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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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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건국대학교 항쟁 / 서울
1987년 6월 항쟁 / 전국
6.29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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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六月 抗爭 | June (Democratic) Struggle
파일:/image/pressian/2008/10/17/60081016175711.jpg
아! 나의 조국[1]
파일:AE26558B-F4E5-4991-8566-CBF5226463BE.jpg
서울시청 앞을 가득 메운 시위대[2]
기간
1987년 6월 10일([age(1987-06-10)]주년)[3] ~ 7월 9일
장소
[[틀:깃발|]][[틀:깃발|]][[대한민국|]] 전역
원인
전두환 정부의 폭압적 독재
4.13 호헌조치 발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4]
목적 호헌철폐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참여 인원 400만~500만 명 추산[출처]
시위 당사자 대한민국 국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요 인물 대통령 전두환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노태우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김대중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
결과
6.29 선언 발표,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개헌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
기념 홈페이지

1. 개요2. 진행
2.1. 5월 이전2.2. 항쟁의 서막
2.2.1.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2.2.2.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2.3. 6월 10일, 본격적인 항쟁의 시작2.4. 명동성당 항쟁2.5. 항쟁의 진행2.6. 미국의 경고, 군부의 반대2.7. 전두환 정권 무조건 항복2.8. 양김의 분열과 전두환 정부의 잔재
2.8.1. 관련 문서
2.9.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의 재조명
3. 평가와 의의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참고/관련 자료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護憲撤廢! 獨裁打倒! 民主爭取!)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1987년 6월, 전두환 정부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 운동을 지칭하는 단어로, 6월 민주 항쟁, 6월 민주화 운동, 6.10 항쟁[6]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현재는 주로 ‘6월 항쟁’이라고 불린다.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남은 임기가 1년도 안되어 임기 중의 개헌이 불가능하니, 현행 5공화국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특별 담화로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는 가뜩이나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열망하던 사람들의 반발을 끌어냈다. 대다수 국민은 직선제로의 복구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선언을 계기로 제도권 야당과 재야 민주화 세력들은 연합전선을 구축하였고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기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두환 정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서구 수준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다.[7]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지금까지도 "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또한 다른 민주 혁명과는 다르게 비교적 평화적인 시위로 군사독재 정권을 쫓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이 평가받는 시민 항쟁이기도 하다. 시민 항쟁이 일어나면 대개 공권력의 폭력 남용에 의한 내란, 쿠데타, 폭동 등의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6월 항쟁은 경찰과 시위대가 격렬히 충돌하긴 했지만 전반적인 치안은 양호했으며 사상자도 다른 민주화 운동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등 평화시위의 조짐이 짙게 보였다. 당시 취재를 나선 외신 기자들도 이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세계 민주주의 역사의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6월 항쟁은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시민들의 힘(People's Power)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이른바 '제3의 민주화 물결'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8][9]

2. 진행

2.1. 5월 이전

1986년 인천 5.3 민주항쟁 10.28 건대항쟁의 실패 이후 제5공화국 정권의 엄격한 탄압으로 전국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반전의 계기를 가져온 건 1987년 1월 14일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명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이었다. 당시 경찰은 운동권 선배 박종운[10]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했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그에게 물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요구했으나 물고문을 못 이긴 박종철이 죽었다. 이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발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11]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고 책상을 내리쳤더니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망언이다.[12][13]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는 곧 있을 1988 서울 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말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고,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되었다.

이때는 1980년에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던 신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5년 만인 1985년에 다시 대거 사면되고 이들이 다시 신한민주당을 구성해 총선에서 제1 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 人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민정당과 신민당 두 당이 제시한 개헌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매우 달랐다.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 내각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은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했다. 어째 여야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야권의 기세가 올라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가 벌어질 경우 대통령 중심제에 의해 가해질 충격이 더욱 크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비교적 약한 의원 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호응하는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신민당은 대분열, 결국 김영삼, 김대중 세력이 일거에 탈당하여 새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약속해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원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총재로 후계자 노태우 바지사장으로 세워서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

2.2. 항쟁의 서막

6·10항쟁 30돌을 맞아 당시 숨은 주역이었던 이부영 전 의원과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대담했다.

급히 적네,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네…6월 부른 ‘감옥 편지’

2.2.1.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


2017년 6월 8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 그때의 상황을 증언하는 이부영, 한재동

그런 와중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마티아 신부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5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상승했다.

이 발표된 과정이 매우 극적이었다.[14] 당시 고문치사 사건 주범들은 사건 축소, 은폐로 자신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에 대해 억울해하며 감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것을 우연히 근처 방에 수감 중이던 재야민주화운동가 이부영이 듣게 되어 교도관에게 문의했더니 " 박종철 사건이 은폐조작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흘러나온 것.[15] 이부영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관련 내용을 휴지에 써서 다른 교도관을 통해서 외부에 내보냈고, 이를 받은 김정남 전 수석이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발표하게 된 것이다.[16][17]

이렇게 사건이 축소 조작되었음이 새롭게 밝혀지자 경찰과 정부의 도덕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여론은 폭발했고, 야당과 재야운동권은 고문 살인 은폐 조작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18]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또한 각 대학에서도 시위의 열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5월 말, 학생들이 뭉쳐 종로로 나왔다. 이날 시위에는 이전과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종로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드러누워 집회를 하다 경찰이 체포하려 하자 시민들이 항의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19] 6월 초, 국본은 서울시내에 약 20만 장의 전단을 뿌려 집회 사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2.2.2.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그리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천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학생들은 '전두환-노태우 화형식'을 끝낸 후 교문 앞으로 진출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들은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본래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20] 연세대생 이한열의 후두부에 직격한 것이다.

이한열은 쓰러졌고,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세브란스병원으로 호송됐다.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종창과 이한열은 이 집회 이전까지는 서로 전혀 몰랐던 사이였다고 한다.[21]

중앙일보는 적당한 사진을 찾지 못해 사진을 찍은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기자에게 연락을 했는데[22], 정태원 기자는 출근을 하지 않아 정태원 기자의 서랍에 있는 사진들을 가져가라 라고 해서 문제의 사진을 가져갔고, 조선일보에 난 사진 말고 이 사진을 편집국에 가져갔다. 그 후 편집국 일부에선 데모를 유발할 위험성이 큰 사진이라며 말렸으나, 이창성 사진부장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해 암묵적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준비를 각오하고 사진을 키워 신문에 게재했다는 일화가 있다.[23] 하지만 사진부장에게는 다행히도, 이때의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정작 보안사령부조차 그를 끌고 가 고문을 할 틈이 없었다. 언론사 간부를 불러 갈굴 생각을 하는 것보다 시위대가 계속 불어나 막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6월 10일자에 학우들에게 들려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사진이 올라왔고,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버스에서 정태원 기자의 사진을 본 최병수 작가는 바로 그날 밤 연세대 총학생회로 달려가 판화 제작의사를 밝힌 뒤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문구를 담은 목판화를 제작하였고[24], 이는 보도 다음날 스카프와 손수건 등으로 만들어져 시위 참여자들에게 배포되었다.[25] 연세대 학생회관에는 목판화를 확대한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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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0394430601_20110610.jpg

이 사진은 전두환 정권의 호헌조치의 종지부를 찍는 촉매제로 작용했으며, 훗날 AP통신 선정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됐다.[26]

파일:o-LEE-900.jpg

한편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우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학교 전체가 뒤집혔다. 예비역 출신부터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다.[27] 그때는 이런 식의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인해 사망한 자들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 강제로 부검한 뒤 사망원인을 조작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28] 이런 관행은 민주화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1991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시신 탈취 사건과 2016년의 백남기 농민 시신 부검 논란도, 적어도 유족들과 민중총궐기 당사자들에게는 이러한 의도로 비춰지고 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외에도 이석규, 이태춘도 경찰의 최루탄에 의해 사망한 사실이 있었다.

1960년 4.19 혁명 때도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김주열, 이한열 모두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범국민적 시위로 확산되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2.3. 6월 10일, 본격적인 항쟁의 시작

6·10 대회 결의문(1987.6.10.)

첫째, 이 땅에서 권력에 의한 고문, 테러, 불법 연행, 불법 연금 등 여하한 인권 유린도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국민적 요구이다.

