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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대한민국의 변호사 조영래 趙英來 | Cho Young-r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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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7년 3월 26일[조기입학][2] |
경상북도 대구부 대봉정 309번지[3] | |
사망 | 1990년 12월 12일 (향년 43세)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 | |
본관 | 함안 조씨[4] |
직업 | 변호사 |
학력 |
대구국민학교 (
전학) 경성수송공립국민학교 ( 졸업) 경기중학교 ( 졸업) 경기고등학교 (61회 /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 법학[5]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법학 / 석사[6]) |
가족 |
아버지 조민제(趙民濟) 어머니 이남필 3남 4녀 중 장남[7] 배우자 이옥경(李玉卿) 아들 조일평(趙一平), 조무현(趙茂顯) 조카 조동림, 조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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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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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관해 간략히 소개하는 <지식채널e> |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은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 1981년 12월 검사시보 시절 일기에서 -
- 1981년 12월 검사시보 시절 일기에서 -
대한민국의 인권 변호사.
2. 생애
1947년 3월 26일 경상북도 대구부 대봉정(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309번지에서 아버지 조민제(趙民濟)와 어머니 이남필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이자,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민제는 경상북도 청송군 출신으로, 독학으로 비누 제조법을 익힌 뒤 1942년 대구부로 이주해 비누와 가루치약 등을 제조하는 대동화학공업(大同化學工業)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사업 초기에는 군대에 납품하는 등 그런대로 현상유지가 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1953년 대구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5학년 되던 1957년 가정형편으로 인해 상경하여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에 새 터전을 잡고 학교는 서울수송국민학교에 전학했다. 그러나 조영래의 가족은 1977년 강서구 화곡동에 정착할 때까지 가정형편상 성북구 안암동· 종암동, 서대문구 갈현동[8] 등의 빈민촌을 전전해야 했다.
서울수송국민학교 졸업 후 경기중학교를 전교 3등으로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기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63년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가담하여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정학 처분에도 굴하지 않고 이듬해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
서울대 재학중에도 한일기본조약 반대,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규탄, 6.8 부정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대학생의 교련수업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하면서 당시 김근태, 손학규와 함께 서울대학교 운동권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1969년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에서 연수하던 중 유신헌법 제정 직전 학생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조작한 소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생전에 겸손한 성품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린 그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도 변호사 시절인 198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도대체 나이 어린 대학생 4명이 무슨 수로 정부를 뒤집을 수 있었겠느냐."
며 당시 각본에 따라 짜여진 그 사건의 허구성을 이야기했다. [9] 1973년 출소 후에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당해 6년 간 외진 옥탑방 등을 전전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으며 이 중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전태일이 살아간 청계천과 유가족을 방문해 이들의 증언을 취합해 한낱 소란으로 잊혀질뻔한 전태일의 삶을 재부각하는 생애 최대의 걸작인 《전태일 평전》(부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했다.[10] 그러나 당시의 서슬퍼런 시대상 원고를 한 신부에게 들려 일본의 출판사로 가져가 일본에서 가명으로 먼저 출간했다가, 1983년 국내에서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란 명의로 돌베개에서 출간했다. 그러나 이 책이 쓰여지고서 15년이 넘도록 그리고 이 책이 국내에서 출판되고도 10년 가까이 되도록 이 책의 저자는 일반에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우선 실명을 그대로 썼다간 그 자체로 증거가 되어 잡혀가니까 익명, 가명 혹은 출판사 편집부 등으로 표기하고 출판한 것이고[11] 그 다음으로 자신이 한 일을 남에게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저자 조영래의 성품 때문이다.[12] 그래서 조영래가 사망하고 1년 후인 1991년 1차 개정판에 와서야 저자가 조영래라는 것을 표기할 수 있었다.
1980년 8월 수배가 해제되면서 복권되어[13]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하여 1982년 12기로 수료하자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14] 제때 졸업한 사시 13회 동기들은 연수원 3기다.
