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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국 및 외국인정책 통계월보 內 체류외국인 연도별·국적(지역)별 현황 기준. |
1. 개요
재한 인도인은 인도 국적을 보유한 상태로 한국에 체류하는 인도인들을 가리킨다. 인도계 한국인은 인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 혹은 인도계 부모를 두되 한국 국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다. 편의상 해당 문서에서는 재한 인도인과 인도계 한국인을 함께 서술한다.2. 전근대
한국에 최초로 정착한 인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허황옥이다. 하지만 해당 인물이 인도 출신이 맞는지, 북인도 출신인지 남인도 출신인지 관련해서는 아직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가야의 무덤 유적지에서 남인도 타밀족과 유사한 하플로그룹 유전자를 보유한 인골이 발굴되었다는 점이다. 고대 한-(남)인도 문화교류 : 주첸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허황옥 이외에도 전근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추정되는 인도인들은 모두 불교 승려(이른바 호승胡僧)이다.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온
허황옥 일행에 의해 가야에 불교가 전해졌고 이게 초전이라는 남방전래설이 한 축이긴 하지만 여하튼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건 중국으로부터다. 하지만 오해가 있다.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건 맞지만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건 중국 승려가 아니라 ‘호승(胡僧)’이었다.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 삼국사기〉(1145년 전후 편찬), 〈 해동고승전〉(1215년 전후 편찬), 〈 삼국유사〉(1285년 전후 편찬) 공히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진(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면서’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사기〉와 〈유사〉의 기록에는 없지만 〈해동고승전〉에는 순도의 출신이 ‘ 서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백제 불교의 시작도 역시 서역의 승려였다. 〈사기〉에는 “(384년) 9월 호승 마라난타가 진(晉)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고승전〉에는 마라난타가 ‘ 천축’으로부터 중국으로 들어왔고 다시 백제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인도’를 가리킨다. 최근에는 마라난타의 출신지를 놓고 간다라라는 설과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는 설이 맞붙어 지면상에 주장과 반박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왜 중국의 스님들이 아니라 인도 출신(상황에 따라서는 중앙아시아)의 스님들이 한반도로 들어왔을까?
이에 대해서는 우선 중국불교사를 살펴봐야 한다. ... 중국에 불교가 수입된 건 서기 65년 전후로 본다. 그런데 터를 잡는 데는 또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대략 기원후 2세기~ 3세기 정도부터 산스크리트 경전의 한역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토대가 닦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또 이후 100년의 기간은 격의불교 시대였다. 불교 본래의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 구마라습(344~413)이다. 격의불교의 시대와 구마라습의 신역(新譯)이 있던 기간 사이에 대체로 중국에 불교교단이 성립된 것으로 보는데 호승 불도징(佛圖澄, 233~348)과 그의 제자인 도안(道安, 312~385)이 활동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계를 받는 한족이 없었는데 335년 전후로 한족 출가자들이 출현하게 된다.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372년과는 불과 40년 차이도 나지 않는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와는 또 50년 차이도 나지 않는다. 중국 교단이 이제 막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려고 했던 때 해외에 포교승까지 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불교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인도 혹은 중앙아시아 승려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여하튼 삼국 모두 중국에 교단이 안착되기 전부터 불교를 수입하기 시작했으며 불교를 전한 이들은 한족 출신이 아니라 모두 인도 혹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도 호승은 꾸준히 한반도를 찾아왔다. 천축국 승려 마후라가(태조 12년, 929년)를 비롯해 서천축의 홍법 대사(태조 21년, 938년) 등이 잇따라 방문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송나라 승려의 입국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한다.
출처 :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 이방인 선지식 호승의 유산
불교 전래에 대해서는 〈 삼국사기〉(1145년 전후 편찬), 〈 해동고승전〉(1215년 전후 편찬), 〈 삼국유사〉(1285년 전후 편찬) 공히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6월에 진(秦)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면서’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사기〉와 〈유사〉의 기록에는 없지만 〈해동고승전〉에는 순도의 출신이 ‘ 서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백제 불교의 시작도 역시 서역의 승려였다. 〈사기〉에는 “(384년) 9월 호승 마라난타가 진(晉)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고승전〉에는 마라난타가 ‘ 천축’으로부터 중국으로 들어왔고 다시 백제로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인도’를 가리킨다. 최근에는 마라난타의 출신지를 놓고 간다라라는 설과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는 설이 맞붙어 지면상에 주장과 반박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왜 중국의 스님들이 아니라 인도 출신(상황에 따라서는 중앙아시아)의 스님들이 한반도로 들어왔을까?
