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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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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우크라이나
행정구역 르비우주 르비우시
슬로건 Semper fidelis(언제나 충성스럽게)[1]
면적 148.9km2
인구 717,273명[A]
시간대 UTC+02:00 (EET)[서머타임]

파일:lviv 1.jpg
파일:lviv2.jpg
파일:lviv3.jpg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르비우 역사 지구
영어 L'viv – the Ensemble of the Historic Centre
러시아어 Ансамбль исторического центра Львова
프랑스어 Lviv – ensemble du centre historique
국가·위치 우크라이나 르비우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8년[4]
등재기준 (ii)[5], (v)[6]
지정번호 865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역사
3.1. 초기, 루테니아 왕국의 지배 (1256~1349)3.2. 폴란드 왕국의 지배 (1349~1772)3.3.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1772~1918)3.4. 전간기 (1918~1939)3.5.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3.6. 전후 (1945~2022)3.7.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시기(2022~ )
4. 관광5. 정치6. 여담

[clearfix]

1. 개요


우크라이나 서부 최대의 도시로 르비우주의 주도이다. 2022년 기준 인구는 717,273명이며 우크라이나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7]

13세기에 설립된 이후 도시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뀐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도시 명칭도 리보프, 르부프, 렘베르크 등으로 바뀌었다. 루테니아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지만 폴란드의 지배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르비우는 키이우와 더불어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기 때문에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자신들의 정신적, 문화적 수도로 여긴 곳이었으며 지금도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인의 주요 문화 중심지이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났지만 구시가는 기적적으로 보존되었고 여러 문화가 융합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기에 그 역사성을 인정한 유네스코는 1998년 120헥타르에 이르는 구시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중심지였고,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 중 하나이다.

2. 언어별 표기

우크라이나어 Львів
폴란드어 Lwów(르부프)
독일어 Lemberg(렘베르크)
러시아어 Львов(리보프)

영어로는 Lviv, Lvov, Lwow 등으로 표기한다.

3. 역사

르비우는 1256년 건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적루테니아(Червона Русь)와 갈리치아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원주민인 루테니아인은 1349년부터 1991년까지, 1918년 잠깐을 제외하고 나라 없이 지내야 했고 르비우도 폴란드, 오스트리아, 소련의 지배를 돌아가며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폴란드의 지배가 특히 길었고[8], 루테니아 왕국 시절부터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한 폴란드인이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상당부분 폴란드화 되었기 때문에 키이우를 비롯한 다른 우크라이나 도시들과는 다소 차별화된 외관을 가지고 있다. 폴란드인들은 나라를 잃은 뒤에도 도시의 다수 인구를 차지하며 르비우를 폴란드의 문화 중심지로 가꾸어갔다. 하지만 동시기 유대인 우크라이나인도 도시의 상당수를 점하고 있었기에 르비우는 이들의 문화중심지, 그리고 특히 우크라이나인 민족운동 본거지 역할도 겸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처음엔 그 방식이 극단적이진 않았기에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진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전반적으로 서로 큰 대립없이 공존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 내셔널리즘이 전파되자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은 도시의 정체성을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르비우의 근세사가 영광을 누리던 한 다민족 국가의 흥망과 함께한 역사였다면, 근대사는 상기한 바와 같이 나라 없는 두 민족의 공존과 대립의 역사였다. 이런 역사를 지나는 동안,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인에게는 갈망의 도시였고 전후 도시가 드디어 우크라이나인의 품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커지자 도시엔 우크라이나인들이 몰려들어 현재 도시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우크라이나인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 그리고 현 우크라이나가 오랫동안 서부의 친서방, 동부의 친러로 대립해왔음을 고려하면, 도시의 다수가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르비우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가장 강한 도시 중 하나이다.

지배자들이 그들의 언어로 도시를 부름에 따라 도시의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따라서 이 장에선 르비우의 이름을 도시를 지배하는 세력이 바뀜에 따라 그들의 언어로 도시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기술하도록 하겠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부르는 이름인 르비우를 기본으로, 폴란드인은 이 도시를 르부프(Lwów)라 부르고 오스트리아인( 독일인)은 렘베르크(Lemberg),[9] 러시아인은 리보프(Львов)라 부른다. 라틴어 표기는 레오폴리스(Leopolis)이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자국어로 변형해서 레오폴리스(Leópolis), 레오폴리(Leopoli)라고 부른다.

3.1. 초기, 루테니아 왕국의 지배 (1256~1349)

6세기 경부터 이 지역에 마을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1256년 루테니아의 왕이었던 갈리치아의 다닐이 이 지역에 도시를 세우면서 르비우의 도시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도시의 이름은 다닐의 장자였던 레프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1260년 르비우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룬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파괴되고 말았다. 1270년 다닐의 후계자 레프는 도시를 재건했고 르비우를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 루테니아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당대 우크라이나 지역에 도시가 얼마 없던 데다 얼마 전까지 최대의 도시였던 키이우가 1240년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사실상 사라지면서 르비우는 일대 최대의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로서 기능했고 독일인, 아르메니아인 등을 포함한 수많은 상인들의 터전이 되었다. 또, 당시 기근을 겪던 크라쿠프에서 피신해 온 폴란드인이 대거 르비우에 자리잡으면서 인구도 크게 늘었다.

