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10-1대 황제
요안니스 2세 Ιωάννης 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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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요안니스 콤니노스 Ἱωάννης ὁ Κομνηνός |
출생 | 1087년 9월 13일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사망 | 1143년 4월 8일 (향년 55세) |
동로마 제국 킬리키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118년 8월 15일 ~ 1143년 4월 8일 (25년) | |
전임자 | 알렉시오스 1세 |
후임자 | 마누일 1세 |
부모 |
아버지 :
알렉시오스 1세 어머니 : 이리니 두케나 |
배우자 | 헝가리의 이리니 |
자녀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마누일 1세 |
종교 | 기독교(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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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110-1대 황제이자 콤니노스 왕조의 3대 황제.당시의 로마군은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내전기와 노르만 전쟁기, 페체네그 전쟁기를 거치며 매우 약해진 상태였는데, 요안니스의 아버지인 알렉시오스 1세가 1091년 레부니온 전투에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후 필로밀리온 전투에서 튀르크와의 전면적인 야전에서 승리 할 수 있음을 입증하면서 간신히 수습된 상황이었다. 요안니스 2세는 아버지가 물려준 군대를 이끌고 공세에 나서 대부분의 야전[1]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재위 기간 동안 로마군을 12세기 최강의 군대 중 하나로 성장시켰다. 요안니스 자신도 자주 친정에 나섰고 격전 중에 부상을 입기도 하는 등 모범적인 야전사령관의 모습을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치럼 제국의 위기를 온몸으로 버텨내고 중흥을 이룩한 극적인 면이나 아들처럼 바실리오스 2세 이후 최대 판도를 이룬 것 같은 화려한 업적이 없어 존재감이 부족한 황제이다. 아예 대놓고 제목부터가 John II Komnenos, Emperor of Byzantium : In the Shadow of Father and Son인 책이 있다. 거기다 누이이자 역사가인 안나 콤니니도 아버지 알렉시오스와 요안니스의 아들인 조카 마누일의 이야기는 많이 남겼음에도, 친동생이자 제위 경쟁자였던 그에 대해서는 기록을 적게 남겨 더더욱 이러한 현상에 부채질하고 있다.
2. 즉위 이전의 생애
그 아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뺨보다 이마가 더 넓었다. 코는 납작하지도, 매부리코도 아닌 중간이었다. 그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서 가장 생기 넘치는 부분은 그의 짙은 검은 눈이었다. (
알렉시아스에서 안나가 그녀의 동생을 처음 본 순간을 묘사한 글)
알렉시오스 1세와
이리니 두케나의 셋째 자식이자 장남으로
콤니노스 가문 최초의
포르피로옌니토스였다. 그러나 누이 둘이 이미 태어나 있었고, 그 중 장녀이던
안나 콤니니와 공동 황제로 선정되어 있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약혼한 상태로
두카스 가문의 차기 제위가 유력했기에 확고한 후계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제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가 1092년 그를 공동 황제로 지목하고
헝가리 왕국의 왕녀인 피로슈커(Piroska)[2]와 약혼하게 된 데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1095년 또는 1097년 사망하게 되자 후계자로서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1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인 하(下) 로렌공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부황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할 때 협상을 위한 인질로 십자군 진영에 보내지기도 했다. 1104년에는 약혼녀인 헝가리의 이리니와 결혼하였다. 2년 뒤인 1106년 첫 자녀로 쌍둥이 남매를 보았는데, 이 때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황태자 부부가 옮겨와 있을 때여서 남매는 포르피로옌니토스임에도 포르피리궁 태생이 아니다. 금슬이 좋았는지 이후 제위를 계승하는 1118년까지 막내 마누일을 볼 정도로 8명이라는 많은 자식을 두었다.
