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2:35:07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colcolor=#191919>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쟁기(1918).svg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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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Hermann Kövess von Kövessháza
파일:F.M.v._Kövess_(BildID_15718304).jpg
이름 Hermann Albin Josef Freiherr Kövess von Kövessháza 독일어
헤르만 알빈 요제프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남작[1][2]
Kövessházi Kövess Hermann 헝가리어
쾨베슈하지 쾨베시 헤르만[3]
출생 1854년 3월 30일
파일:오스트리아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 제국
파일:트란실바니아 대공국 국기.svg 지벤뷔어겐 대공국 테메슈바어
사망 1924년 9월 22일(향년 70세)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공화국
파일:포어아를베르크, 빈, 잘츠부르크의 기.svg
최종 계급 제국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제국원수 계급장.svg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3. 평가4. 가족 관계5.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헤르만 쾨베시 초상화1.jpg 파일:헤르만 쾨베시 초상화2.jpg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의 초상화 [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인이자 제국원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성공적인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으며, 추밀원을 지냈다. 1917년부터 헝가리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8년 11월 3일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역임했다.

2. 생애

쾨베시는 테메슈바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육군 소장인 알빈 비크토어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Albin Viktor Kövess von Kövessháza, 1821–1890)과 트란실바니아의 어느 한 약사의 딸이었던 요한나 레지나 스터징(Johanna Regina Sterzing, 1836-1898) 사이에서 태어났다.[5]

쾨베시의 경우,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난 헝가리계 오스트리아인이었으나, 부모님의 영향으로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한 편이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쾨베시(Kövess) 가문은 원래 헝가리의 '쾨베슈칼러이'(köveskállai) 쾨베시라는 이름을 가진 오래된 귀족 가문으로, 두나운툴(Dunántúl) 지역 내 베스프렘(Veszprém) 주의 쾨베슈칼(Köveskál) 마을 출신이었다. 13세기부터 공식 문서에 이 가문이 등장하며, 이름은 Kues, Kvesd, Kewes, Keoves, Kewessy, Köves, Kövessy 등 다양한 철자로 쓰였다. 1544년 2월 25일, 이 가문 출신의 언드라시 데 케베시(Andreas de Kewes)가 헝가리 국왕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귀족 문장과 영지를 하사받았는데, 그는 당시 궁정 사제였고 후에 베스프렘 주교가 되었다. 이후 18세기에 쾨베시 가문의 한 분파가 오스트리아[6]로 이주하면서 본래의 귀족 칭호인 '쾨베슈칼러이'를 '쾨베슈하지'(Kövessházi)로 변경하였다.[7] 이후 헤르만 쾨베시가 이 분파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헤르만 쾨베시의 어머니인 요한나 레지나 스터징은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혈통과 출신을 가진 독일계 루마니아인이었다.[8]

1864년부터 쾨베시는 부다페스트의 오펜(Ofen)에 있는 중등학교에 다녔고, 1865년 가을부터 하인부르크안데어도나우에 있는 생도학교에 입학했다. 1868년, 즈나임(Znaim) 근처 클로스터브루크(Klosterbruck)에 있는 공병학교(Genieakademie)에서 1년간 수학한 뒤, 의 황립 및 왕립 공병사관학교(k.u.k. Technische Militärakademie)의 공병부(Genieabteilung)로 옮겨 거기서 졸업을 하였다. 1872년 9월 1일, 쾨베시는 의 제2공병연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3년후인 1875년 5월 1일에 중위로 진급한 쾨베시는 1876년부터 1878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다.

1878년 9월 1일부터 헤르만슈타트에 있는 제16보병사단의 참모장교로 배치된 쾨베시는 이듬해인 1879년 6월부터 같은 곳의 제12기병여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동년 11월 1일에는 특별 진급으로 대위가 됨과 동시에 1880년 5월 1일부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사라예보에 위치한 총사령부 참모로 배속된 쾨베시는 1882년, 쾨베시는 남부의 달마티아 전역에 참가하여 크리보시예(Krivošije)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이 공로로 그는 훗날 1890년에 제정된 공로훈장(Signum Laudis)의 동메달을 전시 리본과 함께 수여받을 자격을 얻었다. 또한 1882년 7월 9일 이탈리아 왕관 기사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달마티아 전역 이후, 쾨베시는 예상을 깨고 두 번이나 참모 고급장교 시험("대천사 시험", Erzengelprüfung)에 낙제했다. 이로 인해 그의 승진이 크게 지연되었고,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장교임은 분명했지만, 불운하게도 저조한 시험 성적을 거두자 참모장교로서의 경력은 끝이 나버렸다. 1884년, 쾨베시는 으로 돌아왔고, 제38보병연대 제6중대장을 맡았다. 1886년 11월 1일부터는 렘베르크에 주둔한 제11군단 참모부원이 되었다. 1888년 5월 1일부로 크라쿠프 제56보병연대 제14중대 대위가 되었다. 1890년 5월 1일 특별 진급으로 소령이 되어 제26보병연대 제2대대장이 되었고, 1892년 2월 28일부터는 같은 연대 제4대대장을 맡았다. 1894년 5월 1일 정상적인 진급으로 제72보병연대 중령이 되었고, 1896년 11월 1일 다시 특별 진급으로 제52보병연대 대령이 되었다. 1898년 3월 제23보병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지휘 하에 이 연대는 주둔군 중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며,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로부터 직접 여러 임무를 부여받았다.

1900년경, 쾨베시는 주둔부대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쾨베시는 몇개의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번째로 황립 및 왕립 군대 중 가장 젊은 대령이었다는 점과 두번째로는 가톨릭이 우세한 군부 내에서도 흔치 않은 개신교 신자라는 점이었다.[9] 그리고 쾨베시가 가진 또 다른 세번째 특징은 그가 평소에 건선을 앓고 있었는데, 이 피부병으로 인해 당시 장성들의 기본 소양이었던 콧수염이 쾨베시한테만큼은 면제되고 있었으며, 덕분에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쾨베시는 승진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4월에는 세르비아의 타코보(Takovo) 십자 훈장 2등급을 수여받았고, 이 훈장을 받은 것으로 시작해서 1902년 4월에는 철관 훈장 3등급을,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또한 1902년 10월부터 1906년 11월까지 제15보병여단장과 제14군단 장교학교장을 겸임했다. 특히 쾨베시는 제15보병여단장에 재직했을 당시, 콘라트 휘하의 제8보병사단 소속이었다.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은 2개의 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쾨베시의 제15보병여단과 비크토어 단클의 제16보병사단이었다. 이 기간동안 제8보병사단은 콘라트의 지휘 아래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정예 부대로 평가 받았는데, 그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데 있어 여단 지휘관인 쾨베시와 단클의 훌륭한 지휘 능력과 참모로서의 자질, 그리고 둘의 성실한 협력 관계가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알프스산맥에 자리를 잡아 산악 지형이 많은 티롤의 특성상 산악전 능력 배양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티롤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콘라트의 제8사단은 산악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는데, 콘라트는 높은 고도, 험준한 지형, 극한의 기후 등 독특한 환경 조건으로 인해 평지에서의 작전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산악전에서의 실전적 훈련을 강조했고, 스스로도 알펜포어아인(Alpenverein)[10]에 가입해 현지 지형을 답사하곤 했다. 그런 콘라트의 밑에서 쾨베시와 단클은 그의 막료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는데, 이들의 능력 있는 보좌와 협력이 빛을 발한 것이 바로 1905년 9월 남티롤 논탈 계곡(Nontal)에서 열린 황제 기동훈련이었다. 당시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은 이탈리아 왕국군을 가정한 "적군" 역할과 "아군"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역할을 모두 수행했는데, 양쪽 역할 모두에서 콘라트는 공격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쾨베시와 단클이 이끄는 두 여단의 뛰어난 기동과 전투 수행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8보병사단의 이런 훌륭한 성과는 훈련을 참관한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1년후에 콘라트가 참모총장에 임명되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쾨베시를 비롯한 콘라트 휘하 지휘관들의 능력이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요한 지휘관 역할을 맡게 되는 발판이 되었다.

