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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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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La Révolution française | French Revolution
파일:Prise_de_la_Bastille.jpg
《바스티유 습격(La prise de la Bastille)》, 장피에르 루이 로랑 위엘, 1789, 종이에 수채.
1. 개요2. 내용
2.1. 혁명 전야
2.1.1. 이론적 배경2.1.2. 경제적 위기와 수탈2.1.3. 부르주아의 부상
2.1.3.1. 대검 귀족, 법복 귀족2.1.3.2. 앙시앵 레짐2.1.3.3. 세금2.1.3.4. 삼부회
2.2. 세력
2.2.1. 푀양파: 입헌군주2.2.2. 평원파: 온건 공화 ~ 급진 공화2.2.3. 지롱드파: 온건 공화2.2.4. 몽테뉴파( 산악파, 자코뱅): 급진 공화2.2.5. 테르미도르파: 부르주아2.2.6. 도시 민중 세력
2.3. 진행2.4. 이후
2.4.1.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정부(1799 ~ 1804, 6년간)2.4.2. 프랑스 제1제국(1804 ~ 1814, 11년간)
3. 평가4. 이야깃거리
4.1. 아이티의 또 다른 혁명4.2. 여담
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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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89년 프랑스 왕국에서 발발하여 테르미도르 반동 전까지 지속되었던 혁명의 상징이 된 일련의 민란이다.[1]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특별히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18세기에 걸쳐 일어난 여러 시민 혁명 중 가장 뜻깊다고 간주되며,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도 전환점이 된 대사건으로 분류된다. 내부적으로는 잇따라 즉위하는 무능한 왕들과 사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귀족들과 구체제의 모순을 제거했고 외부적으로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이 주위 국가들에게 크게 미치게 되면서 19세기 이후 각국의 시민 혁명의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사실 프랑스에서 일어난 굵직한 혁명 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으로 유명한 1830년 7월 혁명, 레 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유명한 1832년의 6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도 있으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직후 파리 코뮌이 세워지기도 했고, 넓게 보면 나치 독일 치하 레지스탕스의 활동과 1968년 68운동 같은 다른 혁명들이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아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라 칭한다면 대부분은 1789년의 혁명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 문서는 1789년 삼부회 사건부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까지 계속된 혁명을 다룬다.

루이 16세의 처형을 보고 유럽국가들은 봉건제 유지에 위협이 되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또는 국가 내부의 혁명으로 인한 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영토를 뺏기위해 프랑스 혁명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이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와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조 등 지배계급 인사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며 왕권을 더욱 더 강화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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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한 진짜 이유!![2] 프랑스 혁명은 왜 시작 되었을까?[3]

2.1. 혁명 전야

2.1.1. 이론적 배경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Liberty, Equality, Fraternity
자유, 평등, 우애[4]
혁명의 이념적 기초는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를 포함한 계몽주의자들과 백과전서파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뿌리를 만든 사람은 루소로서,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인민주권론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전제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사회계약설은 홉스 리바이어던에서 처음으로 주장한 이론으로, "왕이란 존재는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직업이 아니며, 한 사회와 국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번영하기 위해 백성님들께서 계약하듯이 옹립해 준 자리다."라는 왕권민수설을 주장했다. 이는 왕권신수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론이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에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이 들어갔는데, 이 때 파견된 프랑스 군인들이 미국의 자유정신과 해방정신을 배워 와서 혁명에 기여했다는 설도 있다.

2.1.2. 경제적 위기와 수탈

프랑스 혁명 직전 프랑스는 여러 정치적, 경제적 난제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프랑스는 각 지역별로 법률이나 통치제도가 달라 체계적인 징세나 은행 제도가 발달하지 못했고[5] 이는 국가 세입을 정부의 의뢰를 받은 징세청부업자(재정가)에게 맡기게 되었다. 이 재정가들은 국가가 요구하는 금액을 맞추기 위해, 또 중간 단계에서 이득을 갈취하기 위해 평민들을 쥐어짜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끝없이 벌어진 전쟁은 2년치 국가 세입을 빚으로 잡히는 등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되었다. 또한 역대 프랑스 왕들은 귀족에 대항하기 위해 부르주아들에게 관직과 귀족 작위를 팔아 왔는데 수백 년에 걸친 매관매직으로 면세특권을 가진 귀족층이 비대하게 늘어났다. 사실상 이들의 재산을 거두면 국가부채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절대왕정 체제에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6] 당시 영국의 귀족 계층이 인구의 0.5% 가량이었던 것에 비해 프랑스는 3%에 달했다. 이러한 모순적 체제를 이어받은 루이 15세 루이 16세의 정부는 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루이 14세는 부족한 예산을 순수히 빚을 내 충당했는데 이를 끝까지 갚지 않고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원금만 30억 리브르에 이르는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승하했다. 루이 15세 역시 마찬가지로 쌓여가는 빚을 돈을 더 많이 빌리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것이 쌓여 루이 16세 치세에서, 프랑스는 국가예산의 반 이상이 선대 왕들이 남긴 빚을 갚는 데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다.[7] 설상가상으로 하인들의 제복 제정과 사냥, 연회 등 점점 늘어나는 왕실의 사치, 그리고 귀족들도 이 사치에 동참하면서 국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귀족들의 행각의 마이너 그레이드 버전이 상공업자들에게서 벌어졌다. 당시 도시 수공업자들은 장인-도제 관계를 통해서 길드를 이루는 지극히 폐쇄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기술 발전과 판로 문제 등으로 도제가 장인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도제는 예비 장인이 아닌 수공업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면서, 도시 수공업자층의 문제를 가져왔다. 이는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하던 영국과 대조적이다.

게다가 이때 닥친 것이 가뭄과 흉년이었다. 1785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2년 뒤인 1787년에는 큰 홍수가 닥쳤고 다시 1788년에는 가뭄과 우박, 벼락이, 그리고 1788년~1789년 사이 겨울에는 기록적인 추위가 프랑스를 강타했다.[8]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1730년경 이후 지속되던 호경기가 1775년부터 갑자기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1773년부터 농작물의 흉작이 빈번해졌고, 1775년부터는 식량 부족이 만성화하였다. 더구나 1785년의 대가뭄과 1788~1789년 겨울의 한해는 식량 위기를 더 악화시켰다. 그리고 곡가 앙등은 불황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776~1789년 사이의 평균 물가 상승률은 65%였다. 밀과 호밀의 가격이 각각 66%와 71% 올랐고, 대혁명이 일어나는 1789년 여름 6월과 7월에는 각각 150%와 165% 상승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22
이런 불황기에 프랑스 정부는 최소한 두 가지 중대한 정책적 과오를 저질렀다. 하나는 1778년 미국 독립 전쟁의 참전이고 또 하나는 1786년 영국-프랑스 통상 조약의 체결이다. 미국 독립 전쟁을 돕기 위해 프랑스가 쓴 돈은 무려 20억 리브르였다. 이 돈은 프랑스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물론 프랑스가 7년전쟁(1756~1763)으로 영국에게 아메리카 식민지를 빼앗겼고 이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것은 맞으나 그와 별개로 최대의 라이벌을 약화시키는 것은 충분히 국익에 부합했으며, 미국에 대한 지원 또한 의도한 범위 내에서만 진행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프랑스의 생각과 달리 미국 내의 독립 지지가 강고하지 않은 것이 밝혀지며 점점 프랑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금액을 쓰고 말았다. 이는 영국의 약화로 얻을 이득을 상쇄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프랑스에서는 농민 봉기가 셀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시기에는 식인에 관한 기록까지 보였다. 프랑스의 식인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까지 등장하며 그 시기 정도 되면 이동 중이던 여행자 일행이 마을 주민들에게 먹히거나 농민 봉기 후에 영주 일가가 바비큐가 되었다는 식의 기록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이 뒤에 언급할 대공포로 이어졌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세금을 걷는 구조 자체에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조세 수취 구조를 살펴보면, 예산은 만들어야겠으나 돈이 없는 왕실이 돈 많은 귀족 내지 부르주아에게 돈을 꾸어오고, 그 대신에 지정한 연도 동안 일정한 영지의 세금에 대한 수조권을 주는 식으로 세금 민영화를 했는데, 문제는 이렇게 수조권을 확보한 재정가들이 왕에게 바친 돈의 본전과 이득을 뽑기 위해 농민들을 가혹하게 쥐어짰다.[9] 그 유명한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이러한 족속들 중 하나였다.[10] 당시 프랑스 전체의 절반 이상의 수십 년분의 수조권이 이런 식으로 넘어갔다. 이미 이 세금 문제 때문에 저항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세정책은 1700년대 초반 그대로 였다. 1789년 프랑스의 직접세는 타유세, 인두세, 20분의 1세로 구성되어 있었다. 타유세는 제3계급에게만 부여되었는데 지방마다 징수기준이 달랐다. 북부 지방의 경우 소득 전체에 대해 남부 지방의 경우 부동산 수입에 대해 세금을 징수했다. 문제는 이 타유세가 정률세가 아닌 할당세였다는 것이었다. 즉 국왕이 세율을 정해 납세자의 소득 일정 부분을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총액을 설정하고 그것을 할당받은 단체 혹은 교구에서 제3계급에서 징수했던 것이었다. 여기에 1701년 추가된 인두세도 불평등 그자체 였다. 본래 인두세는 모든 프랑스인에게 부가되는 시스템으로 총 22계급으로 나눈 뒤 제 1등급 왕세자 2천 리브르부터 22등급 병사와 날품팔이는 1리브르만 내도록 규정이 되었었다. 하지만 1710년 성직자들이 2천 4백만 리브르로 조세의 원장 자체를 사버렸고, 귀족층도 소리 소문 없이 고등법원과 왕실에 압박을 가해 면세를 받아버렸다. 마지막으로 1749년 도입된 20분의 1세의 경우 상업적 수입, 금리 수입, 봉건적 부과조 수입, 임대료 등에 대해 징수하였는데 성직자들은 다시 한번 조세의 원장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귀족들은 왕실을 압박하여 면세받았다. 1787년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이 20분의 1세를 공평하게 모두에게 부과하는 보조시세로 대체하자고 제안했으나 2신분과 고등법원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 되었다.

