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5:08:44

살바도르 아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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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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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공화국 제28대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Salvador Allende
파일:Salvador Allende M.D.jpg
<colbgcolor=#d52b1e><colcolor=#ffffff> 본명 살바도르 기예르모 아옌데 고센스
Salvador Guillermo Allende Gossens
출생 1908년 6월 26일
칠레 발파라이소
사망 1973년 9월 11일 (향년 65세)
칠레 산티아고 라 모네다 궁전
국적
[[칠레|]][[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28대 대통령
1970년 11월 3일 ~ 1973년 9월 11일
서명 파일:살바도르 아옌데 서명.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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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52b1e><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살바도르 아옌데 카스트로
어머니 로라 고센스 우리베
형제자매 6명
배우자 오르텐시아 부시 (1940년 9월 16일 결혼)
자녀 장녀 카르멘 파스 (1941년생)
차녀 베아트리스 아옌데 부시 (1943년 9월 8일생, 1977년 10월 11일 사망[2])
삼녀 이사벨 아옌데 부시 (1945년 1월 18일생)[3]
친척 오촌 조카 이사벨 아옌데
신장 177cm[4]
학력 칠레 대학교 의과대학 ( 의학 / 학사)
직업 의사, 정치인
병역 사병 복무
종교 무종교( 불가지론)
정당 [[칠레 사회당|
칠레 사회당
]]
의원 선수 4(상원)
1(하원)
경력 칠레 대학교 학생연맹 부회장
카를로스 반 부렌 병원 전공의
오라테스의 집[5] 의사 겸 병리학자
칠레 사회당 창당발기인
발파라이소 의료협회 조사관
발파라이소 의학협회 이사
팬아메리칸 매디컬 컨퍼런스 의장
인민전선 발파라이소 지역위원장
칠레 사회당 발파라이소지부 회장
칠레 공화국 하원의원
제26대 보건복지사회지원부 장관 (1939년 8월 28일 ~ 1942년 4월 2일)
근로자보험기금 부사장
칠레 사회당 사무총장
칠레 공화국 상원의원
상원 위생 보건 및 공공지원위원회 위원장
칠레 의사 노동조합 총장
칠레 공화국 상원 부의장 (1951년 7월 3일 ~ 1953년 5월 26일)
제24대 칠레 공화국 상원의장 (1966년 12월 27일 ~ 1969년 5월 15일)
제28대 칠레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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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정계 진출2.3. 대통령 당선2.4. 개혁 정책2.5. 미국의 공작2.6.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
3. 미디어4. 평가
4.1. 좌파적 견해4.2. 우파적 견해4.3. 총론
5. 이야기거리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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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SalvadorAllende2.jpg
TENGO FE EN CHILE Y SU DESTINO.[6]
나는 칠레와 그 운명을 믿습니다.
칠레 의사 출신 정치인, 제28대 대통령.

칠레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다.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해 양극화를 해소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쿠데타가 일어나자 대통령궁에서 직접 항전하다 자결하여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1908년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아옌데의 집안은 칠레의 정치 명문가[7]였고 아옌데 자신도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어린 시절 집 근처에 살던 구두 수선공에게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 아옌데는 부와 권력에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럼에도 발파라이소에서의 삶의 현실적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후 아옌데는 칠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아옌데는 입학을 1년 미루고 나서 사병으로 자원입대 하여 군복무를 마쳤다.[8] 의학도의 길을 걸으면서 칠레 민중들이 처한 현실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등이 집필한 사회주의 서적들을 읽으면서 사회주의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2.2. 정계 진출

칠레에는 합법적 활동을 인정받은 공산당이 이미 있었지만 아옌데는 공산당보다는 사회주의 정당이 더 칠레의 현실에 맞다고 판단하고 1933년 칠레의 사회주의 정당인 칠레 사회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1937년 칠레 사회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에 중도파와 좌파정당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의사 출신인 탓에 1938년부터 42년까지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에 해당하는 후생장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속해있던 인민전선 정부는 '통치는 교육이다'란 구호를 내세워 교육제도 개선 확충을 밀어 붙였고, 약 38만 5,000명의 어린이가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1945년부터 4번 내리 연속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의회 연설에서 밝혔듯이 아옌데는 평화적 방식을 통해 혁명적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집권 기간 내내 보수정당인 기독민주당과의 연대를 집요하게 시도했었다. 1952년과 1958년 그리고 1964년까지 세번이나 대선에 출마했지만 중도파가 따로 떨어져나갔던데다가 거기에 더해 공산당과 사회당의 분열, 그리고 보수진영의 격렬한 방해공작으로 연달아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아옌데는 1952년 대선에 사회당과 공산당이 함께한 ‘인민전선’의 이름으로 나섰고, 1958년과 1964년에는 사회당, 공산당 등이 모여 결성한 ‘인민행동전선’의 대통령 후보였다.

2.3. 대통령 당선

1970년 대선을 앞두고 칠레 사회당과 공산당은 더 이상 좌파진영이 분열해서는 대선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칠레 공산당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려 했으나 네루다는 대선출마를 포기하고 사회당과의 연합을 주장했다. 결국 사회당과 공산당은 연합하여 인민연합을 결성하고 인민연합의 대선후보로 아옌데를 내세우게 되었다. 재밌는 것은 아옌데가 정작 자기 당인 사회당 안에선 별로 인기가 없었고 공산당이 더 아옌데를 밀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불법으로 지정되어 활동이 어려웠을 시절 아옌데가 사회당원으로서 공산당의 권리를 옹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칠레 사회당은 '소련의 조종을 받지 않는 사회주의 정당'이란 것을 내세워 공산당과 자주 대립했는데 아옌데가 여기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치열했던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인민연합의 아옌데가 보수진영의 후보로 출마한 호르헤 알레산드리(Jorge Alessandri) 전 대통령을 2%p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1위로 당선했다. 그러나 아옌데나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이나 과반득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의회가 상위 1, 2위 후보 중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되어있었다. 의회가 아옌데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편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확산을 걱정하던 미국은 반미 사회주의 성향인 아옌데의 당선을 당혹스러워하며 칠레 내정에 간섭해 정치를 뒤흔들려 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의 정치적 중립과 정치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고수하던 레네 슈나이더(René Schneider) 칠레군 총사령관을 납치하려는 시도까지 벌였다(!!). 군부 쿠데타 억제의 보루였던 슈나이더 총사령관은 납치되진 않았으나, 자신을 납치하려 한 범인들이 쏜 총탄에 부상을 입고 3일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아옌데는 "그 총에는 내가 맞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르네 슈나이더 납치미수 사건에 과연 CIA가 개입했는지에 대해서 CIA는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정황상 개입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후에 헨리 키신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자신이 CIA의 그런 계획을 막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키신저의 이런 해명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2.4. 개혁 정책