1903년 4월 바덴 대공국으로부터 베르톨트 공로훈장 2등급을, 1904년 1월에는 제링겐 사자 훈장 1등급을 받았다. 1906년 11월부터 1910년 4월까지는 인스브루크에서 콘라트 휘하의 제8보병사단을 지휘봉을 잡았다. 1907년 5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1908년 8월 12일 레오폴트 훈장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1910년부터 1911년까지 1년 동안 티롤 요새화 공사와 요새의 총 감독관을 맡았다. 1911년 6월, 쾨베시는 다시 헤르만슈타트로 돌아와 제1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트란실바니아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곧이어 1911년 8월 비밀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1911년 11월 1일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12년 8월, 제95보병연대 명예대령(Oberstinhaber)으로 임명된 직후, 쾨베시는 헤르만슈타트에서 발생한 종교 관련 사건에 연루되었다. 당시 약 400명의 독일어권 가톨릭 신자들이 시 교구 사제였던 에곤 호헨로헤 공작(Egon Prinz Hohenlohe)과의 갈등 끝에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가톨릭이 우세했던 궁정 사회에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호헨로헤 공작은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보낸 서한에서 쾨베시가 이 문제를 방관하고 있으며, '로스 폰 롬 운동(Los von Rom Bewegung)'[11]을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는 쾨베시를 시기하던 "동료" 장교들에게 좋은 공격 기회가 되었고, 조기 퇴역 압박에 직면했다. 다행히도 황제 주둔 시절 쾨베시의 공적을 기억하고 있었고, 덕분에 그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다만 1914년 3월 7일에 철관 훈장 1등급을 받았는데, 이는 통상적인 경우보다 1년 정도 늦은 수여였다고 한다.

2.1. 제1차 세계대전 시기

2.1.1. 동부전선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쾨베시는 트란실바니아 제12군단장으로서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다. 당시 쾨베시는 모든 군단장들을 통틀어서 제일 고참이었지만,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기병대장 비크토어 단클 보병대장에 밀려 군사령관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쾨베시는 루돌프 폰 브루더만 기병대장 휘하의 제3군에 배속되었고, 제12군단을 지휘했다.

8월 21일 갈리치아 동부 국경의 야로스와우(Jarosław) 근처 졸로치우(Zolochiv) 지역에서 양측 기병 정찰대 간의 첫 대규모 전투가 발발했다. 제11군단이 렘베르크 지역에 남아있는 동안 쾨베시의 제12군단은 8월 26일부터 포모리야니(Pomoryany)에서 동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8월 28일부터 시작하여 이틀 연속 지속된 그닐라 리파(Gnila Lipa) 전투에서 니콜라이 루스키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제3군에게 패배했다. 당시 제3군은 115개 대대와 376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 제3군은 약 200개 대대와 685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어 전력의 열세가 컸다.

그의 제12군단은 루돌프 폰 브루더만 기병대장 휘하의 제3군에 예속되어 있었고, 제3군단, 제11군단과 함께 집단군(Korpsgruppe Kövess)을 이루어 여러 기병사단의 지원을 받으며 드네스터 강 교두보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때 제3군과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기병대장이 지휘하는 제2군[12] 휘하의 제7군단이 참여한 작전이 시작되며 제1차 렘베르크 전투가 발발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군은 공세를 맞아 거세게 반격했고, 졸로치우 지역에서 10만 명 이상의 병력으로 흘리냐니(Hlyniany)를 거쳐 렘베르크 방향으로 돌파에 성공했다.

로하틴-바부호프 지역에서 제7군단이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간신히 저항했으나, 갈리치아의 오스트리아 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9월 7일, 러시아군은 격렬한 전투 끝에 그루데크(Gródek) 시를 점령했다. 9월 8일, 베레슈카 강 중류에서 제3군이 반격을 시도했으나 9월 10일까지 공격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9월 11일, 산(San) 강 뒤로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쾨베시의 장남이자 황립 및 왕립 카이저경보병연대 소속 초임장교 벨러 쾨베시(Béla Kövess)[13]가 우흐누프(Uhnów) 근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로써 쾨베시는 브루실로프 공세 때 아들을 잃은 콘라트, 허저이, 플란처발틴과 함께 동부전선의 1차 갈리치아 전역에서 아들을 잃은 고위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다.

후퇴하는 군대의 보급품을 운반하던 열차들이 진로에서 막히자, 브루더만은 보급품들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보급열차들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쾨베시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남자다운 인물이 필요하다. 군복을 입은 노파들과 신경쇠약자들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라는 신랄한 비판을 남겼다.[14]

9월 2일, 제국군의 전반적인 재편성 과정에서 쾨베시의 제12군단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휘하의 제2군으로 재편입되었다. 10월 말, 바르샤바 전투에서 힌덴부르크가 패배하고 후퇴하면서, 이에 연동하여 쾨베시의 제12군단도 산 강 전선에서 철수해야 했다. 11월 8일, 폴란드 전선의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쾨베시의 제12군단은 카르파티아에서 철수하여 실레지아로 철도 이동을 시작했고, 11월 13일 루블리니츠(Lublinitz)에 도착했다. 이후 보이르슈의 슐레지엔 향토방위군 우측에 배치되어 러시아 제4군과 대치했다. 1914년 말 우치 전투에서 제12군단은 벨하토프(Belchatow)와 표트르쿠프(Piotrków)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12월 12일에는 제2군의 우익으로서 바르타강 양안의 프루시에츠코(Prusiecko) 지역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 독일 제국은 쾨베시의 공적을 인정하여 1915년 3월에 철십자 2등급을, 5월에는 적십자 공로성 훈장을, 7월에 1등급을 수여했다.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시작 후, 쾨베시 군집단(Armeegruppe Kövess)은 라돔 지역에서 비스와강을 향한 공격을 재개했다. 7월 21일에는 보이르슈의 독일 국토방위군단(Landwehrkorps)과 협동작전으로 이반고로드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이어서 비스와강 도하 작전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공으로 8월 3일에 레오폴트 훈장 대십자를 수여받았다. 8월에도 쾨베시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8월 초 델랴틴(Deliatyn) 주변에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을 여러 차례 저지했으며, 중순에는 스타니슬라우와 예주폴(Jezupol) 남쪽 지역에서도 방어에 성공했다. 8월 중순 이후에는 공세로 전환하여 클리카프카(Klikawka) 강과 부크강을 연이어 도하했고, 이바니우(Ivaniv)와 코스탸친티우(Kostiantyniv) 북쪽에서는 네미리우(Nemyriv)를 비롯한 여러 거점을 장악했다. 이후 상부 풀바(Pulwa) 강 방면으로 진격을 이어갔다.