보조세의 경우 15세기 도입되었는데 포도주, 주정에 대해 부과된 세금으로 성직자와 귀족은 원천 면제였다. 앞서 14세기에는 이른바 소금세가 부과되었는데 기옌과 같이 프랑스 왕국에 합병된 지방은 합병 조건으로 소금세 면제를 요구하였으며 브르타뉴 역시 소금세를 면제 받았다. 소금세는 소금세가 없거나 적게 징수하는 '소 소금세 지방'과 각 가정이 '항아리와 소금 단지를 위한 8세 이상의 프랑스 시민들은 매년 9kg의 의무염을 사도록 강요받는' 이른바 대 소금세 지방으로 나누어졌다. 이 소금세 역시 귀족과 성직자들은 피해갔고 결국 의무적으로 소금을 구입하고 이에 대한 세금을 내는 것 역시 3계급의 몫이었다.

무엇보다 프랑스 세금 제도의 가장 큰 폐단은 총괄 징세 청부제였다. 17세기 초 프랑스 국왕 참사회는 도급으로 징세 청부를 입찰하는 관례를 도입하고 대상 지역을 확대했는데 루이 14세가 이를 1726년 전국에 도입하며 총괄 징세 청부제가 실시되었다. 이 총괄 징수 청부 계약은 단 한사람의 낙찰자 명의로 이루어졌고 기한은 6년이었는데 총괄 징세 업자들이 그 보증인이었다. 권한 역시 막대하였는데 이들은 간접세에 대한 소송에서 국왕 참사회에 항소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종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막대한 권한을 보장 받은 징세청부업자들은 이삭 줍기 권리와 같이 생존에 관한 전통적 권한들도 무시한 채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무시된 것은 '이삭 줍기'라는 전통적 권한이 있었는데, 유럽 농촌에서는 밀을 수확한 다음부터 바닥에 떨어진 밀 이삭은 밀밭의 주인이 아니어도 가져가도 된다는 암묵의 룰이자 전통적인 권리가 있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떨어진 곡식의 낱알을 줍는 것을 묵인하는 전통이 있었는데[11]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해주고 생존을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관습이었던 셈이다.[12] 유명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이 다루고 있는 것도 이것이다. 결국, 평온한 목가적 풍경이라기보다는 치열한 생존현장을 보여주는 셈인데 그 시기에는 전통적인 룰과 최소한의 생존 권한마저도 부정당한 것이다.

