외투표에서 문재인 후보의 손을 들어주면서 역전에 성공하였다.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광역시장, 경상남도지사 선거 및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전국적으론 더불어민주당이 대구경북과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고, 대구경북에서도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을 상당수 확보하는 대승을 거뒀지만, 경남도지사 선거만큼은 접전이였다. 실제로 여기는 여론조사와 출구조사 모두 김경수의 우위로 나왔지만, 개표 초반엔 김태호 후보가 5% 이상 앞서는 이변이 나오기 된다, 그 이후 창원 성산/의창 등 동부경남이 개표되면서 김경수 후보가 추격하더니 진주,마신회원 등 중서부 경남 지역에서 역전하면서 김경수 후보가 앞섰고, 실제로도 김경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부산광역시장 선거의 경우 초반에는 서병수 후보가 앞섰지만 이후 오거돈 후보가 역전하여 앞서는데 성공한다.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자유한국당 후보가 초반에 앞서다가 후반에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앞서는 일도 있었다.
- 2019년 보궐선거 창원시 성산구 국회의원 선거: 여론조사 초기엔 여영국이 10%p 넘는 격차로 여유롭게 이길거라 예측이 되었고,자유한국당 당대표인 황교안이 자유한국당 경남 FC 경기 난입사태를 일으키며 악재를 더 추가했다. 하지 실제로는 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가 개표율 98%까지 앞서가다가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역전하면서 504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일부 지역, 특히 사하구 갑인 경우는 개표율 93%까지 미래통합당 김척수 후보가 앞서다가 막판에 사전투표로 더불어민주당 최인호 후보가 역전했다.
- 2021년 재보궐선거 중 서울 일부 지역: 선거 전체적으로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의 경우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가 전 지역에서 이겼고 서울특별시장 선거의 경우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25개구에서 전부 이겼으나 서울 일부 지역의 경우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가 앞서나가다가 후반에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역전한 경우가 있다. 선거 전체적으로 봐도 초반에는 판세가 팽팽했지만 LH 사태가 터지면서 국민의힘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졌다.
- 제20대 대통령 선거: 이 선거는 경선, 여론조사,개표 모두 역전이 많았던 선거라고 봐도 무방한데, 국민의힘 경선에서 윤석열이 국민여론조사에서 뒤쳐지고도, 당원투표에서 앞서서 본선에 진출했고, 대선 초반엔 윤석열이 앞서다가 윤석열의 권위적인 행보와 이준석과의 갈등으로 다시 이재명이 앞서고, 권위적인 행보를 멈추고 난뒤에는 다시 윤석열이 앞섰다. 이재명 후보가 유리했던 호남 지역 투표함과 사전투표함을 먼저 열면서 개표 초반엔 이재명 후보가 10%p 이상 앞섰지만, 이후에 윤석열 후보가 유리했던 강원, 영남 지역 투표함과 본투표함이 열리면서 표차가 줄어들더니, 결국 3월 10일 0시 32분, 개표율 50.9%에 윤석열 후보가 역전하였고 강남3구 지역 투표함까지 열리면서 당선이 확정되었다. 여러모로 제16대 대통령 선거의 리버스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선거 및 일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본래 선거 판세는 선거 전체로 보면 국민의힘 우세 지역이 7개 정도 있었으며 경합인 곳도 꽤 있었고 더불어민주당 우세 지역도 꽤 많았지만 더불어민주당의 검수완박 강행 논란, 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실책, 2022년 한미정상회담 등으로 국민의힘에게 유리한 결과로 흘러가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유리한 곳은 접전으로, 접전인 곳은 국민의힘 우세 지역으로 흘러가다가 국민의힘 우세 지역이 점점 늘어나더니 선거 결과는 국민의힘의 압승이었고 수도권(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충청권(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 충청북도), 대경권(대구광역시, 경상북도), 동남권(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모두 국민의힘이 승리했지만, 경기도지사 선거만큼은 역전에 딱 맞는 사례다. 실제로 경기도지사의 경우에는 국민의힘 경선에서 김은혜 후보가 민심에선 졌지만, 당심에서 더 크게 벌려서 본선에 올랐고, 선거 이전 여론조사에서는 김은혜 후보가 앞서는 여론조사도 있었고, 김동연 후보가 앞서는 여론조사도 있었는데 선거 이후 출구조사 결과 김은혜 국민의힘 후보가 0.6% 차 앞서는 초박빙이었고, 실제 개표도 시종일관 김은혜 후보가 넉넉히 앞서 사상 첫 여성 광역단체장이 나오나 싶었는데 6월 2일 새벽 5시 32분, 개표율 95%를 넘기면서부터 김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역전을 허용하고 결국 8913표란 근소한 격차로 승리를 거뒀다. 어찌보면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의 리버스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외에도 경기도 기초자치단체장의 경우는 대다수 지역에서 국민의힘이 승리를 했으나 부천시장, 파주시장 등 일부 기초자치단체장은 초반에 국민의힘이 앞서나갔으나 후반에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역전하여 앞서나간 경우가 많고, 반대로 서울특별시 기초자치단체장의 경우는 대다수 지역에서 초반에 더불어민주당이 앞서나갔으나 후반에 국민의힘이 앞서나간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충청북도 증평군수 선거에서도 초반에 국민의힘 송기윤 후보가 앞서나가다가 후반에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역전당한 경우도 있을 정도로 역전 사례가 꽤 있는 편이었다.
- 2022년 6월 보궐선거 보령시 서천군 국회의원 선거와 제주시 을 국회의원 선거: 초반에는 서천군의 투표함들이 개봉되면서 나소열 후보가 앞섰으나 보령시의 투표함이 개봉되면서 장동혁 후보와의 표차가 점점 좁혀지더니 개표 후반에 장동혁 후보가 앞서면서 역전에 성공한다. 제주시 을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에는 초반에 부상일 후보와 김한규 후보가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했으나 새벽 1시를 기점으로 김한규 후보가 승기를 잡는다.
-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이 선거에서도 초반에 국민의힘 후보가 앞서나가다가 후반에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역전한 지역구가 있고 반대로 초반에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앞서나가다가 후반에 국민의힘 후보가 역전한 지역구가 있다. 또한 출구조사에서는 열세였지만 본선에서 이를 뒤집고 당선된 후보들도 있다.
3.1.1.1.3. 국외
- 1967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1차 투표에서는 샤를 드골 대통령의 우파연합이 예상외의 부진을 보이면서 좌파연합의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결선투표에서 우파연합은 중도파와의 연합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 196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본래는 68운동의 격화와 반 드골 정서가 강해지면서 좌파연합이 우세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으나 예상과는 달리 우파 및 중도파의 결집으로 선거 결과는 우파연합의 압승으로 끝난다.
- 제45회 영국 총선: 본래는 노동당이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면서 노동당이 승리를 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에드워드 히스가 이끄는 보수당이 이를 뒤집고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보수당이 승리한다.
- 제46회 영국 총선: 본래는 보수당이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면서 보수당이 승리를 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개표 결과 헤럴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이 의석수에서 앞서면서 노동당이 승리를 하였다. 다만 득표율은 보수당이 높았고 노동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 노동당 후보들의 표가 당선권에 근접했고, 얼스터연합당 의원들이 보수당 편을 들지 않은 것이 보수당의 주요 패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8개월 이후 치러진 재총선에서는 노동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하면서 승리한다.
-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본래는 제4차 중동전쟁과 오일 쇼크로 인해서 나빠진 프랑스의 경제와 10개월 징병제에 반대하는 프랑스 국민들의 시위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급속도로 떨어졌고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치러진 대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1차 투표에서는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가 40% 넘는 득표를 하면서 1위를 하였다. 하지만 이후 토론에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후보가 우위를 점하면서 결선투표에서는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후보가 역전을 했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본래는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를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주관하게 되고 이에 따라 200주년 행사에 따른 애국심과 향수 물결이 퍼지면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유리할 것으로 보였으나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지미 카터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33%나 앞서면서 재빠르게 역전에 성공했고 리처드 닉슨 사면 논란으로 포드는 곤경의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지미 카터가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지미 카터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제럴드 포드가 토론회에서 선전하면서 다시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제럴드 포드가 두 번째 토론회에서 실수를 하고 밥 돌이 맹활약을 하면서 지미 카터가 소폭 우세를 유지했고 지미 카터는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
- 197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오일쇼크로 프랑스의 경제가 침체되며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텡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졌고 투표권 인하 등 개혁 과정에서 우파연합 간에 내분이 일어나며 좌파연합은 1976년 지방선거와 1977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1978년 총선에서도 초반에는 좌파연합이 여론조사에서 우세를 점하면서 좌파연합이 승리를 할 듯 보였다. 그러나 당초 예상과 달리 득표율은 접전이었으며 결선투표에서 의석을 대거 확보하며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면서 우파연합이 승리한다.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본래는 여당인 자민당의 각복전쟁으로 내각불신임안이 통과되고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는데 선거 초기에는 40일 항쟁 등 자민당 내부의 혼란스런 상황으로 인해서 야당인 사회당-공명당-민사당이 유리할 듯 보였고, 정권교체가 유력해 보였지만 수상인 오히라 마사요시가 급성 부정맥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1주일 후 급사하는 상황이 일어나면서 자민당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선거 판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분당 직전까지 가있던 자민당은 계파 모두가 갈등을 접고 일치된 자세로 단결하면서 동정론까지 얻게 되었고 결국 284석이라는 의석을 얻어내면서 압승을 거둔다.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본래는 여론조사에서 자민당이 유리할 것으로 나왔었지만, 록히드 사건의 재판 영향과 너무 많은 수의 자민당 후보 출마로 인해서 자민당이 6석 차이로 패배했다. 하지만 자민당이 원내1당을 수성하는데 성공했고 신자유클럽과 연정하면서 자민당 내각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 198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본래는 이란-콘트라 사건과 블랙 먼데이로 인한 주가 폭락 사태로 공화당이 불리했고 이에 민주당이 유리했으며 초반에는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가 우세를 달렸다. 하지만 조지 H. W. 부시 후보가 네거티브 공세로 이를 뒤집는데 성공하면서 공화당이 역전했으며 조지 H. W. 부시는 대선에서 8% 격차로 승리하는 데 성공한다.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본래는 농산물 수입 자유화 이슈로 인한 농민들의 자민당 이탈로 자민당이 크게 불리했고 여기에 더해서 리크루트 사건에 자민당 전현직 총리가 연루되어 있다는 의혹도 불거져 나옴과 동시에 소비세 제도 관철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의 이미지가 더 좋지 않게 되고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역시 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었음은 물론, 후임 총리가 된 우노 소스케 역시 게이샤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고 자민당은 제15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대패하면서 자민당은 존폐 위기에 몰렸으며 가이후 도시키는 위기 돌파를 위해 중의원 해산을 했지만 의미없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일본사회당-공명당-민사당 3당 연합체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고 사회당 위원장 도이 다카코의 인기까지 급상승하면서 마돈나 선풍이 정국을 관통했다. 그러나 야당의 선거전략 실패와 가까스로 찾아온 행운 등으로 자유민주당이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가까스로 승리하였고 정권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 제12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본래는 사회민주당이 동독 지역에서 지지를 받았고 여론조사에서도 사회민주당이 앞서면서 사회민주당의 승리가 점쳐졌지만 기민련이 통일의 조속한 시행과 화폐교환비 1:1 지정 같은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면서 판세를 뒤집더니 기민련/기사련-자유민주당 연정은 총선에서 큰 낙승을 거두었고 헬무트 콜은 총리 3선에 성공한다.
- 제51회 영국 총선: 본래는 여러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지지율이 1위를 달렸고 총선 직후의 BBC 출구조사에서도 노동당과 보수당의 초박빙을 예측했다. 하지만 선거 막판의 끝없는 이슈 갈아치우기, 노동당 당수였던 닐 키넉의 삽질, 노동당의 지지자들인 노동자들이 인두세를 피하기 위해 선거인 등록을 거부한 것 등의 여파로 인해서 보수당이 지지율 7% 차이로 과반 의석 이상인 336석을 확보하면서 승리를 거둔다. 이로 인해 존 메이저 총리를 위시한 내각 역시 재신임을 받게 되었다. 소위 샤이 지지층의 원조인 샤이 토리가 나오게 된 계기다.