2.1.2. 발칸 정복에 성공

2.1.2.1. 세르비아 정복
1915년 9월 28일,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기간에 공을 세운 쾨베시는 제12군단장직을 요한 폰 엔리케스(Johann von Henriquez, 1861-1924)에게 넘기고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 기병대장으로 부터 지휘권을 양도받아 새로 편성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15년 10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칸 전선에서 동맹국 세르비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다. 독일의 마켄젠 원수가 전체 작전을 지휘했고, 쾨베시의 제3군은 이 작전의 핵심 부대 중 하나였다. 당시 세르비아는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이후 전략적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불가리아의 참전으로 동서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쾨베시의 제3군은 1915년 10월 초 마켄젠 군집단 예하에서 독일 제11군, 불가리아 제1군과 협력하여 도나우강 사바강 도하 작전을 감행했는데, 쾨베시는 샤바츠(Šabac)와 벨리코 그라디슈테(Veliko Gradište)사이 전선에서 베오그라드 동부 고지 점령작전에 가담했다. 강력한 세르비아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도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10월 9일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세르비아군은 크라구예바츠(Kragujevac)와 니시 방면으로 후퇴했지만, 불가리아의 참전으로 살로니카로 이어지는 철도선이 차단되어 연합군으로부터의 지원과 포탄 보급이 불가능해졌다.

11월 코소보 공세에서는 북쪽에서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며 세르비아군을 남쪽으로 압박했다. 마켄젠은 세르비아군을 코소보 평원에서 포위하여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려 했고, 쾨베시의 제3군은 이 계획의 북부 지역을 담당했다. 11월 23일에는 그의 제59보병사단이 미트로비차에 도달하는 성과를 거뒀다. 혹한의 날씨 속에서도 작전을 멈추지 않았으며, 제10산악여단이 4,921피트 높이의 빙판길을 극복하며 진격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추위로 인해 30명의 병사가 동사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쾨베시는 작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이러한 끈질긴 추격 작전 끝에 11월 말에는 마침내 세르비아 전역 점령을 완료했다. 이페크(Ipek) 지역에서만 80문의 포, 160대의 탄약 수송차, 40대의 자동차, 12대의 야전용 제빵차, 수천 정의 소총과 기타 군수물자를 노획했고, 하루 동안에만 2,000명이 넘는 포로를 획득했는데 그중 300명은 몬테네그로인이었다. 플레블례(Plevlje)에서 전진한 쾨베시의 부대는 브라나 고라(Vrana Gora) 남쪽의 몬테네그로 진지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일부 부대는 타라(Tara) 협곡까지 추격해 글리바치(Glibaci)에서 적 대대를 격파했다. 또한 벨로폴례(Bjelopolje) 남서쪽의 타라카이에(Tarakaie)와 베라네(Berane) 북쪽의 고두사(Godusa)에 있는 적의 강화된 진지도 점령했으며, 타라에서의 전투에서는 3문의 산악포, 2문의 야전포, 1,200정의 소총을 추가로 노획했다. 세르비아군에게 3만 명의 사상자와 199문의 포, 150대의 차량 등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알바니아 방향으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비록 세르비아 군대를 완전히 포위하여 섬멸하진 못했지만, 발칸반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오스만 제국과의 육로 연결 확보로 동맹국의 발칸 장악력 강화라는 군사적 성과를 남겼다. 점령 후에는 북부와 중부 세르비아, 그리고 코소보 서부지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베오그라드에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특히 무엇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어서 베오그라드 점령은 1914년 초기 실패를 만회하는 상징적인 승리로 평가받았다. 쾨베시는 세르비아 점령에 대한 공으로 11월 28일에 군사공로십자 1등급과 이후 도입된 검날 문양도 추가로 수여받았으며, 11월 29일에는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통보받았고, 12월 4일에 공식으로 수여받았다. 이는 쾨베시가 이번 세르비아 작전에서 거둔 일련의 성과들이 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입증한 중요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훗날 쾨베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가장 성공적인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주요 업적이 되었다. 이 작전으로 인해 세르비아는 40만 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알바니아 산맥을 넘어 아드리아해 연안으로 후퇴하는 대후퇴를 감행해야 했다. 혹한과 질병, 알바니아 게릴라들의 공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결국 연합군의 도움으로 코르푸 섬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2.1.2.2. 몬테네그로 정복
1916년 1월, 이번에는 몬테네그로를 향한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약 101,000명의 보병, 1,170명의 기병, 947문의 포를 동원했고, 몬테네그로군은 52,400명의 병력과 155문의 포로 맞섰다. 몬테네그로 국경에는 4개 주력부대, 약 35,0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서부방면에서는 사르코티치가 이끄는 제19군단이 작전을 전개했다. 이 군단은 69개 대대, 2개 기병중대, 63개 포병부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총 57,570명의 병력, 170명의 기병, 254문의 이동식 포, 360문의 고정식 포, 58문의 해군포를 보유했다. 로브첸(Lovćen) 산은 해발 1,749m 높이로 코토르 만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몬테네그로군이 프랑스제 포병을 배치하고 있었다. 로브첸 산 공격은 소르시치의 부대(6,150명, 16문의 포)와 브라운의 47보병사단(16,500명, 30문의 포)이 담당했다. 1월 8일부터 시작된 공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진행되었고, 48시간 만에 크르스타츠 고개와 로브첸 정상을 점령했으며, 1월 10-11일에는 보스니아계 부대들이 로브첸 산을 완전히 장악했다.

