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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시대

平成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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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
아스카
시대]]
다이카(大化) 하쿠치(白雉) - 슈초(朱鳥) - 다이호(大宝) 게이운(慶雲) 와도(和銅)
와도(和銅) 레이키(霊亀) 요로(養老) 진키(神亀) 덴표(天平) 덴표칸포(天平感宝) 덴표쇼호(天平勝宝) 덴표호지(天平宝字) 덴표진고(天平神護) 진고케이운(神護景雲) 호키(宝亀) 덴오(天応) 엔랴쿠(延暦)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엔랴쿠(延暦) 다이도(大同) 고닌(弘仁) 덴초(天長) 조와(承和) 가쇼(嘉祥) 닌주(仁寿) 사이코(斉衡) 덴난(天安) 조간(貞観) 간교(元慶) 닌나(仁和) 간표(寛平) 쇼타이(昌泰) 엔기(延喜) 엔초(延長) 조헤이(承平) 덴교(天慶) 덴랴쿠(天暦) 덴토쿠(天徳) 오와(応和) 고호(康保) 안나(安和) 덴로쿠(天禄) 덴엔(天延) 조겐(貞元) 덴겐(天元) 에이간(永観) 간나(寛和) 에이엔(永延) 에이소(永祚) 쇼랴쿠(正暦) 조토쿠(長徳) 조호(長保) 간코(寛弘) 조와(長和) 간닌(寛仁) 지안(治安) 만주(万寿) 조겐(長元) 조랴쿠(長暦) 조큐(長久) 간토쿠(寛徳) 에이쇼(永承) 덴기(天喜) 고헤이(康平) 지랴쿠(治暦) 엔큐(延久) 조호(承保) 조랴쿠(承暦) 에이호(永保) 오토쿠(応徳) 간지(寛治) 가호(嘉保) 에이초(永長) 조토쿠(承徳) 고와(康和) 조지(長治) 가쇼(嘉承) 덴닌(天仁) 덴에이(天永) 에이큐(永久) 겐에이(元永) 호안(保安) 덴지(天治) 다이지(大治) 덴쇼(天承) 조쇼(長承) 호엔(保延) 에이지(永治) 고지(康治) 덴요(天養) 규안(久安) 닌페이(仁平) 규주(久寿) 호겐(保元) 헤이지(平治) 에이랴쿠(永暦) 오호(応保) 조칸(長寛) 에이만(永万) 닌난(仁安) 가오(嘉応) 조안(承安) 안겐(安元) 지쇼(治承) 요와(養和) 주에이(寿永) 겐랴쿠(元暦)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
시대]]
겐랴쿠(元暦) 분지(文治) 겐큐(建久) 쇼지(正治) 겐닌(建仁) 겐큐(元久) 겐에이(建永) 조겐(承元) 겐랴쿠(建暦) 겐포(建保) 조큐(承久) 조오(貞応) 겐닌(元仁) 가로쿠(嘉禄) 안테이(安貞) 간키(寛喜) 조에이(貞永) 덴푸쿠(天福) 분랴쿠(文暦) 가테이(嘉禎) 랴쿠닌(暦仁) 엔오(延応) 닌지(仁治) 간겐(寛元) 호지(宝治) 겐초(建長) 고겐(康元) 쇼카(正嘉) 쇼겐(正元) 분오(文応) 고초(弘長) 분에이(文永) 겐지(建治) 고안(弘安) 쇼오(正応) 에이닌(永仁) 쇼안(正安) 겐겐(乾元) 가겐(嘉元) 도쿠지(徳治) 엔쿄(延慶) 오초(応長) 쇼와(正和) 분포(文保) 겐오(元応) 겐코(元亨) 쇼추(正中) 가랴쿠(嘉暦) 겐토쿠(元徳)
남조
겐코(元弘)
북조
겐토쿠(元徳) 쇼쿄(正慶)
겐코(元弘) 쇼쿄(正慶)
겐코(元弘) 겐무(建武)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시대]]
남조
엔겐(延元) 고코쿠(興国) 쇼헤이(正平) 겐토쿠(建徳) 분추(文中) 덴주(天授) 고와(弘和) 겐추(元中)
북조
겐무(建武) 랴쿠오(暦応) 고에이(康永) 조와(貞和) 간노(観応) 분나(文和) 엔분(延文) 고안(康安) 조지(貞治) 오안(応安) 에이와(永和) 고랴쿠(康暦) 에이토쿠(永徳) 시토쿠(至徳) 가케이(嘉慶) 고오(康応) 메이토쿠(明徳)
메이토쿠(明徳) 오에이(応永) 쇼초(正長) 에이쿄(永享) 가키쓰(嘉吉) 분안(文安) 호토쿠(宝徳) 교토쿠(享徳) 고쇼(康正) 조로쿠(長禄) 간쇼(寛正) 분쇼(文正) 오닌(応仁)
[[센고쿠 시대|
센고쿠
시대]]
오닌(応仁) 분메이(文明) 조쿄(長享) 엔토쿠(延徳) 메이오(明応) 분키(文亀) 에이쇼(永正) 다이에이(大永) 교로쿠(享禄) 덴분(天文) 고지(弘治) 에이로쿠(永禄) 겐키(元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겐키(元亀) 덴쇼(天正) 분로쿠(文禄) 게이초(慶長)
게이초(慶長) 겐나(元和) 간에이(寛永) 쇼호(正保) 게이안(慶安) 조오(承応) 메이레키(明暦) 만지(万治) 간분(寛文) 엔호(延宝) 덴나(天和) 조쿄(貞享) 겐로쿠(元禄) 호에이(宝永) 쇼토쿠(正徳) 교호(享保) 겐분(元文) 간포(寛保) 엔쿄(延享) 간엔(寛延) 호레키(宝暦) 메이와(明和) 안에이(安永) 덴메이(天明) 간세이(寛政) 교와(享和) 분카(文化) 분세이(文政) 덴포(天保) 고카(弘化) 가에이(嘉永) 안세이(安政) 만엔(万延) 분큐(文久) 겐지(元治) 게이오(慶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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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시대
平成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일본어 [ruby(平, ruby=へい)] [ruby(成, ruby=せい)][1]
개막 1989년 1월 8일
종막 2019년 4월 30일 (30년)
천황 아키히토 천황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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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타 노보루 (1989)
우노 소스케 (1989)
가이후 도시키 (1989~1991)
미야자와 기이치 (1991~1993)
호소카와 모리히로 (1993~1994)
하타 쓰토무 (1994)
무라야마 도미이치 (1994~1996)
하시모토 류타로 (1996~1998)
오부치 게이조 (1998~2000)
모리 요시로 (2000~2001)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1~2006)
아베 신조 (2006~2007, 2012~2019)
후쿠다 야스오 (2007~2008)
아소 다로 (2008~2009)
하토야마 유키오 (2009~2010)
간 나오토 (2010~2011)
노다 요시히코 (2011~2012)
이전 쇼와 (昭和)
다음 레이와 (令和)

