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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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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섭정 배경 · 평가 · 여담 · 매체 |
1. 생애 초 · 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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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와룡관과 학창의를 착용한 대원군[1] |
소년기 흥선군은 이름난 수재였다. 흥선군의 재주를 알아본 아버지 남연군이 족보 상 이종사촌인[3] 김정희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겼고, 흥선군은 그에게서 난초 치는 법과 서예, 그림, 글씨 등을 두루 배웠다. 그러나 어머니와 맏형, 아버지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하게 산 형 흥인군 이최응은 머리가 나빴기에 무시하고 경멸했다.
1834년(순조 34) 흥선정(정3품 당하관)의 작위를 받고 흥선도정(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에, 흥선군[4]으로 승진한다. 그밖에 종친부 유사당상, 비변사 당상, 오위도총부 도총관, 천장도감 대존관, 도총관 등을 지냈다. 3품 이상의 고위직으로 붉은 관복을 입는 엄연한 재상직이지만, 실제로는 왕실 종친들의 명단을 정리하거나 왕실의 장례 과정을 관리하는 정도의 한직이었다. 하지만 세조 때의 영의정인 구성군 이준 이후로 조선의 종친들은 힘있는 관직에 제수된 적이 없으니 딱히 푸대접 받았다고 취급할 일은 아니다.
2. 집권 준비 과정과 상갓집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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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권오창 화백이 그린 흥선대원군 초상화 |
결국 작전은 성공해, 철종이 사망한 후 1863년 조 대비와 익종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12세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섭정의 형식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여기서 익종의 양자로 들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대행 왕인 철종이 아니라 신정왕후 조씨의 남편인 익종의 후사로 삼아서, 왕실의 계보를 익종 계열로 잇게 하여 신정왕후를 흡족케 한 것이다. 과거 철종이 즉위할 때는 당시의 대행 왕인 헌종이 아닌 순조의 아들로 삼아서 왕위를 잇게 하는 바람에, 익종 계통은 후사가 끊어진 상황이었던 점을 절묘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종의 즉위는 흥선군과 조 대비의 친정인 풍양 조씨가 신 안동 김씨가 나서기 전에 선수를 친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 대비가 후계자를 정하는 것엔 철종의 의사도 약간 반영되어 있었다고 하며, (신)안동 김씨 측에서도 고종의 즉위에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신)안동 김씨가 예전만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건 사실이지만, (신)안동 김씨의 일부 파벌[6]은 풍양 조씨와 함께 어느 정도 실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이후에도, (신)안동 김씨는 여전히 거대 파벌로 잔존했으며,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고종에 의해서 조정의 중진들로 중용되었다.
고종이 즉위한 뒤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시행했으나 전례에 따라서 조선시대에 성인으로 인정되는 15세가 되는 3년 만에 철회하고, 형식상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드라마 등의 이미지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매일 조정의 어전 회의에 직접 등장해서 전면에서 섭정을 시행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와는 다르다. 고종 즉위 후 3년 동안은 앞서 말했듯이 공식적으로는 신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이므로, 대원군은 크게 중요한 국정 사안을 위한 회의 외에는 궁궐에 안 왔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는 막후에서 신정왕후와 국정을 논의하며, 최종 결정은 신정왕후가 내리는 형태였다. 형식상 고종의 친정이 시작한 뒤에는, 일단 안건을 고종과 조정 대신들이 논의한 뒤 이를 운현궁에 보내서 대원군이 안건 결과를 결정하고, 형식상 고종이 재가하는 막후 정치의 형태가 되었다. 다만 법적으로 고종은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조씨의 양자라는 형태로 즉위했기 때문에, 이하응이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완전히 법도 전례도 없는 형태임에도 고종의 생물학적 부친이라는 이유로 행해진 것뿐이었다.
지금껏 잘 알려진 야사들에 의하면 흥선군은 신 안동 김씨 측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 상갓집 개라고 불리면서까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소위 '천하장안'[7]이라 불리는 심복들과 함께,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등 깨어있는 왕족으로 보이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가 수모를 당했다는 야사 첫 번째.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신위가 있는 만동묘에 참배를 하러 갔다가 남루한 옷차림 덕에 하인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다. 이유는 명나라 황제 폐하를 모신 곳에 웬 거렁뱅이가 들어와서 더럽히냐는 것. 이하응은 서원을 관장하는 변장의라는 사람에게 "감히 하인이 왕족을 때리다니 있을 수 있는 소리인가?"라며 조지라고 했으나, "하인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어떻게 벌을 줄 수 있나요?"라며 단칼에 거절당한다. 당시 이하응이 얼마나 같잖게(…) 보였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었던 (신)안동 김씨 일파들도 다 살려준 대원군이었지만, 변장의는 이하응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놈은 내가 집권하면 반드시 죽인다"고 생각했는지, 고종의 즉위 후 왕족을 우습게 본 대가로 서울로 강제 압송되어 말 그대로 맞아죽었다고 한다. 사실 대원군의 왕족 우대 정책에 따라 시범 케이스로 삼기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만동묘는 대원군이 당파 싸움의 온상으로 지목해 강제 철거했다. 그러나 이건 야사일 뿐, 실제 역사는 아니다. 흥선대원군 자체가 무슨 남루한 비렁뱅이 거지가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 명예직이나마 고위 관직을 지내면서 조정에서 모범 종친으로 칭송받는 어르신이어서 저딴 대접 받을 일이 없었고, 이미 최후의 당파인 벽파와 남인이 순조 재위기에 전멸해서 당파 싸움이란 것은 있지도 않았다. 다만 노론의 핏줄을 이어받은 이들은 다수 포진해 있어서 고종이 친정할 때 역적으로 낙인 찍힌 노론계 신하들을 대거 사면한 적도 있다. 실제 대원군이 만동묘를 철거한 이유는 서원 철폐 때문이고, 만동묘 제거는 그 준비 단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 조선왕조실록》에 변장의란 사람은 나오지도 않는다. 다만 흥선군이 종친 시절에 만동묘를 찾았다가 모욕을 당한 사건 자체는 있었다고 한다. 만동묘 앞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아랫 사람의 부액(부축)을 받았는데, 이를 본 만동묘 관리자 중 한명이 '이 곳은 주상 전하께서도 부액을 받지 않고 오르는 곳인데 어딜 감히!'라며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
2번째. (신)안동 김씨의 수장이자 김좌근의 아들인 김병기도 수시로 모욕을 주었는데, 어느 잔칫집에 이하응이 나타나 잔칫상을 요구하자 "저런 거렁뱅이 상갓집 개한테 진수성찬도 호사다"라며 자기가 먹던 고기의 뼈다귀를 이하응에게 던져 주었다. 당시 이런 수모를 당한 이하응은 그냥 웃고 넘겼는데, 훗날 자신이 권세를 잡자 김병기의 잔치에 참여해서는 독이 들었다며 먹던 음식을 뱉었다. 감히 임금의 생부이자 당대 최고 권력자인 대원군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쓰게 된 김병기는 그 자리에서 대원군이 뱉은 음식을 주워먹는 기지를 발휘, 대원군의 분노를 흘려내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역시나 이것도 야사이며,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흥선군은 유력 왕위계승 후보인 남연군 일가의 소속으로 조정으로부터 모범적인 종친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었고[8], 종친 좌장으로 아버지 남연군, 형인 흥인군과 함께 예우 받았다. 아무리 안동 김씨 천하인들 김병기가 함부로 모욕을 줄 상대는 아니다.