이러한 재정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당시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는 " 파산을 인정하지 말고, 세금을 인상하지 않으며, 빚을 더 지지 말자."라는 선대 재무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의 금언을 받들어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심각한 위기였던지라 이 정도의 노력으로는 이미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고, 결국 네케르는 사임하게 됐다. 이후 졸리 드 플뢰리, 르페브르 도르므송이 대규모 공채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어찌저찌 버티었다. 이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추천을 받아 재무총감에 임명된 샤를 드 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에 와서는 전임자들이 활용했던 대규모 공채를 발급하는 방식은 전혀 먹히지 않게 되었다. 1788년 국고 회계 보고서에 따르면 지출이 6억 2천 9백만 리브르 였던 반면 수입은 5억 3백만 리브로로 적자가 무려 1억 2천 6백만 리브르에 달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억 3천만 리브르 공채 발행을 계획하였고 전체 예산 중 교육과 빈민 구제에는 전체 행정 예산 1억4천5백만 리브르의 2퍼센트인 1천 2백만 리브르였고 왕실과 특권층 지원 비용은 3천 6백만 리브르로 3배가 많았다. 더나아가 해당 1788년 예산의 50%인 3억 1천 8백만 리브르는 아예 부채 상환으로 매겨져있을 정도였으니 당시 프랑스 왕국의 재정적 막장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샤들 드 칼론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귀족들도 세금을 내자는 평등과세론을 들고 나왔고, 1787년 명사회 144명을 소집해서 이에 대한 협조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명사회는 재정문제는 중대한 사안이므로 자신들보다는 전국 3신분 대표회의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결정을 거부했는데, 이는 허울 좋은 말에 불과했고 실상은 귀족들이 여태까지 면세 특권을 누리다가 갑자기 평민처럼 세금을 내면 본인들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매우 기득권적인 의식의 발현이었다. 결국 귀족들은 국왕과 평민을 배신하고, 1614년 이후 단 한 번도 소집된 적 없는 전국 3신분 대표회의 의회에서 이 문제를 미룬 채 상황을 해결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드 칼론이 해임된 후 그 후임을 맡은 재무총감 에티엔 드 브리엔(Étienne Charles de Loménie de Brienne)은[13] 명사회와 고등법원의 허락을 받고 우선 6,700만 리브르를 차입해 이자와 빚의 일부를 탕감하려 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에 대한 공민권 부여, 인지세 신설, 귀족과 성직자들의 과세를 내용으로 한 그의 개혁안에 기득권층인 명사회와 고등법원이 반발하며 강력반대했다. 루이 16세 역시 브리엔의 개혁안을 지지하며 최대한 지원사격을 했는데 1787년 8월 6일 고등법원은 루이 16세의 압박에 브리엔의 개혁안을 통과시켰지만 바로 다음 날 왕령이 불법이라며 무효화해버렸고 루이 16세는 자신의 왕령을 거부한 고등법원 사법 귀족들을 트루아로 추방시키는 것으로 보복했다. 하지만 사법 귀족들이 이러한 처사에 강력히 반발하며 1787년 9월 4일 한 달 만에 루이 16세는 추방한 고등 법원 귀족들의 복귀를 허가해야 했고 20분의 1세 부활을 내용으로 하는 브리엔의 개혁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세제 개혁에 실패한 브리엔은 공채 발급으로 국가 재정을 운영하려 하였지만 고등법원은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며 공채발급을 허가 하지 않았고 급기야 루이 16세가 11월 19일 직접 왕령으로 공채 발급을 명령하는 왕령을 등록하게 하였다. 당연히 사법 귀족들의 반발은 거셌다. 사촌 동생 오를레앙 공작은 불법이라고 항의하고 나서자 루이 16세는 '이것은 합법이오. 짐이 원하기 때문이오'라며 찍어 누르고 추방해버렸다. 이에 1788년 1월 고등법원은 국왕에 반발하여 봉인장에 대한 탄핵안과 자연권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요구하더나 5월 3일에 이르러서는 왕국의 기본법의 수호자가 국왕이 아닌 고등법원임을 선언하며 절대왕권을 부정해 버렸다. 고등법원은 과세에 대한 의결권은 삼부회 즉 국민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얼핏보면 자유주의적 원칙을 주장하는 듯 하지만 각 주의 관습을 유지되어야 하며 사법 관직은 파면될 수 없다.라며 결국 제1, 2계급의 이권을 보호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사법귀족의 반발에 루이 16세는 상당히 불쾌해 하며 사법 개혁을 실시한다. 국새경 말제르브의 명의로 루이 16세는 고등법원의 강경파 뒤발 데프르메닐과 구아슬라르 드 몽사베르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발부하였고 파리 고등법원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서야 두 법관을 체포할 수 있었다. 이어 1788년 5월 8일 6개의 사법 개혁 왕령이 등록 되었는데 그 내용은 형사법을 처형하기전 가해지던 고문 즉 선결신문의 폐지, 난립하던 하급 재판권과 상급 재판권을 정리하고 제1심 제판소와 항소 법원을 설립하여 고등법원의 권한을 크게 축소시켰다. 또한 국왕의 법령에 대한 등기권을 파리 고등법원 대법정과 국왕의 최측근들로 이루어진 전권법정으로 옮기도록 하여 사법 통제권을 사법 귀족들로 부터 국왕에게로 귀속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폐단 중 하나였던 관직 매매제는 손대지 못하였고 이러한 근본적인 개혁안들은 왕권이 루이 14세만큼 강하지 않았던 루이 16세의 시기에는 너무 늦었던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만을 품은 사법 귀족들이 제3계급을 선동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사법 개혁이 실시된 지 한 달이 지난 후 브리엔은 제3신분의 삼부회 대표수를 2배로 늘리고 머릿수로 표결하는 방식을 도입하겠다는 왕령을 등록하자 도피네, 프랑슈콩테, 프로방스의 제2계급들이 제일 먼저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지방 고등법원과 지방 삼부회 1, 2계급을 포섭하였는데 성직자 총회에서 전권 법정 설치에 항의 서한을 보내더니 급기야 6월 11일 디종과 톨루즈에서 상급 항소법원의 설치에 반대하는 지방 1, 2계급의 사주를 받은 주민들이 항소 법원 지사의 공관을 포위하여 고등법원을 부활시켰으며 렌에서는 군대와 항소 법원 설치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국적인 사법 귀족의 반발 중 가장 거대하였으며 혁명의 시작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도피네 지방에서 일어난 봉기였는데 그르노블 고등법원은 사법 개혁을 명하는 왕령 등록을 거부하자 5월 20일 부총독 클레르몽 토네르 공작은 이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추방일이던 6월 7일 법원 보조원들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민중 봉기를 일으켜 도시 순찰대를 공격하고 고등법원 법관들의 복귀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날 오후 추방령이 무효화되고 고등법원이 유지되게 되었다.[14] 이어 6월 14일 그르노블 시청에서 9명의 성직자, 33명의 2계급 귀족, 59명의 3계급 대표들이 모여 고등법원의 사법관들을 복귀시킬 것, 제 3신분의 대표 수를 1, 2계급 대표자 수와 같게 할 것, 왕국의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요구했고 7월 21일에 이르러서는 도니페 주 삼부회가 주 조세 특권을 포기하며 '우리 세 신분은 우리의 대표자들이 왕국의 삼부회에서 결의한 경우에만 조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도니페 주 삼부회의 반발과 1계급의 강력한 반발에 브리엔과 왕실은 결국 굴복하였다. 1788년 7월 5일 사법개혁안 등록 2달 만에 브리엔은 삼부회 소집을 약속하고 8월 8일 1789년 5월 1일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국왕의 제가없이 공표하는 동시에 전권법정의 기능을 무효화시켰다. 개혁에 실패한 브리엔은 파면되었고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케르는 말제르브 사법개혁의 무효화를 선언하고 고등법원의 복귀, 삼부회 소집을 재확인 하였고 9월 21일 파리 고등법원이 곧 소집될 삼부회는 대표들의 머릿수가 아닌 1614년과 마찬가지로 각 신분별로 한 표를 갖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명령을 공표하였다.[15]

이런 와중에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했다.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독립하고 얄미운 영국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20억 리브르의 지출을 들여 얻은 건 자존심밖에 없었고, 결국 국가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실은 여전히 호화로운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비록 사치가 재정난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왕실이 사치를 부리지 않고 긴축 정책을 조금 더 취했더라면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조금이나마 희망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평민층을 덜 자극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건 다 왕과 귀족의 사치 때문이다."라는 식의 말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왕실과 귀족이 하는 파티나 무도회는 자신들의 부와 힘을 과시하고 정보교환수단이 미발달한 시대에서 친교를 쌓고 정보를 교환하는 방식이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프랑스가 루이 14세 이후 지속된 전쟁과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국가 재정이 부도위기에 몰리고 백성은 늘어난 세금과 과도한 부역에 고통받고 있었는데 정작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과 귀족들이 끝까지 납세를 거부하는 등 기본적인 의무조차 거부하면서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평민세력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만약 이때 귀족과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일부 포기하는 방식으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프랑스 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처럼 온건한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귀족층은 국토 40%를 소유하면서도 이에 대한 납세를 철저하게 거부했고 오히려 평민층에게 더욱 증세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최소한의 보여주기조차 거부하는 이 행태는 당연히 당시 프랑스 평민들 사이에서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프랑스 대혁명을 유혈이 낭자한 비극으로 만들었다.[16]

2.1.3. 부르주아의 부상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층을 약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귀족 세력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따라서 루이 14세는 매관매직을 통해 부르주아들이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확장하였고, 루이 14세 시대에는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귀족층에 합류했다. 이는 대검귀족들의 전통적 실권[17]을 거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매관매직을 통해서 행정관료-귀족이 된 구 부르주아(법복귀족)들은 당연히 이런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루이 14세는 왕의 말을 잘 듣는 신귀족과 자신으로 이루어진 귀족의 복종<->왕의 은혜 구도에 금전적 이득과 사면, 권력을 미끼로 한때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대귀족들을(대표적으로 대 콩데 공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 편입시켜 구귀족이 절대왕정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세력이 한미한 구귀족들은 족보정리사업을 명분 삼아 숫자를 줄여두었다. 실권 없는 잡다한 관직들을 잔뜩 팔아치워서 전쟁을 위한 예산을 충당한건 덤이었다. 다만 이렇게 귀족이 된 이들은 광범위한 면세 특권을 누렸다.

이리하여 루이 14세는 리슐리외-마자랭 시절을 지나며 자연스럽게 따라온 왕권강화의 전통적 반동, 귀족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구귀족들이 자발적으로 왕에게 복종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으나,[18]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 체제의 설계자인 루이 14세는 제위 기간 동안 일어난 수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이 체제를 도입, 유지시키면서 외치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후계자인 루이 15세는 너무 어렸고[19] 능력 자체도 증조할아버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루이 14세 치세에는 귀족들이 왕에게 눌려 단지 왕권이 제공하는 열매들만을 누렸을 뿐이지만, 루이 15세 치세에 이르러 위세가 높아진 귀족들은 우유부단한 왕 아래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이권을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몇 십 년 혹은 수년 전 자신들이 속해 있었던 부르주아 계급들이 더 이상 귀족층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부르주아의 신분 이동을 막았다. 또한 루이 14세의 전쟁이 낳은 스노우볼이 굴러가기 시작했는데,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 루이 14세의 전쟁 카를 5세 이래로 유럽 대륙의 전통적 패자였던 합스부르크의 기나긴 패권을 끝내고 프랑스를 유럽 제1의 국가로 올려놓는데는 성공했으나,[20] 합스부르크의 시대에는 큰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던 영국이 급부상하여 경쟁자로 치고 올라온 바람에 정작 프랑스는 전성기 합스부르크 수준의 위치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다.[21] 이런 상황에서 루이 15세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개입이 모두 막대한 국력 소모에 비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합스부르크의 시대보다 훨씬 고도화된 유럽국가의 외교는 근대 유럽 외교의 상징인 "강자에 대한 무한한 견제"라는 개념을 구체화해 유럽의 양대 강자 중 하나이자, 영국보다 대륙 내 이권에 훨씬 관련이 많은 프랑스의 발목을 미칠듯이 붙잡기 시작했다.
2.1.3.1. 대검 귀족, 법복 귀족
그리고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이들을 대검 귀족, 이렇게 신흥 귀족으로 떠오른 구 부르주아들을 법복 귀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본래 귀족이었던 자들에 비해 이러한 신흥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더 애를 썼다고 한다.[22] 위에서 보았듯이 이미 썩을대로 썩은 프랑스 재정을 손 보려던 브리엔과 칼론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고 조세는 오직 삼부회로만 부과할 수 있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소집하게 한 것도 이들의 강력한 기득권 수호 저항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선택이 제 3계급의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2.1.3.2. 앙시앵 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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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예전에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자들을 포함한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특권층으로서 세금을 내지 않고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는 반면, 시민계급과 농민은 국가 재정을 떠받쳐야 했다. 이를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즉 구체제(영: Ancient Regime)'라고 부른다.

