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00:54:02

튀르키예/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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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시나이 반도만 서아시아에 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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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통령3. 부통령4. 대국민의회5. 지방자치6. 튀르키예 정치의 구성요소들7. 에르도안의 권력 강화
7.1. 대통령 직선제 도입7.2. 언론 탄압7.3. 인터넷 검열7.4. 2017년 개헌
8. 관련 문서

1. 개요

세계가 튀르키예를 우려하는 이유
튀르키예의 정치 정보
<colbgcolor=#e30a17> 부패인식지수 34점 2023년, 세계 115위[1]
언론자유지수 31.60점 2024년, 세계 158위[2]
민주주의지수 4.33점 2023년, 세계 102위

튀르키예는 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2017년 개헌 이전까지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해왔다.

튀르키예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집권 초인 2005년에는 정치적 권리(PR) 27점, 시민 자유(CL) 38점, 총 65점의 상당히 높은 점수였고 2014년까지도 60점대를 기록했으나[3] 에르도안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2015년 5점[4], 2016년 2점[5]이 하락하며 50점대로 떨어지더니 2017년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미수의 여파로 무려 15점[6]이 하락해 38점이 되었고, 2018년에도 6점[7]이 하락했고, 이후 30점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다. 2024년 현재 튀르키예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PR 17점, CL 16점, 총 33점.

2. 대통령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튀르키예 대통령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부통령

대통령은 부통령을 지명할 수 있으며, 대통령 유고 혹은 궐위시에 그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지만 대통령 유고 및 궐위 발생으로부터 45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8] 부통령직은 2017년 헌법 개정으로 설치되었으며, 현임 부통령은 푸아트 옥타이(Fuat Oktay).

4. 대국민의회

튀르키예의 대국민의회(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는 단원제 의회이다. 1982년 이전까지는 양원제였으나 군부 독재정권 당시 단원제로 개헌된 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임기는 5년이며, 행정구역을 기반으로 한 87개 선거구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통해 선출된다.

봉쇄조항은 7%. 비례대표제 채택 국가 중에서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 봉쇄조항은 1980년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명목상으로는 정당 난립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도입된 조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쿠르드족을 배제하려는 의도로 의심되고 있다.

이 제도 때문에 특정 정당이 과반에 한참 못 미치는 득표율을 얻고도 개헌선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적이 2번이나 된다. 첫 번째인 1987년 총선에서는 투르구트 외잘 총리가 이끌던 조국당(ANAP)이 36.3%를 득표했음에도 전체 의석의 65%(292/450)를 석권했다. 그러나 이 때는 외잘 총리가 경제를 전혀 개선하지 못했고, 무리하게 추진한 개헌 국민투표가 반대 65%로 부결되면서 재선 1년만에 레임덕이 찾아왔다. 결국 당시 여당이던 조국당은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대참패하면서 쉴레이만 데미렐에게 정권을 내줬다.

두 번째로, 2002년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투표에서 1/3밖에 못 얻고도(34.28%) 의석수 66%(363/550)를 독식했다. 공화인민당이 19.5%를 득표해 나머지 34% 의석을 획득했고, 정의개발당과 공화인민당 이외의 모든 표가 사표가 되는 바람에 전체 투표의 46%가 사표가 된다.[9][10] 사실 다른 정당들이 봉쇄조항 돌파 실패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정당들 간의 알력다툼은 끝이 없었고 후보 단일화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오히려 멀쩡히 있던 당에서마저 계파 갈등으로 인해 탈당과 분당이 쉴새없이 일어나는 난장판에 가까웠다. 결국 정당들 간 단일화 협상은 실패했고, 이들 정당의 지지표는 전부 사표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중진 의원 일부는 아예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정의개발당, 공화인민당에 빌붙어 출마하여 자기 자리를 지켰다. 2002년 튀르키예 총선은 역대 가장 많은 정당(76개 정당)이 참여한 선거로 튀르키예 역사에서 깨지지 않을 대기록이기도 하다.

2002년에 전부 원외정당 신세가 된 反에르도안 진영은 이후 정당 간 이합집산을 통해 모두 합쳐졌다. 2015년 쿠르드족 출신 인민민주당(HDP)의 봉쇄조항 10% 돌파를 마지막으로 주요 정당들의 득표율이 봉쇄조항 이하로 떨어지는 사례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2017년에 선거법이 개정되며 거대 정당과 선거연합을 구성한 군소정당들은 봉쇄조항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2018년 선거에서 9.96%[11] 득표한 좋은당을 시작으로 2023년 선거에서는 2.81%를 득표한 새복지당과 1.73%를 득표한 튀르키예 노동자당이 봉쇄조항에 미달함에도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한편 2002년 이래 정의개발당이 대국민의회 제1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2017년까지 의원내각제였던 국가로 본래는 의회에서 선출되는 총리가 내각을 구성해 국가를 이끌었다. 그러나 에르도안이 튀르키예 대통령이 된 2014년 이후로 실권은 거의 대통령에게 넘어가고 총리는 유명무실해졌으며, 결국 2017년 개헌을 통해 총리직은 폐지되고 해당되는 자리에 부통령직이 신설되었다. 의원내각제였던 시절에는 총선 이후 120일 동안 내각 구성을 하지 못하면 튀르키예 대통령의 지시로 의회해산 후 재선거를 했다. 현재는 국회의원 360명 이상의 동의와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의회 해산이 가능하며, 일단 의회가 해산되면 대국민의회 선거과 대통령 선거를 같이 시행해야 한다. 즉 의회 해산은 대통령이 3선을 노리지 않는 이상 대통령의 재임기간을 단축시키는 불필요한 행위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넘어가던 과도기에는 잠시 대선과 총선 날짜가 불일치하기도 했으나, 2017년 개헌을 통해 두 선거의 날짜를 일치시켜 현재는 대선 1차투표와 총선이 같은 날에 실시된다.

정기 재보궐선거에 관한 사항이 선거법에 규정돼 있기는 하나, 이 조항은 선거구에 대한 조항과 모순되어 1990년대 이후 사문화된 상태이다. 한편 어느 선거구의 의원 자리가 전부 공석이 되거나 의회의 5%(30명)가 공석이 되면 공석이 존재하는 선거구에서 90일 이내에 재보궐선거를 진행한다. 전자의 조항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을 총리에 올리기 위해 2003년 신설된 조항이고, 후자는 아직까지 실현된 사례가 없다.

5. 지방자치

의외로 튀르키예는 지방자치제도가 일찍이 확립되어있었다.