1323년 루테니아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기자 이 지역은 피아스트 왕조의 일원이던 마조프셰의 볼레스와프 예르지 2세에게 주어졌다.[10] 그가 암살당하자 당시 폴란드 왕이던 카지미에시 3세가 이 지역의 권리는 볼레스와프의 사촌인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했지만 현지 귀족들은 드미트로 데드코(Dmytro Dedko)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뽑았다. 분개한 카지미에시 3세는 갈리치아를 침공했지만 데드코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1349년 데드코가 죽고 나서야 카지미에시 3세는 르비우(르부프)를 포함한 갈리치아 전역을 얻었다.

3.2. 폴란드 왕국의 지배 (1349~1772)

1356년, 카지미에시 3세는 도시에 마그데부르크법에 의거한 도시 특권을 주었다. 시 의회를 설립하고 시장을 따로 뽑을 수 있게 된 시민들은 도시 발전을 가속화했다. 르부프는 흑해 발트해 무역권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 도시로서 두 무역권을 연결하며 수많은 상품들이 거쳐감에 따라 부유한 도시가 되어갔다. 도시는 점차 다양한 민족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국제도시가 되어갔고 이에 따라 라틴어를 쓰는 가톨릭 성당,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정교회 성당이 모두 세워지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11] 로마 가톨릭, 아르메니아 가톨릭이 이 도시에 대주교를 두었다. 17세기 초, 르부프는 25,000명의 인구에 30개의 장인 조합을 가진 도시로서 그단스크, 크라쿠프와 더불어 연방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이 시기 도시의 요새화도 잘 이루어져 르부프는 연방 남서쪽의 주요 방어막이 되었다.

17세기 중순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가 가속화되면서 르부프도 여러차례 방어전을 치르게 되었다. 연방이 대홍수에 휩쓸리던 시기에, 카자크 봉기가 루테니아 자포리자 지역에서 발원한 탓에 도시는 반란군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1649년,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 반란군에게 공격당했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뒤이어 1655년 연방을 침공한 스웨덴군이 르부프까지 내려와 도시에 공성전을 펼쳤고 위기에 처한 당시 연방의 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르부프 라틴 성당에서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12]를 폴란드의 수호자이자 여왕으로 대관하며 국가 방어 의지를 다졌다. 이런 결의에 힘입어서인지, 1년의 공성에도 르부프는 떨어지지 않았고 전세도 바뀌어 연방은 각지에서 스웨덴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듬해 르부프는 에르데이 공국의 공격도 받았으나 역시 함락되지 않았다. 1672년 오스만 제국 메흐메트 4세가 연방을 침공하여 르부프도 공성전을 받게 되었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연방은 전쟁에서 패했으나 도시는 함락되지 않았다. 3년 뒤, 연방이 약해졌다고 판단한 오스만 제국에서 또 다시 침공해 왔지만 폴란드에는 1674년 새로운 왕으로 폴란드 민족의 군신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즉위 중이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이번에도 르부프를 포위 공격했지만 1675년 8월 24일, 얀 3세가 도시 근처에서 훨씬 적은 군세로 오스만군을 크게 격파함에 따라 오스만군은 물러나고 3년 전 패배로 잃은 영토도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수많은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연방에 충성하며 함락되지 않았기에, 도시의 새로운 모토는 Semper fidelis(언제나 충성한다)로 정해졌다. 하지만 1704년, 대북방전쟁의 와중에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군에 역사상 처음으로 함락되어 약탈을 당하고 말았다.

연방의 국운은 기울어도 르부프는 함락당한 경험이 적은 데다, 새로운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지면서 도시는 여전히 발전해갔다. 연방의 쇠퇴가 가속화되어 1772년에 1차 폴란드 분할이 일어났을 때, 르부프(렘베르크)는 연방의 갈리치아 영토 상당부분과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3.3.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1772~1918)

렘베르크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성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처음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는 강압적이지 않아서 1773년에는 렘베르크 최초의 신문이 발간되기도 했다. 1784년에는 분할로 잠시 문을 닫았던 대학이 다시 열었고 강의는 폴란드어 라틴어,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19세기부터는 지역 귀족들의 무능을 비판하며 도시의 독일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교육기관들은 독일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독일인, 체코인이 도시로 상당수 이주함에 따라 1840년 경 도시는 폴란드-우크라이나인과 독일인이 양분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독일인을 우대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렘베르크는 1848년 오스트리아 전역에 퍼진 혁명에 동참하여 독일화에 반발하기도 했다. 놀란 합스부르크 왕가는 혁명이 진정된 후 렘베르크에 다시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시기, 도시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폴란드어 방언이라 할 수 있는 르부프 방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는 점점 더 느슨해졌고 1861년에는 도시에 갈리치아 의회가 만들어졌다.

