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5:00:57

LA 폭동

로드니 킹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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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폭동
LA 暴動 | 1992 Los Angeles Riots (LA Riots)
<nopad> 파일:lariot.jpg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92년 4월 29일 ~ 5월 4일
발생 위치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유형 폭동
원인 로드니 킹 사건과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에 대한 흑인·히스패닉계 미국인들의 반발
인명피해 <colbgcolor=#bc002d> 사망 58명
부상 2,383명
체포 13,779명
재산 피해 약 10억 달러(1조 원)

1. 개요2. 전개3. 원인4. 영향5. 한인 사회와 LA 폭동
5.1. 한인 사회의 피해5.2.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갈등5.3. 한인 사회의 대응5.4. 당시 한국인 조직폭력배들의 행동5.5. 한인 사회의 변화
6. 기타7. 유사 사례8. 관련 문서9. 외부 링크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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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opad> <nopad>
폭동 당시 EBS[1] (현 EAS) 경보방송이다.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 비단 흑인뿐만 아니라 히스패닉계 미국인도 가세했으며 미국의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4.29 시민 봉기(4.29 Civil Uprising)라는 명칭도 유명하며 이 폭동의 기폭제였던 '로드니 킹'의 이름을 따 King Riot라고도 불린다.

2. 전개

폭동의 발단은 '로드니 킹 사건(Beating of Rodney King)'에서 시작되었다.

1991년 3월 3일 이른 저녁 미국 로스앤젤레스 210번 고속도로에서 로스앤젤레스 경찰국과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 등 경찰관들이 서쪽 방향으로 과속하던 차량 1대( 현대 엑셀 5도어 해치백)를 추격전 끝에 멈춰 세운 뒤 운전자를 현장에서 붙잡았다.

운전자인 흑인 남성 로드니 킹(1965~2012, 사건 당시 25세)은 음주 상태로 과속 주행을 하고 있었고 번쩍이는 경광등과 사이렌의 소리를 감지하고도 차량을 세우지 못했으며 에 취한 탓인지 차에서 내리라는 경찰의 명령에 더디게 응했고 경찰의 명령대로 땅에 엎드려 있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경관들에게 저항했으며 경찰의 체포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전히 조사되지 않은 중범죄 용의자인 킹은 경찰관을 향해 달려갔다. 킹은 도망칠 계획이었다. 이때부터 경관들이 톤파를 사용해 킹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킹은 체포에 저항했으며 경찰의 명령을 지속적으로 따르지 않고 몸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원은 경찰관들이 초기에 로드니 킹을 위험하다고 인식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킹은 당시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된 상태였는데 만약 자신이 과속으로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 영상 마리화나도 흡입한 상태였다. 신문

폭동으로부터 1년 후에 있었던 재판에서는 대부분의 구타는 적법하였고 로드니 킹의 저항을 제압하려는 시도에 있었으며 이는 경찰 정책에서 허용하는 수준의 무력 사용이었다고 판단했으며 마지막 6번의 폭행만 위법성이 인정되었다. 실제로 로드니 킹은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누워서 저항했다.

피투성이가 된 킹은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 장면을 인근 주민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했지만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장 데릴 게이츠 총경(Daryl Gates, 1926~2010)은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플만 하고 있었다. 결국 3월 15일에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기소되었고 7월 9일에는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문제가 잘 해결될 듯 싶었으나[2] 해가 넘어가 1992년 2월 5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법원이 배심원에서 흑인을 한 명도 배치하지 않고 12명의 배심원 중 10명이 백인인 배심원단이 몇 개월 동안 진행된 법정 심의 결과 4월 29일에 나온 판결은 경찰관 4명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 결정. 당시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이름은 스테이시 쿤, 로런스 파월, 티머시 윈드, 시어도어 브리세뇨, 롤란도 솔라노[3]다. 당시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계 미국인, 1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구성되었고 검사 테리 화이트는 흑인이었다. 취재 열기가 뜨거운 탓에 재판지를 옮겼는데 그 동네 사람들 대신 근처 다른 동네 구역, 그것도 백인 및 히스패닉 구역에서 배심원을 모집했다.

무죄 평결 소식은 TV 라디오로 즉각 발표됐다. 당시 LA 시장이었던 흑인 톰 브래들리는 믿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했다.

이런 판결에 분노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 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 갔고 곳곳에서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지나가는 차량을 세우고 운전자를 끌어내려 구타하는 등의 장면이 생중계로 보도되었다. #[4]

그리고 방화와 약탈이 TV로 방송되던 상황에서도 게이츠 총경은 정치자금 모집을 위한 집회에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워서 초동 진압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SWAT의 창설자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었던 게이츠 총경은 이 사건으로 직위해제되었고 1992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이후에도 경찰 관련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폭동은 점점 규모가 커졌고 흑인은 물론 히스패닉 갱단들까지 무장하고 합세하여 경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조지 H.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주방위군 육군 병력 6,000명과 다수의 험비, M35 트럭, 연방 육군 제7 보병 사단 2,000명 및 제40보병사단 미합중국 육군/군사경찰 중대, 제1해병사단 병력 1,500명, 제1경기갑 정찰 대대 LAV-25 장갑차 투입 명령을 내렸으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아예 제82공수사단 공수부대 대대를 18시간 안에 배치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뒀다. 연방군이 폭동 진압에 동원된 건 1968년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 처음 일어난 일이다.[5][6] 여하튼 총합 13,500명에 달하는 사단급 군대가 투입되면서 경찰과 함께 폭동을 진압하기 시작해 5월 4일에 폭동이 모두 종결되었다.

이 폭동으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58명, 부상자 2,383명, 체포된 사람은 13,779명이었다.

3. 원인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로드니 킹(성인 인증 필요)

어쨌거나 로드니 킹이 폭행하는 장면만 촬영되지 않은 저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었고 미국 흑인을 포함해서 인종을 불문하고 미국인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거기다 당시 LA의 게토에서는 금주법에 버금가는 실책인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한 여파로 극빈층 흑인이 늘어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터지자 격분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불만과 권리 요구를 폭동과 약탈, 방화로 표현했다. 물론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폭동으로 변질되었다.

이전에도 LAPD 즉 LA 경찰국은 흑인의 불신을 샀는데 당시 LA 경찰국장이었던 데릴 게이츠가 문제였다. 이 양반은 무자비한 진압으로도 유명했다. 마약사범 검거를 위해 장갑차에 충각을 달아 가정의 벽을 부수고 특수요원처럼 무장시킨 경찰을 투입시키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7] 이 무자비한 진압 방식으로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니 로드니 킹 사건의 경찰관이 무죄를 선고받자 감정이 폭발했다. 사건이 종결된 후 위에도 적혀 있지만 1992년 6월 28일에 LA 경찰국장 데릴 게이츠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후 원인 제공자인 경찰관 4명은 연방 민권법 위반 혐의로 모두 재기소되었는데 그 결과 2명에게는 징역 30개월 유죄가 선고되고 2명에겐 무죄가 선고되었다.

4. 영향

이 사건은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물론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의 제정 이후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이 철폐되었지만 이는 법적으로만 철폐된 것이었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인식은 당연히 바꾸지 못했다.[8]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차별을 표현하는 단어는 암묵적으로 터부화되었는데 이를 테면 인종을 색깔이 아니라 그 발상지로 지칭하는 풍조가 퍼졌다. ' 아프리카계 미국인' 같은 명칭이 대표적으로, 당시의 픽션 등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악당이 등장하여 '너희 검둥이, 아니 요즘은 소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부르던가?'라는 식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는 흑인을 말하는 '니그로'란 단어 자체도 차별적 요소가 없었으나 이 단어와 슬랭에 해당하는 ' 니거'란 단어가 비하적으로 쓰이자 흑인들이 이 단어로 지칭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유색인종(colored)"이란 단어로 바뀌었고 이 단어에도 거부감을 일으키자 결국 "블랙"으로 바뀌었다.[9] 따라서 현 시점에서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니거'를 쓰는 건 거의 정신나간 행위로 취급받고[10][11] 니그로나 유색인종이란 단어는 흑인들 본인도 쓰지 않지만 "블랙"이란 단어는 많이들 쓴다. 흑인들이 본인들을 지칭할 때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시피하고 거의 블랙이라고 하며 타인종이 지칭하는 경우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편이다. 정확히는 "난 블랙이지만 니들이 날 블랙이라고 부르면 차별하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약간 불안해" 정도 인식이다.

결국 199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12]

LAPD는 데릴 게이츠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싹 물갈이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많지 않던 비백인 경찰이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경찰수사에서 인권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었고 경찰들이 매우 몸을 사리게 되었으며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사용해 오던 강압수사 및 폭행과 협박이 줄어들었다.