2.1. 제위 계승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가 적법하지 않은 찬탈로,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위에 올랐다고 해도 어찌 내 아들이 아닌
이방인에게 제위를 물려주겠소? (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요안니스 콤니노스' 1장, 알렉시오스의 유언)
알렉시오스 1세는 평생에 걸쳐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정작 황궁 내부는 안정시키지 못했다. 황후 이리니 두케나와 맏딸인 안나 콤니니가 함께[3][4] 요안니스의 자형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요안니스 대신에 제위에 올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1118년에 건강이 악화된 알렉시오스가 죽자 요안니스는 제위를 계승하였으나, 아버지의 장례식을 시작하자 마자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신 황제는 그를 기다리는 음모 속으로 걸어들어갈 뻔 하였으나, 누군가가 사전에 경고해주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낙담하지 않고 차근차근 다음 음모를 준비해나갔다. 요안니스가 제위에 오른 몇달 뒤, 그녀는 남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함께 군대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요안니스가 금문 바깥에 위치한 별궁 필로파티온에 기거하는 동안, 니키포로스가 그를 따르는 귀족들의 사병들과 함께 별궁을 포위해 황제를 끌어내리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에 필로파티온 앞으로 나타난 다른 귀족들과 안나의 사병들과는 달리, 니키포로스가 이끄는 병사는 별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처남에게 달려가 이 음모의 진상을 밝히고 이를 주도한 자신의 아내 안나를 선처해 줄 것을 빌었다. 요안니스는 귀족들과 안나를 잡아들였지만, 관례대로 눈과 코를 상하게 하는 대신 재산만을 몰수하는 관대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요안니스 악수흐에게 안나의 재산을 양도했지만, 이마저도 이후 반환되었다. 쿠데타에 실패한 안나는 결국 체념하고 테오도코스 케카리토메네 수녀원에서 35년간 칩거하며 역사서를 집필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3. 재위 초반, 성공과 좌절
3.1. 룸 술탄국 응징 원정
재위 초반 제국의 안보는 나름대로 안정적이었다. 주변의 국가들은 서로 싸우고 있거나,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있었다. 황제는 바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룸 술탄국을 몰아내고 아나톨리아 서남부를 수복하려 했다. 당시 룸 술탄국은 다니슈멘드의 압박으로 약해져 있었다. 다니슈멘드의 아미르 가지 2세가 할리스 강 유역에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며 룸 술탄을 위협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아나톨리아 내의 튀르크족들의 정세도 급박해졌다. 이들은 룸 술탄국과 다니슈멘드 영토 사이를 오가며 양자에게 군사력을 제공했다. 이들은 프리기아(Phrygia)와 피시디아(Pisidia) 사이의 넓은 지대를 유린하며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 있었는데, 이곳은 그들이 발흥한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이나 이미 정착해있던 아나톨리아 중부의 고원지대와 다르게 목초지가 넓고 기후가 온화했다. 이들은 여름과 가을엔 이곳에 사는 로마인들에게 소작을 놓고, 겨울에는 뗄나무와 목초를 베게 하는 착취를 계속하고 있었다. 튀르크인들은 선황의 치세동안 제국령을 침탈하면서 그 도상에 있는 라오디키아(Laodikea)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아나톨리아 서남부의 동로마 항구들과 도시들이 고립되어 육로로 통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가장 큰 위기에 처한 곳은 항구 아탈레이아였다.아탈레이아와 니케아를 잇는 육로 통행을 복구하기 위해 황제는 출병을 감행했다. 먼저 그는 요안니스 악수흐에게 병력을 떼어 주어 리쿠스(Lycus)와 라오디키아로 급속 행군하게 하였다. 이 소규모 병력은 로마의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공성 병기를 준비해 놓음으로써 적이 방어할 시간을 빼앗았다. 튀르크멘 지도자 아부 샤라는 아나톨리아 중부로 도망쳤고, 첫 공격에 라오디키아는 바로 함락되었다. 황제는 그곳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요새를 건설하는 작업을 시작해, 아나톨리아 중남부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황제는 이 시기에 중앙군을 악수흐에게 맡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5] 악수흐는 중앙군을 이끌고 늦가을까지 소조폴리(Sozopolis)와 메안데르 강 중부를 재탈환했다. 또한 이 지역에 도로와 요새를 수리하여 안정화시키는 작업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거의 50km에 이르는 지역이 요새화되거나 도로로 연결되었다.