1866년,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한 뒤 심각한 민족주의의 위협에 시달리자, 제국의 다른 피지배민족들의 땅과 더불어 갈리치아에도 1867년부터 광범위한 자치가 허락되었다. 독일화는 중단되었고 폴란드어가 다시 도시의 주된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언론에 대한 검열도 취소되었다. 이와 함께 도시는 아름답게 가꾸어졌다. 많은 건물들이 새롭게 올라왔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 크게 거부감이 없던 갈리치아의 폴란드-우크라이나인들은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건물도 많이 지어 올렸다. 과거부터 번영하던 도시의 토대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어 시가지를 형성했다. 또한 19세기 말 유럽 전역에 퍼진 벨 에포크의 분위기가 렘베르크에도 미쳐 도시에는 극장이 새로 생기는 등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같은 갈리치아에 속한 크라카우와 더불어 렘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지배 하 폴란드인의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 도시는 폴란드인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인 역시 도시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문화를 보존해 나갔다. 우크라이나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던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어를 금지하고 우크라이나인의 자치, 문화적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상당수가 렘베르크로 이동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렘베르크는 세계 최대의 우크라이나인 문화 유산 집합소가 되었다. 또한 경제, 문화, 정치 각 분야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가 세워졌다. 이 무렵, 유대인들도 도시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으며 크라카우와 함께 갈리치아의 유대인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세계 최초의 이디시어 일간지가 렘베르크에서 발간되었다.

하지만 문화적 성장과는 별개로 도시는 경제적으론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였다. 폴란드 분할 이후에도 여전히 귀족, 지주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각종 개혁의 물결이 이곳까지 미치지 못했고 농민들에 대한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데다 지역 자체가 워낙 척박하여 농사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국 중심부와 갈리치아를 잇는 교통망 건설에도 실패하여 갈리치아는 점점 더 고립되고 무역의 혜택도 줄어갔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각종 산적한 국내 문제로 인해 산업화에 큰 관심을 보일 수 없었는데, 갈리치아는 그 작은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이전부터 척박한 땅 때문에 만성적으로 이어지던 갈리치아의 빈곤은 19세기 말 절정에 달했다.

이에 따라 갈리치아의 농민들은 더욱 렘베르크로 몰려들었고 도시의 인구는 이렇게 좋지 않은 이유로 인해 크게 늘었다. 분할 당시 약 3만이던 인구가 1910년 196,000명이 되었고, , 프라하, 부다페스트에 이어 제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는 산업화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고 무역 중심지의 타이틀도 잃어버렸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바르샤바, 독일 제국의 지배를 받던 포젠이 산업화를 통해 경제적으론 크게 성장하던 것과는 달리 렘베르크의 폴란드인들은 자치와 자유,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얻은 대신 경제적으론 힘겨워했다.

1914년 9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를 몰아붙이던 러시아는 렘베르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오스트리아는 도시를 탈환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가 확실해지자 1918년 11월 1일, 현지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독립하여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만들었고 렘베르크를 이 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1919년 1월 22일에는 우크라이나 중부를 통치하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즐루키 협정(Акт Злуки)을 체결하여 서로 합병했다.

3.4. 전간기 (1918~1939)

하지만 독립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던 폴란드인 역시 도시와 동부 갈리치아를 확보해 신생 폴란드에 붙으려 했고, 곧 우크라이나인들과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군 조직을 가지고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이 도시를 장악했고, 도시는 그대로 서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다. 충격에 빠진 폴란드인들은 서우크라이나 독립 당일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십대의 농민 자식들로 구성된 1,400명의 우크라이나 주둔군은 이 봉기를 막을 수 없었고 폴란드인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장악한 뒤 약 340명의 우크라이나인, 우크라이나인을 지지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리곤 우크라이나인의 단체를 모두 폐쇄하고 체포하는 등 폭압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이런 와중 1919년 2월 14일 신생 폴란드군은 르비우의 폴란드인들을 원조하기 위해 서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서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보다 소비에트 러시아를 주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도 1월 7일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략을 당했고 2월 5일에는 수도 키예프가 점령당해서 서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대 우크라이나의 무장세력 중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서우크라이나는[13] 근 9개월간 폴란드를 상대로 버티는 저력을 보여주지만 결국 동부 갈리치아와 르비우 전역이 점령당해 사실상 멸망했다. 서우크라이나 정부는 7월 16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이었던 우크라이나는 대소전쟁에서 폴란드의 도움을 얻으려 했고, 이렇게 동부 갈리치아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간 거래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1920년 4월 21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정부는 폴란드 공화국 정부와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 동부 갈리치아를 폴란드령으로 인정하고 그 댓가로 폴란드의 군사원조를 받았다.[14]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개입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흔한 국경분쟁에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간의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싸우던 벨라루스는 거의 개발되지 않은 가난한 황무지였던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벨라루스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발도 진척되고 토지도 비옥하고 동부를 중심으로 공업화도 이루어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폴란드는 이러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목표로 했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분리를 결코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15]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은 1920년 5월 키예프를 탈환했으나 곧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에 크게 밀려 서쪽으로 퇴각했고, 르비우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신의 전공을 위해 탐내던 도시로 1920년 7월부터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세묜 부됸니가 지휘하는 소비에트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8월 중순 소비에트 러시아의 서부전선군이 바르샤바 전투에서 궤멸됨에 따라 르비우 공략에 들어가는 힘도 약해졌고, 르비우를 공략하던 소비에트 러시아군 역시 8월 말 폴란드군의 반격을 받아 격파되어 철수했다.

