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2:14:40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Sinking of the RMS Lusitania

Lusitania-Affäre
파일:Lusitania 191551.jpg
발생 날짜 1915년 5월 7일 ([dday(1915-05-07)]일)
발생 위치 북대서양
선종 여객선
유형 운항 중 어뢰 피격
좌표 51°25′N 8°33′W
<colcolor=#000> 탑승인원 1,959명
사망자 1,198명
구조자 761명

파일:RMS Lusitania in New York 1907.jpg

1. 개요2. RMS 루시타니아3. 상세
3.1. 배경3.2. 사건 당시
4. 사건 이후
4.1. 국제법 위반 관련 논란
5. 관련 문서

1. 개요

RMS 루시타니아 제1차 세계대전 아일랜드 앞 바다에서 독일 제국 해군 대양함대 소속의 유보트 SM U-20 어뢰에 맞아서 침몰한 사건.

2. RMS 루시타니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RMS 루시타니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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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세

3.1. 배경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보다 해상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인 독일 제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세우고 영국으로 접근하는 수송선을 죄다 격침시켜 영국을 말려죽이려고 들었다. 독일은 잠수함 작전을 실행하면서 각국의 일간지에 "독일 제국은 영국과 전쟁중이니 영국에 접근하는 선박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광고를 냈지만, 루시타니아 호는 이를 무시하고 영국으로 항로를 잡았다.

3.2. 사건 당시

1915년 5월 6일 아침 RMS 루시타니아호는 아일랜드 앞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당시 안개가 짙어 시야확보가 어려운 상황이였고 루시타니아호는 속도를 줄여 항해한다.

오전 10시경,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고 루시타니아호는 속도를 다시 높였다. 그리고 오후 12시 45분, 안개가 완전히 걷혔고 독일 해군 소속 유보트 U-20이 물 속에서 위로 부상했다.

오후 1시 20분, U-20은 수평선 너머 여러척의 선박들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목격 직후 U-20의 선원들은 목격한것이 여러척의 선박들이 아닌, 거대한 한 여객선임을 알게 되었고 U-20은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 루시타니아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1시간 가량 루시타니아호를 추격하던 U-20은 오후 2시 10분에 마침내 700m 앞에 있던 루시타니아호를 향해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는 루시타니아호의 우현을 강타하였고, 큰 폭발과[1] 동시에 우현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며 순식간에 루시타니아호의 선수가 물에 잠겨 침몰하기 시작했다.

어뢰 폭발 2분 뒤, 루시타니아호의 선장은 배를 멈추라고 지시했고, 그와 동시에 루시타니아호는 SOS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후 2시 15분, 정전이 일어났고 정전 1분 후 선장은 배를 버리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루시타니아호는 결국 2시 28분, 어뢰 폭발 18분만에 바다속으로 침몰했다.

불과 3년 전에 발생한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영향으로 구명정 등은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지만, 어뢰 폭발로 인해 사상자가 제법 생긴 데다가 삽시간에 일어난 재난으로 우왕좌왕하는 승객들을 승무원들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배가 18분 만에 침몰하여 많은 이들이 구조되지 못했다. 그래서 타이타닉과 달리 루시타니아는 남녀노소 사망비율이 비슷한 편이다. 엘리베이터로 탈출하려다가 전원이 끊기는 바람에 그대로 갇혀서 수장당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2] 선장 윌리엄 토머스 터너는 루시타이나의 조타실 근처 갑판에 있다가 배가 침몰하면서 바다에 빠진 후 부유물을 붙잡고 3시간을 버틴 끝에 구조되었고, 비록 배의 최고 책임자이기는 했으나 배가 가라앉는 속도가 선장이 뭘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던 데다 그 역시 피격 직후 얼마 안 되어 조난당해 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었음이 감안되어 법적 및 도덕적 문책을 당하지는 않았다. 당시 침몰 해역의 수온은 약 11°C로 타이타닉이 침몰한 북서 대서양 해역보다는 높았지만, 워낙 침몰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 수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바다에 빠진 승객들 중 대다수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였다. 선장도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이지, 조금만 늦게 구조됐으면 죽었을 것이다.

4. 사건 이후

이 사고로 미국은 매우 격분했는데, 루시타니아 호에 128명의 미국인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건이 미국의 세계대전 참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3] 미국이 독일제국에 선전포고 하기 2일 전인 1917년 4월 4일에도 미국 상선이나 화물선이 격침되며 미국인이 죽고 있었기 때문. 이 사건 이후에 미국본토에서 독일제국에 의한 사보타지가 터지면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급기야 1917년 1월 16일 치머만 전보 사건이 터지면서 분노가 폭발한 미국은 1917년 4월 6일 선전포고와 함께 늦게나마 협상국에 가담하고 약 1년 반만에 독일 제국을 완전히 때려잡았다. 참고로 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각국의 선박들이 무차별 격침당하면서 여러 나라들이 독일제국에 이를 갈았고, 결국 이는 독일 제국의 패전에도 한몫하게 되었다.

4.1. 국제법 위반 관련 논란

루시타니아는 군이 아니라 민간이 운영하는 배였지만, 독일은 "루시타니아에는 약 173톤 만큼의 무기를 싣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은 정당하다."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훗날 사실로 밝혀졌다. 영국으로 가는 물자 보급 사정이 좋지 않아서 민간이 운영하는 배에라도 각종 군수 물자들을 실어야 했기 때문. 국제법상 민간 선박이라도 군수물자를 적재했다면 공격이 가능하다.

또한 루시타니아는 영국 해군의 보조함으로 정식 등록되어 있었고, 이후 약 4,200,000발의 소총탄과 1,250발의 탄피, 18개의 뇌관 등의 각종 군수 물자들을 싣고 있었다는 것이 추가로 밝혀졌다. 그래서 흔히 알려진 것처럼 독일이 무고한 민간 선박을 공격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 민간 선박으로 위장해서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태평양 전쟁에서도 일본은 민간 바지선을 이용해 식량과 무기를 수송했다. 당연히 지금도 이런 일이 흔하다.

또한, 국제법상 군수물자로 볼 수 있는 화물의 범위는 굉장히 광범위하기 때문에, 병기와 탄약 같은 것이 아니라 해도 식량이나 유류, 차량 같은 군민 모두 쓸 수 있는 물자라면 군수물자로 봐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5. 관련 문서


[1] 이 폭발로 거대한 물기둥이 만들어졌는데, 얼마나 거대했는지 구명정 한 척이 바다로 떨어지고, 배의 잔해들이 물기둥을 타고 올라와 배의 갑판위에 떨어져 이로 인해 부상당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2] 위 영상자료에서 볼 수 있듯 침몰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대부분의 구명정들이 승객들을 태우기도 전에 루시타니아호와 함께 가라앉았고, 그나마 먼저 내려진 구명정들도 수면에 내려지기 전에 고정고리가 풀려 태우고 있던 승객들과 함께 수면으로 추락하거나 루시타니아 호의 선체에 밀려서 전복되면서 결국 제대로 내려진 구명정은 48척 중 6척으로 전체 수의 8분의 1에 불과했다. [3] 독일 제국은 미국에게 루시타니아호 사고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했고 잠시나마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멈추는 모습까지 보여주었기에 미국도 한발 물러나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