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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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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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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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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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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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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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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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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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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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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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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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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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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전투 |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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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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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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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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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레닌그라드 공방전 Блокада Ленинграда Leningrader Blockade Siege of Leningr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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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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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41년 9월 8일 ~ 1944년 1월 27일 (총 871일) | ||
장소 | ||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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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핀란드|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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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독일 국방군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리터 폰 레프| ]](북부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에른스트 부슈| ]](제16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제56기갑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에리히 회프너| ]](제4기갑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제41기갑군단장)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크 폰 퀴힐러| ]](제18군 사령관) ● 핀란드군 [[틀:깃발| ]][[틀:깃발|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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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게오르기 주코프| ]](총사령관)
결과 | ||
소련의 승리 | ||
영향 | ||
독일 국방군 북부집단군의 후퇴 | ||
전력 | 725,000명 | 930,000명 |
피해규모 | 사상자 579,958 명 |
● 소련군 - 사망, 포로, 실종 1,017,000명 - 부상 2,410,000명 ● 민간인 - 사상자 642,000명 - 피난 400,000명 |
[clearfix]
1. 개요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1분 전개 |
2. 전투 경과
2.1. 1941년
1941년 6월 22일부터 시작된 독일 국방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허를 찔린 소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독일군은 세 개 집단군으로 나눠서 소련을 공격했는데, 이 때 북부집단군이 공격한 도시가 바로 레닌그라드였다. 레닌그라드는 제정 러시아 시절(당시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부터 수도[4]이자, 러시아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중심지이면서 유럽을 향한 창구 역할을 했다. 게다가 소련 정권으로서도 1차대전 당시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5]의 권력 장악으로 러시아 공산 정권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레닌 사후 그의 이름이 붙은 이 도시는 수도 모스크바 못지않은 상징적, 이데올로기적 중요성도 넘치는 곳. 이곳의 함락은 독일이나 소련에게나 매우 큰 사건이 될 터였다.하여간 그 결과 소련 측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다음 날 동원령을 선포해 방위군을 조직하고 도시 요새화 작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어린이와 여자를 미리 피난시켰는데, 오히려 이렇게 피난한 사람들보다 진격해 오던 독일군을 피해 레닌그라드로 몰려오던 이들이 훨씬 많았다. 어쨌든 레닌그라드 사령부에서는 기존 소련군과 피난자와 시민들 사이에서 뽑은 의용군을 포함한 병력을 방어선에 배치해 전투에 대비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지휘한 북부집단군의 레닌그라드 공격은 7월 중순에 시작되었는데, 그 동안 소련군을 탈탈 털어오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에 상당히 견고하게 구축된 방어선에 좀처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빡친 아돌프 히틀러는 7월 27일에 북부집단군 사령부를 시찰하면서 레프에게 12월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1939년 11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벌어진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 겨울전쟁)으로 영토의 10%나 소련에게 빼앗긴 핀란드는 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핀란드는 여러나라에 도움을 타진했으나 영국, 프랑스 등이 사실상 거절한 가운데, 1941년 7월말 독일과 동맹을 맺고 독소 전쟁에 참전하여 레닌그라드를 공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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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포격을 당하는 레닌그라드 시가지 | 공습 이후의 레닌그라드 시가지 |