이후, 리가 조약으로 전쟁이 폴란드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르부프는 동부 갈리치아와 함께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고 르부프 주의 주도가 되었다. 전간기 르부프는 수도 바르샤바에 이어 두번째로 중요한 경제 중심지였고[16] 타르기 프스호드니에(Targi Wschodnie, 동부 박람회)라는, 루마니아, 헝가리, 소련을 아우르는 주요 무역 박람회가 1921년부터 매년 르부프에서 열렸다. 1931년 경 도시의 인구는 31만에 달했고 그 중 63%가 폴란드인, 24%가 유대인이었으며 11%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폴란드 정부는 우크라이나계 시민들을 차별했다. 우크라이나인 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시 의회에 우크라이나인은 없었다. 우크라이나인을 도발하려는 목적에서인지 시 의회는 1918~1920년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폴란드인들을 기념해 행진 세레모니를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빈에서 1929년 세워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집단(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ї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 ОУН)은 르부프에도 영향을 미쳐 르부프의 폴란드인 경찰국장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것은 2차 대전기 도시에서 일어날 비극의 서막이었다.

정작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의 르부프는 굉장히 가난한 지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국 내부 개발에도 버거워할 정도로 내부 사정이 복잡한 나라였어서 갈리치아 개발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르부프는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계선 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더더욱 르부프를 방치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제2공화국의 르부프는 폴란드 정부가 열심히 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루블린과 더불어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당시 폴란드는 비스와 강을 경계로 이른바 '폴란드A'로 불리는 비스와 강 서쪽의 '부자 지역(대표적으로 그니에즈노, 카토비체, 바르샤바, 크라쿠프, 우치, 포즈난 등)'과 '폴란드B'라고 불리는 비스와 강 동쪽의 '가난한 지역( 르부프, 루블린, 빌노, 브제시치, 비아위스토크 등)'으로 나뉜 상태였는데 르부프는 '폴란드B'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래서 르부프 시는 당시 사회주의 토지개혁을 부르짖는 폴란드 농민당의 최대 표밭이었다. 폴란드 농민당은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인에 대해서는 차별을 주장했다. 중도적반공주의자이자 연방주의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농민당과는 선을 그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르부프 내의 우크라이나인이나 독일인도 이끌고 가려고 했지만 정작 피우수트스키는 르부프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3.5. 제2차 세계 대전 (1939~1945)