아옌데는 자신과 비슷한 정강을 내세운 칠레 기독교민주당과 공조하여 1970년 9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11월 3일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아옌데의 경쟁자였던 호르헤 알레산드리는 34.9%를 기록했는데, 아옌데는 이것보다 2% 높은 득표율인 36.6%의 득표율을 올렸다. 대한민국은 칠레의 친북화의 우려 속에 11월 4일 산티아고의 대성당에서 열린 아옌데의 취임식에 대통령 특사로 백두진 의원을 파견했다. # 또한 인민연합 집권 이후 처음 실시된 1971년 4월 지방선거에서도 아옌데 정부는 승리를 거뒀다.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전략적 목표는 다음과 같다.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전략적 목표는 첫째, 민족의 자주독립 완수(외세의 지배정책으로부터 진정한 독립, 외국독접의 국유화), 둘째, 민주주의의 심화(민중의 국가권력 수립, 만인에게 동등한 기회부여), 세째, 사회주의의 물적 기초의 확립 등으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목표설정에 따라 칠레혁명의 기본동력과 대상을 살펴보면, 먼저 혁명의 대상은 ① 제국주의 부르조아지, ② 쁘띠 부르조아지, ③ 중소부르조아지 등 주적과 연결되지 않는 모든 계급의 동맹으로 편성된다. 이상은 전략적 목표설정에 따른 전략적 동력과 대상에 관한 것이었다.
여현덕, 『통일전선과 민주혁명 2 』, 사계절, 1988, p.320

아옌데는 당선된 직후 개헌을 제안했다. 공무원과 정치인에 대한 주민소환제도를 도입하기로 했고, 노동자 조직과 시민운동 진영에도 정치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기로 했다. 국방 분야에서는 칠레 민중을 중심에 놓은 새로운 주권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일련의 사회개혁 프로그램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남녀 동일임금제, 전국민 생활임금제, 사회보장제도 확대, 전 국민 대상 예방치료 의료보장 등이 있었다. 대규모 신규주택 건설 사업도 계획했으며 민간은 물론 민관 합작회사도 건설에 참여하도록 했다. 또한 차별을 당해온 여성과 혼외 자식에게도 평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9] 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 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뼈대에는 칠레 경제를 3개 부문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으로 나눠,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긴밀히 연계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조처는 구리,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산업과 금융, 무역, 그리고 칠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과점 부문들의 국유화 정책이었다.[10]

예나 지금이나 칠레 경제에서 구리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데 대부분의 구리 광산들은 다국적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옌데는 다국적 기업들이 소유한 탄광, 구리광산들과 대형 은행들의 자산을 국유화했고,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우유를 배급하는 정책도 추진했다.[11] 다른 한편으로 다국적 기업과 미국, 부유층의 대토지 소유를 규제하고자 사유지의 4분의 1 내지 5분의 1을 국유화하는 토지개혁도 추진했다. 또한 컴퓨터 계획경제에 활용한 사이버신 계획을 수립하였다.

아옌데 정부의 1971년 경제성장률은 국유화 정책의 결과 9.4%를 찍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국유화 정책으로 일궈낸 단기적인 성과였으며 그마저 얼마 안 가 약빨이 떨어졌다. 아옌데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개혁은 이미 도시화율이 75%를 찍고[12] 농업과 구리 광업, 외국의 투자에 의존하던 칠레의 연약한 경제구조를 도외시한 채로 진행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최초의 경제위기 징후가 나타난 것은 1971년 말이었다. 이때부터 시장의 품귀 현상과 암시장 출현이 일어났다. 재정적자는 1970년 GDP의 3.5%에서 1971년 9.8%로 급증했다. 외환보유고의 추이, 인플레이션, 무역수지 등 경제의 거의 모든 지표에서 적신호가 켜졌다. 바로 다음해인 1972년에는 경제성장률이 -1.0%를 찍었고, 1973년에는 -5%로 더욱 악화되었다.

2.5. 미국의 공작

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 정권을 못마땅하게 여긴 판국에 아옌데의 반미정책과[13] 다국적 기업에 대한 강제적인 국유화 정책에 빡쳐서[14] 칠레 경제를 고사시키는 작전을 썼다.

1970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을 겨냥한 흑색선전에 80만~100만 달러 가량의 자금을 쏟아부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과 별개로 아옌데가 사회주의 정책을 펼쳐 미국계 기업의 자산들을 무상몰수하자,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칠레 군부에 자금과 무기 지원, 반 인민연합 선전을 포함한 다양한 경로로 지원했다. 심지어 눈을 가린 죄수들이 총살당하는 장면이나 소련의 탱크가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진주하는 모습 등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언론을 통해 전파됐다.[15]

2.6.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16]

파일:t1larg.chilean.allende.suicide.gi.jpg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함께한 아옌데. 임명 직후에 찍은 사진이다.
파일:external/www.memoriaviva.com/allende_salvador1.jpg
아옌데의 경호원, 이른바 "개인적인 친구들"[17]