2014년 이전까지는 한국과 비슷하게 전국을 16개 대도시자치단체(büyükşehir belediyeleri)를 포함한 81개 광역자치단체에 해당하는 도(일, il)로 나누고 그 안에 기초자치단체인 군·구(일체, ilçe)를 구성하여 2단계 행정체제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기초자치단체가 2004년에 3,193개라는 무지막지한 숫자. 에르도안 정의개발당이 집권하고 나서 대도시자치단체를 늘리고 기초자치단체를 거의 부군면 통폐합 수준으로 축소하고 있다. 2014년에는 대도시자치단체가 30개로 증가하고 기초자치단체는 1,351개까지 감소했다. 이 과정에서 정의개발당이 은근슬쩍 지방의원 정수도 대거 축소하고 있다. 2004년 지방선거에서 총 3,208명을 뽑았던 광역의원, 총 34,477명을 뽑았던 기초의원은 2014년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은 1,251명으로 1/3토막을 내고, 기초의원은 20,500명까지 줄였다.

정의개발당에서는 이것도 많다며 더 줄이겠다고 벼르고 있어서 2019년 튀르키예 지방선거에서는 더 크게 줄어들 예정이다. 공화인민당에서는 정의개발당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광역자치단체 수를 증가시킨다는 조건 하에 뭐라 하지 않고 있지만, 쿠르드족 계열인 인민민주당은 지방의원 정수 대거 축소에 대해 격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의개발당에서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너무 예산낭비를 심하게 한다는 이유로 기초자치단체를 600여개, 지방의원은 1만명 아래로 줄이는 것을 계획중.

또한 튀르키예에는 각 도와 기초자치단체에 해당하는 대표가 중앙정부에서 임명하는 쪽과 민간에서 선출하는 쪽으로 두개가 존재한다. 도의 경우 중앙에서 임명하는 왈리(Vali)와 민간에서 선출하는 도지사(İl başkanı)가 존재하고 기초자치단체에도 중앙에서 임명하는 카이마캄(kaymakam)과 민간에서 선출하는 군수, 구청장(ilça başkanı)가 따로 존재한다.[12]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보내는 왈리와 카이마캄은 민선 도지사와 군수의 활동을 보조하면서 동시에 견제하는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에 지방자치에 있어 중앙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6. 튀르키예 정치의 구성요소들

6.1. 세속주의 이슬람주의

튀르키예 국민의 대부분은 무슬림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튀르키예는 철저한 세속국가다.

튀르키예가 이토록 철저한 세속주의 국가가 된 것은 케말 아타튀르크와 공화주의자들이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이슬람을 "극복해야 할 낡아빠진 이데올로기"로 치부해 철저히 배격했기 때문이다. 아타튀르크의 종교 배제와 세속화 정책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강경했다.

그러나 도시 지역과 달리 시골은 여전히 보수적인 대중 문화가 많이 남아있어서, 정치적인 세속주의와는 별개로 시골 지역에서는 일례로 명예살인 2005년에서야 법적으로 금지된 적도 있었다.[13] 게다가 불법화 이후에도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해당 여성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사건이 가끔씩 벌어지곤 한다.[14]

그래서 튀르키예는 공화국 건국 이래 세속주의를 강력히 추구해왔지만, 오늘날 튀르키예인의 민족성을 규정하는 것 중 하나가 이슬람인 것이 현실이기에 이슬람이 튀르키예인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해서, 현재도 공화주의자 + 군부와 이슬람주의자의 힘겨루기가 이어져오고 있으며, 튀르키예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은 대개 이슬람 vs 세속주의이다.

파일:external/image.donga.com/20100507071_1.jpg

이런 식으로 국회 공성전이 잦은데 그 원인도 이슬람과 세속주의의 갈등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튀르키예 서부 지역은 상당히 세속적이고 자유분방한 편이지만, 동부로 갈수록 보수적이고 과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배트맨을 두고 소송까지 벌인 ' 바트만' 시 같은 곳에선 명예살인 및 여러 이슬람 과격 논쟁도 벌인 바 있고 아주 드물게 과격파에 의한 테러도 벌어지는 실정이다.[15] 이슬람 보수파와 소수민족들이 동부에 많이 살기도 해서 과거의 치안은 내전 수준으로 불안했다. 90년대 초반에는 튀르키예군이 길을 묻다가 튀르키예어를 못 알아듣는 쿠르드인 농부를 그냥 쏴 죽인 사건도 있을 정도이다.

처음 튀르키예에 도착하면 길거리 가판대에서 플레이보이를 대놓고 파는가 하면 신문, 방송에도 굉장히 선정적인 모습을 보여서 서유럽만큼이나 자유분방한 나라처럼 여길 수 있으나, 튀르키예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보수적인 면이 꽤나 많다. 대도시 지역은 이런 경우가 적지만, 시골에서는 전원적인 풍경이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으려 하면 여자들이 황급히 도망가거나 제지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외간 남자에게 얼굴 팔리는게 곧 동네 망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라도 남녀가 함께 손잡고 걸으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야단친다.

이는 여행할때도 굉장히 핸디캡으로 작용하는데 대부분의 (저렴한) 숙소가 커플숙박객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한 남녀가 아닌 이상 같은 방을 주지 않기 때문에 싱글룸 두 개를 잡아야 한다. 사실 3스타 이상의 고급호텔에서는 내국인 미혼커플 숙박객도 받는다. 튀르키예에 거주하면서 호텔 주인과 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여행객들이 묵는 저렴한 숙소나 외국인 호텔의 경우 일부러 방값을 두배로 받기 위해 "여기는 이슬람 나라니까 미혼커플은 혼숙이 불가능하므로 방 두 개를 잡아라"라고 사기를 친다는 것. 튀르키예 법으로도 만 18세 이상 남녀의 혼숙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사기가 그럴듯해보일 정도로 사회가 보수적이라는 것을 방증한다고는 할 수 있겠다.