-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본래는 걸프전 승리 및 미국을 정치, 군사적으로 강국으로 만든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유력해 보였고 여론조사에서도 조지 H. W. 부시가 앞섰지만 빌 클린턴 후보가 경제 문제를 꺼내들면서 판세가 뒤바뀌기 시작하더니 보수 무소속 후보였던 로스 페로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보수표가 조지 H. W. 부시와 로스 페로로 분열되면서 빌 클린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즉 결과는 제15대 대통령 선거, 과정은 제16대 대통령 선거 미국판인 것.
- 제13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본래는 통일 이후 최악으로 치닫는 독일의 경제와 기민련/기사련-자유민주당의 지지율 하락, 헬무트 콜 내각의 지지율 하락으로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승리할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나 헬무트 콜의 노익장 과시 및 자유민주당과의 연정으로 10석 차이로 과반수 이상 의석을 차지하면서 기민련/기사련-자유민주당 연정이 내각을 유지한다.
- 1994년 미국 중간선거: 본래는 공화당이 상원에서 근소하게 과반의석을 달성하고 하원에서는 근소하게 과반의석 달성이 실패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선거 결과 공화당이 상원에서 넉넉하게 과반의석을 달성했고 하원에서도 과반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남부에서 의석을 많이 가져오면서 이 선거를 기점으로 남부가 완전히 공화당 텃밭으로 뒤집히게 된다.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본래는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별세로 자민당이 압승할 것 같았지만 후임 총리였던 모리 요시로 총리가 신의 나라 망언을 내뱉으면서 지지율이 떨어졌고 자민당이 과반 이상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다만 공명당 및 보수당과 연정을 맺으면서 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 초반에는 조지 W. 부시 후보가 엘 고어 후보를 앞서면서 여유롭게 앞서나갔지만 플로리다가 엘 고어 우세 지역으로 판명나고 미시간, 일리노이, 뉴저지 등 민주당 우세 지역의 개표가 시작되면서 엘 고어가 조지 W. 부시를 상대로 표차를 좁히더니 펜실베이니아도 엘 고어가 앞서면서 역전에 성공을 했다. 그리고 뉴욕에서도 개표가 시작되면서 엘 고어가 크게 앞서나갔다. 하지만 부시가 오하이오를 이기고 다시 올라오면서 따라붙더니 플로리다가 경합 지역으로 번복되고 부시 후보가 서부와 남부의 공화당 우세 지역을, 고어 후보가 태평양 해안 주를 확보하면서 다시 선거판세가 요동쳤다. 그러다 플로리다가 부시 우세 지역으로 바뀌면서 부시가 재역전해서 부시가 이겼으나 플로리다의 격차가 573표 차이로 매우 크지 않아 자동 재검표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후 한 달동안 재검표 소동이 이어졌지만 재검표에서도 부시가 앞서면서 부시는 대통령이 되었다.
- 제15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본래는 슈뢰더 총리 내각의 지지율 하락, 경제 문제 및 독일의 불황, 유로화 도입으로 인한 혼란 등으로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총선에서 패배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게다가 사민당 지지층까지 등을 돌리고 중도성향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면서 사민당의 참패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슈뢰더 총리가 이라크 전쟁 참전반대를 밝히면서 어느정도 지지율이 올라갔고 선거 결과 양측이 초접전이었지만 사민당-녹색당 연정은 과반 이상 의석을 아슬아슬하게 지켰고 사민당-녹색당 연정은 내각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구조사에서는 존 케리 후보가 앞서는 걸로 나왔지만 실제 개표에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앞서면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선거 초반 판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집권여당인 자민당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장기집권 피로감으로 인해서 직전 선거들인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제20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2005년에 치러진 도쿄도의회 선거마저 자민당이 부진하고 민주당이 약진하는 성과를 내면서 자민당은 초반에 위기에 몰렸고 반대로 민주당은 두차례나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자민당을 앞섰고 의석수도 자민당에 맞먹거나 앞서는 의석을 확보하면서 정권 획득을 노리고 있었다. 심지어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추진하는 우정 민영화 법안이 참의원에서 여당 일부의 반란표로 부결되는 등 위기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중의원 해산을 선언하고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치르게 되지만 이 때만 해도 조기 총선을 열면 선거를 대패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을 정도로 위기상황이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중진들을 정리하고 정치신인들을 공천하면서 조금씩 판도가 뒤바뀌기 시작하더니 일본우정 민영화 찬반여부로 선거의 정체성을 정리하여 이슈를 선점하면서 여론이 뒤바뀌었고 민주당이 민영화 반대, 고이즈미 반대에만 집착하면서 선거전 내내 자민당에게 끌려다녔다. 그러나 고이즈미 반대파들이 신당을 창당하면서 표 분산이 우려되었지만 탈당파들은 판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자민당+공명당 연합은 327석을 차지하면서 큰 압승을 거두었다.
-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개표 초반에는 밋 롬니 후보가 전체 득표율과 선거인단에서 모두 앞서갔지만 플로리다, 오하이오, 버지니아 등에서 차례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승리가 예측되면서 선거인단 수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1차 역전을 했고 캘리포니아, 뉴욕 등에서의 득표율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승리로 끝나면서 전국 단위 득표율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차 역전을 했다.
- 제18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본래는 기민련/기사련이 독일 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참패를 하면서 사민당이 우세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메르켈이 국제무대에서 소리를 높이고 국내무대에서 소리를 낮추는 전략을 쓰고 사민당의 정책을 수용하면서 큰 트러블 없이 원만하게 해결하는 총리 이미지를 구축했고, 기민련-기사련 또한 메르켈의 인기를 활용하면서 기민련/기사련이 다시 1당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메르켈의 기민련/기사련이 예전보다 의석을 대거 늘려 311석을 차지하면서 기민련/기사련이 연속으로 1당을 지켰다. 다만 과반에 미달했고 연정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이 전멸하면서 사민당과 다시 연정을 해서 연립정권을 다시 창출했다.
- 제56회 영국 총선: 여론조사에서는 보수당과 노동당이 엎치락뒤치락 했고 경합으로 나오는 여론조사도 있었고 출구조사에서도 보수당이 단독 과반을 구성하지 못할 것으로 나왔으나 보수당이 단독 과반인 330석을 달성하면서 보수당이 승리를 했다.
-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선거일 직전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우세를 점쳤고, 개표 초반만 해도 힐러리 클린턴이 앞서 갔지만, 위스콘신과 플로리다에서 뒤집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엔 시종일관 도널드 트럼프가 앞서면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단, 실제로는 힐러리 클린턴이 득표수에서 앞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이유는 바로 미국식 선거인단 제도 때문이다. 물론 러스트 벨트의 이변을 간과한 민주당의 실책을 감안하면 사실상 참패라고 해도 무방하다.
- 제57회 영국 총선: 본래는 테레사 메이 총리 내각에 대한 지지율도 높고 보수당에 대한 지지율도 높았으며 총선 직전 지방선거에서도 보수당이 승리했기 때문에 총선에서도 보수당이 압승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노인 복지지원 축소 논란으로 인해서 보수당과 노동당의 지지율 차이가 좁혀지더니 2017년 맨체스터 경기장 테러, 2017년 런던 브리지 테러 등으로 보수당이 점점 지지율이 하락하고 노동당의 지지율 상승이 지속되면서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 지지율이 보수당 지지율을 역전하는 여론조사까지 나왔다. 총선 결과, 보수당은 단독 과반이 붕괴되고 민주통일당과 연정해서 겨우 내각을 지켰으며 노동당은 의석을 늘리면서 크게 약진했다.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본래는 모리토모 학원 비리 사건, 카케 학원 스캔들, 2017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의 대패 등으로 자민당과 아베 신조 정권에 큰 위기가 찾아왔지만 아베 신조 총리의 3차 개각, 중의원 해산 결정에 이어 북한 문제로 인해 지지율이 반등하면서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압승할 분위기로 바뀌었고 예상대로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공명당 연합이 큰 압승을 하면서 아베 신조 총리는 수상 4선 연임에 성공한다.
- 제58회 영국 총선: 여당인 보수당은 제57회 영국 총선에서의 선거운동 기간 동안 저지른 실수로 인한 부진 및 단독과반 붕괴, 2017년 브렉시트 협상 결렬과 일부 의원들의 탈당, 2017년 전당대회 해프닝, 2019년 지방선거에서의 참패로 위기를 맞았었다. 하지만 테레사 메이가 총리 직에서 사임하고 보리스 존슨이 총리로 선출되면서 판세가 변화되기 시작하더니 제58회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이 과반인 326석을 뛰어넘어서 365석을 차지하면서 보수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켰다.
-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초반엔 도널드 트럼프가 앞서 가면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나나 싶었지만, 공화당의 준텃밭이였지만 2018년 중간선거에서 이변을 일으킨 애리조나가 넘어가고, 우편투표의 개표가 시작되자 조지아와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위스콘신 등에서 역전을 하면서 조 바이든이 당선되었다. 말 그대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리버스라고 해도 무방하게 되었다.
- 2021년 영국 지방선거: 보리스 존슨 총리를 위시한 내각이 코로나19 대응 실패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보수당 역시 지지율이 하락했지만 좌파 야권의 표가 녹색당, 노동당으로 분산되면서 보수당이 다시 앞서기 시작하면서 역전에 성공했고 2021년 영국 지방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2021년 런던광역시장 선거에서도 이기지는 못했어도 보수당 후보가 크게 선방하였다.
- 제20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본래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높은 지지율과 두터운 신뢰로 인해서 기민련/기사련의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연방정부의 코로나 대응 실패로 인해서 역전의 조짐이 보이더니 마스크스캔들 등의 대형악재와 바덴뷔르뎀베르크, 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선거에서의 완패로 인해서 연방의회에서 선거의 승리가 불투명한 쪽으로 바뀌었고 사민당의 승리가 예상되는 듯 했다. 그러나 5월 중순부터 지지율을 회복하고 작센안할트 주의회 선거에서 기민련이 다시 승리를 거두면서 기민련/기사련이 승리할 것으로 다시 전망이 바뀌었다. 그러나 7월 폭우-홍수 사태 때 아르민 라세트 당대표의 태도 논란으로 또다시 사민당 승리 예상으로 재역전했고 아르민 라세트는 홍수 대처, 기후 변화에 주력했지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아르민 라세트가 일론 머스크와 나눈 대화도 논란이 되면서 사민당 승리 예상으로 더욱 기울게 되었다. 이에 기민련/기사련은 선거 캠패인을 전환해서 사민당을 압박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지지율이 소폭 재상승하였다. 본선 이후 출구조사 결과에서는 기민련-기사련과 사민당이 초접전으로 나왔고 경우에 따라서 기민련/기사련이 제1당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왔으나 선거 결과는 사민당의 제1당 탈환으로 마무리 되었다.
-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선거 이전에는 자민당이 2021년 일본 국회의원 보궐선거 및 2021년 요코하마시장 선거에서의 참패, 2021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1당 탈환을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진한 선거 결과,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이끄는 내각의 낮은 지지율 등으로 인해서 자민당, 공명당 연합의 의석수가 대거 줄고 자민당은 단독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입헌민주당의 의석수가 늘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기시다 후미오 총리로의 내각 교체 등으로 인해서 예상을 뒤엎고 출구조사에서는 자민당이 단독과반을 확보한 것은 물론 자민당, 공명당 연합이 앞섰고 실제 개표결과에서는 자민당이 출구조사 결과도 뛰어넘는 단독과반 확보에 자민당, 공명당 연합이 압승을 거두면서 역전에 성공했다.