이에 대해서는 우선 중국불교사를 살펴봐야 한다. ... 중국에 불교가 수입된 건 서기 65년 전후로 본다. 그런데 터를 잡는 데는 또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대략 기원후 2세기~ 3세기 정도부터 산스크리트 경전의 한역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토대가 닦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또 이후 100년의 기간은 격의불교 시대였다. 불교 본래의 뜻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 구마라습(344~413)이다. 격의불교의 시대와 구마라습의 신역(新譯)이 있던 기간 사이에 대체로 중국에 불교교단이 성립된 것으로 보는데 호승 불도징(佛圖澄, 233~348)과 그의 제자인 도안(道安, 312~385)이 활동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계를 받는 한족이 없었는데 335년 전후로 한족 출가자들이 출현하게 된다.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372년과는 불과 40년 차이도 나지 않는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와는 또 50년 차이도 나지 않는다. 중국 교단이 이제 막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려고 했던 때 해외에 포교승까지 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불교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인도 혹은 중앙아시아 승려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여하튼 삼국 모두 중국에 교단이 안착되기 전부터 불교를 수입하기 시작했으며 불교를 전한 이들은 한족 출신이 아니라 모두 인도 혹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도 호승은 꾸준히 한반도를 찾아왔다. 천축국 승려 마후라가(태조 12년, 929년)를 비롯해 서천축의 홍법 대사(태조 21년, 938년) 등이 잇따라 방문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송나라 승려의 입국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한다.
출처 : 현대불교(http://www.hyunbulnews.com) 이방인 선지식 호승의 유산
3. 규모
한국내 남아시아인 공동체의 경우, 재한 파키스탄인, 재한 네팔인, 재한 방글라데시인, 재한 스리랑카인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인도인의 경우에는 그 수가 적은 편이다. 국내 공단 지역의 경우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인도 출신은 보기 힘들다. 대신 이들은 주요 대학, 연구소, 인도 요리 레스토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20세기 인도인들의 디아스포라는 주로 영어권인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인도인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친인척들이 거주하는 영미권 국가로 이민을 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이민을 희망하는 인도인들의 수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1]
21세기 들어서 한인관계에서 교류가 증가하면서 한국에 체류하는 인도인 이주 노동자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박사후연구원과 교수, 연구원, 엔지니어, 기술직 등 이공계 인력[2], 인도 요리 전문 요리사 외에도 배우, 기자, 가수[3] 등으로 넓히고 있다.
인도계 한국인도 있으며 이름까지 한국어로 개명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원광조가 있다.
4. 문화
4.1. 언어
인도가 워낙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는 나라이다보니, 재한 인도인들이 사용하는 모어 역시 제각각이다.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볼리우드 등의 영향으로 힌디어를 할 줄 안다. 그리고 이들은 펀자브, 하리아나, 델리, 우타르 프라데시, 비하르, 구자라트 등 북인도 출신도 많지만 마하라슈트라 뭄바이, 카르나타카 벵갈루루, 서벵골 콜카타, 타밀나두 첸나이 등 남부, 동부, 서부 출신들도 있다. 인도는 영어가 공용어인 국가이지만, 북인도 출신 중에서는 의외로 영어를 잘 못하는 경우도 많다.펀자브, 하리야나 지방 출신의 경우 펀자브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재한 파키스탄인들 중 펀자브 지방 출신들과 펀자브어로 소통이 가능하고, 이스트 벵골 출신들의 경우 방글라데시인들과 벵골어로 소통하기도 한다. 다만 파키스탄의 국어인 우르두어가 힌디어와 문자만 다르고 입말은 대부분 호환되는 이유로, 재한 파키스탄인, 재한 네팔인들과 소통할 때 힌디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긴 하다.
소수이지만 카슈미르어 혹은 타밀어, 말라얄람어, 칸나다어, 텔루구어, 아삼어 화자도 존재한다.
