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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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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공산주의의 약화3. 발단: 고르바초프의 취임과 개혁· 개방
3.1. 개혁 실패 동구권의 붕괴3.2. 소련에 미친 영향
4. 절정: 소련의 해체5. 여담6. 출처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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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어: Гласность(개방, 직역하면 공표 혹은 발표)·Перестройка(재건 혹은 재편성이라는 뜻)
영어: Glasnost·Perestroika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펼쳐진 일련의 개혁· 개방정책으로, 결국 본인의 실각과 소련 붕괴, 냉전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2. 배경: 공산주의의 약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혹은 그 외의 어떠한 형태이든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내재된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이 명백해졌으며 점차 가속화되는 몰락의 중심에는 공산권의 핵심인 소련이 있었다.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시기에 형성된 관료제 사회의 내재적인 계급모순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이러한 중앙집권 관료제 속에서 소련은 빠르게 공업화를 이뤄내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생산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자 기존의 중앙집권 관료제는 오히려 생산력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고 비효율과 낭비를 낳게 되었다. 그럼에도 서방 국가들은 "비효율적이고 무자비한 공산주의가 그럭저럭 돌아가는 원동력은 청백리같은 고위 간부들 때문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이상론은 소위 '공산귀족', 즉 노멘클라투라 계급의 부상으로 철저히 논파되었다.

물론 당시의 관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지만 서방 68운동의 여파로 헝가리[1], 체코슬로바키아[2], 폴란드[3] 등에서 벌어진 일련의 개혁 시도들은 동구권의 영향력 감소를 두려워한 소련의 강경노선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후에는 사실상 의미 있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다. 더하여 이러한 강경노선은 동유럽의 공산정부가 가졌던 최소한의 지지와 정통성마저 상실하는 연쇄작용을 불러왔다.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소련만이 공산정권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정작 소련의 경제 상황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식 공산주의 계획경제 제3세계에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이 단기간에 가난한 농업국에서 세계 2위의 공업국[4]으로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5] 그러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하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련은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이 1%에서 2%를 웃돌고 있었다. 이 시기 소련은 수출품의 38%가 천연가스, 나머지는 중공업, 화학 제품이었다.[6] 겉으로 봤을 때는 화려해보이던 소련은 중공업 올인으로 크게 부실해진 경공업, 그리고 이에 따른 국민들의 생활 수준 저하라는 그림자가 있었다. 소련은 영토가 아주 넓었기에 기간에 맞춰 생필품과 식료품을 모든 지역의 국민들에게 공급하기가 어려웠고, 극동이나 중앙아시아 등 유럽에서 멀어지면 양 또한 부족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 곡물과 천연자원을 수출하면서 미국에서 식량을 사들여야했던 큰 약점까지 생겨버렸다.

막대한 군비경쟁도 문제였다. OPEC 석유 가격담합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일시적으로 호황을 누린 소련[7]은 마침내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영에 대항하여 석유 생산을 급속히 늘리는 바람에 석유값이 급속하게 떨어지자 경기기 다시 후퇴하였다. 게다가 소련은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을 강요당했던 반면 미국은 서서히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중앙계획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소련 및 일부 위성국들에서는 1980년대 초에 일시적으로 경기 회복현상이 나타나기는 했으나[8] 근본적인 개혁이 실패한 이상 이러한 호조가 지속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9] 개혁에 실패한 관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고는 계속되는 경제침체와 역사적 민족감정이 맞물려 점증하는 자국 인민들의 불만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억제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3. 발단: 고르바초프의 취임과 개혁· 개방

1985년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마침내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 고르바초프의 급진적인 개혁은 소련의 사회 전반에 폭풍우를 몰고 오게 되고 이는 1991년 결국 소련의 역사적인 해체와 본인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가 청년기를 보낸 흐루쇼프의 집권기는 강력한 통제와 억압으로 점철된 소련의 역사 속에서 잠시나마 해빙의 분위기가 사회를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경험에 더해 소련의 경직된 관료 사회를 몸소 겪었던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기 전에 이미 소련의 공산주의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모델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일찌감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Perestroika)
    정치·경제적 개조를 의미한다. 부패한 관료제 타파, 공산주의 경제의 체제적 한계점을 개선하고 점진적인 시장자유화를 추구하는 등의 정책을 포함한다. 흔히 '개혁' 으로 번역된다.
대외적으로는 모스크바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공식적인 간섭권을 명기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는 한편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정책지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0] 이어 경제 규모가 소련의 2배에 달하는 미국과의 군비경쟁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각종 군사용 무기 감축을 시도했다.