- 2021년 미국 주지사 선거: 본래 이 두 지역은 민주당 우위 지역이여서 민주당이 수성할 줄 알았으나, 결과는 공화당의 버지니아에서의 역전승과 민주당의 뉴저지에서의 신승으로 끝났다.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의 경우 개표 초반에는 헨리코 후보가 앞섰으나 개표 중반에 교외, 지방 카운티의 표가 개표되면서 영킨 후보가 앞서면서 역전에 성공하였고 영킨 후보가 당선되면서 공화당이 버지니아 주지사 직을 탈환했다. 뉴저지 주지사 선거의 경우에는 개표 초반에는 필 머피 현 주지사가 무난히 앞서면서 재선에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개표가 진행되면서 득표율 격차가 좁혀지더니 개표 중반에는 애틀랜틱 카운티, 컴벌랜드 카운티, 로스터 카운티에서 잭 치아타렐리가 앞서면서 기어이 잭 치아타렐리 후보가 역전을 해서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편투표함과 사전투표함이 열리면서 필 머피 현 주지사가 재역전에 성공을 했고 필 머피 현 주지사의 재선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버지니아 주 부지사 선거, 버지니아 주 법무장관 선거, 버지니아 주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앞섰다.
-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본래도 자민당-공명당 우세로 예측되었지만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와 비슷한 결과를 낼 것으로 예측이 되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 피살 사건으로 인해서 자민당-공명당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전망되었고 결국 선거에서 자민당-공명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일본유신회, 국민민주당 의석까지 포함하면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 선거구에서는 접전이 벌어졌는데 자민당-공명당 후보들과 입헌민주당 후보들끼리 역전과 재역전을 벌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 2022년 미국 중간선거: 2021년 미국 주지사 선거에서 버지니아를 내준 뒤, 아프간 전쟁 참패와 1년 넘게 이어진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인해 바이든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기까지 하면서, 언론에선 레드웨이브가 일어나 공화당에게 상하원을 다 내준다는 보도가 대부분이였다. 하지만 트럼프가 임명한 법관들이 로 대 웨이드 폐기란 참극을 저지르면서 민주당 지지층, 특히 여성들이 결집하면서 선거 정황이 뒤집히더니 상원 민주당 다수, 주지사 추가 획득, 하원도 공화당 근소우위로 마무리 했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의 미국 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2023년 상반기 일본 국회의원 보궐선거: 본래는 야마구치현 4구를 제외하면 격전이 이뤄지는 선거로 치러질 전망이었지만 자민당이 제20회 통일지방선거에서 선전하고 치바현 5구가 야권분열이 일어나면서 자민당에게 점점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기시다 후미오 폭탄 테러 미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자민당이 더욱 유리해지기 시작했고 자민당은 당초 목표인 3석에서 승리하고 심지어 1석을 추가하면서 자민당은 2023년 일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했다. 다만 야마구치 4구와 야당 후보가 당선된 와카야마 1구를 제외한 모든 선거구의 후보간 득표율차가 5% 이하였기 때문에,[2] 압도적으로 승리한 선거는 아니었다.
3.1.1.2. 국민투표, 주민투표
- 2005년 프랑스 유럽헌법 국민투표: 프랑스에서 진행된 국민투표인데 본래는 헌법에 대한 찬성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들의 반대가 커졌고 이에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유럽헌법 국민투표를 밀어붙였지만 예상외로 54%의 반대표가 나오면서 부결이 되었다.
-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본래 영국의 브렉시트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의 브렉시트 반대에 찬성하는 여론이 반대하는 여론보다 좀 높았지만, 실제론 잉글랜드에서 예상보다 탈퇴 찬성표가 많이 나오면서 찬성표가 우위가 되었고, 결국 영국은 유럽연합을 떠나게 되었다.
- 2020년 오사카도 전환 주민투표: 본래는 오사카시를 오사카도로 전환에 찬성하는 여론조사 비율이 꽤 많았고 일본 유신회의 높은 지지와 코로나19 대응으로 인기몰이에 성공한 요시무리 지사의 인기로 통과될 확률이 높았지만 출구조사에서 여론조사를 뒤엎고 반대가 근소하게 나왔다. 초반 개표는 반대가 우세했지만 곧바로 찬성으로 뒤집어지면서 역전이 되었고 만여표 가까이 벌어졌다가 이후 표차가 줄어들더니 다시 반대가 찬성을 역전했고 또다시 찬성이 반대를 재역전했다가 반대가 찬성을 또다시 재역전한 뒤에는 찬성이 다시 재역전을 하지 못하고 반대로 확정되었다.
3.1.1.3. 그 이외
- 2021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여론조사에서는 고노 다로 후보가 총재 선거에서 유리했고 실제 총재 선거에서도 고노 다로 후보가 유리할 것이란 전망이 일부 있었으며 숨은 고노 표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기시다 후미오와 다카이치 사나에 후보가 결선 투표에서 단일화를 하고 아소 다로의 지공회가 두루뭉실한 태도를 보임은 물론, 자민당의 3A 중에 한 명인 아마리 아키라 세제조사회장도 아베 신조와 회동해서 결선 투표에 협력하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기시다 후미오가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했다.
- 2024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여론조사에서는 대부분의 조사에서 이시바 시게루 후보가 우위를 점했으나, 1차 투표에서 경쟁자 다카이치 사나에 후보에게 밀려 2위로 결선 투표를 가게 되었고, 이 때까지만해도 매 총재 선거마다 의원 투표에서 항상 약세를 보였던 이시바의 약점으로 인해 다카이치의 당선이 지배적인 여론이었다. 그러나 결선 투표에서 의원·지방 투표에서 모두 다카이치를 이기며 이시바가 새 총재로 당선되었다. 이는 자민당의 실세인 아베 신조와 아소 다로에게 시달린 이시바와 마찬가지로 시달렸던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아소가 지원하는 다카이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자신의 과거 파벌인 굉지회의 의원들을 투입시켜 일부러 이시바에게 거의 몰표를 줬다는 평론가들의 평이 존재한다.
-
미국에서
공화당의
남부전략과
민주당의
뉴딜 정책으로 인한
텃밭 변화: 본래 예전에는 북부에서 공화당 지지세가 많았고, 남부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와 달리 오히려 민주당이 보수정당 포지션이고 공화당이 진보정당 포지션이었다. 다만 공화당은 1890년대부터 보수정당으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고 민주당도 1890년대부터 진보정당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북부는 공화당의 텃밭이었고, 남부는 민주당의 텃밭이었다.
하지만 대공황과 뉴딜정책을 거치면서 미국 정치지형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데 북부에서 공화당 지지세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민주당 지지세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는 북부에서도 공화당의 지지기반이 꽤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북부의 지지를 잃게 된 공화당이 남부전략을 쓰면서 공화당의 지지세가 높아지면서 역전의 기미가 보였으나 1980년대까지는 북부에서도 여전히 공화당이 승리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1990년대 빌 클린턴이 돌풍을 일으킨 걸 기점으로 뒤집히게 되면서 북부가 완전히 민주당 텃밭이 된다.
다만 조지아 등 일부 주에선 1990년대까지도 조직력이 남아있었으나 그 조직력도 2000년대엔 산산조각이 나면서 북부와 남부의 격차가 벌어졌다. 다만 2010년대 이후부턴 캘리포니아나 북부 지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과 회사의 영향으로 남부에선 민주당세가 늘어나고, 거꾸로 러스트벨트의 쇠퇴로 북부에선 공화당세가 늘어나고 있다.
-
대북강경론과 대북온건론:
남북관계의 상황에 따라서 대북강경론이 우세하기도 하고, 대북온건론이 우세하기도 한다. 북한이 도발을 저지를 때는 대북강경론이 크게 우세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대북강경론이 우세한 적이 더 많다.[3]
1940년대 후반에는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 영월발전소 폭파기도, 북한이 벌인 각종 교전 등으로 대북강경론이 우세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북한이 벌인 6.25 전쟁으로 인해서 대북강경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된다. 이후로도 북한이 저지른 테러와 어선 납북 등으로 인해서 대북강경론이 계속 우세하게 된다. 1960년대에도 북한이 어선 납치를 자행하고, 휴전선에서 각종 도발을 저지르고, 대한민국 해군 함정을 격침시키고, 온갖 테러를 저지르면서 대북강경론이 계속 압도적으로 우세했었다. 여기에 연달아서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까지 벌어지면서 대북강경론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1970년대 초에도 북한이 저지른 테러 등으로 인해서 대북강경론이 극에 달했다.
그러다가 1971년에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되고 1972년에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인해서 대북강경론이 조금 내려가고 대북온건론이 올라가는 듯 보였으나 이후에도 북한이 지속적으로 도발을 저지르면서 다시 대북강경론이 올라가더니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인해서 대북 강경론이 압도적으로 올라가고 이후 연달아 북한이 남침용으로 파 놓은 땅굴들이 연달아 발견되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까지 터지면서 대북강경론은 최고조를 찍게 되고 1970년대 중반~후반에도 대북강경론은 계속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980년대에도 북한이 휴전선에서 온갖 도발을 저지르면서 대북강경론이 계속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다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와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사건,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대북강경론이 최고조에 달했고 이후로도 북한이 계속 도발을 저지르면서 대북강경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에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펴고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 이뤄지면서 대북강경론이 약간 줄고 대북온건론이 약간 늘어나는 듯 보였으나 북한이 반성하지 않으면서 대북강경론은 여전히 우위를 유지했고 제4땅굴 발견으로 대북강경론은 다시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서서도 북한이 휴전선에서 온갖 도발을 저지르면서 대북강경론이 계속 우세했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질 듯 하면서 대북강경론이 줄고 대북온건론이 올라가는 듯 보였으나 이후로도 북한이 휴전선에서 도발을 저지르고 거기서 모자라서 1차 북핵위기가 불거지면서 대북강경론이 올라가면서 대북강경론이 우위를 지켰다. 그러다가 1996년에 벌어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대북강경론이 다시 극에 달한다. 90년대 후반에도 대북강경론이 여전히 우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햇볕정책이 시행되고 금강산 관광이 시행되면서 대북강경론이 줄기 시작하고 대북온건론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속초잠수정 침투 사건,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이 벌어지면서 대북강경론이 여전히 우위를 유지했고 제1연평해전까지 벌어지면서 대북강경론이 우위를 유지하는 듯 보였으나 2000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면서 대북온건론이 대북강경론을 역전하였다. 하지만 이후 북한이 휴전선에서 온갖 도발을 자행하면서 다시 대북강경론이 대북온건론을 역전했고 2차 북핵위기와 제2연평해전이 벌어지면서 대북강경론이 다시 우위를 점했고 북한의 NPT 재탈퇴 등으로 긴장상태가 유지되었고 이에 대북강경론이 약간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남북 간의 교류가 증대되면서 대북온건론이 다시 우위를 점하기도 했었으나 북한이 휴전선에서 도발을 저지르면서 대북강경론과 대북온건론이 엎치락뒤치락 한다. 그러다가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대북강경론이 재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7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면서 다시 대북온건론이 대북강경론을 누르고 재역전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북한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구상을 무시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했고 대북강경론이 대북온건론을 누르고 또다시 재역전에 성공하더니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대북강경론이 다시 확실하게 우위를 점했다. 이후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대청해전 및 북한의 2차 핵실험 등으로 대북강경론이 계속 올라오다가 2010년대에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이 일어나면서 대북강경론이 다시 최고조에 달하게 되고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도 대북전단 발원지 격파사격 협박, 탈북자 암살 미수 사건, 연평도 해상 포격, GPS 교란 등으로 대북강경론이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한다. 이후로도 북한의 3차 핵실험 및 북한의 로켓 발사, 북한 무인기 추락 사건, 북한의 전쟁 위협, 한수원 해킹사건 등으로 대북강경론이 크게 우위를 점했고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과 서부전선 포격 사건으로 대북강경론이 더욱 우위를 점했다. 이후로도 북한이 계속 로켓과 미사일을 발사하고 북한의 4차 핵실험, 북한의 5차 핵실험 등이 이어지면서 대북강경론이 계속 우위를 점했다. 그러다가 2017년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풀리는 듯 보였지만 북한의 6차 핵실험이 일어나고 북한이 ICBM을 발사하고 391흥진호 나포사건,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여전히 대북강경론이 우세했었다.