하지만 미국의 닉슨 정부가 원했던 것과는 달리 아옌데 정권은 좌파진영의 내분과 보수진영, 미국의 노골적인 압박 속에서도 최소한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고, 1973년 총선에서 대통령 불신임을 여유있게 막아낼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상원 50석 중 20석, 하원 150석 중 62석). 물론 표면적으로는 기독교민주당을 비롯한 우파세력들이 득표율 57%를 차지했던지라 1975년 대선을 노릴 수 있었지만 우파진영에서는 아옌데 정부 지지율 하락세를 보며 개헌선 확보를 목표로 잡았기 때문에[18] 보수파는 충격을 받았고, 내분에 휩싸였다. 물가상승률이 급속히 오르고 있는 중임에도 의석이 오히려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것은 선거가 아니라 군사쿠데타였다. 1973년 6월 22일 1차 쿠데타는 군부의 중립을 강조하는 카를로스 프라츠 육군참모총장 겸 내무부장관[19]에 의해 진압당했다. 프라츠는 후임 육참총장으로 당시 육참차장이었던 피노체트를 임명했고 아옌데는 이를 승인했는데 결과적으로 아옌데는 자기 사형선고문에 지장을 찍은 셈이 되었다. 아옌데를 의심의 눈길로 보던 닉슨 대통령은 당시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를 통해 칠레 쿠데타에 1,000만 달러를 지원했고[20] 칠레 군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쿠데타를 감행하였다.[21]

아옌데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고별을 고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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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triotas, esta será seguramente la última oportunidad en que me pueda dirigir a ustedes. Mis palabras no tienen amargura sino decepción, y serán ellas el castigo moral para los que han traicionado el juramento que hicieran. Ante estos hechos sólo me cabe decirle a los Trabajadores yo no voy a renunciar. Colocado en un tránsito histórico, pagaré con mi vida la lealtad del Pueblo. Y les digo que tengo la certeza, que la semilla que entregáramos a la conciencia digna de miles y miles de chilenos no podrá ser cegada definitivamente. Tienen la fuerza, podrán avasallarnos, pero no se detienen los procesos sociales ni con el crimen... ni con la fuerza. La historia es nuestra y la hacen los pueblos.

Trabajadores de mi Patria, quiero agradecerles la lealtad que siempre tuvieron, la confianza que depositaron en un hombre que sólo fue intérprete de grandes anhelos de justicia, y empeñó su palabra en que respetaría la Constitución y la Ley y así lo hizo. En este momento definitivo, el último mensaje lo dirijo a ustedes, quiero que aprovechen la lección.

Me dirijo sobre todo, a la modesta mujer de nuestra tierra, a la campesina que creyó en nosotros, a la obrera que trabajó más, a la madre que supo de nuestra preocupación por los niños. Me dirijo a los profesionales de la Patria, a los profesionales patriotas, a los que hace días estuvieron trabajando contra la sedición auspiciada por los colegios profesionales, colegios de clase para defender también las ventajas que una sociedad capitalista le da a unos pocos.

Me dirijo a la juventud, a aquellos que cantaron, entregaron su alegría y su espíritu de lucha. Me dirijo al hombre de Chile, al obrero, al campesino, al intelectual, a aquellos que serán perseguidos; Radio Magallanes será acallada, y el metal tranquilo de mi voz no llegara a ustedes. No importa. Lo seguirán oyendo. Siempre estaré junto a ustedes, por lo menos mi recuerdo será el de un hombre digno, que fue leal a la lealtad de sus Trabajadores. El Pueblo debe defenderse pero no sacrificarse, el Pueblo no debe dejarse arrasar ni acribillar, pero tampoco puede humillarse.

¡Trabajadores de mi Patria! Tengo fe en Chile y su destino. Superarán otros hombres este momento gris y amargo, donde la traición pretende imponerse. Sigan ustedes sabiendo que, mucho más temprano que tarde, de nuevo abrirán las grandes alamedas por donde pase el hombre libre para construir una sociedad mejor.

¡Viva Chile! ¡Viva El Pueblo! ¡Vivan los Trabajadores!

Estas son mis últimas palabras, y tengo la certeza de que mi sacrificio no será en vano. Tengo la certeza de que por lo menos será una lección moral que castigara la felonía, la cobardía y la traición.

번역본[22]:
동포들이여, 공군이 이미 <라디오 포르탈레스>와 <라디오 코르포라시온>의 송신탑을 폭격했습니다. 슬프다기보다는 차라리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배반한 군부에 도덕적 단죄가 뒤따르기를 바랍니다. 칠레의 병사들, 허울뿐인 지휘관들, 해군 참모총장을 참칭하고 나선 메리노 제독, 어제까지만 해도 정부에 대한 신의와 충성을 다짐하고도 쿠데타군에 가담해 경찰총장 자리를 차지한 멘도사 장군의 행태는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습니다. 이런 비열한 행태를 마주하면서 제가 반역자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나는 결코 사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맞은 지금 저는 인민들의 충정을 제 목숨으로 보답하려 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들의 존엄한 의식 위에 뿌린 씨앗은 결코 파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들이 무력을 장악했으니 우리를 짓밟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회적 변혁의 과정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범죄 행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며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민입니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그동안 보내주신 변치 않는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정의를 갈구하는 여러분의 의지를 옮기는 통역 구실에 불과한 제게 보내주신 무한한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께 헌법과 법률을 준수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헌법과 법률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연설을 하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분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을 교훈으로 삼아주십시오. 반동적인 무리들이 외국 자본과 제국주의와 결탁해, 헌정 질서를 존중해 온 군의 전통을 깰 수 있는 분위기를 조장했습니다. 시나이데르 장군과 아라야 사령관은 칠레군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희생됐습니다. 저들은 지금 집 안에 숨어 자기들의 이익과 특권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군부와 권력을 찬탈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국의 겸허한 여성 동지들께 특별한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인민연합 정부를 믿어주신 여성 농민들과, 누구보다 힘써 일하신 여성 노동자들, 그리고 인민연합의 보육 정책을 적극 이해해 주신 어머니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땅의 모든 애국적 전문 직업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전문가 집단 내부에서 터져나온 온갖 선동, 자본주의 사회가 제공하는 수많은 특권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된 계급 집단에 맞서 올곧게 투쟁해 왔습니다.