동부방면에서는 쾨베시의 제8군단이 두 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제62사단(칼저 폰 마스펠트 중장)과 제53사단이 타라강을 따라 플레블랴와 비옐로 폴리에 방향으로 진격하며 몬테네그로군을 견제했고, 노비 파자르에서 출발한 제10산악여단과 제18산악여단이 1월 10일 베라네를 점령하는 등 포위망을 좁혀갔다. 프리슈티나에서 출발한 제205여단과 제9산악여단은 서쪽으로 진격해 페치와 벨리카를 점령했고, 제57보병사단은 프리즈렌에서 출발했다. 양면작전의 성공으로 1월 13일에는 수도 체티네가 함락되었다. 체티네를 빼앗긴 니콜라 1세는 휴전을 요청했지만, 콘라트 일반참모장의 지시로 공세는 계속되었다. 결국 1월 16일 포드고리차마저 점령되자 몬테네그로는 1월 23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 성공으로 쾨베시는 1916년 1월 12일, 은 공로훈장을 전시 리본과 함께 받았고, 1월 24일에는 바이에른 왕국으로부터 군사공로훈장 대십자(십자검 포함)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2월 26일에는 제국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서부방면을 지휘한 사르코티치는 '로브첸의 남작' 작위를 받았다.
2.1.2.3. 알바니아 공략
몬테네그로 점령 직후인 1월 16일에 쾨베시는 군사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3월 1일 비크토어 베버 폰 베베나우(Viktor Weber von Webenau) 중장에게 총독직을 인계하고 알바니아 공략에 나섰다. 3군의 일부 병력과 카를 폰 플란처발틴의 제19군단을 이끌고 1월 말 스쿠타리와 알레시오[15]를 점령한 후 티라나 방면으로 진격했다. 2월로 접어들 때에는 엘바산(Elbasan)과 베라트(Berat)를 점령하며 알바니아 중북부 지역을 장악했고, 이탈리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항구도시 두라초를 포위했다. 이 지역의 군벌이자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던 에사트 토프타니(Essad Toptani)가 농성을 펼쳤지만, 나흘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에사트 토프타니의 알바니아군을 격퇴했고 이탈리아 왕국군도 해상에서 철수하면서 쾨베시는 두라초 점령에 성공했다.

이때 쾨베시의 공적은 가히 대단했는데, 산악전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험난한 지형과 겨울 날씨를 극복하였고, 이 작전의 성공으로 발칸 반도 서부 전선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아드리아해 연안을 전부 손에 넣었고, 이탈리아 왕국의 발칸 진출을 사실상 저지하며 발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쾨베시는 오헝군, 독일군, 불가리아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고 각국 군대의 특성과 지휘체계를 효과적으로 조율했다. 특히 험준한 산악지대와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서도 해군력과의 협동작전을 통해 연안 요새들을 효과적으로 점령했고, 베오그라드 점령부터 알바니아 해안까지의 연속적인 작전을 통해 발칸반도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단기간에 확보하며 전략목표를 달성했다. 이러한 성공적인 작전 수행 이후 쾨베시는 3월부터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환 배치되었다.

2.1.3. 트렌티노 공세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해 1916년 3월 17일, 카타로에 주둔중이던 쾨베시 제국상급대장의 제3군은 남서부 전선으로 이동되었다. 콘라트 일반참모장과 오이겐 대공 대공은 아시아고 방면의 이탈리아 왕국군 전력이 약하다고 분석한 후 쥐트티롤에서 돌로미티 산맥을 통해 이탈리아군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고, 이 작전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쾨베시의 제3군을 불러들인 것이었다.[16] 그리하여 제3군은 클라겐푸르트, 볼첸을 거쳐 트리엔트에 도착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를 시작한 지 한달이 넘은 4월 30일에 쾨베시는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부터 왕관 훈장 대십자를 받았고, 4월과 5월 사이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은/금 임티아즈(Imtiaz) 메달을 수여받았다.

콘라트 일반참모장은 그의 총괄 아래에서 비크토어 단클의 제11군과 쾨베시의 제3군을 합쳐서 오이겐 대공의 군집단으로 편성, 트렌티노 지역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공격해 베네토 평원으로 진출한다는 이른바 트렌티노 공세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기본적인 목표는 이손초강 일대에 가해지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압박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만약 작전이 매우 잘 풀려서 베네치아 베로나까지 점령에 성공한다면 아예 이손초 일대의 이탈리아 왕국군을 포위섬멸 하는 것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17] 이를 위해 콘라트는 3월부터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트렌티노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18,000톤의 군수물자, 280개 대대(약 30만 명), 1,447문의 포가 다른 전선에서 이동되었는데, 이는 이탈리아군의 20만 명, 850문의 포에 비해 우세한 전력이었다. 특히 38cm와 42cm 해군포 등 대구경 화포들을 배치하여 화력의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하지만 적의 의심을 피하고 열악한 도로와 철도망을 활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대규모 이동은 쉽지 않았다.

쾨베시의 제3군은 제20군단과 협력하여 공세의 좌익을 담당했다. 북동쪽 방면인 수가나 계곡을 통해 보르고(Borgo) 시를 거쳐 아스티코(Astico) 계곡과 전략적으로 중요한 아시아고(Asiago)와 아르시에로(Arsiero) 도시들을 점령하고 브렌타(brenta) 계곡을 따라 최대한 깊숙이 진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3월부터 4월까지 이어진 혹독한 겨울 날씨가 준비를 크게 방해했다. 고지대의 고개들은 눈에 덮여 있었고, 도로들은 눈사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철도 운송이 제한되고 도로 교통이 방해를 받았으며, 야외에 노출된 보급품과 식량이 손상되는 일도 있었다. 이에 콘라트는 수천 명의 군인과 동원된 노무자들을 투입해 도로와 오솔길을 정비하고, 창고와 케이블카를 새로 건설하며, 병력을 위한 대피소를 준비하는 등의 작업을 진행한 뒤 공격 개시일을 5월 15일로 연기했다.

5월 15일 오전 6시, 1,500문의 포가 이탈리아군 진지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고, 오전 9시부터는 융단폭격이 이어졌다. 이탈리아군의 요새들[18]은 대구경 박격포의 집중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특히 쾨베시가 맡은 전선 구역에서는 초기에 큰 성과를 거두어 브렌타 강을 통제하는 아르멘타라(Armentara) 산맥과 이어서 5월 28일에는 아시아고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중앙 지역에 국한된 성과였다. 정작 쾨베시가 이끄는 제3군 주력은 발사이가나(Valsugana) 계곡과 오스페달레토(Ospedaletto) 방면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연락과 보급이 어려웠고, 오이겐 대공의 지시에 따라 포병의 전진 배치를 기다리며 신중하게 진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6월 4일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어 부코비나 전선이 붕괴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다급히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켜야 했고, 이로 인해 티롤 공세는 6월 16일에 중단되었다. 쾨베시의 부대들은 겨울진지(Winterstellung)선으로 철수하며 점령했던 지역의 일부를 포기해야 했다. 이탈리아군은 즉시 반격을 개시했는데, 피에트로 프루고니(Pietro Frugoni)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 제5군이 비첸차 트레비소 사이 평원에 배치되어 5개 군단, 10개 사단, 약 180,000명의 예비대를 투입했다. 7월 27일까지 이어진 반격으로 이탈리아군은 잃었던 영토의 절반 정도를 회복했다.