여러 작품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 Grand Theft Auto: San Andreas>의 주요 무대인 로스 산토스의 모티브는 LA고 스토리도 흑인 갱스터 부패한 경찰관이 적대하는 이야기다.[13] 작중 시간 배경도 1992년이며 최후반부에 나오는 폭동까지 완전히 LA 폭동의 오마주다. 게임 내에서 로스 산토스 경찰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보면 경찰관들이 시민 한 명을 다굴치는 이스터 에그가 있는데 이는 로드니 킹 사건의 패러디인 듯하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1995년작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도 로드니 킹 사건과 이후 벌어진 폭동과 유사한 내용이 등장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 블랙팬서>에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안 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되는 배경이 1992년이며 흑인들이 무장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5. 한인 사회와 LA 폭동

5.1. 한인 사회의 피해

LA 폭동 당시 연방 법 집행 노력을 지휘했던 FBI 관계자에 따르면 약탈자들은 한인 상인들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코리아 타임스의 기사 'Cry Koreatown'[14] # #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지금도 LA의 대표적인 흑인 게토로 알려진 콤프턴[15]은 LA의 코리아타운과 LA의 위성도시인 토랜스(Torrance)의 한인타운 사이에 햄버거처럼 끼어 있다. 즉 이 동네에 거주하는 흑인들이 무슨 일이 있어서 자기 동네 밖으로 나오면 제일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게 한국계 미국인들이 사는 동네다.

당시 경찰의 대처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폭도들이 폭동 발생시점에서 폭도들과의 협상이나 제압을 포기한채, 당시 폭도들이 노리고 있었던 LA 시청, 주요 관공서타운이나 거기에 인접한 LA의 대표적 부촌 베벌리 힐스의 백인 부자들 거주구역을 틀어막고 대신 한인 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도 몰려가도록 만든 것이었다. 계기가 흑백갈등이라 백인이 1차적인 목표가 된다고 해도 시위가 폭동으로 변한 뒤에는 초기의 목적성이 대부분 사라지기 마련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흑인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한인들의 거주지가 흑인 거주지와 바로 접해 있어 주변으로 확산되면 피해가 생길 것임이 분명한 폭동에 대해 아예 차단하는 게 아니라 폭동 지역과 거리가 있어 대응할 시간이 충분한 특정구역을 보호하려는 식으로 대처했다. 즉, LA의 공권력이 폭동의 진압이나 협상이 아니라 주류 백인을 지키기 위해 노골적으로 한인 커뮤니티를 흑인 폭도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지는 이이제이 전략을 썼다는 것이다.

게다가 주방위군이 출동하고도 북쪽으로 가는 흑인들을 제때 차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피해는 심각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여 한미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직접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한인사회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집계된 한인사회의 피해는 약 4억 달러어치 손해[16], 점포 2,300여 곳 손실 등이다.[17] 피해를 당한 한인들의 대부분은 지방정부나 연방정부로부터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 한인 상점 중에서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있긴 했지만 극소수인 만큼 굉장히 드물었다.[18]

자경단 활동 덕인지 폭도들에게 살해당한 한인은 없었다. 유일한 한인 희생자는 청년단 소속이었던 19세의 이재성으로 한인 간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였는데 서로를 폭도로 착각해서 벌어졌고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기사 참고

5.2. 한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갈등

한인 사회가 LA 폭동에서 큰 피해를 입은 건 흑인들과 한인들의 갈등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인들이 평소에도 흑인에게 폭행, 살해를 당하거나 강도를 당하는 일이 잦아 흑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이 많았고 이로인해 또 역으로 흑인들이 반감을 가지는 등의 악순환이 있었으며 이는 LA에서 갱단과 범죄율이 높아지자 더 심해졌다. 결국 한인 업체들은 아예 흑인들을 고용하지 않는 수준까지 이어졌다. 흑인 래퍼들은 한인들에 대한 불만을 곡으로 써서 비난하기도 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래퍼 아이스 큐브의 < Black Korea>란 곡이다. # 이 곡을 디스한 'Call me a tiger'라는 곡이 있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타이거JK의 커리어가 시작됐다.

하지만 늘 그렇듯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고[19] 이와 다르게 실제로는 흑인 차별을 하지 않는 한인들과 한인들을 차별하지 않는 흑인들도 많았다. 미국은 한•흑 갈등을 정치적 요소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차별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도했으며 폭동이 터지자 미국 언론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을 폭동과 연관지어 집중 보도해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20]

이 사건은 아시아계, 특히 한국계 미국인 커뮤니티에서 흑인에 대한 거센 반감과 분노를 야기했고 한국계 이민자들과 흑인과의 갈등이 이후에도 불거지게 한 사건이다. 그리고 모든 일의 근원인 로드니 킹 본인이 강도질을 벌인 대상이 다름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건 이후에도 한인들 중에는 로드니 킹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다.

폭동 이후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이후 자성과 반성의 목소리가 나왔으며 이 일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고 흑인 사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이 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계 이주자들에 대해 사과했다. 흑인지도자 LA폭동 사과, LA 폭동 8년 만에 흑인사회 한인들에게 공식 사과

물론 지금도 한인과 흑인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이후 이어지는 한국계 이민자들의 흑인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일으키고 있다. LA 폭동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인 셈.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인 사회에서 흑인 사회와 대화와 교류를 하면서 이 일의 재발 방지를 위한 협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흑인 사회에서도 반성과 함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한인 사회와 교류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LA시 당국에서 이 사건으로 아주 처참하게 데였고 미국 내 비판자들로부터 가루가 되도록 까인 만큼 LA시 차원에서 한인 사회, 흑인 사회의 협력을 지원하며[21] 한인 사회에 대해서도 행정적 편의 등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 코리아타운 정중앙에 미국 최대 규모이자 최대의 자금으로 설립된 공립학교가 대표적인 사례다.

5.3. 한인 사회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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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rhymeswithhistory.files.wordpress.com/roofkoreans.jpg

당시 한인 가게 주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했으며 총기와 탄약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폭도들과 공성전을 벌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폭도들도 시가전을 굳이 감수할 이유가 없어서 저항이 거세 자신들이 되려 죽겠다 싶으면 금방 달아났다.

5.4. 당시 한국인 조직폭력배들의 행동

당시 한인타운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기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한인타운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삼고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을 갈취하던 한국인 조폭들은 폭동이 터지자 한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혼란을 틈타 흑인이나 히스패닉들이 들이닥치기 전 한인 상점의 물건을 털고 잽싸게 도망쳤다. 애초에 조폭 같은 사회 암적인 존재에게 정의로운 일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지만 보호한다고 해 놓고 보호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구실조차도 내던져 버린 셈이었다. 이는 당시 히스패닉 갱단과 중국계 삼합회가 어찌됐건 자신들의 물주들을 지키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때문에 당시 차이나타운과 히스패닉 주거지는 털리지 않았다.

사실 당시 한인타운에서 삥 뜯던 조폭들은 한국에서 기반을 잃거나 쫓겨온 이들이 대부분으로, 특히 범죄와의 전쟁을 계기로 늘어났다. 게다가 민족 정서상 같은 한국인이라도 범죄자들은 따돌림당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겉돎으로써 동질감이 적었다는 점도 원인이기도 했다.

하여간 이것 때문에 한인들은 조폭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경단을 구축해 대응했던 깡까지 더해져 사태 진정 이후 뻔뻔스레 다시 나와서 돈 내놓으라는 조폭들에게 보호한답시고 돈만 갈취하더니 막상 사건이 터지니깐 도망가던 놈들이 뭐하러 오냐, 한 번만 더 그러면 쏴죽이겠다며 분노하던 사례가 상당히 많이 나타나 오히려 조폭들이 힘도 못 쓰고 부리나케 쫒겨나는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한인 조폭들이 명분이 없어져서 이 사건 이후에는 코리아 타운에서 쪽을 못 쓰게 됐다는 게 이 폭동의 몇 안 되는 긍정적인 효과라 할 수 있겠다.

5.5. 한인 사회의 변화

이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2가지 변화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미국 국적(시민권)을 취득한 후 미국인으로서의 권리를 얻어 공동체의 규범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생활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주로 한인 공동체에서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 이민자들이었다. 심지어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에서 멈추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22] 당시까지만 해도 한인사회는 개개인의 성공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나 자신들의 권리 상승을 위한 집단적인 노력에는 관심이 적었고 이것 때문에 소수인종이지만 자신들의 권리 상승을 위해 집단적인 노력을 하던 흑인들에 비해 자신들의 권리를 더욱 주장하지 못하던 실정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한인 공동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인들을 포함한 아시아인 공동체 전반에서 나타나던 경향이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정착이 오래된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그래도 오랜 정착 기간으로 인해 나름의 권리를 주창할 기반이 있었지만 한인들은 그런 기반이 더욱 부족했다.