과격 보수파들에겐 이스라엘과 무역을 하며 같이 군사훈련도 하는 튀르키예 정부의 현재 모습이 불만일 것이고 때문에 여러 번 테러도 벌어졌다. 2003년에 벌어진 영국계 은행 HSC 은행과 영국 총영사에 벌어진 자폭테러도 비슷한 경우. 이 사건으로 48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면서 튀르키예의 치안이 나빠지자 과격파에 대해 더 엄격해지고 탄압과 감시도 지독하게 심해졌다. 튀르키예에서는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거나 회사에 출근할 때도 입구에서 검문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때부터 이어진 법이다. 저 당시에는 지하철, 전차를 탈 때조차도 검문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지금도 마르마라이 같은 이스탄불 지하철 역에는 항상 검문검색대가 있어서 검문검색이 실시중이다.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이라 기독교, 특히 선교사를 파견하는 개신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편. 대놓고 탄압하진 않지만 개신교 신자 대상으론 불시에 수색을 하는 등 어느정도 불이익이 있다.[16] 하지만 세속적인 성향은 분명히 드러나 이스탄불이나 트라브존, 앙카라, 에디르네, 이즈미르 같은 서부 쪽 대도시에선 에잔(이슬람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알리는 말)이 울리면 무조건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담배 피우면서 일하거나 책보거나 잠을 자고 먹을 거 먹는 이들도 꽤 된다고 한다. 라마단 때도 은근히 숨어서 먹는 이들도 많고, 눈치껏 조용히 뭘 먹는 이들도 꽤 된다. 이래서인지 골수 아랍국가들은 튀르키예는 무늬만 이슬람인 엉터리 나라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물론 동부로 갈수록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리고 동부 지역 내에서도 도시의 엘리트, 부유층은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서민들을 '무식하고 천하다'고 무시하고, 서민들은 그러한 부유층, 엘리트에 대해 "신앙심도 없고 부도덕하면서 우리를 무시한다"라고 분노하며 갈등이 벌어지곤 한다.

튀르키예는 이슬람교와 세속을 아슬아슬하게 왔다갔다하는 나라인데, 도시(서부)는 대체로 세속주의가 강하고, 향촌(동부)으로 갈수록 보수주의가 강하다. 그래서 도시에서는 자체 포르노 영화까지 제작되는 판국인데 반해, 농촌에서는 여성이 결혼 전에 처녀성을 잃었다는 이유로 명예살인을 당하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에 금지된 음주는 도시에서는 거의 신경쓰지 않지만, 개중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들은 금주를 지킨다.

정의개발당 집권 이후로 튀르키예의 세속주의는 조금씩 완화되어갔는데, 완화되는 정도가 아니라 반세속주의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어, 에르도안 집권 이후 튀르키예의 엘리트가 180도 뒤바뀌고 있다. 히잡은 원래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쓰던 것이 이제는 대통령 영부인이 히잡을 쓰니까 중상위 엘리트까지 확산되어 히잡을 써야 대접받는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조성되는 분위기가 되었다. 튀르키예 군경까지 히잡이 허용되어 더할 것이다. 2008년 이후 구 엘리트이던 세속주의 세력과 신 엘리트(예를 들어 이슬람계 중상층 상인, 기업인 등. 압둘라 귈, 에르도안이 이에 해당)의 싸움이 벌어졌고 구 엘리트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불과 16년 전만 해도 달랐던 분위기가 확 뒤바뀌고 있다. 2016년 8월 27일에는 여경이 히잡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치를 발표했고, # 튀르키예 여군의 히잡착용금지도 철폐했다. #

7월 2일에 튀르키예 최고행정법원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환원하는 것을 2주뒤에 결정한다고 밝히면서 비판을 받고 있다. # 이에 에르도안은 하기아 소피아 박물관의 모스크 전환은 튀르키예의 주권사항이라고 밝혔다. #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로 바뀐 7월 24일에 에르도안은 하기아 소피아에서 예배를 했다. #

튀르키예에서 LGBT 퍼레이드가 에르도안 정권에 의해 몇년동안 취소되고 있고 정치인들의 LGBT에 대한 혐오 발언이 늘어나면서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드라마에 게이 캐릭터가 나왔다는 이유로 넷플릭스측에 압력을 가한 일이 발생했다. #

튀르키예 정부가 이스탄불 협약에서 탈퇴하자 여성단체들이 항의시위를 했다. # 그리고 6월 19일에도 항의시위를 했다. #

여성단체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정부는 7월 1일부로 이스탄불 협약에서 탈퇴했다. #

튀르키예 SNS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23살의 여성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스테르담의 성 박물관 안에서 찍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혐의로 기소(!)됐다. # 다만 후속기사는 없고, 메르베 타쉬큰(Merve Taşkın) 본인의 인스타그램에도 새 포스트가 멀쩡히 올라오는 걸 봐서는 유야무야된 것 같다.

6.2. 정당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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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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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 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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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정치에서 좌우를 가르는 기준은 공화국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로 프레임화 되어있다. 즉 세속주의 성향은 좌파, 이슬람주의 성향은 우파로 크게 구분되지만 그 안에서도 민족주의, 사회주의 계열 등의 자잘한 구분 또한 존재한다. 이것을 유념하며 각 정당의 행보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923년 공화국 수립 이후 전통적으로 튀르키예를 지배해오던 정당은 케말주의 이념을 계승한 공화인민당(Cumhuriyet Halk Partisi)이었다. 이 정당은 케말 아타튀르크가 창당한 정당으로, 현재 기준으로 사회민주주의가 주요 당론인 중도 좌파 정당이다. 유럽의 각국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정당들의 국제 연대 단체에도 소속되어 있다.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가 크게 상승 바람을 받던 50~60년대에는 강경 사민주의 성향을 띄기도 했다. 튀르키예 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군부와도 긴밀한 연대를 구축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군부와 공화인민당이 항상 죽이 잘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군부 쿠데타 이후 공화인민당이 군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던 역사도 있었고, 기본적으로 정당이란 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군부와 대립하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그래도 세속주의의 보루이자 케말주의의 계승당이라고 불릴만 하다. 공화인민당은 군인을 비롯한 공무원, 노조, 고학력자, 알레비파 교도 등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다.

이후 20세기 동안 튀르키예의 정치구도는 중앙집권 급진주의를 지향하고 세속적인 공화인민당과 지방 분권 온건주의를 지향하며 상대적으로 친이슬람적인 민주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구분은 상당히 오래동안 지속되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오스만 제국 시기 통합진보위원회와 자유와 합의당 사이 관계도 이러하고 1924년 창당한 진보공화당도 공화인민당보다 온건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이었다. 그러나 1925년 쿠르드족 봉기를 이유로 아타튀르크는 진보공화당은 강제해산하고 1937년까지 일당제로 통치했다. 그리고 이스메트 이뇌뉘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해 당내 소수파의 탈당을 지지하니 이렇게 탄생한 정당이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인민공화당에서 분당하여 기존의 자유와 합의당, 진보공화당과 같은 포지션으로 있었으나 공화인민당에서 분당한 만큼 그 정도가 크진 않았다. 그러나 1950년 아드난 멘데레스가 집권하여 연임에 성공하며 인민공화당의 경쟁정당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2차 멘데레스 내각은 경제위기를 맞고 이를 해결하기는 커녕 군부와 공화인민당의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3차 멘데레스 내각은 초헌법적 공안기구를 설치하고 언론과 야당을 탄압했다. 그리고 이뇌뉘 대통령이 피습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1960년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당을 강제해산하고 민주당 지도부는 종신정치금지, 멘데레스 총리에겐 교수형을 구형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의 후신 정당인 정의당이 등장하였고 80년대 후반 부터 이슬람주의 정당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런 정당들이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할 때마다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뒤엎었다.