애초 콘라트의 구상은 쾨베시의 제3군이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 지역의 발사이가나(Valsugana) 계곡에서, 단클의 제11군이 발라르사(Vallarsa) 계곡에서 진격해 이탈리아군을 포위하고 베네치아 아드리아해로 직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클의 제11군은 서쪽 발라르사에서 주그나(Zugna) 산과 부올레(Buole) 고개의 강력한 저항에 막혔고, 쾨베시의 제3군도 발사이가나 계곡에서 진전이 더뎠다. 비록 쾨베시가 중앙의 제20군단과 함께 아시아고까지는 진출했지만, 결국 양 군 모두 작전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이렇듯 티롤 공세에서 쾨베시는 콘라트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으며 주요 공격 부대를 이끌었지만, 제3군의 실패는 작전 전체의 실패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5월 15일부터 6월 15일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5,000명의 전사자, 23,000명의 부상자, 2,000명의 포로 등 총 30,000여 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는 쾨베시 개인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독일군의 지원 부재, 험난한 지형, 불리한 기상 조건, 그리고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한 급박한 병력 분산이 빚어낸 결과였다.

1916년 6월 4일 동부전선에서 개시된 브루실로프 공세의 즉각적인 성공으로 인해 콘라트 이탈리아 전선 티롤 공세를 중단해야만 했다. 당시 쾨베시가 지휘하던 제3군은 3월부터 티롤 공세를 위해 남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쾨베시의 공적은 인정받아 6월 19일 독일 기사단의 마리아너십자(Marianerkreuz) 목걸이 배지를 수여받았다. 이후 7월 말 그의 제3군은 동부전선으로 급파되어 독일 남부군(Südarmee)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7군 사이의 스트리파(Strypa) 전선에 배치되었다. 제3군은 독일 제국군 크라벨 군단(Korps Kraewel)의 제105사단, 제119사단의 증원을 받았으나, 8월 7일 치열한 러시아군의 공격에 심각한 손실을 입고 후퇴를 강요당했다.

카를 대공 휘하의 군집단이 마라마로스시게트(Máramarossziget)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예하의 제7군 사령관이었던 카를 폰 플란처발틴 제국상급대장은 러시아군의 공격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전선에 과도한 병력을 배치한 실책을 저질렀다. 그 결과 제7군은 벤니기 군단(Gruppe Benigni)이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일부 사단은 3,000명 이하로 감소했으며, 러시아군에게 38,000명의 포로와 49문의 포를 빼앗기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50km 후퇴하며 약 10만 명의 병력 손실이 발생했고 6월 18일 체르니프치, 29일에는 콜로메아(Kolomea)를 상실하는 등 연이은 실패로 인해 플란처발틴은 9월 8일 독일 제국군의 요구로 제7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동부전선이 붕괴 위기에 처해있었고, 특히 헝가리 국경 지역이 러시아군과 새로이 참전한 루마니아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카를 대공에게는 전장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쾨베시는 동부전선에서의 풍부한 전투 경험과 발칸전선에서의 성공적인 지휘 능력을 입증한 바 있던 장군이었다. 그의 능력은 동맹국들에게도 인정받아 9월 16일에는 불가리아 왕국으로부터 성 알렉산더 훈장 대십자(십자검 포함)를, 9월 30일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대금 리아카트(Liakat) 메달과 철반월장(Iron Crescent)을 수여받았다. 카를 대공은 이러한 쾨베시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 위기 상황을 타개할 적임자로 판단했다. 따라서 10월 20일, 쾨베시는 카를 군집단 예하의 제7군 지휘권을 인수받았고, 기존 쾨베시가 지휘하던 제3군은 제7군 임시 사령관이었던 카를 폰 키르히바흐 기병대장이 인수하는 형태로 지휘관 교체가 이루어졌다.

제7군을 인수한 쾨베시는 카르파티아 산맥 루마니아 국경에서 러시아 제국군 헝가리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러시아군은 루마니아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공세를 계속했으나, 쾨베시의 군대는 주야로 이어지는 치열한 전투에서 이를 저지했다. 특히 카르파티아 산맥의 주요 도로와 고개에서 러시아군이 끈질기게 공격을 시도했으나, 후고 폰 하버만(Hugo von Habermann)과 쇼이켄슈틸 장군 휘하 부대들의 성공적인 방어로 러시아군은 최소 3만 명의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왈라키아 평원에서 루마니아군이 결정적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도 러시아군은 쾨베시의 부대를 상대로 성과를 얻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쾨베시는 브루실로프 공세 과정에서 상실했던 지역들을 상당 부분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1916년 12월 10일 대군사공로훈장(Nagy Katonai Érdemérem)을 수여받았다.

2.1.4. 부코비나 수복작전

1917년 봄과 초여름, 쾨베시는 부코비나 수복작전을 준비했다. 이 시기에 기존 훈장들에 새로 제정된 '검'을 추가로 받았다. 1917년 7월 1일에 시작된 케렌스키 공세 동안, 쾨베시의 제7군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의 러시아 제8군과 대치했다. 당시 제7군은 다음과 같은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 루트비히 폰 파비니(Ludwig von Fabini) 제17군단 - 제8기병사단, 제30·34사단
  • 리하르트 폰 콘타(Richard von Conta) 독일 카르파티아 군단 - 독일 제1·200사단, 제40 혼베드사단
  • 사무엘 아포르(Samuel Apór) 기병군단 - 제5·6기병사단
  • 클레투스 폰 피힐러(Kletus von Pichler) 집단군 - 제11·59사단
  • 후고 폰 하버만(Hugo von Habermann) 제11군단 - 제51·74사단
  • 알프레트 크라우스 집단군 - 독일 제117사단

이들 부대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고개들을 지켜냈고, 이후 반격으로 전환했다. 7월 19일부터 시작된 타르노폴 공세와 연계하여, 쾨베시의 제7군과 카를 크르지테크의 제3군은 공동으로 부코비나 지방의 수복을 진행했다. 7월 말까지 제3군의 카를 리츠만(Karl Litzmann) 집단군이 스타니슬라우와 나드보르나(Nadworna)를 탈환했고, 부코비나에서의 진격이 계속되었다. 쾨베시의 군대는 드라고이에사(Dragoiessa) 동쪽 고지대와 킴폴룽(Kimpolung) 북쪽 지역을 확보했고, 코마네스티에(Komanestie)에서는 헝가리 제101 보병연대(Bekestsaba)의 두드러진 활약으로 러시아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뛰어난 공격을 감행했다. 8월 3일에는 수도인 체르노비츠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세 번째로 해방시켰다. 러시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도시를 포기했고, 프루트강 드네스트르강 사이에서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격에 밀려 국경 쪽으로 후퇴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새로운 제1군(제11, 23, 17군단)을 투입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라다우츠-구라후모라(Radautz-Gurahumora) 선으로 후퇴를 강요당했다.