하지만 그 시점에서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로 더 이상 진격하기 보다는 겨울전쟁 때 잃었던 카렐리야 지방의 수복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독일 육군 사령부의 참모인 알프레드 요들이 핀란드군에게 레닌그라드 공세를 강화할 것을 요청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어쨌든 독일군은 9월 8일에 자신들의 병력만으로 시의 북부에 위치한 라도가 호수에 다다르면서 도시의 육상 통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오시프 스탈린도 자신의 친구라는 이유로 계속 시의 방어를 맡겨놓았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더 놔둘 수 없었고,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후임자로는 그 때 막 스탈린과 작전 계획을 놓고 언쟁을 벌이다가 총참모장 직책에서 사임한 게오르기 주코프를 임명해 보냈다. 하지만 주코프는 독일군의 맹렬한 공세 속에서 레닌그라드로 부임하러 가는 동안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그 사이인 9월 12일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식품창인 바다예프 창고(Бадаевские склады)가 독일군의 폭격으로 전소되면서 식량 수급에 적잖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창고가 목재여서 독일군의 폭격을 받아서 전소되어버렸다. 바다예프 창고에 저장된 밀과 설탕은 각각 3천 톤, 2500톤에 달했는데, 창고에서 건진 밀과 설탕은 각각 1천 톤과 900톤에 불과했다고 한다. 단 이 창고가 전소되어 식량 수급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바다예프 창고에 저장된 밀과 설탕은 레닌그라드에 저장된 분량의 4.3% 정도였다. 9월 12일 전까지 육체 노동자(рабочий), 사무직 노동자(служащий), 아동 및 부양가족(Дети и иждивенцы)에게 각각 일일 600g, 400g, 300g의 빵이 배급되었고, 이렇게 9월 2일부터 11일까지 레닌그라드에서 소비된 빵이 일평균 2천 톤 가량이었므로, 밀 3천 톤은 레닌그라드 주민을 1.5일(10월 이전 기준)에서 3일(10월 이후 기준. 배급량이 1천 톤으로 감소함)은 먹일 수 있는 분량이었다. 한국에서는 어째선지 바다예프 창고가 아니라 바다예프 상점이라고 잘못 알려졌다.(Склад는 러시아어로 ' 창고'라 한글로 상점 번역은 오역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독일군도 히틀러의 오락가락하는 지휘 방침으로 혼선을 빚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레프에게 북부집단군에서 전차 부대들을 빼내어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인 9월 19일에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시 경계를 약 10km 앞둔 지점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여기서 계속 공격하기 보다는 포위망을 풀지 않은 채 레닌그라드에 억류된 시민들과 군인들이 모두 굶어죽도록 내버려두는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공공연히 '우리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 따위는 관심 없다'고 떠벌이면서 소련군과 시민들을 조롱했다.
그렇다고 주코프의 노력으로 사기를 회복한 소련군은 그 정도로 약체화되지는 않았다. 11월 10일에 레닌그라드 방어군은 시 북동부에 위치한 티흐빈을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하는 첫 반격전을 벌여 성공했고, 독일군은 핀란드군과 합류할 위치를 잃었다. 이 때부터 레닌그라드의 상황이 소련 바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영국과 여타 영연방 국가들은 핀란드를 추축국으로 규정하고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2.2. 1942년
하지만 그 시점에서 소련군도 마찬가지로 포위망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있었다. 군기를 잡아놓았던 주코프는 티흐빈 탈환 직후 모스크바 방어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스탈린에 의해 모스크바 방어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다시 떠났고,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1942년 1월 7일에 제2충격군과 제54군을 동원해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철도 요충지인 류반을 탈환하고 제18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류반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공세는 너무 무리한 작전이었기에, 결국 제2충격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사령관인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은 독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6]블라소프는 이후 독일로 압송되어 포로 생활을 했다. 포로 생활 중 친독파로 전향해 반공 성향의 러시아 해방군을 이끌었고 결국 전쟁 후반기에 소련군에게 잡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블라소프 본인은 자신의 전향 이유를 "제대로 준비 안된 병사들을 무리하게 작전에 밀어넣고 희생시키는 체제에 회의를 느꼈다."라고 설명한 적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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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에서 노획해 모스크바로 가져온 극초기형 티거를 살펴보는 주코프와 보로실로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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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루델에게 공격받은 직후, 유폭 직전의 마라. | 유폭으로 박살난 마라. |
이후 6월부터 9월까지는 독일군 포병들도 다시 시내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소련군이 라도가 호수를 통해 레닌그라드에 보급 물자를 계속 보내자 8월에는 독일군과 이탈리아 왕국군, 핀란드군 연합으로 소함대를 조직해 라도가 호수의 보급선을 공격해왔고, 소련군도 이에 맞서 제8군과 재건된 제2타격군을 동원해 라도가 호수 남부에서 독일군을 공격하는 시냐비노 공세를 시작했다. 거의 2개월 가까이 계속된 이 공세도 역시 실패해 11만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지만, 독일군이 핀란드군과 연합하기 위해 계획하고 있던 노르트리히트(북쪽의 빛) 작전을 무산시키는 전략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포위망은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을지언정 여전히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고, 소련군도 이를 뚫기 위해 계속 공세를 가했지만 큰 성과는 얻지 못한 채 소강 상태가 되었다. 독일군 포병들도 레닌그라드 시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파상적인 포격을 계속 가했지만, 시는 결코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텼다.