현재의 집권여당은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으로 친 이슬람적 성향[17]으로 인해 군부, 공화인민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문제를 잡고 국민 소득을 많이 높이는 등 2010년대 초반까지 경제가 순항하여 이시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덕분에 군부에서도 압둘라 귈을 비롯한 정의개발당 정치인들의 친이슬람정책에 대하여 반발이 컸지만 2천년대에는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고 지나갔다. 2016년은 실패 허나 2014년부터 경제가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gdp가 쪼그라들고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경고등도 커지는 등 위기도 맞고 있다.

상기했듯 튀르키예의 정당구도는 세속주의 vs 종교주의라는 큰 프레임에 기타 자잘한 프레임이 겹쳐져 있는데, 이것을 놓치면 기타 주요 정당 중 하나인 민족주의행동당의 행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민족주의행동당은 과거 케말주의자들 가운데 친군부성향+친종교적 성향의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이 갈라진 정당으로 아타튀르크의 정책과 유산을 계승해야 하지만, 동시에 종교적이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정의개발당이나 행복당, 과거의 복지당 같은 이슬람계열 정당들은 기본적으로 무슬림은 매우 보편적이고 열려있는 개념으로 받아들이지만[18] 민족주의행동당의 경우, 무슬림이더라도 튀르크 혈통이 아니면 배제하자는 입장이다. 즉, 민족주의행동당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튀르키예에서 태어났고 무슬림이더라도 쿠르드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은 배제해야 한다고 보며지못미, 때문에 종교적인 성향으로 정의개발당의 2중대를 자처하는가 하면 갑자기 세속주의 성향으로 전환해 케말주의 정당인 공화인민당과 연합하기도 하는 것이다. "튀르키예는 튀르크인의 땅이다(Türkiye, Türklerindir.)" 라는 구호와 제노포비아적 성향을 보이는 민족주의행동당은 때문에 전통적인 이슬람 우파적 가치로는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이 정당의 전통적인 지지층은 앞에서 말했듯 군부를 지지하고 같은 무슬림이더라도 다른 아랍 국가의 국민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케말주의 우파들이었으나, 당대표 데블렛 바흐첼리가 2017년 본격적으로 에르도안에 붙을 조짐을 보이자 이들은 모두 메랄 악셰네르가 이끄는 좋은 당과 위미트 외즈다으의 승리당으로 흩어졌고, 현재는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에는 실망했으나 쿠르드족, 좌익 사상 등에 대한 반감으로 공화인민당을 지지하지는 못하겠다는 유권자들의 대체 정당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재는 원래의 정체성은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또한 쿠르드 민족정당인 인민평등민주당이 원내에서 활동중이다. 이들의 주요 지지층인 쿠르드족은 에르도안은 싫어하면서도 문화/종교적으로는 튀르키예 내에서 제일 보수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들의 사민주의/친LGBT/여성주의 성향은 쿠르드족의 온전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하며, 이들은 보수성을 내세우는 정의개발당과 지지층 확보에 있어 경쟁 관계에 있다.

한편 튀르키예 동남부 지방은 여전히 지방 토호 정치명문가의 영향력이 강력한데, 이들은 특이하게도 한 가문이 한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여러 정당으로 나뉘어서 활동한다. 예를 들어, 비틀리스의 가이달르(Gaydalı) 가문의 장남은 인민평등민주당에서, 동생은 정의개발당에서, 그의 아버지는 민주당에서 활동하는 등 당색이 제각각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시행하는 튀르키예 선거법 특성을 이용해 최대한 많은 당선자를 내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서로 같은 선거에 출마한 삼촌과 조카가 선거 결과를 둘러싸고 중앙선관위에 재검표를 요청하며 가족끼리 갈등을 빚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가족 구성원 간의 정치 노선 차이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6.3. 군부 정치

튀르키예 내의 군부의 위치는 상당하다. 유사시 징병가능한 병력만 2,200만명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군사력에, 아타튀르크나 그 뒤를 이은 이스메트 이뇌뉘 같은 장군 출신들이 1차 대전 이후 튀르키예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냈기에 군부에 대한 대우나 인식이 좋은 편이다. 심지어 경찰은 썩어서 부정부패 저지르고 잔다르마(Jandarma, 헌병)가 와서 이를 바로잡는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19]

그러나 군부의 특권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도 많다. 인권문제는 물론이고, 6.25때 튀르키예 참전에 이바지한 당시 총리 아드난 멘데레스(Ali Adnan Ertekin Menderes)를 군부가 쿠데타로 축출하여 기어코 교수형시킨 것이 멘데레스가 너무 세력이 커진 군부 힘을 줄이고자 노력한 게 원인이었다. 이 사람도 이슬람 강경파들을 견제하고, 반공 정책을 취했으며 해외 자본 참여 같은 일도 풀어주며 개방적으로 이끌던 인물이었다. 후일 멘데레스는 명예가 복권되었고, 후손들은 국가 연금을 받으며, 교과서에서도 여러 일로 잘했는데 군부와 충돌로 인하여 죽게 되었다고 뒤늦게 우호적으로 수정되었다.[20] 그리고 튀르키예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강한 후유증을 유발한 1980년 케난 에브렌(Ahmet Kenan Evren)의 쿠데타 역시 군부가 벌인 흑역사. 튀르키예의 전두환이나 후안 페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프란시스코 프랑코라 할 수 있는 에브렌은 대통령 중심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독재자가 되어 7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렇게 군부가 쿠데타를 벌여서 선거로 집권한 정부를 뒤엎고 대통령과 총리를 몰아내는 일이 자주 벌어졌는데, 1960년을 시작으로 1971년, 1980년, 1998년, 2016년까지 10여년을 주기로 정권에 대한 쿠데타가 반복되면서, 유럽 연합에서는 이 일을 문제삼아 튀르키예의 EU 가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젠 유로존 문제도 있고... 이 때문에 튀르키예는 여러가지로 강대국이 될 여건이 큰데도, 군부 때문에 발목을 잡는다고 포브스에서도 보도할 정도로 알아준다. 위에 멘데레스 일에서도 언급하듯이 군부 고위직들이 여러 국영사업체들을 맡는 것도 문제.