3번째. 이하응이 난과 그림을 그려서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본 (신)안동 김씨 문중 식객 심의면이 이하응에게 궁도령이라고 조롱하고 비하했는데, 행사에 온 그에게 "뭐 하러 이런 곳에 오느냐"며 면박을 줬다고 한다. 뒤에 심의면은 대원군이 집권한 뒤 형조판서 직에서 파면되고 벼슬에서 잘렸다고 한다. 심의면이 벼슬자리에서 잘린 건 사실이지만, 단지 대원군을 얕잡아 봤다고 괘씸죄로 숙청된 건 아니었다. 실록을 보면, 심의면은 그의 아들 의주부윤 심이택이 자그마치 27만 냥의 재물을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사건이 들키면서 세트로 숙청된 것이다. 조선 왕조의 1년 수입이 60만냥. 이건 뭐 반년치 국가 수입을 갈취한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신정왕후 조씨는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 것이랑 똑같다"고 분노했다. 그러고는 저잣거리에서 곤장맞게 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이런 이미지가 박힌 것은 사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의 영향이 크다. 앞에서 서술했듯 그는 흥선정과 흥선도정[9]을 거쳐 이미 24세에 군(君)작위를 받은 바 있다. 그 이후 수릉(익종의 릉) 천장도감의 대존관(代奠官 : 종친 2품)과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 종친부 유사당상(정3품 당상관)등의 관직을 지낸 바 있다. 녹봉이 있으나 마나한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파락호라 욕먹으며 다닐만한 수준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물론 잘산다, 못산다는 것도 상대적인 기준이라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는 빈민 급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 신분에 비해서 "체면치례", "품위 유지"를 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른바 '천하장안'도 중인 신분이었지, '시정잡배'로 불릴 위인들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신)안동 김씨 일족에게 자신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장사치 같은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거나 체면을 떨어뜨리는 행세를 하는 등 어느 정도 쇼를 한 부분은 있다. 실제로 그가 빈곤하게 지낼 때 자주 돈이나 쌀을 꾸러다니는 모습을 보였는데, 당시 사회에서 양반(그것도 왕족)이 굶어 죽으면 죽었지 장사꾼들에게 구차하게 먹을 걸 꾸러다니는 것은 욕먹기 딱 좋은 행위였다. 그리고 권세가들을 찾아가 큰아들에게 벼슬자리를 줄 것을 구걸하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저 정도면 뭐 크게 이상하진 않은데?' 할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 기준으로 왕족이 할 만한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 이 쇼한 것에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부풀려져 우리가 아는 상갓집 개의 이미지가 형성된 듯 하다.
굳이 저런 쇼를 한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철종의 큰아버지 풍계군의 양자인 이세보는 경평군에 봉작되었다가, 안동 김씨가 다 해먹는다고 비판을 했는데, '언어를 조심하지 않은 죄'로 논척되어 양자에서 파양되고 작위도 삭직당했다. 왕족이 세도가의 횡포에 휘둘리는 것을 보았으니, 최소한의 운신이라도 보전하려면 결국 적당한 사고뭉치 이미지를 통해 안동 김씨의 권세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스탠스를 내비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의 뒷수습 과정에서 흥선군이 유사당상으로 복직되었으며, 그 후에 신정왕후 조씨의 눈에 들게 되었으니 고종의 즉위에 영향을 끼친 셈. 여담으로 나중에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종친들에게 대거 벼슬을 내려, 엄청난 수의 종친들로 관직을 채웠다. 흥인군도 왕위 서열에 가까운 왕족 중에선 실로 오랜만에 호위대장 등을 겸하는 등 세도 정치 시절보단 훨씬 잘 나갔고, 대원군 실각 이후에는 영의정 등 높은 벼슬을 하며 문호개방을 주도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 때 안동 김씨에 휘둘려 피해를 입은 왕족 중, 1862년 사약을 받고 죽은 이하전이 언급되고, 흥선군의 파락호 행세도 이하전의 사망이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다. 그런데 이를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이하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다. 이하전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죽기 전에 언급된 부분이 있는데, 덕흥대원군에게 헌종이 작헌례를 실시하면서 덕흥대원군의 사손인 이하전을 불렀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이렇듯 파락호 생활에서 일약 대원군으로 수직신분 상승하는 클리셰가 널리 퍼진 까닭은 100년 전 작가인 김동인이 왕족을 상갓집 개처럼 묘사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무시받으며 비루하게 살던 사람이 실은 큰 뜻과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식의 묘사는 이른바 힘숨찐 클리셰로 불리며 2020년대인 지금도 드라마, 영화, 웹소설 등에서 끝없이 재탕되고 있다. 《운현궁의 봄》이 나온지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흥선군이 상갓집 개로 묘사되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생명력을 유지하는 강렬한 전개와 캐릭터성을 구축해 놓은 김동인의 상상력을 현대 작가들이 뛰어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집권
3.1. 내정 개혁과 왕권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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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이한철이 그린, 흥선대원군 초상화. 섭정 당시인 1869년경의 모습으로 금관을 착용하고 조복을 입고 있다. |
흥선대원군은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양전 사업은 전국에 실시된 것도 아니고, 딱히 큰 효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양전사업이 이때만 실시된 것도 아니다. 또한 군정을 개혁하기 위해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한다. 당연히 양반들은 반발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의견을 관철시켰고, 이에 걷히는 세금이 확연히 늘어났다. 다만, 양반들의 원성이 하도 높아 체면을 고려해서 노복의 이름으로 거뒀다.
또한 이전까지 관에서 곡식을 빌려준다는 명목 하에 수령과 아전들의 돈벌이 구실이 되었던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지역의 덕망 있는 양반이 곡식을 빌려주게 하는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게 했다. 이 사창의 운영을 책임진 자를 사수(社首)라고 부르는데, 사수는 임명제가 아니라 지방의 추천제로 이루어졌다. 이를 환곡의 개혁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리대인 것은 여전했고, 수령과 아전이 무조건 먹던 것을 지역 양반들이 먹을 수도 있게 한 정도, 그리고 양반들의 불만을 달래는 효과와 이 과정에서 이자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둬가는 효과만 있었다. 하지만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환곡을 백성의 손에서 주관하게 하니 효과가 매우 좋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는 등 추가 연구가 좀 더 필요할 여지는 있다.
이외에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면서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본래 조선시대의 국정 명령 집행 문서는 항상 '왕약왈(王若曰 : 왕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로 시작했는데, 대원군 섭정기에는 모든 명령 집행 문서에 왕약왈 대신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 : 대원위가 분부한다)'가 앞에 붙었다고 한다. 《 매천야록》에는 이 무렵에 '대원위분부' 5글자에 온 천하가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고종 즉위년과 대원군이 물러난 고종 11년의 재정을 비교하면 조정이 보유한 황금은 51%, 쌀은 299%, 포는 255%, 목재가 258%, 은이 27%, 철이 673%로 늘었을 정도였다. 다만 이게 좋은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나온다.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삼정의 문란으로 들불처럼 민란이 벌어졌던 세도 정치 말엽과 대조하여 대원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했다.
흥선대원군은 이전까지 집권하고 있던 세도정치 집단들도 몰아내야 했는데,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안동 김씨들은 수백 년을 내려온 비변사를 폐지하는 것은 애석하다고 은근슬쩍 반대를 하다가, 대원군과 조 대비의 뜻이 확고하자 타협안을 내놓아, 의정부와 비변사에게 권력을 반반씩 나누되 대신 경국대전에도 없는 비기구인 비변사의 존재를 공식화하려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 어림없는 소리!"를 외치면서, 그 타협안에서 불과 1년 후에 비변사를 혁파하고 비국(備局)의 인신(印信)을 녹여 영원히 부활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의정부와 삼군부는 모두 왕과 직결되는 권력기관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강화되었고, 세도 가문의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는 또한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세도 가문의 위세를 꺾는데 성공했다. 기존에는 종친은 4대에 걸쳐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는데, 이 제한을 2대로 줄였다. 그 결과 전주 이씨는 (신)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최대 정파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것은 종친이 고종이 아닌 대원군을 따르게 되는 배경이 되었고, 후일 대원군의 재집권 시도에도 이들의 힘을 빌렸다. 반면 대원군과 대립해야 했던 고종은 친위세력을 자신의 처가인 민씨에서 찾아야 했다. 또한 '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펴면서 법제도 바로잡았다.