2.3. 1943~44년
이렇게 1942년이 지난 뒤, 1943년 1월에 소련군은 또다시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스크라 작전으로 이름붙은 이 공세는 성공을 거두었고, 라도가 호 주변의 땅이 소련군 손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포위망의 일부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스크라 작전의 성공으로 힘을 얻은 소련군은 그 직후인 2월에 주코프의 지휘로 이보다 더 대규모의 공세인 북극성 작전을 벌였지만, 독일군을 일부 격퇴하는 데 그치고 다시 교착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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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계속 독일군의 산발적인 공세가 이어졌지만, 이미 전황은 소련에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소련군도 1944년이 되자 이번에는 기필코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을 모두 풀어버리겠다는 기세로 맹공격을 퍼부었고, 물자와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은 결국 1월 말에 레닌그라드로부터 60~100km 떨어진 지점까지 밀려나 시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포위망이 사라지면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소련군은 물러난 독일군을 향해 반격을 개시했지만, 소련 남부 전선과 달리 레닌그라드의 고위 장교들은 대부분 전쟁 내내 방어전에 매진했던 탓에 세련된 공세 전략을 습득하지 못했고, 때문에 소련군의 공격은 굉장히 서투르게 진행되었다. 독일군의 방어선 역시 소련군의 예상보다 견고하게 구축되어 소련 보병들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2월 20일엔 소련군이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26일에는 공식적으로 레닌그라드가 해방되었음이 선포되어 포병대가 예포를 쏘며 승리를 자축했다.
900일간의 봉쇄기간 동안 독일군은 공중폭격 10만 7158발, 포탄 14만 8478발을 레닌그라드에 쏟아 부었다. 거의 하루에 300발 꼴이다.
3. 시민들의 참혹한 생활상
독일군의 포위로 보급이 끊긴 뒤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의 삶은 매우 처절해졌는데, 특히 독일군의 폭격으로 식량 저장고가 없어지면서 당장 먹을 식량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빵 배급량은 하루 125g까지 줄었다.[9] 난방 연료인 석탄이나 석유, 가스의 공급도 끊겼고,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유서 깊은 목조 가구나 건물들을 장작으로 쓰기 위해 부숴야 했다. 당연히 엄청난 수의 아사자와 동사자가 발생했고, 의약품이 부족해지면서 병에 걸려 죽어가는 시민들도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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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가죽으로 만들어진 가방이나 신발을 푹 끓여서 젤리로 만들어 먹기도 했고[10], 쥐나 곤충을 잡아 먹거나 들판에서 캐낸 풀이나 나무에서 벗겨낸 나무껍질로 연명하기도 했다. 도로를 제외한 공터들에 빼곡히 심어서 재배한 양배추를 맹물에 끓여서 썩은 빨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11] 억지로 먹기도 했다. 소련의 공식 기록에서는 부정되고 있지만, 죽은 사람의 시체에서 채취한 인육을 먹는 식인 행위까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소련군은 이 식인 행위를 단속하고 범인들을 처벌하는 임무 또한 수행해야 했다. 1942년 2월에만 600명이 식인 행위로 체포되었다. 이 단속임무를 수행했던 이가 바로 테렌티 시티코프 당시 여단정치위원으로, 후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북한에서 소군정 사령관을 지냈다.