셋째, 정치 군부 세력의 몇몇 핵심자들끼리 독재 권력을 무슨 사유물인 것처럼 주고받으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이른바 4.13 호헌 성명이 무효임을 선언하며, …… 범국민적 운동을 더 한층 가열할 것임을 결의한다.
-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
6월 10일에는 "국민운동본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시위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 시위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30대~40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 속칭 "넥타이부대"가 대거 참여하였다. 다수의 시민이 참여한 것은 박종철, 이한열의 사망과 같은 인권유린 사건이 그들의 정치의식을 크게 자극하였기 때문이다.[29] 이에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12시에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수일 전부터 봉쇄했으며, 당일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경적을 울리는 모든 차량운전자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아넣겠다"고 뉴스를 통해 으름장을 놓았으며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또한 수도권 전철은 시내 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 수업,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가 나왔다. 또 봉쇄된 곳도 미리 또는 담을 넘어 어찌어찌 진입한 사람들에 의해 12시에 사전 집회를 개최했으나, 경찰의 원천 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도 확산되진 못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일담에 보면 이러한 조치 때문에 도리어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봉쇄되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당일 12시 명동으로 모이라는 전언이 있었고, 12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명동제일백화점 (현재 명동 영플라자, 솔라리아니시테츠호텔) 앞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1987년 신동아 7월호 참고) 1000여 명 이상이 운집한 집회를 해산시키려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지만 시민들은 주동자를 보호하며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고, 늦은 시간까지 집회를 계속하였다. 제일백화점 앞으로 복귀하지 못한 시민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유사한 성격의 작은 집회를 만들어 냈다. 명동 성당에서 롯데백화점 본점 일대에는 시위집회 참여 인원이 점점 늘어났다. 여기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조치가 한몫했다. 직장인 입장에서는 회사는 조기 퇴근으로 일찍 끝났는데, 지하철 무정차로 집은 못 가고, 서머타임으로 인해 날은 밝으니 자연스레 시위대에 합세할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이 점은 중 고등학생들도 마찬가지라서 조퇴는 했는데, 집에 가기는 아쉬웠던 중 고등학생들도 젊은 혈기에 대거 시위에 가담하였기도 했다.[30] 이 당시에는 그 시대 상을 그린 만화 <100℃>에서는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이거 시위에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겠지?"하고 집회를 막으려고 애쓰는 정부의 멍청한 대응을 비웃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6월 10일 저녁 6시,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일어난다. 국본의 방침대로 저녁 6시에 서울주교좌성당 저녁 만도 종소리를 필두로 하여 차량 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시위가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당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을 MBC 뉴스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땡전뉴스였던 당시 사정상 제1헤드라인이 민정당 전당대회 소식이고 이를 10분 넘게 보도하고 있다. 시위 소식은 3~4 꼭지 뒤에 "서울 시내 몇몇 곳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큰 충돌 없이 끝났습니다." 라고 언급한다. KBS 9시 뉴스 역시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 시기는 제16회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한창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경상남도 마산시에 있는 마산종합운동장에서 이날 오후에 태국 헝가리 축구대표팀 간의 경기를 한 뒤, 이어서 열린 한국 A팀과 이집트 간의 경기가 치러졌는데 경기 도중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당시에는 민주화 운동 외에도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매우 많이 일어났기에 최루탄에 익숙했던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큰 동요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집트 선수 중 다수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 사이에 한국 선수들이 골을 넣었기는 했지만 이집트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이상을 보이자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도 웅성웅성거렸고 결국 주심은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몰수무를 선언하며 경기를 종료시켰고, 이 장면은 KBS 1TV를 통해서 갑자기 방송이 끊기는 초대형 방송사고까지 겹쳐 전국적으로 생중계되었다.[31]

이렇게 허무하게 경기가 끝나자 경기 전에 강제로 표를 사야 했던[32] 마산 관중들이 표 환불을 요구하며 주최 측에 대거 항의하다가, 표 환불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시위대에 합세하며 심야 시간까지 시위를 벌였고 전두환의 사진은 불탔다. 이 소식은 다음 날에 주요 언론들을 통해 짤막히 보도되면서 대중들에게 시위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널리 알린 셈이 되었던 것이었다.

2.4. 명동성당 항쟁

파일:external/i.huffpost.com/slide_352927_3830070_free.jpg

시위대가 피신한 명동성당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다. 그는 추기경이라는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경찰들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4. 6월 민주항쟁(상)',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 중심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자 한국 가톨릭의 상징인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시도 자체만으로도 세계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철통같은 독재권력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전두환이 벌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33]이나 남미[34]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이게 현실이 되었다면 1988 서울 올림픽은 그대로 물거품이다.[35] 결국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36][37] 명동성당과는 마찬가지로 당시 민주화인사의 피난처이자 6월 항쟁의 진원지인 서울주교좌성당은, 성공회가 잉글랜드의 국교고[38], 바로 뒤에 주한영국대사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난입하여 대성당의 성물 등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서울교구 사제단이 10일간 단식투쟁에 돌입하였고, 전국의 모든 성당에서는 사제와 대성당을 위한 기도가 봉헌되었다.

국민들은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성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명동성당 농성 중 조영래 인권 변호사들이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양복 정장을 착용한 변호사들의 복장을 경찰들이 정부 관료로 오인하여 처음에는 달리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허나 곧 상황을 파악한 경찰들은 재빠르게 접근을 막아세웠고, 변호사들의 접근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이 변호사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 나오는 이야기.

2.5. 항쟁의 진행

서울이 심합니다. 광주는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 6월 13일, 대통령 주재 관계기관 대책회의. 내무부 장관 고건
6월 11, 12일은 데모가 가속화하다가 13일은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월요일(15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데모에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습니다.
- 6월 14일, 대통령 주재 비상대책회의. 내무부 장관 고건[39]
6월 10일의 대규모 시위로 일순 긴장 상태가 이어졌지만 13일~14일의 주말이 찾아오면서 시위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고, 가장 우려했던 광주가 대학생보다는 광주 종교계 쪽이 주도를 했다.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는 물론이고 10.27 법난으로 정권에 비교적 순응적이었던 불교계까지도 가세했는데, 광주 불교계를 분노하게 한 것은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법회가 열리고 있던 금남로 근처 원각사에 전경 60여명이 대웅전까지 난입해서 최루탄을 터트리고 학생들을 연행하는 일을 벌인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비교적 조용함에 따라 청와대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 자신감과 내각 내 온건파의 주장으로 치안 당국은 명동성당 농성자들에게 성당 농성을 중단하면 아무도 구속하지 않고 무사 귀가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며, 농성자들은 찬반 투표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농성을 중단했다. 다행히 치안 당국의 약속은 지켜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판이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주말 시위가 소강 상태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다시 거리로 몰려왔다. 특히 지역의 주요 대학가들은 일제히 6월 15일을 신호탄으로 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고건이 특별히 언급할 정도로 신경썼던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애시당초 광주 대학가가 조용했던 이유는 전남대학교는 학교 축제로, 조선대학교 학내 민주화 문제로 6월 10일 직후에 시위를 벌일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이 끝나자마자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는 항쟁 첫 주에 적극 가담하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가장 격렬하게 항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5.18 당시 광주 지역에서만 궐기가 일어나며 공권력이 광주에만 집중되며 1980년 지옥 같았던 5월을 기억하던 이들이 타 지역의 사태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부에서 정부의 눈을 피한 움직임은 계속되었고, 광주 지역의 시위대들은, 6월 항쟁에 불길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서울에서도 명동성당 농성자들이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을 본 학생, 시민들은 정권이 밀리기 시작했다고 인식하며 투쟁에 불을 붙였다. 6.29 선언이 있기까지 12일 동안 매일 150명에서 300명에 가까운 군중들이 광주서현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고 할 정도로 투쟁은 격했다. #

이한열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에 이르렀다.

집권세력은 국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 진압하느냐, 아니면 직선제 개헌으로 항복하느냐의 기로에 봉착하여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는데 이날 저녁 청와대 안가에서는 심야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전두환은 이기백 국방부 장관, 각 군 참모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자는 전제 아래 출동 준비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치안본부장은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각하( 전두환)는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 군대를 투입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국가가 뒤집힐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40]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면서 전두환을 설득하여 즉각적인 군 투입은 막았다. # 6월 19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계엄령으로 군을 투입하든지, 아니면 물러서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옆 회의실에서 군 고위회의가 열렸다. 이는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투입 계획을 세밀히 점검하는 자리였다.

이때 전두환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군대가 모두 점령지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면서 "이것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엄령에 플러스 알파를 하는 비상 조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대도 동원할 수 있고 군법 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다 준비가 되어 있지"라고 했다.