다만 신 안동 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아래에도 언급하겠지만 이는 대원군이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지나친 성장을 막아야 했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은 크게 잃었지만 개인 재산이나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사실상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은 영의정에서 물러나서 명예직을 지내며 조정 내 원로로 잘 대접받다가 자연사했고, 김병기는 잠시 경기도 광주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하여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 / 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 흥선대원군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야사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처음으로 조정 대신들과 면담하는 공식 석상에서 한 말이 "나는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세도 가문의 위세를 꺾고),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종친을 정계에 등용하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남인을 등용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시오?"인데 이 말을 들은 (신)안동 김씨의 김병기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는 것은 가능하겠습니다만,[10] 어찌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즉 "너님이 아무리 용 써봐야 우리 가문 위세를 꺾을 수 있겠음?" 정도의 의미다. 그러자 대원군은 "저 놈은 지 잘난 줄만 아는구만."이라고 핀잔만 주고 넘어갔고, 이후 (신)안동 김씨의 위세를 꺾는 작업을 실시했다고 하는데 실록에는 별 얘기가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애초에 대원군은 어전 회의에 나와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형식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다만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 때 작성한 것이라서 그 정확성이 의심되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흥선대원군은 또한 대규모로 서원을 철폐시켰다. 서원은 이전까지 제사 비용 등을 주변의 농민에게 물리는 등 문제를 일으켰고, 사액 서원들의 면세권을 이용해 주위의 양반들이 땅을 서원에 맡기고 세금을 내지 않는 등 폐단이 심했다. 이에 그는 600여 개의 서원[11]을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밀어버렸다. 야사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 날 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고 하는데 근세조선정감에 기록되어 있다.
서원을 철폐할 때 대원군은 말이 서원이지 군역 기피, 중복 제사, 민폐 등을 지적하는 등 워낙 철폐의 명분을 든든히 축적하고 철거하여 유생들은 별 저항도 못했다. 그들의 꼼수라 해봐야 흥선대원군의 조상을 모시는 서원을 만들고 중앙의 철거 명령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 고작이었는데, 대원군은 인평대군 서원부터 철거해버리고, 지속적인 독촉으로 관철해냈다. 복구 요구도 이항로, 기정진, 최익현을 비롯한 거물급을 제외하곤 없었고, 서원 복구 요구가 빗발같이 쏟아진 것은 대원군 실각 이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후였는데 고종 역시 그런 요구들은 씹었다. 서원 철폐 당시 어렸던 고종이 서원 철폐에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화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흥선대원군의 정책 현안 역시 일관되지 못했는데 겉치레를 없애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면서 서원을 철폐하는 것은 좋았는데 문제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정책 현안인 경복궁 재건을 시도한 것이다. 여러 성공에 고무된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위상을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는데 제 아무리 순조롭게 경복궁을 건설한다 하더라도 총 유통 화폐가 1천만 냥인 상황에서 750만 냥짜리 토목 공사를 한 것이니 당시 조선의 경제 상황으로는 확실한 무리수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조~경 단위의 공사를 벌인 꼴인데 꼭 해야만 하는 공사였다면 부분적으로 조금씩 상황을 봐가면서 했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어 있던 경복궁을 새로 짓는데 드는 비용과 노동력은 엄청났지만 원납전을 모금 받고 국가 재정으로 충당하며 처음에는 별 탈 없이 지어갔다. 이 비용에 대해서 언급이 별로 없는데 알고 보면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조선 왕조의 1년 평균 수입은 10만에서 50만전 정도로 추정되는데 경복궁 중건 비용은 750만 전에 이르렀다. 잘나갈 때 기준으로 15년치, 당시 상황이 어렵던 조선의 기준으로는 약 60년치 이상의 국가 예산이 투여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왕실, 종친, 관료들이 내놓은 50만 전이나 당오전과 당백전(當百錢) 발행 과정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도 포함될 것이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조선 정부에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경복궁은 중건 과정에서 2번이나 불이 났다. 처음 공사를 시작해서 공사가 사실상 끝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3년 2개월. 태조 시기 경복궁을 처음 건축하는데 걸린 기간은 10개월이었으며 태조 시기 창건한 경복궁의 궁내 전각이 390칸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중창한 경복궁은 5,800칸이었다.
문제는 다 지어가는 도중에 화재로 싸그리 타버린 것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을 천명한 것이 1865년(고종 2년) 4월이었다. 하지만 1866년(고종 3년) 3월에 불이 나서 건물 800칸과 목재를 태워버렸으며 이듬해 1867년(고종 4년) 2월에 다시 불이 나서 건물이 불타버렸다. 결국 완성된 것은 1868년(고종 5년) 6월이었다. 다시 짓기에는 너무 무리가 가는 일이었지만 이 와중인 1866년에 병인양요가 터졌다.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하고 원납전을 강제로 거두며 문세를 걷는 등 재원을 마련하고 농민들을 무보수로 대거 동원시켰다. 당백전 발행은 조선 정부는 물론이고 조선 전체의 재앙이었다. 당백전이 발행된지 6개월만에 대표적인 물가 지표인 쌀값이 6배로 폭등하였고 실질 화폐를 사용하던 당시에 당백전 같은 악화(惡貨)가 유통된 결과 조선의 화폐 경제는 박살났다. 당백전은 2년만에 폐지되고 이후 청나라 동전을 밀수한 청전(淸錢)의 유통을 합법화했는데 청전도 악화라서 조선에서는 화폐에 대한 불신 풍조마저 일어났으며 몇몇 수령은 현물과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고 정부에는 당백전으로 납부하는 기행까지 벌였다.
당연히 정부도 모를 리가 없었지만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였으니 뭐라 할 수가 없었는데 인플레이션은 덤. 친정을 한 고종은 참다 못해(경복궁 중건에 너무 많은 돈을 퍼부었기 때문에 청전이나 당백전을 유통하지 않으면 조선 정부는 재정 파산 지경이었다.) 청전의 유통을 폐지하는데 그 결과는 당연히 디플레이션과 재정 파탄으로 이어졌다. 이 사업은 양반들은 물론 일반 백성에게까지도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그가 퇴진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경복궁 중건 무렵에 나온 것으로 전해지는 민요가 바로 〈경복궁 타령〉이다. "우리나라 좋은 나무는 경복궁 짓는데 다 들어간다", "조선 8도 유명한 돌은 모두 경복궁 짓는 주춧돌감이다"라는 구절이 당시 상황을 잘 알려준다.
후에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흥선대원군은 훈련도감의 조총수를 늘리고, 만주에서 말을 수입하고, 일본에서 최신식 총을 수입하려고 노력했으며, 서양의 화포나 배 만드는 기술을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등 군사 기술에도 신경을 많이 썼지만, 실적은 시원찮았다. 군사력 확보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대한제국시기의 고종은 그나마 확보한 궁중 재정으로 진행했는데도 반란 진압에 예산이 부족했다. 경복궁 중건과 그 뒤처리가 블랙홀처럼 모든 재정을 빨아들이고 있던 대원군 집권 시의 조선의 재정으로는 어떤 것도 진행할 수 없다. 게다가 서양식 무기, 보급 체계에 대해서 무지한 조선이 효율적인 근대적 군대를 갖추기란 어림없는 일이었다. 일본만 해도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다음에야 그럴듯한 군대를 갖출 수 있었지, 그 전에는 서양 군함 몇 척에 털리긴 일본이나 조선이나 매한가지였다.
어쨌거나 대원군은 신병기 개발을 위해서도 노력을 많이 했는데, 서양의 증기선을 모방해서 만든 화륜선[12]를 건조하였고, 평민이라 하더라도 사격술만 좋으면 즉각 벼슬을 내려 병사들의 숙련도를 높이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건 근세조선정감이라는 야사집에 기록된 것이며, 승정원일기등 공식 문헌에서는 시도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기에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면제배갑이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딱히 근거를 찾기 힘든 말이다. 천을 많이 겹쳤다고 해서, 당시 서양의 후장식 소총의 관통력을 이겨낼 수 있을지 부터가 의문이다. 방탄 효과가 있었다고 해도 조선 측에서 시험해 볼 만한 물건은 조총뿐이니만큼[13] 조총을 상대로 했을 때나 방탄 효과가 있겠지, 미제 스나이더 소총을 막아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장 그 정도로 방탄 효과가 뛰어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선 측의 기록에도, 미군 측의 기록에도 매우 상세하게 적혀 있을 텐데, 면제배갑의 방탄력에 관련된 미군의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게다가 아무리 포격 및 총격이 계속 가해진 뒤 벌어진 전투라지만, 조선군과 미군 사이의 백병전에서 거의 학살 수준의 교환비가 나오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미군의 권총이니만큼, 면제배갑 방탄설은 낭설에 가깝다. 덤으로 너무 덥고 불편하여 사용하기에 애로 사항이 꽃을 피우는 물건인데, 불이 워낙 잘 붙는 놈이라 미군이 포격을 가하자 조선군은 그야말로 개박살나고 말았다.