하지만 2018년에 남북관계가 급격히 좋아질 조짐을 보이면서 대북온건론이 다시 올라왔다. 그러나 2018년 초만 하더라도 남북 단일팀 논란과 김영철 방한 논란으로 대북강경론이 약간정도 우세를 했었다. 그러나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과 2018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2018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서 대북온건론이 대북강경론을 누르고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며 대북온건론이 최고조에 이른다. 그러나 이후 북한산 석탄 밀반입 논란으로 대북강경론이 다시 올라왔으나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대북온건론이 다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탈북자 기자 배제 논란, 김영철의 냉면 발언 논란, 북한 군용기의 대한민국 상공 비행 등으로 대북강경론이 다시 올라오는 듯 하다가 제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알려지면서 대북온건론이 아직은 약간 우위를 점했으나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미사일 기지 논란이 불거지면서 대북강경론이 대북온건론을 누르고 재역전에 성공했다. 이후에 북한의 이스칸테르 미사일 발사, 삼척항 목선 귀순 사건이 불거지면서 대북강경론이 점점 우세하지만 한 때 2019년 남북미정상회동으로 대북온건론이 올라오는 듯 보였지만 이후로도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지속되고 깜깜이 축구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대북강경론이 더욱 올라갔고 2020년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과 북한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등으로 인해서 대북강경론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했으며 이후로도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로 인해서 현재는 대북강경론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이다.
3.1.2. 경제
3.1.2.1. 국제관계
- 대한민국,북한: 한강의 기적 이전만 해도 1인당 GDP는 북한이 앞섰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전쟁의 상처를 복구해 나가고 60년대부터 산업화에 돌입하면서 대한민국이 추격을 하기 시작하다가 한강의 기적과 북한의 80년대 경제 실책 등으로 뒤집히더니 지금은 대한민국은 선진국 위치에 오르고, 북한은 고난의 행군 등으로 완전히 추락을 하여 아직 개발도상국 위치에 있다.
-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이쪽도 대약진 운동 이후만 해도 중화민국에 많이 뒤쳐졌지만,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을 하면서 뒤집어 진 것이다.[4]
3.1.2.2. 공기업/ 공공기관
- 서울교통공사로 합병 이전의 서울도시철도공사: 본래는 서울메트로가 서울도시철도공사보다 오래된 공기업이고 연혁도 길었던데다가 평판도 서울메트로가 훨씬 더 좋았고, 서울메트로가 칭송도 많이 받았으며 반면에 서울도시철도공사는 별로 평판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서울메트로의 평판이 하락했고 서울도시철도공사가 평판이 더 좋아졌으며 칭송도 서울도시철도공사가 더 많이 받았다.
3.1.2.3. 대기업/ 중견기업
- 삼성그룹: 본래 삼성그룹이 1위 대기업이었다가 현대그룹이 역전을 하여 한 때 대한민국 전체 1위 대기업이었지만,[5] IMF 사태 이후로 삼성그룹이 다시 완벽하게 역전했고 현대그룹을 2위로 추락시킨 것도 모자라 중견기업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했다![6]
- 롯데그룹: 본래는 껌을 만드는 회사로 시작했지만, 제과, 호텔, 백화점, 음료 등을 연달아 설립하고 석유회사 인수, 롯데리아 설립, 롯데마트 설립 등으로 다른 대기업들을 제치고 10위권 안에 든다. 이후로도 다른 대기업들이 IMF 사태로 부도처리되는 와중에도 10위권 대기업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나가서 5대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 효성그룹: 한 때 10위권 대기업이었지만, 섬유 산업의 하향세와 IMF 사태로 인해서 다른 대기업에 밀려서 40위권까지 내몰렸다가 현재는 다시 역전하여 다른 대기업들을 제치고 20위권 대기업이 되었다.
- 두산그룹: 본래는 대한항공을 보유한 한진그룹이 10위권 대기업에 위치해 있었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 한진그룹이 10위권 대기업에서 밀려나고 아래로 내려갔으며 두산그룹이 10위권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현재 한진그룹의 순위를 역전했다.
- 한화그룹: 본래 한국화약 시절 10위권 대기업에 위치해 있었고 한화그룹으로 변경을 한 뒤에도 10위권 대기업을 유지했지만 한 때 10위권 밖으로 밀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역전하여 다른 경쟁 대기업들을 제치고 10위권 내에 다시 들었다.
- 한진그룹: 본래는 대한항공 및 한진해운 및 한진중공업 등을 보유한 한진그룹이 금호아시아나그룹보다 앞섰으나 고속버스에 머무르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점점 약진하기 시작하더니 광주패밀리랜드를 설립해서 서비스업에도 손을 뻗으면서 금호그룹이 점점 약진하고, IMF 때 위기를 맞지만 극복을 하면서 금호산업을 출범시키고 한진그룹이 한진중공업, 한진해운, 메리츠투자증권 등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금호그룹은 다시 전성기를 맞고 대한항공의 여러 사건사고로 위기에 빠진 한진그룹을 거세게 추격하더니 한진그룹의 순위를 역전한 건 물론,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하면서 한 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더욱 전성기를 맞는 듯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형제공동경영 체제가 무너지면서 금호석유화학이 분리되었고 그러더니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에 따른 부작용이 많이 밀려오고 유동성 위기까지 오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다시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고 한진그룹이 다시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역전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매각하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핵심이던 금호렌터카도 매각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다시 순위가 추락했고 한진그룹은 다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순위를 재역전하는 데 성공한다. 그 외에도 한국복합물류, 금호생명, 금호종합금융,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금호타이어 등도 매각하면서 금호그룹은 더더욱 추락하며 한진그룹은 두산그룹에 순위가 밀리기는 했어도 여전히 굳건하게 대기업의 위치를 지켰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핵심 자산인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하기로 결정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결국 중견기업으로 강등을 당해버렸고 결국 금호고속과 금호건설로 분리경영을 이어가게 되었지만, 한진그룹은 여전히 굳건하게 대기업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3.1.2.3.1. 계열사
- 현대건설: 창립 이후 6.25 전쟁 당시에 미군 숙소를 지으면서 잘 나가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한강 인도교, 경인고속도로, 소양강댐, 고리 원자력 발전소를 지으면서 급성장했으며 특히 경부고속도로가 현대건설의 역작이었다. 이 외에도 각종 현대아파트와 정부서울청사, 경향신문 사옥, 현대 사옥들을 지었고 충북 단양의 석회석광을 사서 석회시멘트 공장을 세워서 시멘트제조업도 했다. 그 외에도 태국 파타야~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까지 따내면서 해외건설공사도 수주했을 정도로 잘 나가던 회사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들어서서 한 때 침체기를 걸었다. 그러나 2009년에 대우건설을 제치고 도급순위 1위를 탈환하였으며 2013년까지 연속 1위를 유지했고 빅데이터를 비롯한 건설회사 평판에서도 1위를 유지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 현대엘리베이터: 본래 80년대 이전에 엘리베이터 산업은 금성엘리베이터, 신영전기엘리베이터, 동양엘리베이터 등이 엘리베이터 산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그 외에도 외국계 엘리베이터도 엘리베이터 산업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현대 관련 건물들도 1984년 이전에 60년대~80년대 초반에는 금성엘리베이터나 신영전기엘리베이터를 썼을 정도다. 1984년에 현대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금성엘리베이터나 신영전기엘리베이터, 동양엘리베이터나 외국계 엘리베이터 등이 계속 잘 나갔다. 그러나 현대엘리베이터 설치 이후 현대 관련 건물들에 현대엘리베이터를 속속 설치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후반~1990년대 들어서서 현대엘리베이터가 점점 승강기 산업에서 영향력을 행사해나가기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국내 승강기 산업 점유율에서 현대엘리베이터가 동양엘리베이터를 앞지르면서 현대엘리베이터는 승강기 산업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까지는 LG산전엘리베이터-오티스엘리베이터가 여전히 굳건하게 1위를 지켰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들어서서 현대엘리베이터가 국내 승강기 산업 점유율에서 1위를 달성하면서 역전에 성공했으며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대한항공: 본래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국내에 딱 하나 있는 항공사였고 위상도 대한항공이 훨씬 높았다. 아시아나항공이 1988년에 설립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위상은 한동안 대한항공이 더 높았다. 하지만 갖은 사건사고로 인해 오명도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1997년에 일어난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인해서 대한항공의 위상이 많이 추락했고, 이후에도 연달아서 대한항공의 화물기들이 추락하면서 대한항공은 더욱 위상이 추락하였다. 반면 아시아나항공은 이 때 반사이익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회사 홍보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성장세를 많이 보이면서 아시아나항공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대한항공의 위상을 역전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대한항공이 절치부심을 하여 안전성을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항공 안전 관리 부서 임원에 외국인을 채용하면서 대한항공의 위상도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아시아나항공 역시 2000년대 중반까지는 여전히 위상이 높았던지라 서로 경쟁을 많이 했다. 그러나 아시아나항공을 보유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무리하게 인수했다가 위기에 빠지면서 200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나항공의 위상이 다시 하락하기 시작하고 대한항공의 위상이 상승하여 완전히 역전에 성공을 했다. 그러다가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으로 인해서 대한항공의 위상이 약간 하락하고, 아시아나항공이 다시 반사이익을 누렸으나 이후 잠시 대한항공의 위상이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물컵 갑질 논란으로 인해서 다시 대한항공의 위상이 하락을 했다. 하지만 아시아나항공 역시 박삼구의 성희롱 논란과 기내식 공급부족 사태로 인해서 위상이 상당히 하락했고 대한항공은 조양호 회장 사후에 동정심으로 인해 어느정도 위상이 회복되더니 코로나 19 때 대한항공이 흑자를 거두면서 대한항공의 위상이 꽤 상승했다. 반면 아시아나항공은 HDC그룹에 인수되기로 하면서 한 때 희망이 보이는 듯 했으나 HDC그룹이 인수를 포기하면서 결국 대한항공에 통합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3.1.2.4. 중소기업
3.1.2.5. 금융
- 대한민국 원의 지폐들: 예전에는 천 원권 지폐, 오천 원권 지폐, 만 원권 지폐가 가치가 많은 지폐였고, 쓰임새도 충분했던 지폐였지만 IMF 이후 물가가 오르면서 천 원권 지폐의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로는 오천 원권 지폐와 만 원권 지폐의 가치와 쓰임새도 슬슬 하락하기 시작하더니 오만 원권 지폐가 발행된 이후로는 만 원권 지폐의 가치와 쓰임새가 하락하고 오만 원권 지폐의 가치와 쓰임새가 상승하면서 현재 천 원권 지폐는 잔돈으로 전락했고 오천 원권 지폐도 잔돈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있으며 만 원권 지폐 역시 쓰임새가 예전만은 못하다.
3.1.3. 언론
- 신문 구독률·열독률과 뉴스 이용률: 과거에는 신문의 구독률과 열독률이 높았고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발행부수도 최다였다. 1950년대부터 신문 구독률과 열독률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는 발행부수가 세계 10위에 달했으며 컬러TV가 보급된 1980년대와 PC통신이 발달한 1990년대만 해도 신문 구독률과 열독률이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IMF 사태와 인터넷의 보급 이후 신문 구독률과 열독률이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인터넷 뉴스 이용률과 TV 뉴스 이용률이 급증하더니 2000년대 중반에는 종이신문 구독률의 과반이 무너졌다. 2000년대 후반에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종이신문 구독률이 더 급격하게 하락하더니 인터넷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비율이 더 높아지면서 인터넷 뉴스 이용률이 신문 구독률을 역전했다. 더욱이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의 발달로 신문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하락세가 가속화되면서 열독률마저 과반이 무너지더니 2010년대 후반에는 구독률이 10%마저 무너졌다. 반면 뉴스나 인터넷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고 유튜브에도 언론의 기능이 발달하면서 온라인 뉴스가 더 발달했다. 2021년에는 신문 열독률도 한 자리로 추락했다.
- 한국일보: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한국일보가 제일 잘 나갔으며 특히 1960~197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함께 양대 산맥으로 꼽혔다. 1980년대 이후로는 조금 밀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200만부수 이상을 자랑했었다. 그러나 IMF 사태를 기점으로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하여 사세가 기울었고 현재는 발행부수도 20만 남짓 수준으로 추락했다.