3.1. 개혁 실패 동구권의 붕괴

냉전의 한 축을 이루는 소련 최상층부에서 쏟아져나온 혁신적인 정책들은 이념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엄청난 평지풍파를 몰고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유진영 제2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막연히 개혁·개방이 공산권을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게 하리라고 기대했을 뿐 그 최종적인 결론, 즉 냉전의 종결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한계는 바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단기간에 페레스트로이카, 즉 체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필요했으며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 즉 정보의 자유화가 여기에 필요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리라고 기대했지만 자신들의 부패를 숨기고자 하는 관료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체제의 경직성이 맞물리면서 글라스노스트는 오히려 중앙권력의 추진력을 갈수록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 큰 문제는 열린 사고를 가진 개혁가들에게조차 '글라스노스트'가 '페레스트로이카'보다 훨씬 더 명확한 강령이었다는 점이다. 정보의 자유화나 민주 질서의 수립은 기본적으로 '통제'와 '허용'의 문제였지만 오래 전부터 수렁에 빠져 있던 정치·경제적 지표들을 재건하는 일은 나아가야 할 방향조차도 뚜렷하지 않았다. 석유값이 석유 파동 시기의 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 소련의 주요 재정적 기반인 석유 수입이 늘어날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미국 영국 등지에서 온 경제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시장개방을 주장하였지만 이미 내적 균형이 붕괴된 경제가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자본주의 바다 속에 떠밀려갈 경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탈냉전 소련 붕괴 이후 그 결과로 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보리스 옐친 정부 하에서 극심한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확대, 복지체계 붕괴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몇 개 공화국 독립에 대한 열망과 수십년간 공산당의 강력한 탄압에 억눌려 있던 연방의 페레스트로이카(정치·경제적 개혁)가 뒷받침되지 못한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그야말로 통제 불능의 사회적 혼돈으로 이어졌다. 동유럽의 지도자들은 곧 정권의 힘만으로는 끝없이 불어나는 대중을 통제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련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일찌감치 폐기함으로서 이미 위성국의 공산당에 대한 보호를 사실상 철회한 상태였다.하긴 제 코가 석자인데 결국 1989년에서 1991년 사이 동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격변기를 거쳐 자본주의 정부로 권력을 넘겨주게 되었다.[11]

3.2. 소련에 미친 영향

소련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있던 사회주의 공화국들에서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던 일부 개혁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성대한 환영을 받았던 반면 예상외로 대다수의 소련인들에게는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자신의 경험도 그의 행보에 영향을 주었다. 혁명 영웅이던 레닌 스탈린, 무학(無學) 광부로 시작해 서기장의 자리에 올라 출세한 흐루쇼프, 공산당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제철소 기사였던 브레즈네프와는 달리 고르바초프는 농민 가정 출신이기는 해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 계층의 인물이었다.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기존의 서기장들과는 달리 서민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급진적 개혁안만을 내놓는 원인이 되었다.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급격한 체제 변화에 대한 혼란이었다. 전간기에 짧은 시기로나마 비공산주의 국가였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다른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12] 대다수의 소련인들[13] 1918년 적백내전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세워지고, 끝내 붉은 군대가 내전에서 승리해 소련으로 이어지는 기억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 말기에는 초고령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났던 사람들이었고 고르바초프 서기장 자신도 제국 시대에 태어났던 이전 지도자들과 다르게 소련인으로 태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서기장이었다. 즉 태어난 국가의 환경과 학교 및 콤소몰 등에서 받은 교육 등등 전반적인 정체성적인 면으로 봤을 때, 동부와 서부 지역의 차이는 물론 존재했으나 혁명 이후 태어난 세대는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카자흐인, 고려인 등의 민족 정체성 보다는, 혹은 카자크처럼 그러한 독보적인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더 상위의 개념인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살고 있기 때문에 소련인으로써의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14]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던 1985년을 기준으로 40세 이상의 모든 폴란드인들이 비(非) 공산주의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데다 공산체제 하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서( 1956년, 1970년) 정권을 뒤엎은 경험까지 가졌던 반면 68세 이하의 모든 본토 출신 소련인들은 공산주의 외의 사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당대 소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혁명이란 러시아 제국 차르 소련 서기장으로 바뀐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때문에 대다수 소련인들이 정권과 정책을 평가하는 기준은 서구권 사회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삶의 질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이들은 유가 폭등으로 막대한 흑자를 벌어들인 70년대 말을 즈음하여 국민적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던 기억을 잊지 못했고 당시의 실질적인 국가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었으며 설령 알 수 있더라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의 일반 대중에게 지지받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혁신적인 삶의 질 향상이 뒤따라야 했으나 이미 석유값이 고점에 비해 절반에 못 미치던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4. 절정: 소련의 해체