그 외에는 서양식 포가를 도입하고, 신식 포 주조술로 만든 대포 / 중포 / 소포와 현대의 기뢰에 해당되는 수뢰포를 제작해 실전 배치했다. 기존에는 가는 흙으로 만든 거푸집(토모)를 사용하였는데, 대포를 주조할 때마다 일일이 흙으로 거푸집을 만들고, 나중에 거푸집을 부수고 포를 꺼내야만 했다. 그러나 해국도지를 통해 전래된 방식은 분리 조립식 철제 거푸집이라, 종래의 방법과는 달리, 거푸집을 부술 필요도 없었고, 쇳물을 부을 때 열과 압력으로 거푸집이 부서지거나 흙의 습기로 불량품이 나오는 일도 없었다. 다만 실전 활용은 불분명하다.
3.2. 종교 탄압과 양요
1864년 흥선대원군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를 물어 잡아 죽였다. 이 문제는 이후 1890년대 교조 신원 운동으로 동학 세력이 뭉쳐,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반면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가족 중 아내(부대부인 민씨), 큰딸, 고종의 유모까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훗날 흥선대원군의 손자 의친왕과 영친왕, 그리고 그 부인들인 김덕수 여사와 이방자 여사도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일으켰던 병인박해의 무시무시함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묘해진다. 집권 이후 한동안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고,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14]과 직접 만나 향후 대책을 물어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본인도 그 당시 국내에 유입되어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사제들을 통하여 꾸준히 서구 세력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서구 열강은 좋은 먹잇감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에 영향을 받은 유림 세력에서 천주교를 탄압하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다음부터 얘기가 갈린다. 일설에 의하면 대원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끌어들이려고 했고 그 계획에 프랑스인 선교 사제들을 이용하려 했는데,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흥선대원군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될 생각 없다"고 답하자 유림의 요청을 받아들여 천주교를 쓸어버렸다는 것이다.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과 비슷하다.
그리고 내용에서는 좀 멀어질 수 있으나, 국제 정세를 이야기하자면 프랑스는 러시아와 가까운 상태였다. 좋아서라기보다는, 영국을 사이에 두고 " 적군의 적은 아군"이라는 식으로 이루어진 것에 가깝지만. 이러한 프레임이 지구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데,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 식민지 확보를 위해서 으르렁대고 있었던 시기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를 유난스레 견제한 쪽이 영국이었다. 이러한 견제가 계속되어 영국은 거문도 사건도 일으키게 되고, 나중에 영일동맹마저도 영국과 일본 양국이 '러시아를 향한 견제와 적대'라는 이해 관계가 맞아지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어쨌거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정치적 입장에서도 괜히 러시아를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도 있다.
안 그래도 천주교를 배척하던 여론은 흥선대원군에게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라고 부추겼고, 때마침 청나라가 서양 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당하고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불안감을 느낀 그는 1866년 8천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과 9명의 프랑스인 사제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때 신자들을 처음에는 생매장까지 단행하는 등 무작정 처형했다. ( 천주교 대전교구의 해미순교성지( 충청남도 서산시)와 홍주성지( 홍성군) 등에 당시의 생매장 흔적이 남아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 천주교를 계속 믿겠다면 죽일 것이고, 더 이상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를 택했다. 이 신자들 중 어린아이들도 많았는데, 대원군은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말라"고 했다. 때문에 병인박해 이후로 고아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 무시무시했던 병인박해다.
이 난리 통에 살아난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15]는 베이징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제독의 프랑스 극동 함대에 연락하는데 프랑스 극동 함대는 이를 구실로 조선에 수교를 요구하며 출정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강화성과 한성근이 지키던 문수산성을 점령하고 갑곶진, 광성진까지 함락하여 사실상 강화도를 장악한 후에 여유롭게 양헌수가 지키던 정족산성(삼랑성)을 점거하려 했다가 매복한 조선군의 기습을 받은 뒤에는 사기가 꺾여서 곧바로 다음 날에 조선 정벌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되는데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 군인이 쓴 일기에는 "조선이 베트남보다 풍요로운 것 같은데 베트남 말고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것"이라고 기재된 내용도 있다.
애초 베트남이 프랑스와 어설픈 접촉을 시도하다가 나라가 통째로 망한 걸 보면 당시 흥선대원군의 정세 판단은 정확했다고 평할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한 근대화로 식민지화를 막은 경우도 있는 만큼 이에 대해서는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은 수십 권의 책과 은괴를 약탈당하고 불타게 되는데 이 때 프랑스군이 가져간 의궤들은 2011년에야 반환되기 시작한다.
여담이지만 사실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할 때 선교사들을 먼저 들여보내길 즐겨했는데, 병인박해 같은 상황이 연출되면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선교사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지[16]로 떠날 때엔 언제라도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순교할 위험에 처하면 이미 각오한 대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사의 자세라고 볼 수 있는데,[17]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처럼 도망쳐 군대를 이끌고 오는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우스운 일이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 두려워 도망쳤다 해도,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조선 정벌을 강하게 주장하기까지 했다.
리델 신부는 나중에 주교가 되어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선교 활동을 위해 다시 조선 땅에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오래 논의하다가 리델 주교를 죽이지는 않고 조선 밖으로 추방했다. 이후 리델 주교는 다시 조선에 돌아오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자세한 것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문서를 참조.
1868년(고종 5년) 독일계 유대인 상인이자 인류학자인 오페르트가 주도한 140여 명[18]은 조선과의 수교를 위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시도했다. '조선인은 부모를 특히 각별히 여기니, 남연군의 시신을 들고 인질극을 펼치면 어쩔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이건 뭐… 현대인 입장에서 봐도 이건 인륜을 한참 벗어난 짓거리에, 정작 부모의 시신을 뺏긴 아들이 미치도록 분노할 거라는 건 생각도 안 해본, 순도 100% 바보 멍청이 짓이다. 서양에서도 왕족의 무덤을 함부로 건드리면 당연히 끔살이다.
이후 오페르트 일당들의 처벌은, 조선 정부는 오페르트 일행의 만행에 대해 청나라 예부에 자문을 보내 이 사건을 알리면서 이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국가의 영사들에게 통고하는 동시에 사건 해명을 요청했다. 청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상하이 주재 프로이센 왕국 영사는 사건의 주모자 3인, 즉 오페르트, 페롱 신부, 젠킨스 등은 프로이센 왕국 사람이 아니며, 선주 묄러와 선원들은 전연 음모 사실을 몰랐다는 등의 해명을 했다.
한편 상하이 주재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그를 조사해서 본국 정부에 조회하여 응분의 처분을 하겠다고 해명했다. 이후 오페르트는 본국에서 실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난선 구제 문제를 놓고 교섭함으로써 조선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 측의 총영사 슈워드는 베이징 주재 미국 대리공사 윌리엄스와 상의한 후 젠킨스를 불법적이고 수치스러운 원정을 준비했다는 등 8개의 범죄 조항을 들어 주 상하이 미국 영사 재폰에 기소했다."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 출판부, 2003년, pp.109-110
중국에서 출발한 이들은 프로이센 왕국 국기를 달고 일본에 가서 무기와 도굴 장비를 구매한 다음, 충청남도에 상륙한다. 이후에 러시아 군대를 자칭하면서 덕산 관아와 인근 민가를 습격해서 무기와 도굴 장비를 다시 강탈했다. 하지만 구만포에서 남연군 묘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시간을 많이 소모해서, 결국 한밤중에 남연군 묘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전날 마을에서 깽판 부리고 간 탓에 금방 관군이 출동했고, 결국 그들은 관에 발라놓았던 석회[19]를 뚫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철수한다.