3.1.4. 사회
- 남성: 군 입대때문에 20대까지만 해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항상 뒤쳐지는 경우가 많지만[7] 30대가 되기 전에 어떻게든 취업에 성공해서 직장인이 되면 그때부터 경제권은 물론 발언권 등도 강력해지는 경우도 있다. 연애 시장 및 결혼 시장 등에서도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점차 유리해진다. 특히 본인이 공무원, 대기업, 전문직 등에 종사하는 엘리트 계층이라면 금상첨화 그 자체. 물론 본인이 매우 열악한 중소기업에 다닌다든지 노가다 등 육체노동에 종사한다든지 더 나아가 백수라면 당연히 예외다.
- 화장 문화와 매장 문화: 본래 대한민국은 매장이 대세였지만 21세기 이후로 화장 비율이 매장 비율을 역전하여 현재는 화장 비율이 90%대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전에도 고려시대 때 화장이 대세였고[8] 삼국시대 때는 또 매장이 대세였다. 다만 중국의 경우도 본래는 매장이 대세였지만 1950년대 이후 화장이 역전을 하여 고위층을 제외하면 화장비율이 높아졌고 영국 역시 매장이 대세였지만 식민지가 해체된 이후에 화장이 역전을 하여 화장비율이 높아졌다. 미국 역시 매장이 대세였지만 최근 들어서서 화장비율이 매장비율을 역전했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역시 본래 매장이 대세였지만 화장 비율이 역전을 한 뒤 점점 비율이 높아졌다.
- 입식 문화와 좌식 문화: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입식 문화가 주류를 대세이지만 대한민국,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는 좌식 문화가 대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는 본래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 초기까지는 입식 문화가 주류였지만 고려 말기부터 좌식 문화가 조금씩 유입되기 시작했고 조선 중기부터 좌식 문화가 점점 확산되다가 조선 후기에 좌식 문화가 주류로 정착된다. 그러나 개화기~대한제국 때부터 입식 문화가 다시 유입되기 시작했고 해방 이후에 1950년대를 거치면서 입식 문화가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하더니 1960년대~1980년대 산업화와 각종 국제 행사를 거치면서 입식 문화가 급격히 확산되었고 1990년대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입식 문화가 다시 주류로 변했다. 다만 여전히 좌식 문화와 혼용하는 경우가 일부 있었으나 최근에는 그마저도 입식으로 바꾸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본래 고대~송나라 시대에는 좌식 문화가 주류였으나 당나라~송나라 때부터 입식 문화가 확산되더니 원나라를 거치면서 입식 문화가 주류로 변했고 명나라~청나라를 거치면서 입식 문화가 정착되었다.
- 대한민국/인구: 본래 대한민국의 인구는 1920년대에 1천만명 대였으나 이후 증가세를 기록하여 1948년에 2천만명 대를 넘어섰다. 한 때 한국전쟁으로 1천만명 대로 감소했지만 이후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54년에 2천만명 대를 다시 넘고 1967년에 3천만명 대를 넘었으며 1984년에는 4천만명 대를 넘으면서 인구증가세가 지속되다가 2012년에 5천만명 대를 넘었다. 이후로도 인구증가세가 소폭 지속되었으나 2021년에 인구감소세로 돌아섰다.
3.1.5. 문화
- 지상파와 케이블, 종합편성채녈: 본래는 지상파 방송이 대한민국 TV를 주름잡고 있었으며 드라마, 예능, 시사프로, 뉴스 등 모든 면에서 지상파 방송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2000년대 후반의 케이블 방송의 성장, 2010년대의 종편 방송 개국으로 슬슬 역전 조짐이 보이더니 2018년 이후로는 종편이 드라마, 예능, 시사프로 등에서 모두 약진하면서 종편 방송이 우위를 점했고 역전에 성공하였다. 반면 지상파 방송은 추락을 했다.
- 퓨전사극: 본래는 정통사극이 대한민국 사극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1990년대 후반에 허준의 흥행을 기점으로 퓨전사극이 올라올 조짐을 보이더니 2000년대 중반에 해신이 흥행하면서 퓨전사극이 본격적으로 약진을 시작하였고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로 가면서 정통사극이 침체에 빠지면서 퓨전사극이 사극의 주류로 올라가면서 역전에 성공했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서서는 정통사극이 거의 방영하지 않았을 정도로 퓨전사극이 한국 사극의 주류였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서서 다시 정통사극이 방영을 하고 있다.
3.1.6. 교육
- 국내 대학교의 여학생 진학률: 예전에는 남학생의 진학률이 높았지만 2000년대 초반에 격차가 좁아지더니 2005년을 기점으로 여학생 진학률이 남학생 진학률을 역전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국내 대학교의 입학생 비율 중 여학생 비율: 예전에는 전국 대학교 입학생 비율에서 남학생의 비율이 높았지만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서울의 대학교 입학생 비율에서 여학생 비율이 높아지면서 서울 쪽은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역전했고 2000년대 후반에는 광주 쪽도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역전했다.
- 국내 대학교 재학생 중 여학생 비율: 본래는 국내의 전국 대학교 재학생 중에 남학생 비율이 많았지만 서울은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격차가 좁아지더니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서울의 대학교 재학생 비율 중에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역전을 하였고 광주 역시 2000년대 중반에 대학교 재학생 비율 중에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역전하였으며 충남과 제주도 2010년대 후반~2020년대 즈음에 역전을 하였다. 모든 대학교로 치면 서울은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역전하면서 지금은 여학생 비율이 꽤 많아졌다. 광주는 2000년대 초반에 여학생 우세로 바뀌었다가 남학생 우세로 잠시 돌아갔지만 금방 여학생 우세 지역이 됐다. 경기는 2010년대 초중반에 여학생 우세로 바뀌었다. 부산과 대구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여학생 비율이 많아졌다가 2000년대 중반에 남학생 비율이 많아졌지만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서면서 다시 여학생 수가 많아졌다. 충남은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서서, 경북은 2020년대 초반 들어서서 여학생 우세로 바뀌었다. 전남은 2010년대 초반에 모든 대학교 재학생 비율에서 여학생 우위로 바뀌었지만 곧 남학생 우위 지역이 됐다.
- 서울의 대학교 재적학생 비율 중에 여학생 비율: 본래는 서울의 대학교 재적학생 비율 중에 남학생 비율이 많았지만 모든 대학교 재적학생 비율에서는 2005년에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역전했고 일반 대학교 재적학생 비율 중에서는 2020년에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역전했다.
- 정시와 수시: 본래는 정시 비율이 과반 이상을 넘었지만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격차가 줄어들더니 2000년대 후반에 수시 비율이 과반 이상을 넘으면서 역전을 했고 이후 격차가 벌어져서 지금은 수시가 상당히 우위에 있다.
-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의 여초현상 및 여학생 증가 현상: 예전 7~80년대까지만 해도 이 대학들도 여대를 제외하면 남학생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이 대학들에서 여학생들이 계속 증가하더니 2000년대 이후에는 인문대학에서 여학생의 비율이 과반을 넘으면서 역전을 했고 2000년대 후반에는 사회과학대학, 법과대학, 상과대학에서도 재학생 기준으로 여학생 비율이 과반을 넘으면서 역전을 하였으며 사회과학대학은 재적학생으로도 여학생 비율이 과반을 넘으면서 역전을 하였다. 2010년대 이후로는 여학생 비율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여대는 물론, 남녀공학에서도 이 대학에서 여학생 비율이 많아지고 있다.
- 교사 내부 여성 비율: 현재는 공무원 중 대표적인 여초 직업으로 꼽혔지만,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오히려 남초 직업이였다. 그러다가 1990년대를 기점으로 여성의 비율이 늘어나다가 2000년대가 되어서 뒤집어 진 것이다. 다만 사립학교인 경우는 남성 비율이 상당히 높다.
- 국립대학, 공립대학과 사립대학: 현재 대한민국 고등교육기관은 80% 이상이 사립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국공립 고등교육기관들의 비율도 적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 국공립 고등교육기관 비율이 사립 고등교육기관 비율을 앞질렀던 경우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경우에 따라서 경성제국대학과 관립전문학교, 공립전문학교를 포함한 국공립 고등교육기관과 사립전문학교를 포함한 사립 고등교육기관의 비율이 오락가락 하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국공립 고등교육기관의 비율이 앞서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립 고등교육기관의 비율이 앞서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를 포함한 국공립 고등교육기관들의 비율이 사립 고등교육기관들의 비율을 앞서기도 했지만 1950년대 이후 여러 사립대학을 포함한 사립 고등교육기관들이 우후죽순 설치되면서 사립 고등교육기관들의 비율이 국공립 고등교육기관들의 비율을 앞섰고 이후 사립 고등교육기관들의 비율이 격차를 벌리더니 현재는 사립 고등교육기관들의 비율이 80%를 넘게 되었다. 다만 한국 대학의 원탑은 여전히 국립 고등교육기관인 서울대학교가 1위를 지키고 있다.
- 대학진학률 및 취학률: 본래 대학진학률은 1970년대까지 10~20%를 맴돌았고 취학률 또한 10%를 넘지 못했고 고졸 이하의 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졸업정원제가 시행되고 이로 인해 대학진학률이 30%대로, 취학률이 10~20%대로 높아지고 고졸 이하의 비율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에 김영삼 정부의 대학설립준칙주의와 이공계 대학정원의 증가로 대학진학률이 40%대, 취학률이 30~40%대를 뛰어넘어 50%대에 들어서면서 중,고교 졸업자들의 비율을 역전했고 이는 계속 상승하여 대학진학률은 60~70%, 취학률은 50~60%대를 뛰어넘어서 2000년대 중반에는 80%대, 취학률은 70%대까지 이르렀고 중,고교 졸업자 비율은 10%대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조정국면에 들어서면서 대학진학률이 60~70%대로 내려갔지만, 여전히 대학진학률이 큰 우위에 있으며 취학률도 60~70%대를 유지하고 있다.
3.1.7. 스포츠
구기 스포츠에서 유독 역전이 잘못 쓰이는 경우가 있다. 역전의 핵심은 지고있다가 '전세가 뒤집히는 것'인데, 지고있던 것이 아니었는데 리드를 다시 잡았다고 역전이라고 잘못 말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예를 들어 축구에서 2:0으로 리드하던 팀이 2:2 무승부까지 따라잡혔다가 다시 골을 넣어서 3:2로 앞서나간다고 해도 이는 '지던 경기를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전이라 할 수 없지만, 이를 역전골이라고 잘못 일컫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역전이 아니므로 예시를 추가할 때 유의할 것.-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의 대한민국 vs 이탈리아전: 대한민국의 첫 8강 진출을 만든 경기다.
-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의 벨기에 vs 일본전. 일명 로스토프의 14초.
- 1978년 AL 동부지구의 뉴욕 양키스
- 2004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의 보스턴 레드삭스
- 2007 서울국제마라톤 이봉주: 잠실대교를 지나며 선두와 많이 멀어졌으나 이후 불같은 스퍼트로[9] 선두를 달리던 케냐 선수를 야금야금 추격하더니 결승점을 1.6km 정도 앞둔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앞길에서 역전에 성공하여 당시 세는 나이 기준 38세의 나이로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 2013년 508 대첩 10점차 역전승이라는 역대 최다 점수차 역전승이 나왔다.
- 2000년 5월 7일 LG vs. 두산전
- 2013년 한국시리즈
- 도쿄 대첩: 여기 나오는 5개 경기 모두 한국이 역전승했다.
- 도쿄돔의 기적
- 2016 AFC U-23 챔피언십 카타르 결승
- 2016 르망 24시: 일명 토요타 3분 사건
- Daum 스타리그 2007 결승
- BATOO 스타리그 08~09 결승
-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 1 결승
-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 2004년 스파3 서드 대회 전설의 역전
-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펜싱 남자 에페 개인전 결승전의 박상영
- 2018 세계사격선수권 10m 공기권총 결선의 진종오 선수
- 2012 런던 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 준결승전의 김지연
- 이스탄불의 기적
- 리스본의 기적
- 리아소르의 기적
- 마라카낭의 비극
- 캄프 누의 기적(1999년)
- 캄프 누의 기적(2017년)
- 이란 쇼크: 점수 때문에 부각이 안 되지만 전반전까지만 해도 2대1로 한국이 앞서고 있었다.
- 로마의 기적
- 안현수: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남자 5000m 계주가 유명하다.