1983년에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한 이후, 1984년 망원동 수해 주민들의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했다. 1984년 대홍수로 서울 망원동 5,000여 가구가 침수당한 사건에 무보수로 참여해 3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판결을 받아냈다.[15] 이 사건은 사상 초유의 대규모 집단소송이었다. 조 변호사는 이 사건 가옥침수 원인은, 첫째 망원유수지 일체의 유수지 시설물을 점유하는 서울특별시의 그 설치, 관리상의 잘못과, 둘째 주식회사 현대건설의 부실공사, 셋째 유수지 시설물을 관리하는 서울시 소속 공무원의 수재발생 방지노력 태만에 있다고 주장, 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법원에 제출한다. 서울시는 중량급 변호사들 5명을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하여 장황한 법리 전개와 일본 수해 소송의 예를 들어가며 시의 책임을 극구 부인하게 되는 근거를 제시하는 한편 시가 보유하고 있는 토목공학, 토질역학의 방대한 정보, 지식을 동원하여 망원유수지 수문붕괴가 불가항력적인 천재였음을 강조하는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조 변호사는 이러한 방대한 물량공세를 두세 차례의 과학적이고도 집약적인 반론제기로 단숨에 이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시를 당황시킨다.[16]
집단소송제도 없고, 그 개념조차 낯설던 1984년, 그는 2,300여 피해 가구를 조직하는 고단한 법정 투쟁 끝에 호우 피해는 천재(天災)가 아닌 국가의 책임임을 입증했다. 인권변호가 시국 형사사건에 머물던 시대에, 일반 국민의 일상에도 법률이 유용할 수 있음을 한국 사회에 알린 것이다. 조영래 변호사는 처음부터 공익 변론을 사회 개혁과 인권 확장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조영래는 주변에 자주 미국의 소비자 운동가인 랄프 네이더 변호사에 대해 언급했다. 군사독재라고 하는 주적(主敵) 외에도 한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다루고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7]
1986년에는 당시 전화교환원 이경숙의 호소로 시작된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소송을 이끌었다. 당시 이경숙은 교통사고로 직장을 그만두려고 했는데 미혼 여직원은 보통 25세쯤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둔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로 같은 처지의 남직원보다 퇴직금 등을 덜 주는 것에 반발하고 소송을 걸었지만 '미혼 여직원의 정년은 25세'라는 1심 재판부의 판결에 절망해 항소를 망설이는 상태였다. 조영래는 그녀를 설득, 항소심에서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임을 확인받았다. 조 변호사는 이 사건이 개인 이경숙의 이해 관계를 넘어 한국 여성 전체의 권익에 관계되는 사건이라고 판단하여 무료로 이 사건을 수임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하고, 여성단체와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항소심을 진행했는데, 여성단체에서는 여론조사 결과와 학계의 의견 등 자료를 제공하고 한편으로 공청회 등 여론 수렴 작업을 했으며, 조 변호사는 그러한 자료들을 십분 활용하여 세심하고도 설득력있는 변론을 펼쳐서 항소심 재판부로 하여금 7번의 긴 심리를 거쳐 결국 여성계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한다. 이 사건은 승소 판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결과 모두가 큰 수확이고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조 변호사가 법원에 제출한 장문의 의견서와 준비 서면들의 줄과 행마다 베어 있는 인간 평등, 남녀 평등에 대한 확신과 의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18]이 여성조기정년제 사건은 우리나라 여성 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주요 판결이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을 변호하고 가해자 문귀동에 대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등의 활동으로 인권 변호사로서 큰 활약을 했다. 조 변호사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고문 피해자 권인숙 양을 접견하면서, 또 검찰과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이 사건을 은폐하는 시도를 보면서, 이 사건이 부도덕한 군사 독재 정권이 몰락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만이 권양을 살리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즉시 권 양 변호를 위한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 부천경찰서 서장과 고문 형사 등 성고문 관련자들을 고발한다. 변호인단이 제출한 고발장에 의하여 검찰은 수사를 시작했으나, 예상 밖으로 문귀동에 대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나아가 수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권양에 대한 악의적인 모함과 중상으로 가득 찬 <공안당국의 분석자료>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게 되자, 조 변호사는 즉각 이에 대처하여 변호인으로서는 다소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자회견까지 자청하여 검찰 수사 결과의 허구성과 수사 과정에서의 의혹을 낱낱이 밝히게 된다.
"권양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합니다."