르부프는 9월 12일 독일 제1산악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르부프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국경지대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지휘부는 폴란드군의 루마니아 철수를 위해 르부프를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르부프는 일주일 넘게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9월 20일 르부프에 당도한 소련군이 독일군으로부터 자리를 넘겨받고 르부프를 공격했다. 결국 9월 21일 도시는 소련군에 항복했다. 커즌 선에 따라 폴란드 동부를 차지한 소련에 의해 르부프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르부프를 점령하던 소련군은 도시 내 우크라이나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군의 르부프 점령을 환영했다. 하지만 소련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모두를 억압했고 1940년에만 약 3만 명의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들이 도시에서 쫓겨나 소련 내륙으로 이송되었다.
르비우에서 독일군이 벌인 유대인 박해를 촬영한 영상.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르비우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처음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침공을 환영했다. 이들은 과거 오스트리아의 지배 시절을 떠올리며 독일 역시 마찬가지로 관용적인 정책을 베풀어 주고 폴란드와 소련의 통치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리라 믿었다. 6월 30일 도시가 독일에 함락되자 OUN은 르비우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정부의 복원을 선언했는데, 이와 함께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로"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나치는 우크라이나인의 해방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9월에 스테판 반데라, 야로슬라프 스테츠코 같은 OUN 고위인사들을 모두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지하로 들어간 OUN은 더욱 극단적으로 변해서 나치, 폴란드인, 소련 모두와 싸우기 시작했다. 폴란드인 지식인이 처형되고 무작위 일제검거가 일어나는 등 나치와 민족주의자의 세력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모두에게 가혹했다. 이는 소련의 통치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야만적인 '제노사이드', 즉 인종학살이었다.
1941년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직후 르비우 근교의 촐로키우 시(Zolochiv)에서 벌어진 유대인 색출. 영상 속에서 주민들과 친위대원, 독일 국방군 병사들이 '웃으면서' 구경하는 가운데 이웃들이었던 우크라이나계 민병대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유대인 남성은, 영상이 촬영된 다음 날 나치당 친위특무대에 의해 총살당했다. 위 영상이 찍힌 당시 르비우 일대에서는 친위대, 우크라이나인, 국방군이 5일간 약 3000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하지만 이 이후, 우크라이나인 주민들이 독일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숨겨준 사례 또한 다수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들도 유대인들만큼 고통스럽진 못했다. 르부프는 바르샤바, 우치에 이어 폴란드에서 세번째로 큰 유대인 공동체로, 전쟁 직전 도시의 유대인 인구는 약 11만으로 불어났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뒤, 폴란드 서부의 많은 유대인들이 르부프로 탈출함에 따라 독일군 점령 직전 유대인 인구는 무려 22만에 달했다. 하지만 르부프마저 독일에 점령당하자 이들 유대인들에겐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르부프 주둔 SS사령관은 가장 악명높은 살인마 중 하나였던 SS 집단지도자[17] 프리츠 카츠만(Fritz Katzmann)이었다. 도시를 점령한 독일은 우선 NKVD가 정치범 수용소에서 학살을 벌일 때 유대인들이 협력했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선동했다. 물론 실제로는 소련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모두가 NKVD 학살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선동에 넘어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르부프의 폴란드인, 유대인,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그들의 피가 섞인 우크라이나인, 학살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인을 닥치는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총은 기본이요 몽둥이, 칼 등 현지인이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무기가 동원되어 학살이 행해졌다. 이와 함께 아인자츠그루펜 역시 도시의 유대인을 학살하여 한 달이 안되는 기간에 약 1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 역사는 이를 르비우 포그롬( Lviv pogroms)이라 하는데, 폴란드 타 지역에서의 유대인 학살과 달리 현지인들이 주가 되어 인종 학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11월 8일 르부프 교외 자마르스티니프(Замарстинів) 구역에 게토가 만들어졌고 약 12만 명의 유대인들이 게토에 수용되었다. 게토로 이동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페우테브나(Pełtewna)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 다리에 서 있던 SS들은 걸음걸이가 느린 노인, 장애인들을 그 자리에서 총살했고 약 5,000명의 유대인들이 이 다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다른 게토들과 마찬가지로 르부프 게토의 상황 역시 끔찍하기 짝이 없었으며 게토의 유대인들은 독일인 식량 배급의 10%만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첫 절멸수용소 이송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4개월의 기간동안 1만명이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르부프 게토는 절멸수용소 이송이 가장 빨랐던 게토 중 하나로 1942년 3월 15,000명의 유대인이 베우제츠 절멸수용소(Belzec extermination camp)로 이송되었다. 그 뒤 8월 약 5만명의 유대인들이 추가로 베우제츠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43년 1월에는 프리츠 카츠만의 지시로 약 2만명의 유대인과 유대인 경찰 전부가 도시 근교에서 총살당했다. 1943년 6월 나치는 게토를 없애기로 했는데 남아있던 12,000명의 유대인들은 게토 속에 숨겨져있던 피신처로 숨고 일부는 발악적인 저항을 했다. 나치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은신처를 불로 태워 많은 유대인들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극히 일부만이 하수도를 통해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며, 르부프 게토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유대인은 '르부프 임시 유대인 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823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944년 6월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폴란드 이동의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폴란드 영내 진입이 눈앞에 다가오자 소련군보다 먼저 폴란드 주요 도시를 자력 탈환하고 폴란드 독립국가를 세울 목적으로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폭풍 작전'에 따라 폴란드 지하국가(Polskie Państwo Podziemne, 속칭 PPP)에 폴란드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르부프에서도 1944년 7월 21일 PPP의 주력인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속칭 AK)을 중심으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4일의 전투 끝에 국내군은 도시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르비우에서 나치와 민족주의자가 벌인 참극은 끝을 맺었다.

3.6. 전후 (1945~2022)

전후 영국과 폴란드의 수복 노력에도 불구하고[18] 도시는 소련의 구성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도시의 폴란드인들은 모두 추방되었고 추방된 이들은 주로 폴란드가 새로 획득한 독일 영토에 정착했다.[19] 전후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압적인 러시아화가 진행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이 정책은 완화되었고 르비우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문화중심지로 다시 기능하게 되었다. 1950~6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도시에 수많은 공장과 발전소가 세워짐에 따라 도시의 인구는 다시 크게 늘었다. 이 중 리보프 자동차 공장도 있었는데, 무려 30,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며 소련에 공급되는 대부분의 버스를 생산했다. 공업화는 도시에 경제력을 부여하긴 했지만 도시의 서구적인 색채를 일부 지워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할 때, 르비우는 소련으로부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요구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운동(Народний Рух України, Ру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르비우의 인구 대다수를 우크라이나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르비우는 독립 우크라이나의 도시로서 약 600년 만에 다시 우크라이나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도시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주요 문화중심지로서 우크라이나인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은 서구적인 도심지를 가지고 있다. 1998년 유네스코는 동유럽과 서유럽의 문화가 조화롭게 융화되었다는 점, 이 도시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들의 문화적 중심이 되었다는 점을 인정해 르비우 구시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위기로 키이우를 포함한 나라 동부가 혼란에 빠졌을 때 르비우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우크라이나인이 압도적 다수라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3.7.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시기(2022~ )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르비우도 러시아군의 공습을 받아 전쟁터로 변하였다. 그래도 이 지역은 비교적 후방이라 예비군 및 의용군 모집 등의 임무가 수행되고 있으며, 만약 키이우가 함락되었다면 이곳이 몰락한 젤렌스키 정부의 임시 거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2022년 4월 2일 키이우 전투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승리하면서 가능성은 없어졌다. 다만 서방 물자의 집적지 역할을 하기 때문인지 러시아가 집요하게 미사일 공격으로 도시를 공격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상자가 나오는 등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난 도시라고 하긴 어렵다. 또한 마치 한국전쟁의 부산과 비슷하게 전쟁터인 동부에서 전쟁을 피해 르비우에 이주하는 동부인들이 많은 편인데 덕분에 도시 인프라를 넘어선 인구의 확대로 골치를 앓는 대다가 동부인들은 서부인들과 언어도 달라[20] 곤욕을 치르고 있다.
평화롭고 조용한 2022년 6월의 르비우 거리