-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인터극장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그 중 절정은 09-10 시즌 챔스 4강전(vs FC 바르셀로나)과 10-11 시즌 챔스 16강 2차(vs 바이에른 뮌헨).
- 마르첼로 브로조비치: 원래 수비형 미드필더였지만 오랫동안 제 자리에서 뛰지 못해 기량이 제대로 발휘가 안됐다. 그리하여 인테르 팬들에게 3년간이나 안 먹어도 될 욕을 먹었으며 같은 크로아티아 출신 미드필더이던 마테오 코바치치보다 평가절하 되었다. 그러나 인테르 생활 3년차에 제자리에 놓이게 되자 괄목상대급으로 기량이 치솟아 크로아티아의 러시아 월드컵 준우승 주전 명단에 당당히 자기 이름을 올리게 됐다. 반면 코바치치는 부진한 인테르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갔으나 정작 출전을 많이 못해 기량이 정체되다 못해 퇴화되었다. [10]
- 2013년 K리그 클래식 포항 스틸러스: 마지막 대결인 38차전 이전까진 울산 현대의 우승에 가까웠지만, 마지막 대결에서 추가 시간 끝자락에 골이 나오면서 역전을 했고 우승했다. 참고로 이게 K리그 팀 중 유일하게 더블이 나온 사례이기도 하다.
- 2017년 슈퍼볼 LI
- 2018년 한국시리즈: 특히 6차전은 여기에 제일 맞다. 해당 문서로. 기적 문서로 포함되어 있다.
- K리그1/2019년/17라운드 강원 vs 포항: 후반 25분까지 0대4로 끌려가던 강원FC가 거짓말처럼 5골을 몰아넣어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특히 강원의 5골 중 3골이 후반 추가시간에 터졌다!!!
- 2019년 KBO 리그 최저평균자책점 부문의 양현종
- 2019년 KBO 리그의 두산 베어스: 시즌이 2달 남은 8월까지만 해도 SK와 9경기 차이 3위였지만, 그 이후 SK가 무너지고 두산이 치고 오르면서 승차를 좁히고, 마침내 9경기 차를 뒤집고 역대 최초로 승차 없이 정규시즌 우승을 달성했다.[11] 특히 이겨야 우승하는 마지막 경기에서도 8회 3점차 열세를 뒤집고 끝내기로 우승을 확정했다. 그리고 SK를 스윕으로 업셋한 키움을 상대로 스윕을 해서 통합 3번째 우승은 물론 6번째 우승을 이뤘다.
- 2019년 메이저리그의 워싱턴 내셔널스: 시즌 초반만 해도 19승 31패로 극열세였지만, 마이애미 말린스를 상대로 역전승을 한 뒤 28승 11패를 하며 와일드카드를 탈환했고, 그 이후 8월에 19승 7패 등 놀라운 승률을 기록해서 와일드카드에 올랐다. 그 이후 와일드카드에선 3:1을 3:4로 역전승, NLDS에선 1승 2패를 3승 2패로 역전승, 월드 시리즈에선 2승을 한 뒤 2승 3패로 역전당하더니, 다시 4승 3패로 역전해서 창단 첫 우승을 하게 되었다.
- 2020년 슈퍼볼 LIV
- 루이지 사멜레[12]
- 2020 도쿄 올림픽/야구 대한민국 vs 도미니카 공화국 녹아웃 2경기, 동메달 결정전 모두 이긴 팀이 역전한 경기인데, 전자는 대한민국이 이겼고, 후자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이겼다.
- 베르나베우의 기적: 레알 마드리드는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1차전에 4-3으로 패배 후 2차전에 선제골을 내주고 시리즈 점수 5-3으로 두 시즌 연속 준결승에서 탈락이라는 위기에 몰렸으나 90분 후 추가시간에 두 골을 몰아치고 연장전 전반에 패널티 킥을 성공, 6-5로 역전에 성공 후 결승에 진출했다.
- 2022 AFC 여자 아시안컵 결승 대한민국 vs 중국: 여담으로 카타르 U-23 월드컵에서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결승 진출 방법과 결승에서의 스코어가 똑같다.[13]
- 2022년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 시즌 초반엔 1위 라쿠텐과 무려 11.5게임차이로 꼴찌를 바라보나 싶더니, 그 이후 승수를 계속 쌓고, 마침내 쇼뱅과 1~2위 쟁탈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나흘만에 1.5게임을 뒤집으면서 26년만의 퍼시픽리그 2연승에 모자라, 26년만의 5번째 우승까지 하게 된다.
- 루사일의 기적, 알라얀의 기적, 제1차 칼리파의 기적, 제2차 칼리파의 기적 - 네 개 다 초반엔 선제골을 먹고 뒤쳐지다가 역전했고, 상대적 약팀이 강팀을 꺾는 이변을 만든 경기란 공통점이 있다.
3.1.8. 군사
3.1.8.1. 무기
- 냉병기와 화기: 본래는 무기에서 활, 화살, 창, 검, 도검, 도끼, 둔기, 채찍, 장병, 투척무기, 쇠뇌를 비롯한 냉병기가 주류였고 투석기도 대부분 냉병기에 속했다. 그나마 불을 이용한 공격은 불화살과 화차, 맹화유가 전부였다. 하지만 화약과 대포가 개발되면서 화기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화승총의 발달로 점점 더 화기가 주류가 되기 시작한다. 반면 활, 화살을 비롯한 냉병기는 점점 밀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더해 블랑기포, 홍이포, 비격진천뢰, 신기전 등 각종 화약 무기들이 늘어나면서 화기는 본래 주류였던 냉병기를 제치고 조금씩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연이어 휠락, 플린트락 등을 장착한 소총 등으로 총기가 발전하고 서양식 대포, 야포와 퍼거션 캡까지 등장하면서 화기는 주류로 점점 자리잡는다. 심지어 소총에 이어 기관총이 등장하고 여기에 더해 유탄발사기와 박격포의 등장에, 포병사격도 발전하면서 완전히 주류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전차, 장갑차, 전투기, 군함이 발전을 거듭하고 미사일, 수소폭탄, 핵폭탄까지 등장하면서 오늘날 화기는 주류 무기가 되었다. 그래도 총검술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는 총검술도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3.1.8.2. 병과
- 기병과 보병: 근대 이전만 해도 상대적으로 기동성이 강한 기병이 보병보다 우위였고, 실제로 병자호란, 몽골-금 전쟁처럼 유목민족이 정주민족을 농락한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총기가 발명된 이후엔 격차가 줄어들더니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기병대가 사장되었고 현대엔 오히려 보병이 기병보다 우위가 되었다. 다만 기병의 역할은 기계병으로 계승되었다. 대한민국도 6.25 전쟁 때만 해도 기병대가 있었으나 그 이후 해체되었고, 보병과 기계병이 주류가 되었다. 다만 여전히 기마경찰이나 기마의장대를 볼 수 있다.
3.1.8.3. 병력
3.1.8.4. 전쟁
- 한니발 전쟁
- 고구려-위 전쟁 - 위나라 관구검의 공세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고구려측은 밀렸으나 유유의 희생으로 역전승으로 쉬결되었다.
- 고구려-백제 전쟁 - 고구려-백제 전쟁도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하면서 전쟁이 계속되었다. 근초고왕과 고국원왕 때는 백제가 우위였으나,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과 소수림왕, 고국양왕 때를 거치면서 역전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아신왕과 광개토태왕 시절에는 고구려가 우위를 점하면서 역전에 성공했다. 이후 전지왕, 구이신왕, 비류왕, 개로왕과 장수왕 때를 거치면서 고구려는 더더욱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동성왕, 무령왕과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때를 거치면서 다시 두 나라간 사이에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했으나 성왕과 양원왕 때를 거치면서 백제가 다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나제동맹이 깨지고 성왕이 전사하면서 두 나라는 치열한 싸움을 계속한다.
- 백제멸망전 당시 황산벌 전투 - 백제의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신라의 명장인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대군을 상대로 네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지만 반굴과 관창의 전사로 인해 사기가 오른 김유신 장군과 신라의 5만 군사들이 계백의 5천 백제군을 모두 섬멸했고 계백 역시 전사했으며 백제 역시 멸망을 했다.
- 고구려-당 전쟁 - 고구려-당 전쟁은 초반에는 당나라가 고구려의 요충지들을 함락시키고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대군을 궤멸시키면서 당나라 우위였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가 승리하면서 고구려 우위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이후로도 각종 소모전 및 사수대첩 등에서 고구려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의 내분으로 인해 당나라가 다시 상황을 뒤집는 데 성공했고 그럼에도 고구려는 2년 동안 버텼으나 당나라가 고구려의 요충지들을 함락시키더니 평양성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성은 초반에 함락당하지 못했으나 배신자인 신성이 성문을 열면서 평양성은 함락당했고 고구려는 결국 멸망한다.
- 안시성 전투 - 제1차 고당전쟁에서 밀리던 고구려군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세를 역전시킨 중요한 전투이다.
- 여요전쟁
- 제1차 여요전쟁과 제2차 여요전쟁 - 제1차 여요전쟁은 초반에 거란군에게 봉산 방어선을 함락당하면서 위기에 몰렸으나 대도수와 유방이 지휘한 안융진 전투의 승리로 고려군이 역전에 성공했고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에서 고려는 강동 6주를 얻어내었다. 제2차 여요전쟁은 초반에 흥화진성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를 거두고 강조가 지휘하는 30만 대군이 1차 전투에서 거란군을 몰아내면서 고려의 승리가 확실시 되는 듯 보였으나 삼수채 전투 중 2차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고려군이 참패를 하고 곽주성을 함락당하고 개경이 거란군에게 점령당하고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하면서 거란군이 전세 역전에 성공하고 고려는 큰 위기에 몰렸으나 고려의 요충지들이 건재했으며 양규와 김숙흥이 게릴라전으로 거란군을 섬멸하면서 고려 백성들을 구출하고 하공진의 활약으로 거란군이 철수하면서 고려군이 다시 전세 재역전에 성공한다.
- 제3차 여요전쟁 중 귀주대첩 - 초반에는 소배압의 거란군과 강감찬의 고려군이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면서 양쪽이 궁기병, 경기병, 검차(고려 한정), 궁병, 창검병 등을 동원해서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했는데 고려군의 궁병 사격에 거란군이 밀리지만 거란군 역시 궁병으로 사격하면서 거란군이 우위를 잡았다가 강민첨의 고려군 궁기병과 경기병이 측면을 향해 달려오는 거란군 궁기병들을 저지하면서 다시 고려군이 승기를 잡고 고려군의 중앙부가 방패병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검차를 밀고 들어와서 고려군이 다시 승기를 잡았으나 거란군 궁기병이 고려군의 좌우측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거란군이 승기를 잡고 고려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 지속되다가 김종현의 철기병 1만이 오면서 강감찬, 강민첨, 조원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승기를 잡아서 거란군을 궤멸시키는데 성공했고 소배압의 거란군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1천에 불과했다.
- 여몽전쟁
- 홍건적의 2차 침입
- 백년전쟁
- 이탈리아 전쟁
- 네덜란드 독립전쟁
- 임진왜란 - 초반에는 조선군이 부산진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부산진과 동래가 일본군에게 함락당하고 이일의 군대와 신립의 기병대마저 일본군에게 전멸당하면서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밀렸고 수도 한양과 연이은 요충지들을 내주며 선조와 조정이 의주까지 피신하면서 조선이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한산도 대첩 등 이순신의 여러 해전의 승리, 의병들의 참전, 권율의 행주 대첩, 이치 전투으로 조선군이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자멸하면서 당시 왜군이 잠시 우위를 잡다가 명량 해전에서 다시 역전에 성공했다. 그 이후 명나라 지원군도 참여하게 되고 조선군이 평양성에서 탈환을 한 뒤 한양에 재입성하는 데 성공하고, 노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조선이 승리를 거두었다.
- 이치 전투 -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서 왜군이 유리했던 임진왜란을 조선군이 유리한 전쟁으로 바꾼 전투 중에 하나이다.
- 행주 대첩
- 한산도 대첩
- 명량 대첩 - 원균이 칠천량 해전으로 거북선 3척과 판옥선 80~90여척을 까먹어서 13석 vs 333석으로 대열세였는데 이 열세에서도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판옥선이 왜군의 세키부네를 31척이나 부쉈다. 이 결정적인 승리로 조선은 재반격을 시작하게 된다.