조 변호사는 권인숙에 대한 공문서 위조 등 형사 사건의 변론에서 이와 같이 변론하며 눈물을 흘렸다.조 변호사는 이 변론요지서를 통하여 부정한 권력을 준엄하게 고발하고, 그에 온몸으로 맞선 권양의 고통과 희생을 모든 국민들의 아픔과 분노로 승화시켰으며, 결국 진실은 승리하고야 만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폐부 깊숙이 새겨 놓았다.[19]
1987년에는 연탄공장 옆에 살다가 진폐증에 걸린 시민을 도와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했다. 이 사건은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 있는 연탄공장 부근에서 1979년부터 약 8년간 거주한 박길래가 위 공장에서 배출되는 석탄 분진으로 인하여 진폐증에 걸리게 되어 이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공해병 소송에서 해결되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제이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공해로 인한 신체상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사전대책 마련, 둘째, 피해 원인을 공통으로 하는 다수 피해자가 제기하는 손해배상 소송에 적용될 집단 소송 제도 마련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조 변호사는 평소 환경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해 왔고, 일찍이 온산에서 공해병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직접 현지 답사를 하기도 했다.[20] 이 사건 변론에서 조 변호사는
"피고 회사는 위 공장의 석탄 분진 배출로 말미암아 진폐라는 영구 불치의 병을 얻어 노동 능력을 상실한 원고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고 주장하면서, "이제 바야흐로 경제 개발 제일주의 정책 및 기업의 재산권 절대의 사상은 퇴조하였으며, 종래의 환경 보전과 경제 발전의 조화론은 이미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낡은 이론으로 전락해 버렸다. 공해 문제는 인간 생존의 위기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고, 국가의 모든 산업정책이나 개발 행위에는 환경에 대한 영향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기에 이르렀으며, 환경 보전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환경 보전 의무는 국가와 국민의 헌법상 의무인 바, 일개 기업에 대한 고려로 인하여 위와 같은 헌법상 의무가 방기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라는 변론[21]으로 해당 회사의 책임을 인정하는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1988년에는 국제그룹 강제 해체를 겪었던 양정모 전 회장의 헌법 소원을 담당했다. 조영래는 1989년 해당 헌법 소원 준비 도중 본인의 사법연수원생 시절 스승이자 당시 헌법재판관인 이시윤, 헌법재판소장 조규광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는데, 조영래가 소송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타계한 이후, 두 번의 변호인 승계를 거쳐 인용 판결을 받아냈지만 당시 이시윤과 조규광의 대답은 인용 여부에 대해 부정적 의견이었다고 한다. 이시윤은 인터뷰에서 이때도 조영래의 폐암 병색이 매우 심각했다고 기억하며,
"질풍과 노도의 시절, 불세출의 영웅 조영래가 못내 뜻하던 결정을 보지 못한 데 통절의 비통을 금치 못한다..(후략)"
고 회고했다. [22]이외에도 보도지침 사건 등을 변론했다. 제5공화국 말기인 1986년 9월 경 당시 언론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이었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기관지인 《말》지 특집호에 1985년 10월 경부터 1986년 8월 경 사이에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보도내용을 통제하기 위하여 각 언론사에 시달한 이른바 <보도지침> 내용을 게재하여, 제5공화국의 언론 통제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검찰은 1986년 12월 경 민언협 회원인 김태홍 등 3명의 기자를 외교상 기밀누설죄 등으로 구속했다. 조 변호사는 이 사건을 맡아 진행하는 과정에서 먼저 검찰에 대하여
"외교상의 기밀이라 함은 보도통제의 대상이 된 내용 사실이 기밀사항이라는 취지인가, 아니면 그러한 내용 사실에 대한 보도통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밀사항이라는 취지인가."
등 공소사실이 검찰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것임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구문권을 행사했다.[23] 이때 조영래 변호사가 제기한 석명 요구는 그동안 시국사건에서 별로 써먹지 못한 무기로서 검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24]《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및 《 동아일보》 객원 편집위원도 역임했다. 1980년대 《동아일보》는 독재정권의 언론 통제속에서도 가장 야당 및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에 호의적인 보도를 자주 하곤 했다. 이런 성향은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당시 《동아일보》는 야당 신문이란 평가를 들었다. 성향이 지금처럼 확고한 친재벌, 친보수쪽으로 바뀐 건 김대중 정부 시기 2001년 세무조사 관련으로 마찰을 빚으면서부터이다.
《 대한변호사협회 인권보고서》 발간의 산파역을 했다. 당시 대한변협의 사무실에도 국가안전기획부나 국군보안사령부 요원들이 상시로 출입하던 시절이라 그는 보고서조차 은밀히 쓰고, 출간해야 했다. 보고서가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그는 보고서의 후기를 이렇게 고쳐 쓴다.