이에 따라 군대 투입을 통한 무력 진압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이 났으며 수도권 외곽에 주둔 중이던 충정부대[41]들을 서울 외곽 지역에 집결시켰다. 당시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 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 수 있게 한 것.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대를 투입하여 무력 진압으로 소요 사태를 종결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보고하였다. 어쩌면 5.18 광주를 뛰어넘는 상황이, 그것도 수도 서울 한복판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경찰력이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이 어떻게든 경찰력으로 책임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는 군 투입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발언이었을 뿐, 경찰력의 대응 능력 한계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서울의 급증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지방의 경찰력을 계속해서 소환하여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지방의 경찰력 공백만 불러오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지방의 시위는 서울과 달리 과격성을 띠고 있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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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순찰차나 전경 버스 같은 경찰 차량, 안기부 직원의 차량, KBS와 MBC의 보도 차량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습격받아 전소되었으나, 경찰력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해야 했다.
  • 6월 13일 부산에서는 전방입소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부산수산대, 경성대 학생 천여 명이 부산역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며 연좌 농성을 벌이고, 지나가던 시민들과 대합실에 있던 시민들이 합세해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민들은 인근 상점에서 쭈쭈바를 수십 개씩 사서 시위대 위로 던지며 응원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으로 흩어져 남포동과 서면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 6월 15일, 대전에서는 충남대, 목원대, 한남대, 배재대, 대전대 등에서 학생들이 일제히 교문 봉쇄선 돌파를 시도했고, 병력 대부분을 서울에 차출당한 충남경찰은 모든 학교에서 방어선이 돌파당했다. 쏟아져나온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시민들이 대전 도심을 가득 메웠고, 이에 대전 치안당국이 타협안을 제시해 대전역까지의 가두시위를 보장하고 진압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 다른 때 같았으면 협상에 나선 치안당국 책임자가 온건하다며 처벌받을 일이었지만, 그때의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 6월 16일, 부산에서는 부산대생 5천여 명 등 9개 대학생 1만여 명이 비상 학생총회를 개최하고 시내에서 연합 시위를 벌였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시위대 5천여 명은 충무동 시위대와 합세하면서 남포동 거리를 완전히 뒤덮어버렸고, 시위대는 금방 1만여 명을 넘어섰다. 대중집회를 마친 남포동 시위대는 인근 시청 옆 부산문화방송으로 향했다. 경찰은 시청 앞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아 차단했다. 경찰 저지선까지 이동한 시위대는 연좌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평화적 연좌시위도 아랑곳 않고 몇 차례 경고방송과 함께 곧바로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진격했다. 흩어진 시위대는 국제시장과 대청동, 보수동 등지로 나뉘어 시위에 들어갔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폭력진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던 소규모 시위대는 경찰 진압에 밀려 영선고개 쪽으로 피하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인근 공사장에서 가져온 철근과 벽돌, 시멘트 포대 따위로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이윽고 몰려온 경찰들의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투석전이 벌어졌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은 집요하게 해산을 시도했고,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이 전방위적으로 시위대 해산 작전을 펼치면서 시위대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톨릭센터와 접촉했고, 심각성을 인지한 가톨릭센터가 비상시에 센터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해 피신하고, 가톨릭센터를 항쟁의 중심지로 만들 것을 결의했다.
  • 6월 16일, 진주에서도 시위대에 의해 파출소 4곳이 공격받아 불탔고, 전투경찰 병력 주둔지였던 한국도로공사 진주지사가 공격받았으며 시위대가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했다.
  • 6월 17일, 전날에 이어 시위를 이어가던 진주 경상대 학생들이 남해고속도로로 재차 진입, 도로를 점거하고 LP 운반 차량 2대를 탈취하여 폭파 협박을 하며 진주시내 진입을 시도해 정촌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초유의 사태에 치안당국도 경악하여 경찰특공대까지 투입, 시위대를 겨우 해산시키고 운반 차량을 재탈환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시위대가 다시 뭉쳐 경전선 철도를 점거하는 바람에 철도 운행이 일시 중단되었다. #
  • 6월 18일, 부산에선 2만여 명의 시위대가 가톨릭센터를 거점으로 집결하여 대청동, 충무동, 남포동 일대를 장악하고 출동한 경찰 병력을 향해 인근 공사장의 철근, 벽돌 등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들은 밤이 되면서 '한열이를 살려내라', '독재타도/호헌철폐' 등지의 4.4조 음률의 구호를 외치며 촛불을 들고 범일동 및 좌천동 고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좌천동 고가 경찰 저지선에서 최루탄이 무차별 난사되는 중에 회사원 이태춘이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다리 밑으로 떨어져 인근 봉생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43] 이 소식에 분노한 시민들은 저지선을 뚫어 KBS부산방송총국을 습격, 화염병을 던져 집기 일부를 파손했으며 밤사이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렸다. 이날 서면~범내골 일대에는 30만 명이 운집해 6월 항쟁 최대의 시위가 일어났다.
  • 6월 18일, 춘천에서는 강원대 한림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 및 시민 1만여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시내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며 주요 관공서와 파출소, 방송국 등을 습격했고, 시위가 이어지던 19일 새벽 1시경에는 일시적으로 강원도청을 점거했다. 몇몇 전경 부대는 접전 중에 진압장비 다수를 빼앗겨 시위대에게 불태워졌고, 경찰 차량 몇 대도 전소되었다. #
  • 6월 19일, 부산에서는 10개 대학 및 3개의 전문대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나와 경찰 기동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진압장비를 탈취했으며, 초량파출소, 남포1, 2, 3파출소, 보수1파출소, 부산진파출소 등에 방화하고 집기를 파손했다.
  • 6월 19일, 대전에서는 과격 시위대가 탈취한 버스가 대전역 광장에서 휴식 중이던 충남제2기동대 전경 대열을 덮쳐 전경 1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당했다. #[44]
  • 6월 19일, 청주에서는 충북대학교생 200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가, 최루탄 파편에 유아가 맞아 다치는 등의 일이 벌어지면서 총 1만 명이 넘는 시위대로 크게 불어났다. 이 기세를 타고 청주시청, 민정당 충북당사, 사직경찰서, KBS청주방송총국, 충청일보사 등에 화염병 및 투석 공격을 감행했다. # 1987년 청주시의 인구는 약 40만 명이니 인구의 2.5%가 시위에 나선 것이다.
  • 6월 19일, 충주에서는 건대생 200여명[45]을 포함한 시위대 1천여 명이 가두 시위에 나서며 KBS충주방송국과 민정당사, 신민당사[46], 전신국, 용암파출소 등을 공격했다. 충북 경찰 역시 다수 경찰력이 서울로 차출되고 남은 경찰력 중 다수가 청주에 결집한 상황이어서 고작 1천여 명에게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결국 옆동네인 제천에서 급히 경력을 지원받아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
  • 6월 20일, 19일에 이어 청주에서는 연이틀 연속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KBS 차량을 불태우고 석교파출소를 함락시키고 영운파출소를 전소시켰다. 21일에도 다시 시위에 나서서 3일 연속으로 시내로 나아갔고 19일 공격한 KBS 및 충청일보사를 다시 공격했으며 이후 전경들에 밀려 퇴각하는 와중에도 사창파출소를 공격해 불태웠다. #
  • 6월 21일, 부산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806명이 연행되었다. 이 시기에 부상자가 속출해 부산대 의대·치대, 동아대 의대, 고신대 의대 4학년생을 중심으로 진료반을 구성해 남포동 국도극장 앞에 고정 진료소를 설치했고, 이동 진료반도 구성했다. 제약사에서는 약품을 트럭 채로 실어 날라 주기도 했다.
  • 6월 23일, 제주에서는 연 3일째 가두시위를 벌인 제주대학교 학생 7백여명이 제주시내 도심지에서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하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동반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제주대생들은 중앙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세워져 있던 도로포장용 중기 1대를 밀고 나오고 제주시청 소속 제주7가1050호 지프를 공격해 전복시키기도 했다. 이후 11시 30분께 지난 22일부터 학생 1백여명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중앙성당으로 가 합류했다가, 24일 새벽 학교와 성당측의 주선으로 연행학생들이 모두 풀려나오자 농성을 풀고 귀가했다.[47]
  • 6월 26일 안양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경찰관사와 안양파출소가 공격받아 불에 탔고, 민정당 안양지구당도 마찬가지로 전소되었다. 노동부 안양출장소(현 중부지방고용노동청 안양지청)도 사측 편만 든다는 노동자들의 분노가 시위에 담겨지면서 같이 공격받아 불타올랐다.
  • 6월 26일 대구에서는 명덕로터리 2.28 기념탑[48]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반월당으로 행진하며 최소 1만여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했고, 밤 10시 40분 민정당 대구 제3지구당( 남구, 수성구) 이치호 의원[49] 사무실에 시위 군중들이 난입, 사무실 집기와 유리창 등을 부수고 노태우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알리는 당보를 길거리에서 불태웠다. 파출소 5곳도 습격받았고 그 중 3곳이 불에 탔다. #

6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치안력의 한계는 명백해졌다. 경찰들은 지방에서 공세적 진압을 사실상 포기하고 행정기관 등을 중심으로 한 거점 방어에 치중해야 했으며, 그조차도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보급받은 최루탄이 바닥나서 전경들이 시위대와 투석전으로 맞대응하는 상황까지 내몰렸고, 각지에서 경찰 부대가 시위대에 압도되어 퇴각하거나 얌전히 항복한 뒤 무장을 해제당하고 쫓겨나는 일마저 줄이었다. 시위가 워낙 대규모에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보니, 지방의 시위진압 부대들은 어느 한 도시에 머물지 못하고 열심히 버스타고 돌아다니며 이곳 막고 다시 이동해서 저곳 막는 등 땜방을 하고 있었다. 지역마다 민정당사, 도청 및 시군청, KBS 방송국, 파출소 등은 제1 공격대상이 되어 화염병과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6월 13일 고건 내무부 장관은 전두환에게 서울의 시위는 현재 치안력으로 진압 가능하지만 시민들이 경찰이 아닌 시위대에 호응, 동조 및 가담하면서 경찰들의 사기가 매우 떨어지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그리고 시위가 확산되면서 경찰들의 체력도,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져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루탄이 바닥나고 있었다. 경악한 당국은 공장을 풀가동했지만 생산량은 소모량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최루탄까지 바닥난다면, 체력과 사기까지 바닥인 경찰은 맨몸으로는 도저히 시위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군부를 통해 구체적인 병력 동원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6월 17일, 작전명령 제87-4호에 의한 병력 동원 계획이 수립되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후방을 담당하는 2군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의 위수군단 군단장이 지역별 계엄사령관을 맡으며 부산경남지구와 충남북지구를 특히 핵심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또, 전방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하고 특전여단 6개와 해병연대 2개, 그리고 각 군단 직할대인 특공연대 4개를 동원해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 마산, 대전, 대구 등 시위가 거센 곳에 집중 배치하기로 하였다. 육군참모총장 박희도는 철도청과 병력 동원을 위한 열차 수송계획의 협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때 세워진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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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항공여단이나 화학부대도 동원하려고 하였다.