노래와 흥겨움, 열정으로 투쟁을 지원했던 청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칠레의 모든 남성에게도 안타까운 인사를 전합니다.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 모두, 앞으로 파시즘 치하에서 탄압을 당하게 될 겁니다. 파시즘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러가 횡행하고, 교량이 파괴되고, 철로가 끊기고,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이 파괴돼도 이를 막아야 할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 역시 똑같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서는 안 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겁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23]
내용

이 연설은 아옌데의 아내 오르텐시아와 세 딸, 연인이자 통역 겸 비서인 미레야 콘트레라스 등 40명 남짓한 이들이 지켜봤다. 이 연설에 감동받은 이들 대다수가 눈물을 흘렸고, 아옌데의 측근들과 아내 세 딸, 동지들이 그를 끌어안았다. 연설 이후 아옌데는 자신의 아내랑 딸들을 포함하여 총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과 정부 각 부처 각료를 비롯한 동지들을 대통령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향해 돌격해 오는 반란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고, 심지어 탱크에 맞서 휴대형 대전차포를 발사하기 까지 했다. 이러한 교전 끝에 대통령궁 방어 작전에 동참했던 아우구스토 올리바레스가 부상을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자 휴전 협상에 나서는 척 하면서 자신들의 동료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 문을 잠근 채 예전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로 받은 AK-47[24]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

이후 그의 죽음은 영웅적인 항전 끝에 사살 당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 낭설이 처음으로 나돌게 된 원인은 카스트로가 했던 아옌데 추모 연설이다. 이후로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것이 사실처럼 떠돌게 되었는데 2011년 7월 재부검 결과 자살로 결론났다. 관련 기사 다만 그 가족들은 이미 그 전부터 정부 발표대로 그가 자결했으리라고 생각했기에 동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차피 영웅적으로 싸우다 죽은 것은 마찬가지이기도 하고 말이다. 시신은 암매장되었다가 1990년 정식으로 매장되었다.

오늘날 아옌데는 칠레에서 가장 위대한 칠레인 1위에 선정되기도 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정치인인 만큼 진영에 따라 평가가 나뉘는 편이다. 이는 군부 세력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다시 집권에 성공하기까지 했던 만큼 꽤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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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옌데의 안경 일부[25]

3. 미디어

  •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에서 제목을 따온 1975년 프랑스 영화이다. 1973년에 쿠데타가 일어난 걸 생각하면 아무리 프랑스라고 해도 정말 빨리 만들어진 편이다. 영화는 군사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피노체트가 독재자가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여기에선 아옌데가 반란군과의 항전(교전)중 사살되고 군사정권이 자살로 조작한 걸로 묘사된다. 국내에서는 전두환이 5공 청문회에 출석하기 하루 전인 1989년 12월 30일 토요일 밤에 KBS 토요명화에서 이 영화를 방영했다. 이 영화도 현재 저작권이 풀려 있는지 유튜브에서 한글자막본을 무료로 볼 수 있다.
  • 아옌데의 시간
    1970년 9월부터 1973년 9월까지 약 3년간의 아옌데 집권 시기를 다룬 그래픽 노블 만화다. 2020년 국내에도 번역되어 출간됐다. 관련링크.

(관련영상)

4. 평가

4.1. 좌파적 견해

아옌데는 칠레 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혁명적 변혁에 평생을 바쳤다. 일부 오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 목적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아옌데는 삶을 통해 정치적 타협이 꼭 개량주의는 아니라는 점을,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존 체제에 기반을 둔 개혁은, 유혈과 폭력적 변화를 효과적으로 피하면서도 충분히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뤄내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20
아옌데는 인민 전선 정부 집권 기간 동안 배출된 한 세대의 정치 지도자 가운데 좌파 진영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리고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인민 전선 시기를 경험한 정치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세계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고,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효율적인 칠레 좌파를 형성했다. 아옌데가 이들 중 가장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치 체제 전반에 대한 지식과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전투적인 자세, 인민을 향한 깊은 열정, 교육할 줄 아는 능력, 재능 있는 인물들을 모아내는 능력, 수십 년 공직 생활을 통해 형성된 공적인 품성까지. 여기에 더해 아옌데는 주어진 정세를 읽고, 그에 따른 전략 전술을 세우는 능력까지 탁월했다. 상황의 핵심을 재빨리 파악하고, 주변 동지들보다 더 멀리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 이는 아옌데가 일련의 특정 정치사상과 지도 이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옌데가 보편적인 정치 이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아옌데 특유의 이념, 곧 '아옌데주의'의 원칙은 분명히 존재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257
칠레혁명의 과정에서 보여준 이른바 칠레의 길은 총이 아닌 투표에 의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실현한, 그러나 곧 투표 아닌 총에 의해 그것이 좌절된 아주 희귀한 선례였다. 그러나 선거를 통하여 또 의회제도를 통하여 시도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이행의 실험이 성립된 지 3년만에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의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1973년 9월 11일 칠레 산티아고의 모네다궁이 군사쿠데타에 의해 공습을 받음으로써 칠레 3년간의 실험은 막을 내렸다. 칠레의 실험이 좌절된 후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사회주의 이행을 둘러싼 많은 논쟁들이 제기되었다.
여현덕 지음, 박현채·김홍명 엮음옮김, 『통일전선과 민주혁명 2 』, 사계절, 1988, p.329

아옌데는 오늘날 칠레 좌파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한명으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급진적인 측에서는 그가 칠레를 지나칠 정도로 온건하게 개혁하려고 한 것이 문제라는 주장도 하며, 또한 그렇게 온건파 컨셉을 잡았음에도 그가 기득권층과 미국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는 군부의 경계를 풀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경계를 소홀히 해 결과적으로 본인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는 지적도 있다.[26]

한편, 아옌데가 권력 기반으로 온건 좌파 성향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을 고려했지만, 아옌데 정권이 광산과 은행의 국유화 이후[27] 다국적 기업에 정책 협조를 구했던 점 등으로 당시 칠레의 온건좌파와 어긋나는 행보를 보이며 지지기반을 잃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MIR(혁명 좌파 운동)[28] 등 더 좌파적인 시각의 견해는, 그가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추구했지만, 실제로 사회주의 정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충돌을 조율할 시점이 오면 언제나 일관되게 자유주의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비난도 한다.[29] 또한 아옌데는 사회주의 세력이 과격하게 움직이면(무토지 농민의 토지 점거 등) 법치를 주장하며 막고 적극적으로 분쇄한 데 반해, 우익 세력이 과격하게 움직이면 강경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언제나 협상과 양보로 일관했다고 해석한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우익 세력은 시간이 갈수록 아옌데 정권에 도전할 용기를 얻었지만 사회주의-노동계열의 조직들은 갈수록 연계가 분쇄되었다고 평가한다.

