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3:31:24

민주당(튀르키예 1946년)

※ 아래 정보는 해산 당시를 기준으로 함.
파일:Demokrat_Parti_(1946)_logo.svg
Demokrat Parti
<colbgcolor=#FF2625><colcolor=#fff> 영문 명칭 Democrat Party
약칭 DP
한글 명칭 민주당
창당일 1946년 1월 7일
해산일 1960년 9월 29일
전신 공화인민당
이념 자유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우익포퓰리즘
스펙트럼 중도우파
당 색 빨강 (#FF2625)
창립자 젤랄 바야르
대표 아드난 멘데레스

1. 개요2. 역사
2.1. 창당2.2. 야당 시절 (1946~1950)2.3. 1950년 총선과 정권교체2.4. 집권 1기 (1950~1954)2.5. 집권 2~3기와 흑화 (1954~1960)2.6. 군부 쿠데타와 당 해산 (1960)2.7. 후일담
3. 이념4.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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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 1월 7일, 공화인민당 이스메트 이뇌뉘 대통령의 승인으로 다당제가 도입됨에 따라 젤랄 바야르 전 총리, 아드난 멘데레스 의원 등이 공화인민당 1당 독주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창당한 정당이다.

1950년 총선에서 승리해 처음 집권한 이후 3연속 압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하였으나, 1960년 제말 귀르셀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잃었고, 결국 군부에 의해 1960년 9월 29일 강제 해산되었다.

2. 역사

2.1. 창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튀르키예가 건국된 이후 1946년까지 공화인민당에 의한 일당제가 유지되었다. 물론 아타튀르크 임기 중에도 다당제 전환 시도가 2차례( 1924년, 1930년)이나 있었지만 관제야당 성격으로 창당했던 야당 세속주의 개혁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되자 아타튀르크도 다당제의 뜻을 접고 죽을때까지 오히려 공화인민당 주도의 일당독재를 강화시켜나갔다.

아타튀르크 사후 대통령이 된 이스메트 이뇌뉘 역시 일당제를 유지해나갔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서방 진영의 압력이 거세지자 1946년 다당제를 인정하고 오히려 야당 창당을 독려하는 상황이 됐다. 1945년 예산안 처리 국면에서 이미 이뇌뉘와 척을 진 젤랄 바야르 전 총리를 비롯해 아드난 멘데레스 등이 공화인민당을 탈당[1] 민주당을 창당하는 작업에 나섰고 1946년 1월 7일 튀르키예 역사상 세번째 합법 야당인 민주당이 출범했다.

2.2. 야당 시절 (1946~1950)

합법 야당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뇌뉘 대통령의 지지 아래 출범한만큼 표면적으로는 케말주의를 따른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공화인민당의 급진적인 세속주의 및 국가주도 경제발전 정책에 추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덕분에 처음에는 관제야당임을 의심하던 각각의 이유(반세속주의, 민주주의 지지 등)로 1당 독재에 반대하던 국민들의 민심을 끌어모았다.

그사이 여당 공화인민당에서는 기존의 오스만 선거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선거법을 통과시키면서 기존의 의회를 해산, 1946년 7월 21일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의 다당제 총선을 치렀다. 하지만 공개투표라는 악법이 남아있던 상황이라 대중의 기대와 달리 공화인민당이 465석 중 395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유지했고, 민주당은 64석을 획득하며 원내에 진입하는데 만족해야했다.

원내에 진입한 이후에는 공화인민당 행정부의 부패상과 경제 악화에 대해 장외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선명야당 노선을 명백히해 맹공을 퍼부었다. 결국 1947년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는 이뇌뉘 대통령이 직접 개입해서 상황을 겨우 해결할 정도가 되자 민주당의 인기는 더더욱 올라갔다.

1947년 6월, 이뇌뉘 대통령과 젤랄 바야르 민주당 대표와의 협상으로 이뇌뉘 대통령이 야당과 다당제를 보다 존중하고 야당에 강경하던 레제프 페케르 총리를 보다 유화적인 하산 사카 총리로 교체하는 대신 바야르가 이끄는 민주당 측에서 기존에 비해 좀 더 온화적으로 접근하기로 합의했다. 이 7월 12일 합의로 반정부 강경파는 민주당을 떠나 국민당을 창당해 나갔지만 민주당은 덕분에 강경파의 목소리로부터 해방되어 본격적으로 집권 역량을 쌓는 준비에 나설수 있었다.

결국 1949년 공화인민당으로부터 비밀 선거 및 공개개표 원칙 및 최고선거관리위원회 구성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고, 1950년 튀르키예 최초의 민주적 선거가 진행되었다.