3.2. 베로이아 전투
1120년, 악수흐는 다시 아나톨리아 서남부로 향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그들의 아나톨리아 재수복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찾아왔다. 레부니온 전투로 약화되었던 페체네그족이 다시 세력을 키워 30여년 만에 제국의 국경선을 넘은것이다. 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트라키아를 향했고, 불가리아 테마의 많은 마을들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아직 악수흐가 이끄는 주력군이 마르마라 해를 건너지 못한 상황에서 황제는 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해 사회 혼란을 조성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수백명의 바랑인 친위대가 포함된 80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거의 네배에 달하는 페체네그 군을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트라키아의 베로이아 지역에서 대치했다. 황제는 현명하게도 페체네그의 족장들에게 저자세로 나가면서 막대한 선물과 도나우강 이남의 통행권을 제공하고 강화 조약을 체결할 것처럼 행동했다. 페체네그의 족장들이 황제의 제안에 대해서 논의하는 동안, 때맞춰 도착한 악수흐의 주력군이 그들을 덮쳤다. 서로 비슷한 두 군세는 베로이아의 벌판에서 혈전을 벌였다.자세한 상황은 베로이아 전투 참조.
3.3.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
황금뿔 만에 있는 베네치아의 무역 조계는 선황 때의 조약으로 거의 무관세의 혜택을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는 제국의 시전 상인들과 그 조합들은 원로원을 통해 베네치아인들의 특권을 취하해달라는 청원을 계속해오고 있었다. 마침 노르만인의 위협이 주춤해진 상황이었기에, 막 제위에 오른 요안니스는 도박을 감행해보기로 하였다. 1118년, 그는 베네치아의 원수 도미니코 미카엘에게 더이상 옛 통상 특권은 유지되지 않는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 보호 무역을 시작했다. 이에 분노한 베네치아는 수년간 기회를 노리다 70여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드리아 해를 가로질러 제국의 서부로 향했다. 이들은 6개월간 제국 서부 해안의 주요 요새 코르푸를 공성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2세가 무슬림들에게 사로잡혀 베네치아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기에 공성을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베네치아는 코르푸를 얻지 못하고 우르트메르로 향했다.예루살렘 왕국의 혼란이 정리된 1125년, 마침 동로마 제국이 전선을 확장시켜 해로 방어에 틈이 생기자 에게 해에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주요한 조선소가 있던 레스보스(Lesbos), 히오스(Chios), 로도스(Rhodos), 사모스(Samos), 안드로스(Andros) 등이 점령당하거나 타격을 입었다. 제국은 이에 대응하여 북 에게 해에 있는 림노스(Lemnos)에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1126년 봄, 북진하는 베네치아 함대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로마 해군 간의 해전이 일어났다.[6] 이 전투 이후 베네치아 측에서는 통상 특권을 재승인 받는 대신, 점령지를 반환하고 로마 해군을 지원하는 내용의 평화 조약을 제안했다. 피해도 컸지만 다른 영토 수복이 급했던 제국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알렉시오스 1세가 지휘 체계를 개편한 이후, 해군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던 요안니스는 이 전쟁을 계기로 해군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의 지방 함대 사령관인 드룬가리오스(Droungarios)들 위주로 움직이던 해군은 더욱더 해군 총사령관인 메가스 둑스(Megas Doux)에게로 집중되었다. 해군 관할지도 기존의 에게 해의 섬에서 더욱 확장되었고, 개편된 해군의 운용과 유지에 걸맞게 세제도 바뀌었다. 덕분에 1120년대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에 휘둘리던 로마 해군은 마누일 1세의 치세 초에만 수백여척의 원정 함대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위세가 절정에 이른 마누일 치세 후반에는 베네치아를 포함한 주변 국가 모두를 압도하는 동지중해 최강의 해군으로 성장하게 된다.