튀르키예 정치에서 군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모순적인 결과로 귀결되며, 이는 종종 튀르키예 정치에 관심있어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튀르키예 정치에서 군부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튀르키예 세속주의의 수호자'일 것이다. 튀르키예인들 대부분이 무슬림이며, 신앙심이 꽤 깊은 편이다. 아무리 케말 아타튀르크 이후 꾸준히 세속화, 튀르크화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튀르키예 사회에서 세속주의의 대척점에 위치한 이슬람주의가 아예 힘을 잃었다고 하는 것 역시 무리다. 오히려 히잡을 쓰고 등교하고 싶다는 작은 욕구에서부터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끼는 것까지 다양한 이유로 이슬람주의는 꾸준히 힘을 얻고 있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 의회제도, 선거제도 등은 모두 서양의 문물이며, 튀르키예 정치에서 이슬람주의에 대항해 이와 같은 서구의 제도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바로 군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적인 방법으로 힘을 얻은 이슬람주의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서구의 제도를 지켜야한다는 군부의 입장은 전혀 민주주의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민주주의와 세속주의를 수호한답시고 전혀 민주적이지 못한 방법을 써야 하는 이 모순적인 모습은 아타튀르크 이래 튀르키예 군부가 튀르키예 정치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이다.

튀르키예 뿐만 아니라 다른 중동 지역에서도 이러한 군부의 권위주의 + 세속주의는 반대로 대중들로 하여금 민주주의 + 이슬람 극단주의(중에서 그나마 온건파)를 선택하게 한다는 해석도 있다. 민주주의가 자생할 만 하면 군부가 무력을 동원한 편의주의로 개입하여 헌정질서를 교란하는 것 또한 책임론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이러한 군부 개입의 한계는 2016년 7월 16일에 벌어진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미수 사건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군부는 20세기에 했던 것처럼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튀르키예를 통제중이라고 방송을 통해서 주장했다. 허나 군부는 세속주의와 정교분리를 지키기 위해 이슬람화 정책을 추진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해 정변을 일으켰으나 정작 많은 튀르키예인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으며[21], 오히려 일부는 쿠데타를 스스로 막고 나섰다. 덕분인지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 이는 더이상 군부가 무력으로 세속주의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6.4. 민족주의

튀르키예는 민족주의가 상당히 강력한 국가이다. 역사적으로 소수민족, 특히 아르메니아인과 마찰이 잦았던 만큼 오스만 제국 치하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는 입에 올리기만 해도 목숨이 위험해질 정도이다. 아르메니아계 튀르키예 언론인 흐란트 딩크(Hrant Dink)라는 사람이 이 문제를 언급했다가 오귄 사마스트(Ogün Samast)라는 청년에 의해 대낮에 총탄에 벌집이 되어 사망했는데, 사마스트와 함께 공범이였던 야신 하얄(Yasin Hayal)이라는 청년은 "다음에는 오르한 파묵 차례다!"라는 인터뷰까지 했다. 반 학살[22]이나 카르스 학살[23]이 대표적 떡밥이다.

심지어 노벨상(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도 자기 나라에서 학살 문제를 언급했다가 살해협박을 받고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했다가 튀르키예로 돌아왔으나 에르도안 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미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현재 오르한 파묵은 미국에서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오르한 파묵이 언급한 학살 문제는 다음과 같다. '오스만 제국은 100만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과 13만이 넘는 쿠르드인을 학살했다.[24] 그것은 비난받을 잘못이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끼리 싸우고 나아가 그들도 오스만인들을 학살한 학살이나 카르스 학살같은 일같은 여러가지 잘못도 언급해야 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런 것도 죄다 오스만 인들 탓을 하고 있으면서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학살과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에게 사죄받고 싶으면 자신들도 사죄하고 인정해야 한다.' 사실 중립적 언급이라고 보기엔 규모면에서 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일단 오스만의 학살을 인정했다. 조금 튀르키예쪽에 쏠린 발언이긴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25]한 것 자체를 숨기는건 사실이니까. 아르메니아는 오르한 파묵의 이 발언에 입다물고 있다.

회색늑대라는 정치깡패 조직이 튀르키예 마피아와 연계하여 설치고 있다. 회색늑대는 범튀르크주의, 범투란주의를 주장하며 강한 튀르키예 민족주의적 색채를 띈다. 또한 튀르키예 마피아와 민족주의 정치인들, 군부, MIT 같은 정보기관이 서로 연계하여 정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이 연계된 부정부패와 초법적 비리는 몇차례 국가적 스캔들로 번지기도 했다. 딥스테이트의 어원도 이런 튀르키예 정치의 특수성에서 유래됐다. 관련 영문 위키 2021년 5월에는 유명한 튀르키예 마피아 보스 세다트 페케르가 또 다시 정의개발당 에르도안 권력 핵심층의 비리를 폭로하기도 했다. 기사, 기사2, 기사3

6.5. 쿠르드족 문제

튀르키예 남동부 광범위한 지대에 약 1200~1500만명 가량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 이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 그리고 혈통을 가지고 있는 민족으로 튀르키예인과 여러가지 마찰이 있고 갈등이 심해 현재까지도 튀르키예의 골칫거리다. 특히 튀르키예는 오랜 세월동안 이들의 독자적인 언어, 문화, 교육을 금지하고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족에 대한 엄청난 인권탄압과 경제적 차별, 홀대가 이어지면서 쿠르드족의 반튀르키예 감정과 적개심이 극심하다.[26]

현재도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을 비롯한 수많은 지하저항단체들이 분리독립을 외치면서 계속 테러와 게릴라전으로 튀르키예를 괴롭히면서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EU가입을 의식해서 쿠르드족에 대해서 조금씩 유화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는 한다. 하지만 2009년 이스탄불에 벌어진 쓰레기통 폭탄 테러를 비롯한 여러 테러에 쿠르드인이 관여한 것이 드러나자, 튀르키예인들의 분노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어 튀르키예 정부가 쿠르드인에게 엄하게 나오고 쿠르드인들도 그럴수록 튀르키예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강해져 게릴라전과 테러로 튀르키예와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어 쿠르드인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PKK의 테러 노선에 반대하며 떨어져 나온 평화민주당(BDP) 등 쿠르드족 계열의 합법 정당들은 오랜 기간 동안 튀르키예 대국민의회(TBMM)에 의석을 얻기 위해 애썼으나 쿠르드 정당의 원내진입을 막기 위해 설정한 10%의 높은 봉쇄조항에 가로막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과거 이를 우회하기 위해 무소속으로 지역구 후보들을 출마시키는 전략을 사용했으나, 2015년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인민민주당이 13%의 득표율로 처음 원내입성에 성공한 이후 지속적으로 10%대 이상의 지지율을 얻으며 튀르키예 정치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인민민주당은 쿠르드 민족주의와 함께 튀르키예 내 좌파, 노동운동 세력 및 성소수자들을 포섭하여 현재 빅텐트 좌파 정당의 성격을 띤다.