무력 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시위 지도부는 유혈 사태에 대비하여 비상 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2.6. 미국의 경고, 군부의 반대

당시 미국의 정계와 여론은 전두환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남미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독재정권을 지원하곤 했지만,[50] 그래도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고 군부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것을 좋게 볼 리 없었다.[51]

미국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에는 침묵했다. 당장 1980년 내내 미국 외교가와 정계의 최대 관심사는 이란 이슬람 혁명과 그 여파로 일어난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어서 백악관이건 국무부건 한국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여론 역시 마찬가지여서 미국의 여론이나 언론은 외교관을 포함한 자국민들이 대거 인질로 잡힌 테헤란에 관심을 기울였지, 자국민의 안전과 관계가 없는 한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현지시각 1980년 5월 18일(한국시각 5월 19일)에 발생한 마이애미 인종폭동 및 세인트 헬렌스 화산 폭발로 미국의 여론은 더더욱 한국에서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경제마저 불경기에 접어들던 시기였는지라 그야말로 한국 문제는 오비삼척이었다. 심지어 더 나아가 5월 23일에 존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이 한국군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 광주로의 군 투입을 묵인했고, 1981년에 부임한 리처드 워커 주한미국대사도 1982년에 재야 민주인사들에 대해 "버릇없는 애X끼들"이라고 폄하했는데, 이때를 계기로 재야 민주단체 인사들이 반미로 전향한다. 그리고 이는 훗날 한미동맹에 있어서 위협이 되는 NL의 급진적 반미성향을 가진 단체들의 출현을 만드는 계기도 된다. 최형우 의원이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었던 존 스타인과 대면한 자리에서 "이게 다 당신네들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52]

하지만 1987년의 미국은 1980년과 달리 본격적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에 관심을 두고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6년 필리핀 민주혁명을 계기로 레이건 독트린을 수정해 반공친미 독재자와도 결별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무엇보다 한국은 전두환의 3S 정책에 따라 민주화의 열기를 돌리려고 개최한 반드시 평화의 화합의 장이 되었어야 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국이었다. 이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흑백인종차별을 유지하는 남아공 문제[53]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집단 불참했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에는 소련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한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이 대거 불참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공산진영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하면서 올림픽 정신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며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됨에 따라 냉전 체제가 무너져 가면서 오랜만에 진정한 평화와 화합의 올림픽이 될 수 있는 상황에 올림픽 개최국인 대한민국이 계엄령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올림픽 때문에 수많은 외신들의 이목이 한국으로 쏠리고 있었고, 외신 기자들도 한국 국내에 많이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외국의 눈치와 감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보도한 한국의 상황은 6월 10일 이후로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등 미국 유수의 신문사들의 1면을 장식했고 미국 국민들은 한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받아보게 되었으며 이는 그대로 미국의 여론으로 연결되었다. 6월 16일에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 한국 민주화 지지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24일 하원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의회와 별개로 행정부도 움직이고 있었다. 6월 17일,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존 스타인이 김영삼의 최측근 최형우와 접촉했다. 최형우는 이 자리에서 이게 다 전두환의 후견인 노릇을 한 미국 탓이라며 만약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이 투입된다면 YS와 자신은 광화문 앞에서 분신자살하겠다고 선언했다. 최형우 말고도 다방면을 통해 한국 주요인사와 접촉하고 정보를 수집한 미 중앙정보국은 군 투입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하고 이를 주한미국대사관 및 본국에 보고한다.

워싱턴 D.C.의 대응도 이에 동조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즉시 한국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여 군 병력 투입을 막고자 하였다. 이때 특사 후보로 여러 명이 거론되었는데 레이건은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를 특사 후보로 점찍었다고 한다. 미국의 2인자라는 강력한 상징성에다가, 부시 부통령이 닉슨 행정부에서 UN 대사와 초대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장, 포드 행정부에서 미 중앙정보국장을 지낸 이력이 있는 외교/정보통이기도 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주미 한국대사 김경원 국무부 등을 통해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전두환 정권의 주미 대사라는 입장에서 무작정 전두환을 옹호할 수도, 그렇다고 미국의 대응에 구경만 할 수 없던 그는 "전두환의 성격상 특사를 보내면 오히려 성질만 돋구게 된다"며 경고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보내달라고 읍소했다. 최종적으로 백악관은 그의 읍소를 받아들여 특사 파견 대신 대통령 친서 전달으로 격을 낮추게 된다. 제임스 릴리(James Lilley)[54] 주한미국대사는 지방의 시위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6월 17일 지방 미국문화원을 순시하던 중 대통령 친서를 받았다는 연락에 급히 서울로 귀환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릴리 대사는 이튿날인 6월 18일 전두환 대통령을 접견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외무부 관리가 접견 요청을 거절하려 했다. 이를 듣고 화가 난 주한미국대사관의 해리 던롭(Harry Dunlop) 정무참사관은 접견 약속을 잡기 위해 외무부와 통화하던 도중에 이렇게 비난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 대사를 안 만나겠다는)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귀국의 대통령이 그랬다는 말을 접수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이 그럴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실 수 없어요. 빌어먹을, 누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 그 사람 이름을 대요, 당장!

보통 완곡표현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외교적 수사의 특이성을 감안하면, "빌어먹을"이란 직접적인 욕설과, "지금 당장!"이라는 상당히 과격한 어투을 보면 이는 돌려말한 것도 아니고 "X랄 말고 니네 대통령 당장 튀어나와!"란 쌍욕을 직접적으로 박은 것이나 다름없다.[55] 이 같은 미국의 강경 발언을 듣고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최광수 외무장관이 직접 주한미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고, 릴리 대사는 6월 19일 오후 2시에 전두환 대통령과의 접견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한편 주한미군 정보부대에서는 6월 19일 오전에 한국군이 무력 진압에 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은 6월 19일 오전 10시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안기부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6월 20일 오전 4시를 기하여 대학 캠퍼스와 여러 도시에 군을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같은 날 청와대에서는 무력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주한미군에게도 통보하라는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실제로 이 사실이 한미연합군사령부에 통보되진 않았다.

6월 19일 오전, 릴리 대사는 주한미군 수뇌부가 참석한 오찬 행사에서 윌리엄 리브시 주한미군사령관[56]을 만났다. 릴리 대사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할 때 시위를 진압하는 데 군대를 동원하지 말라고 말하겠다고 전달했다. 리브시 사령관은 조용히 듣기만 했는데, 릴리 대사는 이를 동의로 이해했다. 훗날 친서를 전달하면서 하술한 것처럼 주한미군사령관의 이름을 들먹인 것에 대해 리브시 사령관은 불쾌해 했지만, 그는 릴리 대사에게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서울 진입을 막을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6월 19일 오후 2시, 릴리 대사는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정치범을 석방하고, 권력을 남용한 정치 탄압 관리를 처벌하며, 언론의 자유를 신장하라는 내용이었다. 릴리 대사는 "주한미군사령관과 자신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고, 총리가 계엄령 선포가 임박했다고 발표한다면 한미동맹 저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57] 19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6월 20일,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서는 6월 20일 새벽 4시에 한국군이 강제진압을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하였다. 미 중앙정보국은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6월 20일 오후에 전두환과 면담 일정이 있다는 걸 알고 그 전에 접촉하여 한국군의 무력진압 계획을 알려주었고,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다시 한 번 무력진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이 다시 벌어질 뻔한 위기를 막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미국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한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전두환 계엄령 내가 막았다” 아시아 비망록. 제임스 릴리 회고록

6월 21일에는 개스톤 시거(Gaston Sigur Jr.)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한국 문제에 군부가 개입하는 건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말했고, 23일에는 급히 한국을 방문하고 이틀 뒤에 돌아갔다. 이때 시거는 25일 한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계엄 선포 반대의 뜻을 분명히 전했다."고 전했다.

또한 국군 내부에서도 시위 진압에 대해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기에 작정하고 진압을 명하면 오히려 그 군인들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청와대로 쳐들어갔을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전두환이 믿고 있던 군부조차 무력 진압에 회의적이었는데, 군의 주축에 해당하는 야전 지휘관들은 당연히 무력 진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소장~중장급 실전부대 지휘관들 또한 똑같이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병력 투입에 찬성하고 있던 일부 대장급 지휘관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1999년 10월 10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9의 진실 편에서 하나회 핵심이며 87년 5월까지 내무장관이었던 정호용과 인터뷰했는데, 6월 항쟁 때 현직에 있는 후배들이 찾아와서 군부대가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군 투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해왔고, 자신 역시 이에 동의하여 민정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에게 그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특히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이 고명승 보안사령관과 민병돈 특전사령관이었다. 둘은 육사 15기로 그 기수 하나회의 대표주자였으며, 고명승은 12.12 군사반란 당시 청와대 경호실 소속으로 쿠데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런 둘이 전두환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민병돈은 유사시 예하 부대의 진압 동원에 반대하겠다는 뜻을 고명승에게 밝혔고, 고명승은 이 의견을 전두환에게 전달하였다. 보안사와 특전사는 12.12 당시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하는 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들로, 전두환으로선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12.12 당시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보안사도 보안사지만 실병력들을 동원했던 소장, 준장급 지휘관들의 역할이 컸다. 당장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 9사단 병력들이 서울로 들어올 수 있기에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6월 항쟁 때는 이 실질 병력들을 동원할 수 있는 지휘관들이 앞장서서 군 투입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이 매의 눈으로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진압 작전을 실행에 옮기려면 한미연합군사령부의 관할 밖에 있는 특전여단들이 핵심이 되어 움직여줘야 했으나 특전사령관부터가 반대하고 나섰으니 대략 난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1987년 당시에는 12.12 당시 특전사령부가 쉽게 넘어간 것을 교훈삼아 707특임대가 특전사령부 영내에 주둔중이었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을 쉽게 제거할 수도 없었다.