이렇게 삶이 가장 원시적인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레닌그라드의 시민들은 강인했다.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살아남은 시인 올가 베르그골츠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서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자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썼다.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었기에 그런 자유를 자극했고, 그 자유는 자연 발생적인 융통성, 삶의 강렬함, 섬뜩한 극기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믿기지 않게도, 레닌그라드의 노동자들은 이렇게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모스크바 방어에 사용할 곡사포와 박격포 1,000문, PPS-42 기관단총 4만 5천 정을 만들어 냈고, 이 무기들은 독일군 진지선을 넘어 레닌그라드 밖으로 공수되었다. 소련군도 레닌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라도가 호수가 어는 시기를 이용해 차량을 동원하고 호수 위에 임시 협궤 철도를 가설하는 등의 수단으로 레닌그라드에 물자를 공급했고, 레닌그라드에 난방을 위한 가스를 공급하는 파이프라인을 복구하는데 성공했다. 또 이 기간 동안 탈출을 원하는 시민들의 외부 지역 소개 작업도 이루어졌고, 1942년 봄에는 시민들의 건강과 영양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과학자들 역시 분투했다. 소련 최대의 농업 작물 종자와 표본을 보존하고 있던 파블롭스크 실험국에서는 소련 농업의 미래를 위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종자와 표본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과학자들은 피난을 거부하고 자리를 지켰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종자들에 차마 손대지 못하고 굶어죽거나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파블롭스크 실험국을 지켜낸 이들의 희생으로 소련 농업은 전후 가까스로 회생할 수 있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실험국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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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의용군 |
당시 제대로 된 매장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종이로 된 신분증도 다 낡아 없어져 신원 확인이 불가능해지자 사망자들을 공동 묘지에 한데 매장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피스카료프 공동묘지에는 당시 사망자들 50만 명이 매장되어 있다. 박노자의 할아버지도 공방전 도중에 사망하여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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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묘비에 낫과 망치가 새겨져 있는 곳과 별이 새겨져 있는 곳이 있는데, 전자는 민간인들의 묘지이고 후자는 군인들의 묘지이다. |
레닌그라드가 고향이었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일곱 번째 교향곡을 이 공방전 초기에 독일군에 의해 도시가 포위된 상태에서 작곡하기 시작했고,[12] 이후 포위망이 일시적으로 뚫렸을 때 쿠이비셰프로 피난한 뒤에 완성시켰다. 이 곡은 그 상징성 때문에 아직 공방전이 진행되고 있던 레닌그라드 시내에서 온갖 연주자들을 마구 긁어모아 임시로 급조한 관현악단이 동원되어 연주하기도 했고,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승인은 없지만 지금도 '레닌그라드'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임신 중이었던 산모가 출산한 아이들은 살이 찌기 쉬운 체질이 많았다고 한다. 산모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보니, 태아는 바깥 세계를 먹을 것이 부족한 세상으로 인식하고 먹은 것을 비축해두는 체질로 적응했다는 것. 굶으면서 다이어트를 하면 살이 찌기 쉬운 체질이 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이러한 현상은 공방전 초기보다는 후반에 태어난 아이들일수록 더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또한, 태아 시기의 영양분 부족으로 내장 장기가 덜 발달한 영향으로 이들은 같은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질병의 위험이 높으며,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많아 수명에 대한 최종 통계는 나오지 않았으나 예상되는 수명도 비교적 짧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위종의 아내로 알려진 엘라자베타 발레리아노브나 놀켄도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아사했다.
3.1. 생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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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언제나 태양은 뜬다!