그렇다고 해도 역시 최후방이다보니 키이우에서조차 러시아군이 물러간 4월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시기에 르비우가 가장 평화로운 우크라이나 지역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해당 동영상은 6월 26일에 올라온 동영상인데 르비우가 이렇게 일상의 평화를 만끽하던 순간에 동부에서는 세베로도네츠크 리시찬스크를 두고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이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겠다. 이렇듯 반러의 중심지였지만 역으로 러시아의 공격에서는 먼 후방에 위치해 평화를 누리는 갈리치아를 비롯한 서부 우크라이나와 친러의 중심지였으면서 러시아에게 배신당하고 생지옥이 된 동부, 남부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극명히 갈린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경제 중심지가 점점 르비우로 옮겨가는 중이다. # 그러면서 러시아군 포로 수용소도 여기 있다.

2023년에도 다른 지역에 비하면 폭격 빈도가 줄어들었으나, 7월 6일. 러시아군이 대규모 미사일 폭격을 감행하여 40여명 이상 사망, 부상과 함께 르비우 구시가지 내 완충지역의 역사적 건물이 일부 파괴되었다.

2024년 3월 24일,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 대선 기간을 노린 대대적인 벨고로드 재침투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크림반도에 공습을 가하자 14대 가량의 Tu-95MS가 보복 공격을 위해 르비우에 순항미사일을 발사했으며, 약 20발의 순항미사일과 7기의 샤헤드 자폭드론에 공격받았다. #

9월에도 러시아군이 미사일 공습을 다시 발생하였으며, 그 중 아버지를 제외한 어머니와 세 딸 등 일가족 4명이 일시에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다. #

4. 관광

파일:Lvivoperahouse.jpg
  • 르비우 오페라 하우스

르비우는 구시가지와 문화 유산이 매우 잘 보존된 도시이다. 현대 르비우 시의 도심은 구시가지를 거의 그대로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관광하기에 더욱 편리하다. 르비우는 역사적으로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라 최근 한국에서 나름대로 유명해진 폴란드의 고도(古都) 크라쿠프와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역사적인 중요성에 비해서 르비우는 크라쿠프보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편인데, 프라하-빈-부다페스트-크라쿠프로 이어지는 한국인들의 중부유럽 주요 여행코스에서 르비우는 동선상 너무나 많이 비켜나 있고 상대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생소하고 정치 지형이 불안정한 우크라이나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르비우에는 유럽 관광객은 좀 있지만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 관광객은 매우 찾아보기 어렵다. 8년 전에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돈바스 전쟁이 일어나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르비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전역을 여행 자제 지역으로 지정했는데, 비교적 영향이 적음에도 같이 여행 자제로 묶인 서부의 르비우[21]가 앞으로 한국의 관광객들에게 그 진가가 드러내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여행자 보험 받기도 상당히 까다로운데, 르비우에서 동부 우크라이나까지 가려면 기차타고 하루종일 가도 모자른 상황인데도, 여행자 보험 회사들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싸그리 묶어서 여행자 보험 신청조차 안 받아준다. 결국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그에 따라 우크라이나 전역이 여행금지로 지정되며 르비우 여행은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가는 방법은 쉽지 않다. 기차를 타고 간다면 크라쿠프와 부다페스트에서 직통으로 갈 수 있는데, 크라쿠프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야간열차로 새벽 4시 경 이루어지는 국경검문 포함 약 7시간 반 정도 걸리며 매일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여름 기준으로 아침에 출발해 저녁에 도착하여 하루 일정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 그리고 초저녁에 출발해 다음날 오전에 도착하는 야간열차 이렇게 두 편이 있으며 모두 13시간 반 정도 걸린다. 물론 폴란드와 헝가리, 슬로바키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시간표를 확인해 기차편을 요리조리 연결해서 갈 수 있지만 역시 하루 일정 전체를 잡아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따라서 크라쿠프에서 들어가는 편이 '일정상'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가격은 가장 싼 침대칸도 50,000원 정도로 비싼 편이다. 크라쿠프에서 출발하는 훨씬 저렴한 야간 버스도 있다. 물론 교통 스케줄은 매년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여행자 본인이 직접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항공편으로 르비우 시를 방문하는 방법은 튀르키예 이스탄불 공항을 이용하여 터키항공 직항 비행기로 르비우 시를 여행가는 코스를 추천한다.[22] 이스탄불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에서 르비우로 직항하는 페가수스 항공 비행기가 있긴 하지만 한국 사람 입장에서는 사비하 괵첸 공항을 이용하기에는 거리 문제상 좀 껄끄럽다.[23] 튀르키예 이스탄불이나 폴란드 바르샤바 이외에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항공편으로 르비우 시로 이동하게 될 경우에는 대개 우크라이나 국제항공을 통해서 키이우를 경유하여 이동하는 것도 좋은 옵션이다.[24]