여하간, 아옌데 정권에 당시 칠레의 급진적인 노동세력은 큰 실망과 좌절을 느꼈다. 산티아고의 가장 전투적인 공장 가운데 하나인 엑스수마르의 한 노동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나는 사장들에 대한 양보 조처가 정부의 우경화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정부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있었다. 대중의 지지를 구하고 애초의 프로그램을 시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사실상 그럴 뜻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대중은 주변으로 밀려났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자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지금 우익은 축제 분위기일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라디오 방송만 들어 봐도 의기양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정권을 따돌리고 민중 조직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MIR 등의 주장에 따르면,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1973년 8월 아옌데 내각이 통과시킨 무기통제법은 군대가 치안유지를 빌미로 대중조직들에게 선제공격을 할 수 있도록 법적인 보증을 서준 꼴이었다. 물론 이 법이 만들어진 필요는 총을 들고 설쳐대는 극우 깡패와 극좌 혁명주의자들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가 이 무기통제법을 등에 업고 움직인다고 해도 합법적인 틀을 유지하려면 대통령의 계엄령이 필요한데, 아옌데는 이걸 승인해줬다는 것. 그리고 다음 달인 9월이 되자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대통령궁을 향하여 우익과 군부는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는 해석이다. 그렇기에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은 아옌데를 배신자이자 실패하고 경계해야할 모델로 여긴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급진 좌파들의 불신은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 1914년~1918년의 독일 정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꽤나 연식이 있는 정서이다.[30]

4.2. 우파적 견해

미국의 개입이 확실한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솔직히 그렇게 무너진 것은 어찌보면 아옌데 그 자신에겐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옌데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실패한 사회주의 정치인이 아니라 미국에 저항하다 피살된 사회주의의 성자로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히 말해 아옌데가 좌파에게 이렇게 각광받는 이유는 그의 스펙터클한 죽음 덕분이지, 뭔가 대단한 업적을 남겨서가 아니다.

사실 아옌데가 집권하기 전 칠레는 선진국은 아닐지라도 중진국은 되었다. 1970년 당시 칠레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1.1달러로 지금 기준으로 가난해보이지만 이건 화폐 가치의 차이 때문이고 당대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이미 중진국 수준의 국가였다. 1960년 기준으로는 일본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았고[31] 이후로 경제성장이 쳐져서 그렇지 1970년 기준으로도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비슷한 수준의 국민소득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는 장기간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으로 제3세계 국가 가운데서 산업화가 잘 이루어진 편인 멕시코도 1인당 GDP가 1970년 기준으로 칠레에게 밀린 706.3달러였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아옌데가 집권한 1970년부터 1973년까지 칠레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0.9%로, 전임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대통령의 4.6%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옌데 집권기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해는 1971년으로 이해 9.4%를 기록했는데, 아옌데는 1970년 11월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일반적으로 큰 확대재정을 추구하는 경우 단기적으로는 경제성장률이 높아지게 되나, 장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인해 재정건전성의 훼손이 되는 등 경제적 비용을 발생시키게 되는데, 1971년 칠레의 경제성장의 단기적 상승은 이러한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단순히 큰 확장재정 뿐만 아니라 경제구조의 급격한 사회주의적 전환을 추구하였고, 이러한 급진성은 이후 기업의 극도의 비협조성을 낳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를 반영하듯 칠레의 경제성장은 1년차 이후 바로 급격히 낮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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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부터 1977년까지 칠레의 실질임금 변화. 주황색 선 사이가 아옌데의 집권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칠레의 실질임금 수준은 1971년 1분기를 제외하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1970년 3분기를 100으로 할 때 아옌데 집권 직후 칠레의 실질임금은 1971년 1분기 120 언저리를 기록했으나 그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72년 3분기에는 1970년 3분기 이전으로 실질임금이 줄었으며 아옌데 몰락 직전에는 30 언저리까지 내려갔다.[32] 칠레의 실질임금이 가파르게 감소한데는 칠레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의 수출 감소로 인한 달러 부족 등을 이유로 들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옌데 정부의 무리한 최저임금 인상과 가격 통제, 국유화 시도에 있다.

1971년 초 아옌데 정부는 블루칼라 노동자와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각각 37~41%, 8~10% 인상하면서도 상품 가격은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다. 1972년에도 블루칼라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27% 더 인상했고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임금을 인플레이션에 연동했다. 이때 경제성장을 통해 임금이 올라가는게 아니라 당시 칠레의 통화였던 칠레 에스쿠도를 마구 찍어내서 노동자의 실질 최저임금을 인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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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칠레 칼부코(Calbuco)의 한 상점 앞에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고 있다.