앙시앵 레짐에 대하여, 옛날의 것, 구닥다리라는 선입견 때문에 이를 비판한다는 주장도 적혀 있었다.[23] 하지만 이는 앙시앵 레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 주장이다. 앙시앵 레짐은 프랑스 혁명 전에 존재했던 모든 구체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군주정 체제를 일컫는 말이다. 중세 봉건제하에서 성직자들은 신앙생활, 성무, 검소함을 갖추라는 요구를 받고 귀족은 각종 특혜를 누리는 조건으로 군역을 짊어졌다. 즉, 귀족이나 사제에 대해 '유지비가 비싼 인력'이라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중세 말기가 되며 상업을 포함한 산업의 발달, 그로 인한 부의 축적, 절대 군주정 체제에서 운영되는 상비군 등으로 성직자들은 재산을 불릴 수 있었고, 살아남은 귀족들은 의무 없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사실 어느 나라, 어느 왕정이나 세금은 결국 평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국가가 상비군을 확충하게 되면서 귀족은 의무에서 벗어난 반면 권익은 누리고 성직자는 소득이 있지만 세금 한 푼 안 내고 있었으니, 이것을 앙시엠 레짐의 모순이라고 부르며 비판하는 이유이다.
2.1.3.3. 세금
이런 구체제의 모순으로 프랑스는 각 계층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전 시대에만 해도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시민 계급은 정치 권력에서 소외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농민은 점점 늘어가기만 하는 세금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세금은 200% 이상 늘었지만, 노동자 임금은 100% 정도 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거둔 세금이 프랑스 정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배경은 역시 앞서 언급한 수조권 문제. 실제로 프랑스 직할령에 있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한 정도는 되었다. 문제는 빚 대신에 수조권을 받은 소위 징세청부업자의 대상이 된 영지에 사는 사람들로 세금 상승은 이쪽에서 주도했다.

이에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드칼론은 1787년 2월, 명사회를 열어 귀족과 성직자를 포함한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것을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특권 계층은 이것에 크게 반발하며 과세를 강력히 거부했고 고등법원의 권한을 이용해 어떻게든 특권 계층의 임시 과세안을 막으려 했다. 이때 귀족은 삼부회에 비견될 회의를 별도로 열려고 국왕에게 압력을 넣기에 이르렀고, 이에 대한 반발로 열린 것이 뒤에 언급되는 삼부회였다. 삼부회의 구성과 명사회의 소집 등도 특권 세력과 왕실의 대립 과정에서 결정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트리거는 구 특권 세력이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프랑스 혁명의 1단계 혹은 0단계는 구 귀족들의 왕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이 반발은 '국민의회'가 폭주하자, 귀족들이 루이 16세에게 달려가면서 바로 끝났다. 당시 귀족층이 소유한 토지는 국토의 40%를 차지하였고, 이들이 토지세를 납부했으면 혁명은 많은 피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혁명 후 많은 귀족과 세리들이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2.1.3.4. 삼부회
결국 드 칼론과 그 후임자인 브리엔이 특권 계층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며 실각하고 후임 재정총감으로 복귀한 자크 네케르는 1614년 이래로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의를 개최를 제안했다. 그리하여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개최됐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견제할 생각으로 원래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제3신분인 부르주아 의원의 수를 두 배로 늘렸다.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열린 삼부회였으나 투표안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이 삼부회의 투표안은 이랬다. 제1신분 의석 300, 제2신분 의석 300, 제3신분 의석은 600이었다. 귀족층은 여기서 각 신분 간 같은 투표수를 주장했다. 한 신분 의석에서 의결된 하나씩의 의견을 결정하자는 식이었다. 사실 각 의원당 1표씩을 가지게 되면 특권층은 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귀족층의 일부가 부르주아 계층을 지지했고 고위 성직자들이 아닌 일반 성직자들은 특권층보다는 시민 계급의 이익에 더 공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헌금은 지방의 본당(성당)들로부터 걷어져서 일단 파리 대주교까지 올라간 다음에,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였다. 그런데 고위 귀족들이 이미 수도원 레벨을 장악했기 때문에 지방까지 내려올 돈이 없었다. 때문에 지방에서 사목하던 사제들은 프랑스 혁명의 초기 과정에 참여하게 됐다.

반대로 부르주아 계층은 여기서 1인당 1표제를 주장했다. 그 이유는, 위와 같이 1인 1표제를 시행한다면 머릿수로 이길 테니까. 여기에, 부르주아 계층은 가난한 성직자와 귀족 등 자신에게 우호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포섭하기도 했다. 나라 꼴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귀족 과세에 찬성한 귀족도 소수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6월 17일, 부르주아 의원들은 1인 1표제와 영국식 의회 체제를 골자로 하는 삼부회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문제는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격렬한 논쟁 끝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삼부회가 끝났다. 그들은 단독으로 국민의회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영국식 의회를 선언했다. 놀란 루이 16세는 부르주아 의원들의 이런 불법 행동들을 제압하려 했고 결국 삼부회 회의장을 군대를 동원해 폐쇄했다. 윤아무개씨의 롤모델은 루이 16세라는 설이 있다. 분노한 부르주아 의원들은 이에 맞서서 20일에 테니스 코트에서 헌법 제정까지 의회를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소위 테니스 코트의 맹세로 저항했다.

여기에 시에예스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성직자들과 라파예트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귀족들이 국민의회에 가세한 데다 미라보 백작의 폭탄발언[24] 때문에 루이 16세도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전 계급 의원들이 참여하여 헌법위원회를 창설해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영국의 찰스 1세처럼 왕이 의회에 눌려 처형당하기까지 했던 전례를 우려하여 국경 수비를 담당하던 군대를 베르사유 파리 일대로 진격시키자 이는 파리 시민들의 공포와 분노를 자아냈고, 이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2.2.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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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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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회 자코뱅파 왕당파
입법의회 격앙파 민주파 지롱드파 평원파 푀양파
제1공화국 산악파 실각
에베르파 관용파 로베스피에르파 테르미도르파 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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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제국 제2공화국 참여세력 실각
파리 코뮌 자코뱅 블랑키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제3공화국 참여세력 }}}}}}}}}

2.2.1. 푀양파: 입헌군주

2.2.2. 평원파: 온건 공화 ~ 급진 공화

2.2.3. 지롱드파: 온건 공화

  • 온건 공화파 계열의 여러 파벌의 집합체이며, 자주연방주의자
  • 주요 지도자들
    • 피에르 베르니오
    • 자크 피에르 브리소
    • '지롱드파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마담 롤랑
    • 니콜라 드 콩도르세
    • 제롬 페티옹

2.2.4. 몽테뉴파( 산악파, 자코뱅): 급진 공화

2.2.5. 테르미도르파: 부르주아

  • 부르주아
  • 주요 지도자
    • 조제프 푸셰
    • 베르트랑 바레르
    • 장마리 콜로 데르부아
    • 자크 니콜라 비요바렌
    • 장 랑베르 탈리앵

2.2.6. 도시 민중 세력

2.3.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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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후

2.4.1.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정부(1799 ~ 1804, 6년간)

나폴레옹은 통령정부를 세워 차츰 제정으로 나아갔다. 나폴레옹은 통령정부를 수립한 후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하였고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완전히 종식된다. 실제로 많은 역사가들도 이 시기를 혁명의 종료 시기로 보고 있다.