공항에서 도심으로 택시로 이동하는 경우,[25] 5배 이상 바가지 쓰기 싫다면 무조건 우버나 얀덱스 앱으로 택시를 잡아야 한다.[26] 우크라이나의 택시 기사들은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를 못하고 영어만 하는 관광객들을 아예 대놓고 호구로 보며, 심지어 혼자 택시에 타는 외국인 여자 승객의 몸을 더듬는 개객기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27] 다행히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소매점이나 식당 등에는 영어가 통하기 때문에 언어 문제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말 걸면 일부러 영어로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아는 상태에서 가면 여행이 더 편해지기는 한다.

1박 2일이면 넉넉하게 주요 관광 포인트를 둘러볼 수 있다. 다만 첫날 저녁에는 꼭 발레 감상을 일정에 넣도록 하자. 르비우 오페라 발레 극장에서 믿을 수 없는 가격으로(3000원~가장 좋은 좌석도 우리 돈 20,000원 내외) 수준 높은 발레를 볼 수 있다. 다만 7월 중순~8월 중순까지는 유럽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스케줄이 없으니 주의하기 바란다. 도시의 치안은 전반적으로 안정된 편이다.[28] 소매치기는 보기 힘들며, 마트에서 먹을 걸 사서 호텔로 돌아올 때 특정 확률로 뜬금없이 행인 한명이 나타나서 한입만 달라고 귀찮게 구는 정도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비해서 숙박비를 비롯한 여행물가가 훨씬 저렴한 편이다. 2019년 1월 기준으로 도심 호텔 레스토랑의 런치세트가 100흐리우냐(한화 4천원) 정도.

5. 정치

이곳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가장 강한 곳이다. 우크라이나 서부[29]는 1939년 이전까지 러시아의 지배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어서 키이우, 하르키우, 도네츠크, 오데사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러시아인들과 같이 살아보거나 러시아어를 썼던 경험이 없다. 도시 근교로 조금만 이동해도 러시아어가 아예 하나도 안 통한다. 반러 감정이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강한 곳 중 하나로 구시가지의 재래 시장에 나가보면 푸틴의 얼굴이 그려진 화장실 휴지를 많이들 팔고 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지배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 우크라이나 중부 지역과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동질감을 느끼지만 서부 지역의 사람들은 완전히 남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래선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면서 폴란드를 꼬드길 마음으로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가 가지라고 유화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흔히 러시아인들이나 러시아 시각에서 쓰여진 역사책에서는 서부 우크라이나가 친폴란드적이라는 선입견이 존재하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폴란드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않다.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에도 좋지 못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반폴란드, 반러시아 성향을 가진 극우 정당 스보보다의 지지도가 높은데, 폴란드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전 대통령이 서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극우 청년에게 계란을 맞았다.

특히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로는 우크라이나 갈리치아당 등 지역정당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결선에서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전 지역에서 이기는 동안 재외국민과 함께 페트로 포로셴코가 이긴 지역이기도 한다. 이곳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유대인 혈통이면서[30] 모어가 러시아어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떨떠름해했다. 다만 젤렌스키 대통령이 2022년 러시아군의 침공에도 피신하지 않고 키이우에서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우크라이나가 선전하면서 이젠 서부에서도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상승했다.

6. 여담

도네츠크에 기반을 둔 FC 샤흐타르 도네츠크 유로마이단의 여파로 일어난 돈바스 전쟁으로 2014년 이후 동부 돈바스 지역이 친러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자 도네츠크 대신 이곳 르비우에서 홈경기를 치르고 있다.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농업이 주 산업인 우크라이나 서부 특성상, 우크라이나 서부 전역의 대학생들이 르비우로 몰려든다. 우크라이나어를 전혀 몰라도 도심지에서는 영어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시민들의 친유럽 성향이 강하고 우크라이나에서 IT 업계의 중심지인만큼 르비우는 힙스터들의 소굴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한다. #

고전배우 폴 무니, 영화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가 이곳에서 출생했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이다 보니 2021-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 와중에는 여러 나라가 르비우로 대사관을 이전하고 있다. 현재까지 외교 활동을 이전한 것으로 확인된 국가들은 미국, 네덜란드, 호주, 독일, 영국 캐나다 등이 있다. 한국 주 우크라이나 대한민국 대사관도 르비우에 임시 사무소를 열었으나 상황의 악화로 철수하였다. 이후 한국 대사관은 4월 30일 키이우로 복귀하였다. #