특히 이러한 한인 공동체의 특징은 흑인 공동체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수십 년간 흑인 공동체 집단이 민권운동을 통한 권리 상승 노력을 할 때마다 많은 백인들은 한인들을 이른바 사회에 잘 적응한 모범적 소수집단으로 치켜세워 주면서 흑인 공동체 집단의 민권운동을 폄하해 왔고 이 때문에 흑인 커뮤니티의 입장에서는 한인 커뮤니티의 의도와는 별개로 한인들의 폐쇄성과 정부 신뢰 경향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폭동 당시였던 1990년대 초에는 어느정도 경제가 발전한 신흥공업국 상태까지 올라왔던데다[23] 역사적, 지리적 영향으로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주의가 자리잡아 정부와 공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는 반면, 미국 사회의 흑인은 근본적으로 정반대다. 현시대 흑인 사회의 고통은 미국 정부와 주류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탄압, 핍박 속에 형성되어 흑인들은 다른 원인으로 그들끼리 뭉칠 수 밖에 없었으며, 미국인들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정부ㆍ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DNA에 각인된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특히나 같이 소수민족으로 차별받으면서도 정반대의 대응을 하는 한인 사회에 대한 흑인들의 불신은 날로 깊어갔고 한인들 역시 암묵적으로 백인들의 시선으로 흑인차별에 동조한 결과 한인 공동체의 소극적인 정치활동은 흑·백 양 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24]. LA 폭동으로 폭발한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얻어맞는 과정에서, 백인 주류가 정작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한인을 지켜준게 아니라 한인을 위험 상태로 내몬 것을 알게 된 후, 한인들은 미국사회의 냉혹함, 한인에 대한 백인 주류의 진짜 시선을 깨닫고 한인 커뮤니티의 독자적 존립을 위해 교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권리를 지켜 줄 정치가의 필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경제적인 자립에만 허덕였던 수많은 한인 교포세대를 지나, 상대적으로 교육을 잘 받은 한인 2세대들을 중심으로 미국 시민권 취득과 정치활동의 참여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한인들은 지역 정가에 많은 정치 기부금을 전달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 지역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를 기반으로 한인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증가하는 결과로까지 발전했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한인들이 교포들만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조차도 방아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인 사회는 주류 백인 사회와의 갈등만 아니면 관심 없이 생활했다. 물론 관심이 없었던 만큼 적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주류 백인 사회는 다른 소수인종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할 때마다 한인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했고 LA 폭동은 한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그동안 주류 백인 사회에 의해 방패막이로 이용되고 있었음을 터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인사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다른 소수인종 집단과의 인적 교류를 시작한다. 이는 한인 사회의 주류가 영어가 서툴고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는 데 바빠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기존의 1세대에서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라와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식 문화를 학습하고 다른 소수인종과 교류를 많이 한 2, 3세대로 바뀌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으며 이 시점 이후 들어온 새로운 한인 이민자들은 기존의 이민자들과 달리 전문직들이 많았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아 한인 공동체의 정치 참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 2020년에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25] 직후에는 많은 동양인 커뮤니티가 직접 Black Lives Matter와 같은 소수인종 문제와 관련된 사회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해 인종간 갈등을 완화시키는 한편[26] 일부 폭동으로 번져 혼란이 발생했을 때는 LA 총영사관과 한인회가 나서서 LA 한인타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주 방위군 투입이 결정되었음을 알림으로써 주 방위군은 윌셔 대로의 코리아타운 주요 길목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혼란을 방지했다.

6. 기타

  • 방송인 썬킴이 당시 현장에서 이 사건을 몸소 겪었으며 당시 유언장까지 써 뒀다고 한다.
  • 1993년 해당 경찰 4명은 연방민권법 위반 혐의로 다시 기소됐다. 배심원 제도를 이용하여 재판했는데 흑인 배심원을 한 명도 배치하지 않고 아시아계 1명과 히스패닉 1명을 빼면 죄다 백인 배심원들이 판단하게 하였다. 2명은 징역 30개월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2명은 무죄가 선고되었다. 유죄가 선고된 2명은 제압이 끝난 후 추가적으로 폭행한 것으로 보아 유죄로 판결한 것이다.
  • 2014년 8월 미국 미주리 주에서 또다른 흑인 소요사태인 퍼거슨 소요가 벌어졌고 또 한인 상가가 불타고 약탈당했다. 정치계 진출이건 인종교류건 결국 아무런 영향도 없이 다시금 흑인 동네 옆에 있다는 이유로 한인들이 또다시 피해를 입은 것이다. 미국/인종차별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결국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흑인들이 다시금 그들의 분노를 자기들보다 더 약한 소수인종들에게 표출한 것이다. 다만 통계적으로 보면 아시아인 대상 인종차별 범죄의 70% 가량은 백인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 기사 하지만 실질적으로 뉴스로 나오는 건 흑인의 아시아인 대상의 인종차별 범죄가 다수고 이러한 뉴스 전략들이 결과적으로 흑인과 아시아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 결과 흑인들에 대한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경찰들의 강경진압에 대한 정당성만 강화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흑인 사회에서도 이를 비판하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아이러니하게도 폭동 당시 공권력이 폭동과 약탈에 대처하지 못하는 추태를 보이고 한인들이 자체 무장하여 자신들을 지키는 모습으로 총기 소지에 대한 옹호론이 강화되었고 한인 등 백인과 흑인에 비해 소수인 아시아계와 동유럽, 아프리카 이민자의 총기소유 비율이 높아져 총기 규제 시 이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게 되었다.
  • 폭동의 소용돌이에서 무사했던 곳도 있었는데 당시 42세였던 홍정복이 운영하던 밴네스 마켓이 대표적이다. 평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들에게 무료로 생필품을 준다거나 기초생활수급자면서 알콜중독자인 남편이 정부에서 받은 생활비로 술을 사려고 하자 아내에게 전화를 함으로써 막거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좀도둑을 향해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면서 걱정해 주는 등의 선행으로 지역 사회에서는 MAMA라는 별명으로 유명했고[27] 폭동 당시 흑인 주민과 갱단이 자진해서 주변을 호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7년 후인 1999년 2월 3일 히스패닉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했고 흑인과 히스패닉 주민들이 교회 장례식에 대거 모여 눈물로 추모했다. #[28] 이후 흑인 갱단이 홍정복을 죽인 범인을 잡아서 죽여 버린다는 경고 쪽지까지 붙였고[29] 실제로 히스패닉 범인 중 한 명은 경찰에 잡혔으며 다른 한 명은 실종되었다고 한다.[30] 달리 말하면 흑인들에게 끝없는 선행을 베푼 한인조차도 히스패닉 무장 강도에게 살해당할 만큼 당시 LA 미국은 인종에 따른 범죄가 만연한 사회였다.
  • 코리아타운과 다저 스타디움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폭동 기간 동안 잡혔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홈 3연전 중 2경기[31]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홈 3연전 시리즈가 전부 연기되었다. 문제는 두 팀 연고의 거리는 거의 미국 동서 끝자락이라서 다음에 언제 올 수 있을지가 문제가 되는지라 다음에 잡힌 필리스와 엑스포스의 LA 원정 때 잔여일정을 어떻게든 전부 다 끝내야 했다. 그래서 두 팀이 다시 LA를 찾은 7월 2일부터 5일까지 필리스와는 4일 동안 5연전(7월 3일 더블헤더), 그 다음 엑스포스는 3일 연속 더블헤더라는 엽기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1992년의 다저스는 리그 최하위 팀이었기 때문에 지구 우승 경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점이 다행일 정도. 다저스의 1992년 스케줄
  • 폭동 이후 교민 사회를 돕기 위해서 미국 자체에서 200만 달러, 한국에서 400만 달러가 모금되었다. 미국에서 모금된 돈은 미국 안에서 모아진 것이라서 즉시 분배되었지만 한국에서 모금된 돈은 언론사, 교회, 시민단체 등이 중구난방으로 보내온 돈인 데다 외국에서 온 돈이라서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해 온 까닭에 LA총영사관에서 성금관리위원회를 조직해서 피해를 입은 교민들을 상대로 피해액을 조사해서 분배하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지만 총영사관에서 돈을 횡령하려고 한다는 괴소문이 돌더니 흥분한 교민들이 영사관을 포위하고 돈을 주지 않으면 총영사를 죽이겠다고 갖은 협박을 하면서 농성까지 했고 급기야 돈을 즉시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자살 협박 시위까지 하는 통에 총영사관에서 돈을 성금관리위원회에 이관했지만 이번엔 교민들이 성금관리위원회를 협박해서 돈을 모조리 빼앗았고 돈은 제대로 나눠준 것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피해자협의회는 피해자들에게 2천 달러씩 공평하게 나눠줬다고 주장했으나 나중에 돈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다시 총영사관에 와서 돈을 달라고 시위하는 등 제대로 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LA총영사를 지냈던 박종상은 짜증스러웠는지 "피해자들이 자초한 것"이라고 회고록에서 싸늘하게 촌평했다.
  • 대표적인 흑인 갱단이며 서로 라이벌인 블러즈 크립스가 시위 참가와 주민보호 목적으로 잠시 연합했다고 한다.
  • 직/간접적으로 LA 폭동을 언급하는 영화는 현재 두 편으로, 첫 번째로 < 다이 하드 3>에서 이 사건이 잠깐 언급된다. 존 맥클레인과 어거지로 파트너가 된 제우스 카버가 "자네 LA에서 무슨 일 있었나? 혹시 자네 유명인물이야? 설마 로드니 킹 사건은 아니겠지?"라고 묻자 존 맥클레인이 " 내가 이 사건의 범인의 동생을 옛날에 빌딩 32층에서 던져버린 일이 있었어."라고 대답한다. 두 번째는 영화 <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으로, 주인공인 N.W.A 및 그들의 음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언급되었으며 최초로 LA 폭동 씬을 직접 촬영하고 상영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또한 현재 LA 폭동 씬이 등장하는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
  • 한국에서는 MBC의 특집극 드라마 <억새바람>[32]에서 LA 폭동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 드라마가 나온 해는 1992년으로, LA 폭동이 발생한 바로 그 해다. <억새바람>은 한인 이민자 1.5세대를 다룬 최초의 한국 드라마[33]인 데다 LA 폭동이 한인 사회에 남긴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내용상으로 LA 폭동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관련 칼럼
  • 폭동을 키운 주범으로 지목되어 그간 몸담아 온 경찰계에서 완전히 쫓겨난 게이츠 총경은 이후 자신의 특기를 살려(?) 게임 회사에 들어가 게임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폴리스 퀘스트 시리즈 중 4편, SWAT 4 제작에 참여했다. 게이츠는 자서전에 경찰국장 자리에서 질려서 자의로 물러났다고 적었다. 2008년 키아누 리브스 주연 영화 <스트리트 킹>에서 경찰서장 역으로 잠깐 나왔으며 이로부터 2년 뒤인 2010년 4월 16일 만 83세로 병사했다.
  • 경찰에게 구타당해 폭동의 도화선이 된 킹은 사건 이후 LA시로부터 보상금을 받아 사업을 했으나 실패했고 레코드 회사에서 일하면서 여생을 보내다가[34] 2012년에 LA 근교인 리알토 시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35] #
  • 2017년 4월 28일, 연합뉴스에 한인 2세들이 말하는 LA 폭동의 기억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
  • 2022년 2월 한국계 미국인 배우 존 조가 LA 폭동을 주제로 한 청소년용 소설 '트러블메이커'를 출판했는데 주인공인 한국계 12살 중학생 조던 박의 시각에서 LA 폭동이 한인 사회에 미친 영향과 의미, 인종 갈등의 문제 등을 풀어냈다. #
  • 2022년 2월 3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LA 폭동에 대한 내용이 방영되었다. 당시 폭동의 피해를 입은 한인타운의 상인들 중 일부가 인터뷰에 참여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 2023년 2월 15일, MBC 일타강사에서 LA 폭동에 대한 내용이 방영되었다. 당시 폭동을 직접 취재했던 LA타임즈 강형원 기자가 나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폭동 발생 30주년인 2022년 4월 29일 한인·흑인 단체가 LA 코리아타운에서 화합의 행사를 개최했다. #
  • 기욤 뮈소의 소설인 종이 여자에서 메인 무대가 LA인 만큼 주인공들의 청소년 시절에 일어난 사건으로 자세히 나온다.