3.4. 헝가리, 세르비아, 달마티아 원정과 하람 전투
1095년부터 헝가리는 칼만, 알모스 형제의 불화로 왕위 계승전 상태에 있었다. 알모스와 그의 아들 벨러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쳐 친척 피로스카 태자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알렉시오스와 요안니스 부자는 그들에게 마케도니아의 영지를 내 주었고, 이곳은 반 칼만 헝가리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칼만은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의 헝가리 반군을 용인했지만, 그의 형제이자 두 번째 헝가리 왕인 이슈트반 2세는 알모스를 추방할 것을 요구하며 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1128년, 헝가리군은 베오그라드와 니소스, 소피아 그리고 필리푸폴리를 공격하고 북방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즉시 반격에 나섰다. 도나우 강의 함대와 이스쿠르 계곡의 가도를 따라 행군한 두 개의 제국 중앙군은 도나우강 북방으로 도하하는 헝가리군을 추격했다. 이슈트반은 풍토병에 걸린 상태에도 일사불란하게 군대를 지휘해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하람의 요새에 진을 쳤다. 이에 황제는 도나우 강과 네라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함대를 이용해 몰래 도하하였고, 이슈트반의 헝가리군은 불시의 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자세한 전개는 하람 전투 항목에서 볼수 있다
이후 이슈트반과 헝가리군을 지원하려 봉기한 세르비아인들은 라스키아(Rascia)의 족장 볼칸의 지도 아래 로마인들을 공격했지만, 그들의 반격은 제국에게 있어 산발적인 반란에 불과했다. 1130년경이 되면 세르비아 반군은 대부분 포로로 잡히고, 아나톨리아의 새로 건설된 도시에 농경지를 받고 정착하게 된다.
4. 재위 중반, 치세의 절정
4.1. 다니슈멘드 토벌전
서방이 다시 안정되자 황제는 다시 동방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룸 술탄국이 몰락하고 다니슈멘드 왕조가 강성해지고 있었는데, 아미르 가지는 멜리테네, 앙키라, 카스타모뉘(Kastamonu), 강그라(Gangra) 등을 점령했으며, 1130년에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제압하고 안티오키아의 공작인 보에몽 2세[7]의 목을 은상자에 담아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낼 정도가 되었다. 1130년,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요안니스는 전면전을 개시했다. 그는 원정을 통해 파플라고니아, 강그라 등의 아나톨리아 중부를 수복하였고 카스타모뉘를 공성전하여 점령하였다. 황제는 다니슈멘드에게 핍박받던 로마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구출하여 아나톨리아 서부에 재정착시켰으며, 심지어 튀르크 아미르들까지 황제에게 자발적으로 항복하게 만들어 다니슈멘드에게 칼을 돌리게 했다. 이들은 대부분 투르코폴레스라고 불리는 모태 정교회 신앙의 투르크족들이거나, 로마인의 황제보다 다니슈멘드를 더 혐오하고 있던 룸 술탄국 귀족들이었다. 그 동안 황제의 동생 이사키오스는 그가 원정을 떠난 틈을 타서 제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미기 위해 제국의 적들을 연대시키려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떠나고 말았다. 수년간 이어진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특히 1133년에는 황제가 직접 참가하는 개선식을 수도에서 열 정도가 되었다.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문부터 성 소피아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광장에 비단이 수놓였고, 수십만에 이르는 인파가 황제의 개선을 보러 쏟아져나왔다. 바랑인 친위대와 제국의 중앙군은 반짝이는 금박, 청동 미늘 갑옷을 입고 행진했으나, 황제 자신은 검소한 치장의 개선 마차에 성모상을 실은 채로 걸어서 개선에 참가했다. 요안니스 1세의 치세 이후로 이런 거대한 개선 행진은 처음이었다. 시민들은 화려한 개선식과 황제가 가져온 승리에 열광했다.