막대한 전공을 쌓은 쾨베시는 1917년 8월 5일, 제국원수에 진급하였다. 이는 콘라트에 이어 합스부르크 왕가 구성원이 아닌 인물로서는 두 번째로 이 계급에 오른 것이었다. 8월 6일에는 빌헬름 2세 카를 1세 체르노비츠에 방문하였고, 평의회의 심사끝에 8월 14일, 쾨베시에게 서훈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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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8월 6일 체르노비츠에 입성하는 카를 1세와 쾨베시, 이때 쾨베시는 전날 제국원수에 진급하였다. 다만 입성 당시까지는 제국상급대장 칼라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파일:Kovess_hermann_kovesshaza_FM.jpg
원수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쾨베시, 제국원수 칼라장도 착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훈 사유로는 "1915년 8월 제12군단장으로서 이반고로드 요새 점령, 그리고 군사령관으로서 1915년 10월부터 1916년 2월까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정복 및 북알바니아 점령 시 보여준 승리의 지휘력에 대해"였으며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의 2번째로 높은 등급인 지휘관십자(Kommandeur des Militär-Maria-Theresien-Ordens)를 수여받았다. 또한 같은 달 17일에는 헝가리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계속해서 제7군 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를 러시아군에 대비하며 부코비나 지역 방어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고, 1917년 12월 러시아와의 휴전 이후에도 쾨베시의 제7군은 평화조약 체결까지 기존 진지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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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베시 장군[19]이 1917년 8월 17일 슐로스 바르톨츠 궁전[20]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역사상 180번째 수여식에서 아르츠 장군과 악수하는 모습.

1918년 1월 16일, 콜로즈바르에서 쾨베시는 제7군[21]에 제1군을 합친 쾨베시 군집단(Heeresfront Kövess)의 사령관이 되어 도브루자에서 갈리치아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몰도바 전선을 담당하였다. 제7군은 부코비나 산악 카르파티아 지역을, 제9군단과 제21군단을 휘하에 둔 제1군은 트란실바니아의 국경선 방어를 담당하였다. 1월 말경 쾨베시의 군대는 여러 지역에서 활발한 포격전을 벌이며 방어선을 유지했다. 3월에 들어서자 쾨베시는 제7군으로 부코비나에 속한 세레트-구라후모라-수차바 삼각지대를 점령하였다. 이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 루마니아가 전쟁에서 이탈함에 따라 군집단은 1918년 4월 5일 해체되었고, 4월 15일에는 제1군과 제7군 사령부도 해산되었다. 이후 지역 안전 유지를 위해 크론슈타트의 에메리히 허드피 폰 리브노(Emmerich Hadfy von Livno) 제8군단이 새로운 제1사령부로, 체르노비츠의 하버만 제11군단이 새로운 제7사령부로 재편되었다.

2.1.5. 전쟁 말기와 그 이후

3월 26일, 쾨베시는 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 슈테판 훈장 대십자(Szent István-rend nagykeresztje)와 2년 3개월 전에 수여받았던 독일 제국의 저명한 군사 훈장 푸르 르 메리트에다가 백엽을 추가로 수여받았다. 이후 1918년 5월, 잠시 현역에서 물러나 부인과 함께 알타우제(Altaussee)로 휴양을 떠났다. 9월 4일에는 몰타기사단 공로훈장 대십자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일, 불가리아가 항복하고 협상국의 군대들이 세르비아로 진격하자 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쾨베시는 새로 편성된 발칸 군집단(Heeresgruppe Balkan)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임무는 아드리아해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력은 한참 부족한데다 장비와 보급 상태까지 열악했고, 협상국의 압도적인 병력과 제국의 내부 붕괴로 인해 이 임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속에서 10월 중순 협상국이 니시를 점령하니, 쾨베시는 각 부대들에게 도나우- 사바-드리나 강 후방으로의 철수 명령을 내리며 어떻게든 방어선을 구축해보려 시도했으나 군사력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병력 부재로 실패하였다. 전선이 붕괴되어 방어가 실질적으로 무의미해지자 발칸 군집단의 지휘권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인계하고 쾨베시는 티롤 군집단의 사령관이 되었지만, 여전히 발칸에 남아 책무를 수행중이었다.

1918년 10월 31일에 헝가리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을 선언했고, 1918년 11월 3일,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같은 날, 카를 1세 황제는 퇴위하기 직전 마지막 명령으로 쾨베시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총사령관(Armeeoberkommandant)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사실 이 임명에는 복잡한 이면이 숨어있었다.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 전날인 11월 2일, 휴전 체결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던 카를 1세는 처음에 아르츠 일반참모장에게 총사령관직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카를 1세의 측근으로서 함께 주요 전략적 결정을 내리고, 제국의 주요 군사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던 아르츠는 이미 카를 1세의 의도와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휴전 체결이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책임[22]을 생각하면 제국 해체 과정에서의 책임 소재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의 휴전 조건 이행에 대한 책임까지 생각해 봤을 때 제국 해체 과정에서 최고사령관이 져야 할 정치적, 군사적 책임은 실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을 우려한 아르츠가 이를 거절하였다.

그 날 아르츠가 " 황제가 오늘, 11월 2일 쾨베시 원수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쾨베시 총사령관이 바덴바이빈 최고사령부에 도착할 때까지 아르츠 제국상급대장이 직무를 대행한다"라며 일방적으로 쾨베시의 총사령관 임명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쾨베시가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정작 발칸전선에서 한창 작전 중이던 쾨베시는 자신의 총사령관 임명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즉, 카를 1세 아르츠는 휴전 협정의 책임을 새로운 총사령관에게 이전하고, 날짜를 소급 적용하여 법적인 책임까지 회피를 하는 형태로 실제 협정은 아르츠가 처리하되 공식적 책임은 쾨베시가 진다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당연하지만 쾨베시는 정책 결정보다는 야전 사령관으로서 주로 전술적인 임무를 수행하며 실제 전투 지휘에 집중했을 뿐 정치적 결정과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왜 하필이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느냐의 의문에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카를 1세 아르츠가 단순히 쾨베시에게 책임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복잡한 정치-군사적 상황에서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쾨베시가 정책 결정자로서의 업무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치적 논란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쾨베시가 일찍이 군사적 능력은 검증된 야전 사령관이다보니 군대 해체 과정을 실무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경험도 보유하고 있었다. 실제로 쾨베시는 후에 군대 해체와 병력 귀환이라는 실무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그가 정치적 책임보다는 실무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적임자였음을 보여줬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일리있는 인사 선정이었다.

아무튼 이런 수뇌부에서의 결정을 알 리가 없는 쾨베시는 11월 7일이 되어서야 뒤늦게 본인의 총사령관 임명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야한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였다. 이미 제국이 해체된 시점에 헝가리 시민권자인 자신에게 있어서 이 총사령관 임명은 의미도 권한도 없었다. 거기다 더해 혼란스러운 후방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도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쾨베시는 오직 황제에 대한 충성만으로 이를 군말없이 수락, 이미 헝가리 보이보디나 어퍼틴(Apatin)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11월 9일에 에 도착했고, 11월 11일에 바덴바이빈 최고사령부에 도착했지만 이미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은 한참전에 체결된 상태였다.

쾨베시의 주요 임무는 군 최고사령부(AOK)의 업무 종결을 관리하고, 군대 해체 과정을 감독하여 병사들의 본국 송환과 안전한 귀향 보장을 위한 지원도 조직하였다. 다만 신생 공화국 당국과의 갈등 조정도 맡아서 처리하였는데,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는 쾨베시로서는 갈등 조정에 한계가 있었던지라 새로운 공화국 정부 대표들과 지속적인 갈등 관계를 유지하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왕국이 휴전 발효 시점에 대한 해석 차이를 이용해 공격을 감행하자 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인들의 피해가 발생했고, 쾨베시는 이탈리아의 기만적 행위를 지적하며, 이탈리아는 항상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약을 해석한다면서 1896년 에티오피아 전쟁 시기와 비교하며 이탈리아의 조약 해석 방식을 비판하였다.