"우리의 인권보고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치떨리는 분노로 이렇게 외칠 따름이다.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주요 시국사건을 같이 담당하던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상설조직인 정법회를 창립했다. 정법회의 탄생은 지금까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변론에서 더욱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변론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25] 그렇게 남들이 하지 못할 노력으로 이 땅에 봄을 오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0년 12월 12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가톨릭대학교 여의도성모병원에서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43세. 사실 폐암 진단을 받기 전에도 조영래는 심한 골초여서 지인들조차 그의 사무실은 너구리굴이 따로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라 이 흡연 습관이 폐암으로 이어진 듯 하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모란공원에 있다. 이 곳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묘소가 모여 있는 곳으로 전태일[26], 문익환의 묘지도 이 곳에 있다.
유고집으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가 있다.
제27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되었다. #
"故조영래 변호사는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차별받고 불이익을 당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해온 한국사회의 대표하는 민주화 운동가이자 인권변호사였다.
조 변호사는 19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라는 새로운 개념의 법률사무소를 연 이래 많은 인권 사건들을 맡아 변론 활동을 전개하였고, 시민의 권리와 여성 평등 문제, 환경 문제 등에 관한 법적 해결은 한국 사회를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전태일 정신 계승 사업 활동을 펼쳤고, 정의실현 법조인회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창설을 주도하였다.
망원동 수재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보도지침 사건, 상봉동 진폐증 환자 보상 사건, 《자본론》 출판 사건과 《북한방문기》 출판 사건,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 사건 등 소송에서 변호를 맡아 인권 향상과 함께 국가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 서울대학교, 2017. 11. 07
조 변호사는 1983년 시민공익법률사무소라는 새로운 개념의 법률사무소를 연 이래 많은 인권 사건들을 맡아 변론 활동을 전개하였고, 시민의 권리와 여성 평등 문제, 환경 문제 등에 관한 법적 해결은 한국 사회를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전태일 정신 계승 사업 활동을 펼쳤고, 정의실현 법조인회 및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창설을 주도하였다.
망원동 수재 사건, 대우어패럴 사건, 여성 조기정년제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보도지침 사건, 상봉동 진폐증 환자 보상 사건, 《자본론》 출판 사건과 《북한방문기》 출판 사건,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 사건 등 소송에서 변호를 맡아 인권 향상과 함께 국가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 서울대학교, 2017. 11. 07
2020년 6월 10일, 제33주년 6월 항쟁 기념식에서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3. 문장력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가졌던 그는 한일회담 반대를 위해 처음으로 쓴 문장인 <선언문>을 작성한 바 있으며, 《전태일 평전》에서 그의 필력을 알 수 있다. 조영래 자신은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전태일 평전》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다.민청학련과 인혁당에 대한 정부의 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폭로한 김지하가 재수감돼 사형 위기에 빠지자 조영래는 김지하 시인을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양심선언문>을 쓰는 데 관여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김지하 스스로 1976년의 그 유명했던 <김지하 양심선언>이 사실은 조영래의 작품이었음을 고백했다. 이 <양심선언문>은 후에 국제 사회의 지식인들이 김지하 구명운동에 나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7]
4. 글
엽서 반댓면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우람하게 서 있었다.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들에게 보낸 엽서[28]
다음은 조영래 변호사의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에 실린 추도문 중 하나다."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들에게 보낸 엽서[28]
하얀 겨울에 떠나간 우리들의 '조변'
우리들의 '조변'이 갔다. 어디 가서든 그의 친구임을 자랑하고 싶도록 만들던 조영래 변호사-그의 푸근한 미소와 낭랑한 목소리, 그리고 줄담배 연기를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는 '조변'없는 이승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조변! 그렇게 훌쩍 세상을 뜨는 것을 보니 저승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구려.
조변호사, 그는 어차피 요절한 천재로 기억될 것이다. '조변'은 그러나 바보를 존경할 줄 아는 천재였다. 예리하고 가파른 천재가 아니라 강 같은, 음악 같은, 함박눈 같은 풍류남아였다. 그 깊고 넓은 웅지를 펴기 전에 질풍노도의 시대를 만나 1년 반을 감방에서, 여섯해를 도망자로 보내야 했던 '우리들의 조변'은 죽음까지도 태산같이 당당하게 맞아들였다.
전남 곡성의 태안사에서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던 '조변'은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애써 싸우지 않았다. 죽음을 사색하고, 죽음과 대화하고, 그러다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죽음과 손잡고 저승길로 떠났으리라.