2.4.2. 프랑스 제1제국(1804 ~ 1814, 11년간)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서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었다. 그렇게 공화정은 무너지고 프랑스 제1제국이 시작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전통은 나폴레옹 정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혁명을 부정하려 했던 왕정복고 시대에도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파리 시민 봉기와 정권 타도는 반복되었고, 이러한 봉기가 종말을 맞은 것은 파리 코뮌이 처참한 최후를 맞고 난 이후였다.

이 와중에 왕당파라도 프랑스 혁명을 부정하는 부르봉파와 프랑스 혁명을 긍정하는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파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합집산이 계속 이어졌고, 공화주의자들도 지롱드파와 자코뱅파가 따로 나누어졌듯이, 보수주의파와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따로 나누어졌다. 프랑스 제2공화정이 1848년 혁명으로 성립되었지만, 나폴레옹 3세의 당선 및 친위쿠데타로 인한 즉위로 이어져 프랑스 제2제국 수립으로 군주정이 다시 세워졌고,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하여 보나파르트가가 몰락한 상태에서, 제3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공화주의자들은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아돌프 티에르를 비토했고, 이로 인해 파리 코뮌이 일어났다가 진압되는 등,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에 공화주의자들의 입지가 탄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를레앙파와 부르봉파가 연합해서 왕정을 복고하려고 시도했다가 샹보르 백작 앙리가 자식이 없던 상태에서 오를레앙 가와의 악연으로 연합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 계획이 틀어져 버렸고, 결국 1876년 총선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의회 다수를 차지하여 프랑스 정계의 주도권을 쥐게 됨으로써 공화파가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이다. 자코뱅파의 이념이 결실을 맺은것이 1880년대의 일이었다는 얘기다.

3. 평가

20세기, 프랑스 혁명은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추앙받는 세계사적 일대 사건으로 공히 인정되었다. 사실상 시민세력이 왕조를 무너뜨린 최초의 사건이었고, 국제적으로 유럽 봉건왕조의 연쇄적 붕괴로 이어지기도 했다.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국민국가체제의 전환을 이끈 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후 국가 혼란상과 막대한 희생은 프랑스 혁명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쇄술의 발달로 시민의식에 급전환을 맞이하면서 영국의 명예혁명(1688년) 후 절대왕정의 시대의 한계를 일반 대중이 인식하게 된 시대 흐름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을 뿐이며, 귀족 권력을 탐한 부르주아 엘리트[25]의 왕권 도전이라는 시각이다.

사실상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혁명의 주도세력이 부르주아 엘리트, 즉 귀족의 질시에 맞선 또 다른 기득권층이었고, 이들의 국가통치가 공포정치(Reign of Terror)로 혼란을 넘어서 국가 붕괴 수준의 비극이었으며, 사회 혼란을 부추긴 상퀼로트[26] 등의 선동과 전횡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던 사실 등이 프랑스 혁명의 빛나는 간판 뒤에 숨겨진 짙은 그림자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폭도가 자행할 수준의 대학살도 역사에 남겼는데 '9월 대학살' 중 상퀼로트 민중이 감옥에 갇힌 성직자와 귀족 천여 명을 살육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귀족 여인들을 강간하는 등 당대 이웃 나라들이 경악할 만한 사건, 사고를 남겼다. 특히, 랑발 공비 사건이 대표적인데 다른 귀족여자들이 모두 해외 망명으로 도피했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곁을 지키겠다고 끝까지 남아 있다가 수감된 그녀는 9월 대학살 시기 상퀼로트 집단에 끔찍한 폭력을 당해 죽은 뒤 목이 죽창 꼬챙이에 매달려 마리 앙투아네트의 감옥 앞에 전시되었다.

혁명의 불길을 넘어서 내전 형태로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 방데 전쟁'(Guerre de Vendée)은 혁명파에 반대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력과 왕당파를 지지하는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이다. 프랑스 서부에 있는 방데 지역의 농민들을 주축으로 한 이 '반혁명 전쟁'은 1793년부터 1801년까지 8년간 무려 30만~4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낳은 내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혁명 세력들은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을 그냥 죽이지 않고 결혼식이라며 남녀를 묶어 수장하고, 아이는 말로 짓밟고, 아기는 총검으로 살해했으며, 임산부조차 포도 압착기로 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최근까지 금기시되고 있고 오히려 해외에서 이 방데 전쟁의 참상이 부분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실정이다. 방데 전쟁에서 끔찍한 진압을 당한 지역은 지금도 여전히 프랑스 혁명 기념일을 반기지 않는다.

이러한 혁명군의 공포정치는 유럽 왕실에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분노한 민중과 여론이 국가 체제를 무너뜨리고, 귀족 사회를 유린하는 상황이 전 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영국에서 러시아까지 당대 모든 왕실이 공포에 떨었다. 사실 프랑스 혁명 시기는 국가 질서가 무너진 아노미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혁명 후 혁명군[27]이 직접 학살한 시민도 당시 수십만에 달하며, 경제 혼란으로 아사한 국민까지 숱하게 발생했다. 혁명 11년만에 국민적 합의로 나폴레옹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것은 프랑스 혁명의 암울했던 경과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이러한 이유로 21세기 들어서 국내에서도 프랑스 혁명의 가치와 의미는 재평가되고 있다. 덧붙여 20세기 국내 학계에서 프랑스 혁명을 특히 민주주의와 직접 결부했던 배경에는 1970~1980년대의 18년 군사정권에 대한 반작용적 측면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프랑스 대혁명의 열매는 전국민이 아닌 왕과 귀족이 있던 자리를 차지한 부르주아 엘리트 남성들이 독점하였고 여전히 농민, 소상공인, 여성, 식민지 원주민들은 정치참여와 권리행사가 제한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아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2차 세계 대전 후 시작된 68운동으로 완성되었다.

4. 이야깃거리

4.1. 아이티의 또 다른 혁명

미국 독립전쟁과 함께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가 독립하는 데 영향을 크게 끼친 사건이 바로 이 프랑스 혁명이다. 혁명 시절 전부터 아이티의 흑인들은 불평등한 대우에 봉기를 해서 프랑스에서 진압을 하긴 했지만 혁명 후 저항이 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아이티의 독립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하던 그 프랑스 혁명정부가 아이티 흑인들의 적으로 등장해 진압과 학살을 일삼았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한창 만들어지던 파리 국회에서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였던 뱅상 오제는 아이티인과 기타 노예들의 권리도 보장해야 맞지 않냐며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조금의 소득도 없이 회의에서 나와야 했다. 이에 분노한 아이티인들은 뱅상 오제를 지도자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고 뱅상 오제는 고문 끝에 죽었다.

그러나 이런 강경진압은 오히려 혁명에 불을 지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끄는 반군 세력이 불어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는 주모자를 처형하며 진압을 하긴 했으나 국내 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기에 더 이상의 강경책은 부담스럽다는 걸 알고 흑인들에게 노예제 폐지와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며 유화적으로 나서면서 아이티 혁명에도 빛이 보이는 듯했으나, 영국과 스페인의 개입, 신분이 다른 혼혈 물라토들과 흑인들 개개인 간의 갈등이 번지면서 아이티는 여전히 혼란에 놓였다. 그러다 나폴레옹 집권기에 아이티 흑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진압과 학살을 일삼고[28]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를 납치했는데, 오히려 이 사건 후로 아이티 흑인들이 모두 등을 돌리며 프랑스에 한 몸으로 대항하게 만들었다.[29] 결국 프랑스는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에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하며 아이티를 끝까지 옥죄어 미국처럼 되지 못하게 했다. 이 배상금 때문에 아이티의 경제는 파탄이 났으며 계급구조 변동도 백인이 흑인으로 변한 것밖에 없어 혁명 이후로도 수십 년 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스페인령 아이티(도미니카)를 침공했다가 실패하면서 몰락했다. 현재도 국경을 맞댄 도미니카 공화국이나 서쪽 바다 건너 쿠바 자메이카, 바하마 등에 비해 더 가난한 최빈국으로 남아 있다. 나폴레옹은 후에 루베르튀르를 체포한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후회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결정적으로 아이티 독립 여론이 확고하게 굳었기 때문.