2.3. 1950년 총선과 정권교체

선거를 앞두고 공화인민당에서는 반세속주의 심리를 누르기 위해 마드라사 교육을 받고 이슬람주의에 비교적 온정적인 솀세틴 귀날타이를 신임 총리로 교체하고, 그간 금기시했던 공교육 내 종교교육을 초등교육에 한해 일부 도입하는 등 아타튀르크 집권 이래 유지되어온 강경한 세속주의, 국가주의 입장을 변화시키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민주당에서는 이에 대항해 농촌 지역에 집중하면서도 종교 문제보다는 경제적 자유화를 주요 의제로 내세웠다. 민간자본 성장 및 외자 유치를 위한 안정적인 경제구조 제공, 세금 인하, 여러 사업에서의 국가독점 철폐 등을 안건으로 내세우면서 공화인민당의 27년 1당 독재를 마감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튀르키예 국민들은 선거를 앞두고 급격하게 입장을 바꾼 공화인민당의 정권을 연장시키기보다는, 이슬람 성향이 강한 농촌 지역 유권자들과 경제적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도시 지역 유권자들이 손잡고 정권을 교체하는 길을 택했고 민주당이 무려 55.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동부 아나톨리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앞서 487석 중 416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며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2.4. 집권 1기 (1950~1954)

1950년 5월 22일 새로 개회된 대국민의회에서 당수였던 젤랄 바야르를 이뇌뉘의 뒤를 잇는 신임 대통령으로, 아드난 멘데레스를 신임 총리로 선출하며 집권의 서막을 열었다. 유혈 없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1당 독재를 종식시켰기 때문에 튀르키예에서는 이 당시를 '백색 혁명'(피 흘리는 '적색 혁명'과 대비) 내지 '무혈 혁명'이라고 부른다.

집권 1기는 상당히 순조로웠는데 전후 미국과 유럽의 경제 회복 구도에 발맞춰 경제 자유화 조치를 시행하면서 공화인민당 정부 막판에 찾아온 경제 위기를 탈출했고, 이 시기 6.25 전쟁 파병 문제가 주요 의제로 떠오르자[2] 여야 합의로 파병을 결의했고, 이후에도 민주당이 공화인민당의 친서방 노선을 유지하자 1952년 튀르키예가 NATO에 가입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또한 이 대가로 이루어진 마셜 플랜 등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 및 농촌 개혁에 힘을 써 튀르키예 국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주력했다.

이런 노력으로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기록적인 풍작이 이어지면서 과거 대표적인 식량 수입국이었던 튀르키예가 세계적인 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이 시기 튀르키예는 농업의 성장을 바탕으로 연간 11~13%의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이슬람에 대한 유화 조치도 이때 이루어졌는데, 그동안 금지되어왔던 아랍어 기도를 다시 허용하고, 모스크를 새로 건립하는 것도 허락하며 동시에 라디오를 통한 종교 방송을 허용하는 등 공화인민당 주도의 종교 억제 조치를 대폭 완화했다.

2.5. 집권 2~3기와 흑화 (1954~1960)

집권 1기의 성과를 바탕으로 1954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2연속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연장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정점으로 민주당의 앞날에 점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멘데레스 총리가 심혈을 기울였던 농업 성과가 부진해졌고, 1기 시절의 빛나는 경제 성과가 이어지지 못하면서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이 다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률은 추락하고, 인플레이션은 악화되는 국면에서 공화인민당에서는 국가가 개입하여 공업 발전 등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멘데레스와 민주당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고 원조 자금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상황을 악화시켰고, 결국 사회 불안이 이어졌다.

문제는 민주당이 이런 실패를 인정하긴커녕 세속주의 성향 엘리트와 군부의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본격적으로 흑화했고 언론 통제를 시도하고 학술 활동을 억제하는 등 창당 시기의 정신을 완전히 잃은 행동을 보였다. 결국 이에 대한 반발 여론이 커지면서 1957년 총선에서는 민주당과 공화인민당 간의 득표율 격차가 7.2%p까지 축소되었고 공화인민당이 1950년 이후 처음으로 세자릿수 의석수를 확보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여전히 다수당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에 민주당 정권이 한번 더 연장되었지만, 반성은커녕 야당 공격과 언론 탄압에 공력을 기울였고 이런 권위주의 분위기 속에서 경제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 키프로스 분쟁, 튀르키예 항공 추락 사고 등의 사건 사고가 이어지면서 정권은 더욱 혼란 속으로 빠졌다. 이 와중에 1959년에는 공화인민당 당수인 이스메트 이뇌뉘 전 대통령이 민주당 지지자에게 공격당하는 등 야당과의 관계도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군부는 1960년, 선을 아득히 넘고 있었던 멘데레스 총리와 민주당 정부를 끝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6. 군부 쿠데타와 당 해산 (1960)