오페르트는 이후 "우리가 석회를 못 팠을 것 같냐? 파려고 하면 팔 수 있었음.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너네 백성이 불쌍해서 봐준 거야." 따위의 정신승리 쩌는 병맛 글[20]을 보내려 시도했다. 오페르트는 자신을 수군 제독이라 일컬으며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를 영종첨사 심효철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는데, 심효철이 "내용이 윤리에 어긋난다"고 전달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이고, 사본이 조정에 올라가서 온 대신이 다 같이 보았다. 당연히 대원군도. 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진 대원군은 격노해서 통상 금지 정책을 강화했다. 자세한 것은 오페르트 도굴 사건 참조.
다만 이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 대한 가장 정석적인 이야기고,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목할 것도 존재한다. 우선 도굴 사건의 배경인데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병인박해로 인해 청나라로 망명한 조선인 천주교 신자 최선일(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 참여한 조선인)이 오페르트에게 관과 부장품을 볼모로 조선 정부와 교섭하라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의 주장이다. 조선에는 와 본 적도 없는 프랑스인 예수회 신부였던 쟝 바티스트 뒤 알드(Jean Baptiste Du Halde, 1674년 - 1743년)가 풍문만 듣고 쓴 책 《조선 왕국(Kingdom of Korea)》에 "조선은 왕족의 무덤에 부장품을 만땅으로 채워 넣어서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라는 글을 썼고, 이후 외국인들에게 도굴 붐이 일어났는데 오페르트도 그 중 하나란 것이다. #
다음으로 주도자가 오페르트이냐 아니면 젠킨스이냐도 문제다. 일반적으로는 오페르트가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런 식의 발굴 혹은 도굴 작업의 주도자는 경비를 대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인 젠킨스였다. 그리고 이 사건이 국제 문제가 되어서 벌어진 재판에 출석한 사람도 오페르트가 아니라 젠킨스. 오페르트의 경우는 일단 도굴단이 프로이센 국기를 달고 프로이센 왕국군을 자칭했다는 점, 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시도했다는 것, 무엇보다도 돌아가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이라는 책을 썼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시신을 통해서 조선 정부와 협상하려고 했다는 것도 이 책에 나온다.
당연히 미국이라면 이를 갈고 있는 북한의 경우, 오페르트는 안중에도 없고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미국이 주도한 간악한 만행들 중 하나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월북 화가 정현웅의 대표작이 바로 미제의 남연군묘 도굴일 정도. 한제국 건국사에서도 이 도굴 사건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기본적인 얼개는 같지만, 대체 역사 소설이라서 실제와는 좀 다르다.
1869년(고종 6년)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이 지나서 조선에 수교를 청하는 국서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내용이 이전의 관례에 어긋나는 내용이었던지라 거절했다(서계 사건). 그 관례란 천황이 '조선 국왕 전하'라고 존칭을 써서 보내는 것이었으나, 이때 일본은 '본국 천황이 조선 국왕에게'란 제목으로 시작하게끔 써서 보내왔고, 대원군은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결국 1872년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는 정식으로 단절되었는데, 두 나라 모두 이대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기에 협상은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조선은 이전의 격식과 일본 전통 복장을 요구했고 서양식 양복을 입고 서양식 화륜선을 타고 온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그걸 거절하는 식의 일이 반복되었다. 대원군 실각 후 조선 조정에서 일본의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사이에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병인양요 이전 1866년에 평양에 제너럴 셔먼호[21]라는 미국 배가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기습 사격을 가해 7명의 평양 군민을 살해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평양 군민들은 평안감사 박규수의 지휘하에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사로잡은 서양인들과 중국인 선원들을 죽였다. 선원들 살해 자체는 박규수의 명령이 아닌 성난 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일이다. 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삼아 1871년 로저스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왔는데 이 때 미국은 남북 전쟁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았고 결국 5년만에 함대를 이끌고 온 것이다.
신미양요 당시에도 조선은 미국 함대 군인에게 전쟁할 때 하더라도 일단 음식과 물을 보낼테니 잘 먹으라고 하였으나 미국 함대는 가볍게 씹고 온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재연 등이 광성보와 갑곶에서 대항했으나 조선군은 정말이지 처참하게 참패했는데 조선군은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싸웠다고 한다. 참전한 미군의 기록에 따르면 무기를 놓친 사람은 아예 돌을 들고 달려들었으며 패배가 확정되자 칼로 목을 찌르거나 바다에 투신해 자결하는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미군은 더 싸워봐야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4월 28일에 철수한다. 당시 미국은 남북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태평양 너머에서 소수의 병사로 장기전을 치를 여력이 안 되었다. 조선에게 있어 실질적인 전투 결과는 병인양요 때와 비슷하게 전술적 패배임과 동시에 전략적 승리였다. 조선군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프랑스도 미국도 조선과 통상을 맺지 못하고 물러났기 때문. 이에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는데 척화비 건립은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이양선 사건 등으로 민심이 극도로 반외세에 달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한 조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10년 후에 한반도에는 관심이 없었던 영국이 러시아 견제차 거문도와 인근 섬들을 불법 점령하였고, 냉전과 흡사한 기류가 한반도에 흘러 하마터면 한반도 자체가 위기에 처할 뻔했으나, 2년 ~ 3년이 지난 후에 러시아의 남하 정책 철회를 확신하고서는 그냥 뱉어냈다. 사실 두 나라 모두 한반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던 게 아니라[22]서 전면전으로 가지는 않았겠지만, 만약에 영국이 한반도까지 식민지화한다면, 동북아 균형에 차질이 생겨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서구 열강들이 영국을 압박하려고 준비하기는 했었다.
이 2차례의 양요가 단지 무모한 쇄국 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고종이 친정을 맡게 된 후에는 당백전의 여파로 재정이 완전 파탄 지경에 이르러서, 조선군 기강과 무장 상태는 대원군 집권기와 비교해도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 결과 영종진에서 병인양요 / 신미양요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다만 개항을 한 것 자체는 조선 조정이 개항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운요호 사건은 단순한 계기라고 보면 된다.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한 대신들은 "이거 상당히 이득될 듯합니다"란 결론을 내리고 있었고, 고종도 동의했다. 이후에도 고종은 병력 확충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나라의 무기를 마구잡이로 도입해 보급과 숙련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등 문제가 많았다. 제식 소총만 해도 몇 가지가 됐는데 모두 다른 탄을 사용했으니 보급이 원활할 리가…
오늘날 흥선대원군이 개화를 이루지 않고 척화비 등으로 외세를 배척해서 조선의 발전이 늦어졌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이러한 평가는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보면 헛소리에 가깝다. 흥선대원군은 여타 위정척사파들처럼 사상적 도그마에 입각해 무조건적인 외세 배척을 주창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 문물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견지한 인물로 청나라에서 서양식 대포 제조술을 도입하여 대포를 제작하기도 했었다. 당시 서구 열강과 제휴나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가장 적극 고려했던 인물 또한 흥선대원군으로 능력이 있었고 시대와 문제점을 읽는 안목도 있었으며 추진력도 강했지만 아들 고종과 사이가 너무 안 좋았고 정책이 일관되지 못했다.