당장 전두환의 측근들조차 대놓고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권할 정도였으며, 전두환 본인이 의외로 쉽게 직선제를 수용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심지어 전두환의 군부 개입 포기 배경엔 올림픽이 얼마 안 남았다는 현실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역시 만일 서울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난다면 올림픽 개최지를 올림픽 유치과정 중 낙선한 일본 나고야시 등의 다른 곳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거론했다. 설사 개최지가 변경되지 않았더라도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처럼 학살자들이 개최한 올림픽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2.7. 전두환 정권 무조건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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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 행렬.[58]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택했다. 먼저 민정당은 6월 21일 비상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직선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인 22일에 전두환은 위기상황 타개를 위해 김영삼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틀에 걸쳐 협상을 조율한 끝에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영수회의가 성사되었지만, 김영삼이 요구한 직선제, 선택적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 등을 전두환이 거부해서 회담이 결렬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한국국민당 총재 이만섭과의 회담도 이루어졌는데, 이때 이만섭은 "깨끗이 직선을 해서 국민 심판을 받도록 하시지요. 그래서 동교동[59], 상도동[60] 머리 처박고 싸우게 하고 이쪽은 정정당당하게 물가 안정, 올림픽 가지고 심판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다. 이 발언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 노태우와도 이틀 전에 만나 직선제로 하자고 설득을 했다. 25일에는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드디어 6.29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이 선언으로 노태우는 일약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였다. 6월 항쟁의 대미는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으로 끝났는데, 처음에는 연세대 교정에서 군중 10만명으로 시작해 신촌 네거리 노제에서 30만, 시청 앞에선 100만여 명으로 각각 늘어났다. 이 장례식 참가 인원수는 정부 수립 이래 역대 집회 중 최고였다.

당시 시민과 학생들은 이한열의 영정과 대형 태극기, '한열이는 부활한다' 등의 만장 300여개 등을 앞세운 운구 행렬을 따랐고, 이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모여 올림픽기와 태극기를 가리켜 "조기",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하자 김병식 당시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올라가 조기를 게양했다. 뒤이어 근처 서울프라자호텔, 조선호텔, 프레지던트호텔 등도 조기를 달았다.[61]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운구 행렬 이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백만여 명의 군중은 연좌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의 완전 퇴진을 위해 전민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그러나 장례위원회도, 국본 지도부도, 서대협도 백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 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로 군중들이 흩어져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시위로 번지게 된 데에는 대학교를 졸업한 도시 봉급자를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들의 참여.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낮이 가장 긴 6월인데다 서머타임 시행으로 저녁 9시까지도 햇빛은 쨍쨍하고, 시위가 진행되는 서울 도심 한복판과 서울 지하철 2호선 지하철 운행을 중단 혹은 무정차 통과해 시위 참여의 좋은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강남 아파트촌까지 소등 형식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음식점 주인들과 아줌마들은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을 위해 김밥을 싸주며 시위에 박차를 가하였고, 넥타이 부대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시위를 막고 있는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꽂아주었다. 맨 위의 동영상 10분 20초 부근에서 한 중년 남성이 장미꽃을 거부하는 경찰에게 장미꽃을 억지로 꽂아주며 "경찰관도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보면 그 직후 경찰이 남성에게 "경찰관이 대한민국 국민입니까?"라고 묻고 남성은 다시 그 경찰에게 "네!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이거 달아야 합니다."라고 답한다. 이는 4.19 혁명 당시 시위대 진압을 위해 온 군인들의 탱크 위로 한 어린아이가 올라가 대한민국 국군 만세를 외친 것과 비슷한 대목. 실제로 민주화를 논할 때 시위를 진압하는 입장이던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이 6월 항쟁의 결과물로 대한민국 역사상 9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를 담고 있는 이 헌법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서 제6공화국으로 개헌된다.

2.8. 양김의 분열과 전두환 정부의 잔재

개헌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16년 만에 부활하여 직선제 선거가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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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black> 이랬던 김대중, 김영삼이,[62] 이렇게 돌아섰다.[63]
  • 1987년 대선 결과.
    • 노태우 (8,282,738표, 민주정의당): 36.64%
    • 김영삼 (6,337,581표, 통일민주당): 28.03%
    • 김대중 (6,113,375표, 평화민주당): 27.04%
    • 김종필 (1,823,067표, 신민주공화당): 8.06%
    • 신정일 (46,650표, 한주의통일한국당): 0.20%
    • 홍숙자 (사회민주당), 김선적 (일체민주당), 백기완 (무소속): 중도 사퇴

야당 후보였던 통일민주당 김영삼과 평화민주당 김대중의 단일화가 좌절되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인한 북풍으로 인해 야권이 축소되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때는 김종필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네 후보는 자신들의 출신 지역들의 지역감정을 고취하였고 이는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배경으로 당선된 노태우의 득표율은 대통령으로서 사상 최저였으며 당선 이후에도 13대 총선에서 과반확보 실패로 여소야대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합당을 감행함으로써 여소야대 국면을 극복하게 되고 이로 인해 기존 정권의 색채는 계속 유지된다. 이 때문에 6월 항쟁을 가리켜 '절반의 성공'으로 지칭하는 의견도 있다. 밥상은 국민들이 잘 차려주었는데 정작 잘 떠먹어야 할 김대중 김영삼이 서로 맛있는 반찬을 먼저 먹으려고 싸웠다가 정작 전혀 뜻밖의 사람 먹어버린 격이다.

그러나 이미 크게 솟아올라 대세가 된 개혁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으므로 노태우 정부는 민주화와 자유화, 그리고 냉전 붕괴에 의한 북방외교 등 전환기의 정권에 요구되는 시대적 과제를 나름대로 충실히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이 퇴임 후 백담사에 칩거한다던가, 5공 청문회가 열린다던가 하는 군사정권 잔재 청산의 신호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편 1987년 선거는 지역대결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첫 번째 선거이기도 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 강원, 인천, 경기, 충북에서, 김영삼 후보는 경남과 부산에서, 김대중 후보는 전남과 전북, 광주, 서울에서 김종필 후보는 충남[64]에서 각각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물론 지역 갈등을 이용한 선거의 기원은 어디까지 잡겠다고 말하는 데도 다양한 논의가 있을 정도로 1960년대 후반 혹은 1970년대 초반부터 조짐이 나타나지만 각 후보자들의 연고지와 그 인근에 다득표지가 집중된 것이 1987년 선거에서부터 유독 눈에 띄었으며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1987년에 있었던 6월 항쟁과 개헌, 대선 등을 통해 확립된 각 정당과 정파의 합종연횡, 정치 체제, 선거에서 드러난 지역구도, 대중에게 각인된 정치 의식과 사회 의식, 세대 의식 등의 다양한 개념 등을 통틀어 흔히들 '87년 체제'라 칭한다. 이 '87년 체제'는 비단 정치 구도를 칭하는 범주를 벗어나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와 형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2.8.1. 관련 문서

2.9.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의 재조명

6월 항쟁을 계기로 과거사 청산운동, 과거사 진상규명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금기시 당한 사건과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과 헌법 정신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헌법재판소의 탄생 등이 이뤄졌지만 이는 정치적 민주화에 한정된 것이었고 경제적[65], 사회적 민주화에까진 이르지 못했다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그런 시각에서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논하는 여러 논의들이 있다.[66] 그러나 하나의 항쟁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은 당시 대한민국 현실에서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반론도 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치적 민주화였으며 그 결과는 보란듯이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6월 항쟁이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당시 국본 부산지역 상임위원으로서 부산 집회를 주도했던 노무현 문재인은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어 각각 20주년, 30주년 기념식에서 6.10 항쟁의 의의에 대해서 연설을 한 바 있다. 2020년 당시 제1야당 국민의힘에서는 강령에 6.10 항쟁을 새롭게 추가시켰다.

3. 평가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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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쁜날
차값은 무료입니다
-가화다방 주인 백 -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 담화가 발표된 직후 소공동 가화다방[67]에서 주인 전씨가 직접 내걸었던 무료영업 메시지.
당시 국민들이 가졌던 환희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으며, 2015년 개정 교육과정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68]
6월 항쟁은 사실상 수십 년에 걸친 군사독재 통치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국민의 직선제 개헌안 목소리를 무시하고 간선제 유지로 정권을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부를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비록 양김 단일화가 틀어지면서 군사반란의 주역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 의미가 약간 퇴색된 점은 있지만 3당 합당 이후 다음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에 의해 하나회가 성공적으로 숙청되어 문민통제의 길을 열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87년 체제라는 말을 쓸 정도로 현재까지도 제6공화국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이로 인해 1987년 체제는 대한민국의 헌정사상 가장 길게 장수하고 있는 헌법 체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87년의 민주화는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의의가 있다. 앞선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의 경우 4.19 혁명의 배경으로 50년대 말 원조 감소로 인한 경제의 혼란이, 박정희 - 전두환 정권 교체기 부마민주항쟁 서울의 봄, 5.18 민주화운동 등의 배경으로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의 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은 이미 다각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경제적인 변화가 정치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한국 정치사에서도 실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의 경우, 3저 호황을 등에 업고 한국 경제가 순항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위신과 외교적 요소,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나 미국의 동의 여부 등 앞서 다룬 요소들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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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진이다. 제목은 "아! 나의 조국."[69]
1987년 6월 26일 부산직할시 남구 문현동 문현교차로[70] 일대에서 개최되었던 "평화대행진" 행사 도중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 라고 외치면서 뛰어가는 장면이다. 이 사진에서 뛰어가는 시민이 누구였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뒤에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는 시민 2명이 누구였는지는 한겨레에서 찾았지만, 웃옷을 벗고 뛰어가는 주인공은 많은 언론사들과 기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음에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지하철 공사 중인 곳에 올라가 대기하고 있었던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가 촬영했으며, 훗날 '흔들리는 나의 조국'을 보았으며 셔터를 눌렀을 때 전율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평생의 특종이 될 것을 셔터 누르는 순간에 직감했다고. 이 사진은 1999년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되었다.[71]

6월 항쟁 당시 친정부 어용, 왜곡언론이라는 이유로 경향신문 뭉치가 서울역 앞에서 화형당하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의 기준이다. 이후 신문사의 운영주체[72]가 바뀌면서 성향이 바뀐 사례.