그 취지는 노동자의 구매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기업이 시장에 상품을 내놓지 않아 시장에 상품이 희귀해지고 암시장이 커지는 역효과를 낳았다. 사치재만 사라진게 아니라 , , 설탕, 밀가루 등 서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품 자체가 시장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시중에 푸는 돈은 늘어나는데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이 줄어들다보니 1971년만 해도 22.1%였던 인플레이션이 1972년 163.4%, 1973년 508%로 급증했다. 품귀 현상과 초인플레이션으로 노동자의 구매력을 끌어올린다는 본래 목적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즉, 아옌데 정권의 경제 실패의 원인중 하나로 꼽히는 기업가의 비협조성은 근본적으로 아옌데 정권에게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무리한 국유화 정책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국유화를 한다는 것은 기업 구입에 따른 재원 소모 및 경영진 교체에 따른 경영 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이 국유화한 기업들은 낙하산 인사가 경영을 맡으면서 생산성이 극도로 감소했는데, 실제로 칠레의 구리 광산들은 이 시기에 국유화가 되었어도 경영진들의 관리가 워낙 엉망이어서 증산이 아니라 감산 일변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원조성 구리 주문조차 제대로 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아옌데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의 또 다른 요인으로 꼽히는 미국의 간섭 역시 이론의 여지가 있다. 우선, 아옌데 정권이 외국의 원조를 받지 못하게 된 데에는 아옌데 정권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아옌데는 기존 영국계나 미국계 회사들을 국유화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초과이익론(Excess profit thesis)에 따라 아예 보상을 하지 않고 몰수했다. 그 동안 외국 회사들이 칠레에서 '과도하게' 이익을 가졌으니 보상 없이 국유화를 해도 된다는 논리였다. 게다가 1972년 6월 17일 아옌데 정부는 외국의 채권자에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상의 디폴트 선언을 했다. 즉, 외국계 기업을 보상 없이 몰수함에 따라 그들이 칠레에 쏟은 투자금이 전부 사라지고, 거기에 더해 국가신용도까지 추락하니 미국을 포함한 외국 자본들이 칠레에 투자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부러 구리 가격을 폭락시키거나 구리 수입을 줄였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칠레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과도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당장 네슬레 스위스 기업이지 미국 기업이 아니다. 그리고 칠레의 대외무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미국이 칠레의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CIA 추산에 따르면 1969년 칠레 총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6.9%에 불과했다. 오히려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차지하는 비중이 27.3%로 미국보다 훨씬 컸고 영국(14.3%), 일본(13.4%)도 미국과 비슷한 비중을 차지했다. 칠레산 구리 수출도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7.2%로 ECC(40.4%)와 영국(17.4%)이 더 컸다. # 요약하면, 미국과 칠레의 교역이 칠레의 대외무역에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칠레 경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란 것이다. 그리고 구리의 가격은 공급과 수요가 해마다 널뛰기하는 원자재 특성상 등락이 심할 수밖에 없으며 아옌데 집권기에는 오히려 전반적으로 상승 추세에 있었다. # 즉, 아옌데 정권 하의 경제 실패는 미국이 아옌데 정권을 죽이려고 경제를 파탄냈다기보다는 아옌데 본인의 실책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33]

아옌데 정권에서 내세울 만한 성과는 문맹퇴치 등 교육수준 개선과 분유 무상배급같은 아동복지 개선인데, 이것도 실상을 파고들면 기존의 급격한 개선 기조가 아옌데 집권기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에 가깝다. 이미 칠레는 1920년에 초등 보통교육을 도입했고 유네스코 연감(Statistical Yearbook)에 따르면 1950년 문해율 80%, 1960년 84%, 1970년 90%로 증가했다. 또한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교 입학자도 각각 연평균 9%, 6%, 14% 증가했다. 아옌데가 집권한 1970년 초등학교 입학률은 95%, 중등학교 입학률은 49%에 달했으며 특히 중등학교 입학률은 1960년 20% 미만에서 대폭 증가한 것이다. 만일 아옌데가 러시아 내전 직후 소련이나 2차대전 직후 동유럽에 집권했다면 아옌데는 명백히 문맹퇴치에 공헌이 있다고 보여지겠지만, 그는 이미 문해율이 90%에 달하던 나라의 대통령이니 문맹퇴치를 벌인다 해도 의미가 퇴색될수밖에 없었다. 아동복지도 1935년 1,000명당 402.2명이었던 유아사망률이 1970년 104명으로 급격히 개선되고 있었고 이것은 집권 여당의 성향과 별 관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34] 이런 상황에서 네슬레의 자산을 압류해 분유 배급에 쓴 것은 실익은 애매한데 기업의 악감정은 깊어지는 실책이었으며 그 배급마저도 이루어지지 못한 공염불에 그쳤다.

아옌데의 정책은 단순히 칠레 경제에 위기를 초래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정책은 근본적으로 자본가와 지주 계급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계급투쟁의 일환이었으며 이는 칠레 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열시키고 극단화했다.[35] 아옌데는 자신의 정책에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두른 채 칠레 국민을 자본가- 지주 노동자- 농민이라는 프레임으로 이원화했으며 언제나 후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자를 탄압하는 정책을 주저하지 않고 펼쳤다. 자본가들에게는 상품 가격을 통제하는 식으로, 지주는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거나 빈농에게 분배하는 식이었다. 1971년 아옌데 정부는 의회의 승인 없이 기업체를 몰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고 수많은 토지와 공장들의 경영권이 노조와 정부에게 이전되었다. 칠레 경제는 아옌데의 경제정책에 직격탄을 맞았고[36] 거리의 폭력은 점점 더 격렬해져서 아옌데 통치 기간 동안 정치적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00명에 육박했다. 좌익이고 우익이고 가릴 것 없이 반대파를 조지는데 여념이 없었으며[37] 당연히 1973년 총선으로 우파가 과반을 차지한 칠레 의회는 난리부르스를 추면서 아옌데의 정책에 반대했다.

1973년 총선 결과는 이미 아옌데 정권이 처한 총체적인 위기를 그대로 나타낸다. 당시 반 아옌데로 뭉친 기독민주당-국민당-급진민주당-급진좌파당의 선거연합은 55.49%의 득표율로 하원 150석 중 87석, 57.25%의 득표율로 상원 50석 중 30석을 차지했다. 취임한지 3년만에 아옌데의 인기가 이미 식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발발한다. 피노체트는 실패가 예정된 대통령 아옌데를 자살하도록 강요한다. 그렇게 실패한 사회주의 정치인은 사회주의의 빛나는 순교자이자 칠레 민주주의의 아이콘이 되고, 피노체트 이후로도 이어질 칠레의 정치적 양극화에 또다른 전기를 마련했다. 이것은 아옌데 정권이 선거로 무너지지 않고 쿠데타로 무너지게 만든 결과이니 확실히 피노체트의 과오라 할만하다.