7. 유사 사례

  • 대공황 약탈 폭동 (1929~1932)
  • 뉴욕 할렘 폭동 (1935)
  • LA 폭동 (1965)
  • 와츠 폭동 (1965)
  • 뉴어크 폭동 (1967)
  • 디트로이트 폭동 (1967)
  • 마틴 루터 킹 암살 관련 폭동 (1968): 미국 흑인들에겐 영웅 중 영웅이나 다름 없는 마틴 루터 킹이 갑자기 암살당했으니 미국 흑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36]
  • 마이애미 폭동 (1980): 특히 해당 사건의 발단이 된 '아서 맥더피 폭행치사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과 진행양상이 대다수 비슷했다.
  • 신시내티 폭동 (2001)
  • 오클랜드 폭동 (2009)
  •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2020): 일부 지역에서 폭동도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보면 평화적인 시위가 대부분이었으며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인한 폭동들도 흑인들에 의한 인종 폭동이라고 할 수 없는데 백인들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도 약탈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위의 퍼거슨 소요와는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37]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0. 둘러보기

역대 미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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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8일 ~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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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일
34 컨셉션호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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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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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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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31일
217 100 이집트 항공 990편 추락 사고
1999년 5월 9일
23 뉴올리언스 버스 사고
1998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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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린 램프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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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햄릿 닭고기 가공 공장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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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애틀랜틱 사우스웨스트 항공 231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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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유나이티드 항공 585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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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지상충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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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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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0월 23일
23 필립스 정유 회사 폭발 사고
1989년 9월 21일
21 알톤 버스 추락사고
1989년 7월 19일
111 유나이티드 항공 232편 착륙 사고
1989년 4월 17일
47 아이오와급 전함 주포 폭발사고
1989년 2월 8일
144 인디팬던트 에어 1851편 추락 사고
1988년 12월 21일
270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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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캐롤튼 버스 충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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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퍼시픽 사우스웨스트 항공 177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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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컨티넨탈 항공 1713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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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노스웨스트 항공 255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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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람비안스 플라자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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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듀폰트 플라자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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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30일
21 캘리포니아 워커 버스 사고
1985년 12월 12일
256 애로우 항공 1285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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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984년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1984년 7월 18일
21 샌 이시드로 맥도날드 총기난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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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에어캐나다 797편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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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1983년 베이루트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1983년 2월 10일
31 SS Marine Electric 침몰 사고
1982년 9월 11일
46 만하임 미 육군 CH-47c 추락 사고
1982년 9월 4일
25 Dorothy Mae Apartment-Hotel 방화 사건
1982년 7월 9일
153 팬 아메리칸 항공 759편 추락 사고
1982년 1월 13일
78 에어 플로리다 90편 추락 사고
1981년 7월 17일
114 하얏트 리젠시 호텔 고가 통로 붕괴 사고
1981년 1월 9일
29 뉴저지 요양병원 화재 사고
1980년 12월 4일
26 스토퍼스 인 호텔 화재
1980년 11월 21일
85 MGM 그랜드 호텔 화재
1980년 9월 12일
34 Florida Commuter Airlines 65편 추락 사고
1980년 7월 27일
23 브래들리 인 요양원 화재
1980년 6월 5일
20 아칸소 재스퍼 버스 사고
1980년 5월 9일
35 선샤인 스카이웨이 대교 붕괴사고
1980년 3월 14일
87 28 LOT 007편 추락사고
1980년 1월 28일
23 USCGC 블랙손 침몰 사고
[ 197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9년 11월 28일
257 22 에어 뉴질랜드 901편 추락 사고
1979년 10월 31일
73 웨스턴 항공 2605편 착륙 사고
1979년 5월 25일
273 아메리칸 항공 191편 추락 사고
1979년 4월 3일
25 스르라우한 웨이사이드 요양원 화재
1978년 11월 18일
918 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
1978년 9월 25일
144 샌디에이고 상공 공중충돌 사고
1978년 4월 27일
51 윌로우 아일랜드 참사
1978년 1월 28일
20 코트스 하우스 호텔 화재 사고
1977년 12월 13일
29 Air Indiana 216편 추락 사고
1977년 11월 6일
39 켈리 반스 댐 붕괴사고
1977년 7월 19일
40 로럴 런 댐 붕괴 사고
1977년 6월 26일
42 모리 카운티 교도소 화재 사고
1977년 5월 28일
165 비버리 힐즈 서퍼 클럽 화재
1977년 3월 27일
583 테네리페 참사
1976년 10월 24일
25 푸에르토리코인 사교 클럽 화재
1976년 10월 20일
78 MV 조지 프린스호 침몰 사고
1976년 6월 4일
46 에어 마닐라 항공 702편 추락 사고
1976년 5월 21일
29 유바 시티 버스 추락사고
1976년 4월 27일
37 아메리칸 항공 625편 추락 사고
1976년 3월 9일, 3월 11일
26 스코샤 탄광 폭발 사고
1976년 1월 30일
23 윈크레스트 요양병원 화재 사고
1976년 1월 10일
20 패스파인더 호텔 폭발 사고
1975년 11월 10일
29 에드먼드 피츠제럴드호 침몰 사고
1975년 6월 24일
113 이스턴 항공 66편 추락 사고
1974년 12월 1일
92 트랜스 월드 항공 514편 추락 사고
1974년 9월 11일
72 이스턴 항공 212편 추락 사고
1974년 9월 8일
88 트랜스 월드 항공 841편 폭파 사건
1974년 6월 30일
24 걸리버즈 나이트클럽 방화 사건
1974년 4월 22일
107 팬 아메리칸 항공 812편 추락 사고
1974년 4월 4일
72 서던 에어웨이즈 242편 추락 사고
1974년 3월 3일
346 25 터키항공 981편 추락 사고
1973년 12월 17일
34 1973년 로마 공항 습격·납치 사건
1973년 8월 28일
24 휴에바 미 공군 C-141 추락 사고
1973년 7월 31일
88 델타 항공 723편 추락 사고
1973년 7월 23일
38 오자 에어 809편 추락 사고
1973년 7월 22일
78 팬 아메리칸 항공 816편 추락 사고
1973년 6월 24일
32 업스테어 라운지 방화 사건
1973년 3월 22일
32 MV Norse Variant 침몰 사고
1973년 2월 10일
40 스태튼 아일랜드 가스 폭발 사고
1972년 12월 29일
101 이스턴 항공 401편 추락사고
1972년 12월 8일
45 유나이티드 항공 553편 추락사고
1972년 10월 30일
45 1972년 시카고 열차 추돌사고
1972년 9월 24일
22 새크라멘토 캐나디어 세이버 추락 사고
1972년 6월 9일
238 Canyon Lake 댐 붕괴 사고
1972년 5월 2일
91 선샤인 광산 화재
1972년 2월 26일
125 버팔로 댐 붕괴 사고
1971년 9월 14일
111 알래스카 항공 1866편 추락 사고
1971년 9월 9일 ~ 9월 13일
43 애티카 교도소 폭동
1971년 8월 18일
37 페그니츠 미 육군 CH-47 추락 사고
1971년 6월 7일
28 Allegheny Airlines 485편 추락 사고
1971년 6월 6일
50 휴즈 에어웨스트 706편 공중충돌 사고
1971년 2월 3일
29 티오콜 화학공장 폭발 사고
1970년 12월 30일
39 Hurricane Creek 탄광 폭발 사고
1970년 12월 20일
29 파이어니어 호텔 화재
1970년 11월 27일
79 미 공군 C-123K기 추락 사고
1970년 10월 2일
31 위치타 주립대학교 미식축구팀 비행기 추락사고
1970년 11월 14일
75 서던 에어웨이즈 932편 추락 사고
1970년 5월 2일
23 ALM 항공 980편 사고
1970년 3월 20일
20 오자크 호텔 화재 사고
1970년 1월 10일
21 하머 하우스 요양원 화재
}}}
[ 196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9일