자본주의화는 이미 경쟁력 없는 소련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는데 고르바초프는 생필품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국영기업들의 경영을 자율화시켰지만 막상 국영기업들은 경영자율화를 기회삼아 생산되는 상품의 생산량을 늘리기보다는 몇 배의 가격으로 시장 비싸게 팔아치우기 시작하면서 국영상점에 납품되는 물건 수가 줄어드는 바람에 소비자들은 더 긴 줄을 서야 했고 결국 소련 당국에서 돈을 더 찍어내야 했기 때문에 물가가 오르는 결과를 낳았다. 고르바초프 시절의 임금 상승률은 총 50%를 기록하면서 구매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막상 이 구매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상품생산량으로 인해 암시장의 팽창과 물자 부족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서구 소비재들의 수입이 늘어났지만 이는 무역 역조 현상을 심화시켰다. 마침 허용된 언론 표현의 자유는 그동안 억눌렸던 대중적인 분노에만 불을 붙였다. 국제적으로도 소련의 영향력은 동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고 마침내 1990년 동독 서독 흡수 통일되기까지 이른다. 또한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라는 500일 내에 국유자산 민영화, 교육, 복지까지 민영화하는 등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결론적으로 아비규환이 발생하는 상황이 되었다.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지면서 각지에서 폭동 민란이 일어났고 지방 행정단체의 수장들은 권력을 이용해 무너져가는 경제 속에서 식량 무기를 비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결과론적으로 볼 때 고르바초프는 급증하는 혼돈 속에서 그 자신이 닻을 올렸던 "민주적 공산주의"를 성공적으로 완주시키기에는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1991년 초까지도 이미 탈퇴를 승인받고 떠난 발트 3국 몰도바,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제외한 9개 공화국은 연방 해체에 반대했는데 이들은 각 공화국들이 동등한 주권을 인정받는 연합체로서 소련의 존속에 찬성했다.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고르바초프는 76%의 지지를 얻어 소련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복고적 쿠데타가 조금씩 안정화되어 가던 소련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가했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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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에 방영된 꼬마펭귄 핑구의 한 에피소드에 이를 풍자한 표지판이 나온다.[15]( 4:49 부터)
데데테, "뱀 페트로프"(Змеи Петров, 1991) 알리사(АлисА), "새로운 방식"(Новый метод, 1989)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담긴 노래들. 당시 러시아 민중이 페레스토로이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볼 수 있다.[16][17]

취지는 좋았지만 결국 개혁개방 정책 실시 당시에도 실제 효과는 미비했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제멋대로 왜곡해서 갖다붙이던 소련의 현실을 비꼰 유머가 나돌았다. 공산주의 유머/소련/정치와 행정 항목에도 서술된 내용이다.
1980년대 말 소련의 한 식당에서.

문) "왜 미트볼 정육면체 모양이죠?"
답)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개조)!"

문) "게다가 덜 익었잖아요!"
답) "우스코레니예(ускоре́ние, 가속)!"

문) "심지어 한 입씩 누가 베어먹기까지 했네!"
답) "고스프리욤카(Госприёмка, 품질 검사)!"

문) "뭘 잘했다고 묻는 말마다 그렇게 뻔뻔스럽게 되받아치는 거죠?"
답)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언론의 자유)!"