- 30년 전쟁
- 프랑스-스페인 전쟁
- 7년 전쟁
- 미국 독립 전쟁
- 나폴레옹 전쟁
- 제1차 아편전쟁
- 태평천국 운동
- 의화단 운동
-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 - 초반엔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를 점령하고, 국경 전투에서 이겨서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까지 단 50km 남은 지점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저지를 하고 파리에서 100km 지점인 누아용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이후 수 많은 참호전를 치르는 도중에 러시아 제국이 전쟁에서 물러나면서 독일 제국군이 춘계 공세을 해서 파리 근교에 다시 도달했지만 그 이후 킬 군항의 반란으로 독일 제국군이 항복하였다.
- 제2차 세계 대전
- 국공내전 - 초반엔 국민당이 만주 전역을 휩쓸고 다니면서 홍군을 밀어붙었지만, 미군의 휴전 요청 이후부턴 홍군이 만주를 장악하고 베이징,난징,충칭까지 다 털리면서 타이완 섬으로 쫒겨났다.
- 이라크 내전 - 참고로 ISIL가 수도에서 불과 1.6 km까지 진격했었기에 더 기적적이다. 특히 이라크판 스탈린그라드 전투인 모술 공방전이 여기에 더 어울린다.
- 6.25 전쟁
3.1.8.5. 반란
- 조사의의 난 -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잃은 태조 이성계와 태조 이성계의 뜻을 받든 조사의가 일으킨 반란으로 처음에 태종 이방원과 조선 조정에서는 동북면을 회유하는 데 주력하였으나 박순과 송류가 살해를 당했고 이후 태종 이방원과 조선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들을 모아서 서북면에는 이천우를 파견하여 서북면으로 이동하는 반란군을 차단하도록 했고 동북면에는 조영무를 파견하고 대규모 진압군을 보내서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했으나 조사의를 위시한 반란군은 이천우가 이끄는 진압군을 혼란에 빠뜨린 뒤에 기병 100명을 사로잡고 이천우도 겨우 살아서 탈출했으며 기세등등한 조사의와 반란군은 그 숫자가 더욱 늘어나서 6~7천명에 이르렀고 여진족이 합류하면 1만이 될 것이라고 더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직접 친정을 하고 조영무가 이끄는 진압군이 동북면으로 이동하여 배후의 지원을 차단했고 연달아서 이천우와 이빈 등이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적극적인 교전은 회피한 채 조사의의 군대가 주둔한 곳들의 주변을 점거하면서 반란군의 발을 묶으면서 슬슬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고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사의에 의해 포로로 잡힌 자가 한 말에 의해 반란군은 당황을 했고 탈영병들이 발생하면서 조사의의 반란군은 일거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한 탈영병이 반란군 진영에 불을 지르면서 조사의의 반란군은 일거에 와해된다. 그리고 반란이 진압되면서 태종 이방원과 조선 조정, 진압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조사의와 그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참수된다.
- 계유정난 - 사실 계유정난도 본래는 쉽게 성공한 게 아니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본래는 김종서에게 밀렸다. 수양대군의 측근인 홍윤성, 양정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내금위에서 관직을 하고 있었으나 거의 무뢰배 수준에 가까웠고 수양대군에게 모인 병력들은 거의 무뢰배들에 가까웠다. 반면에 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 삼정승과 민신, 조극관 등 김종서의 측근 중신들을 위시로 한 세력들은 의정부는 물론, 인사권과 삼군의 군권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김종서가 거느리는 병력들은 수양대군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수양대군에게는 한명회라는 책사가 있었고, 권람이라는 문과에 급제한 책사도 있었으며 명나라에 가면서 신숙주까지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고 정창손, 정인지, 이계전, 이인손 등의 일부 대신들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서거정, 강희맹, 양성지, 노사신 등 일부 학자들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서 김종서에게 기울어져 있던 전세를 슬슬 역전시키기 시작하더니 홍달손과 내금위 무사들이 수양대군의 편이 되면서 계유정난을 실행에 옮겼고 김종서, 황보인을 위시한 김종서파 대신들을 다 죽이면서 완전히 역전에 성공했으며 수양대군은 국정 전반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2년 후 세조로 즉위한다.
- 이시애의 난 - 초반에는 이시애가 함길도절제사 강효문을 죽이고 길주목사 설정신이 다스리는 길주를 점령하고 함길도관찰사 신면의 관군들도 격파하면서 이시애의 반란군이 우위에 있었고 귀성군이 이끄는 관군 3만은 강원도 철원군까지 밀려버렸다. 그러나 세조가 지원군을 더 파견하면서 전세가 역전될 조짐을 보이더니 귀성군의 관군들이 회양으로 진격하면서 점점 역전을 하기 시작했고 영흥을 탈환하고 북청까지 탈환하면서 관군이 승리하는 듯 했지만 북청에서 이시애의 반란군이 여진족과 합세하면서 다시 반란군에게 전세가 역전되는 듯 했지만 제2차 북청전투에서 관군이 대승을 거두고 만령전투에서 관군이 큰 성과를 올리고 이시애의 반란군을 궤멸시키면서 관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으며 이시애는 참수가 된다.
- 이괄의 난 - 처음에는 이괄이 인조가 보낸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살해하고 이괄의 반란군들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들 다수가 장만의 관군에게 투항하면서 관군 우세로 역전하는 듯 했으나 관군이 우왕좌왕한 틈을 타서 이괄의 반란군이 황주 전투에서 관군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아직 관군의 포위망은 건재한지라 마탄에서 적을 격퇴할 수도 있었지만, 마탄전투 역시 이괄의 반란군이 승리를 거두고 관군을 궤멸시켰으며 임진강 방어선마저 무너지고 한양도 함락당하면서 인조는 공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한양을 점거한 이괄이 인조 일행을 뒤쫓지 않고 한양에 머무르면서 전황이 이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인령전투에서 장만과 정충신의 관군이 기적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전세가 관군에게 역전되었으며, 이괄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인해 참수된다.
- 이인좌의 난
- 홍경래의 난
- 정난의 변 - 처음엔 주체가 선전을 하며 북부 지역을 다 쓸었지만, 황제군이 상당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서 전세는 도저히 좋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심지어 포위당해서 잡힐 위기에도 쳐한다. 하지만 잘못된 오보로 인해 방어군이 철수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 뒤론 상황이 뒤바뀌었고, 결국 주체는 수도인 난징까지 점령하게 된다.
3.1.9. 수사기관
3.1.10. 재판
- 2018년 이재명 허위사실공표 혐의 사건(사건번호 2019도13328) - 2심에서 벌금 300만 원 당선무효형을 받았으나, 3심( 대법원)에서 무죄취지 파기환송을 받으며 기사회생했다. 파기환송심에서 무죄 최종 확정.
3.1.11. 교통수단
3.1.12.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 싸이월드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예전에는 싸이월드가 대한민국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주류였고 싸이월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싸이월드가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페이스북이 대한민국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주류가 되었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페이스북 이용자들이 더 많아졌지만 페이스북도 노령화가 되면서 몰락했고 지금은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을 뛰어넘으면서 역전에 성공하면서 인스타그램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인스타그램이 더 많아졌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인스타그램 이용률이 상당히 높다. 반면 페이스북은 노령화가 되고 있는 추세다. 그래도 젊은 층들도 여전히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경우나 페이스북 계정은 유지하는 경우가 꽤 많다.
3.1.13. 패션
- 대한민국 백의민족 풍습의 변화: 예전에 대한민국은 백의민족 풍습이 주류를 이루었다. 다만 삼국과 고려 때는 다양한 색깔의 옷을 많이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조선시대가 들어서면서 백의민족 풍습이 강화되었고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때도 백의민족 풍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8.15 광복 이후 백의민족 풍습이 슬슬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6.25 전쟁을 기점으로 백의민족 풍습이 크게 쇠퇴하였고 이후에도 여러 정책의 영향이나 국제 행사의 영향으로 백의민족 풍습이 꽤 쇠퇴하면서 지금은 거의 색깔 있는 옷들이 많아지거나 하얀색으로 해도 여러 색깔 장식을 채우는 옷들이 거의 많아졌다. 다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흰색을 선호하는 경향이 꽤 있다.
- 정장: 18세기 말 ~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의 프록 코트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정장은 이후 많이 퍼져나가서 19세기 ~ 20세기 초에는 정장이 인기를 많이 누렸고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과 구한말 이후의 조선 및 대한제국도 정장을 많이 입게 된다. 20세기에는 정장이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전 세계는 물론, 대한민국도 정장을 많이 애용했지만 20세기 최후반 ~ 21세기 들어서면서 실용성이 중요해지면서 정장의 입지도가 점점 좁아졌으며 2020년대 들어서서는 이미지가 중요한 직원들을 제외하면 정장의 입지도가 예전보다 더 좁아졌다.
- 넥타이: 30년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 군인들이 목을 보호하기 위해 두른 목수건 크라바트에서 유래한 넥타이는 파리 시민들의 관심을 사게 되면서 루이 14세가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매고 다니면서 프랑스 귀족 패션으로까지 발전했고 이후에도 여러가지 타이가 개발되면서 넥타이가 남성 정장의 대표적인 정식 아이템으로 자리잡았고 19세기 ~ 20세기에는 넥타이가 큰 인기를 많이 누렸다. 이후 아시아권에도 넥타이가 확산되었으며 동북아에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구한말 조선의 개화기를 기점으로 넥타이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중반에도 넥타이는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20세기 최후반 ~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노타이 차림의 사람들이 많아졌고 넥타이의 입지도가 예전보다 좁아졌다. 특히 서양권은 사무직종=정장이라는 관념이 사라지면서 개인의 복장 자유가 어느정도 인정받으면서 넥타이가 더욱 쇠퇴하였다. 동양권은 넥타이를 매는 관념이 많이 남아있었으나 대한민국은 198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노타이 차림의 회의가 조금씩 늘어나더나 2000년대 이후로는 일본발 쿨비즈 문화가 일본보다 더 많이 유입되면서 여름에는 넥타이가 없는 경우가 많아지거나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이 많아지면서 넥타이 차림의 복장이 공식적인 때를 제외하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서양권 역시 여전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넥타이를 매는 경우가 많고 여전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넥타이를 매는 경우가 많아서 넥타이는 여전히 정장의 기본 옷차림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드레스: 예전에 웨딩드레스, 파티드레스는 귀족이나 부유층들 전유물이었으나 현재 들어서서는 웨딩드레스는 일반인들이 결혼을 할 때 많이 입는 보편적인 결혼식 패션이 되었고 파티드레스 역시 일반인들이 꽤 입는 경우가 있다.
- 티셔츠: 예전에는 영국 군인들이 입는 속옷 정도에 불과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가더니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와일드 원>의 영향으로 속옷에 불과했던 티셔츠가 일상복이자 보편적인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고 1960년대를 기점으로 티셔츠는 전세계에 퍼지게 된다.
- 스웨터: 예전에 스웨터는 운동선수들이 보온을 위해 입는 옷으로 입는 정도에 불과했으며 인기도 거의 없었으나 러셀이 두꺼운 스웨터를 흥행시키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운동선수들이 스웨터를 애용했고 축구선수나 야구선수는 물론, 운동선수들도 스웨터를 많이 입게 되었고 챔피온이라는 브랜드가 스웨터를 더욱 개발 및 흥행시키면서 일반인들도 스웨터를 입게 되었다. 대탈주 영화의 흥행으로 스웨터를 찾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게 되고 패션 디자이너들까지 스웨터를 많이 입으면서 스웨터는 평상복이 되었다.
- 과잠바: 예전에는 대학교에서도 교복을 많이 입었으나 대학교 교복이 없어진 이후 1980년대부터 과티를 입기 시작했다. 다만 이 때는 주로 일부 대학생들만 과티를 입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고려대에서 과잠바 문화가 시작된 이후, 서울대로 확산되고 타 대학으로 두루 확산되면서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과잠바 문화가 많이 보편화되었다.