'생명의 길' 기념비 中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라도가 호수(Ла́дожское о́зеро, 줄여서 Ла́дога)는 독일군과 핀란드군에게 완전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다른 지역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라도가 호수 얼음 위에 가설되었던 통로는 생명의 길(Дорога жизни)이라 불리며 문자 그대로 레닌그라드의 생명선 역할을 하였다. 이 길을 통해 이를 통해 1600만 톤의 물자가 공급되었으며, 시민 137만여 명이 대피할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 전선을 지키기 위해 병력과 군수품이 보충될 수 있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라도가 호수의 수송로를 통한 이 거대하고 처절했던 작전에서 운전사들은 짧게는 35km, 길게는 무려 135km에 이르는 거리를 수송해야 했는데, 소련군 운전병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자원해 레닌그라드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물자를 수송했다. 독일군과 핀란드군이 라도가 호수변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있어서 한정된 항구밖에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 이 때 사용되었던 오시노베츠(Осиновец) 항구에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기리는 Дорога жизни를 이름으로 하는 박물관이 있다.'생명의 길' 기념비 中
하지만 이 생명의 길은 역시 너무도 많은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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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영어 영상 |
트럭 운전사들은 이런 역경 속에도 시민들을 살리고 레닌그라드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얼어붙은 호수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오갔다. 이들의 분투 또한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묘사한 군가 '라도가 호수에 대한 노래'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남성 베이스 솔로 버전 듣기 군가라고는 하지만 거의 레닌그라드의 민중가요 비슷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의 레닌그라드 버전이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아래 동영상에서도 퍼레이드가 끝나고 연주되며, 후렴구에 Дорога жизни(생명의 길)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레닌그라드 해방 75주년 기념 퍼레이드
물론 소련이 무작정 트럭 운전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아니었다. 라도가 호수 수송은 최적화를 전공한 수리경제학자들이 참전한 엄연한 군사 작전이었다. 30대 대학 교수였던 레오니트 칸토로비치가 생명의 길의 안전 문제를 총괄했으며 기온과 얼음의 두께를 측정한 뒤 자동차들 사이의 최적의 거리를 계산했다. 너무 짧은 간격으로 많은 차량이 다니면 얼음이 깨져서 차량이 가라앉을 것이고, 너무 긴 간격으로 다니면 물자를 충분히 수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칸토로비치는 얼음길을 지나는 차량들 사이를 직접 오가며 얼음이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관련 내용 그는 이 업적으로 레닌그라드 수호 훈장을 받았으며 종전 후에도 최적화 연구를 계속해 197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3.2.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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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타냐 사비체바의 사진 |
독일군의 공습 이후 작은 언니 니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는 타냐에게 니나의 수첩을 주었고 타냐는 제냐의 죽음 이후 제냐가 죽은 날짜를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타냐는 그 전에도 두꺼운 공책에 일기를 쓰고 있었지만, 나무도 석탄도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땔감 대용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저 수첩이 유일하게 남은 일기장이 되었다.
당시 기술자 공부 중이던 니나는 해당 수첩에 밸브나 보일러 설비 등에 관한 정보를 적어두는 용도로 사용했다. 수첩은 반 정도 비어 있었는데, 비어 있는 부분은 마치 전화번호부 수첩처럼 가장자리에 색인 용으로 키릴 문자가 적혀 있었다. 타냐는 날짜 순서대로 일기를 적지 않고, 자신이 적는 첫 글자의 페이지에 내용을 기록했다.[14]
Женя умерла 28 дек в 12.00 час утра 1941 г.
(제냐 언니가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 30분에 죽었다.)
Бабушка умерла 25 янв. 3 ч. дня 1942 г.
(할머니가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죽었다.)
Лёка умер 17 марта в 5 час утра в 1942 г.
(료카 오빠가 1942년 3월 17일 아침 5시에 죽었다.)
Дядя Вася умер в 13 апр 2 ч ночь 1942 г.
(바샤 삼촌이 1942년 4월 13일 밤 2시에 죽었다)
Дядя Лёша 10 мая в 4 ч дня 1942 г.
료샤 삼촌이 1942년 5월 10일 낮 4시에 (죽었다)[15][16]
Мама в 13 мая в 7.30 час утра 1942 г.
엄마가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에 (죽었다)[17]
그렇게 모친까지 사망하였고, 모친의 시체까지 수거된 이후[18] 타냐는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장이 짧아서 그런지 감정이 북받쳐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여기서부터는 글자가 이전에 비해 좀 더 커진다.(제냐 언니가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 30분에 죽었다.)
Бабушка умерла 25 янв. 3 ч. дня 1942 г.
(할머니가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죽었다.)
Лёка умер 17 марта в 5 час утра в 1942 г.
(료카 오빠가 1942년 3월 17일 아침 5시에 죽었다.)
Дядя Вася умер в 13 апр 2 ч ночь 1942 г.
(바샤 삼촌이 1942년 4월 13일 밤 2시에 죽었다)
Дядя Лёша 10 мая в 4 ч дня 1942 г.
료샤 삼촌이 1942년 5월 10일 낮 4시에 (죽었다)[15][16]
Мама в 13 мая в 7.30 час утра 1942 г.