1. 개요2. 용례3. 연호/출전(出典)
3.1. 202년 만의 생전 퇴위와 차기 연호
4. 시대적 특징
4.1. 잃어버린 30년(1992~2019)4.2. 1998년 한일관계의 대대적인 정상화4.3. 쇼와 시대 서브컬쳐와의 차이점
4.3.1. 아이돌 성우 양성 시대4.3.2. 라이트 노벨의 전성기4.3.3. 가상 캐릭터들의 노래와 음악4.3.4. 심야 및 서브컬쳐 애니메이션의 전성기와 강세4.3.5. 아동 및 여아, 청소년 애니메이션
5. 주요 인물들6. 사건
6.1. 헤이세이 원년 ~ 헤이세이 9년( 1989년 ~ 1997년)6.2. 헤이세이 10년대( 1998년 ~ 2007년)6.3. 헤이세이 20년대( 2008년 ~ 2017년)6.4. 헤이세이 30년대( 2018년 ~ 2019년)
7. 기타

[clearfix]

1. 개요

아키히토 천황이 재위했던 1989년 1월 8일 0시 00분 00초부터 2019년 4월 30일 23시 59분 59초까지 사용된 일본 연호이자 시대 구분. 2019년 4월 30일, 고쿄 세이덴 마쓰노마에서 202년 만에 이루어진 당시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平成, 전각 문자 한 글자 공간에 넣으면 .[2] 한국식 독음으로는 평성이라고 읽는다.

이 연호를 제안한 사람은 야마모토 다쓰로(山本達郎; 1910~2001) 도쿄대학 명예교수이다.

이 연호를 쓰던 시절의 천황탄생일은 12월 23일이었다. 현재는 평일로 환원되었다.