4.3. 총론

아옌데는 2008년에 칠레 국영 방송국이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칠레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우익 쿠데타로 사망한 아옌데는 1970년대 이래 칠레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좌파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로 여겨졌다. 가령,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소설인 강철군화의 표지는 '강철군화에 짓밟힌 아옌데'를 묘사했다. 80년대에 한국에서 출간된 번역본의 표지 뒷면도 이 표지를 사용했다. 시간이 흐른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로 아옌데의 유산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재차 주목받았다. 특히 칠레에서는 교육과 공공서비스 개선을 위한 예산확보의 방안으로 천연자원에 대한 공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또한 아옌데 정권의 경제 실패에 대해서도 미국의 공작으로 인한 피노체트의 쿠데타와 아옌데의 반강제적인 자살이 정당화되어선 안된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보수파가 과반을 차지했음에도 상술되었다시피 대통령 불신임 저지선은 확보되었고, 이는 당시 경제 상황과는 별개로 여전히 아옌데 정권의 지지자들이 적지 않게 존재함을 민주적인 규칙을 통해 보여준 것이었으며,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쿠데타는 민주적 규칙을 멋대로 어긴 폭력 행위일 뿐이었다.

반면에 미국의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를 비롯한 우익 진영에서 아옌데는 실익은 적으면서 위험성은 한가득인 정책만 펼쳐서 나라를 갈가리 찢어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경제위기를 일으킨 주범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파이프스는 피노체트의 행동을 군사 쿠데타로 보지도 않는 것 같은데, 그에 따르면 당시 칠레 헌법에 대통령 탄핵에 관한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의회가 부득이 군대에 법질서 회복을 요구했으며 피노체트는 의회의 요구에 응답하여 개입했다는 것이다.[38]

5. 이야기거리

미국이 칠레 군부쿠데타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했는지는 향후 CIA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 더 확실하게 파악될 것으로 보인다.[39]

1960년대 칠레의 정치인이었던 아옌데는 북한과 베트남, 쿠바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세 나라를 방문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서 이룬 성과에 감탄했었다고 한다. 특히나 북한 방문에서 현지 공장과 농촌 지역 그리고 종합진료소를 방문하면서 "칠레에선 도시인들도 누리지 못하는 각종 혜택을 농촌 지역에서 누리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는 말을 했다.

아옌데는 아내 오르텐시아와의 슬하에 세 딸을 두었다. 오르텐시아는 쿠데타 직후에 딸들을 데리고 멕시코로 망명했고, 칠레가 민주화된 후에 돌아와 조용히 살다가 2009년에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녀 베아트리츠는 멕시코로 망명한 지 4년 만에 자살했다. 차녀 카르멘 파스는 민주화 이후에 칠레로 돌아와 평범한 생활을 했다. 막내 마리아 이사벨은 민주화 이후에 사회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상원의장 등을 거친 뒤 사회당 당수까지 됐다. 베아트리츠의 딸이자 아옌데의 손녀인 마야 페르난데스는 2012년 칠레 지방선거에서 산티아고의 현직 보수 구청장을 꺾고 승리했으나 재검표 과정에서 석패했다. # 그녀는 시간이 흐른 2022년에, 즉 아옌데가 사망한 지 약 반세기 만에 세계 최연소 대통령인 가브리엘 보리치 행정부의 국방장관이 됐다. 이는 칠레 현대사에서 대단히 상징성 있는 인사로 평가받는다.

1967년에 체 게바라가 사살되자, 그 소식을 들은 아옌데는 연설을 통해 체 게바라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떠올리면서 추모사를 남겼다. 그는 연설 도중에 체 게바라의 친필 사인이 담긴 <게릴라전 교범>을 꺼내 보였는데, 책에 써있는 내용은 똑같은 목적을, 나와 다른 수단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였다고 한다.

2021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급진좌파 정당 소속의 가브리엘 보리치는 당선 후 첫 행보로 칠레 대통령궁을 방문해 아옌데의 흉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