일본은 애초 네덜란드와 오랜 접촉이 있었고 미국이 일본을 식민지 삼으려고 살짝 간보다가 남북 전쟁을 전후로 한 국내의 혼란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니 일본은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였던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제 아무리 수백 년간 네덜란드와의 교류로 서양에 대한 지식과 문물을 체험한 일본일지라도 당장 근대화로 강력한 군사력과 물량을 앞세운 미국의 화력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은 개항 당시에는 무리였다. 만일 남북 전쟁으로 인한 국내 혼란이 아니었다면 일본도 베트남과 같은 식으로 식민화되었으리라는건 불 보듯 훤한 일이다. 산업혁명으로 넘사벽의 수준이 된 서구 열강의 막강한 물리력에 동아시아 각국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직접 맞대응하기란 태국처럼 지정학적인 요건을 잘 이용하거나 일본과 같은 시기적 행운이 주어지지 않고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조선이나 흥선대원군은 운이 없었을 뿐이고 일본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당장 개항을 하고 싶어도 서양에서 요구하는 것은 철저한 불평등 조약에 기반한 반 식민지였기 때문에 개항을 하고 싶어도 할 대상이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설혹 평등 조약을 맺으려 해도 그러려면 서구 열강이 얕보지 못할 무력이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그 정도의 무력을 갖출 무기를 팔아줄 존재가 없었으며 그런 상대가 있었다 해도 재정이 파탄난 당시 조선에서 얼마나 가능했을까?
물론 개항 긍정파들의 주장도 강하기는 하다. 태국과 에티오피아처럼 식민화를 면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례를 들어 이 주장을 결정론적이라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태국이나 에티오피아도 지정학적 조건, 열강 사이의 대립 이용, 전쟁을 통한 승리 등 조선과는 여러모로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다. 당장 태국의 이웃나라인 버마는 당시 태국과 비교하여 딱히 크게 밀리는 국력이 아니었음에도 영국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위치에 있었기에 3차례의 전쟁 끝에 결국 식민지가 되고 만다.
4. 10년의 섭정에서 물러나다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여론(특히 양반들)은 악화되어 있었다. 이미 최익현의 스승 이항로가 1866년(고종 3년)에 2차례나 상소를 올려 만동묘 복구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을 강하게 비판했고, 1868년(고종 5년) 10월에는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서 경복궁 중건, 원납전, 당백전, 문세를 비판했다. 흔히 대원군이 이것 때문에 실각했다고들 하지만, 정작 고종 5년에 최익현이 올린 상소는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상소를 올릴 거면 진즉에 올리지 공사 다 끝나가는 마당에 허둥지둥 올린 티가 다 난다고 조정에선 비웃기도 했다. 결국은 최익현이 용감히 말을 했다고 전보다 높은 돈녕부 도정에 제수하는 수준에서 끝났다.사대부의 여론은 약간 애매했다. 만동묘와 서원의 철폐에 분노하는 여론도 있었지만, 남인, 북인, 소론을 비롯한 소외된 당파 출신들, 이인좌의 난 이후로 배제되었던 영남의 유림들같이 대원군 덕에 빛을 본 세력들이 대원군의 지지 세력이 되었고, 척사(斥邪)의 분위기에 이항로, 기정진 등 대원군의 개혁에 반발하던 유림도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는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1873년(고종 10년) 윤 6월, 광주 유생 이세우의 주장에 따라, 대원군은 송시열 이후로 조선 왕조에서 2번째로 대로(大老)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대원군의 권위가 한층 올라간 것이다.
근데 불과 4달이 지난 10월 25일, 유명한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온다.
“신은 몇 해 전에 부름을 받고 마지못해 벼슬의 반열에 나왔으나, 며칠도 못 가서 까닭 없이 견파(譴罷)당하였으니, 신의 변변치 못하고 사람답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벌써 환히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때부터 시골로 물러가서 고생을 달게 받으며 낮은 벼슬자리도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승지와 같은 훌륭한 벼슬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명을 듣고 나서 놀랍고 황송하여 더욱 죽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일들을 보면, 정사에서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정변구장 政變舊章) 인재를 취하는 데에는 나약한 사람만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대신(大臣)과 육경(六卿)들은 아뢰는 의견이 없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은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는 비난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속된 논의가 마구 떠돌고 정당한 논의는 사라지고 있으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뜻을 펴고 정직한 선비들은 숨어버렸습니다.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며,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고(이륜두상 彝倫斁喪) 선비의 기풍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스럽다고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염치없는 사람은 버젓이 때를 얻고, 지조 있는 사람은 맥없이 죽음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위에서는 천재(天災)가 나타나고, 아래에서는 지변(地變)이 일어나며, 비가 오고 날이 개이고 춥고 덥고 하는 기후 현상에서는 모두 정상적인 상태를 잃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아무리 노련하고 높은 덕망으로 세상 사람들의 추대와 신망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견제당하고 모순에 빠져 힘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신과 같이 본바탕이 어리석고 학식도 전혀 없는데다가, 외롭고 약하여 어찌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본분에 지나친 것을 삼가라는 경계와,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벼슬 반열에 끼어 따라다니고 길가에서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하게 자족하면서, 아무것도 꺼리는 바가 없이 처신한다면, 또한 사람들의 드센 비방과 무엄하고 불경스럽다는 주벌이 잇따라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달려 나가고 싶어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이 상소를 받은 고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최익현을 크게 칭찬했다.
“그대의 이 상소문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또 나에게 경계를 주는 말이 되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감히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일을 계승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23]으로 제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한 말에 대하여 만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소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상소의 파급력은 엄청났는데, 좌의정과 우의정이 사직을 요청하고, 영돈녕부사 홍순목과 승정원, 홍문관 등이 일제히 자신들의 죄를 자처하면서 인혐(引嫌)[24]하여 반성 분위기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형조참의 안기영이 최익현이 대소 신료들을 일망타진하려 했다고 최익현을 탄핵했다.
“방금 최익현(崔益鉉)의 상소 원본이 내려온 것을 보니, 겉으로는 언사(言事)를 칭탁했으나, 속으로는 자기의 정직을 판 것으로, 높고 낮은 관리들을 일망타진하고 꼬리를 숨기면서 몰래 음흉한 기도를 실현하려 하였습니다. 이륜두상(彝倫斁喪) 4글자는 어느 책에 나타나 있으며 어떤 시대에 언급되었던 표현입니까? 성상께서 즉위한 이래로 일가 친척들 간에 화목하게 하였고,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이끌었으며, 정당한 도리를 지켜 불순한 무리들을 배척한 결과, 위에서 인륜이 밝고 소민(小民)들이 아래에서 서로 화목하니, 곧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바이고 함께 칭송하는 바입니다. 도대체 그의 말이 이에 무슨 한 터럭만큼이라도 그럴 듯하게 비슷하게 맞는 것이 있기에, 그가 감히 이에 대해서 이처럼 어려워함이 없이 지적하여 탓한단 말입니까? 이 일을 엄하게 조사하고 철저히 해명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가지고 시비하는 자들이 장차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할 것이며, 뒷날에 가서 오늘을 보는 사람들도 장차 어떤 세계라고 말하겠습니까? 속히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하여 기어코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이에 고종은 안기영의 소를 뭔 소리인지 이해 못하겠다고 까면서 최익현의 주장을 공격하는 이들을 충신을 공격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안기영이 최익현의 소를 공격할 분위기를 만들자, 조정은 최익현이 비판하는 대상이 누구냐고 따져물으며 반격에 나섰다.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으로 대응했고 신하들은 지금 온 조정을 버리고 최익현 한 사람만을 믿는 것이냐고 고종에게 항의했다. 이에 고종은 안기영을 비롯하여 최익현 반대파들을 유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1월 3일, 이에 최익현이 새로 상소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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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은 서원 철폐, 만동묘 철거, 원납전, 호전 유통, 당백전, 남인 신원 등을 정면으로 물고 늘어지면서, 대원군의 정책에 돌직구를 날린 것은 물론이고, 아예 대원군의 섭정 자체를 맹공격했다. 온 조정이 경악하여 이륜두상 운운한 최익현을 국문할 것을 청했다. 완전히 겁에 질린 조정은 최익현을 난신적자(亂臣賊子 :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이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라고 맹공하면서도, 최익현이 대원군의 섭정을 대놓고 공격한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고종은 이에 "최익현이 옳은 말을 했지만 상소가 날 핍박하려 하니 국문하겠다"란 엉뚱한 이유로 최익현을 국문했는데, 그에게 형신(刑訊)도 가하지 않고 국문을 순식간에 끝냈다. 말이 국문이지 최익현을 보호하려는 쇼였던 것.