6월 10일에 있었던 민정당 전당대회는 호헌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는 사실상 다음 대통령을 지명하는 자리였고, 이때 노태우가 지명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막간 공연을 하였던 곳이 MBC였다. 당시 MBC 소속 인기 코미디언 "배추" 김병조는 원고에 쓰여있던 '민정당은 국에게 을 주는 정당이고, 통민당은 국에게 고을 주는 정당'이란 문구를 그대로 읽었다. 이 표현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배신감은 하늘을 찔러서 그는 이후 사실상 연예인 생명이 끝장나게 된다.

이 당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필두로 한 여러 노래패들과 그들이 만든 민중가요가 시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사계, 광야에서, 그 날이 오면 같은 곡은 지금도 유명하다. 안치환 등의 가수는 6월 항쟁을 기반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천안문 6.4 항쟁을 이끌었던 3대 학생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인 우얼카이시 둬라이티는 6월 항쟁을 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다. 87년 6월 중국 중앙 텔레비전에서는 서울[73]의 시위 모습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중계하듯 보도를 했는데 이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당시 지방 중소도시와 농촌에서는 왜곡보도로 인해 자세한 정보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직할시나 도청 소재지급 지방 대도시에서의 동조 시위 소문은 계속 들려왔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6.29 직전에는 '우리들도 뭔가 해야 되지 않느냐'는 학생들의 이야기도 있었다"고 당시 지방 거주 고등학생들은 회상하고 있다.

이 당시 어린이로 있었던 1970년대 후반생이나 1980년대 초중반생들은 일부를 중심으로 화염병 투척하는 무서운 아저씨들이라는 인식이 쌓이기도 하였다. 또 그 당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절대로 화염병 던지는 무서운 아저씨들과 마주하지 말아라, 화염병 든 낯선 사람이 다가거나 위협하면 경찰에 신고해라, 절대로 화염병 가진 낯선 아저씨들 따라가면 안돼라며 주의를 주기도 하였는데 이 당시에는 항쟁이라는 인식 대신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고 아이들 학교 등하교를 위협하는 시위라는 인식이 짙어서 당대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알려주었던 편이었다.

또 당시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에서도 담임 선생들을 중심으로 학생들에게 시위대들을 나쁜 사람들이라 칭하였을 정도로 그 당시 학교에서조차도 항쟁 참가자들을 낯선 아저씨, 위험한 아저씨들이라며 학생들에게 접근하거나 다가가지 말라고 지도했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시위 참가자들이 학교에 등하교하던 어린 국민학생들을 인질이나 볼모로 삼아 위협 등을 가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짙어서 일선 학교에서도 국민학생들에게 이렇게 권고했던 편이었고 가정통신문을 통해서도 부모들에게 이러한 권고를 해주었던 편이었다.

당시 뉴스데스크 KBS 뉴스 9 등 정규 보도에서는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이나 화염병이 터져 불타는 거리, 전경 부상자 등 시위의 폭력적인 모습만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최루탄가스로 고통받는 시민들의 인터뷰도 왜 쏘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잦은 시위와 최루가스로 힘들다는 뉘앙스로 왜곡해서 보도했다. 시위 구호는 묵음처리하거나 함성을 합성해 묻었다.

6월 항쟁 기간 중에도 코리아컵 축구대회가 취소되거나 프로야구 시즌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들도 여럿 있는데 상기한 대로 마산에서의 시위가 있고 부산에서도 6월 12일 한국과 미국간 축구경기 도중에 최루탄이 구덕축구장에 최루탄이 난사되어 30분간 경기가 중단되고 관중의 절반이 빠져나오면서 환불을 요구하기도 했고, 6월 14일에 롯데와 해태가 열리는 와중에 대학생들이 구장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경기가 끝날때즈음에 경기장 안에서도 어김없이 독재타도 구호가 나오자 질겁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는 일이 벌어졌기도 했다.

6월 항쟁을 다룬 노래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부른 '유월의 노래'가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일어섰다 오직 맨주먹
피눈물로 동지를 불렀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하나된 소리
민주와 해방의 나라 이뤘다.
아 우리들의 수난 우리들의 투쟁
우리들의 사랑 우리의 나라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손 맞잡은 우리 전진하는 우리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투쟁하는 우리 사랑하는 우리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유월의 노래 #듣기

당시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차량은 경적을 울리고, 보행자는 손수건을 흔드는 식으로 연대를 표시했다.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일부 대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시내버스에 시위구호를 적기도 했다.

북한은 6월 민주항쟁을 "6월인민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 남조선 파쇼정권과 미제의 간섭과 침략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항쟁"으로 왜곡하고 있다.

5. 대중매체에서

이걸 다룬 만화로는 최규석 100℃가 있다. 물이 99℃까지는 온도가 올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100℃가 되면 기체가 되는 것처럼, 6월 항쟁을 그때까지의 민주화운동이 계속 벌어지다가 임계점에 이른 것을 100℃에 비유한 제목(만화 내용에 나온다. 링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만화를 볼 수 있다).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 23회에서 다룬 바 있는데, 시위 장면을 자료화면으로 때운 채 5공 정권과 군부, 3김 등 야당 세력의 내부 움직임을 중점으로 다뤘고, 2005년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제5공화국 39~40회에서도 다루지만 전개가 빨라진 후반부에 나와서인지 비교적 간략하게 나온 편이다.[74]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 6월 항쟁을 바탕으로 한 대체역사 캠페인이 등장한다. 초기는 역사와 동일하지만 6월항쟁 중반부터 이때를 적화통일의 기회로 본 김일성이 대규모 간첩을 투입, 사회 혼란을 유발시킨다. 한편 충도완 전두환의 군사정권은 경찰로는 진압이 불가하자 군대를 투입, 전방부대를 진압에 동원하여 수천명의 사상자가 생기고[75]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시민이 체포된다. 그러는 사이 주한미군은 시위대의 공격을 우려해 영내에 고립된 상황에서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다. 전열이 흐트러진 국군과 주한미군은 북한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큰 타격을 입고 수시간만에 방어선이 무너진다. 플레이어는 낙동강 방어선을 끼고 부산 주변의 마지막 방어선에서 미군의 증원을 기다리다가 인천에 상륙하여 적의 허리를 잘라 대규모 포위로 전황을 뒤집는게 주 목표다. 6월항쟁을 배경으로 12.12 쿠데타, 5.18 광주항쟁, 6.25 전쟁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과 흡사한 흐름에서 제작진의 배경지식을 알수있는 부분. 관련영상

대체역사소설 < 10월의 폭풍>은 6월 항쟁의 끝무렵 김영삼을 모델로 한 야당 지도자가 암살당하면서 다시 시위가 불이 붙어 정국이 혼란해지고 정부의 진압도 과격해지는 가운데, 군 일각에서 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제5공화국을 종식시키면서 전두환은 스위스로 망명하고, 쿠데타 세력이 새로운 군사정권을 수립한다는 가정으로 전개된다. 이 군사정권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쿠데타에 반대해 서울올림픽을 보이콧 하려던 움직임도 달래고, 오히려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한 후 1990년대 초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와 김대중이 모델인 야당 지도자를 둘러싼 암살 음모가 소설의 본격적인 배경이다.

2011년에 공개된 허각의 앨범 중 그 노래를 틀 때마다의 시대적 배경이 이 시기로 추정된다.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독재타도를 외치는 점, 그리고 남주인공으로 나오는 유승호가 87학번 대학생인 점을 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2017년 12월에 개봉한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이희준, 김태리 주연의 영화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는 과정과 6월 항쟁의 발발과정을 다룬다.

2020년 4월 3일에 1987 그날이라는 만화가 출판되었다.