프랑스는 물론 미시시피회사 거품 사태 같은 경제위기도 영향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아이티의 독립 때문에 루이지애나를 통째로 포기하다시피 미국에 팔아야 했다. 판매대금은 1500만 달러였는데 당시 미국의 영토보다 거대한 땅을 통째로 먹는 미국 입장에서는 공짜나 다름 없는 금액. 루이지애나 구입 문서로.

숭고하다는 듯 내세운 보편 자유주의 이념 위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걸 생각하면 아이티 혁명에 대한 프랑스의 대처는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렇다 보니 흔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혁명사에 아이티 혁명을 끼어넣기만 해도 일반적인 서술과 뉘앙스가 완전히 바뀌는 걸 볼 수가 있다. 일례로 래리 고닉의 유명 학습만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는 아이티 혁명을 끼워넣는 것만으로 뒤틀린 프랑스 혁명사를 쓰는 데 성공했다.

4.2. 여담

  •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시몬 볼리바르 호세 데 산 마르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 의해 남미 지역 대부분이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지만 정작 해방된 국가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백인 혈통인 크리올들이었다.[30] 물론 이들도 원주민과 흑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아르헨티나와 칠레, 우루과이에서는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아메리카 원주민 스페인 식민정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정도로 탄압하면서 학살하기도 했고, 백호주의적인 이민정책도 펼쳤으며, 원주민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에서도 백인과 메스티소, 원주민, 흑인간의 빈부격차는 매우 컸고, 이것이 현대 중남미의 빈부격차로까지 이어졌다. 오히려 적당히 하라며 만류하던 스페인에서 벗어난 현지 백인들은 더 열심히 학살과 억압을 자행했다.
  •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공화정이 운 좋게도(?) 추분 날 성립된 덕에 잠시 쓰였던 프랑스 공화력에서는 천문학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추분이면서 혁명이 일어난 날이기도 한 그날을 공화력의 시작점으로 삼기도 했었다. 혁명력은 12년 남짓 사용되다가 폐지됐다.
  • 혁명 전까지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을 " 군주 를 처형하는 과격하고 무도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혁명 초기에는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을 보고 "너희도 우리 따라하네."라면서 좋아했다. 심지어 일부 영국 왕족들과 귀족들도, 혁명 당시 학살당하는 프랑스 귀족들을 보면서 고소해하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초기부터 혁명의 과격성을 지적했던 영국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보수주의의 성전(聖典)인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년)을 저술한 에드먼드 버크.[31] 하지만 왕족과 귀족들은 혁명이 자국에 퍼질 것을 두려워했고 이는 혁명 후에 프랑스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과 싸워야 했던 이유였다.
  •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에드먼드 버크 토머스 페인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버크는[32]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을 써서 혁명을 이제까지 세상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경악스러운 일이라고 공격하며 국왕, 귀족, 봉건제도를 옹호했다. 그는 국민의회가 품위도 자유도 없는 채 행동하고 있으며,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를 고요하고도 강인한 인내심을 가졌다고 칭송했다. 그러자 페인은 즉각 그에 대한 반박으로 <인권(The Rights of Men)>을 저술하여 버크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버크의 주장이 "세계에 대한 협잡"이라며 프랑스 혁명은 인권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서 비롯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 상태를 국민주권대표제 국가라고 하는 기반 위에서 유럽의 혁명의 전개라고 봤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으로 미국은 자유의 챔피언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는 자유의 우승자로 만들었다며 시민혁명을 적극 옹호했다.
  • 아이러니하게도 바스티유 감옥 습격 후 정국을 주도한 국민의회는 파리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한편,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에드먼드 버크의 주장처럼, 입헌군주제로 점진적인 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급진파라고 칭해지는 자코뱅 내에서도 당통과 같은 과격파들은 마라나 로베스피에르에게 비난받았을 정도. 이랬던 프랑스 혁명이 흑화한 계기는 루이 16세 일가의 탈출 미수와 이로 인한 필니츠 선언. 1791년 6월 루이 16세의 가족들은 파리를 탈출하여 프랑스 동부 국경까지 갔으나 국경을 넘지 못하고 파리로 압송됐다. 국내적으로 왕의 권위나 지지가 크게 떨어짐으로써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온건파와 지롱드의 입지가 좁아졌다. 국외의 경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전격적으로 군사동맹을 맺으며, 곧이어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프랑스 왕을 위해 필요한 무력을 사용하여 즉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는 프랑스에서 주전파가 득세하도록 부추겼고,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며 혁명 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발미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 혁명의 수명을 연장하는 한편 내외부의 악재로 인한 자코뱅과 과격파의 부상은 혁명정부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노선을 변경하도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루이 16세가 제 무덤을 판 셈.
  •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왕정복고주의 세력의 반발이 극으로 치달았다. 특히 브르타뉴와 메인, 앙주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가톨릭 교회의 재산 몰수와 주일 폐지, 과도한 증세와 모병으로 인해 방데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세력과 이를 진압하기 위한 정부군 간의 전쟁을 방데 전쟁이라고 부르며, 앞서 말한 브르타뉴와 메인 지역의 반란과 합쳐 '서부 전쟁'이라고도 한다. 당시 혁명 전쟁으로 인해 정부군 전력의 대부분은 국경으로 이동한 상태였기에 반란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낭트 공방전에서의 패배와 이후의 강경한 섬멸 명령으로 방데 지역은 큰 피해를 봤고, 1796년 반란은 평정됐다. 방데 전쟁 시기에 진행된 진압 작전을 '근대사 최초의 대규모 학살'이라고까지 부르는 역사가들도 있다. 혁명군의 학살이 있었던 것은 이견이 없으나 그 규모에 대해서는 최대 60만 명이라는 막연한 추정치만 있을 뿐이다. 한 동안 혁명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며 방데 전쟁을 비롯한 반혁명 반란의 진압 과정에서의 학살에 대해선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거나 반혁명파의 난동 등으로만 언급하다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때인 2012년이나 돼서야 이걸 인정했다.[33]
  • 대혁명이 반가톨릭 성격을 띠고 있었다 보니, 영미권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존속했던 소도미법이 프랑스에서는 일찌감치 폐지되었다. 신성모독죄도 마찬가지로 이때 폐지되었고 가톨릭은 프랑스 밖에서도 점차 세속적인 영향력을 잃게 됐다. 그래서 전통 가톨릭 계열 단체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가톨릭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프리메이슨 자유주의자가 꾸민 음모"로 여겨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 가톨릭 교회가 세속적인 영향력을 잃게 된 것과는 달리, 종교 권력 면에서 로마의 교황청 및 교황 본인의 권력과 위상은 더 높아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했다. 앙시앵 레짐 문서에 나오듯이 각 지역 교구를 관리하는 주교들은 봉건적 권리를 누리고 있었고, 갈리아 교회주의라 하여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독립적인 성향이 더해졌다. 그런데 이것이 혁명으로 인해 송두리째 무너지면서 교황청으로 그 권력이 집중된 것.
  • 혁명 시기 혼란으로 인해 통제가 일일이 되지 못하면서 발생한 사건 사고는 역사 자료와 문화재의 손실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서 농민의 딸로 프랑스를 구했던 영웅 잔 다르크도 피해갈 수 없어서 일부 과격파들이 그를 두고 왕당파와 가톨릭의 상징이라고 낙인 찍는 일도 있었으며 반혁명 반란 진압과 외국과의 전쟁 등으로 국내외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를레앙과 로렌 동레미 라퓌셀 등 그와 관련있는 지방에서 그를 기리는 기념행사가 할 수 있는 여력도 없는 탓에 중단되는 것은 물론이고 동상을 포함한 기념품과 관련 자료들이 파괴되거나 관리되지 못해 소실되는 일도 있었다. 이후 잔 다르크는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전국민적인 영웅으로 다시 올라서게 됐다. 이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비슷한 사례로 프랑스도 잔 다르크에 대한 기록이 많이 소실되어서 오히려 영국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일어난 7월 14일은 현재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fête nationale)로 현 프랑스의 국가적 축일이자 법정 공휴일이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혁명을 기념하는 군사 퍼레이드, 기념 축제, 콘서트 등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데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기인 1989년에는 200주년 기념일( Bicentenaire de la Révolution)이어서 더욱 더 성대하게 치렀다. 공교롭게도 이 해 G7 정상회의 의장국 순번이 프랑스였던 관계로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에서 정상회담이 열렸고 14일 밤, 파리에서 대규모로 열린 200주년 기념 행사에 당시 해당국 정상들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마거릿 대처, 헬무트 콜 등을 초대하기도 했으며 그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 앞 피라미드와 신도시 라 데팡스 지역에 위치한 신 개선문(La Grande Arche)을 이날에 맞춰 완공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용자짓을 벌인 적도 있는데, 미테랑의 초청으로 기념일 당일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독일군 부대가 퍼레이드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 시민의 분노의 대상이던 프랑스 귀족의 상당수는 혁명 후 몰살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외국으로 달아났다. 프랑스 혁명사의 권위자인 조르주 르페브르의 추산에 따르면 20-30만 정도로 추정되기도 한다.[34]
  • 현대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이 프랑스 혁명 자체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오가고 있다. 긍정적으로 민주적인 법안이 마련된 것이 있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공포정치와 내정 혼란으로 오히려 프랑스를 장기간 동안 전쟁과 학살에 휘말려 문제가 많았다고 제시한다. 여튼간에 빛과 그림자가 확실히 구분되는 혁명이었다.
  • 당통의 죽음은 혁명 이후 자코뱅파 내부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의 대립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유명하다.