그리고 최익현이 시골 사람이라 뭘 몰라서 헛소리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끝내버렸다. 대원군이 공격당한 부분 자체가 논의 대상에 오르지도 못한 것이다. 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 된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양주의 별장에 칩거했다. 그리고 그의 복귀를 청하는 신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고종이 조정을 장악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부사과 이휘림이 고종에게 대원군을 달래 돌아오게 해야 한단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이런 미친놈!’이란 반응을 보이며 이휘림을 고금도에 위리안치했고, 조정은 이휘림을 죽여야 한다고 들끓었다. 그렇게 대원군은 완전히 실각한다.
드디어 실세가 된 고종은 상당히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최익현을 방면했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규수, 이경하 등을 발탁했고, 대원군 반대파인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했으며, 동시에 오랜만에 명망 높은 안동 김씨들을 불러들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만동묘를 복구했고, 문세, 호전을 혁파했으며, 남인인 목내선, 이현일의 사면을 취소하고, 홍상간, 홍지해 등은 신원(伸冤)했다. 하지만 호포제, 사창제는 고수했고, 서원 복구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만동묘도 제사를 관가에서 주관하게 함으로써, 그 권위를 사실상 조정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대원군에게 큰 은혜를 입었던 영남과 성균관의 유생들은 대원군의 복귀를 요구하며, 고종의 친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특히 영남은 선조 이후 3백년간 중앙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가 대원군에 의해서 겨우 조정으로 돌아온 처지였다. 여러 차례 벌을 주어도 이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지지 않자, 고종은 고종 12년 5월 17일에 "대원군은 쉬려고 집에 간 것뿐인데 내가 불효자인양 말을 하는 것들이 많다. 없는 말로 날 다시 희롱하면 죽는다?"라고 엄한 경고를 했다. 그럼에도 불과 4일 후에 대원군을 복귀시키란 소가 올라오자, 유생들을 모조리 참수하라는 초강경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이최응을 비롯한 대신들이 며칠이나 간청한 후에야 위리안치로 벌을 감해주었고, 의외로 서슬 퍼런 고종의 위세에 대원군 복귀 요구는 재야에서도 완전히 사라진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승지와 종친을 보내며 문안하며 자신이 불효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고, 오히려 존호를 바치고 대소사를 대비를 찾아가 묻는 등 신정왕후 조씨(조 대비)를 찾아 극진히 모셨다.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대원군의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보전하고자 발탁한 세력이 명성황후의 일가인 여흥 민씨였다. 그 중에서도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 민겸호의 위세는 대단했고, 민승호는 과거 김좌근이 그랬듯 조정의 실세가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민승호는 1년 후에 누군가가 보낸 폭탄에 의해서 가족들과 함께 폭살당한다.( 민승호 암살사건) 하지만 민씨 세도 자체는 고종의 비호 아래에 유지된다.
5. 재집권 시도
그러나 이렇게 권력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얌전히 앉아있지 않았다. 일단 당장 실권을 잃었다고는 해도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기간만 10년이다. 흥선대원군은 본래 중앙 정권에서 밀려나 있었던 왕실 종친, 남인 등의 노론 이외의 사색당파 잔당, 차별받는 신분이던 서얼, 중인 등을 골고루 등용하고 끌어들였으며 그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세력은 사회 각층에 뿌리깊게 널리 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왕의 생부'라는 위치는 고종조차도 흥선대원군 자신을 제거할 수는 없게 만들었다.흥선대원군은 집요하게 복권을 시도했는데 사실상 흥선대원군이 살아있을 때 조선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정변에 크건 작건 운현궁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 부자간의 대립을 틈타 청나라, 러시아,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를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개국 초에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내면서 시작된 조선 왕조는 마지막 순간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몰아내려 반란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데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모두 아버지가 지고 만다.
1881년(고종 18년) 아들 고종을 몰아내고 쿠데타를 기도하지만 ' 이재선 사건'은 중간에 걸리면서 일망타진돼 서자인 이재선, 측근 안기영과 권정호 등만 사형당하고 흥선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면책된다.
6. 청나라의 납치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잠시 재집권해 개화 기구를 폐하고 군대 구조를 예전과 같이 돌리면서 복권을 꾀하지만, 청군에게 끌려가 심양으로 압송된다.청나라에 끌려간 흥선군은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심문을 받고 청나라 관리들에게 흉선군(조선의 흉악한 폭군)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등 갖은 모욕을 겪으며 3년간 유폐 생활을 한다. 흥선대원군은 난을 치며 난초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평정심을 유지했는데 이 석파란은 청나라에서도 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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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청에 끌려간 대원군. 63세 때의 모습이다. |
1887년(고종 24년) 청나라의 원세개와 공모해 또 다시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번에는 장남 이재면( 흥친왕)을 옹립하려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다. 여기까지 이미 쿠데타 시도만 2번째인데 이 사건으로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크게 척을 지게 되고 고종은 왕족을 측근에서 배제한다.
1894년(고종 31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농민군과 연계하여 정권을 잡으려다가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도 대단히 논란이 많은데, 농민군 특히 전봉준이 재봉기하는데 큰 영향을 준 대상이 고종이냐 대원군이냐에 대해서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이 시기의 흥선대원군에게는 '고종 밀서 위조 혐의'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손자인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해 이준용은 사형 선고까지 나왔는데 흥선대원군이 필사적으로 구명 활동을 벌여서 유배형으로의 감형에 성공한다. 손자 이준용은 아버지나 삼촌들과는 다르게 적극적이고 호탕한 성격이라 흥선대원군과 죽이 잘 맞았다.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일본이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내어 섭정에 앉혔으나, 그저 조선에서 현지인의 반발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고자 얼굴마담으로 내세웠을 뿐 실권은 없었다. 이후 제2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면서 다시 물러나게 된다.
7. 을미사변과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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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청에 지내던 시기 모습으로 추정되는 말년의 초상[25] |
다만, 이 부분은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의심되는 유길준 1명의 주장에 근거한 것으로 이 부분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이후로는 공덕동의 별장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 계획을 세우고 일본에서 낭인[27]들을 불러온다. 한국 땅을 처음 밟는 일본 낭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주회, 우범선[28], 이두황 등 3대대장과 전 군부 차관 이진호 등이 협력하고 개화파 거물 유길준까지 가세하면서 일본 낭인들은 반나절도 안 돼 한성에 들어왔다.
을미사변은 일개 조폭급인 낭인들이 일국의 국모를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이 맛이 갔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기는 한데, 그 배경에는 이와 같이 조선 조정 내 반 고종 세력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공격에서 아관파천 사이의 기간은 왕권이 거의 바닥에 떨어진 시기였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한성에서 일본 수비대와 합류하여 경복궁으로 침투하였고 그 과정에서 궁궐의 수비대를 살해한 뒤 명성황후도 살해했다.
흥선대원군은 1895년 을미사변 때 갑작스레 궁으로 끌려갔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을미사변이 있기 며칠 전에 일본 공사 오카모토가 칩거 중인 흥선대원군의 집에 찾아가 을미사변과 이후의 일에 대해 각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내용으로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이 궁중을 감독하지만 내정에서는 내각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굴욕적인 내용 등으로 인해 민씨 정권에 반대되는 세력인 흥선대원군을 범인으로 몰아넣기 위한 일본의 음모라는 시각이 주가 되었으나 유길준은 그가 일본 대사관에 수시로 찾아가서 며느리를 죽여달라고 사주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박은식은 그가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조자로 지목하고 감정이 인간의 양심을 가렸다며 비토하였다.[29] 유길준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명성황후 암살을 일본인과 상의한 건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유길준은 친구 윤치호에 의해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력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받았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을미사변에 대해 묵인 혹은 이용당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나 주동자였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1898년( 광무 2년) 1월 부인 민씨[30]의 죽음을 보고, 그도 한달 뒤인 2월에 향년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곳은 운현궁이 아니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오늘날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 있었던 별장 아소당이었다.
을미사변의 일로 아들 고종과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황이라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끝까지 자식으로 생각하며 보고 싶어했지만 고종은 아버지에게 비정할 정도로 냉담하게 대했으며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참여도 하지 않았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죽기 전에 고종 탄신일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고종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의 참석을 거부했고 결국 참석을 못하게 된다. 운명하기 직전 흥선대원군이 한 것으로 많이 알려진 말은 다음과 같다.