2. 용례

서기 1989년이 '헤이세이 원년(元年)'이다. 즉, 1989년 = '헤이세이 원년(1년)', 1990년 = '헤이세이 2년' 식으로 진행했다.

서기 2010년은 일본 연호로 헤이세이 22년. 그래서 일본에서는 2010년(헤이세이 22년) 222에 다양한 이벤트가 전국 각지에서 펼쳐졌다.[3]

연호가 바뀐 시점이 새해 벽두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던 탓에, 이전 연호였던 쇼와(昭和)와 현재 연호인 헤이세이(平成)를 세대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1988년까지의 출생자를 쇼와 세대, 1989년부터의 출생자를 헤이세이 세대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히로히토가 사망한 것은 1989년 1월 7일로, 1989년 1월 1일부터 일주일간은 쇼와 64년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연도만으로 세대를 나누는 것은 사실 적절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러나 일본 현지의 민간 홈페이지나 매체 대부분 1989년을 쇼와 64년이 아닌 헤이세이 원년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아무래도 1989년 중 쇼와 64년이었던 시기가 1년 365일 중 고작 7일 밖에 안 되어서가 큰 것 같다.[4] 그래서 1926년 12월 25일~1989년 1월 7일이 쇼와지만 사실상 1927년 1월 1일~1988년 12월 31일로 인식되고 있다. 반대로 레이와 시대의 시작은 2019년 5월 1일이고, 무엇보다도 아키히토의 이례적인 생전 퇴위로 인해 한 달 전인 4월 1일부터 새 연호가 미리 공개되는 등 새 시대의 준비 과정이 몹시 떠들썩했기 때문에 그 기억이 많이 남아서 2019년은 헤이세이, 레이와 두개의 시대로 인식되고 있다.

3. 연호/출전(出典)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갈 때의 방송자료( 후지TV, 1989년 1월 7일~8일)[5]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갈 당시 어떤 사람이 캠코더로 찍은 당시의 특별 프로그램들(1989년 1월 7일~8일)[6][7]
새연호 발표 장면(2:00부터). 4:3 비율의 아날로그 감성이 상당히 인상깊은 영상자료이다.[8]
파일:헤이세이 아저씨.jpg
1989년 1월 7일 새로운 연호, 헤이세이를 발표하는 오부치 게이조 당시 내각관방장관.
쇼와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가 됨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新しい元号は、「平成」であります。
새로운 연호는, '헤이세이'입니다.
오부치 게이조 당시 내각관방장관의 새 연호 발표
연호 '平成'은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제순(帝舜)의 "内[원문]
(내평외성: 집안은 화목해지고 밖은 안정을 이루었다.)"와 <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地(지평천성: 땅이 다스려짐에 하늘의 일이 이루어진다)"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연호를 정할 당시 <서경>의 해당 부분이 청나라 고증학자들의 연구로 위서라는 사실이 고증되었고, 헤이지(平治, 1159~1160) 연간이 전란으로 혼란스러웠기에 이후 平으로 시작하는 연호를 피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平에는 干(방패)이 있고 成에는 戈(창)이 있으니 곧 '방패와 창'은 전쟁을 의미한다고 해서 다른 걸로 고르자는 반대 의견이 있었다.[10] 그러나, 이때 연호 결정 시 최종안에 올라왔던 후보인 헤이세이(平成), 슈분(修文), 세이카(正化)[11] 중 슈분(Shubun)과 세이카(Seika)는 직전 연호인 쇼와(Showa)와 알파벳 이니셜이 겹치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헤이세이(Heisei)로 결정되었다.[12] 그 밖에 올라왔던 또 다른 후보는 분시(文思), 덴쇼(天章), 고쇼(光昭)가 있었다.

헤이세이(平成)라는 연호안은 이미 에도 시대 말기 게이오(慶應)로 개원했던 1865년 당시 연호의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 전거 역시 <사기>와 <서경>이었다.

헤이세이(平成) 연호안 발표 이전에는 일본의 고전서를 출처로 하는 방안이 있었지만, 최종안에 남아있지 않아 무산되었다. 훗날 30년 뒤, 나루히토가 즉위하며 일본 고전 화가집인 《 만엽집》(万葉集)의 〈매화의 노래〉에서 따온 '레이와'(令和)를 연호로 정하였다. 그러나 〈매화의 노래〉가 연대상 수백 여년 앞서는 후한 장형이 지은 〈귀전부〉(歸田賦)의 구절을 참고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지며 실상 다시 중국 고전에서 유래하는 연호를 쓰게 되어 버렸다.