5. 대중매체에서

순정 만화의 명작으로 알려진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프랑스 혁명 발발 직전의 프랑스의 모습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후반부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테르미도르도 프랑스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테르미도르 반동 시기까지 다루고 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작품인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템플 기사단이 식량을 대량으로 빼돌려 농민들을 일부러 굶주리게 하고 자코뱅을 부려 대중을 선동한다. 혁명을 통해 혁명 이후 혼란을 거쳐 대중을 통제할 큰 힘을 보이기 위함. 암살단은 반대로 온건한 혁명을 지향하며 템플 기사단과 대립하고 있다.
파일: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jpg
이 그림은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35]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이라는 그림으로, 1789년의 혁명이 아니라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36]

그림이 워낙 인상적인 탓인지 시대가 다름에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관해서 언급할 때 인용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심지어 교과서에서도 말이다. 사실 이 때도 1789년 때처럼 가톨릭이 조인트를 많이 까였었고, 소위 '기적의 메달'이라는 가톨릭 성물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자세한 건 파리의 성모 문서로. 200년 전에도 아킴보가 있었다
파일:external/www.coldplay.com/art_vivalavida.jpg
이 그림은 영국의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의 앨범 사진이다. 노래 가사의 배경이 유명한 역사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 신항로 개척시대, 예수( 로마시대) 등 다양하다.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두 도시 이야기 또한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회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목의 '두 도시'는 런던과, 혁명기의 파리를 가리키는 것. 혁명의 단초가 된 귀족들의 사치와 횡포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서술하지만, 피에 취해 점점 더 광포해져가는 혁명의 열기 역시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작가가 영국인이라서 그런 것 아니냐는 말도 있다만.

바로네스 오르티 스칼렛 핌퍼넬 역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있는데, 농민봉기로 고향을 떠난 저자의 관점이 작품에 녹아들어가 혁명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향 연애 AVG인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도 작중배경으로 이 시기를 다루고 있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로베르 엔리코와 리샤르 T. 헤프롱 감독의 1989년작 영화 프랑스 대혁명(La Revolution Francaise)이 혁명기 프랑스를 다루고 있다. 프랑스 영화이지만 이탈리아, 영국, 독일, 캐나다 합작품이다.

장장 6시간에 달하는 엄청난 러닝타임을 자랑하며 1부와 2부가 각각 '빛의 시대', '공포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답게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한다. 프랑스 왕가의 사치스러운 궁정 묘사부터 시작해서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삼부회, 프랑스 혁명 전쟁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칼 같은 고증을 통해 묘사한다. 출연진도 제법 호화 캐스팅으로 라파예트 후작 역에 샘 닐, 미라보 역에 원로 배우 피터 유스티노프,[37] 사형 집행인 상송역으로 무려 크리스토퍼 리가 출연한다!

혁명의 잔혹한 면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영화이므로 은근히 잔혹한 장면이 많다.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수비군 사령관 드 로네이를 살해하고 그 목을 창에 꽂아 조리돌림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단두대 처형 장면(직접적으로 목이 잘리는 장면은 안나오지만), 후반부 혁명이 과격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시민들이 감옥을 습격하여 죄수들을 끌어내 창밖으로 던져서 죽이고 사람을 전속력으로 벽에 돌진(...)시켜서 머리를 박살내 죽이는가 하면 여자를 산채로 벽에 못박는 장면까지 나온다.

영화 테마곡(L'hymne à la liberté)이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다. 성악 버전 오케스트라 버전

중국의 애저 플레임 스튜디오(Azure Flame Studio)에서 개발된 성녀전기라는 게임이 프랑스 혁명과 이후 혁명 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프랑스 혁명의 전개를 일부 비튼 대체역사로 미라보 백작이 급사하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성녀의 가호를 받은 것을 알게 되자 그녀를 설득하여 프랑스 왕가가 바렌 사건에서 도주하는 대신 잔류하여 혁명을 지지하기로 하면서 프랑스 왕국이 입헌군주제로 개편된다. 다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권을 잡은채로 여전히 왕당파, 푀양파, 자코뱅, 파리지앵으로 나뉘어 개판이 된 상태이다.

초전자머신 볼테스 V의 스토리 플롯 역시 프랑스 혁명에서 많이 따왔다. 적 세력 보아잔부터 명칭은 이웃 혹은 이웃나라를 뜻하는 프랑스어 voisin에서, 내부 구성원들은 부르봉 왕조 앙시앵 레짐에서 따왔다.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시즌2 막화의 중간 부분에 프랑스혁명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다. 12:05에 시작

영화 세계사의 한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루이 16세는 자신과 닮은 시종을 대역으로 세우고 도망치고, 시종이 기요틴으로 처형될 위기에 처하지만 마차를 타고 도망친다.

애니메이션 캐슬바니아: 녹턴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며 아이티 혁명이 언급되기도 한다.

대체역사물 단두대에서 살아남기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 그것도 바렌 사건 직후부터를 다루고 있다.