1134년, 그는 다시 중앙군을 아나톨리아 깊숙히 진군시켰다. 함께 종군하던 황후가 풍토병으로 죽었지만, 행군은 짧은 장례식 이후 멈추지 않았다. 더군다나 1134년 다니슈멘드에서는 수장인 가지 아미르가 죽게 되어 혼란이 일어났고 강그라와 주변 지역이 쉽게 정복되었다. 요안니스는 새로운 정복지에 2000여명의 주둔군을 배치하고 돌아갔다. 대부분이 정교회 신자이던 지역 사람들이 다시 점령지로 모여들었고, 여기에 제국의 사민 정책이 이어지면서 아나톨리아 서부는 융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로마 제국과 다니슈멘드와의 전면전은 1130년부터 1135년까지 거의 매년 이루어진 원정이 대체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4.2. 안티오키아를 수복하다
1136년, 제국의 위협이 되는 시칠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모략이 성공하면서 서방이 안정되자, 황제는 염원하던 안티오키아를 회복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1137년). 안티오키아 공국은 보에몽 1세의 데볼 조약 이래로 명목상 로마 제국의 신하였지만, 바로 다음 공작인 탕크레드부터 이를 부정하며 제국과 적대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안티오키아 공작과 황제는 서방과 십자군의 우르트메르를 이어주는 유일한 육로인 킬리키아에서 계속해서 대립했다. 이곳은 본래 로마 제국에 속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로마인들이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아르메니아를 평화적으로 합방하고 주민들을 정착시킨 영토였다. 아르메니아의 척박한 산악지대보다 킬리키아가 마음에 들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이곳으로 대거 이주해왔고,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소아시아의 패권을 놓치는 1070년대에 들어서는 그 이주가 절정에 달했다. 혼란에 빠졌던 제국이 겨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1100년대에 들어서 이곳은 각각의 독립 아르메니아인 토후들이 로마, 안티오키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공국의 편을 들며 난타전을 벌이고 있었다. 1137년 당시 이곳의 패권을 쥔 국가는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공국이었다. 군주 레오 1세의 통치 아래 이들은 타르소스, 아다나, 시스(Sis), 모프수에스티아(Mopsuestia) 등의 주요 로마 거점을 빼앗고는 공작을 칭하기 시작했다. 이 거점들은 그 해 제국의 손에 다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레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몽이 모프수에스티아를 제외한 세 도시를 도로 빼앗고 로마인들의 촌락 수십 곳을 약탈했다.다니슈멘드의 준동을 어느 정도 억제한 요안니스는 4만 5천의 대군을 몰아 동방 원정을 감행한다. 레오 1세는 황제의 대군에 대항하지 못하여 산악 지대로 숨어 들어갔고,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도 꼬리를 뺄 수 밖에 없었다. 1138년 초, 바랑인 친위대와 페체네그족 부대를 중심으로 한 황제의 대군의 안티오키아의 성벽을 두들겼다. 중앙군이 성을 공성하는 동안 로마인들의 용병들은 황제의 명령 하에 레몽이 한 방식과 똑같이 안티오키아 공국의 촌락들을 약탈하여 응징했다. 더 우려스러운 사실은 그들의 동쪽 측면에서 장기 왕조의 군대가 북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서로 적을 두게 된 안티오키아 공작은 결국 황제에게 항복했다. 황제는 제국이 무슬림의 영토를 정복하여 그의 새 영지로 줄 것을 약속하는 대신, 안티오키아를 다시 제국령으로 다시 가져왔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주교에는 라틴 총대주교 대신 쫒겨난 정교회 총대주교를 다시 불러들일 것을 명했다. 이 때가 바야흐로 요안니스의 짧은 전성기였다.
