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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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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중세2.2. 근세2.3. 19세기2.4. 20세기2.5. 21세기
2.5.1. 2010년대
2.5.1.1. 2018년2.5.1.2. 2019년
2.5.2. 2020년대
2.5.2.1. 2020년2.5.2.2. 2021년2.5.2.3. 2022년2.5.2.4. 2023년2.5.2.5. 2024년
3. 문화 교류
3.1. 러시아 문학과 우크라이나어 문학과의 관계3.2. 러시아어3.3. 정교회 갈등
4. 교통 교류5. 여론 조사6.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 소수민족7. 대사관8. 관련 기사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대한 문서다. 양국은 중세 키예프 루스 시절에는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의 공동조상인 고대 동슬라브어를 쓰고 동일한 정교회를 믿었으나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키예프 대공국이 멸망한 후 분화되어 서로 다른 역사를 걸어왔다. 양국은 동슬라브 문화권에 속해 있다.

러시아 내에는 상당수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들이 거주하는데, 사실상 러시아인들 중 친척 중 한두 명 이상이 우크라이나계 또는 카자크 혈통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든 수준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1] 종교적인 면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기본적으로 정교회를 믿지만, 서부 우크라이나, 특히 갈리치아 자카르파탸 지역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키예프 루스 멸망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벨라루스와 서부 및 중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타협책으로 기존 정교회의 형식을 유지하되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를 설치하였는데, 훗날 러시아 제국 폴란드 분할을 통해 벨라루스와 중부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하면서 점령한 지역의 동방 가톨릭 교회 신도들을 정교회로 환원시켰지만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점령하여 동방 가톨릭 교회를 그대로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2018년까지는 모스크바 총대주교 산하의 우크라이나 정교회, '키이우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 '독립 우크라이나 정교회'라는 세 분파로 갈렸다. 하지만 2018년 12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독립교회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자, '키이우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독립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서로 교단을 합쳐 '우크라이나 정교회'로 재탄생, 이듬해 1월에 정식으로 독립교회로서 발족했다. 그래서 2019년부터는 우크라이나의 정교회는 독립교회인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모스크바 산하의 자치교회인 '우크라이나 정교회' 둘만 있다. 자세한 내용은 2018년 정교회 분열 항목 참조.

2021년 12월부터 양국 사이에서 우크라이나 위기가 일어나자 갈등이 생기고 있다. 러시아측은 우크라이나 국경 부근에 군대를 배치시켰다.

결국 2022년 2월 24일부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단교하였다.

2. 역사적 관계

2.1. 중세

개요 부분에 상술된 것처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라는 역사를 공유한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사후 키예프 루스의 공후들 사이의 상속 분쟁, 흑해 무역로의 쇠퇴 등을 계기로 중심지 역할을 맏았던 키이우의 역할은 약화되었다. 서기 12세기 이래 지방 공후들이 점점 더 부를 쌓고 세력이 강해지자 이들은 키이우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를 알려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1169년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 공후가 아들을 보내 키이우를 정복하고 장장 3일간에 걸쳐 약탈한 이후, 키이우로 공후좌를 이동하지 않고 계속 블라디미르-수즈달에서 통치를 지속한 것을 들 수 있다. 보골륩스키가 과거 키예프 루스의 지도자들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블라디미르를 선호한 것은 이런 12세기 루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한 편 갈리치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유목민 세력을 무찌르며 부강해졌다. 갈리치아 공후들은 기존의 드니프로 강 교역로를 포기한 대신 다뉴브 강 교역로를 사용하였다. 키이우와 쇠퇴와 지방 공국들의 번성은 루스인들의 인구 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13세기 중반 들어 키예프 루스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한 것은 루스 사회의 분화를 가속화하였다. 키이우와 체르니히우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완전히 황폐화되면서 루스인들은 단일한 구심점을 잃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은 루스의 두 곳의 공후통치 중심을 인정했다. 하나는 상술한 블라디미르-수즈달[2], 또 다른 하나는 갈리치아-볼히니아[3]였다. 두 공국은 '루스'라는 명칭을 공유했지만, 서로 다른 지정학적 궤적을 밟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몽골 제국과 더 멀리 위치해있었던, 그리고 유럽 가톨릭 세력의 지원이 가능했던 갈리치아-볼히니아의 경우 몽골의 내정간섭도 적었고, 수탈도 훨씬 적었다.
몽골군 사령관이 갈리치아-볼히니아의 다닐로에게 갈리치아를 몽골에 넘기라고 요구하자 그는 바투 칸을 만나러 그의 수도인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찾아갔다. 이는 야를리크(몽골 칸이 수여하는 공국을 통치하는 조건적 허가장)를 받기 위한 것이었다. 바투 칸이 다닐로에게 "당신은 우리의 음료인 쿠미스를 마시는가?라고 묻자 다닐로는 "저는 아직 마셔보지 않았으나, 칸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마실 의향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방식으로 연대기 작가는 다닐로가 몽골에 복종하고 몽골 엘리트에 포함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기독교도인 루스 공후가 이교도인 몽골 칸에게 충성을 서약한 것에 비판적인 연대기 작가는 몽골에 대한 루스 공후들의 행동의 세 양태를 기록했다. 첫 사례는 체르니히우 공국의 미하일로 공에게 연대기 작가는 최고의 찬사를 표했다. 그는 관목에 절을 하라는 바투 칸의 요구를 우상숭배라고 거절했다가 바투 칸에게 살해되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야로슬라프는 두 번째 양태가 된다. 그는 관목에 절을 하는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연대기 작가로부터 배교자나 다를 바 없다는 멸시어린 비판을 받았다. 갈리치아-볼히니아의 다닐로가 세 번째 양태가 된다. 그는 몽골 지배를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았고, 여기에 완전히 굴복하지도 않았다. 다닐로에게 동정적 태도를 보인 연대기 작가는 다닐로가 관목에 무릎을 꿇지도 않고,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지도 않았지만, 쿠미스를 마심으로서 칸의 세속적 권위를 수용한 점을 묘사했다.

사실 몽골은 루스 공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요구한 적이 없으며 전반적으로 정교회에 대해 최대의 관용을 보였다. 그러나 연대기 작가가 세 가지 행동 양태를 구별한 것은 몽골의 권위에 대한 루스 공후들의 협력과 저항의 양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바투 칸의 명령으로 실제 죽임을 당한 미하일로 공은 1239년 몽골군에게 항복하기를 거부했고, 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바투 칸이 보낸 사절을 죽였다. 블라디미르 야로슬라프 공은 이와 대조적으로 루스 공후들 중 제일 먼저 몽골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다닐로는 다른 노선을 택했다. 그는 바투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 서약을 오래 지키지는 않았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역

한 편 키이우에 소재하던 전(全)루스 대주교좌는 몽골 제국의 침략 이후 블라디미르-수즈달로 이전 이후 다시금 모스크바 공국으로 이전되었는데, 루테니아 왕국 시절 갈리치아에 추가로 이른바 대주교좌가 설치되었고, 이는 소(小)루스 대주교좌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대러시아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를 일컫는 명칭 중 하나인 소러시아(말로로씨야)의 어원이 된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확장하는 과정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은 키예프 대공국에 속했던 지역들, 이른바 루테니아에서 킵차크 칸국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몽골 제국과 유럽 가톨릭 국가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갈리치아-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분할 정복되었다. 반면 북부에서는 노브고로드 공국이 세력이 유지하였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이 팽창했다. 노브고로드는 모스크바에 합병당하고 리투아니아는 야기에우워 왕조를 통해 폴란드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2.2. 근세

루블린 조약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연방제로 통일하고, 폴란드의 가톨릭 귀족들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를 믿는 농노들을 착취하거나 아니면 동방 가톨릭 교회로 반강제로 개종시키는 정책을 펄쳤다.

폴란드의 동쪽 변방을 방어하던 우크라이나계 카자크들이 정교회 탄압 및 가혹한 농노제 강요에 반감을 품고 봉기하였고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요청에 따라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당시 흐멜니츠키와 대화에 응한 루스 차르국 측의 바실리 부투를린은 차르가 폴란드 왕이 이들을 대한 것보다 더 잘 대해줄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협상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흐멜니츠키는 이에 반대하며 자신들은 왕과 그의 관리들과 협상하는데 익숙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투를린은 선출된 군주인 폴란드 왕이 세습적인 루스 차르와 대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이 차르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결코 맹세하는 일이 없다며, 자신이 카자크들에게 약속한 바에 대해 맹세하기 역시 거부했다. 루스 차르국 군대로부터 가능한한 빠른 원조가 필요했던 흐멜니츠키는 유리하게 협상할 여유도 없이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밖에 없었다.