사실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이라크, 시리아, 이란 접경지대에 총 2500~3000만명이 각 나라별로 찢어져 살고 있다. 역사상 한번도 독립국가를 세워보지 못한 채 이 나라 저나라에 털리면서 살아온 민족으로 이들의 꿈은 독립국가 '쿠르디스탄' 건국이다. 그러나 튀르키예를 비롯해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쿠르디스탄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 각 중동 국가들은 이들의 독립운동을 매섭게 탄압하거나 분리독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 북부 유전지대를 포함한 쿠르드족 지방정부가 쿠르드 노동자당을 지원한다는 구실로 튀르키예군이 이라크 북부 침공을 준비한 적도 있다. 이라크와 튀르키예 접경지대 양쪽에 나뉘어 살고 있는 쿠르드족의 연결에 대해서 튀르키예는 극도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27]

그리고 1990년대부터 튀르키예는 동부의 물부족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에 물도 수출하고 서부쪽은 별로 걱정이 없는데 사막성 기후가 많은 동부쪽의 물부족을 우려해 댐을 연이어 짓고 있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아타튀르크 댐은 다 만들었고 더더욱 많은 댐을 지으려고 하는데, 이 문제로 반발한 시리아와 전쟁 직전까지 가고 주변 나라와 갈등이 장난이 아니다. 거기에 문제는 댐들이 지어지면 쿠르드족이 많이 사는 도시들과 마을들, 디야르바크르와 하산케이프를 비롯한 지역들이 물에 잠기는 점. 여기에 쿠르드족 말고도 여러 나라가 지배하고 살았던만큼 많은 전근대에서부터 고대 유적지까지 있다. 이때문에 튀르키예 및 국제 고고학계는 결사반대를 부르짖고 있다. 이에 대하여 튀르키예 측은 이집트 아스완 댐 건설때처럼 유적지를 옮긴다는 의견을 보였다가 실컷 비웃음이나 듣었는데 아스완 댐이 건설 이후 벌어진 자연기후 변화 문제로 계속 까이고 있다.

더불어 친튀르키예 쿠르드인들도 당연히 이건 쿠르드 독립이니 뭐니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문제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해선 독립지지 쿠르드인들과 협조하여 막겠다고 이를 갈며 저항한다. 동부가 아닌 서부 및 이스탄불이나 앙카라 수도권 거주 쿠르드인들도 이건 결사반대중이다. 수백여만 쿠르드인들 거주지를 물바다로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쿠르드인들이 반튀르키예 감정을 가져 내전을 더 크게 벌인다는 우려와 반대도 만만치 않다.

튀르키예 내 환경보호단체들도 기후변화로 인한 부작용이 닥쳐온다고 결사반대하고 동부에 있는 고대 아르메니아 수도이던 아니를 비롯한 고대 아르메니아 유적지들이 가득한 터라 여기가 물에 잠기는 문제를 두고 조상의 역사를 수몰한다며 아르메니아도 결사반대하여 튀르키예측은 고민 중이라고 한다. 결국 이 댐 건설에 입찰하려던 유럽 여러 나라 건설사들은 스스로 입찰을 포기하고 물러났으며 미국이나 일본,한국 및 중국 건설사들도 이라크 및 아랍권과 아르메니아를 통한 유럽권 우려를 눈치보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기에 현재 댐건설은 무기한 보류 중이다.

사실 쿠르드인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한데, 쿠르드족 항목에도 나오지만 쿠르드들은 단 한번도 뭉쳐본 적이 없다. 애초에 쿠르드는 부족집단이고, 각 부족마다 사용하는 말도 크게 다른데다가 문화도 꽤 다르다. 단지 사는 곳이 같아서 '쿠르드'라고 묶인것일뿐 한번도 동족적 유대관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튀르키예에 살고 있는 쿠르드 부족 가운데 가장 큰 세 개 부족을 예로 들자면, 자자족(Zaza), 쿠르만즈(Kurmancı), 소라니(Sorani)가 있는데 이 안에서도 씨족별로, 종교별로 갈라진다. 때문에 분리독립파를 지지하는 쿠르드 부족들과 무장단체들은 튀르키예에 남기를 원하는 친튀르키예 쿠르드 부족들이랑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이를테면 1925년 반공화국, 반세속주의를 명분으로 일단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할 때도 튀르키예군뿐만 아니라 이웃한 적대적인 쿠르드 부족들이 나섰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 알려지지 않은 게 튀르키예에 다른 소수민족도 여럿 살고 있다. 흑해 지역에서 아르메니아계인 헴신 족(1만 6천명)과 조지아계인 라즈족(3만명)과 체르케스족(2만 5천명, 이상 통계는 2009년 이뤄진 것)이 살고 있다.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고 사는데 쿠르드족에 견주면 수가 워낙 적어서 튀르키예에서도 잘 모르는 경우도 많고 상당수가 튀르키예와 동화되어있다.

6.6. 북키프로스 문제

튀르키예 정치에서 꽤나 큰 이슈로 북키프로스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1974년 튀르키예군이 키프로스의 튀르키예계 주민들을 지원한 이래로 키프로스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튀르키예군이 북키프로스의 안보를 지원하기 위해 아직 4만명 가까이가 주둔하고 있다. 튀르키예측에서는 1960년 키프로스 독립 당시 튀르키예, 그리스, 영국이 협상한 '키프로스에 변란이 일어났을때 세 국가가 개입해 평화유지에 힘쓴다.'는 조약을 근거로 튀르키예군의 주둔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남키프로스에서는 불법침략이라고 본다.

7. 에르도안의 권력 강화

7.1. 대통령 직선제 도입

에르도안 정부는 1980년대까지의 쿠데타를 일으켰던 장군, 장교, 병사들을 모두 잡아서 튀르키예 군사재판과 대법원으로 넘겼고, 300명이 넘는 기소 대상자들은 모조리 무기징역이나 징역 20년형 등 중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튀르키예 군부의 세력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렇게 집권에 방해되는 군부를 완전히 숙청한 에르도안 정부는 점점 독재에 가까워져가고 있다. 정권을 장악한 에르도안과 정의개발당은 헌법을 수정해 대통령을 간선에서 직선으로 바꿨는데 이에 대해서 야당에서는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논리로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결국 개헌은 이루어졌고, 온갖 국내외적 반발에도 사상 첫 직선 선거제로 열린 2014년 8월 대선에서 에르도안이 승리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이긴 것과 같이 해외 거주자 투표에 대한 표 공개가 감춰졌다는 야당의 반발, 탁심 광장개발에 대한 절대반대가 여전한 가운데 튀르키예의 블라디미르 푸틴 술탄이라는 비이냥이 쏟아졌다.