5. 제위 후반, 고난과 죽음
5.1. 샤이자르 공방전
레몽을 위해 정복할 지역은 모술과 알레포 주변의 샤이자르라는 지역이었다. 튼튼한 성채로 둘러싸인 이곳은 시리아의 주요 요충지였다. 1138년, 동로마군을 중심으로 한 4만 8천의 군대와 성전 기사단까지 동원한 연합군은 사이자르를 두들겼지만, 외성을 파괴하는 것 외에는 성과가 더뎠다. 레몽이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와 짜고 동로마군이 공성할 동안 태업을 하기로하고, 이를 통해 황제에게 안티오키아를 가질 명분을 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황제가 공성에 회의감을 느끼는 동안 조슬랭과 레몽을 비롯한 라틴 기사들은 주사위 놀이나 하며 시간을 때웠다.외벽이 날아간 사이자르 수비군으로서도 더 이상 버티기엔 어려웠다. 결국 사이자르 영주는 기독교도인과 성 십자가의 조각을 넘기고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성을 온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이자르를 레몽에게 할양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 속에서, 라틴 귀족들은 황제가 조약을 위반하였다고 안티오키아의 주민들을 선동하였다. 결국 황제가 안티오키아 성내에서 소규모 주둔군과 함께 휴식하는 동안, 조슬랭 2세와 레몽의 주도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게다가 제국의 대장군이자 황제의 자형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시리아의 풍토병으로 생사가 위중한 상황이기까지했다. 황제는 라틴 귀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교묘한 태업과 선동을 통하여 레몽은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서의 명맥을 지켜낼 수 있었다.
5.2. 허무한 죽음
요안니스는 다시 동방 원정을 바랐으나 주변 상황은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다니슈멘드의 에미르 가지의 후계자인 말리크 모하메드 가지(Melik Mehmed Gazi)가 새로이 부상하여 트라페준타의 둑스가 일으킨 반란과 연대를 꾀했기 때문이었다. 반란을 진압한 황제는 원정을 준비했다. 그 동안 안티오키아 공국의 패악질은 멈추지 않았다. 황제가 귀환한지 4년도 채 되지 않은 1142년, 이제는 안정적으로 제국령에 편입한 아다나와 모프수에스티아 사이의 아르메니아 공국 영토를 계속해서 약탈한데다, 제국령인 키프로스 섬 주변에서 해적질을 자행한다는 보고까지 입수한 상황이었다. 황제는 친서를 보내 약탈을 중지할 것을 명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리스 황제를 운운하는 모욕적인 괴서들 뿐이었다. 결국 황제는 다시 우르트메르를 향해 진격했다. 이번 원정에는 그의 세 아들인 황태자 알렉시오스, 둘째 황자 안드로니코스, 넷째 황자 마누일까지 대동한 5만의 대군이 참가했다. 이번에는 공국 신민들의 민심마저 제국 쪽에 가 있었다. 기독교 신민들은 원래 정교회 신자들이었던데다, 레몽의 지속된 실정으로 라틴 귀족들에게서 마저 황제의 친정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레몽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저번 원정 때처럼 반 제국 폭동을 일으킬 만한 여론 자체가 조성될 수 없는 상태였다.[8]그러나 이번에는 신이 레몽의 편이었다. 진격 중인 제국군의 군영에서 장남이자 공동 황제 알렉시오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고, 그를 운구하기 위해 배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던 차남 안드로니코스마저 시체에서 감염되었는지 같은 병으로 사망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레몽은 그 참사로 황제가 병력을 돌리길 간절히 바랐지만, 황제는 아랑곳 않고 킬리키아를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제는 까마귀의 둥지로 불리는 두 봉우리의 산에서 이어지는 광활한 계곡에 주둔지를 세우고 사냥에 나섰다. 홀로 떨어진 멧돼지와 마주친 황제는 투창의 날을 짐승의 가슴팍에 찔렀다. 멧돼지가 앞으로 뛰쳐나오자, 창은 짐승의 배를 관통했으나 창을 쥐고있던 황제의 손은 이에 감각을 잃고 튕겨나갔다. 그 손은 황제가 어깨에 매고있던 독화살이 담긴 전통(箭筒)에 부딫혔다. 전통이 엎어지면서 쏟아진 화살 중 하나가 황제의 새끼손가락과 약지사이의 피부를 찔렀다. 맹독이 몸에 퍼져나갔고, 급소를 덮쳐 황제의 몸을 차갑게 마비시켰다. 이후 황제는 사냥을 중지했다. -.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역사' -