루스 차르국 군대의 원조에 힘입은 흐멜니츠키의 카자크들은 우크라이나 영토에 절반에 가까운 지역을 점령했다. 드니프로 강을 경계로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러시아가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카자크들은 처음에는 러시아를 해방자로 환영했지만,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문화를 탄압하고 농노제를 강요하며 강제 노동 징발을 일삼자 자신들이 러시아인과 다른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각성하였다. 특히 표트르 1세 시대 상당수 카자크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동원될 당시 상당수의 카자크들이 식사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태에서 러시아인 관리들의 가혹행위에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상당수가 사망하였던 일이 결정적이었다.
라도가 운하 건설 현장에서는 수많은 카자크들이 병들거나 죽었습니다. 무서운 질병이 아주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데 ... 그러나 작업 감독관으로 배치된 장교들은 레온티예프 여단장님의 지시로 불쌍한 카자크들의 이토록 어려운 사정은 무시한 채, 일하는 그들을 사려분별도 없이 무자비하게 몽둥이로 구타합니다. 게다가 장교들은 카자크들을 밤낮 가지지 않고, 심지어 일요일과 축일조차 가리지 않고 휴식 없이 노역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는 작년에 카자크들의 단지 3분의 1만이 살아서 귀향한 것처럼 이번에도 많은 카자크들이 이곳에서 죽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래서 저는 원로원에 삼가 이 공손한 보고를 올려 통촉하시기를 여쭈며, 엎드려 청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제가 감독하는 카자크 대원들이 운하 작업에서 끝내 파멸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이들이 다른 지역으로 보내져서 새로운 노역에 투입되는 일이 없도록 승락해주시옵소서. 동원된 모든 카자크들이 건강과 기력을 잃어 간신히 살아있을 뿐이기에 이들이 더 이상 어떤 노역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적어도 늦가울 우기가 오기 전인 9월 초에는 그들을 고향으로 보낼 것을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드리옵니다.
연대장 체르냑이 1722년 러시아 원로원에 올린 보고

한 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편입되면서 예수회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4] 우크라이나 정교회 시스템이 러시아의 정교회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키예프 아카데미에서 러시아 성직자들이 라틴어 교회 슬라브어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우크라이나 수도사들을 모스크바로 초빙해 러시아 전례서가 유럽에서 출판된 그리스어 및 우크라이나어 판본과 일치하게 개정하라고 지시했다. 이 사업은 니콘 총대주교가 이어받았다. 차르는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전례와 러시아 정교회 전례를 통합하는 것이 동로마 제국과 같은 로마교회를 재건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권위를 더해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니콘의 개혁 과정에서 성호를 두 손가락[5]이 아닌 세 손가락[6]으로 그어야 한다는 변경이 포함되자, 러시아 각지에서 반발이 일어났는데,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고의식파로 불리게 되었다.

표트르 1세 치세 대북방전쟁 당시에는 이반 마제파 스웨덴 왕국 칼 12세를 원조한 것을 이유로 코사크 헤트만국의 자치권이 박탈되었다. 정작 스웨덴 측에 합류한 코사크 병력은 3,000여 명 규모에 불과했으나 러시아 제국 측에서는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이 여타 유럽 국가들과 힘을 합쳐 러시아 제국을 공격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러시아에서는 폴란드와 다르게 같은 정교회를 믿는 입장에서 종교탄압은 하지 않았으나, 이반 마제파의 봉기 진압 이후 코사크 헤트만국이 해체된 것을 전후하여 자유 농민 공동체인 카자크에도 폴란드와 다름없이 농노제를 강요하였다.
지주 지위의 상승은 농노제도의 확대와 강화를 의미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예카테리나 대제의 통치기간 전체를 특징 짓는 것이었다. 농노제도는 새로운 지역들로, 특히 우크라이나로 퍼져갔다. 예카테리나 정권은 우크라이나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법을 비준해준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농노제도를 본격적으로 확립하는데 도움을 준 그리고 말하자면 농노제도라는 악습을 그 제국 전역에 표준화시킨 책임은 예카테리나의 정부의 있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농노들을 지배하는 그 주인들의 권한에 대해서는, 별로 더 보태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고자 애썼다.

1763~83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카자크 농민들을 대상으로 '지주의 허락 없이 농장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는 법' 그리고 "거주지에 원래 하던 일 그대로 머무를 것을 명령하는" 법이 추가로 제정되었다. 1775년에는 드니프로에 있는 세치(요새)를 철폐하고 돈 강과 우랄 지역의 카자크들의 자율권을 제한시켰다. ... 1760년과 1800년 사이에 농노들이 지주에게 지는 부역은 일주일에 사흘에서 나흘로 어떤 경우에는 닷새로 혹은 그 이상으로 늘어났다.
러시아의 역사 / 니콜라이 랴자노프스키

다른 한편으로 우크라이나계 카자크들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및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투입되어 시베리아와 캅카스 각지에 정착하는데 이들 대다수는 러시아인으로 동화되었다.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문서 참조.

2.3. 19세기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멸망하고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은 갈리치아, 자카르파탸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중부, 서부 지역 상당수가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영토로 다시 편입되었고, 새로 러시아가 장악한 영토에서 동방 가톨릭을 믿던 인구 대다수는 다시 정교회로 돌아갔다. 폴란드 분할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내 우크라이나인 인구 비중은 13%에서 22% 수준으로 증가하였다.

우크라이나의 초르노젬 지대는 러시아 귀족들에겐 노른자위 땅으로 유명했다. 이러한 연유로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 당시 우크라이나 일대의 농노 해방과 토지 분배는 최대한 농민들에게 불리하고 귀족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7] 초르노젬에서 수확한 잉여 농산물들은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으로 흑해 오데사를 통해 영국 등으로 수출되었다.

19세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비교적 검열이 약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우크라이나 동부, 중부에서 러시아 제국에 탄압을 받던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 상당수가 비교적 감시 및 처벌 수위가 약하고 서유럽 최신 학문 사조를 접하기 유리한 갈리치아로 이주했다.[8] 이를 계기로 갈리치아 일대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 역시 19세기부터이다. 그동안 루스인, 루테니아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러시아인 및 벨라루스인과 구분하기 위해 자신들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4. 20세기

우크라이나어 출간물 인쇄, 유통 금지 조치는 1905년 혁명 이후에야 해제되었다. 한 편 20세기 초반 상당수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아무르 강 유역, 연해주 등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알타이, 극동 영토로 이주 정착하였는데 이는 표트르 스톨리핀의 이주 장려 정책에 힘입었던 바가 컸다. 모든 체납금 탕감, 기차표 가격 인하, 5년 동안의 세금 면제, 무이자 대출 등 혜택을 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에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멸망하자 우크라이나 지역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주도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으나, 자체적인 군사력이 약했고 결국 폴란드와 소련 분할 점령되었다. 한 편 네스토르 마흐노가 이끄는 세력 이른바 마흐노우슈치나는 볼셰비키와 힘을 합쳐 러시아 백군의 주요 세력 중 하나인 표트르 랑겔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이후 볼셰비키들은 다시 네스토르 마흐노를 적군으로 삼고 그의 무정부주의 세력인 마흐노우슈치나를 와해시킨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적백내전 당시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러시아 백군 측에 가담하여 농산물을 수탈하러 온 볼셰비키들과 충돌한 것을 귀감 삼아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이 추가로 폴란드 측에 손을 벌리지 못하도록 우크라이나 지역 내 민족어 사용 및 교육권을 보장하는데,[9] 이는 소련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어진다.

1920년에서 22년까지 러시아 극동에서 우크라이나계 이민자들에 의해 젤레나 우크라이나가 생겨났다가 소련에게 멸망했다.

1932년~1933년에 소련의 정책적 오류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후 소련은 나치 독일과 협정을 맺어 폴란드를 분할하기로 합의했고, 곧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하지만 폴란드를 점령한 뒤에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다. 우크라이나는 독소전쟁의 주요 전장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독일군들의 진입 초창기에는 꽃을 들고 다가와서 환영하였으나,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열등 인종 취급하며 물자를 수탈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우크라이나 일대는 독일군의 대량 학살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 다음으로 인구 대비 인명 피해가 심각한 지역이 되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은 패하고 우크라이나는 갈리치아/볼히니아/부코비나/자카르파탸 지역을 얻게 되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국경은 2차 대전 이후 완성되었다. 이를 두고 우크라이나 내 친러파들이나 러시아 입장에서는 소련이 우크라이나에게 영토를 선물하였다거나 고토를 회복시켰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의 일부였다. 크림 반도는 본래 러시아 소속이었으나,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우크라이나 소속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계기로 우크라이나는 1950년대 후반까지 소련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였으며, 이를 달래고자 우크라이나 출신인 흐루쇼프 서기장은 집권 초기인 1954년에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귀속시켰다. 한 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부에는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리스인, 불가리아인의 민족어 교육과 사용이 장려되는 별개의 행정 구역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효과는 주로 농촌 지역에서만 일어났다. 도시 주민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러시아어 교육과 사용을 선호하였다.

80년대 중반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펼쳐지면서 우크라이나도 발트 3국 몰도바, 캅카스 3국만큼은 아니지만 서부지역과 대도시를 중심으로 독립여론이 커져갔다. 다만 1991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독립 여론이 다수를 차지한것은 아니었지만, 1991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부터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로 러시아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소련의 새로운 체제인 주권국가연맹은 국가의 독립된 주권을 보장하는 체제였으므로 소련 해체를 주장한 건 아니었다. 그 와중에 8월 쿠데타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완전 독립의 여론이 압도작이 되었다. 독립 국민투표의 결과로 이러한 여론이 대다수를 차지했음을 입증했다.

12월 8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벨라베자 조약을 체결했다. 92년 1월 1일부터 소련은 해체됐다.