83 앨러게네이 항공 853편 공중충돌 사고
1969년 6월 3일
74 USS Frank E. Evans 충돌 사고
1969년 2월 18일
35 허손 네바다 항공 708편 추락 사고
1969년 1월 18일
38 유나이티드 항공 266편 추락 사고
1969년 1월 14일
28 USS 엔터프라이즈 화재 사고
1968년 12월 27일
28 노스 센트럴 항공 458편 추락 사고
1968년 12월 24일
20 앨러게네이 항공 736편 추락 사고
1968년 12월 12일
51 팬 아메리칸 항공 217편 추락 사고
1968년 12월 2일
39 Wien Consolidated 항공 55편 추락 사고
1968년 11월 20일
78 파밍턴 광산 참사
1968년 10월 25일
32 노스이스트 항공 946편 추락 사고
1968년 8월 14일
21 로스엔젤레스 항공 417편 추락 사고
1968년 5월 27일
99 USS 스콜피언 침몰 사고
1968년 5월 22일
23 로스엔젤레스 항공 841편 추락 사고
1968년 5월 3일
85 브래니프 항공 352편 추락 사고
1968년 4월 6일
41 리치몬드 가스 폭발사고
1967년 12월 15일
46 실버 브리지 붕괴사고
1967년 11월 20일
70 트랜스 월드 항공 128편 추락 사고
1967년 7월 29일
134 USS 포레스탈 화재 사건
1967년 7월 19일
82 피드몬트 항공 22편 공중충돌 사고
1967년 6월 23일
34 Mohawk 항공 40편 추락 사고
1967년 6월 8일
34 USS Liberty 피격 사건
1967년 3월 9일
26 트랜스 월드 항공 553편 공중충돌 사고
1967년 3월 5일
38 레이크 센트럴 항공 527편 추락 사고
1967년 2월 7일
25 데일즈 펜트하우스 레스토랑 화재 사고
1967년 1월 16일
37 플로리다 교도소 화재
1966년 10월 26일
44 USS 오리스카니 화재 사건
1966년 8월 6일
42 브래니프 항공 250편 추락 사고
1966년 6월 16일, 6월 28일
37 MV 알바 케이프호 충돌 및 화재 사고
1966년 4월 22일
83 American Flyers 항공 280/D 추락 사고
1965년 11월 11일
43 유나이티드 항공 227편 추락 사고
1965년 11월 8일
58 아메리칸 항공 383편 추락 사고
1965년 8월 24일
59 미 해병대 KC-130F 추락 사고
1965년 8월 16일
30 유나이티드 항공 389편 추락 사고
1965년 8월 9일
53 시어시 미사일 기지 화재 사고
1965년 2월 8일
84 이스턴 항공 663편 추락 사고
1965년 1월 16일
30 위치타 미 공군 KC-135기 추락 사고
1964년 12월 18일
20 맥그로우 요양원 화재
1964년 11월 23일
50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이륙 사고
1964년 11월 15일
29 본자나 항공 114편 추락 사고
1964년 7월 9일
39 유나이티드 항공 823편 추락 사고
1964년 5월 11일
79 마닐라 미 공군 C-135B기 추락 사고
1964년 5월 7일
44 퍼시픽 항공 773편 추락 사고
1964년 3월 1일
85 파라다이스 항공 901A편 추락 사고
1964년 2월 25일
58 이스턴 항공 304편 추락 사고
1963년 12월 29일
22 루즈벨트 호텔 화재 사고
1963년 12월 8일
81 팬 아메리칸 항공 214편 추락 사고
1963년 11월 23일
63 골든 에이지 양로원 화재
#!wiki style= "margin:0px -10px;"
1963년 11월 19일
26 아틀란틱 시티 요양원 화재
1963년 11월 18일
25 서프사이드 호텔 화재 사고
1963년 10월 31일
81 인디애나 주립 박람회 회관 가스 폭발 사고
1963년 9월 17일
32 추알라 버스 충돌사고
1963년 6월 3일
101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293편 추락 사고
1963년 5월 18일
27 사우스 캐롤라이나 버스 추락 사고
1963년 4월 10일
129 USS 스레셔 침몰 사고
1963년 2월 12일
43 노스웨스트 항공 705편 추락 사고
1962년 11월 30일
25 이스턴 항공 512편 추락 사고
1962년 10월 3일
23 뉴욕 텔레폰 컴퍼니 빌딩 폭발 사고
1962년 7월 22일
27 Canadian Pacific 항공 301편 추락 사고
1962년 6월 3일
130 121 에어 프랑스 007편 추락사고
1962년 5월 22일
45 컨티넨탈 항공 11편 폭파 사건
1962년 3월 16일
107 플라잉 타이거 라인 739편 실종 사건
1962년 3월 1일
95 아메리칸 항공 1편 추락 사고
1961년 12월 14일
20 콜로라도 에반스 스쿨버스 충돌 사고
1961년 11월 8일
77 임페리얼 항공 201/8편 추락 사고
1961년 9월 17일
37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706편 추락 사고
1961년 9월 1일
78 트랜스 월드 항공 529편 추락 사고
1961년 6월 15일
73 34 사베나 548편 사고
1961년 1월 15일
28 텍사스 레이더 기지 붕괴 사고
1961년 1월 6일
20 토마스 호텔 화재
1960년 12월 17일
52 뮌헨 미 공군 C-131 추락 사고
1960년 12월 16일
134 뉴욕 공중충돌 사고
1960년 10월 29일
22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교 미식축구팀 비행기 추락 사고
1960년 10월 4일
62 이스턴 항공 375편 추락 사고
1960년 9월 19일
80 World Airways 830편 충돌 사고
1960년 3월 17일
63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710편 추락 사고
1960년 2월 25일
61 리우데자네이루 미 해군수송기 공중충돌 사고
1960년 1월 18일
50 캐피털 항공 20편 추락 사고
[ 195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59년 12월 1일
25 Allegheny 항공 371편 추락 사고
1959년 11월 16일
42 내셔널 항공 967편 실종 사고
1959년 10월 30일
26 피드몬트 항공 349편 추락 사고
1959년 9월 29일
34 브래니프 항공 542편 공중분해 사고
1959년 6월 28일
23 조지아 유조열차 탈선 사고
1959년 5월 12일
31 캐피털 항공 75편 추락 사고
1959년 3월 5일
21 아칸소 흑인학교 화재 사고
1959년 2월 3일
65 아메리칸 항공 320편 추락 사고
1958년 12월 1일
97 천사들의 모후 학교 화재
1958년 11월 18일
33 SS Carl D. Bradley 침몰 사고
1958년 9월 15일
48 뉴어크 만 열차 탈선 사고
1958년 8월 15일
25 노스이스트 항공 258편 추락 사고
1958년 4월 21일
49 유나이티드 항공 736편 공중충돌 사고
1958년 4월 6일
47 캐피털 항공 67편 추락 사고
1958년 3월 19일
24 뉴욕 속옷공장 화재 사고
1958년 3월 7일
26 오키나와 미 해병대 C-119C 추락 사고
1958년 2월 28일
27 켄터키 버스 추락 사고
1957년 11월 8일
44 팬 아메리칸 항공 7편 추락 사고
1957년 2월 17일
72 워렌턴 요양병원 화재 사고
1957년 3월 22일
67 미 공군 C-97기 실종 사건
1957년 2월 1일
20 노스이스트 항공 823편 추락 사고
1956년 10월 10일
59 미 해군 R6D-1기 실종 사고
1956년 9월 5일
20 로빈슨 열차 충돌 사고
1956년 6월 30일
127 그랜드 캐니언 공중충돌 사고
1956년 4월 1일
22 트랜스 월드 항공 400편 추락 사고
1956년 1월 22일
30 로스엔젤레스 열차 탈선 사고
1955년 11월 1일
44 유나이티드 항공 629편 폭파 사건
1955년 10월 6일
66 유나이티드 항공 409편 추락 사고
1955년 8월 11일
66 알텐슈타이그 미 공군기 공중충돌 사고
1955년 8월 4일
30 아메리칸 항공 476편 추락 사고
1955년 2월 12일
29 바턴 호텔 화재 사고
1955년 3월 22일
66 하와이 R6D-1기 추락 사고
1954년 5월 26일
103 USS Bennington 폭발 사고
1954년 2월 1일
35 홋카이도 미 해병대 C-46D 추락 사고
1953년 9월 16일
28 아메리칸 항공 723편 추락 사고
1953년 7월 17일
43 USMC R4Q NROTC 추락 사고
1953년 6월 18일
129 타치카와 미 공군 수송기 추락 사고
1953년 4월 17일
35 시카고 하버 공업 빌딩 화재
1953년 3월 27일
21 오하이오 열차 추돌 사고
1953년 3월 27일
33 라르고 요양원 화재
1953년 2월 14일
46 내셔널 항공 470편 추락 사고
1952년 12월 20일
87 워싱턴 C-124기 추락 사고
1952년 11월 22일
52 알래스카 C-124기 추락 사고
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2년 8월 4일
29 웨이코 버스 정면 충돌사고
1952년 4월 29일
50 팬 아메리칸 항공 202편 추락 사고
1952년 4월 26일
176 USS Hobson 침몰 사고
1952년 4월 11일
52 팬 아메리칸 항공 526A편 추락 사고
1952년 2월 11일
33 내셔널 항공 101편 추락 사고
1952년 1월 22일
23 아메리칸 항공 6780편 추락 사고
1951년 12월 29일
26 컨티넨탈 차터스 항공 44-2편 추락 사고
1951년 12월 21일
119 오리엔트 탄광 폭발 사고
1951년 12월 16일
58 마이애미 항공 C-46기 추락 사고
1951년 9월 1일
45 펠리컨호 침몰 사고
1951년 8월 24일
50 유나이티드 항공 615편 추락 사고
1951년 6월 30일
50 유나이티드 항공 610편 추락 사고
1951년 4월 25일
43 Cubana de Aviacion 항공 493편 공중충돌 사고
1951년 3월 23일
53 미 공군수송기 실종 사건
1951년 2월 6일
85 우드브리지 열차 탈선 사고
1950년 11월 22일
78 큐 가든스역 열차 충돌사고
1950년 9월 26일
23 아시야 미 해병대 C-54D 추락 사고
1950년 8월 31일
55 트랜스 월드 항공 903편 추락 사고
1950년 8월 25일
23 USS Benevlonce 침몰 사고
1950년 7월 26일
25 오시마 인근 미 공군 C-47D 추락 사고
1950년 6월 30일
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1950년 6월 23일
58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2501편 실종 사고
1950년 5월 25일
34 1950년 시카고 노면전차 충돌사고
1950년 4월 21일
35 카타가와현 미군 C-54기 추락 사고
1950년 2월 17일
32 뉴욕 열차 충돌 사고
1950년 1월 26일
32 미 공군 C-54D기 실종 사건
1950년 1월 7일
41 대번포트 요양원 화재
[ 194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49년 11월 29일
28 아메리칸 항공 157편 추락 사고
1949년 11월 1일
55 알렉산드리아 상공 공중 충돌 사고
1949년 7월 12일
35 스탠다드 에어 항공 897R편 추락 사고
1949년 6월 7일
53 스트라토 프레이트 커티스 C-46A 추락 사고
1949년 4월 4일
74 성 안토니오 병원 화재
1948년 12월 28일
32 에어본 운송 DC-3 실종 사고
1948년 10월 27일 ~ 10월 31일
26 도노라 스모그 사건
1948년 8월 29일
37 노스웨스트 항공 421편 추락 사고
1948년 6월 17일
43 유나이티드 항공 624편 추락 사고
1948년 3월 12일
30 노스웨스트 항공 4422편 추락 사고
1948년 1월 28일
32 로스 가토스 DC-3 추락 사고
1947년 11월 28일
20 알프스 미 공군 C-47B 추락 사고
1947년 10월 23일
52 유나이티드 항공 608편 추락 사고
1947년 7월 24일
27 올드 밴 8번 탄광 폭발 사고
1947년 6월 13일
50 펜실베니아 센트럴 항공 410편 추락 사고
1947년 5월 30일
53 이스턴 항공 605편 추락 사고
1947년 5월 29일
43 유나이티드 항공 521편 추락 사고
1947년 4월 16일
581 텍사스 시티 폭발 사고
1947년 3월 25일
111 센트레일리아 탄광 참사
1946년 12월 7일
119 와인코프 호텔 화재사고
1946년 7월 19일
25 마운트 톰 B-17 추락 사고
1946년 6월 5일
61 라 살레 호텔 화재
1946년 4월 25일
45 네퍼빌 철도 참사
1945년 12월 24일
21 나일가 요양병원 화재
1945년 11월 1일
26 가게나우 미 육군 C-47 추락 사고
1945년 8월 9일
34 노스 다코다 미시간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9일
372 USS 마운트 후드 폭발 사고
1944년 12월 31일
50 배글리 열차 추돌 사고
1944년 10월 20일
131 클리블랜드 가스 폭발 사고
1944년 8월 23일
61 프레클톤 항공 참사
1944년 8월 4일
47 스톡턴 열차 충돌 사고
1944년 7월 17일
320 시카고 항구 참사
1944년 7월 6일
167 하트퍼드 서커스 화재
1944년 5월 21일
163 웨스트 로치 참사
1944년 2월 10일
24 아메리칸 항공 2편 추락 사고
1944년 1월 6일
115 USS 세인트 어거스틴 침몰 사고
1944년 1월 3일
138 USS 터너 침몰 사고
1943년 12월 18일
34 USS 로그데이 침몰 사고
1943년 12월 16일
74 레너트 열차 충돌 사고
1943년 9월 7일
55 걸프 호텔 화재
1943년 9월 6일
79 프랭크 포드 정션 열차 탈선 사고
1943년 8월 30일
29 라카와나 열차 추돌 사고
1943년 7월 28일
20 아메리칸 항공 63편 사고
1943년 6월 12일
42 USS R-12 침몰 사고
1943년 2월 27일
75 스미스 탄광 폭발 사고
1943년 1월 31일
32 레이크 포레스트 요양원 화재
1942년 11월 28일
492 코코넛 그로브 나이트클럽 화재
1942년 6월 5일
46 졸리엣 탄약 창고 폭발 사고
#!wikibstyle="margin: 0px -10px;"
1942년 2월 18일
203 USS 폴룩스, USS 스럭스톤 침몰 사고
1942년 1월 24일
48 USS S-26 침몰 사고
1941년 6월 19일
33 USS O-9 침몰 사고
1940년 9월 12일
52 허큘리스 화약 공장 폭발 사고
1940년 8월 31일
25 로베츠빌 DC-3 추락 사고
1940년 7월 31일
43 두들버그 참사
1940년 7월 15일
63 손만 탄광 폭발 사고
1940년 4월 23일
209 리듬 클럽 화재
1940년 4월 19일
31 리틀 폴스 열차 탈선 사고