그는 가능한 한 질서 있게 군대를 해체하려 노력했다. 12월 1일이 되자 실질적인 군사 지휘 기능은 종료되었고, 12월 3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완전한 해체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12월 19일 되자 쾨베시는 공식적으로 지휘권을 반납하였고, 그 다음 날인 12월 20일을 기점으로 마침내 임기가 종료되며 최종적으로 총사령관 직책에서 물러났다. 마침내 쾨베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2.2. 은퇴 후

1918년 말, 쾨베시는 공식적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부다페스트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오가며 검소한 환경에서 지냈다. 1919년 5월 초, 헝가리의 일부 군 장교들이 쾨베시에게 카로이 정부에 대항하는 '백군'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와 함께, 자신의 헝가리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쾨베시는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단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퇴역 군인 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그렇게 남은 여생을 보내던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남작은 1924년 9월 22일, 70세의 나이로 에서 뇌졸중으로 급작스레 사망했다. 그의 전우이자 친구였던 샨도르 수르머이 장군은 그의 사망 소식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Egyik legjobb barátomat vesztettem el az elhunytban. Körülbelül húsz évvel ezelőtt ismerkedtem meg vele, és azóta csak becsülni tudtam őt… Valósággal atyai szívvel bánt alárendeltjeivel, akik természetesen rajongtak érte. Az volt az elve, hogy minden egyes ember élete szent, s éppen ezért minden harci sikert a lehető legkisebb emberáldozattal kell elérni. Vakon bíztak benne katonái az utolsó szálig. Mert tudták, hogy az a helyes, amit a tábornagy parancsol s úgy helyes, ahogyan ö kívánja. Csodásán nagy volt a katonai tudása. Minden feladatot a kivételes elme biztosságával oldott meg. Egyik legjellemesebb és legderekabb fia volt hazájának, s minden magyar ember büszke lehet arra, hogy Kövess Hermann báró magyarnak született."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을 잃었다. 약 20년 전에 그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부성애로 부하들을 대했고, 그들은 당연히 그를 열렬히 따랐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따라서 모든 전투의 성공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인명 희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그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원수가 명령하는 것이 옳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군사적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모든 임무를 탁월한 정신으로 해결했다. 그는 조국의 가장 성실하고 훌륭한 아들 중 한 명이었고, 모든 헝가리인은 쾨베스 헤르만 남작이 헝가리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
샨도르 수르머이의 평가.

그의 시신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어 국가와 군대의 예우를 받으며 케레페시 공동묘지(Kerepesi temető)에 안장되었다. 그의 미망인 오이게니에 히예 폰 글루넥 남작부인(Eugenie Hye von Glunek, 1861-1941)은 1925년 남편의 유산에서 남편을 묘사한 초상 메달을 군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후 오이게니에 히예 폰 글루넥 남작부인은 남편과 사별한 후 17년을 더 살았으며, 1941년에 사망했다. 쾨베시의 묘소는 2001년 국립유산연구소(Nemzeti Örökség Intézete)에 의해 헝가리의 국가 보호 국립묘지로 지정되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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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베시는 분명 제1차 세계 대전을 대표하는 명장이자 덕장이었다. 정치적 고려보다 군사적 실무에 충실한 지휘관이었으며, 부하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특히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와 1917년 케렌스키 공세 시기에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났다. 그는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 있던 티롤 공세 시기에도 자신의 임무에만 집중하며 제3군을 지휘했고, 당시 비크토어 단클 알프레트 크라우스사이의 갈등이나 카를 대공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동부전선에서의 방어전과 반격전, 발칸전선에서의 공세작전 등에서 뛰어난 전술적 능력을 보여줬다.[23] 특히 1915년 10월 베오그라드 점령과 1916년 초 몬테네그로 작전에서는 험난한 지형과 기상조건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1917년에는 러시아의 케렌스키 공세를 저지하고 부코비나 지역을 수복하는 성과를 거뒀는데, 이는 그의 방어전 운용 능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제국 최후의 총사령관으로서도 제국 해체기의 혼란 속에서 보여준 그의 위기관리 능력은 주목할 만하다. 제국 해체 과정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실시했다. 특히 부대 해산 과정에서 부대 해산 관리와 군사 자산 관리를 통해 무질서와 장비 유출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또한 제국 해체로 인한 병력의 혼란을 방지하고 질서 있는 귀향을 보장하기 위한 종합적인 관리 체계를 구축했다. 귀향 증명서 발급과 이동 중 식량과 숙소 제공, 의료 지원으로 신변 안전 보장으로서의 조치를 취했고, 개인 기록의 정리 및 보관 및 미지급 급여의 정산, 제대 증명서 발급 등의 행정 지원과 수송체계 구축으로 체계를 잡고 단계적 제대 시행을 통한 질서 있는 귀향을 마련하였다.

또한 신생국과의 관계 관리에도 노력했는데, 갈등 관계는 여전했지만 어쨌든 제국의 해체로 인해 탄생한 신생국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군사적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군사적 조치를 실행하며 치안 유지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쾨베시의 체계적인 위기관리는 제국 해체기의 혼란을 최소화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그의 뛰어난 행정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군대 해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무질서와 폭력을 효과적으로 방지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제국 군사 전통의 마지막 상징인만큼 쾨베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유일한 루터교도 원수이자 최후의 총사령관으로서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군사적 경력으로는 공병 장교에서 시작해 원수까지 오른 입지전적 경력, 다양한 전선에서의 풍부한 전투 경험과 뛰어난 군사적 성과를 남겼으며, 제국 최후의 순간까지 군의 기강을 유지했다. 또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고 최대한 정치에 거리를 뒀으며, 부하들에 대한 책임감과 실무에 충실한 지휘 스타일로 지휘관으로서의 품격도 잘보여주었다. 때문에 혼란기 속에 안정적인 군 지휘 능력과 실무에 충실한 전문성, 제국 해체기의 질서있는 관리 능력 등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르겠지만 전략적 판단보다는 전술적 실행에 치중했고, 제국 해체를 막을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 부족했으며, 독일 제국군과의 협력 작전시 부차적 역할에 그쳤다는 점에서 그의 한계를 보여주었다.[24] 그렇긴 해도 어쨌든 이러한 쾨베시의 행적은 제국 말기의 복잡한 정치-군사적 상황 속에서 군인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 직업군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개인적 배경으로는 헝가리계 트란실바니아 작센계 출신으로 제국의 다민족적 성격을 대표하고, 제국 군 최고위직에 오른 유일한 루터교도이며, 독일어권 문화에서 성장했으나 제국의 다언어적 특성을 수용했다. 그래서인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모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군인이다. 독일은 그의 공적을 인정해 푸르 르 메리트 훈장과 참나무잎을 수여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 등급 훈장인 마리아 테레지아 지휘관십자와, 헝가리 왕국 최고 등급 훈장인 성 이슈트판 대십자 등 세 나라에서 최고 훈장들을 수여했다. 특히 헝가리의 경우, 쾨베시 사후 77년이 지난 2001년에 그의 묘소를 국가 보호 묘지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평가를 정리하자면 그가 지닌 실무적이고 안정적인 지휘 스타일이 혼란한 시기에 군의 기본적인 기능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제국의 마지막을 품위있게 마무리한 군사 지도자로 여러 나라에서 좋게 평가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에 대한 연구는 부실한 편이라 21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쾨베시의 전기가 출판되었다.