황제는 사냥에 나서서 거대한 멧돼지와 조우했다. 킬리키아와 타우로스 산맥 주변은 멧돼지가 넘쳤다. 어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창을 세워쥔 채로 멧돼지가 뛰쳐나오던 중에 조우했다고 했다. 창날이 멧돼지의 가슴팍에 파고들자, 성난 멧돼지는 더 앞으로 달려들었다. 이로써 황제의 팔은 멧돼지의 난폭한 저항에 옆으로 밀렸으며, 그가 매고있던 화살이 든 전통을 이상한 방향으로 밀어버렸다. 그의 팔에 화살촉이 긁히자 바로 상처가 났다. -요안니스 킨나모스, '요안니스와 마누일 콤니노스의 업적'-
킬리키아에 주둔하는 동안 황제는 사냥에 나섰다가 독이 발라진 화살촉에 손을 찔려버렸고, 상처에서 생긴 패혈증으로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직접 키워온 충성스러운 군대는 사흘을 넘게 철야 기도를 올리며 그의 쾌유를 빌었지만, 이미 기력을 잃은 그는 충성스럽던 병사들을 하나 하나 호명한 후, 막내 아들 마누일을 후계로 지목하고 죽고 말았다. 성지 안티오키아를 수복하겠다는 그의 염원은 그의 막내아들에게 넘어갔다.
요안니스 악수흐를 위시한 로마군은 제위 계승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정벌을 멈추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회군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레몽의 목숨은 다시 연장되었다.
6. 여담과 평가
재위 내내 궁정 분위기는 검소하고 경건하였으며 보수적이었다고 한다. 만일 친족들이나 관료들이 화려한 저택을 짓고 부를 과시하며 여기에 황제를 초대하면 황제가 사치에 대해 잔소리하는 것을 들어야 했었다고 한다. 즉위 전에는 8남매나 되는 자식을 두었으면서 황제가 되고 난 이후에는 자식을 한 명도 못 본 점이나, 말년까지 영토 수복 의지를 불태웠던 것까지 보면 숨막히게 성실한 사람이었던 듯 하다. 또한 극형과 처형을 멀리하고 관대한 성품을 가졌었기 때문에 당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덕분에 안정적인 기반을 물려받은 마누일은 편했을 것이다.그러나 검소한 요안니스가 포기하지 못한 과시가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황금으로 반짝이는 투구였다. 그를 직접 목격한 경험담을 적었거나, 동시대에 살며 전해들은 바를 서술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가 전장에서 황금 투구를 쓰고 돌격을 진두지휘하거나 공성 병기를 직접 밀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사실 중흥을 구가하는 제국에서 황금 투구 하나 정도가 무슨 문제일까 싶을수도 있지만, 돌격의 선봉이나 공성 병기 이동 같은 최전선에 선 상황에서 그런 반짝이는 고가품을 입고 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순간을 연출할수 있었다. 요안니스 황제처럼 진두지휘형이었던 장군과 귀족들은 제국에도, 근동에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귀족 전사들은 전투 직전에 비단 망토나 반짝일만한 장신구를 놓고 가거나 군마에 말아두거나 흙을 묻혀서 색을 바래게 만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로마 제국의 카타프락토이들이 그러했다는 기록은 물론, 고대에서부터도 흔히 기술되어온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 투구 덕에 일선의 병사들이 황제와 함께 싸운다는 사실을 알고 사기가 상승했는데 나중에는 이 투구가 마치 광역 버프처럼 묘사되어서 '그 황금 투구가 반짝이기만 해도 병사들이 용기충천했다.'같은 기록이 남았다. 당연히 대신들은 만류했겠지만...[9]