[1] 미 해병대의 슬로건과 동일하다. [A] 2022년 기준 [서머타임] 일광절약시간제: UTC+3 (EEST) [4] 2008년 등록확장 [5]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6]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 [7] 보다 큰 도시는 키이우, 하르키우, 오데사, 드니프로, 도네치크, 자포리자 순인데 모두 우크라이나 중부 및 동부에 있다. [8] 1349~1772, 1920~1939. [9] 과거에 이 도시가 오스트리아의 도시였을 때는 독일어권 밖에서도 렘베르크라는 명칭이 많이 통용되었지만, 요즘은 독일어권에서도 렘베르크라 부르기보다는 그냥 우크라이나어를 음역해서 Lwiw(르비프)라 부른다. [10] 어머니가 루테니아의 공주였던 마리아이다. 따라서 루테니아 왕국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1323년부터 1340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유리로 바꿔 루테니아 통치를 시작했지만 현지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결국 귀족들은 그를 암살했다. [11] 현재도 르비우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최서단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으며, 우크라이나 서부에 약 500만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12] 폴란드 가톨릭 최고의 성물로 실롱스크 주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고라 성당에 모셔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폴란드 항목의 종교 장을 참고. [13] 우크라이나의 비(非)러시아 세력 중 군사력을 갖춘 독립세력은 크게 3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다른 하나는 네스토르 마흐노 마흐노우슈치나, 마지막 하나가 서우크라이나. 병력은 각 세력이 10만 가량으로 서로 엇비슷했지만 서우크라이나의 군대가 훈련도가 더 높고 규율도 있었다. [14] 해당 조약은 우크라이나에서 엄청난 논란을 야기했다. 폴란드와 직접 총칼을 맞댄 서우크라이나 대통령 예우헨 페트루셰비치(Євген Петрушевич)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했다. 다른 우크라이나인들도 소비에트 러시아만큼이나 폴란드를 미워했다. [15] 러시아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9년 적백내전에서 남러시아군을 이끌고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데니킨이 안장된 돈스코이 묘지를 참배하던 도중 "데니킨은 우리들(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오직 러시아의 권리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정도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분리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입장이야 물론 다르지만. [16] 오스트리아의 지배기간 동안 르부프는 크라쿠프를 추월해 갈리치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17] Gruppenführer. 중장에 상응. [18] 폴란드는 본래 오데르-나이세 선의 실롱스크를 보상으로 받는 것을 거부하고 르부프를 돌려받기를 원했고,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도 르부프를 돌려받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상을 벌였지만 스탈린이 '내가 커즌 경 보다도 더 영국스러운 인간이라고 소련인들에게 말해야겠소?'라는 답변으로 거부했다. [19] 상당수의 舊 르부프 시민이 폴란드가 새로 얻은 실롱스크의 최대도시 브로츠와프에 정착했는데 이를 주제로 한 씁쓸한 농담이 있다. A: 자네 말투가 왠지 낯설지가 않구만. 어디에서 왔나? B: 브로츠와프에 살아. A: 이런 우연이 있나! 나도 르부프 출신인데! [20] 전쟁터인 동부지역은 러시아어 우세 지역이지만 르비우는 우크라이나어 절대 우세 지역이다. [21] 론리플래닛 동유럽판에서도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와 크림 반도의 여행 정보는 빼 버렸지만(즉 론리플래닛 편집진이 판단하기에도 그 지역들은 관광객이 갈 상황은 아니라고 본 것), 키이우와 르비우는 남아서 계속 갱신되고 있다. [22]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LOT를 통해 직항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 [23] 기내식이나 이동거리를 함께 계산하면 이스탄불을 통해서 터키 항공을 이용하는 게 더 저렴하다. [24] 참고로 우크라이나 국제 항공은 트립 어드바이저 리뷰가 악평이 많긴 하지만, 대부분 장거리 노선인 뉴욕-키이우-델리 노선의 운영 미숙 문제이며, 단거리 노선의 경우는 한국인 입장에서 익숙한 동남아 저가 항공사에 비해서는 훨씬 훌륭한 편이다. [25] 17분 정도 소요. [26] 4천원에서 7천원 사이가 적정 가격이다. [27] 우버 택시나 얀덱스 택시 같은 경우에는 택시 기사에게 별점 평가를 매기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런 개객기 기사는 금방 퇴출당한다. [28] 다만 몇몇 젊은 남성들이 종종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째려보는 경우가 있다. [29] 갈리치아 3주(갈라치아는 르비우, 스타니슬라비우, 테르노필)와 자카르파탸, 체르니우치를 포함한 5개주(州)를 가리킨다. 다만 자카르파탸는 헝가리인, 체르니우치는 루마니아인 소수민족이 있다보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아예 없다. [30] 르비우는 역사적으로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했던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