4.2. 종교
대부분의 재한 인도인들이 힌두교를 믿고 있다. 무슬림이나 시크교, 기독교 신도들도 있다. 드물지만 파르시, 자이나교,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신도들이 한국에 체류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 내 체류하는 파르시나 자이나교도들의 경우 대개는 인도 기업의 한국 지사 임원들이나 엔지니어, 대학 교수들이다. 한남동에는 힌두교 사원이 있으며, 포천에는 소규모의 시크교 사원도 있다. 다만 한국에 체류하는 시크교 신도 인구가 워낙 적은 관계로 시크교 터번을 쓰고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만나기 힘든 편이다.한국에 체류하는 인도인 중 힌두교도들은 브라흐민이나 크샤트리야 등 상층 카스트 출신[4]이 많다. 보통 한국으로 오는 인도인들은 요리사 아니면 이공계 직종 종사자, 화이트 컬러 직종 종사자, 유학생이 많은데, 전통적으로 힌두교 문화권에서 요리사는 상층 카스트들이 맡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아랍에미리트 등의 인도인 이주노동자 사회 내에서 같은 인도계 사이의 카스트에 따른 차이가 갈등이 상당한 수준인 반면, 한국의 경우 인도인들끼리 서로 만나기도 힘들고, 대부분 상층 카스트 출신이다보니 이런 부분에서 문제가 적은 것도 있다.
나갈랜드 등 세븐시스터즈 지역 출신 티베트-버마어족 계열 소수 민족 출신 기독교인들이 국내 개신교 선교 단체의 도움이나 초청을 받아 오는 경우도 많은데, 이들은 대개 한국인들과 외모가 무척 유사해서 굳이 자신을 인도 국민이라고 밝히지 않는 이상, 한국 사람 입장에서 이들이 인도인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다. 실제로 국내에서 이들과 결혼한 한국인들도 있고 이들도 기독교 신자다.
5. 여담
인도의 정치 지형이 북인도의 인구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힌두교 민족주의 정당 인도 인민당, 그리고 여기에 반대하는 여타 지역[5]으로 갈리기 때문에, 재한 인도인들 사이에서도 지지 정당 관련한 갈등이 적지 않은 편이다. 가급적 서로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같은 직장에서 일을 안 하려 들 정도이다. 인도 사회의 지지 정당 및 성향 차이는 단순한 정치 지지 진영 차이를 넘어서 민족 감정와 연계된 지역 감정, 종교적 차이 등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6]식문화나 언어 등이 겹치는 이유로 재한 인도인 사회와 재한 파키스탄인, 재한 네팔인 사회와는 연계가 강한 편이다. 인도 요리, 파키스탄 요리, 네팔 요리 식당 등이나 소규모 영세 사업장을 운영하는 경우에는 동업을 하거나 아니면 아니면 한 업장에서 인도,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경우[7]도 드물지 않다. 재한 인도인들 중 종교가 이슬람인 경우는 한국 내에서 파키스탄인들, 방글라데시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경우가 많다.
6. 유명인
7. 관련 문서
[1]
그나마 싱가폴, 홍콩의 경우
영국령 인도 제국 시대 공무원 등으로 인도인들이 자주 이주했지만 한국은 영국의 식민 지배라는 역사를 공유한 바 없으므로, 인적 자원의 접촉 빈도는 더 적을 수 밖에 없었다.
[2]
이들은
서울,
부산,
대구 등 대학이 많은 곳이나
수원,
용인,
청주,
구미,
포항 등 사기업 연구소가 많은 곳에 거주하며,
KAIST로 인해
대전에도 거주한다.
[3]
대표적으로
오징어 게임을 통해 이름을 알린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 코리아 헤럴드 기자
선저이 꾸마르, 전원 외국인인 케이팝 걸그룹
블랙스완의
스리야가 있다.
[4]
브라흐민 중에서도 최상위 계급인
카슈미리 펀디트들도 꽤 많이 보이는 편이다.
[5]
남인도 + 펀자브 + 세븐 시스터즈
[6]
굳이 인도가 아니어도 미국,캐나다 같은 다민족 국가가 아닌 경우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
[7]
참고로 인도인이나 파키스탄인들은 한국에서 만났을 때 서로 자연스럽게 힌디어나 우르두어로 대화하는 것과 다르게, 방글라데시인들의 경우 인도인들하고는 힌디어로 대화해도 파키스탄인들과는 우르두어로 대화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