동년 6월 10일에 발매된 조광일 한국 (Korea)이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6.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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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년 6월 26일 부산직할시 남구 문현동 문현로터리에서 촬영되었다. [2] 1987년 7월 9일에 열린 이한열 열사의 장례 집회 사진이다. 좌측의 건물은 플라자호텔(現 더 플라자). 이 사진은 영화 1987의 포스터에도 사용된 적이 있다. [3] 시위는 3월부터 있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된 것은 6월 10일부터이다. [4]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진 원인이다. [출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343 [6] 범국민적 항쟁으로 번진 날의 날짜인 6월 10일. [7]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산정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는 1987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세계의 자유(부분 자유에서 자유로 올렸다)와 언론자유지수 등을 크게 상향하였으며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대통령을 풍자하는 용어인 " 물태우"가 유행하였고 노래나 영화와 같은 창작물에서도 점차 규제를 벗어나 여러 방면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하여간 이 시기 이후부터 어떻게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인지 다루는 전환(transition)의 문제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고 질적으로 향상시킬지 중점적으로 다루는 공고화(consolidation)의 문제로 민주주의 담론이 전환되었다. [8] 시기상으로는 6월 항쟁보다 앞선 시대이긴 하지만,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이 이 범주 내에 들어갈 수 있으며, 6월 항쟁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던 필리핀 에드사 혁명 동구권 몽골 동유럽 혁명, 대만, 태국, 중남미 남아공의 민주화 역시 이 범주에 포함된다. [9] 제1의 물결은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 등 절대왕정으로부터의 독립 혹은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서구권의 참정권 운동, 제2의 물결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60년대에 일어난 식민지들의 독립이다. 제4의 물결로 2010년대 초의 ' 아랍의 봄'을 들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아랍의 봄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이 매우 막장스럽게 전개되는 바람에 민주화의 열기가 급작스럽게 사그라들어 현 시점에 와서 공식적으로 칭하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10] 이름이 비슷하지만 직계 가족은 아니다. [11] 중앙일보, 경찰조사 받던 서울大生 숨져, 1987년 1월 16일 [12] 이와 관련된 고바우 영감 만화 일화가 있다. 정부에서 "박종철 군에게 아무런 고문도 가하지 않았는데 쇼크사했다."라고 발표하자 고바우 영감이 "그럼 왜 온 몸이 멍투성이였소?"라는 질문에 " 아뭏든(아무튼) 쇼크사했다."라고 반복하자. 갑자기 고바우 영감이 "억!"하고 안색이 파래지더니 "내 심장도 이상해진다."라고 하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원고로 냈는데 이게 정부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고바우 영감이 한 질문 중 "왜 온 몸이 멍투성이었느냐"란 대목이 걸렸던 것. 결국 신문에는 "그럼 왜…?"라는 것으로 대신 실린다. # [13] 가장 의구심이 강했던 사망 원인에 대한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이것만으로 정치적인 어떠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당시의 동아일보는 親 김대중 신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야당색이 강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의 6대 중앙일간지 중에서 비교적 야당 쪽에도 지면을 할애해서 유연하게 써주는 정도였지 지금의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이 진보 언론은 아니었다. [14] 교도소의 이부영에게서 사건 진상을 전달 받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으로 하여금 폭로하는 데 중간 다리 역할을 했던 김정남 전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은 <이 사람을 보라 - 인물로 보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우연 같은 사건의 연속으로 진상의 폭로가 가능했다고 적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본시오 빌라도가 잡혀온 예수를 보고 한 말이다. [15] 교도관-경교대를 위시한 교도소의 폭력적인 통제 분위기 속에서 교도관의 이런 모습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때의 교도관 중에는 심정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음으로 양으로 수감된 민주화운동가들의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저 교도관의 경우는 이부영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 써가며 예의를 갖췄다고. [16] 이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비밀에 부쳐지다가 모두 정년퇴직한 2012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처음 이부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귀뜸한 사람은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였으며, 문서를 외부로 운반한 사람은 교도관 한재동이었다. 이 두 사람은 2012년 박종철 25주기 추모식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17] 이부영의 증언에 의하면 한재동 교도관이 이부영이 적은 메모를 전 교도관 전병용을 만나 전달했고, 전병용이 다시 이를 김정남 전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아찔했던 건, 전병용은 이부영과 장기표를 숨겨준 일 때문에 수배를 받고 쫓기던 중에 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김정남에게 이를 전달하고 이틀 후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만약 전병용이 이를 전달하기 전에 체포되었다면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18]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5월 22일 폭로 기사를 1면 타이틀로 올린 이후 지속적으로 박종철 고문 치사 은폐와 그에 다른 수사, 인책 등에 대한 기사가 1면으로 올라왔으며 5월 말까지 지속됐다. [19] 당시 시대상을 그린 만화 100℃에서는 그때까지 심드렁해하고 방관하던 시민들이 학생들을 억지로 일으켜세워 끌고가던 경찰을 막고는 아무것도 안 한 애들에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고 들고 그걸 목격한 시위대 리더는 이길 수 있다며 숨죽여 눈물을 흘린다. [20] 본래는 45도 위로 세우고 발사해야 한다. 경찰은 "수평사(射)는 불가능하게 방아쇠장치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으나, 그 후 광주집회에서 이때 학생들이 노획한 장비로 진압경찰들을 향해 SY-44를 수평발사하며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전장치가 있었던 건 맞는데, 45도로 든 총기에 방아쇠를 살짝 당긴 상태로 내리면 격발이 가능했거나, 총기를 아예 눕혀 쏘거나, 이쑤시개로 안전장치를 무력화 하는 등의 방법이 경찰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1] 2016년 뉴스타파에서 이종창이 직접 언급한 바에 의하면, 1987년의 이종창 본인은 학생을 보호하는 역할이었고, 이한열이 쓰러져 있던 상황에서 전경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부축을 하여 학교 안으로 올라갔었고, 이상호는 부축한 선배들과 함께 이한열의 다리를 잡고 있던 상황에서, 선배들이 지도교수를 부르라 해서 부른 뒤에 세브란스병원으로 호송됐었다고 한다. [22]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에는 경찰과 더불어 사진기자들의 대열이 마련되어 있었다. 외신기자들은 이 구역을 연세 비치(Yonsei beach)라고 불렀고, 로이터 통신 파견 사진기자가 피격 직후 이한열 열사 앞에 달려가서 사진을 찍고 바로 빠져나왔다. 연세대 정문 앞은 최루탄으로 뿌옇게 변했었다. [23] 원 출처: <한국신문사진론> - 장충종 저. 눈빛. 1998. p70~71. [24] 기획부장을 만나 현찰 5만원을 주면서 빨리 하자고 해서 학교 전체를 뒤져 재료를 구했고, 학생 3명과 함께 밤새 제작을 했다고 한다. [25] 작가가 그때의 상황을 말하기를 처음에는 180장을 만들고, 본인은 작업실에서 잠시 잤다가 연세대로 달려갔는데,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이 가슴에 붙히고 구호를 외치면서 연대 백양로를 걸으면서 나오는 걸 보고 울컥했다고 한다. [26] 참고로 피격 전에는 안경과 마스크를 착용했다고 한다. 시위 당시 착용한 옷과 안경 등은 현재도 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27] 그때의 시위 중에는 투석전은 기본 사양에 화염병같이 위험한 시위도구가 자주 사용되었다. 그로 인해 너무 급진적인 시위대에 반감을 가진 것이지, 실제로 시위대를 빨갱이나 그런 것으로 오인했던 것은 아니다. 이런 묘사는 최규석 작가의 100도라는 만화에서 잘 표현된다. [28] 배우 신현준이 이때 연세대 체육학과 1학년이었는데, 신현준도 이때 이한열 병실 앞을 지키는 일원 중 한 명이었다고 나중에 증언했다. 이때 체격이 큰 체육학과생을 중심으로 병실 앞을 지켰다고 한다. [29] 이들 중 1950년대 이전 태생자들은 4.19 혁명을 접해본 세대이다. [30] 다만 이 당시에는 동안 열풍이 불기 훨씬 이전이라서 좀 성숙하게 잆었던 편인데다가 1986년부터 교복부활이 진행되었다지만, 학교장 재량에 맡기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1987년 시점에서 교복을 착용한 중고등학교는 10%가 채 되지 않아서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는 여전히 사복차림으로 등교했었다. 그래서 넥타이 부대라는 말이 있어도 교복부대라는 말이 안 나온 이유이기도 하며, 21세기 기준에서는 고등학생들과 성인간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모습이다. [31] 지금이야 잊혀진 경기가 되었지만 그때의 대통령배는 아시아에서 그나마 규모가 좀 되는 국제경기였다. 지금으로 치면 아시안게임이나 FIFA 공인 A매치 토너먼트가 벌어지는 경기장 바로 옆에서 독재정권이 최루탄을 쏴재끼는 초대형 나라 망신을 전국에 생중계한 것. 이 때문에 TV를 보던 마산시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바깥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게 자료 뉴스에서의 내용이다. [32]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느정도 규모있는 국제경기인데 관중석이 비어있는 건 윗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직장에서 강제로 참석하게 시키거나 협회에서 사람들을 보내는 식으로 해서 관중석을 채우곤 했는데, 당연하게도 푯값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계산했다. [33] 유럽에서는 68혁명으로 기독교의 영향력이 크게 약해지고 있었지만, 애초에 68혁명자체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했던 혁명이였다. [34] 유럽권이라고 해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1930년대부터 70년대 전반기를 거쳐 장기간의 독재정권기를 거쳤던 경험이 있었고, 중남미 국가들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칠레, 파나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에콰도르, 페루, 도미니카 등 대다수 국가에서 군사독재정권이 펼쳐졌지만 1970년대 말을 전후한 시기부터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시작하여 80년대 중반기에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국 민주화 운동을 강제진압할 경우에는 그대로 보이콧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 한편 남미의 독재는 정말 지독하다 할 정도였다. 대한민국은 북한과 차별화된 이미지를 자아내기 위해서였는지 모르되 최소한 외부세계에 대해 이미지 관리라도 하였지만 남미의 독재국가들은 성직자와 외국인이라 할 지라도 대놓고 죽일 정도로 대외적 이미지 관리도 하지 않았다. [35] 또한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IOC는 올림픽 개최지를 1988 올림픽 유치 과정 중 최종 탈락한 일본 나고야시로 변경할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였으며 나고야 외에 독일 베를린이나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또한 옵션으로 고려되었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첫 올림픽 개최는 2018년에나 이루어지거나, 이 사건이 스노우볼이 되어 아예 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재미있게도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때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기각 시 계엄령 선포로 인해 올림픽이 전면 취소될 뻔한 적이 있다. 