엄마가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에 (죽었다)[17]
타냐 사비체바는 1942년 8월에 139명의 아이들과 함께 소련군의 레닌그라드 시민 소개 작전을 통해 니즈니노브고로드의 크라스니 보르라는 마을로 옮겨졌지만,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악화된 상태에서 장결핵으로 투병하다가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습으로 사망한 줄 알았던 작은 언니 니나는 무사히 살아남았고, 역시 레닌그라드 밖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진 작은 오빠 미하일과 함께 레닌그라드가 해방된 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타냐의 일기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 일기를 세상에 알리며 활동했고 2013년 9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타냐의 일기를 알리고 더불어 레닌그라드 공방전 희생자 추모단체를 이끌며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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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냐의 일기는 곧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상징이 되었고, 타냐가 묻힌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샤트키 공동묘지, 생명의 길, 피스카료프 공동묘지와 사비체바 가족의 자택에는 타냐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만들어졌다. 여러 모로 러시아판 안네의 일기이다. 타냐의 일기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당시 증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4. 기타
현직 러시아 대통령 역시 이 공방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 정확히는 가족 이야기인데, 푸틴의 가족 역시 공방전 당시 갖은 고생을 겪었다. 아버지는 독일군의 포격으로 한쪽 팔을 잃었으며,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은 전쟁통에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참극을 겪었다고 한다. 둘째형 빅토르는 레닌그라드 봉쇄 중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물론 푸틴은 전후에 태어난 늦둥이였기에 전투를 직접적으로 겪지는 않았다. 푸틴의 어머니는 독일군조차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그들을 증오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정했다고 한다. 전쟁의 참혹함이 공격당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공격하는 자도 지옥에 빠뜨린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강구트급 전함이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성능 이상의 전과를 올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본래 제1차 세계 대전 출신인 이들은 초기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전간기에 재개장을 거쳤음에도 태생적인 설계 때문에 진즉 퇴역해야 했던 할머니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강구트급 1번함 오크탸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Октябрьская революция, "10월 혁명")와 2번함 마라는 레닌그라드의 발트 함대 군항에서 발트 함대를 지휘하며 적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기함인 마라가 레닌그라드 함락에 최대의 걸림돌이라 판단한 독일군은 슈투가 편대를 파견해 공격했지만 마라는 초기 드레드노트급이라도 명색이 전함인 데다 견고한 방공망까지 합쳐져 유효타를 입히지 못했다. 이에 루프트바페는 최후의 수단으로 한스 울리히 루델을 불러 오크탸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를 대파하고, 전용 1.4t 폭탄을 목숨 걸고 급강하폭격을 시도해 마라에게 맞춰 침몰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마라는 배의 3분의 1이 해안가에 침저했지만 수심이 낮아 몇몇 포탑은 가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마라를 콘크리트로 그 자리에 고정시키고 육군 관측반이 보내오는 좌표로 포격을 계속 퍼부으며[20] 레닌그라드가 해방되는 날까지 인민의 적들에게 2천 발에 가까운 인민의 불벼락을 선사했다. 독일군은 어렵사리 급강하폭격을 성공시켜 가라앉힌 배가 다시 물 위로 기어올라와 포격을 퍼붓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2년간의 포위전 동안 이들은 레닌그라드의 수호신이라 불리며 레닌그라드가 포위전을 끝까지 버텨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마라의 12인치 주포는 당대 해전에서는 한물간 취급이었지만, 305mm의 체급은 항구에 박혀 레닌그라드를 방어하는 데에는 여전히 유효했던 것이다. 덕분에 마라는 해전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전함이 요구하는 전략병기로서의 역할을 한계 이상으로 해낸 사례로 꼽힌다. 오크탸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 또한 대파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강구트급은 레닌그라드 해방 이후에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2004년작 영화 다운폴에서 삭제장면중 소년병 페터가 도망을 가다가 어느 소련 군인과 마주치는데 해당 소련 군인은 페터가 소년이라는 이유로 권총을 버리고 빨리 도망가라고 한다. 하지만 당황한 페터의 권총에 맞고 쓰러진다.[21] 해당 소련 군인의 군복을 보면 레닌그라드 방어 훈장를 패용하고 있다. 당시 소련군들 사이에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살아남았고 해당 훈장을 수여받았다면 영웅, 전설로 인정받았다. 해당 소련 군인은 독일군에게 적개심을 충분히 가질만 하지만 인정을 베풀다가 권총에 맞았다. 만약 레닌그라드에서 죽을고비를 넘기고 승리를 맛보기전에 패터의 권총을 맞고 죽었다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4.1. 만약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독일군 손에 점령당했다면?