[ 193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39년 10월 12일
24 샌프란시스코 열차 탈선 사고
1939년 5월 12일
26 USS 세일피쉬 침몰 사고
1938년 6월 19일
23 조던 고등학교 버스 건널목 사고
1938년 6월 19일
47 커스터 강 열차 탈선 사고
1938년 6월 19일
45 레드 자켓 광산 폭발 사고
1938년 5월 16일
34 터미널 호텔 화재
1937년 5월 6일
36 힌덴부르크 참사
1937년 3월 18일
295+ 뉴 런던 학교 폭발 사고
1936년 1월 12일
34 SS 아이오와호 침몰 사고
1934년 12월 11일
34 켄 호텔 화재
1934년 9월 8일
137 모로 캐슬호 화재
1934년 7월 22일
21 뉴욕 오싱 버스 사고
1934년 3월 24일
22 린치버그 빌딩 화재
1933년 4월 3일
73 USS 아크론 추락사고
1933년 10월 3일 ~ 10월 4일
29 그리피스 공원 화재
1932년 9월 9일
72 옵저베이션호 폭발사고
1932년 12월 24일
54 모웨아쿠아 탄광 폭발사고
1931년 7월 25일
31 리틀 시스터즈 보육원 화재
1930년 11월 5일
82 밀필드 탄광 참사
1930년 4월 21일
322 오하이오 교도소 화재
[ 192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29년 10월 22일
52 SS 밀워키 침몰 사고
1929년 9월 9일
25 SS 안다스테 침몰 사고
1929년 8월 29일
77 SS 산 후안 침몰 사고
1929년 4월 21일
123 클리블랜드 클리닉 화재
1928년 11월 10일
111 SS 베스트리스 침몰 사고
1928년 11월 8일
20 프레블 박스 토 회사 폭발사고
1929년 8월 20일
22 스터디 클럽 화재
1928년 5월 19일
195 매터 광산 참사
1928년 4월 13일
38 웨스트 플레인스 댄스홀 폭발 사고
1928년 3월 12일
431+ 세인트 프란시스 댐 붕괴 사고
1927년 12월 17일
40 USS S-4 침몰 사고
1927년 11월 14일
28 피츠버그 가스 폭발사고
1927년 5월 18일
45 배스 학교 폭파 사건
1927년 11월 14일
26 SS 파푸스 침몰 사고
1926년 11월 4일
51 반스 헤커 철광 참사
1925년 7월 4일
33 USS S-51 침몰 사고
1925년 7월 4일
44 픽 윅 클럽 붕괴 사고
1925년 6월 16일
47 록포트 열차 탈선사고
1925년 5월 27일
53 글렌 광산 참사
1925년 5월 17일
77 클리블랜드 학교 화재
1924년 12월 24일
36 밥스 학교 화재
1924년 9월 21일
26 SS 클리프톤 침몰 사고
1924년 6월 12일
48 USS 미시시피 주포 폭발 사고
1924년 5월 31일
24 호프 학교 화재
1924년 4월 28일
119 벤우드 광산 참사
1924년 3월 8일
172 캐슬 게이트 광산 참사
1924년 3월 8일
20 닉슨 니트로 공장 폭발사고
1924년 2월 5일
41 밀포드 광산 폭발 사고
1923년 9월 27일
30 겐록 열차 탈선 사고
1923년 9월 8일
23 혼다 포인트 참사
1923년 2월 8일
123 도슨 광산 폭발 사고
1923년 1월 3일
35 앨렌 대교 붕괴 사고
1922년 8월 27일
47 아르고넛 광산 폭발사고
1922년 2월 21일
34 로마 비행선 추락사고
1922년 2월 21일
29 슈피리어 시티 침몰 사고
1922년 1월 28일
98 니커보커 극장 붕괴사고
1920년 9월 16일
40 월스트리트 폭탄 테러
[ 191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19년 12월 20일
23 오나와 열차 탈선 사고
1919년 12월 18일
35 J.A 챈슬러 침몰 사고
1919년 6월 5일
92 발티모어 탄광 폭발 사고
1919년 1월 15일
21 보스턴 당밀 홍수 사건
1919년 11월 11일
101 맬본 스트리트 탈선사고
1918년 10월 12일
453 클로켓 화재
1918년 10월 4일
100 T.A 길레스피 회사 공장 폭발사고
1918년 7월 9일
101 1918년 내슈빌 열차 충돌사고
1918년 7월 5일
87 콜럼비아호 침몰 사고
1918년 6월 22일
86 해먼드 서커스 열차 충돌사고
1918년 6월 2일
52 스플릿 락 폭발사고
1918년 2월 26일
30 USS 체로키 침몰 사고
1917년 12월 20일
49 셰퍼드빌 열차 탈선사고
1917년 6월 8일
168 스페큘레이터 광산 참사
1917년 4월 27일
121 해스팅 광산 폭발 사고
1917년 4월 10일
139 에디스톤 광산 폭발 사고
1916년 8월 3일
24 배런 댐 붕괴 사고
1916년 11월 7일
46 서머 스트리트 다리 참사
1916년 8월 29일
43 USS 테네시 침몰 사고
1916년 5월 8일
2p SS S.R. 커비 침몰사고
1915년 10월 28일
21 세인트 존스 학교 화재
1916년 10월 20일
25 제임스 B. 콜게이트 침몰 사고
1915년 9월 27일
50 아드모레 폭발 사고
1915년 7월 24일
848 이스트랜드호 참사
1915년 5월 7일
1198 128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1915년 3월 25일
112 레이랜드 광산 참사
1915년 3월 2일
21 USS F-4 침몰 사고
1914년 9월 18일
60 프랜시스 H. 레짓 침몰사고
1914년 4월 28일
180 에클스 광산 참사
1914년 1월 30일
41 SS 먼로 침몰 사고
1913년 12월 24일
73 이탈리안홀 참사
1913년 12월 4일
28 아르카디아 호텔 화재
1913년 11월 10일
25 SS 헨리 B. 스미스 침몰 사고
1913년 10월 22일
263 도슨 광산 폭발 사고
1913년 7월 22일
31 브링햄턴 공장 화재
1913년 5월 24일
39 롱비치 피어 오디토리움 붕괴 사고
1913년 3월 7일
33 알룸 샤인 폭발 사고
1913년 2월 28일
25 듀이 호텔 화재
1913년 1월 10일
26 제임스 T. 스테이플 침몰 사고
1912년 7월 4일
39 코닝 열차 탈선 사고
1912년 4월 14일 ~ 4월 15일
1514 238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911년 12월 9일
84 크로스 마운틴 광산 참사
1911년 9월 30일
78 오스틴 댐 붕괴 사고
1911년 8월 26일
21 캐논스버그 오페라 하우스 압사 사고
1911년 4월 9일
128 배너 광산 참사
1911년 3월 25일
146 트라이앵글 의류공장 화재사고
1910년 12월 22일
24 시카고 가축 판매소 화재
1910년 10월 7일
42 보데트 화재
1910년 10월 1일
21 로스 앤젤레스 타임즈 폭탄 테러
1910년 9월 8일
29 페레 마켓 18 침몰 사고
1910년 10월 5일
84 팔로스 광산 폭발사고
1910년 3월 21일
52 그린 마운틴 열차 탈선사고
1910년 3월 1일
96 웰링턴 눈사태
1910년 2월 6일
31 USS 니나 침몰 사고