6. 관련 항목


[재단] 살바도르 아옌데 재단 링크 [2]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칠레 사회주의 성향의 사회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상원의장과 하원의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4] 출처 [5] 칠레 산티아고에 위치한 정신병원이다. [6]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대통령 관저 모네다궁 앞에 세워진 아옌데의 동상 좌대에 새겨진 문구. 이 문구는 그의 최후 연설에 나온 것이다. [7] 조상인 파딘 아옌데는 칠레 프리메이슨의 그랜드 마스터였다. 아옌데 자신도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 [8] 당시 칠레의 부유층들은 군입대를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회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9]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사회복지 거버넌스 차원에서 으레 시행하는 정책들이다. 이러한 것을 이미 50년 전에 구상하고 실현했다는 것. [10] 출처: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182~183. [11] 이 정책은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이던 네슬레의 칠레 축산업 시설을 강제로 국유화한 후에 이뤄졌는데 네슬레에게 제값을 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네슬레가 안 빡칠 리는 없다. [12]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상황과 무리하게 동일시하면 안 된다. 한국은 인구는 많은데 면적이 작고 도시화율은 20%가 안 되는 나라로 농촌에 인구가 넘치는 나라였다. 그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서 해외로 이민까지 장려할 정도였다. 반면에 칠레는 1970년 당시 인구가 1천만도 안되는데 면적은 대한민국의 7.5배이며 도시화율은 75%였다. 즉 한국과 달리 칠레는 농촌에 토지가 넘치는 나라였으며 일례로 당시 칠레에서 중간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양조장이 직영 포도밭 면적만 1만 에이커를 넘겼다. 즉 토지를 재분배해도 그 혜택을 본 농민들이 한국보다 훨씬 적다는 것이며, 또한 소유지를 날린 지주들의 어그로를 한껏 끌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13] 미국이 싫어하는 반미국가 쿠바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 당시 쿠바의 지도자 카스트로가 한 달에 한 번씩 칠레를 방문할 정도로 양국의 외교관계는 친밀했다. [14] 왜냐면, 칠레에 대한 전체 외국 투자 중 미국의 투자가 점하는 비율이 80%가 넘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다국적 기업 국유화는 미국에게 큰 손실을 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조치는 중남미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쿠바 또한 1950년대 바티스타 정권 하에 있던 각종 미국 기업들의 생산수단을 국유화해버렸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 또한 다국적 기업들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15] 당시 칠레의 각 신문과 TV와 라디오 방송 같은 언론들은 아예 "사회주의자 아옌데를 몰아내기 위해 군대가 일어나야 한다!"라는 식으로 노골적인 쿠데타 선동을 부추기는 논조의 기사들을 마구 내보냈다. [16] 1973년 9월 11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암호. 당시 라디오 방송의 멘션. 피노체트군은 해당 암호가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는 시점에 쿠데타를 개시했다고 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에서 헤리넬도가 친구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부엔디아 대령에게 '지금 마콘도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라는 전문을 보내는 장면에서 따온 것이다. [17] 이들은 좌파조직 출신으로 대통령궁이 함락된 직후에 대부분 사살당했다. 사실 공산당과 좌파 노조, 시민단체들은 집권 이후 아옌데에게 어깃장을 놓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옌데의 최후를 죽음으로 사수한 것 또한 좌익 반대파였던 공산당원들과 노조원들이었다. [18] 참고로 1989년 칠레 민주화 이후로 20년을 집권했던 콘세르타시온조차 선거에서 60% 득표를 해본 적이 없다. 칠레 보수파들이 얼마나 과도한 목표를 잡았는지 알 수 있다. [19] 피노체트의 쿠데타 직후인 9월 15일 아르헨티나로 망명했으나 약 1년 후인 1974년 9월 30일 칠레 비밀경찰에 의해 폭탄테러로 암살된다. [20] 이는 2021년 기준 6,000만 달러, 약 730억 정도 되는 금액이다. [21] 다만 알려진 사실과 다르게 피노체트는 거의 마지못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공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합의를 본 마당에 육군의 대빵인 피노체트는 쿠데타 직전인 9월 8일까지 미적미적대면서 쿠데타 동참 요청에 대한 응답을 회피했다. 결국 쿠데타 전날인 9월 9일에야 피노체트가 동참하겠다고 응답하면서 칠레 쿠데타가 이루어졌다. 게다가 쿠데타 당일에는 실패가 두려워서 국경지대로 내뺐다. [22]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정인환 옮김, 서해문집) p.234~236. [23] 아옌데의 연설문은 레디앙에서 쓴 기사에서도 볼 수 있다. 두 개의 9·11 40년전 아옌데의 고별 연설 [24] 대통령 당선 당시에 선물로 받아 집무실에 장식한 소총인데, 순금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관련되었던 미국 정보기관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총 한자루가 아옌데에 대한 미국의 방침을 결정짓게 되었다나 뭐라나. [25] 안경이 박살나있는데, 소총인 AK-47로 근거리에서 헤드샷을 당한 만큼 당연한 결과이다. 실제로 아옌데의 시신은 상당히 참혹했다고 전해진다. [26] 사실 야당이 다수파였던 의회는 아옌데가 대통령에 오르는 것을 찬성하는 대신 군대와 관련된 대통령 권한을 확 줄여 버렸다. 따라서 군대 견제를 더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비슷하게 정권이 위험한 상황에서 집권했던 또 다른 전임 칠레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는 아예 대놓고 엄청나게 잘 무장한 중산층 이상 시민 중심의 민병대를 만들어서 정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과 비교된다. [27] 당시 남미에 퍼져있던 수탈 이론과 칠레에서 심해지고 있던 반 외국인 정서에 기반해 국유화를 추진했다. [28] 쿠바식의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민중권력 정부의 수립을 추구했다. [29] 다만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사회주의 중에서도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입장에선 마르크스식 공산혁명을 딱히 호의적으로 볼 이유가 없기 때문. [30] 다만 아옌데는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일반적인 사회민주주의라고 보긴 어려우며, 반자본주의적이고 체제변혁적이였기 때문에 민주사회주의와 (비폭력적) 혁명적 사회주의의 경계에 있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클레멘트 애틀리같은 일반적인 민주사회주의 지도자에게 분류하지 않는 Socialist rulers(사회주의 지도자) 분류를 사용할 정도. [31] 다만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일본은 선진국은 아니었고 1970년대가 되어서야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물론 아시아 기준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이미 넘사벽 선진국이었다. [32] Rudiger Dornbusch, Sebastian Edwards. (1989) Macroeconomic Populism in Latin America. NBER # [33] 물론, 미국이 칠레의 쿠데타를 계획하고 지원한 것은 맞으나 그것은 군과의 접촉 및 사회 부문의 선동이었지, 경제와 연관을 짓기는 어렵다는 것이 본 문단의 요지이다. [34] 심지어 이웃 아르헨티나도 민간정부와 군사정부를 가리지 않고 유아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35] 당시 칠레 사회가 정치화(Politicization)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치화가 사회 전반의 정치적 양극화(Political polarization)로 이어졌는지, 아니면 이 양극화가 칠레 엘리트 내에 한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분명한 것은 아옌데 정부의 정책이 양극화를 촉진했다는 것이다. # # # # [36] 초인플레이션은 말할것도 없고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칠레의 식량 수입은 149% 폭등했다. 토지개혁을 하면 국민 불만을 잠재우고 생산성도 늘어나니 개도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일각의 생각은 환상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농업생산성은 소농사회보단 지주제나 지주제가 현대화된 대규모 농기업이 더 높으며, 토지개혁 이후 농업생산성 제고는 토지를 받은 농민을 위한 적극적인 융자 및 기술 도입을 비롯한 사후 지원도 충실해야 기대해 볼 수 있다. 러시아 제국도 토지개혁만으로 농민의 생산성이 증가하지 않았으며(생산성 증가분이 그대로 농가의 가구원 증가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생산성이 등락을 반복할 뿐 장기적으로는 도돌이표를 찍었다) 표트르 스톨리핀이 자영농 육성정책을 펼친 후에야 비로소 증가했다. [37] CIA 칠레군과 연계된 극우파 무장조직인 조국과 자유(PyL)는 거리에서 좌파 세력과 대놓고 시가전을 벌였으며 아옌데에 대한 쿠데타를 획책했다. 반대로 칠레 공산당과 MIR에서마저 너무 과격하다는 이유로 출당된 극좌파 무장조직인 인민조직전위대(VOP)도 전직 내무장관 에드문도 수호비크(Edmundo Pérez Zujovic)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암살했다. [38] Richard Pipes. (2001) Communism: A History. Random House Publishing Group. [39] 미국 측은 2000년에 자국이 칠레에서 행한 첩보행위가 칠레의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뉘앙스로 사과 비스무리한 것을 했다. 왜냐하면 칠레는 중남미 내에서 미국의 중요 우호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