4. 가족 관계

1892년 가을, 그문덴(Gmunden)에서 오이게니에 히예 폰 글루넥 남작부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잘 알려진 변호사이자 법무장관이었던 안톤 히예 폰 글루넥 남작(Anton Hye von Glunek)의 재혼으로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쾨베시 부부는 금슬이 좋았고, 그들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특이한 점은 장남 3남은 헝가리식과 독일식 이름을 지어준 반면, 차남만 헝가리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 벨러/아달베르트(Béla/Adalbert, 1893-1914)
  • 게저(Géza, 1896-1977)
  • 예뇌/오이겐(Jenő/Eugen, 1898-1929)

장남 벨러/아달베르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 개전 초기에 황립 및 왕립 카이저경보병연대 소속 소위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비극을 겪었는데, 당시 벨러/아달베르트 말고도 많은 장성들의 자식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콘라트 제국원수, 허저이 제국상급대장, 플란처발틴 제국상급대장이 있다.

차남 게저와 3남 예뇌/오이겐도 전쟁 중에 포병장교로 복무했고, 이들은 다행히 살아남아 전후에 각각 군사학자, 담배도매상이 되었다. 게저는 1950년에 에 소재한 군사역사박물관(Heeresgeschichtliches Museum)의 임시관장을 역임하면서 나름 장수했지만, 예뇌/오이겐은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코카인 파티를 벌이다 사망하였다. 예뇌/오이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게저의 경우 학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반면, 막내 예뇌는 1920년대 부다페스트의 상류층 마약 문화에 빠져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이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이후로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겪었던 혼란을 보여주는 한 예시로 볼 수 있었다.

5. 여담

훗날 헝가리의 일부 군 장교들이 '백군'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가 거절한 일화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쾨베시는 독일어, 헝가리어 등 2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했으나, 주로 구사하는 언어는 독일어였고, 헝가리어는 주로 공식 업무에서만 사용했다. 이것으로 인해 헝가리 후배 장교들의 요청을 거절한 일화가 단순한 표면상의 핑계가 아닌, 정말로 헝가리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차남 게저의 회고에 따르면 쾨베시는 제국이 멸망한 1918년부터 그가 사망한 1924년까지도 항상 그래왔듯이 황제에 충실한 황실 충성파(schwarz-gelb) k.u.k. 장교였으며, 오스트리아인이자 동시에 헝가리인으로서 1918년에 침몰하고 분할된 전체 합스부르크 제국을 조국으로 여겼다고 한다. 앞서 말한 헝가리 후배 장교들의 요청을 거절할 때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든 것은, 그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했으며 이중 정체성을 가졌기에 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특정 후계 국가에 편향되지 않으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군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확고했기에 그가 헝가리의 새로운 정치 움직임 참여를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헤르만 쾨베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료 장성들과는 다르게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이는 앞서 말했던 건선 질환 때문에 주기적으로 면도를 해야했기 때문.

[1]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라면 '폰쾨베슈하저'로 표기하겠지만 쾨베시랑 쾨베슈하저는 헝가리어 인명이라 해당되지 않는다. [2] 독일어 발음기호와 헝가리어 발음기호가 섞어서 사용된다 따라서 {ˈhɛʁman køvɛʃː fɔn køvɛʃːhaːzɒ}로 발음 [3] {køvɛʃːhaːzi køvɛʃː ˈhɛʁman} [4] 쾨베시가 제국원수에 진급하여 원수 칼라장을 단 후에 그린 초상화들인데 첫 번째는 마리아 테레지아 지휘관십자 메달을 메고 있고, 두 번째는 푸르 르 메리트 메달을 메고 있다. 이 둘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최고 등급 훈장이다. [5] 참고 자료 [6] 켐펠렌 벨러(Kempelen Béla)의 헝가리 귀족가문 사전(Magyar nemes családok)에 따르면 쾨베시 가문의 한 분파가 18세기에 오스트리아(Ausztria)로 이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일 확률이 높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일어권 세습영지들을 가리키는 뜻도 있기에 확실하진 않다. [7] 헝가리어에서 -háza는 "~의 집" 이란 의미의 명사형이고 -házi는 거기에서 파생된 형용사형이기 때문에 Kövessháza 출신은 Kövessházi라고 읽는다. 따라서 독일식으로 Kövessházi를 바꾸려면 ~출신의에 해당하는 Von을 Kövessháza 앞에 붙여야하는게 맞다. [8] 참고로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일반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되는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제국상급대장도 트란실바니아 작센 출신으로, 요한나 레지나 스터징과 조상이 같은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헤르만 쾨베시 또한 아르투어 아르츠와는 서로 먼 친척에 해당되는데, 이 둘은 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총사령관이나 참모총장과 같은 군부의 최고위 직책을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9] 때문에 훗날 쾨베시가 제국원수의 자리에 올랐을 때, 최초이자 최후의 非 가톨릭 원수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10] 산악인 클럽 [11] 오스트리아에서 가톨릭을 떠나 개신교로 개종하는 운동 [12] 제2군 대부분의 병력은 세르비아 전선에 있었다. [13] 독일어 이름으로는 아달베르트(Adalbert). [14] 이는 단순한 감정적 비판이 아니었다. 보급열차 소실로 인한 물자 손실은 이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작전 수행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초래했다. [15] 레저(Lezhë) [16] 또한 이는 콘라트와 쾨베시, 그리고 제11군 사령관 단클이 예전부터 각별한 관계였던 것에 기인한다. 1906년 이전 콘라트가 제8보병사단을 이끌 당시, 쾨베시와 단클은 그의 휘하에서 여단장을 맡았던 인연이 있었다. [17] 이 정도로 작전이 확대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측에서는 독일 제국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독일 역시 베르됭 전투를 준비 중이었기에 거절했다. [18] 포르테 캄폴롱고(Forte Campolongo), 포르테 캄포몰론(Forte Campomolon), 포르테 몬테베레나(Forte Monte Verena) 등 [19] 오른쪽에서 네 번째 [20] 오스트리아 하에루스도르프(Hirtenberg)에 위치함 [21] 제3군은 이미 통합된 상태 [22] 예를 들면 법적 책임 [23] 콘라트의 전략이 실제로 성공한 사례들 대부분이 쾨베시의 야전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24] 그러한 점에서 쾨베시는 콘라트와 죽이 잘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