어쨌든 2014년 8월 28일부터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되었다. 에르도안의 후임으로 에르도안의 충복인 아흐메트 다우토을루 전 외무장관이 총리가 되었다. 대통령이 된 에르도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새로 지어지는 총리 관저와 대통령 관저를 맞바꾼 것.. 에르도안 : 새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 이 때부터 현 대통령과의 권력 다툼에서 아흐메트 다우토을루 총리가 물러나 조기 총선이 임박하여 총리 자리가 결국 공석이 되는 등 의원내각제 국가라는 나라에서 총리가 대통령에 휘둘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7.2. 언론 탄압

언론에 대한 탄압이 심각한데 2023년 기준으로 튀르키예의 언론자유지수가 165위에 불과해 하위권에 속한다.[28] 특히 에르도안 대통령과 정의개발당이 집권하고 나서 언론에 대한 탄압이 그전보다 더 심해졌다. 에르도안 현 대통령이 총리, 대통령 임기를 합쳐 집권 10년째를 넘어가자 슬슬 언론을 검열, 통제하고 자신에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잡아가두는[29]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한다.[30]

2016년에는 외신기자들도 탄압받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 # 게다가 튀르키예의 언론상황은 악화되면서 수감언론인수의 1위가 튀르키예를 차지했다. # 그리고 튀르키예에서는 또 다시 언론이 35명이 무더기로 체포되는 일이 발생되었다. # 2017년에는 튀르키예의 경제위기를 보도한 블룸버그의 기자들을 정부가 고소했다. #

튀르키예는 2016년의 쿠데타 진압 이후, 귈렌과 관련된 도서를 수거해 불태워없애는 등 귈렌의 이름지우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

7.3. 인터넷 검열

인터넷 검열이 심한 편인데 2006년 국경 없는 기자회에 따르면 튀르키예도 인터넷 감시 국가로 선정되어있으며 예전에 유튜브에 케말을 게이로 묘사한 동영상이 올라왔다는 이유로 차단하다가 풀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Pornhub 사이트 접속은 원천봉쇄 되어있다. 2014년에는 트위터와 유튜브를 차단시켰다가, 이후 차단이 해제되었다. #

2017년에는 위키백과에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글을 삭제할것을 요구하다가 거부당하자 튀르키예 정부가 튀르키예어판을 포함한 위키백과의 모든 언어판들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관련 기사.

2016년부터 튀르키예는 언론,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는 상황에서 튀르키예의 유명한 경제학자가 에르도안을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가 체포되는 일이 발생되었다. #

2019년 6월에도 튀르키예 검찰이 튀르키예의 경제위기를 보도한 이스탄불의 미국 블룸버그 기자 2명과 소셜미디어에서 튀르키예 경제를 비판한 36명을 고소했다. #

2019년 10월 12일 튀르키예 정부는 온라인 검열을 하여 인터넷에서 시리아 쿠르드인에 대한 군사 작전을 비판한 글을 게시한 사람 121명을 체포했다. #

2020년 7월 29일 튀르키예 의회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 그리고나서 11월 4일에 튀르키예 정부가 자국내 상임 대표를 선임하지 않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페리스코프, 틱톡에 각각 100,000리라(약 13억 3,000만원) 상당의 벌금을 부과했다. #

7.4. 2017년 개헌

2017년초에 국회에서 열린 개헌안이 1차로 통과되고 2017년 1월 18일에 열리는 2차개헌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뀌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동시에 에르도안이 2029년까지 장기집권할 가능성도 높아지면서 반발도 일어나고 있다. # 그리고 2017년 2월 25일에 개헌국민투표를 앞두고 정의개발당과 민족주의행동당이 찬성선거운동을 시작했고 공화인민당은 20개의 주요도시에서 반대선거운동에 돌입했다. #

2016년 말에 튀르키예 정부는 2017년 여름에 대통령제로 개헌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방안을 밝혔고 공화인민당과 인민민주당은 이에 대해 반대했다. 개헌안은 대통령제로 정체를 변경함과 동시에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확장하는 것이고 그 대통령은 에르도안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2017년 1월 11일에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고 대통령제로 개헌하는 방안이 국회에서 논의되면서 야당 의원들과 여당의원들이 충돌했다. 결국 1월 21일에 튀르키예 국회는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는데 물론 야당과의 충돌이 있었다. 이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면 에르도안은 2029년까지 장기집권이 가능해진다.

개헌 투표가 시작되기 전인 2017년 3월 3일에 에르도안의 전기영화가 상영되자 선전영화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유럽과의 마찰도 심하다. 독일에서는 개헌집회가 불허되고 에르도안이 독일을 나치에 비유하는 발언을 하자 독일에서는 단교까지 거론할 정도로 사이가 험악해졌다. 네덜란드에서도 개헌 집회를 불허하고 튀르키예 외무장관의 전용기 착륙을 불허하자 네덜란드에 대해서도 나치, 파시스트의 잔재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tv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유럽을 향해 십자군 전쟁을 운운하는 등 막말을 했다.

결국 4월 말에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이 가결되어 가결되었고 2029년까지 더 집권할 수도 있게 되었다. # 2017년 4월 22일 KBS1에서 방송된 <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에서 이 개헌에 대해 방송을 했는데, 찬성 51.4% 반대 48.6%로 2.6%의 차이였다.

한편 관인이 없는 선거용지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투표감시단에서 지적하자 선거관리위원회는 유효한 표라고 합산했다. 투표를 참관했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서도 2,500,000표(약 5%)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튀르키예 선거관리 위원회는 무효화 심의요구를 반대 10, 찬성 1로 기각했다. 이 일 때문인지 현재 튀르키예 IP로는 위키피디아에 접속할 수 없었다가 나중에 풀렸다.