조변호사는 이 나라 인권변호의 새 지평을 연 사람이었다. 그의 변호에는 인권의 파괴를 체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와 진지함이 실려 있었다. '작은 진실에의 열정'이 있었고 당해본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눈과 가슴이 있었다.
"권양, 온 국민이 그 이름을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 있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조변'은 불의와 싸우는 데 있어서 논리의 힘에 못지않는 감성의 떨림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의 인권활동에는 유려한 시심과 무서운 신바람이 함께 있었다. 권인숙양 사건과 망원동 수재소송사건에 열중해 있던 1986~87년이 아마도 그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지금 모두가 갑갑해하고 있지만 먼 훗날에는 이 시대를 아름답게 추억할 겁니다. 인권, 자유, 평등과 같은 고매한 이상을 주제로 하여 나라 전체가 토론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던 그가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드러누워버렸다. 세상은 그의 희망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실패한 정권교체와 민주화의 사생아처럼 불거져나온 지역감정과 복잡다기해진 갈등들이 우리의 '조변'을 쓸쓸하게 만들어갔던 것이다.
'조변'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공장 주변의 진폐증환자, 스물다섯살에 정년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이 사회를 울리는 큰 의미를 뽑아냈다. 상처받은 권양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준 이야기는 오영수의 단편소설감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조영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바로 '법을 배운 전태일'이었다.
'조변'은 꽉찬 80년대를 살았지만 결국 못다 핀 꽃이었다. 이것이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다. 그는 10년 정도를 담을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짧았던 43년보다 몇배나 더 오래 이어질 아쉬움, 추억담, 그리고 긴 여운을 우리 가슴속에 남기고 그는 표표히 떠났다.
명창 '조변'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를 즐겨 부르더니 한 2년 전부터는 왜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를 그토록 열창하기 시작했는지.
조영래 변호사! 그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이만 떠나시오. 뒤돌아보지 말고, 남은 것 묻은 것 있으면 다 털어버리고, 자 뛰어가세요. '조변'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천당, 극락이 아니고 어디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은, 아무리 천당, 극락이라지만 몸이 아프거든 제발 약도 먹고 병원에도 좀 다니시오!
- 조갑제 - [29]
우리들의 '조변'이 갔다. 어디 가서든 그의 친구임을 자랑하고 싶도록 만들던 조영래 변호사-그의 푸근한 미소와 낭랑한 목소리, 그리고 줄담배 연기를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는 '조변'없는 이승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조변! 그렇게 훌쩍 세상을 뜨는 것을 보니 저승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구려.
조변호사, 그는 어차피 요절한 천재로 기억될 것이다. '조변'은 그러나 바보를 존경할 줄 아는 천재였다. 예리하고 가파른 천재가 아니라 강 같은, 음악 같은, 함박눈 같은 풍류남아였다. 그 깊고 넓은 웅지를 펴기 전에 질풍노도의 시대를 만나 1년 반을 감방에서, 여섯해를 도망자로 보내야 했던 '우리들의 조변'은 죽음까지도 태산같이 당당하게 맞아들였다.
전남 곡성의 태안사에서 마지막 나날들을 보내던 '조변'은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애써 싸우지 않았다. 죽음을 사색하고, 죽음과 대화하고, 그러다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죽음과 손잡고 저승길로 떠났으리라.
조변호사는 이 나라 인권변호의 새 지평을 연 사람이었다. 그의 변호에는 인권의 파괴를 체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와 진지함이 실려 있었다. '작은 진실에의 열정'이 있었고 당해본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눈과 가슴이 있었다.
"권양, 온 국민이 그 이름을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 있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조변'은 불의와 싸우는 데 있어서 논리의 힘에 못지않는 감성의 떨림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의 인권활동에는 유려한 시심과 무서운 신바람이 함께 있었다. 권인숙양 사건과 망원동 수재소송사건에 열중해 있던 1986~87년이 아마도 그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지금 모두가 갑갑해하고 있지만 먼 훗날에는 이 시대를 아름답게 추억할 겁니다. 인권, 자유, 평등과 같은 고매한 이상을 주제로 하여 나라 전체가 토론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던 그가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드러누워버렸다. 세상은 그의 희망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실패한 정권교체와 민주화의 사생아처럼 불거져나온 지역감정과 복잡다기해진 갈등들이 우리의 '조변'을 쓸쓸하게 만들어갔던 것이다.