당시 혜화 대학로에 글라스노스트라는 이름의 호프집이 생길 정도로 대학생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Grand Theft Auto IV 에서 블라드를 죽인 다음 로만 벨릭 이 전화 하거나 전화를 걸 때 자신이 스트리트의 페레스트로이카[18] 근처에 있다고 했다.

6. 출처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에릭 홉스봄 저, 이용우 역, 까치출판사

나머지 주요 자료들은 본문 중에 각주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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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1956년에 일어난 일이라 68혁명과는 거리가 있다. 이때의 너지 임레 니키타 흐루쇼프와 정치적 성향이 비슷했지만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한 폴란드와는 달리 아예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탈퇴하고 중립화 선언을 검토하는 등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네 흐루쇼프가 위신 실추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에 군대를 내보내서 정권을 뒤엎었다. [2] 프라하의 봄 문서 참조 [3] 폴란드/역사, 레흐 바웬사 문서 참조. 단, 폴란드는 1950년대 중반에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타 공산권 국가에 비하면) 온건파가 집권했기는 했다. 경제가 침체일로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문제지. [4] 1위는 미국. [5] 이오시프 스탈린 항목 참조 [6] "80년대 소련 수출 비중 정보". 2018년 10월 24일 확인 [7] 쉽게 간과할 수 있겠지만 소련- 러시아 세계 최대의 천연자원 생산국이다. [8] 1981년에서 1984년간 외채가 약 35~70%가량 하락 [9] <Kollo>, p.41 [10] 이는 고르바초프가 1987년 11월 4일 러시아 혁명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각국 사회주의 국가 사절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밝힌 것으로 자신과 다른 견해의 수용을 거부하는 오만과 폐쇄성은 생산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오히려 사회주의 운동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한국 보도 내용 [11] 그런데 선거가 허용되자마자 옛 공산당의 후신 정당이 다시 여당으로 당선된 케이스도 있다.그런데 사실 원래도 일단은 인민민주주의긴 했으니 뭐… [12] 한때 공산권에 속해 있었던 중유럽과 동유럽 국가들 중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군에게 두들겨 맞아 점령당하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정치 권력 체제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중 밀고 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원치 않게 공산주의 체제 및 정부 수립을 강요당했으며, 몇십년간 소련의 내정간섭과 압력을 받게 된다. 동유럽의 최대 피해자인 셈... [13] 독소 불가침조약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로 확장된 일부 영토는 제외. [14] 소련을 그리워하는 현 구 소련 국가들의 중장년층들의 인터뷰를 보면 세대에 따라서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러시아 인구조사에서도 그렇고, 푸틴 치하 러시아가 개입한 여러 전쟁에 참여한 구 소련 국가 출신 의용병들도 자신들을 여전히 소련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5] 핑구와 여자친구인 핑기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이 표지판 앞에서 헤어지며 씁쓸해지는 장면이다. [16] 물론 저 밴드들은 언더그라운드에 가까운 밴드들이었다. 원칙적으로 소련 시절 음악으로 밥먹고 살려면 보컬-기악 앙상블(ВИА)이라는 이름의 관영 밴드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수많은 페레스트로이카 찬양곡을 양산해냈다. 아이러니한 건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은 소련에서 탄압의 대상이었으나 이런 탄압을 유하게 풀어준 것이 고르바초프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언더 음악가들은 언론과 당국의 다굴, 강제 수색 및 압수, 강제 해체, 심지어는 정신병원 강제입원에 입대(!)까지 별의별 탄압에 시달렸다. 예시로 언급된 데데테의 리더 유리 셰프추크도 언론을 동원한 KGB의 집중포화와 압수수색에 못 버티고 고향인 우파에서 레닌그라드로 도망치는 등 탄압의 희생자 중 하나였다. [17] 알리사와 데데테는 1980년대 결성되어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지만 재미있게도 두 밴드의 성향은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2023년 기준으로 알리사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성전"이라 부르는 등 옹호하고 있고 데데테는 리더가 우크라이나 침략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가 사법 당국에 고발당하고 모든 공연이 취소되는 등 불이익을 겪고 있다. [18] 미카일 파우스틴이 운영하는 카바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