리처드 오버리의 명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주제. 약 100만의 북부집단군이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치르는 대신 레닌그라드를 완전 점령한 이후 모스크바 전투 시 북부에서 양익 작전을 실시했거나 무르만스크, 아르항겔스크 등의 무기대여법 북극해 항로를 마비시켰다면 41년의 소련은 도미노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상기 서적에서는 "러시아의 옛 수도의 결사 항전이 새로운 수도의 목숨을 살렸다."라는 평을 하고 있을 정도. 그래서인지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는 영웅도시(ГОРОД ГЕРОИ)라는 칭호가 붙어있다.
[1]
이탈리아 왕국 해군이 포격 지원
[2]
레오니트 고보로프 이전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3]
독일군에 생포.
[4]
원래 수도는 모스크바였지만
표트르 대제 때 천도했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다시 모스크바로 천도.
[5]
1차세계대전 발발 직후 황실에서는 민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대책 중 하나로 수도의 명칭을 상트페테르부르크(독일식 이름)에서 페트로그라드(러시아식 이름)로 개명한다.
[6]
블라소프는 이미 포위된 상태에서 사령관으로 부임했으므로 2충격군의 전멸에는 책임이 없다.
[7]
그야말로 전설로 남은 소련 최고의 수훈함이다. 자세한 사항은 하단 참조.
[8]
러시아 혁명을 지원하고
겨울궁전을 포격한 것으로 유명한 순양함. 이 공적들을 인정받아 현재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박물관함으로 정박해 있다.
[9]
참고로 1945년경
루뱐카의 죄수들에게 배급되던 빵의 정량이 하루 450g이었다.
[10]
러시아의 전통 요리 중에서 돼지 족발을 푹 삶아 만드는 고기 젤리의 일종인 홀로데츠(холодец)라는 음식이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만들어 먹었다.
[11]
아무런 처리를 가하지 않은 양배추는 매우 역한 냄새가 난다.
[12]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3]
예브게냐(1909년 생. 애칭 제냐), 레오니드(1917년 생. 애칭 료카), 니나(1918년 생), 미하일(1921년 생. 애칭 미샤)과 타티야나.
[14]
예를 들어 첫 번째 일기인 "Женя умерла 28 дек в 12.00 час утра 1941 г."는 "Ж"로 시작하므로, 수첩의 "Ж" 섹션에 기록되어 있다.
[15]
이유는 모르겠으나 원문에는 "죽었다"(умер)가 빠져 있다. 타냐가 적던 중 빼먹은 것으로 추정.
[16]
앞의 문장과 마찬가지 글자인 "Д"로 시작하므로 바샤 삼촌이 죽었다는 내용은 수첩의 오른쪽에, 료샤 삼촌이 죽었다는 내용은 왼쪽에 적혀 있다.
[17]
여기도 원문에 "죽었다"(умерла)가 빠져 있다.
[18]
이후 모친의 시체는 윗집에 살던 이웃인 니콜라옌코 부부가 치웠다. 당시 시신들은 전부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치웠는데, 남편 아파나시 니콜라옌코가 근처 유치원에서 두 바퀴 달린 손수레를 빌려와 타냐 모친의 시체를 싣고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가지고 갔다. 니콜라옌코 부부에게는 딸 베라가 있었고, 타냐와 베라는 전쟁 전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나 전쟁 이후 타냐의 모친이 죽기 전까지 둘은 만나지 못했다. 니콜라옌코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도 타냐는 이미 너무 허약해진 상태라 바실리예프스키 섬까지 같이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19]
출처: 러시아어 위키피디아 번역
[20]
마라의 관측장치는 배가 폭파될 때 파괴되어 사용할 수 없었다. 포탑만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굴린 소련군의 근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21]
해당 소련군인은 권총을 맞고 쓰러지자 러시아어로
쌍욕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