'조변'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공장 주변의 진폐증환자, 스물다섯살에 정년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이 사회를 울리는 큰 의미를 뽑아냈다. 상처받은 권양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준 이야기는 오영수의 단편소설감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조영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바로 '법을 배운 전태일'이었다.
'조변'은 꽉찬 80년대를 살았지만 결국 못다 핀 꽃이었다. 이것이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다. 그는 10년 정도를 담을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짧았던 43년보다 몇배나 더 오래 이어질 아쉬움, 추억담, 그리고 긴 여운을 우리 가슴속에 남기고 그는 표표히 떠났다.
명창 '조변'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를 즐겨 부르더니 한 2년 전부터는 왜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를 그토록 열창하기 시작했는지.
조영래 변호사! 그 겨울이 깊어지기 전에 이만 떠나시오. 뒤돌아보지 말고, 남은 것 묻은 것 있으면 다 털어버리고, 자 뛰어가세요. '조변'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천당, 극락이 아니고 어디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은, 아무리 천당, 극락이라지만 몸이 아프거든 제발 약도 먹고 병원에도 좀 다니시오!
- 조갑제 - [29]
5. 《조영래 평전》 문제
서울대 법대 교수인 안경환에 의해 《조영래 평전》이 쓰여졌다. 하지만 조영래 주변 인물들과 인터뷰조차 하지 않는 등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고 작성되어[30] 각계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심지어 조영래 추모사업회와 유족들은 출간 자체를 반대할 정도였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당사자인 권인숙 역시 《조영래 평전》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저자 안경환은 조영래와 동시대를 살았으나 연결 고리는 조영래의 후배라는 것뿐이다. 조영래와 함께 활동하기는 커녕 조영래같은 행동파도 아니었고, 오히려 성향에 있어서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조영래 평전》을 작성하면서 지나치게 안경환 자신의 성향을 조영래에 무리하게 대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어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서의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조영래가 갖고 있었다고 묘사하거나, 여성에 관해 가부장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서술함으로써, 조영래 자신이 배척했던 것을 정반대로 묘사하여 조영래의 사상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서술 태도에서 박정희 정권, 노동 운동 등에 대해서 보수적인 시각을 드러냈으며, 서울대 법대의 인권운동사에 지나치게 분량을 투자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6. 변론
-
조영래 변호사가 맡았던 변론 중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박종철 물고문 사건과 함께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된 사건이다.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권인숙이 부천서에서 성고문을 당한 후 이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정권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기에 이른다. 아래는 조영래 변호사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론 요지 중 일부이다.[31]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을 알고 있는 이 이름없는 유명 인사, 얼굴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이제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국가와 권력의 존립 근거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만 존재할 정당한 이유를 지니는 것입니다."
"권양은 우리에게 '진실에의 비밀은 용기 뿐'이라는 교훈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권양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다가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하여 증언하고자 합니다.... 이제 저 잔혹하였던 여름과 가을을 지나, 권양은 이 법정에 섰습니다. ... 우리의 권양, 온 국민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은밀하고 고귀한 희망으로 자리잡은 우리의 권양은, 즉각 석방되어야 합니다 "
<조영래변호사의 부천서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 중에서
7. 여담
- 배우 임원희와 매우 닮았다.
- 동생들 모두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동생은 한국 환경운동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인물인 조중래 교수이고, 여동생으로 여성노동자에 관해 목소리를 내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조순경 교수가 있다.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약칭 '민변'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도 조영래 변호사였다. 당시 창립 총회를 하면서 '민주변호사회', '민주변호사협의회' 등의 이름 후보들이 나왔지만,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회원들이 고심하던 차에, 조영래가 칠판에 해당 이름을 적으면서 "무슨 무슨 '회'보다는 '모임'이 더 낫겠다"고 하면서 "지금은 여러분 귀에 생소하게 들릴지 몰라도, 앞으로는 우리 말로 된 이런 이름을 자연스럽게, 많이들 쓰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 이름을 작명한 공으로 조영래는 상금 10만원도 받아 갔다고 한다. 참고로 '민변'이라는 약칭은 황인철 변호사가 지었다고 한다. #
-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맹활약하던 초선의원 노무현을 보고 '대통령감을 찾았다'는 극찬을 했다. 이후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져 민변을 만들면서 함께 의기투합했고, 15년 후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32]
- 그의 기일이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지 11년이 된 날이다.
-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2023년 3월 16일 방송분에서 그의 이야기를 다뤘다.