- 잠옷: 예전에 잠옷은 주로 높으신 분들이나 부유층들이 많이 입었고 이후에도 일부 중산층들까지만 잠옷을 많이 입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일반인들도 잠옷을 많이 입는다. 또한 예전의 잠옷들이 그냥 잠 잘 때만 입었던 것과 다르게 요즘은 잠옷 입고 파자마파티도 하는 경우도 있고 아침식사, 저녁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고 일상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고 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일부 잠옷을 제외하면 잠옷에 그림이나 컬러, 글씨가 많이 없었지만 요즘 들어서서는 잠옷에도 그림이나 컬러, 글씨가 새겨진 잠옷들이 많다.
- 내복: 예전에는 빨간 내복이 주류였지만 요즘은 그림이나 컬러, 글씨를 삽입한 내복이 주류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내복도 거의 공개가 터부시 되었지만 요즘은 내복도 공개가 많이 되고 있으며 내복 역시 예전에는 잠 잘 때만 입는 경우가 많았던 것과 다르게 요즘에는 내복 입고 놀이를 즐기거나 파티를 하거나 일상생활을 하거나 아침식사, 저녁식사를 하는 경우가 꽤 있다.
- 민소매러닝: 예전에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흰색 민소매러닝을 입었지만 요즘 들어서서는 예전과 다르게 어린이, 청소년이나 젊은층은 그림, 글씨가 있거나 컬러가 새겨진 민소매러닝을 입는 경우로 많이 바뀌었고 흰색 민소매런닝은 이제 중장년층이나 노년층이 많이 입는다. 물론 젊은층에서도 여전히 흰색 민소매러닝을 입는 경우도 있다.
- 브래지어: 예전에는 브래지어도 그림, 글씨나 컬러가 거의 없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브래지어도 그림, 글씨나 컬러를 삽입한 브래지어가 많아졌다. 그리고 예전에는 브래지어가 노출되는 것을 꺼렸으나 요즘은 시스루 룩이나 얇은 셔츠로 브래지어 일부가 노출되는 경우가 꽤 있다.
3.1.14. 음식
- 고기, 수산물, 닭고기의 대중화: 예전에는 고기, 수산물, 닭고기는 권력층이나 부유층만 먹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사냥꾼이나 농장, 바다 근처에 사는 경우는 고기, 해산물, 닭고기를 먹는 경우가 약간정도 있었고 나라의 전성기 때는 일반 백성들도 고기, 수산물, 닭고기를 어느정도 먹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침체기나 암흑기나 혼란기 때가 오면 다시 역전되어서 일반 백성들은 고기, 수산물, 닭고기를 못 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산업혁명 등을 거치면서 고기, 수산물, 닭고기를 먹는 계층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경제발달, 음식 산업의 발달 등으로 웬만한 선진국에서는 지금은 고기, 수산물, 닭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다만 후진국이나 빈곤국에서는 여전히 고기, 수산물, 닭고기가 사치품인 경우가 여전히 많다. 한국의 경우는 예전 가난했던 시절에는 고기, 수산물, 닭고기는 권력층, 부유층 전용이었으나 산업화를 거치면서 고기, 수산물, 닭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더니 대한민국이 번영을 누리면서 고기, 수산물, 닭고기가 대중화 수순을 밟게 된다. 한 때 IMF가 터지면서 고기, 수산물, 닭고기를 먹는 계층들이 점점 줄어드는 듯 보였지만 IMF 극복 이후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고기, 수산물, 닭고기는 완전히 대중화가 되었다.
- 대한민국, 일본의 육식: 본래 대한민국은 삼국시대 당시에는 육식이 번창했었으나 백제 29대 국왕인 법왕이 수렵 도구를 폐지하면서까지 육식 금지령을 내리면서 육식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하더니 고려시대 때는 육식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 풍조가 생겼다. 그러나 고려 후기 원간섭기에 들어서면서 육식이 다시 번창하기 시작했고 조선시대를 거쳐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본래 국민 전체가 육식을 금했었으나 에도 막부 시절부터 육식 금지령이 유명무실 해지면서 육식이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하더니 메이지 유신 이후 구미권과 교류를 하면서 육식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메이지 덴노가 육식을 먹으면서 육식이 번창하게 된다.
3.1.15. 편의시설
- 동네목욕탕(대중목욕탕)과 대형목욕탕, 불가마사우나, 워터파크+사우나: 본래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1960년대까지는 대중목욕탕이 상당히 많았었고 동네목욕탕(대중목욕탕)이 큰 인기를 누렸었다. 하지만 1970년대~19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하고 대형호텔에 목욕탕이 들어오고 스파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대형목욕탕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래도 1970년대~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목욕탕(대중목욕탕)이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찜질방을 겸한 불가마사우나가 등장하고 워터파크를 겸한 사우나도 등장함은 물론, 대형목욕탕들도 점점 늘어나면서 동네목욕탕(대중목욕탕)은 점점 인기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1990년대까지는 동네목욕탕(대중목욕탕)이 여전히 인기를 누렸으나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들어서면서 동네목욕탕(대중목욕탕)이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하고 불가마사우나, 대형목욕탕, 워터파크를 겸한 사우나가 계속 늘어난다. 2010년대에도 이 같은 현상은 계속되었고 동네목욕탕(대중목욕탕)은 계속 폐업을 하는 경우도 속출했으며 불가마사우나, 대형목욕탕, 워터파크를 겸한 사우나는 더욱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2020년대 들어서면서 동네목욕탕(대중목욕탕)은 폐업하는 경우가 더욱 늘어났지만 불가마사우나, 대형목욕탕, 워터파크를 겸한 사우나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3.1.16. 건물
- 세운상가: 1968년에 세운상가가 완공되었는데 준공 이후에 세운상가는 아파트도 흔치 않던 당시에는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주상복합단지였고 준공 이후에는 국회의원회관도 들어서고 각종 유명인사와 부유층, 권력층도 거주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상가 또한 온갖 물건들이 판매될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다. 1970년대만 해도 최고의 주상복합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1970년대 후반 강남 개발이 시작되고 여의도에도 속속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주거지로서의 인기는 강남, 여의도에게 내주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인기를 잃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상가로서는 여전히 큰 인기를 누렸고 세운상가는 여전히 온갖 물건들이 모여있는 상권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백화점을 비롯한 고급 유통업체와 아파트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세운상가는 점점 인기를 잃어가더니 1980년대 후반에 용산 전자상가가 들어서면서 세운상가는 상권에서의 인기도 용산 전자상가에게 내주면서 계속 인기를 잃더니 1990년대에는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대형마트들에게도 인기를 내어주고 더더욱 인기를 잃더니 결국 슬럼화가 되었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서서는 철거논의까지 나왔을 정도다. 200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르네상스 서울 계획에 따라서 철거논의가 본격화 되어서 현대상가가 철거되었고 한 때는 세운상가가 없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후 금융위기 등으로 철거가 지연되더니 2012년 12월 이후 철거가 백지화되었다. 이후 공중보행교 설치 및 세운상가 리모델링으로 세운상가는 그럭저럭 유지하는 듯 보였지만 공중보행교 설치가 2단계에서부터 지연되면서 삐그덕 거리더니 오세훈 서울시장이 돌아오면서 세운상가 철거 계획 및 녹지공원 계획 및 오피스 개발계획이 재수립되기 시작한다. 다만 그 계획이 실행되기까지는 10~20년 이상의 기간이 걸린다는 의견이 많아서 일단은 아직 세운상가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3.2. 가상
- 역전재판 시리즈: 에피소드 제목에도 늘 '역전'이 들어가며 작중 인물도 '역전'이라는 말이 입에 거의 붙어있다.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건을 역전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발상을 '역전' 시켜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이 게임의 주제.
- 유희왕 시리즈 - 때때로 주인공이 질 때가 있다.
- 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 - 카스가 군이 소수정예로 야습을 나서다 패배 위기까지 갔으나, 노하라 가족의 난입으로 형세가 단번에 역전된다. 리메이크 실사영화인 < 발라드 이름없는 사랑 노래>도 해당.
4. 여담
- 대전 격투 게임인 철권 5 ~7 FR[14]에서는 체력이 거의 바닥난 소위 말하는 딸피[15] 상태에서 상대를 K.O 시킨 경우 Great이 뜬다.[16] 반대로 1대도 안 맞고 이기면 Perfect.
-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에선 특이하게 역전했을 때 '히오스 했다'라고 표현한다. 후반부 게임에서 한타를 이기고 우두머리를 차지하면 쉽게 역전이 나오는 게임 특성이 한몫했다. 한때 사이퍼즈도 39분을 내리 잘해놓고 적군 팀의 대박궁에 휘말려 1분 만에 본진까지 싸악 밀려버리는 일이 흔해서 역전퍼즈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지만 거듭된 패치로 역전이 잘 일어나지 않게 되어 이 별명은 사라졌다.
- 전화위복도 약간 비슷한 말이다. 다만 전화위복은 이미 터진 안 좋은 일이 나중에 보니까 좋게도 영향을 준다는 뜻이고 판세를 뒤집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5. 기타 동음이의어
5.1. 驛前
"역 역( 驛)" 자에 "앞 전( 前)" 자. 말 그대로 "역 앞"이다. '역전 앞'은 겹말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역 앞에 항상 "역전 XX"라는 소매 가게(슈퍼마켓)나 식당, 우체국, 카페, 주유소, 세탁소,
일본어로는 [ruby(駅, ruby=えき)][ruby(前, ruby=まえ)](에키마에)라고 한다. 그대로 번역하면 "역 앞". 한자도 똑같다. 駅는 驛의 신자체다.
북한에 역전동(驛前 洞)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의미가 여기서 따왔다. 기차역이 있는 동네에 붙으며 대부분 시에 있다. 참고로 남한에도 충주시에 역전동이 있었으나, 충북선 이설로 충주역이 이전하면서 문화동으로 바뀌었다.
5.2. 歷戰
"지날 력( 歷)" 자에 "싸움 전( 戰)" 자. 많은 전쟁을 겪었다는 뜻. "역전의 용사"는 많은 전쟁을 겪은 용사라는 뜻이다.
[1]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2]
야당 후보가 당선된 와카야마 1구도 1위와의 득표율차가 5%차였다.
[3]
이건 대중의 인식 기준이고, 정치인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일반 국민들보다는 대북온건론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자기들 밥그릇은 보전해야 되니까
[4]
하지만 1인당 GDP는 중화민국이 앞선다
[5]
오죽하면
정부서울청사 본청이 현대그룹 본사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고 정부서울청사마저 현대건설에서 손수 만들어줬다. 그만큼 현대그룹이 상당히 잘 나갔다는 뜻이다.
[6]
다만 오히려
현대자동차그룹과
HD현대 이렇게 대기업 2개가 더 늘어나버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7]
단, 20대 남자라고 해도 본인이
금수저이거나 명문대를 졸업하고 장교로 제대하자마자 즉시
공무원,
대기업,
전문직 등 최상위권 직장에 동년배 남자들보다 훨씬 일찍 취업했더라면 당연히 여자들보다 항상 앞서나간다. 물론,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아서 그렇지.
[8]
다만 고려는 왕족과 귀족은 매장을 했다.
[9]
사실 막판 스퍼트는 이봉주의 최대 약점이었다. 1996 동아국제마라톤과 같은 해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막판에 역전당해 1~3초 차로 우승을 놓친 원인이기도 하다.
[10]
과장이 아니다. 원래 코바치치는 잘 풀리는 날에는 해트트릭도 하고 그러던 선수였으나 레알마드리드에 간 이후 골 감각이 떨어져 2019년 100경기째 무득점을 기록하고 있다.
[11]
상대팀 SK 와이번스와의 상대전적에서 우세.
[12]
이탈리아의 펜싱 선수.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남자 김지연, 이탈리아의 김지연, 도쿄판 김지연이다. 그 희생양은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의
김정환.
[13]
승승무로 토너먼트 진출, 8강에서 1-0, 4강에서 2점차 승리, 결승에서 2골 넣고 2-3로 역전패로 준우승.
[14]
6 BR 포함
[15]
정확히는 체력이 약 5% 미만으로 남은 상태.
[16]
철권 2 ~ 철권 3 에서는 딸피 상태에서 K.O를 하면 음성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