소련 해체 이후 양국은 각각 독립된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1992년 1월 6일에 흑해 함대와 우크라이나에 주둔중이었던 구 소련 병력을 두고 양국이 갈등을 빚었다. #

90년대 후반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영토로 인정하되 러시아군이 크림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2.5. 21세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갈등을 겪었다.

러시아인은 우크라이나를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러시아어에서는 보통 나라이름 앞에 В를 붙이는데, 우크라이나 국명 앞에는 НА를 붙여 말한다. 말하는 방법에서부터 우크라이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지방이라는 인식이 담겼다. 러시아인 스스로뿐만 아니라 러시아 공영방송과 러시아 지배자들도 이러한 인식을 부추긴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푸틴 2022년 2월 21일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대국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를 가리켜 '처음부터 러시아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10] '꼭두각시 정권이 이끄는 식민지'라고, 우크라이나인을 가리켜 러시아인이라고 주장했다. #

러시아 시각에서는 원래는 한 나라이고 같은 민족인데 우크라이나는 떨어져나간 탕아 혹은 나쁜 동생쯤으로 취급한다.[11] 러시아인 상당수는 우크라이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여 ' 소러시아'[12]라 부르면서 소련 붕괴 이후 서방의 농간으로 떨어져 나온, 반드시 러시아로 도로 통합시켜야 할 분리주의 미수복지로 취급하기도 한다. 현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적대적인 관계지만 러시아 가정에 우크라이나 출신 친척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역사적, 혈통적, 언어적, 문화적,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이거니와 (지금은 러시아와 사이가 안 좋더라도) 결국에는 러시아의 품에 들어오게 해야 할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크림 반도 병합을 찬성하거나 동부 우크라이나 병합을 찬성하고 우크라이나를 친러적인 국가로 돌려놓거나 좀 더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크라이나 자체를 러시아에 병합시키거나 친러 괴뢰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금의 독립된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꼭두각시, 서구에 조종받는 괴뢰국 정도로 취급한다.

우크라이나는 반대로 현재 러시아와 관계 절연 및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러시아 방송 송출을 금지했다. 그러나 러시아 언론들은 이상하리만치 우크라이나 국내 뉴스를 자국 뉴스처럼 매우 진지하게, 자주, 자세하게 보도한다. 다른 구 소련 지역 국가들보다 훨씬. 물론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다룬다. 영국의 친러 어용 언론인 알렉산더 머쿠리스(Alexander Mercouris)가 우크라이나 동부가 러시아에 합병당하면 우크라이나 서부는 자립하지 못하고 폴란드, 헝가리 같은 국가들에게 합병당할 것이라는[13] 등의 선동으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를 싫어한다고 흔히 알려져 있는데, 우크라이나 안에서도 사람마다 다르고 생각보다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꽤 있었다. 대체로 동부 및 일부 남부[14] 지역은 친러 성향, 서부와 중부는 반러 성향을 나타냈다. 과거에는 두 세력이 비등하게 맞서서 정권을 돌아가며 차지하며 불만과 갈등이 있어도 독립은 하지 않았으나 유로마이단으로 야누코비치 독재정권이 붕괴, 반러 정당들이 집권하면서 반러 정책을 펼치자 친러 인구 상당수가 반발했다. 나중에는 불만이 폭발하여 러시아의 은밀한 지원 하에 우크라이나의 통치영역에서 빠져나갔고 남은 우크라이나 지역은 이에 분노하여 국가적으로 반러 성향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15]

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고[16]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이후부터 정권 차원에서 반러 노선을 타면서 반발한 러시아와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2004년에 빅토르 유셴코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 다시 러시아와 갈등이 있었고, 러시아의 의존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지만, 러시아는 반발하며 그때마다 우크라이나에 잠가라 밸브를 실행했다. 2006년에는 러시아 측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줄이기도 했다. #

2.5.1. 2010년대

2010년에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들어섰고, 이때는 러시아와 잠시 우호적으로 변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2012년에 지역공식어 제정과 관련된 논쟁으로 지역당의원들과 야당의원들간의 집단 몸싸움이 일어났다. # 그렇게 친러파와 반러파가 같은 나라 안에서 공존하던 와중에 2014년에 일어났던 유로마이단으로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되자 유로마이단 이후에는 우크라이나가 소련 관련 상징물을 금지하고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활동도 금지시켰다. 게다가 크림 반도 2014년 크림 위기를 계기로 러시아로 합병되기도 했으며, 동부지역에선 러시아의 친러 반군 지원으로 돈바스 전쟁이 일어나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떨어져 나가는 등 양국의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러시아는 유로마이단 이후로 우크라이나 정부를 '키예프 정권'[17]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유로마이단을 부정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 정부를 적법한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서 제작된 드라마, 영화 등도 수입을 규제하고 러시아를 제재하였다. 여기에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를 제재했고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수입도 중단했다. 러시아 항공사의 항공기는 우크라이나 상공을 비행할 수 없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항공사의 항공기도 러시아 상공을 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대 무기 공장들이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던 곳으로서,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부터 무기를 수입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러시아 측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무기도 수입을 중단하면서 자체생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우크라이나 전체 수출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26%에서 12%로 감소하였고, 대신 유럽연합(EU)이 차지하는 비중은 28%에서 40%로 증가하였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8년 1월 1일부터 러시아인의 입국 통제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

우크라이나가 독립국가연합(CIS)에도 탈퇴를 선언하여 러시아가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친러와 반러가 반반이라 어느정도 균형을 맞췄으나 돈바스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동단의 돈바스[18]가 실질적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떨어져나간 상황이라[19] 우크라이나 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은 동부와 서부를 가리지 않고 거의 반러 일색이 되었으므로 더 여론이 반러에 치우쳐 보이는 것도 있다.

유로마이단, 돈바스 전쟁이 일어난 뒤로 돈바스가 초토화되자, 지역 주민들 중 반러 성향 주민들은 우크라이나 중부와 서부로, 친러 성향 거주민들은 러시아로 대거 피난을 갔다. 유엔 OCHA에 따르면 141만 4798명이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92만 5500명은 국외(주로 러시아)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2014년 12월 6일, 러시아가 2주만에 우크라이나에 석탄 공급을 재개했다. #

2015년 10월 10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채무탕감 요청을 거부해 평행선을 달렸다. #

게다가 우크라이나 총리의 통역사가 러시아 스파이로 밝혀지면서 EU 및 캐나다와 연합해서 러시아에 강력 항의할 가능성이 높다. #
2.5.1.1. 2018년
우크라이나 의회가 우크라이나 동부를 러시아가 일시 강점하고 있다고 선언하자 러시아는 2018년 1월 19일에 유감이라고 밝혔다. # 2018년 3월 16일에 아르센 아바코프 내무장관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들은 주말 대선 투표에 참여하지 못 한다고 밝혔다. # 2018년 4월 23일에 푸틴 지지 서명운동을 벌인 이유로 크림 반도에 거주하는 한 여자가 체포되었다. # 2018년 5월 2일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추가 제재했다. # 2018년 7월 7일에 미 해군함 2척이 우크라이나군과 연합훈련을 위해 오데사로 향하자 러시아는 반발했다. # 2018년 7월 11일에 세르게이 쇼이구 장관은 이탈리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면전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 하지만 2018년 9월 17일 우크라이나누 대러 우호조약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

10월 22일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대러 제재에 대해서 역제재를 실시했고 푸틴 대통령도 서명했다. # 우크라이나측은 러시아측이 경제제재를 하자 러시아 관련 화물 억류로 맞대응했다. #

우크라이나는 7월에 스보보다가 서부지역에 캠프를 차리면서 10대 청소년들에게 무기훈련을 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친러 분리주의자들을 살해하는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거기에다 우크라이나 청소년 스포츠부는 민족주의자들의 캠프도 지원했다. # 11월 25일에 우크라이나 군함 3척이 러시아 영해를 침범한 사건을 두고 외교갈등이 생겼다. # 25일 BBC 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쯤 케르치 해협에서 러시아 군함이 우크라이나 해군함 니코폴, 베르댠스크 2척과 예인선 예니카푸를 향해 포격을 가해 나포했다고 전했으며, 우크라이나 해군은 이날 저녁 페이스북을 통해 성명을 발표하고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이 예인선과 함께 케르치 해협을 통과하려던 우크라이나 함정들에 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소형 함정 베르댠스크가 반파되고 군인 6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 이 사태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의 갈등이 더 커졌다. # 게다가 우크라이나가 게엄령까지 선포하자 러시아는 반발했다. # 그리고 러시아 법원은 11월 27일 우크라이나 함정 승무원 20여 명 중 첫 번째 승무원에게 2개월간 구속을 결정하는 선고를 내렸다. #