[ 190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09년 12월 8일
30 ~ 38 마르케트 & 베세머 No.2호 침몰 사고
1909년 11월 13일
259 체리 광산 참사
1908년 12월 1일
24 D.M 클렘슨호 침몰 사고
1908년 3월 28일
59 1908년 한나 광산 폭발 사고
1908년 3월 4일
173 콜린우드 학교 화재
1908년 1월 13일
170 로드 오페라하우스 화재
1907년 12월 19일
239 다르 광산 참사
1907년 12월 9일
362 모농가 광산 참사
1907년 12월 1일
35 나오미 광산 참사
1907년 10월 11일
22 키프러스호 침몰 사고
1907년 9월 15일
26 카난 열차 탈선 사고
1907년 7월 21일
88 콜럼비아호 침몰 사고
1907년 2월 15일
20 우드론 열차 사고
1905년 12월 30일
602 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고
1905년 7월 15일
66 USS 베닝턴 보일러 폭발 사고
1905년 6월 21일
21 20세기 리미티드 열차 탈선 사고
1905년 3월 20일
58 글로버 신발 공장 참사
1905년 3월 18일
24 1905년 레드 애쉬 광산 폭발 사고
1904년 9월 24일
56+ 뉴마켓 열차 사고
1904년 8월 7일
97 에덴 열차 탈선 사고
1904년 6월 15일
965+ 제너럴 슬로컴호 화재
1904년 4월 13일
36 USS 미주리호 주포 폭발 사고
1904년 1월 25일
181 해윅 광산 참사
1903년 12월 26일
21 이스트 파리스 열차 탈선 사고
1903년 12월 23일
64 코넬스빌 열차 탈선 사고
1903년 8월 6일
26 듀랑 서커스 열차 추돌사고
1903년 7월 29일
22 미국 탄약공장 폭발 사고
1903년 6월 30일
169 1903년 한나 광산 폭발 사고
1902년 9월 19일
115 샤일로 침례교회 압사 사고
1902년 9월 8 ~ 12일
65 야콜트 산불
1902년 7월 10일
112 롤링 광산 폭발 사고
1901년 9월 15일
24 허드슨호 침몰 사고
1901년 8월 15일
40 아일랜더호 침몰 사고
1901년 2월 22일
128 시티 오브 리오 데 자네이루호 침몰 사고
1900년 11월 29일
21 1900 빅 게임 참사
1900년 7월 4일
44 타코마 노면전차 참사
1900년 6월 30일
326+ 호보컨 부두 화재
1900년 6월 23일
35 ~ 37 캠프 크릭 열차 탈선 사고
1900년 5월 1일
200+ 스코필드 광산 참사
1900년 3월 6일
46 1900년 레드 애쉬 광산 폭발 사고
[ 189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94년 9월 1일
418 힝클리 대화재
1890년 2월 16일
100+ 월넛그로브댐 붕괴 사고
[ 1880년대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89년 5월 31일
2208 존스타운 홍수