1959년에 있었던 이뇌뉘 공격 사건에 대해 제1야당 공화인민당에서 국회 차원에서의 조사를 요구했지만, 멘데레스 총리와 민주당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공화인민당이 군부와 접촉해 쿠데타를 시도하고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1960년 4월 27일 별도의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조사위원회는 민주당 의원들로만 구성되었고 평결권과 함께 공소권과 검찰권을 동시에 부여하는 초법적 권한을 가졌는데[3], 이뇌뉘는 이에 대해 반대 연설을 하면서 "이것은 민주정권의 길을 떠나 억압정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국회에서 추방당한다.

이에 반발해 1960년 5월 학생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거세게 일었고, 결국 제말 귀르셀 중장이 이끄는 세속주의 군부가 5월 27일, 쿠데타를 일으켜 앙카라 이스탄불의 관공서와 방송국을 장악하고 바야르 대통령, 멘데레스 총리 등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했다. 뒤이어 1960년 9월, 군부 주도 국민통합위원회에서 민주당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때 체포된 주요 인사들은 야시아다 섬에 수감되어 군사재판을 받았고, 처음에는 바야르 대통령을 비롯한 당내 주요 인사들이 모두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한 제말 귀르셀과 야당 당수 이뇌뉘의 요청으로 바야르를 비롯한 일부는 종신형으로 감면받았지만 의원내각제 체제 하에서 정부의 실권자였던 멘데레스 총리는 끝내 감형되지 않았고 1961년, 임랄르 섬에서 교수형을 집행당해 세상을 떠났다.

그외에도 14명이 추가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살아남은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종신정치활동 금지령이 내려졌다.

2.7. 후일담

귀르셀 대통령과 그가 이끈 군부가 멘데레스 총리와 민주당의 억압적인 행보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켜 그 주요 인물들을 사형시키고 당을 해산시키긴 했지만, 민주당의 풀뿌리 조직까지 모두 제거할 순 없었고 1961년 군부에서 군정을 끝내고 민주주의 제도를 복구하겠다고 선언하자 정의당과 신튀르키예당이 새롭게 등장해 구 민주당 지지층을 흡수하며 성장했다. 사실상 두 정당이 민주당의 후신인 셈.

정의당은 1961년 총선에서 34.78%를 득표하며 158석을 획득, 이뇌뉘의 공화인민당의 뒤를 잇는 원내 2당 자리에 올랐고 의외로 같은 민주당의 후신인 신튀르키예당이 아니라 공화인민당과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여러모로 빛과 어둠이 교차했지만 여튼 튀르키예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정당이기 때문에 이후에도 여러번 민주당의 이름을 딴 후신 정당이 등장했고 현재의 민주당은 2007년에 창당되었지만 스스로 1946년 민주당의 정신적 후예인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이념

당 역사상 보면 이슬람주의 정당이라는 착각을 할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세속주의 케말주의를 지지하는 정당으로, 당시 정당 강령 상에서 케말주의가 공식적으로 기재되어 있을 정도다. # 실제로 아타튀르크가 제정한 1924년 헌법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이슬람 국가화를 주장한 여러 의원들을 당에서 제명조치한 적도 있다.

다만, 아타튀르크와 공화인민당이 추진하던 급진적 세속주의에는 반대하고 이슬람에 온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여러 세속주의 조치를 완화한건 사실인데 이 덕분에 많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이후 튀르키예에서 세속주의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이슬람이 세를 키워 정치적 권력까지 도전하는 터줬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공화인민당과의 가장 큰 차이는 종교 정책보다는 오히려 경제 정책에 있는데, 국가 주도 계획경제 및 경·중공업 발전 쪽에 중점을 두던 공화인민당과 다르게 국영산업 민영화,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했다.

4. 역대 선거 결과

  • 굵은 색은 총리 역임자
연도 대표 의석수 순위 득표율 득표율 증감 비고 집권 여부
1946 젤랄 바야르 62석/503석 2위 비공개 - 창당 비집권
1950 415석/492석 1위 52.67% - 첫 집권 멘데레스 내각 다수 여당
1954 아드난 멘데레스 502석/541석 57.61% +4.94
1958 424석/610석 47.87% -9.74

[1] 정확히는 탈당이라기보단 1945년 9월 이미 공화인민당에서 제명당했다. [2] 이제는 대통령에서 야당 당수가 된 이뇌뉘와 멘데레스 총리간의 국회 문답이 지금도 회자되곤 한다. [3] 심지어 위원회의 평결은 법원을 통한 항소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놨다. 사실상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을 초법적으로 축출하려고 시도했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