러시아 지상군이 크림 반도 케르치로 이동하고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육군은 반군 지역에 7차례 견인포와 박격포 등을 이용해 민간인 지역과 군시설을 대상으로 한 포격을 실시했고, 우크라이나 해군은 정보장교를 대동해서 이동 중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는 미군 주둔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보도했다. #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나토 회원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게엄령 기간에는 러시아에 제한이 가해질 것이라고 밝혔지만, 러시아는 포로셴코가 지지율이 낮자 추가적 긴장을 유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긴장이 높아지면서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 방공미사일을 추가 배치했다.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재조치의 일환으로 16~60세 러시아 남자들에게 입국을 금지하고 조약 40여 건도 취소한다고 밝혔다. #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함정압류조치에 대해 우크라이나측도 러시아 선박을 압류조치해야 한다고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흐로이스만 총리가 발언했다. # 12월 2일에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함정의 수병들을 송환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 러시아 정부는 군함 나포 사건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포상을 주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적대정책을 펼치면서 2018년 12월 6일(현지시간)에 러시아와 우호조약을 파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 게다가 러시아에서 사이버공격이 발생되자 러시아측은 우크라이나를 비난했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긴장이 높아지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걸친 한 국경마을은 사실상 분단되었다. #

2018년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쿠릴 열도 분쟁에서 일본을 지지했다.
2.5.1.2. 2019년
우크라이나는 2019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지만, 러시아내 우크라이나인들의 안전을 위해 러시아에서는 투표소를 설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2019년 2월 21일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체결한 아조프 해 협정을 파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

우크라이나에서 국경보안을 강화하겠다고 내무부가 밝히자 러시아는 조롱 섞인 반응을 내놨다. #

러시아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 화물 운송의 경유를 막은 조처와 관련해 세계무역기구(WTO)는 4월 5일(현지시간)에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 4월 24일에 러시아는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내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시민권 발급을 취득하는 시간을 단축하자 우크라이나는 반발했다. # # 그러자 젤렌스키 당선인은 러시아인들에게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주겠다고 밝혔다. # 그리고 5월 1일에 푸틴 대통령은 특정 부류의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러시아 국적 취득허용범위를 확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 러시아가 돈바스 주민들에게 러시아 여권을 발급하는 조치를 취하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5월 13일에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유럽이 대러제재를 해제하면 민스크 협정을 파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

5월 20일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크렘린은 축하 전문을 보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 그리고 2019년 6월 17일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크림 반도에서 나포된 함정승무원 24명의 석방을 촉구했다. #

크렘린은 7월 11일에 푸틴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화통화로 우크라이나 동부분쟁 해결과 포로송환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 하지만 7월 25일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유조선을 억류한 사건이 발생하자 러시아는 즉각적인 송환을 요구했다.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우회하는 가스송유관을 건설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가스관의 계약기간을 10년에서 1년으로 바꾸려는 계획을 세우자 우크라이나가 반발했다. #

젤렌스키 대통령은 7월 7일 푸틴 대통령에게 동부 지역의 친러 분리주의자들을 억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

9월 7일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포로 35명을 맞교환했다. #

1년만에 케르치 해협에서 나포되었던 우크라이나 선박 3척이 풀려나 우크라이나에 인계되었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상은 12월 9일에 '완전하고 포괄적인 휴전'에 합의했다.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가스공급계약을 다시 체결했다. # 그리고 푸틴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은 12월 31일에 전화통화를 하고 2020년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관계를 발전시키자고 합의했다고 타스통신이 전했다. #

2.5.2. 2020년대

2.5.2.1. 2020년
6월 10일에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에 우크라이나를 초대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승전 기념행사에 초청하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

10월 6일에 푸틴 대통령과 메드베추크 주러 우크라이나 대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제재, 백신과 양국간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러시아어) 그리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러시아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갈등 중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피해를 보는 탓에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V의 도입을 검토하였다. #(러시아어)

우크라이나 TV 채널에서 러시아 프로그램이 유명해지자 우크라이나 TV 위원회에서 조사하였다. #(러시아어)
2.5.2.2. 2021년
러시아산 백신 스푸트니크 V 도입을 두고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자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외교관을 추방했다. #

젤린스키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돈바스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 이에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방문은 환영한다고 밝혔지만, 반군 지원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서 진행했던 군사훈련을 종료했다. #

젤린스키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돈바스 외에도 모스크바에서 만나겠다고 밝혔다. # 그리고 젤린스키 대통령은 새로운 합의안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가입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입을, 크림 반도를 포함한 지도를 그린 유니폼을 공개하자 러시아가 반발했다. #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민족이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안정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7월 27일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리비우에서 미국,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군사훈련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

8월 23일, 우크라이나는 수도 키이우에서 크림 반환을 위한 국제적 지지 확보를 목적으로 정상급 국제회의인 '크림 플랫폼'을 개최했다. 러시아는 이에 즉각 반발했다. #

8월 24일에 우크라이나는 독립기념일을 맞아 수도 키이우에서 최대 규모로 열병식을 열였는데 러시아를 겨냥한 듯하다. #

우크라이나 중앙은행이 예금보유를 위한 러시아 루블 매입을 우크라이나 내 은행에게 금지했다. #(러시아어)

2021년 후반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측은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 병력 10만 명을 주둔시켰다.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베르댠스크에 새로운 해군기지를 세우기로 했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긴장감이 높아지는 가운데, 러시아군이 흑해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진행하고 # 접경지역 순찰을 강화했다. #

젤린스키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회담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

12월 3일에 우크라이나의 올렉시 레즈니코프 국방부 장관은 러시아가 국경 인근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일 수 있다고 밝혔다. #

12월 7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공식 트위터가 러시아 옆에 사는 것이 머리 아프다는 밈을 올렸다. 이에 대만 디지털 외교부도 중국 옆에 사는 것이 머리 아프다는 답글을 달 건 덤. #

한편 러시아는 계속해서 병력을 증강시키며 현대화가 완료된 전술부대를 배치해 총 17만 5천 명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서방을 믿었다가 토사구팽당할 지경이라는 이야기마저 돌았다.[20]
2.5.2.3. 2022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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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위기가 일어나면서 양국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1월 15일 우크라이나 국가보안국은 러시아 해커들의 사이버 공격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

주 우크라이나 러시아 대사관에 머물던 외교관과 그들의 가족 18명이 1월 5일에 철수했다고 알려졌다. 그 후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에 위치한 러시아 영사관에서도 약 30명이 철수했다고 알려져 우크라이나 침공이 임박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에 러시아 외무부는 키이우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은 평소처럼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긴장이 높아지자 우크라이나 국민 3분의 1이 러시아 침공시 결사항전을 할 수 있다는 전언이 나왔다. # 우크라이나의 기자가 생방송중 친러 성향의 야당 의원과 인터뷰하던 도중에 야당 의원이 주먹을 날리자 난투극이 일어났다. #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와 단교를 검토한다고 밝히자 러시아 외무부에서는 단교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 위기가 계속 고조되다가 결국 2월 24일부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와 단교를 선언했다. #

양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러시아내에선 반전시위가 일어났다. 반전시위에서 체포된 시위대가 늘어났다. 주 러시아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꽃을 놓던 러시아 어린이들이 체포됐다. #

3월 2일, 러시아가 헤르손주 점령지에 헤르손 군민정청을 설치했다. 3월 12일, 러시아가 자포리자주 점령지에 자포로지예 군민정청을 설치했다. 러시아 병합을 준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주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두 주에 군민정청을 설치한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민간인 희생자들이 늘어났다. 3월 20일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친러 정당 11개의 활동제한을 밝혔다. #

우크라이나내 러시아군 포로들이 전향해 자유 러시아 군단을 결성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키이우 등 우크라이나 북부 전선에서 철수하자 부차 학살과 관련된 진상들이 드러났다. 류드밀라 데니소바 우크라이나 의회 인권감독관이 우크라이나인 60여만명이 러시아로 강제 추방됐다고 밝혔다. #

4월 14일에 페스코프 대변인은 푸틴-젤렌스키 회담 전에 서명에 준비할 합의문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

4월 16일에 비탈리 클리츠코 키이우 시장은 키이우-모스크바 우호 광장을 마리우폴 광장으로 바꾼다고 밝혔다. # 한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키이우를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부를 점령하면서 점령지에 친러 정치인들을 세우고 러시아 교과 과정 도입, 러시아 루블 사용 도입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또한, 2014년에 철거된 레닌 동상이 다시 세워졌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우호 광장에 세워진 동상이 철거됐다. #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침공 전의 국경을 회복시켜야 평화협상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 헤르손이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당한 뒤, 러시아는 헤르손을 병합할 계획을 세웠다고 스푸트니크 통신이 보도했다. # 헤르손을 탈출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5월 11일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 살해를 저지른 러시아군 포로에 대한 재판이 열릴 것이라고 우크라이나의 이리나 베네딕토바 검찰총장이 밝혔다. #

우크라이나 침공에 참여하다 붙잡힌 러시아 군인 2명이 폴타바 주의 법원에서 전쟁범죄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

러시아 정교회 산하의 우크라이나 교회가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

러시아 하원 의원이 7월에 러시아가 점령중인 도네츠크, 루한스크, 자포리자, 헤르손에 대해 러시아 병합 투표를 실시(!)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

드미트리 무라토프 언론인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기 위해 노벨평화상을 경매에 붙였다. #

16세기에 우크라이나에 지어진 수도원이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

6월 4일, 러시아가 하르키우주 점령지에 하리코프 군민정청을 설치했다. 헤르손 군민정청, 자포로지예 군민정청에 이은 세 번째 군민정청이다.