헤이세이 아저씨가 들고 있던 저 액자는 이후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내각총리대신의 저택에 걸려있었으나 다케시타 사후 유족들의 논의에 따라 국가에 무상 기증되어 현재는 국립공문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13] 대신 다케시타의 저택에는 레플리카가 걸려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는 당사자들만 알겠으나 이 헤이세이가 개원할 시점의 총리와 내각관방장관은 둘 다 와세다대학 출신이다.[14]

간혹 선대 천황인 아키히토 상황을 일컬어 헤이세이 천황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본의 예법상 이는 틀린 것이다. 아키히토가 사망하면 일세일원의 원칙(천황 한 명에 연호 한 개)에 따라 추존 시호로 헤이세이 천황이 되는 것이 확실하지만,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후 명칭이 되므로 아직 살아 있는 덴노의 명칭이 될 수 없다. 즉 일반인으로 따지면, 살아있는 사람을 '고 XXX 님'이라고 부르거나, 명절날 어르신에게 세배하면서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소리다.

따라서 심각한 결례가 되기에 일본인은 보통 '천황 폐하' 등의 경칭으로 부르지만 외국인은 다른 유럽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이름을 불러 아키히토(Akihito)라고 칭하면 무방하다. 후술되는 생물학 논문에서도 저자 명의로서 'Akihito'로 표기된 예가 있다.

3.1. 202년 만의 생전 퇴위와 차기 연호

2010년 7월 22일 이미 생전 퇴위를 밝혔다. 그러다가 2016년 8월 8일에 궁내청을 통해 생전 퇴위 의사를 다시 한번 확고히 밝혔다. 헤이세이 31년 2019년 4월 30일에 202년 만에 일본국 역사상 처음으로 생전 퇴위하고 천황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삼종의 신기(三種神器)는 맏아들 히로노미야 나루히토[15] 황태자에게 황위가 세습되면서 '상황(上皇)'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2018년 7월 1일에 신 연호를 미리 발표하고, 헤이세이 30년이 되는 2018년 12월 31일 헤이세이 시대를 마감하고, 나루히토 황태자가 아버지 아키히토에 이어 일본의 제126대 천황에 즉위하는 2019년 1월 1일부터 신 연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궁내청은 연말에 행사가 많아 이때 퇴위식과 즉위식을 연이어 열고 연호를 바꾸면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판단해 아키히토의 퇴위 날짜와 헤이세이 시대 종료일을 4월 30일로 조정하고, 나루히토의 즉위와 새 연호 사용은 5월 1일 0시부터 하기로 최종적으로 공식 발표했다. # 이때부터는 모든 행정 시스템상의 공문서 날짜 기준이 연호 대신 서기로 바뀐다. 단 전산상의 날짜 한정이고, 실제 종이로 제출 및 보관하는 경우에는 여전히 연호와 서기를 병기한다. # 새로운 연호는 4월 1일 발표되었다.

2019년 4월 1일 새 연호 발표는 우선 9시 30분경에 전문가들이 참여한 간담회를 여는데 여기서 5개나 그 이상의 연호 후보군이 제시되고 10시 20분경에 정부가 이 후보안 설명을 들고 중의원 의장 공저로 찾아가 중의원, 참의원 의장단의 의견을 각각 듣는다. 이후 아베 총리가 주재하는 임시 각료 회의(臨時閣僚会議)에서 최종결정을 하게 되며, 헤이세이 발표 때처럼 현직 내각관방장관인 스가 요시히데가 약 11시 30분 정도에 발표하며 이후 12시에 아베 신조 총리가 총리관저 기자회견실에서 연호에 대한 대국민 담화를 할 예정이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이미 리허설까지 여러번 마쳤다고 한다. |#

새 연호는 일단 과거 연호의 영문명 앞글자 이니셜인 M(메이지), T(다이쇼), S(쇼와), H(헤이세이)는 피할 걸로 관측된다. "S50"(쇼와 50년) 같은 표기가 있기 때문으로 실제 헤이세이 당시에도 후보군이었던 세이카(正化), 슈분(修文)이 탈락한 이유, 선례가 있기 때문. 일각에선 아베 총리의 이름과 비슷한 '안큐(あんきゅう/安久)'가 유력하다는 찌라시급의 소문도 있었지만 속용(널리 쓰임)되는 말이라서 제외되었다는 보도가 나온 상황.