물론 저 계엄령은 성공 가능성이 전무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36]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 때 한통 노조의 파업을 '국가전복행위'라 간주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을 투입하여 시위대를 체포하였고, 이에 국민들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이던 민자당에 대패를 안겨주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37] 그러나 한총련 5기 출범식 이후 1997년 6월 13일에 한총련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와서 '대선자금 공개 및 김영삼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농성을 벌이자 성당 측은 '치외법권 지대'가 아니므로 나가달라고 촉구했으며 농성이 장기화될 경우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요구했다. 이후 1998년 퇴출대상 은행 노조들의 천막농성, 1999년 서울지하철노조 파업, 2000년 한통노조 파업, 2016년 대구 희망원 사건 해결을 위해 장애계 인사들이 올 때도 이들을 성당에서 내모는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명동성당 스스로 보수 행보를 걸었다는 주장이 있고, 1989년 이후 천주교 사제들부터 '민주화에서 천주교의 역할을 이제 끝내고 종교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의견이 다수였고 90년대 들어서 김수환 추기경조차 동의하였을 정도로 천주교 내부에서는 민주화운동에서 천주교는 소임을 다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이후 임명된 서울대교구장들도 명동성당이 민주화는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행위들을 막기 시작했다. [38] 물론 한국 성공회는 영국국교회의 한국지부같은 성격이 아닌, 독립적인 관구로서 성공회 한국관구를 구성하고 있다. 다만, 그때는 독립관구로 독립하지 못해서 행정적으로 잉글랜드성공회 캔터베리관구 하에 서울교구 대전교구, 부산교구로 이루어져 있었다. [39] 출처: 이윤섭, <한국을 뒤흔든 10일 - 6월 항쟁>.(이북스펍). 2013 [40] 전국적으로 150만 명의 시민들이 나와있는 상태에서 천안문 사태 급의 대규모 진압을 벌이려고 한 것. 1980년 5월의 광주와 달리 1987년의 시위는 전국적이었고, 만약 실제로 계엄군을 투입하려 했다면 후술하다시피 군 내부에서 내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41] 제17보병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30기계화보병사단 등 서울 주변에 있는 부대로 유사시 시위 진압에 투입될 수 있는 부대. 유사시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계엄과 쿠데타 등과 관련된 일에 동원되기 때문에 충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89년부터 이 계획은 '상록수 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1999년부터 헌법이 정한 대통령 긴급명령과 계엄법에 의해 병력 이동을 제한하는 쪽으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42] 의창군은 1995년 도농통합으로 마산시 창원시에 분할 편입돼 폐지됐다. [43] 이태춘은 엿새 뒤인 6월 24일에 숨을 거두었다. [44] 그리고 범인들은 밝혀지지 않아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오히려 사건 전에 열린 원동4거리 집회 때 버스를 대신 몰던 야채상 허정길이 전경 살해자로 몰려 대전 보안부대로 끌려간 뒤 충청남도 경찰국, 대전경찰서 등지를 돌며 고문당한 끝에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고, 결국 법원에서 살인 및 살인미수, 집시법 위반죄를 적용받아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며 항소와 상고마저 기각되었다. 11년간의 수감 와중에도 억울함을 호소하며 교도소에 집필을 신청했으나 오히려 14곳이나 이감되었고 1997년 이후 재야단체를 중심으로 석방 요구가 제기되어 1998년 광복절 특사 때 사면되었다. 다만 모친은 그가 석방하기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고 석방 후에는 막노동을 하다 2000년 교통사고를 일으켜 2005년까지 또 복역했으며, 이후 화물트럭 운전 등으로 생계를 이어오며 2018년에는 31년 전 사건에 대해 법무부에 진정을 냈다.( 1999년 <참여사회> 기사, 2005년 <민중의소리> 기사, 2007년 <경향신문> 기사, 2018년 <오마이뉴스> 기사) [45] 그때만 해도 교통대는 조그마한 규모의 산업대라 시위규모 집계가 안된 듯하다. 규모가 커진건 2000년대에 들어서의 일이다. [46] 당시 신한민주당은 상도동계 동교동계가 모두 탈당하고 호헌조치에 찬성하는 세력만이 남아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였고, 이 지역 국회의원 이택희는 그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의 중간 배후 중 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 다음해 열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를 내지 못해 해산되었다. [47] 파일:제주신문1987.6.24.jpg
제주신문 1987년 6월 24일자.
[48] 현재는 회전교차로에서 네거리로 변경되었고 로터리 중앙의 2.28 기념탑은 두류공원으로 이전됐다. [49] 민정당 내에서도 체제수호를 주장하던 강경파였다. [50] 독재정권을 지원한 건 헨리 키신저와 같은 미국 정치인들이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과도하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냉전의 영향으로 미국은 독재 정권이 서는 한이 있더라도 사회주의 계열 정부가 서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다. 이로 인한 대표적인 피해자가 바로 살바도르 아옌데. [51] 이익적인 면으로만 봐도 전두환 정부를 막아야 했다. 민주화 운동 최전선에 있던 김대중, 김영삼이 무슨 무함마드 무르시마냥 반미운동가도 아니고 어차피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세력에게 권력을 몰아주기 보다는 여러 세력이 견제하도록 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었다. [52] 사실 그래도 한국 정도면 굉장히 온건하게 끝난 거다. 그래도 한국은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되고 어쨌든 간에 누가 집권하든 친미, 한미동맹 유지는 견지하지만 이란, 아프가니스탄, 베네수엘라, 쿠바, 이라크 같이 미국의 똥볼에 국민정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반미가 득세하는 국가로 탈바꿈하는 국가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국들과 달리 한국은 북중소라는 적성국이 있긴 했지만. [53] 뉴질랜드 럭비 대표팀이 남아공과 친선전을 하면서 스포츠 교류를 재개하자 이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반발하면서 뉴질랜드에 대한 제재를 요구했지만, 이를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무시하자 집단 불참했다. [54] 도널드 그레그와 함께 미 중앙정보국 동아시아 지부를 책임지던 요원인데, 칭다오 태생이라 유창한 중국어와 인맥을 바탕으로 대만 핵개발을 맡았던 장셴이 포섭 같은 미 중앙정보국의 동아시아 공작을 주도하던 인물이다. [55] 외교적 수사에서 '빌어먹을'이란 표현은 'Fuck'이나 'Shit'에 대응되는 수위의 표현으로, 최대한 순화를 해도 'Damn'이 그나마 비슷한 정도이다. 어느 쪽이던 F-word에 상응하는 최후통첩을 날린 것은 변함없다. [56] 한미연합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 겸임 [57] 저해라는 다소 차분한 표현을 쓰긴 했으나 그 시기의 한미관계와 주변 정세를 보면 실제로는 상당히 강한 수준의 압박이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에게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소련을 견제하고 동시에 3차세계대전 발발시 교두보가 될 지역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최전방이었고, 그랬기에 외교를 제외한 한국의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전까지의 어지간한 민주화 관련 이슈에는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미국이 단순히 외교적 수사인 유감이나 우회적 언급이 아닌 직접적으로 한미동맹을 언급하며 저해라는 표현을 쓴 건은, 이번 사태까지 군을 동원한 무력진압으로 또 다시 1980년의 광주와 같은 대규모 유혈 사태가 발생할 경우 더이상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미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전두환 정권을 날려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에 가깝다. [58] 무려 100만여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였고, 발인 행렬이 출발한 연세대학교의 신촌거리부터 종로 일대까지 행렬로 가득 채워졌다. 사진의 배경은 연세대학교 정문 앞 삼거리이다. [59]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던 곳이다. [60]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던 곳으로 1969년부터 거주하였다. [61] 원 출처: <스포츠와 정치> - 고광헌 저. 푸른나무. 1988. p75. [62] 주변 보좌관들은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사진처럼 손을 맞잡는 경우는 늘상 있는 일이었고 기쁜 일에는 서로 얼싸안기를 수차례, 길을 가다가 서로 멀리서 상대를 발견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상대의 앞으로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했다고 한다. 두 지도자가 상대의 보좌관들을 잠깐 마주칠 때에도 불러서 바빠도 식사는 챙기고 다니라면서 용돈을 쥐어주거나 진행하고 있는 일의 안부를 가볍게 물어보며 격려한 일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서로 호감으로 뭉친 한 패밀리급. 이런 절친 오브 절친이었으나 결국 갈라서버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할 때가 되어서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입원실로 찾아와 화해의 제스처를 남겼다. # [63] 두 사진을 보면 그들의 측근들의 밝은 표정(좌)과 어두운 표정(우)이 서로 대비되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64] 충북에서는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득표율 3위를 기록했다. [65] 다만 1987년 7~9월경에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다수의 노조가 결성되기는 했다. [66] 6월 항쟁 이후 운동권에서 말하는 민주화 운동이 바로 이런 시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67] 저 사진이 화제가 된 후 매년 6월마다 인터뷰를 하는 등 유명해졌으나, 지나친 정치적 관심이 부담스러워 가게를 닫았고 현재는 건물도 사라졌다. [68] 독재정권의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자신들의 선거캠페인에 이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여, 예를 들어 87년 대선 당시 노씨가 가게를 방문해 사진을 같이 찍고, 대선 캠프 등에서 음료 부스의 이름을 "오늘은 기쁜날"로 차용하는 등 태세전환 및 이미지 변신에 적극 활용하였다. [69] 보도사진연감 1988년판에는 "쏘지 마시오."라는 제목으로 기재되어 있다. [70] 문현교차로는 반 전두환 시위의 단골 장소여서 부산시민들끼리는 문현동 바로 북쪽에 붙어있는 전포동을 두고 두환기한 네라서 전포동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71] 간혹 위 사진을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사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의 대표 사진으로는 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유명하다. [72] 1981년 전두환 정부 출범 이후 MBC와 분리되어 정수장학회에서 벗어나 문공부 감독 하의 사단법인으로 있었다. 민주화 이후 1990년부터 한국화약(現 한화그룹)에 처분하면서 주식회사로 바뀌었고, 이후 IMF로 구조조정에 따라 독립, 현재의 경향신문이 된 것. 참고로 이승만 정부 때는 반정부 성향이라서 폐간 조치까지 당했었다. [73] 당시 표기상 한성(汉城, Hànchéng). 당시에는 자신들이 치를 아시안게임 전 대회를 유치했던 한국에 대한 관심과 남한의 혼란상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혼합되어 있었다. [74] 전반부의 5.18 민주화운동이 5화 분량인데, 후반부의 1987년 1년 간이 4화 분량이다. [75] 계속해서 몰려드는 시위대를 보고 패닉에 빠진 한 현장 지휘관이 독단적으로 발포 명령을 내리고, 그 총성을 기점으로 다른 부대들도 덩달아 사격하기 시작하면서 수천명의 사상자가 나온다는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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