6월 9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포함한 러시아 정부 고위 관계자에 대한 제재안에 서명했다. #

6월 15일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이 러시아에 의해 강제이주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

6월 17일 러시아 크렘린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

6월 19일 우크라이나 의회가 러시아 음악과 서적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

6월 20일 우크라이나 법원은 친러 정당인 인생을 위한 야권연단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

6월 27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체스연맹 회장 자리를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 #

우크라이나인의 89%가 러시아에 영토를 할양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방안에 대해 반대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다. #

7월 5일 로스토프주 지사가 돈바스와 로스토프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될 계획이라고 밝혔다. #

7월 7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발언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강경한 입장으로 맞섰다. #

7월 11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 시민권 취득 간소화 조치에 서명했다. # 그리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내 러시아 점령지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하는 절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7월 21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이 곡물수출에 합의했다. #

라브로프 장관이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를 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전쟁 이후, 영적 분열이 심화되고 있다. #

8월 15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겨냥해 러시아 문화를 부정하는 모든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밝혔다.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속전속결로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오판이란 분석이 나왔다. #

알렉산드르 두긴의 딸인 두기나가 사망하자 러시아에서 총공세를 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

8월 27일, 푸틴 대통령이 전쟁 발발 후 러시아로 넘어온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영주권을 발급해주기로 했다. #

9월 5일, 소총으로 러시아 전투기를 격추한 우크라이나인 남성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훈장을 받았다. #

9월 7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서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고 밝혔다. #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떠난 곡물 수송선이 2척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송선이 EU로 떠났다고 밝히며 다시 곡물 수출을 제한한다고 밝혔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스몰린스코예 구의원들이 푸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요구했다.(!) #

9월 9일,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에서 눈에 띄는 전과를 세우기 시작했고 발라클리야 수복, 쿠퍈스크 수복을 시작했다. # 우크라이나군은 하르키우주의 거의 대부분 지역을 탈환했고 루한스크주 일부 지역도 탈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쿠퍈스크에서 철수했고 하리코프 군민정청도 본거지를 옮겼다. 러시아 정부는 반격의 일환으로 증원군을 파견한다고 밝혔다. #

9월부터 우크라이나의 가을 공세가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가 가을 공세로 하르키우주 대부분의 지역을 수복한 것과 관련해 푸틴 대통령은 전쟁이 심각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 러시아 정부는 9월에 동원령을 발표했고 러시아 전역에서 시위가 발생했고 일부 러시아인들이 해외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9월 16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전쟁포로를 석방해야 러시아산 암모니아 수출을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

9월 22일, 라브로프 장관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난했다. #

9월 23일부터 9월 27일까지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의 러시아 편입에 관한 국민투표가 시행된다. 투표가 실시중인 상황에서 러시아군이 민간시설에 미사일을 쐈다. #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의 장기전에 대비해 국방비를 43%까지 늘리는 것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9월 24일, 라브로프 장관은 우크라이나에서 편입된 영토는 러시아의 보호를 받을것이라고 밝혔다. # 구글은 러시아가 친러 해커단체들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와 동맹국들에 대해 사이버 공격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

러시아는 투표 이후, 동남부 합병 선언을 했다. 10월 5일, 푸틴 데통령이 러시아의 동남부 우크라이나 점령지 합병에 서명했다. #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이 헤르손 일대를 탈환하고 동부 일대를 탄환중이다.

러시아가 자포리자 원전 국유화를 발표하자 우크라이나가 반발했다. #

10월 6일,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쿠릴 열도 분쟁에서 쿠릴 열도 4개섬이 일본에 속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

10월 18일, 러시아가 키이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 미사일 공격을 했다. #

10월 21일, 바실리 네벤자 유엔 대사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에서 오랫동안 테러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

11월 이후, 우크라이나가 헤르손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헤르손시와 스니후리우카 드니프로 강 서쪽의 헤르손주 일대를 대부분 되찾았고 러시아군은 후퇴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헤르손주의 드니프로강 서쪽에서 철군했다고 밝혔다. #

11월 15일, 러시아는 키이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 공격을 개시했다. #

러시아가 헤르손시를 점령할 당시,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약탈행위를 했던 사실이 알려졌다. #

12월 6일,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영토내 군사시설 공격에 대해 조치를 강구중이라고 밝혔다. #1 #2 우크라이나 최대 농업회사 3곳이 러시아의 농업회사에 의해 농지를 빼앗긴 것이 밝혀졌다. #

12월 8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기반시설을 계속 타격한다고 밝혔다. #

12월 12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점령하의 도네츠크, 멜리토폴, 크림반도를 타격했다. # 볼로디미르 하브릴로우 우크라이나 외무차관은 러시아의 점령이 있는 한, 휴전은 없다고 밝혔다. #

12월 13일,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의 크리스마스 휴전 제안을 거절했다. #

12월 14일, 미러 양국 조사기관에서 실시한 조사결과에서 러시아인 대다수가 평화협상은 찬성하지만, 점령지 반환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12월 15일, 우크라이나군이 도네츠크주의 러시아 점령지에 포격을 가했다. #

12월 18일, 뉴욕타임스는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키다가 착오로 인해 오판을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

12월 19일, 러시아가 키이우 등 우크라이나에 공습을 가한 가운데, 푸틴 대통령이 벨라루스를 방문했다.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드론 공격을 받았고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이 공격을 받았다. # 러시아 국방부는 벨고로드로 향하던 미국제 미사일을 격추했다고 밝혔다. #

12월 20일, 푸틴 대통령은 국경강화를 명령했다. #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투중인 바흐무트에 와서 병사들에게 상을 준 반면,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에 머물며 시상식을 진행하자 푸틴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생겨났다. # 2014년 크림 반도 병합에 역할을 했던 이고르 기르킨도 푸틴 대통령을 비판했다.

12월 22일, 러시아 연방보안국과 무장한 군인들이 헤르손시의 한 고아원에 들어와 고아들을 납치해 러시아로 끌고가는 영상이 공개됐다. #

12월 24일, 러시아군이 헤르손시를 공습해 6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12월 25일, 헤르손시 시민들이 첩보, 군수 물자 운반 등 스파이 활동을 하며 우크라이나군의 헤르손시 탈환에 기여한 사실이 알려졌다. #

12월 26일, 러시아 연방보안국은 브랸스크로 진입하려던 우크라이나 공작요원 4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 미하일 갈루진 러시아 외무차관은 우크라이나와의 종전을 희망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밝혔다. # 우크라이나가 드론으로 러시아의 엥겔스 공군기지를 공습해 러시아군 3명이 사망했다. #

12월 28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우크라이나 평화를 위해선 4개 지역 합병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 드론을 막기 위한 드론을 개발중이라고 밝혔다. #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우크라이나군에 입대해 러시아군을 막는 등 큰 활약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12월 29일,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가 쏜 이란제 드론 16대를 전부 격추시켰다고 밝혔다. #

12월 30일,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 올리가르히들이 큰 손실을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그리고 양국은 전쟁으로 인해 군사적으로도 큰 손실을 보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

12월 31일, 푸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서방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도구로 사용해 러시아를 파괴할 것이란 시도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전역에 공습을 가했다. #
2.5.2.4. 2023년
1월 2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점령지를 공습해 러시아군 사망자가 발생했다. #

양국간에 일어난 전쟁의 영향으로 사상자가 각각 10만명을 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

1월 3일,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군이 드론을 쏘고 있다보니 방공용 미사일로 드론을 격추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밝혔다. #

1월 5일, 푸틴 대통령이 크리스마스를 포함해서 36시간 휴전을 선언했지만, 우크라이나 측은 비판했다. #1 #2

1월 6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1월 7일, 세바스토폴 지사는 우크라이나군의 드론을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

1월 8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이 포로교환을 했다. #

1월 9일, 러시아가 하르키우시를 공습하면서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 그리고 러시아가 차세대 스텔스 수호이-57을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한 정황이 나타났다. #

러우전과 관련해 6.25 전쟁과 비슷하게 러시아로부터 한국식 분단 시나리오를 들었다고 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가 밝히자 크렘린 측은 부인했다. #

1월 10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친러 국회의원 4명의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박탈시킨다고 밝혔다. #

1월 12일, 솔레다르 전투가 치열한 가운데, 크렘린 측은 솔레다르가 거의 러시아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다고 밝힌 반면, 우크라이나 측은 사수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 헤르손시의 여성이 러시아의 점령기간에 고문당한 사실을 밝혔다. #

1월 15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전력시설을 공격하면서 우크라이나 이동통신업계가 배터리 대란에 빠졌다. #

1월 17일,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가 3월까지 돈바스를 점령한다고 밝혔다. #

1월 21일, 러시아 측은 자포리자 전선에서 더 유리한 전선과 위치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식량을 실은 100척 선박을 억류해 세계 식량 공급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1월 26일, 러시아가 키이우시 등에 미사일, 자폭드론으로 공격했다. # 그리고 러시아 측은 서방 국가들의 탱크 지원에 대해 군사용 로봇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

러시아가 돈바스를 3월까지 장악하려는 목표하에 전투가 격화됐다. #

2월 2일, 서방 국가들이 레오파르트2 전차를 보낼려고 하자 러시아는 로봇탱크 4대를 보낸다고 밝혔다. #

2월 4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이 대량으로 증파해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 그리고 러시아군이 군 재편 작업에 돌입해 최소 5개 전선에서 반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WSJ이 보도했다. #