2019년 4월 1일 "오전 11시 42분경"에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이 새로운 연호를 공식 발표했다. 새 연호는 레이와(令和). 이에 따라 헤이세이는 4월 30일 23시 59분까지 쓰이고 레이와 시대 5월 1일 0시에 바로 개원(開元)해 비로소 헤이세이 시대는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레이와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 시대적 특징

헤이세이 시대가 개막한 1989년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가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이후 1992년 일본은 주식 부동산 등 자산 시장의 거품이 붕괴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 침체에 돌입했다. 그래서 헤이세이 시대는 '살 맛 나던 시대'로 기억되는 전후 쇼와 시대와는 달리 일본이 빛나는 고도성장기를 뒤로 하고 저성장의 늪에 빠진 시기로 기억된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전후 쇼와 시대는 1997년 외환 위기 이전과, 헤이세이 시대는 외환 위기 이후와 유사한 셈이다.[16]

일본 밖에서는 1947년 트루먼 독트린 이후 40년 넘게 세계를 갈라 놓았던 미 · 소 냉전이 종식된 시기였다. 1985년 집권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개혁을 시도했으나, 공산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공산권 전체가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헤이세이 개막 1년 전 이웃나라 대한민국에서 열린 서울 올림픽에 공산권 국가 선수단이 대거 참가할 만큼 인류는 첨예한 이념 대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헤이세이가 개막한 1989년부턴 동유럽 각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공산권 붕괴했으며 이듬해 독일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헤이세이 개막 이후인 1991년에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되면서 냉전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체제 유지에 위기감을 느낀 이웃나라 북한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고, 이후 일본인 납북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으며 2010년대 이후로는 해상으로 미사일 발사를 반복한 탓에 북일관계 남북관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냉전을 겪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1955년부터 이어져온 자민당 독주 체제가 처음으로 무너졌었다. 거품경제 붕괴와 지속적인 부정부패 스캔들로 인해 자민당은 1993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그 결과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非)자민 7당 연립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호소카와 내각은 정치자금 문제로 총리가 사임하면서 1년도 되지 않아 붕괴했고, 내부 분열로 인해 연정도 와해되었다. 이후 일본사회당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로 등극했으나 이는 자민당과 대연정한 대가였고, 1996년 1월부턴 다시 자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된다. 일본에서 다시 비자민당 출신 총리가 나타난 것은 2009년의 일이었다. 2006년 후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물러난 이후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로 이어지는 3년간의 회전문 총리 시대로 알 수 있듯 당시 자민당의 리더십이 빈약했고, 여기에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대침체까지 겹쳐 일본 경제가 역성장하면서 2009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해 전후 최초로 단독 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그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잘 수습하지 못했고, 경제 정책 실패에 더해 그즈음 있었던 중 · 일 경제력 역전으로 인한 위기감 탓에 일본 사회의 우경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2012년 다시 아베 신조의 자민당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또한 전후 수십 년간 평화주의 정책을 유지해온 일본이 본격적으로 재무장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미 2000년대 초반 고이즈미 정권 당시부터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2010년대 들어선 아베 정권이 평화헌법을 재해석해 집단적 자위권을 주장함으로써 대외 군사 개입의 명분을 마련했다. 일본의 재무장과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의 전환은 1950년대부터 내려온 일본 극우 세력의 오랜 염원이기도 하지만, 대외 군사 개입 부담을 줄이고 대신 동맹국 일본의 자위대를 활용하려는 미국의 의중이 담겨 있기도 하다. 때문에 아베 정권은 집단적 자위권 주장 및 군비 증강과 함께 NATO를 필두로 한 서방과 밀착하면서 중국 견제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 사회에 우경화 바람이 불면서[17] 역사수정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해 대한민국[18] 중국[19]과의 역사 분쟁이 격화되기도 했다.[20]

4.1. 잃어버린 30년(1992~2019)

헤이세이 시대의 초창기는 많은 일본인들이 그리워하는 일본 경제의 최전성기 즉,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붕괴되고 현재까지도 일본경제를 끈질기게 발목 잡고 있는 장기적인 불황기에 진입하게 되었다. 일본의 경제학자, 경제평론가들이 1990년대[21]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렀으나 10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거품붕괴의 악영향이 완전히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2000년대[22] 잃어버린 20년으로 연장되었다. 일본의 2010년대[23]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초대형 재해로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 일본을 상징하는 제조업 강국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수출이 부진해지자 2011년을 시작으로 전대미문의 3년 연속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大前研一)를 비롯한 일부 지식인들은 헤이세이사(平成史)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실패한 시대'로 단정하고 있다.