- 조갑제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조영래는 조갑제의 저서인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의 추천사를 써주었으며, 조영래가 사망하자 조갑제는 조영래의 추도문을 직접 써 주고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7.1. 창작물에서
- 홍경인 주연의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도 등장한다. 다만 본명은 아니고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지명수배 당해 도망다니는 학생 김영수( 문성근)로 나온다. 역시 도망 중에 전태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를 삶을 취재하는 관찰자의 역할로 나온다.
7.2. 친구들
- 경기고등학교 61회 졸업생이다. 동기생으로 김근태 前 국회의원, 손학규 前 경기도지사가 있다. 이 세 명은 1965년 나란히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는데 김근태는 상과대학, 손학규는 문리대학, 조영래는 법과대학을 택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설립자인 김영무 변호사도 후원자로서 조영래를 도와줬다.
7.3. 기념사업
- 서울지방변호사회는 2015년에 서초동 변호사회관 입구에 조영래의 흉상을 설치했으며, 2016년에 종로구 당주동에 있던 광화문 변호사회관 10층에 교육시설을 마련하면서 이를 '조영래홀'로 명명했다.
[조기입학]
1946년생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보냈다.
[2]
《법률신문》 <한국법조인대관> 조영래 프로필에는 3월 22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
[4]
30세 래(來) 항렬.
[5]
65학번 수석입학
[6]
석사 학위 논문:
公害訴訟에 있어서의 因果關係 立證에 관한 硏究 (1981)
[7]
막내동생이 래퍼 매드클라운과 배우 조현철의 아버지 조중래이다. 조중래씨는 2022년 70세로 별세했다.
[8]
1979년
은평구로 이관되었다.
[9]
허문명 "이종찬, "조영래가 살아 있다면 대통령감인데.."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 《동아일보》 2013. 5. 22.
[10]
이는
장기표가 전태일의 어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전태일의 수기를 조영래가 정리하여 집필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전태일 문서 참조.
[11]
사실 90년대 이전의 사회과학 서적이나 사회 고발, 체제 비판 성격의 책들은 이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왔다가 이후 검열과 탄압이 완화되자 비로서 원저자를 밝히고 대대적인 재출간이 이루어진다.
[12]
장기표 1991 <《전태일 평전》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조영래>
[13]
이종찬이 조영래의 행동에 대해 상당히 호의를 갖고 있었고, 중정 내부에서조차 조영래 자체는 훌륭한 인물이라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어 생각보다 쉽게 복권 조치가 이뤄졌다고 한다.
[14]
조영래는 '서울대생…' 사건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한 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수배가 되어 긴 도피생활을 한다. 1980년 8월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이종찬 전 원장은 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장을 직접 찾아가 그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가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허문명 "이종찬, "조영래가 살아 있다면 대통령감인데.."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 《동아일보》 2013. 5. 22.)
[15]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토목공학을 독학하여 정부 측의 잘못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16]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변호사 변론선집: 그 인권 변론의 발자취》
[17]
박원순 2003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두레, 423~424
[18]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변호사 변론선집: 그 인권 변론의 발자취》
[19]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변호사 변론선집: 그 인권 변론의 발자취》
[20]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변호사 변론선집: 그 인권 변론의 발자취》
[21]
조영래 "88가합 2897호 준비서면" 1988. 11. 30.
[22]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이범준 지음, 2009)
[23]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변호사 변론선집: 그 인권 변론의 발자취》
[24]
박원순, 2003.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374쪽
[25]
박원순 2003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두레
[26]
조영래 본인이 생전에 《전태일 평전》을 쓴 바 있다. 사망 후에 같은 곳에 묻혔으니 어쩌면 이것도 인연.
[27]
박원순 2003.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한국인권변론사- 가시밭길을 선택한 변호사들》 두레
[28]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1991.)
[29]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1991.)
[30]
가령 부천서 사건에 한 챕터가 할애되어 있지만, 사건 변호사나 피해자와는 전혀 인터뷰하지 않았다.
[31]
《조영래변호사 변론선집》('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1991.)
[32]
천정배의 증언이다. "그때 조 변호사가 청문회를 보더니 좋아하시면서 '아, 우리도 이제 대통령감을 갖게 됐다. 잘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 이후 노무현 의원이 조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와 두 분이 만난 적도 있어요. 제가 노무현 대통령을 가장 먼저 지지하게 된 것도 조 변호사에게 받은 심리적 영향이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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