8. 관련 문서


[1] https://www.transparency.org/en/cpi/2021 [2] 수치가 높을수록 언론 자유가 있는 국가, 언론자유 최상은 100점, 언론자유 최악은 0점. https://en.wikipedia.org/wiki/Press_Freedom_Index [3] 2009년까지는 거의 65점이었으나(2008년 한정 66점) 2010~2012년에는 63점이었고 2013년에는 61점, 2014년에는 60점이었다. [4] PR 2점, CL 3점 [5] 전부 PR [6] PR 6점, CL 9점 [7] PR 2점, CL 4점 [8] 튀르키예 헌법 [9] 1987년에는 19.8%만이 사표가 되었다. [10] 바른길당(DYP) 9.54% 득표, 민족주의운동당 8.36%, 젊은당(GP) 7.25%, 인민민주당 6.22%, 조국당(ANAP) 5.13% 득표 [11] 봉쇄조항과 20,239표차 [12] 한국과 비교하면, 주민 직선으로 뽑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튀르키예의 도지사(İl başkanı)와 군수/구청장(ilça başkanı)에, 상급기관에서 임명하는 부단체장(행정 담당)은 왈리(Vali)와 카이마캄(kaymakam)에 대응한다고 불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기초자치단체의 부단체장은 광역자치단체에서 임명하지만, 튀르키예는 기초자치단체에 해당하는 카이마캄(kaymakam)도 모두 중앙정부에서 임명한다는 점. [13] 튀르키예는 2004년 사형을 폐지했다. 튀르키예에는 이전 군사독재시절에 사형을 남발했던 나쁜 기억과 더불어 EU 가입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폐지의 계기도 UN의 문제제기와 EU 국가들의 지적이 너무 많아 EU 가입에 걸림돌이 될까봐 불법화한 것. [14] 다만 튀르키예의 자살율은 세계 최저수준인데, 자살하면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무조건 지옥행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라 그렇다. [15] 그러나 바트만을 포함한 동부 지역에서 쿠르드계의 지지를 받는 정당인 HDP는 오히려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그래서 선거에서 가장 보수적인 결과가 나오는 지역은 사실 중부 내륙 지방 쪽. [16] 가톨릭과 정교회에 대해선 보통 호기심을 갖지 개신교처럼 대놓고 적대적으로 나오진 않는다. [17] 물론 여기도 튀르키예를 아랍화한다는 반대 세력들의 성화가 거세지자, 아타튀르크 뜻을 거론하면서 히잡 강요나 극보수적인 이슬람 정책은 추진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젊은 층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만 에르도안 장기 집권 체제가 갖춰지면서 점점 보수화되는 중이긴 하다. [18] 다만 정의개발당도 쿠르드족 이야기를 꺼낼 때에 한정해서 튀르크 민족주의를 내세우긴 한다. [19] 실제로 튀르키예 헌병들은 민간 치안일도 병행하고 있다. 관광유적지에 가면 순찰차를 세워놓고 돌아다니는 헌병들을 볼 수 있을것이다. [20] 물론 좋은 평만 있는 것은 아니고, 아드난 멘데레스는 튀르키예 역사상 가장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세속주의 튀르키예를 이슬람 원리주의로 회귀시키려 한 포퓰리스트 독재자였다는 평가도 많이 받고 있으며, 한땐 경제가 순항하기도 했으나 결국 경제위기로 실각하고 마는데 실제 그의 집권기에 튀르키예 경제는 파탄 직전까지 내몰렸다. [21] 공화인민당 케말 클르츠다르오울루 대표도 속내야 어떻든 "민주주의의 주인이 되자"라는 트윗으로 쿠데타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취소선이 그어져 있지만 전혀 빈말이라 볼 수 없는 게, 공화인민당은 뷜렌트 에제비트의 지휘하에 키프로스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인 1977년 선거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군부 쿠데타의 도움 없이 여당이 된 적이 없다. [22] Van. 튀르키예 동부 도시(쿠르드인들은 완으로 발음)로 1915년 4월 24일 여기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5천명이 넘는 오스만인을 학살했다. 이 사실에 열뻗친 쿠쉬드 에펜디(그도 그럴 것이 이 폭동과 학살 와중에 살해된 사람들 가운데 공무원으로 있었던 아우 무스타파와 그의 식구들이 거의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대장은 가는 길에 만나는 아르메니아인은 이슬람 빼곤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반지방 주지사인 제브데트(Cevdet)도 아르메니아인은 놔두면 위험하니 아주 씨를 말려야 한다는 분노섞인 연설을 했다. [23] 1919년 1월 아르메니아군이 카르스를 점령하면서 카르스에 살고 있던 오스만 및 소수 아르메니아 무슬림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하지만 1920년 9월 튀르키예 공화군이 카르스를 탈환했고 아르메니아 점령기 때 있었던 아르메니아군의 무슬림 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24] 하지만 그도 이 당시 벌어진 시리아 기독교인 학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25] 약 5만에서 8만 정도 추정. 아르메니아에선 100만이 넘는 아르메니아 학살보다 적다고 맞서지만 튀르키예에서 겨우 몇 만 죽은 거 가지고 왜 이래라는 논리라면 히틀러가 수백만 유태인 죽인것보단 적다고 입다물면 된다는 거네? 라고 비웃던 튀르키예 여론의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자세한건 아르메니아 대학살 참고. [26] 이때문에 튀르키예에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을 비난하면 이스라엘도 지지않고 튀르키예의 쿠르드인 탄압을 지적하면서 맞비난한다. 실제로도 이스라엘은 쿠르드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국가라서 쿠르드인들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다. [27]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은 이라크인보단 쿠르드족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따라서 이들을 이라크에 묶어두기 위하여 대통령직을 쿠르드족에게 양보하는 등 미국의 중재로 이라크 정부와 여러가지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이라크의 생명줄 유전의 상당수가 북부 쿠르드족 지역이라서... 반대로 튀르키예는 쿠르드 자치정부가 튀르키예 쿠르드족과 연합하는 걸 극도로 경계해서 유사시 무력행사도 공언하고 있다. 이때문에 튀르키예와 관계가 좋지않고 튀르키예의 무력행사를 반대하는 이라크 정부와 큰 마찰을 빚고 있다. [28]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의 러시아보다 순위가 낮다. 즉, 적어도 현 시점 튀르키예의 언론들은 대부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에르도안이 장기집권하는 모습을 보면 그나마 정권 교체 가능성이 러시아보다는 높을 뿐 여기도 러시아와 큰 차이는 없다. [29] 중화인민공화국(14억)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기자를 구속수감하는 것보다 튀르키예(7600만)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기자를 구속수감하는 수가 더 많다고 한다. 심지어 푸틴 치하의 러시아보다 인권 탄압 문제로 국제 사회에 탄원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30] 더 큰 문제는 튀르키예에는 대통령을 모욕하면 최대 징역 4년을 받을수 있는 대통령 모욕죄가 있어 이것이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는 악법으로 지적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