2월 5일, 올렉시 레즈니코우 국방장관은 서방 국가들로부터 지원받은 장거리 무기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크림반도와 관련해 러시아는 러시아의 영토라고 주장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서방제 무기를 이용해 영토회복을 한다고 밝히면서 러시아가 핵무기를 쓸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

2월 11일, 러시아의 베르시닌 차관은 전제조건없이 우크라이나와 협상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군사산업단지에 폭격을 했고 우크라이나도 이에 맞대응을 했다. #

2월 1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접경지에 전투기들을 배치해 공습준비를 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아동들을 최소 6,000명 이상을 납치해 러시아에 있는 재교육 수용 시설로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3월 2일, 러시아 서부의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 러시아 연방보안국은 우크라이나의 사보타주라고 밝혔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을 넘기며 양국 군대가 소모전을 겪면서 병력손실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

4월 8일, 우크라이나군이 페오도시야에 미사일 공격을 시작했고 러시아군이 요격했다. #

4월 24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을 계획하자 미국 측이 만류했던 사실이 알려졌다. #

4월 25일, 러시아군이 쿠퍈스크의 박물관으로 미사일을 쏘면서 직원 1명이 사망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비판했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우크라이나의 범죄조직들이 러시아 범죄조직과의 관계를 끊은 것으로 나타났다. #

5월 14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이 지원한 무기로 러시아 본토 공격은 계획에 없다고 밝혔다. #

5월 16일, 러시아군이 키이우시에 미사일 공격을 했다. #

러시아군의 바흐무트 전투 이후, 자유 러시아 군단 등 우크라이나 국제여단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전투가 일어났다. #1 #2

6월 3일, 러시아군이 드니프로시를 미사일 공격하면서 20여명이 부상당했다. # 올렉산드르 시르스키가 러시아군이 바흐무트에서 큰 손실을 봤다고 밝혔다. #

6월 5일,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군의 격퇴를 막았다고 밝혔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대반격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고 밝혔다. #

6월 8일, 우크라이나군의 대반격이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러시아군과의 전투가 증가했다. #

6월 9일,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군이 카호우카 댐 폭파 사건과 관여되어 있다고 밝혔고 관련된 녹음자료를 공개했다. #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에 대해 인정했지만, 우크라이나군이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

6월 24일, 우크라이나군이 크라스노호리우카 주변 지역을 탈환했고 밝혔다. #

젤렌스키 대통령은 바그너 그룹 반란이 일어난 것에 대해 푸틴 대통령의 통제력 상실이 있다고 밝혔다. #

6월 26일, 우크라이나군이 드니프로강을 넘어 탈환 개시에 나서는 움직임을 보였다. # 그리고 독일 언론은 7월에 양국간 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보도를 했다. #

6월 27일, 바그너 그룹이 벨라루스에 기지를 세우려고 하자 주변국들이 촉각에 나섰다. #

7월 1일, 바그너 그룹 쿠데타가 실패한 뒤에 바그너 그룹이 벨라루스의 버려진 기지를 이용할 가능성이 커지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북부 전선에 대비한다고 밝혔다. #1 #2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를 타격해 3명이 사망했다. #

7월 2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늑대이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 키릴로 부다노우 우크라이나 국방부 군사정보국장은 러시아가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 러시아 상원 고위인사가 우크라이나 아동 70만명을 러시아로 데려와 보호(...)한다고 밝혔다. #

8월 2일, 러시아군이 이즈마일로 미사일 공격을 실시했다. # 러시아군의 드론 공격으로 이즈마일의 항구 인프라가 훼손되고 곡물 4만톤이 소실된 것으로 나타났다. #

러시아 점령지의 우크라이나인 43%가 러시아군의 고문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

8월 3일,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민간인 1만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

8월 5일, 우크라이나 측은 드론을 이용해 러시아 유조선을 공격했다고 밝혔다. # 그리고 헤르손주와 크림반도를 연결하던 다리가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손상됐다. # 러시아 측은 유조선이 공격당하자 극초음속 미사일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

8월 13일, 러시아군이 헤르손주의 시로카 발카를 공습해 7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다쳤다. #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 접경 지역을 향해 여러차례 드론 공격을 가했다. #

9월 22일, 우크라이나 측은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흑해함대 기지를 미사일로 공습해 러시아 해군 고위 지휘관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
2.5.2.5. 2024년
3월 9일,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 시스템 2대가 러시아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에 파괴된 사실이 보도됐다. #

2024년 러시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접경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고 우크라이나 민병대들이 러시아 국경 지역에 침투해 러시아군과 전투를 치렀다. #1 #2

3월 13일, 러시아 국방부는 도네츠크 지역에서 보급을 위해 착륙한 우크라이나 헬기 3대를 발견하고 공격해 2대를 파괴했다고 밝혔다. #

3월 14일, 러시아의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오데사를 공습해 최소 20명이 사망했다. #

2024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의 점령을 받은 지역의 대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EU, NATO도 불공정 선거라고 비판했다. #

4월 2일, 우크라이나가 자체 개발한 드론이 타타르스탄의 정유시설을 타격했다. #

8월 6일,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와 접한 러시아 본토를 상대로 최대 공격을 단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

아랍에미리트의 중재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이 포로교환을 했다. #

9월 12일, 러시아가 쿠르스크의 우크라이나군에게 반격을 가하며 일부 영토를 회복했다. # 러시아는 서방 미사일로 러시아 본토 타격이 허용된다면 키이우를 용광로로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

9월 16일, 러시아군이 하르키우의 아파트를 활공폭탄으로 공습해 1명이 사망하고 42명이 부상당했다. #

양국간 전쟁으로 인해 양국에서 인구 절벽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

9월 17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우크라인스크를 점령했다. #

9월 18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무기창고를 드론으로 공격했다고 밝혔다. #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무기창고를 공습하는 반면, 러시아는 포크로우스크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

9월 19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식 지명 327곳을 변경하기로 의결했다. #

9월 20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전력시설을 공격했다. #

9월 21일, 러시아가 크리비리흐를 공습해 3명이 사망했다. # 게다가 하르키우의 아파트가 러시아의 공습에 의해 12명이 부상당했다.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군수창고를 드론으로 공습했다. #

우크라이나 측이 러시아 국경의 또다른 지점을 돌파했다고 밝혔지만, 러시아 측은 바로 격퇴했다고 반박했다. #

9월 22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공습을 막기 위해 하늘에서 불을 뿜는 새로운 드래건 드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

9월 24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가 점령했던 보우찬스크의 거대 공장 단지를 탈환했다. #

9월 25일, 러시아가 도네츠크주의 마을 2곳을 점령했다고 밝혔다. #

9월 28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면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9월 29일, 러시아가 자포리자를 공습해 최소 16명이 부상당했다. #

9월 30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서 모든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 우크라이나 측은 키이우에 대한 러시아 무인기 공습이 5시간 넘게 이어졌다고 밝혔다. #

10월 1일, 러시아군이 헤르손을 포격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당했다. #

10월 2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과의 전투에서 우글레다르를 점령했다. # 하르키우시가 러시아의 공습을 받아 어린이를 포함해 10여명이 부상당했다. #

10월 3일, 우크라이나군이 ATACMS 미사일로 러시아 레이더를 공격했다. # 그리고 아조우 여단이 토레츠크에서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아낸 영상을 공개했다. #

러시아가 크림반도의 우크라이나 억만장자의 자산을 압류했다. #

10월 4일, 리아 노보스티가 공개한 사진에서 러시아가 점령한 우글레다르가 파괴된 건물들만 남아 있는 모습이 공개됐다. #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 에너지 시설을 공습했다. #

10월 6일, 러시아군이 드론과 미사일로 야간에 우크라이나 공습을 감행했다. #

10월 7일, 러시아군이 키이우에 킨잘 미사일을 발사했다. # 우크라이나군은 크림반도의 페오도시야를 향해 드론을 발사했다. # 그리고 푸틴 생일에 친우크라이나 성향의 해커들이 러시아 국영 방송사를 대상으로 대규모 해킹을 감행했다. #

10월 8일, 러시아군이 토레츠크 외곽에 진입했다고 우크라이나군이 밝혔다. #

10월 9일, 러시아군이 오데사항을 미사일로 공격해 최소 6명이 사망했다. #

10월 12일, 쿠르스크 전투(2024년)가 일어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푸틴 대통령이 쿠르스크주에 러시아군 주력을 투입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CNN이 보도했다. #

10월 13일, 러시아 국방부가 쿠르스크주의 우크라이나군 거점을 활공폭탄으로 공습했다고 밝혔다. #

10월 14일, 러시아군이 자포리자주 레바드네를 점령했다. #

10월 15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가 점령했던 쿠르스크 영토 절반을 탈환했다. #

10월 16일, 러시아 측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승리계획에 대해 우크라이나 국민에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 러시아 국방부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마을 2곳을 점령했다고 밝혔지만, 우크라이나 측은 격퇴했다고 주장했다. #

10월 20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여기저기를 공습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본토를 향해 드론으로 공습했다. #