부황인 알렉시오스 1세 치세 도중부터 시작된 기사 - 왕의 이미지 구축을 왕조의 프로파간다에 본격적으로 써먹은 황제이기도 하다. 아버지 알렉시오스가 외모나 성격상 이에 어울리지 않았고 제국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아 대내외적으로 군인 - 찬탈자 가문의 황제 혹은 교활하고 이기적인 군주로 비춰졌던 반면, 요안니스는 공동 황제 시절부터 부황이 마련해준 기반과 타고난 능력을 배경으로 치세를 시작하여 쌓은 업적을 선전에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모범적인 가장, 관대한 군주, 앞장서는 군인, 신앙심 깊고 검소한 황제라는 동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불리는 요안니스 2세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 이러한 선전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상은 마누일 1세에게 이어져 크게 다르지 않은 이미지로 선전되었고, 알렉시오스 2세에게 상속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역사가인 기욤 드 티레에 의하면 키가 작고 추했으며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고 한다. 물론 동방과 서방의 사이가 안 좋았던 걸 감안하면 어느 정도 참작은 가능하다. 그러나 아버지인 알렉시오스 1세도 작은 체구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베네치아인들이 제국과 전쟁 중에 흑인 노예를 세워놓고 황제라며 모욕한 사례를 보면 기욤의 말도 신빙성이 있다. 다만 외모와는 반대로 관대하고 신앙심이 깊은 점 등은 높이 평가받아 '칼로얀니스Kalioannes(아름다운 요안니스)'라는 별칭도 얻었다.
[1]
야전이 아닌 베네치아와의 해전이나
사이자르 공방전 정도를 제외하면 1140년의 니오케사리아(Neo Caesarea) 전투 정도만이 예외가 된다.
[2]
개명 후의 이름은 이리니(
헝가리의 이리니)이며, 아르파드 왕조
라슬로 1세의 딸이다.
[3]
황후인 이리니는 두카스 가문의 여식이었는데, 이리니를 비롯한 두카스 가문 사람들은 선대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렉시오스를 황태자를 보호하기 위한 섭정 황제 정도로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알렉시오스가 황제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고, 족벌주의적 인사에 의해 콤니노스 가문의 힘이 강해진데다 황자인 요안니스를 보게 되자 점점 차기 제위가 위태로워지게 되었다. 결정타로 공동 황제 콘스탄티노스 두카스가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후 1094년에 사망하자 이러한 구상은 무너지게 된다.
[4]
안나는 어린 시절을 약혼자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시어머니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황후가 되리라 믿고 있던 데다 머리도 비상한 그녀는 그 믿음이 친동생에 의해 깨어지고 친근했던 약혼자가 사망하자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랬으니 모녀는 뭉치기 쉬웠다.
[5]
이는 안나 공주의 새로운 쿠데타 음모를 감지했다는 설, 수도의 치안이 불안정했다는 설 등이 있다.
[6]
전투의 결과에 대해 베네치아 측 사서에서는 승리라고 주장하고, 로마 측에서는 저지했다라고 주장한다. 제국 측 기록 대로 저지했다고 치더라도, 패배했거나 상당한 피해를 입은것으로 보인다
[7]
타란토의 보에몽으로도 불리는
보에몽 1세의 아들이다.
[8]
출처 : 비잔티움 연대기 3권 -쇠퇴와 멸망- (존 줄리어스 노리치 저)
[9]
당시 전쟁터에서 부상자들이나 전사자들의 장비를 벗겨가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 과정이 인도적이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물론 황제씩이나 되어서 홀로 고립되어 쓰러지겠냐는 말은 나올 수 있는데, 황제는 아니더라도
난전 중에 휩싸여 전사한 왕은 나중에 나온다. 신하들이 기겁해서 말린 것도 이유가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