이노센트(만화) 2부에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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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종점으로 잡는 경우도 있으나 총재정부 시기는 중도적인 노선을 앞세웠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실질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끝난 시기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2] 지식한잔의 영상 [3] 함께하는 세계사의 영상. [4] 흔히 박애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근대 일본의 학자들이 개념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역이다. [5] 해당 지역의 관습법을 따르거나 심지어 로마법을 따르는 곳도 있었다. [6] 이들을 전통 귀족(대검귀족)과 구별해 법복귀족이라고 불렀는데 18세기에는 이미 과거 부르주아 시절을 잊고 완전히 귀족화되어 있었다. [7] 1788년 3월 작성된 재정보고서(compte rendu)를 보면, 수입은 5억 300만 리브르였는데 지출은 6억 2,900만 리브르였다. 즉, 1억 2,600만 리브르의 적자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향락과 사치가 주된 적자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왕실의 경비는 사실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전체 예산 중 왕실의 경비로는 3,500만 리브르가 할당되었는데, 이는 총 지출의 6% 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6%가 적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한국의 1년 예산이 500조 원 정도 되는데, 6%면 약 30조 원을 왕실이 가져갔던 거다. 현재 영국 왕실이 2,000만~3,000만 파운드 정도를 왕실 경비로 받는 것을 감안하고 보면 실로 놀라운 액수다. 그러나 현대의 잣대로 당대의 일을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인 데다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수세기간 유럽의 맹주로 군림하던 프랑스의 위신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왕실 경비가 지나치게 많았다고 해도 재정적자의 28%정도밖에 안 되는 왕실 경비가 재정적자의 원인일 수는 없다. 그 외로는 일반 회계 지출이 19%, 국방비 및 외교 관련 지출이 26%였다. 하지만 국채의 상환과 이자 상환에 들어가는 비용은 놀랍게도 전체 예산의 절반에 육박하는 3억 1,008만 리브르를 차지했다. 이 시기 프랑스 왕실의 절망적인 재정 상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 중 하나다. [8] 사실 진짜로 심각했던 대기근은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끝난 상황이었지만 역사적으로 혁명이나 폭동은 원래 가장 기근이 심할 때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피에르 각속트는 "빈곤은 폭동의 원인은 될 수 있으나 혁명의 원인은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 프랑스 혁명 시기는 기근이 조금씩 나아지다가 다시 조금 하락할 기미가 보이는 바로 그 절묘한 시점이었다. [9] 왕실이 세금 100 원 거뒀다 치면 농민들은 300원을 내는 수준이니 서민경제가 박살날 수밖에 없었다. [10]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한창 잘 나갈 때 매년 15만 리브르, 지금 돈으로 2,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11] 이삭 줍기 권리 자체가 성경에 기록된 율법에서 나온 것이다. 신명기를 보면 수확이 끝난 후에 남은 이삭은 밭 주인이라도 다 주워갈 수 없도록 율법에서 규정했다. 최소한의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빈민이 주워서 식량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구약성경 룻기에서도 며느리인 룻이 이삭을 주워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봉양하는 내용이 나온다. [12] 이삭을 종일 주워도 겨우 빵 몇 개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13] 드 브리엔은 원래 대주교였다가 재무총감 사임 후 고위 성직자인 추기경으로 서품된 상황이었는데 당시 성직자들이 면세와 수탈을 일삼으며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을 일으켰던 점을 생각하면 굉장히 깨어 있었던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담당 교구에서 지역 주민을 상대로 선정을 베풀었고 당대 정치 사회제도 개선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서 인기가 좋았다. 재무총감 사임 후 혁명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혁명정부에 온건한 입장이였으나 동시대에 적극적으로 혁명을 지지한 성직자 출신의 시에예스나 탈레랑과 달리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바람에 행보가 일관적이지 않다는 의심을 사서 감옥에 갇혀 옥사하고 말았다. 자살이라는 얘기도 있다. [14] 다만 이 법관들은 노한 루이 16세의 명령에 12일 밤 추방당했다. [15] Duc de Croy,<journal inédit du duc de croy>, 1718년에서 1784년까지 모음집, pp220-228. 서정복, <살림지식총서 291 프랑스 혁명> pp.5-9. LA Revolution Francaise, Albert Soboul [16] 동양에서 흉년이 들면 왕과 양반들이 거친 삼베옷을 입고 반찬 수를 줄이며 고기반찬과 술을 금하는 것도 흉년으로 나빠진 민심을 다독이려는 목적이 컸다. 영국 또한 명예혁명으로 국왕과 귀족의 특권이 어느 정도 강제로 포기당했으며, 생색내기 식의 기부나 쇼맨십 등으로 민심을 다스렸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도 역대 왕비 중 검소했고 자선사업도 많이 한 왕비였으나 프랑스 왕국은 그것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되지 않았다. [17] 왕의 정부에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의 실권이 아닌, 중세 봉건제의 귀족과 유사한 자체적인 군사력을 통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권력을 말한다.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는 방계 왕족, 대귀족을 지방 총독으로 임명해 지방의 징집과 징세를 맡겼는데 세습되는 총독직은 귀족 후견제와 결합하여 지방귀족들과 단단히 유착되었고, 결국 중세 봉건귀족과 비스무리한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평상시에도 수십~수백 명의 수행 귀족들을 대동하고 다녔고, 유사시에는 수천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자 이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해 반란군에 가담했다. 덕분에 유년기의 루이 14세는 반거지꼴로 프랑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18] 리슐리외-마자랭의 왕권강화책은 워낙 포악하고 자비가 없었던지라 귀족들의 저항이 엄청났다. 샤를마뉴의 피를 이은 프랑스 최고 명문가의 수장인 몽모랑시 공작은 리슐리외에게 처형당했고 루이 13세의 동생 가스통 도를레앙은 리슐리외와 계속 싸우다가 결국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으며 왕위계승서열이 가스통 도를레앙 다음이었던 대 콩데 공 또한 반란에 동참했다. [19]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증손자로, 할아버지, 아버지인 왕세자 루이 왕세손 루이가 모두 일찍 죽은 바람에 5살에 즉위했다. [20] 9년 전쟁 당시 오스만 제국은 영토를 좀 뺏기고 마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논할 정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프랑스 대사는 루이 14세에게 오스만이 멸망 직전이라고 보고했고, 합스부르크는 오스만 보고 정 휴전을 하고 싶으면 "콘스탄티노플과 발칸반도 전체"를 내놓으라고 통보했으며, 내부에서는 로마+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정통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기획할 정도였다. 루이 14세의 뒤치기가 없었더라면 합스부르크가 신성로마제국의 통제권을 다시 휘어잡으면서 동로마 제국의 유럽 영토를 획득하고 이탈리아+스페인마저 확고하게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입장에서는 재앙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판도가 성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21] 이후 러시아 제국까지 등장하여 유럽 내 이권다툼에 참전, 영프보오러 5대 열강 구도가 잡히면서 이런 기조는 더욱 심해진다. [22] 이런 케이스는 다른 나라 역사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의 골수 친일파 인사들이 그랬다. [23]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옛날 것이라면 질색을 할 정도로 싫어했다. 계몽철학이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옛날 것들은 구체제의 모순으로 보이기 충분했을 것이다. [24] "장관 각하! 국왕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인민의 의사로 이곳에 앉아 있는 만큼, 총검에 밀리지 않는 한 퇴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25] 당시 자코뱅과 지롱드의 주축이 상당수 법률가 등 당시 삼부회 의원들이었다. [26] 프랑스 혁명의 홍위병 격으로 소상인, 광대 등 사회 빈민들이 모여 거리 권력을 획득하고 인민재판 등을 통해 시민을 폭압했다. [27] 발미 전투와 방데 전투(1792) 등의 희생자 수만 수십만 명이다. [28] 더욱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 파견된 프랑스군의 대부분이 폴란드 분할로 멸망한 조국 폴란드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폴란드 여단 출신이었다. 물론 이들이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까라니 깐 거지만. 민족의 자유를 되찾으려던 사람들이 또다른 민족의 자유 탄압에 동원된 것이다. 이 폴란드 여단 중 대다수는 아이티 혁명에 동조하여 프랑스군들과 맞서 싸웠으며 아이티 독립에 가담한 폴란드인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소수로나마 폴란드계-아이티인으로 아이티에 남아있다. [29] 아이티 독립군 포로들을 배에 싣고 독가스로 처형하기도 했다는 야사도 있다. [30] 순혈 백인은 물론 혼혈도 포함된 주민도 포함된다. [31] 허나, 에드먼드 버크는 오히려 그당시의 보수주의를 극도로 혐오하고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했는데, 실제로도 버크는 그 당시 기준으로는 온건한 진보주의자로, 현대에는 자유보수주의로 평가받는다. 미국 독립 혁명을 지지했던 것이 그 예다. [32] 위의 각주에서 서술했듯이, 에드먼드 버크는 그당시 입장에서는 보수주의자라고 보기 힘든 사람이다. [33] 방데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도 알려지지 않은 반란이 많았다고 한다. [34] 그러나 이건 나중에 크나큰 부메랑이 되어 프랑스 제1공화국 당시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에 귀족들 가운데에는 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그 빈 자리를 메우기가 매우 힘들었다. 특히 해군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35] 그림에서 여신 왼쪽에 서서 모자를 쓰고 소총을 든 사람이 작가이다. [36]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복장 등에 고증도 대혁명 시기와는 맞지 않는다. 차라리 레 미제라블의 배경시대와 더 가깝다고 볼수 있다. [37] 조지프 파인스 주연의 영화 루터에서 작센 선제후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