10월 27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국경을 넘어 브랸스크로 침투하려고 했지만, 저지했다고 밝혔다. # 그리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마을 1곳을 점령하고 전선 곳곳에서 우크라이나군에 최대 770명의 병력 손실을 입혔다고 밝혔다. #

10월 28일, 라브로프 장관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에 대해 우크라이나에는 이미 서방 용병들이 있다고 대응했다. #

10월 30일, 우크라이나의 한 장성이 돈바스 전선이 러시아군에 의해 무너지는 중이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승리계획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

11월 1일, 러시아군이 하르키우를 공습해 1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당했다. #

11월 2일, 러시아 측이 우크라이나가 전쟁포로 교환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11월 7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후방 지역에 대규모 드론과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

11월 17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공습을 가하면서 에너지 시설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

11월 21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가 드니프로 지역을 공격하면서 ICBM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

3. 문화 교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 근세 루스 차르국이 우크라이나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같은 정교회 문화권이었기 때문이다. 종교나 복식 같은 전통적인 부분 외에 근현대 문화, 사상 면에서도 우크라이나 문화는 러시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1863년부로 러시아에서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금지함에 따라 우크라이나 출신 지식인 상당수가 공식적으로 러시아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우크라이나어 사용이 금지되기 이전에도 우크라이나의 지식층 상당수는 공직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2013~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점차 러시아 영화, 프로그램의 방영을 중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어가 폭넓게 사용되고 있지만, 반러 정책 및 우크라이나어 장려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어의 사용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3.1. 러시아 문학과 우크라이나어 문학과의 관계

양국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는 니콜라이 고골 타라스 셰우첸코를 꼽을 수 있다. 두 사람은 다 우크라이나인이고 우크라이나의 고향에 관련한 글을 썼으나, 고골은 러시아어로 글을 썼고 타라스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어로 글을 썼다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니콜라이 고골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 소설가였다. 우크라이나어의 시성으로 꼽히는 타라스 셰우첸코는 니콜라이 고골이 이러한 자신의 재능을 우크라이나어 문학 발전에 쓰지 않고 러시아어로 글을 썼다며, 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 타라스 셰우첸코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내 여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들의 지원을 받아 예술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이미 러시아 제국 시대 당시에도 우크라이나인들의 러시아 상류 사회 진출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어 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이자 타라스 셰우첸코의 첫 번째 시집인 "유랑시인"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고골의 작품을 다시 우크라이나어로 번역, 보급하자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들이 여기에 반발하기도 했다. 양국 사이의 문화적 공통점이 적지 않은 이유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고대 스키타이 문화를 강조하고 자신들이 키예프의 중심지였음을 강조한다.

3.2. 러시아어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 일대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한 1863년부로 우크라이나어로 된 책을 출간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를 명령하였고, 1867년 5월부로 우크라이나어로 된 출간물 금지 조치를 강화하였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어는 시골 지역의 농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소련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의 조치와 같은 극단적인 우크라이나어 금지 조치까지는 시행하지는 않았고, 우크라이나 내에서 우크라이나어 민족어 교육을 실시하면서[21] 우크라이나어로 글을 읽고 쓰는 식자층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인들은 자녀들의 출세를 위해서 우크라이나어 대신에 러시아어를 배우는 학교에 보내는 것을 더 선호하였고,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어를 모어로 쓰는 인구 비중은 더 감소하기 이른다.

러시아어도 우크라이나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언어이며 러시아계가 많은 남부와 동부에서는 우크라이나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상황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부자크 지역 등의 소수민족 집단들은 러시아의 영향으로 우크라이나어를 잘 구사 못하고 러시아어만 유창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 시절인 2012년 인구의 10%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해당 지역언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언어법이 발표되면서 한때 동남부 지역에 한해 러시아어를 지역언어로 인정해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유로마이단 이후 언어법을 개정하고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지역의 분리 독립하거나 러시아에 합병되어 남은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어만을 사용하려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소련시절에 명명된, 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자에서 가져온 지명들을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었다.[22] 게다가 2017년에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자국어 교육 강화 정책을 추진하고 중등학교에서 소수민족 언어로 교육하는 것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러시아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23]

러시아는 이에 반발하며 우크라이나를 제재했고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수입도 중단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8년 1월 1일부터 러시아인의 입국 통제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 그리고 2018년 9월부터 르비우 주에서는 러시아어로 된 책이나 출판물, 프로그램 등이 금지되기까지 했다. # 또한,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의 동부 지역 주민들의 시민권 발급 간소화정책에 반발해서 TV 프로그램의 90% 이상을 우크라이나어로 방영하고 공공문서에서 우크라이나어를 의무적으로 쓰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 하지만 젤렌스키 당선인은 반발했고 러시아도 비판했다. # # 2019년 4월 25일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어의 공용어로서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24]

우크라이나 인구의 소수는 러시아어의 지위와 EU와의 관계에서 걱정하고 있는 것을 나타냈다.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언어법을 두고 2019년 7월 16일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러시아 대표와 우크라이나 대표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 우크라이나 내 SNS 사용자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어) 여담으로 리비우 등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을 여행해보면 러시아인이 현지 매장 직원들에게 "Can you speak Russian?"이라고 영어로 물어보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소련 시절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다만 이 지역은 반러감정 이전에 러시아어를 진짜로 못해서 그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러시아어가 모어였던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어만을 쓰기 시작했다. #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동부 지역 출신 주민들이 러시아의 침공을 받자 우크라이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

2023년 2월 22일, 하르키우의 이호르 테레호우 시장이 SNS에서 러시아어를 썼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자 반발해 소송을 했다. #

3.3. 정교회 갈등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2018년 정교회 분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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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 속에 정교회도 둘로 쪼개졌다. #

2019년 10월 11일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우크라이나 정교회[25]를 승인 및 파문 철회를 하여 독립 정교회로 인정하자 러시아 정교회가 반발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 성사 교류 단절을 선언했다. # 12월 15일에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예피파니 대주교를 교회 수장으로 선출하자 러시아 정교회와 모스크바 소속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반발했다. # #

11월 7일에 포로셴코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정교회 대표에게 출국을 요구했다. # 하지만 독립 정교회로 인정받았다고 해도 우크라이나 정교회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의 분리, 통합을 두고 내부에 갈등이 있었고 모스크바 총대주교 소속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반대했다. # 하지만 공식독립절차를 강행하려고 하자 교회 갈등이 심각해졌다. # 2019년 1월 6일에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독립 절차를 마무리하며 공식적으로는 300여 년에 걸친 예속기간을 벗어났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반발했다. #

4. 교통 교류

양국은 유로마이단, 돈바스 전쟁을 겪기 이전에는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 도로를 통해 교류가 존재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돈바스 전쟁, 크림 전쟁 합병으로 갈등을 심하게 빚으면서 러시아 국적자들의 우크라이나 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2010년대 후반에는 러시아인들의 우크라이나 무비자 입국이 철회되고 사실상 러시아인들에 한해 우크라이나 입국이 금지됐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측은 우크라이나 접경 항로를 폐쇄한다고 밝혔다. #

5. 여론 조사

양국 국민의 상대국에 대한 감정 (%)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우크라이나
시점 좋음 나쁨 시점 좋음 나쁨
08.03. 55 33 08.04. 88 7
09.01. 29 62 09.02. 91 5
10.11. 73 19 10.10. 93 4
14.3. 63 25 14.2. 78 13
15.1. 24 63 15.2. 34 51
19.2. 34 56 19.2. 57 27
20.8. 48 43 20.9. 42 42
21.11. 45 43 21.11. 39 47
22.8. 23 66 22.5. 2 92

2021년 11월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 중 우크라이나에 대한 감정이 '좋다'고 응답한 비율은 45%, '나쁘다'고 응답한 비율은 43%로 팽팽히 갈렸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호감도는 39%, 비호감도는 47%로 나타났다. 러시아에서는 젊은 층이 고령층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고(18-24세 57%, 55세 이상 35%), 우크라이나에서는 동부 지방이 서부 지방보다 러시아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다.(동부 52%, 서부 26%)

시기에 따라 보면 우크라이나의 경우 2014년 이전까지 80% 이상의 국민이 러시아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크림 위기와 돈바스 전쟁으로 인해 호감도가 크게 하락했다. 러시아의 경우 2000년대 중반까진 우크라이나에 우호적인 응답자가 더 많았으나 우크라이나에 비해서 그 비율은 낮은 편이었으며, 유시첸코 집권기와 2014년 이후 상당한 하락세가 나타났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양국 모두 상대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매우 크게 증가하였다. 2022년 8월 레바다 첸트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의 23%는 우크라이나에 호감을, 66%는 비호감을 표시했으며, 특히 고령층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게 나타났다.(18-24세 54%, 55세 이상 82%) 2022년 5월 KIIS에 의해 실시된 조사에서는 우크라이나인의 92%가 러시아에 대해 비호감을 표시했으며, 모든 지역에서 비호감이 호감을 압도했다.(서부 93%, 중부 95%, 남부 90%, 동부 85%)

2022년 이전에는 양국 모두 상대국 국민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응답이 압도적이었으나(러시아 83%, 우크라이나 76%) 상대국 지도부에 대해서는 비호감이라는 응답이 다수를 차지했다.(러시아 67%, 우크라이나 76%) 2022년 8월 러시아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66%가 부정적으로 응답했으나 우크라이나인에 대해서는 호감 68%, 비호감 23%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2023년 7월 3일,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군사작전 지속과 평화협상 추진 여론이 팽팽히 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

6.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 소수민족

제정 러시아, 소련 시기에 한 땅이었기에 러시아인, 벨라루스인들 뿐 아니라 러시아 아니 동유럽 전역의 다양한 민족집단들이 우크라이나에 이주해오기도 했었다. 주로 캅카스와 우랄 지역, 볼가 강 유역에서 온 경우가 많았으나, 발트 3국 혹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경우도 적지 않았고 멀리 러시아 극동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일례로 우크라이나와 아제르바이잔은 소련 시절 이전에는 일절 교류가 없었으나, 소련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인 인구는 5만여 명에 달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최대 부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리나트 아흐메토프 역시 볼가 타타르 출신이다. 이 외에도 추바시인2001년 통계 기준 10,593명, 모르드바인같은 년도 통계 9,331명,[26] 체첸인 인구시인,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온 소수의 퉁구스족( 우데게족, 나나이족, 에벤키족 에벤족)들과 케트족도 소수나마 거주하고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케트족들과 퉁구스계 민족들은 소수가 동화되었을 확률이 높다.