[ 1870년대 이전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76년 12월 29일
92+ 애슈터뷸라 철도 참사
1876년 12월 5일
278 브루클린 극장 화재
1871년 7월 30일
125 1871년 스태튼섬 참사
1871년 10월 8일 ~ 10일
300+ 시카고 대화재
1871년 10월 8일
1700+ 페시티고 대화재
1865년 4월 27일
1700+ 술타나호 침몰 사고
1860년 9월 7일
300+ 레이디 엘진 호 침몰 사고
1860년 1월 10일
88 펨버튼 공장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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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송에서 송출되는 밖의 상황을 보면 평소에 테스트 이외 방송이 거의 별로 안 됐던 EBS가 실제로 방송된 이유를 알 수 있다. [2] 로드니 킹 사건에서 주범인 4명의 경찰들에 대한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LA 폭동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3] 5명 중 이 사람만 킹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으며 아직 현역이다. [4] LA 폭동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인 트럭기사 레지날드 데니의 폭행 장면이다. 흑인 4명이 차를 세우고 기사를 끌어내려 소화기 벽돌 등으로 마구 구타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 방송국 헬기로 생중계되었다. 방송을 본 몇몇 사람들이 도우러 온 덕분에 레지날드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되었다. [5] 이 로드니 킹 사건과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의 여파가 마틴 루터 킹의 암살에 비하는 분노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6] 서술된 것처럼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에도 미국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긴 했는데 마틴 루터 킹은 미국 흑인들 모두에게 있어서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은 큰 충격과 분노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7] 영화 < Straight Outta Compton>에서 제대로 묘사된다. 재임 당시 LA 반문화랑 사이가 안 좋아서 LA 하드코어 펑크 씬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서구 문명의 몰락> 상영도 막으려고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8] 당시의 미국 연방 민권법으로 미국 흑인에 대한 린치, 고문, 살인 등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일상적인 차별은 막을 수 없었다. 일상적인 차별을 본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폭동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의 인식 전환에 대한 윤리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9] 사람 피부는 누구나 색이 있고 비교적 어둡거나 밝을 뿐인데 "유색"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한 차별적 단어라는 주장이다. [10] 한국에는 흑인 갱스터들에게 다른 인종이 니거라고 한다면 거의 총을 맞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을 정도다. [11] 물론 이 미국 흑인들도 "니가(nigga)"라는 흑인식으로 바뀐 슬랭을 쓰지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내포한 "니거(nigger)"는 거의 쓰지 않지만 저 "nigga"라는 슬랭을 쓰지 않는 흑인들도 아주 많다. 흑인들이 무조건 N-word를 쓴다는 것도 인종차별적인 편견이다. 힙합에서 nigga라는 단어가 워낙 많이 나오기 때문에 착각할 수 있겠지만 힙합을 하는 이들 중 많은 수가 갱단 출신이거나 험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이다. 물론 칸예 웨스트 등 유복하게 자란 흑인이라고 N-word를 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12] 1980년대에는 인종차별이 음지에서 진행되어서 잘 안 알려진 것뿐이지, 1940년부터 1980년까지 빠르게 떨어지던 흑인 빈곤율이 1980년부터 상당 부분 정체된 이유는 레이건 시대의 마약과의 전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흑인 빈곤층이나 히스패닉 빈곤층을 마구 잡아들였는데 이 정책 이전과 비교하여 감옥 재소자 수가 5~6배 정도나 늘어났다. 이 정책 이전에는 감옥 재소자 수가 수십 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어 왔는데 이 정책 이후 재소자가 폭증했다. 1980년대 흑인 빈곤층의 갱 활동 증가와 갱스터 랩의 확산, 흑인 게토의 파탄도 이 정책으로 인한 것이다. 결국 나중에 공화당에서도 이 마약과의 전쟁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시인하였으나 이미 파탄난 흑인과 히스패닉 빈곤층 사회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13] 덧붙여 <산 안드레아스> 미션의 최종적인 악당인 텐페니 경관은 백인으로 설정하면 인종차별을 조장할 것 같아 흑인으로 교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가 있다. [14] 기사 작성자 Richard Reyes Fruto. [15] Compton. N.W.A의 " Straight Outta Compton"의 Compton이 바로 이 지역이다. 뮤직비디오에도 자주 나오며 흑인 갱단의 근거지로 많이 묘사되기도 한다. Grand Theft Auto: San Andreas의 주인공 CJ가 사는 동네 갠튼(Ganton)은 이 곳의 패러디다. [16] 그 당시 일어난 모든 피해액이 약 7억 달러. 즉 한인 사회가 전체 피해의 절반 이상을 입은 것이다. [17] 이는 폭동으로 인한 모든 피해의 45퍼센트를 차지한다. [18] 그 중에는 평소 흑인들에게 선행을 베풀어서 흑인들이 직접 지켜준 곳도 있다. 자세한 것은 후술. [19] 지역과 문화권을 불문하고 인종차별주의가 당연시 여겨졌던 것은 20세기 중반까지였다. 예외적으로 남부에서는 20세기 후반이 되어서도 거의 대부분의 백인들이 흑인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인종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부를 제외하면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20] 물론 그 지역 거주 흑인들이 이 두 사건 이전부터 한인들과 갈등을 빚고는 있었지만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의 집중 보도로 인해 폭발한 것이 맞다. [21] LA에서 한인 지역 사회 리더와 흑인 지역 사회 리더가 만나서 대화하고 친목을 다지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22] 이는 한국이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아무리 이민자라도 본래 국적을 포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며 한국과의 교류를 계속 하고 싶어하는 경우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교민들의 자손들은 2010년대 이후 한국 내에서 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적은 후 병역을 이행하면 복수국적 유지가 가능해지긴 했다. 참고로 이렇게 병역을 이행하는 경우 정기휴가 때 미국을 다녀오는 것을 허가해 준다. 항공권도 지원해 주며 휴가기간도 최소 5일 이상은 늘려 준다. 물론 휴가 가기 전에 서류를 복잡하게 써야 한다는 함정이 있기는 하다. [23] 당시에는 아직 신흥공업국이었고 선진국 진입은 2000년대의 일이다. [24] 경찰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민권 없고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이민자 집단보다 일단 시민권이라도 있는 미국 시민을 보호하게 된 것이다. [25] 참고로 가해 경찰 중에는 아시아계 경찰도 포함되어 있었다. [26] 실제로 BLM 운동 당시 많은 아시아인 커뮤니티는 이전의 인권운동들에 비해 훨씬 많은 참여율을 보였다. 한인을 비롯한 동북아 인종 커뮤니티는 상대적으로 경찰에 의한 폭력을 덜 경험했지만 동남아권 아시아인 커뮤니티는 경찰에 의한 폭력과 차별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특히 이들의 동참이 눈에 띄게 많이 나타났다. [27]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LA에서는 홍정복 여사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그 즉시 주변 갱단과 다른 흑인들까지 나서서 보복한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 [28] 그녀의 장례식에서 한 흑인 소년은 "그녀는 우리를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인간으로 대해 주었다."면서 절규했다. [29] '마마, 우리가 범인을 찾아서 대가를 치르게 할게요.'라는 내용이었다. [30] 뒷이야기인데 당시 사건이 벌어진 이후 홍정복 씨를 따르던 갱단이 4일만에 강도 사건의 범인 2명을 모두 찾아냈으며, 경찰이 갱단에서 찾아낸 범인 중 1명을 인계받기까지 11일이 걸렸다고 한다. 이때 경찰들은 갱단과 협상을 해서 강도짓만 했던 공범만 체포했고, 홍정복을 죽인 당사자는 갱단이 직접 처리하고 경찰에서 실종처리했다고 한다. [31] 첫 경기는 폭동 당일인 4월 29일 열렸다. [32] 1991년에 김유미 작가가 지은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33] 단, 시트콤까지 포함하면 1990년말 갓 개국했던 SBS의 <LA 아리랑>이 더 먼저다. [34] 기사 [35] 킹의 약혼녀였던 신시아 켈리의 증언에 따르면 숨지기 전날에 대마를 피우고 과음한 뒤 수영장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LA 경찰이 조사를 했고 사고사로 판정되었다. [36] 이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때는 연방 민권법이 제정된 지 단 4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미국 흑인들은 "Black Pride Movement"라는 새로운 사회 운동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막 민권 운동의 결실이 나오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는데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끈 리더 중 하나인 마틴 루터 킹의 암살은 미국 흑인들을 분노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37] 게다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폭동을 선동한 자가 백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38]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유튜브에 무료 공개한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이다. 2017년 에미상 수상작으로 별다른 해설없이 오직 당시의 생생한 기록 영상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영문 자막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