주상이 보고 싶구나.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31]
대원군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연신 고종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은 임종 때도 찾아오지 않았다. 참고로 고종은 어머니한테도 냉담하여 어머니의 임종 때도 찾아오지 않아 곁에 없었다. 사실 정확히는 고종의 형 흥친왕이 알리지 않았다고 하나 흥친왕은 알리고 싶었지만 알렸을 때 동생 고종에게 당할 후환이 두려워 안 알렸다고 하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다만 다른 기록에는 흥선대원군의 상여 소리를 멀리서 들으며 고종이 오랫동안 대성통곡을 하는데 이 소리가 대궐 밖까지 들렸다는 기록이 있고 이 통곡소리가 들려올 때 비가 내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천륜에 감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용이 전형적인 야사식이라서 사실일까 싶기는 하지만. 다만 그래도 고종은 부모의 임종 소식을 듣고는 참여하지 않아도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장례를 국장으로 거행해 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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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 흥선대원군의 장례식 |
흥선대원군 묘는 총 4번 이장되었다. 처음에는 사망한 곳인 아소당 별장 뒤뜰에 묻혔다가 다시 정식으로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으로 재이장되었고, 그 후 서울 공덕동[32]과 파주(1908년)로 옮겨졌다가, 1966년에 미군 군사 시설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장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묘역을 '흥원(興園)'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흥선대원군뿐만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다른 가족들 묘가 함께 있었다. 하지만 2005년경에 흥선대원군의 4대손이자 운현궁 5대 종주 이청이 다른 가족들의 묘를 이장하고 화장시켜 한 곳에 모아 놓았다. 연령군 이훤, 낙천군 이영, 은신군 이진, 흥친왕 이희(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이문용(흥친왕의 2남), 이우, 이종의 납골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우와 이종의 묘 사이에는 이청이 자신의 사후 들어갈 예비 납골묘를 두었다.
그래서 '흥원'을 방문하면 무덤을 파낸 흔적이 남아 있는 묘터가 남아 있고 온전히 남아 있는 무덤이 1기 있는데 이 무덤이 바로 흥선대원군 부부의 묘이다. 다른 가족들의 납골묘는 이재면의 묘가 있던 자리에 함께 모셔 놓았으며, 나머지 석물들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박물관 건물 주위에 놓여 있다. '흥원'을 가려면 경춘선 마석역에서 내리면 역 주변에 길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고 도보로 대략 15~20분 소요되며, 가는 길이 복잡하니 주의를 요한다.
[1]
다른 여러 복장으로 그려진 그림목록.
[2]
음력 경진년(순조 20년) 12월.
[3]
양할아버지
은신군의 부인이
남양 홍씨로 홍대현의 딸이다. 참고로 홍대현은 홍대용의 사촌. 그의 제부(여동생의 남편)가 김노경으로, 김노경의 동생 김노영의 아들 김정희를 양자로 삼으면서 남연군과 이종사촌이 된다. 그리고 김정희와 흥선군이 5촌인 것은
남양 홍씨 집안 기준이며 김정희의 양증조모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이기 때문에, 전주 이씨 집안 기준으로는 족보 상
영조의 고손자인 흥선군과 8촌 형제이다.
[4]
군호는
여주시의 옛 지명인 흥양부(興陽府)에서 유래한 것. 왕자군이 아닌 종친군은 보통 생모의 관향을 군호로 삼는다. 흥선군의 모친은
여흥 민씨였다.
[5]
흥선대원군이 첩에게서 낳은 딸을 이호준의 첩이 낳은 아들 이윤용에게 시집보냈다.
[6]
특히 김병국과 김병학이었다.
[7]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의 성을 따서 불린 이름.
[8]
심지어는 "종친들이 말썽 부리는데 고(故) 남연군과 흥인군, 흥선군을 본받게 해야 합니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9]
돈녕부와 종친부의 정과 도정이 아니라 작위다.
[10]
그런데 이건 정말 파격적인 발언인 게 원래 안동 김씨는 대게 시파계인데 시파도 사실 노론에게 갈라져 나왔고 노론은 타 정파에 상당히 배척적인 데다가 남인이 숙종, 영조를 거치며 완전 역당 취급받던 걸 생각하면…
[11]
1,000여 개라는 말도 있다.
[12]
흔히
대동강에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 호를 건져 올려 만들었지만, 의하면 성능은 엄청 안좋아서
한강에 띄웠는데 열자를 움직이고는 멈췄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연료는 숯.
[13]
병인양요 당시 노획한 소총은 장전하는 방법도 모르고 탄약도 거의 없을 텐데 어떻게 시험할 건가?
[14]
세례명은 요한 세례자.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15]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16]
당시 서양의 눈으로 보면 조선은 말 그대로 오지다.
[17]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스테파노
부제가 왜 그토록 칭송받는지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18]
이들은 그야말로 다국적이었다.
독일인 야코브 오페르트와 선장 뮐러,
미국인 물주인 리로이 젠킨스,
길앞잡이를 한
프랑스인 페롱 신부, 조선인 최선일 외 2명, 대부분을 차지한 선원들은
중국인이었다.
[19]
조선시대 사대부를 중심으로 많이 퍼진
회곽묘는 요즘도 가끔 발굴된다. 그 구조를 쉽게 말하면, 조선 전기는 관 위에 석회(…)를 퍼부어
공구리질한 수준에 가까웠고, 조선 후기는 공구리로 만든 관 안에 나무 관을 넣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든 이걸 깨려면 굴착 장비를 들고 와야 한다.
[20]
석회가 하도 두껍게 발라져 있어서
드릴도 제대로 안 들어갔었을 거라고 한다. 지금이야 손쉽게 부술 수 있지만, 그 당시라면 정말 중장비는 끌고 와야 부술 정도. 사실 지금도 회곽묘에 대한 개장이나 이장 작업을 할 때는 드릴을 장착한 포크레인을 동원하는 게 일반적이다. 수작업으로 뚫으려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
[21]
제네럴 셔먼호라는 배는 이른바 무장 상선이다. 그래서 일반적 상선과는 달리 상당한 무장이 되어 있었고
미국은 이 배의 침몰 원인이 조선이라는 것에 전력을 오판하게 된다.
[22]
영국은
인도 제국과
청나라만으로 충분했고,
러시아도
발칸 반도를 못 삼킨 이후엔
중앙아시아로 머리를 돌렸다. 다만 발칸 반도에 진출 못한 이유가 영국이었기에 같은 일을 반복하기는 싫어서 행동에 옮겼을 수도 있다.
[23]
재무부 차관에 해당한다. 상소 한방에 이렇게 승진한 것이다!
[24]
자기 허물을 깨달아 반성하는 일,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
[25]
부산광역시
동아대학교에서 소장 중이다.
[26]
이전까지는 극도의 보수 반외세주의자였지만 이 시점을 기점으로 친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거물급
친일파가 된다.
[27]
도쿄대학 출신 등 고학력자가 섞인 것으로 봤을 때 일반적인 낭인은 아니었다.
[28]
아들이
우장춘 박사다.
[29]
한국통사 제1권 제1장
[30]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천주교 신자였기에 죽기 전에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에 대해 흥선대원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31]
황현의 매천야록 2권에서 "리하응은 병이 위급할 때 리재면을 불러, “내가 주상을 알현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 이렇게 세 번을 말하자 이재면은 죄를 지을까 봐 그 말을 감히 알리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어가가 오지 않느냐고 물은 다음 긴 탄식을 하고 운명하였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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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그날 기사에서는 "흥선대원군이 훙서했다"는 정도로만 나왔다. 그래서인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대원군의 죽음 부분을 거창한 설명 없이 그냥 침상에서 숨을 거둔 모습과 "명성황후의 장례가 치러지고 석 달도 못 되어 대원군도 눈을 감았다. 향년 79세."라는 해설로만 간단히 묘사했다.
[32]
당시 고양군 공덕리 율동 인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