소련 해체 직후 우크라이나가 비교적 물가가 저렴하고 날씨도 좋은 이유로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영토 혹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 일대로 이주하는 경우가 적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2001년 인구 조사에서 12,353명의 우즈베크인들이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왔으며, 이 외에도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패망한 것을 전후하여 친소 아프간인 장교 일부가 러시아 대신 우크라이나로 망명했던 바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 아프가니스탄의 강경 무신론자 할크파 멤버이자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 국방장관을 역임했었던 모하마드 아슬람 와탄자르를 들 수 있는데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멸망 이후 러시아로 망명 갔다가 집세를 내지 못해서 가족들과 함께 쫓겨나, 좀 더 물가가 저렴한 우크라이나 오데사로 이사간 후 그곳에서 56세의 나이로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의 고려인 인구는 1989년 통계 기준 8,669 명에서 2001년 통계 기준 49,817명 규모로 증가했는데, 타지키스탄에서 내전이 발발하면서 혹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아르메니아에서 고려인들을 무국적자로 처리하면서[27] 상당수의 고려인들(4만여 명 규모)이 우크라이나로 이주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00년대 중반 이후 조지 부시 정권의 삽질 테러와의 전쟁으로 국제 유가가 폭등하면서 러시아 경제가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로 부흥하기 시작하자, 소련 해체 직후 우크라이나로 이주하였던 여러 민족집단들은 다시 러시아나 독일, 미국, 한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에 체류하고 있는 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7. 대사관

양국은 소련 해체 이후에 각각 대사관을 뒀다. 주러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모스크바에, 우크라이나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키이우에 위치했다.

양국에 위치한 영사관이 일부도시에 있다. 2021년 12월 24일에 러시아 외무부는 리비우의 러시아 영사관이 화염병 공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 게다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관의 직원들을 철수시켰다. # 우크라이나 역시 침공이 일어나자 주러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시켰다.

8. 관련 기사

9. 관련 문서



[1] 우크라이나 분쟁으로 이산가족+사상대립으로 분열되어 버린 우크라이나 가정들 (2015) [2] 모스크바 공국의 기원이 된다. [3] 이른바 루테니아 왕국이라고도 불렸으며, 오늘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러시아 및 벨라루스와 분리된 최초의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로 해석된다. [4] 종교개혁 이후 리투아니아에서 개신교가 유행하자, 예수회 선교사들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로 파견되어 개신교로 개종한 현지 시민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원복시키고, 동시에 정교회를 믿던 루테니아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작업에 착수하는데, 이 과정에서 성경이 벨라루스어와 우크라이나어로 번역되었다. 전근대 당시에는 교육 시설에 종교 시설에 부속 시설인 경우가 많았고, 예수회 측에서 운영하는 학교들은 프랑스 이탈리아의 최신 학문을 동유럽에 소개하는 첨병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정교회 측 인물들 역시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흔했다. [5] 예수의 이중속성을 의미 [6] 삼위일체를 상징 [7] 반면 폴란드계 귀족, 지주들이 많은 지방에서는 최대한 농민들에게 유리하고 귀족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토지 개혁이 이루어졌다. [8]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는 1867년부로 우크라이나어로 된 저작의 출판, 인쇄, 유통, 수입을 일체 금지하는 엠스 칙령을 발표했다. [9]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혁명의 주체로 여기고 농민을 무시한 것에 비해, 레닌은 서유럽과는 다른 당시 러시아 제국의 상황에 맞추어 농민과 소수민족 역시 도시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혁명의 주체로 상정하였다. 물론 농민 문제 관련해서는 노동자로 구성된 적위대가 농민들의 식량을 약탈하는 등 현실은 시궁창에 가까웠지만, 소수민족 문제 관련해서는 레닌주의 교리 내 소수민족의 영토에 기반을 둔 자치권 및 민족어, 민족문화 교육 보장을 명시하였는데, 이는 갈등과 분란을 줄이고 소수민족 인재들을 포섭하는 효과가 있었다. [10] 러시아의 역사가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시작한 건 사실이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논리인지 비교하자면 한민족의 역사도 만주에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발해 멸망 이후로 만주 출신 왕조를 한국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웬만한 국뽕이 아닌 이상 만주를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극소수이다. [11] 벨라루스도 러시아 시각에서는 한 나라이고 같은 민족이며 비록 떨어져나갔지만 그래도 좋은 동생으로 여긴다. [12] 과거 명칭이자 공통조상 루스를 강조하는 명칭. [13] 헝가리와 폴란드는 러시아 외에 우크라이나와도 국민감정이 안 좋은 편이다. [14] 크림 반도는 친러인 정도가 아니라 원래 주민구성이 러시아 본토와 비슷했고, 그 외에 오데사 등은 동부마냥 전쟁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중서부에 비하면 친러 성향이 있는 편이다. [15] 빠져나간 대표적인 예가 크림 반도와 사실상 독립해나간 지역인 돈바스. [16] 현재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 사고에 대한 복구비용을 고정적으로 보내주고 있으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이 협력해서 체르노빌의 방사능 제거를 하고 있다. [17] '키예프의 민족주의 정권', '키예프의 네오나치 정권' 등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다. [18]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주의 1/3에 해당된다. 비록 이 지역이 우크라이나 중공업의 중심지라 할지라도, 동부 지역이 전부 분리되진 않았다. [19] 물론 세계 각국이 독립국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 정권이 나라의 구색을 갖추고 통치 중임은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자칭 '독자 정권'은 우크라이나의 통치는 거부하지만 러시아의 통제는 받는다. [20] 원래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이 있던 당시 우크라이나는 최전방 국가였기에 핵탄두 소유량은 전세계 3위였다. 그러나 막 독립한 우크라이나가 가진 핵탄두를 위험시한 서방 세력이 핵탄두를 포기한다면 막대한 지원과 핵우산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부다페스트 조약을 맺고 핵탄두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2020년대가 되자 핵우산을 약속해주던 서방은 러시아의 자원과 군사력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21] 우크라이나 이외 지역에서는 당연히 우크라이나어로 교육이 진행되는 학교를 찾기 어려웠고,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계 인구가 많았던 지역들 이를테면 우크라이나와 나름 가까웠던 쿠반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 등은 상당수가 러시아인들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22] 예를 들자면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 '흐리호리 페트로우스키(Григорій Іванович Петровський)의 이름을 딴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를 드니프로로 바꿨다. 러시아어 지명을 우크라이나어로 바꾼 것이 아니다. 러시아어 지명도 잘만 남아있다. 예를 들어 드니프로는 러시아어식으로 드네프르가 된다. [23] 이는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만 저격한 조치는 아니고 우크라이나 안의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계 우크라이나인도 같이 반발했다. 왜냐하면 우크라이나의 광역자치단체(주, 특별시, 자치공화국) 중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제외한 나머지 언어 사용자의 비중이 10%를 넘는 곳은 없었지만, 하위 행정구역인 구와 공동체 중에는 소수나마 있었기 때문이다. [24] 국내에는 타스통신을 인용하여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퇴출시키고 우크라이나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인정하는 법안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애초에 1996년 헌법 제정 이후로 우크라이나어는 우크라이나의 유일한 공용어였고, 이것은 바뀐 적이 한 번도 없다. [25] 당시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크게 세 교회로 나뉘는데, 러시아 정교회 산하에 있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 우크라이나 정교회 - 키이우 총대주교,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우크라이나 독립정교회 등이 있었다. 이 중 키이우 총대주교좌 교회와 독립정교회, 그리고 모스크바 소속 교회 일부가 하나로 통합한 것이 우크라이나 정교회이다. [26] 몰도바가 아니라 러시아의 모르드바 공화국의 원주민 [27] 아르메니아의 경우는 독립 이후 고려인들을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국적자로 처리해버렸으며,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경우 각각 라트비아어와 에스토니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 국적을 주지 않아 무국적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28]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뿌리가 됐다. [29]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주 대부분 지역을 수복하면서 러시아로 본거지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