4.2. 1998년 한일관계의 대대적인 정상화

쇼와 시대와는 다르게 특이하게도 현재의 한국의 젊은층들에게는 꽤나 친숙한 연호이기도 하다. 1998년 10월 김대중 정부 당시 일본 문화 전면 대개방에 따라 일본 문화가 한국에 급속도로 유입되어졌고 그 영향으로 이후 태어난 한국의 젊은이들(1990년대생 ~ 2000년대 초반생)[24]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연호이기도 하다. 그 영향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일본문화에 익숙한 세대이고, 과거에 즐겨보던 애니 대부분이 일본 만화라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이들 사이에서는 헤이세이 연호를 어렵지 않게 기억하거나 부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일본 애니메이션[25]을 쉽게 접해 볼 수 있고 일본 문화에 관한 내용을 간접적으로나마 익힐 수 있기도 하다.

쇼와 시대 당시는 한국 기준으로 노태우 정부의 5공에서 6공 시대로 갓 넘어간 시기인지라 이 시대까지는 일본 문화가 전면 봉쇄된 시기였고 당시의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쇼와 시대를 아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아동급 애니메이션 등을 제외하고[26] 일본 문화 대부분은 한국 지상파TV 방송을 타는 것이 제한되어있었기 때문에[27] 쇼와 시대나 쇼와를 아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물론 가요, 만화,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유입이 제한적이었지 소설같은 일반서적은 그 시절에도 들어오기는 들어왔지만 청소년 취향작품들은 아니었다. 이는 다음 김영삼 정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 당시인 역시 일본 문화 유입에 부정적이라 이 당시 일반인들이나 청년층들조차도 교사 및 교수, 일본어 통번역가 정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천황 일본 총리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1998년 한일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는데,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 시 김 대통령과 아키히토 일본 천황과의 만찬에서 천황이 "우리 나라(일본)가 한반도의 여러분께 크나큰 고통(苦痛)을 안겨 준 시대가 있었다. 그것에 대한 깊은 슬픔을 항상 본인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이튿날인 동년 10월 8일, 당시 일본 총리였던 오부치 게이조는 "한국 국민에 대한 식민지배로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고 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통절(痛切)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謝り)를 한다."라고 말하였다. 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 일본 국왕 김대통령 귀빈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10월8일 일본 총리, 식민지배 사과하다

4.3. 쇼와 시대 서브컬쳐와의 차이점

4.3.1. 아이돌 성우 양성 시대

이 시대는 애니메이션, 특히 서브컬쳐 및 아이돌 성우 양성 시대로도 불리기도 하였다. 19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 오타쿠' 애니메이션 시대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1998년 카우보이 비밥 같은 세기말 명작을 남겼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페이트 시리즈, 코드 기어스, 스즈미야 하루히, 클라나드, 이누야샤,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강철의 연금술사, 유유백서, 헌터x헌터 등 대작들이 배출되었던 시대이기도 하였고 2010년대 들어서는 모에 및 미소녀 애니메이션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와 맞물렸던 때였다.

동시에 1990년대 선구자인 하야시바라 메구미를 필두로 2000년대 및 2010년대 아이돌 성우가 배출되었던 시대이기도 하다.[28]대표적으로 타무라 유카리, 호리에 유이 등 아이돌 성우들이 배출되거나 미즈키 나나 등 오타쿠들을 열광시키거나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급 성우들이 배출되기도 한 시대이다.

남자 성우로는 세키 토모카즈, 히야마 노부유키, 미도리카와 히카루, 코야스 타케히토 등의 성우들도 배출되었던 시대이기도 하다.[29]

4.3.2. 라이트 노벨의 전성기

이 시대는 만화,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던 양강 체제 속에서 라이트 노벨이 활성화되었던 시기라 사실상 전성기에 속한다. 일본에서는 일반 소설에 비해서 내용이 가볍고 만화풍의 일러스트를 삽입가미하여 만담스러운 내용을 소설로 담아낸 라이트 노벨 문화가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상당한 라노벨 작가들도 배출되었고 동시에 라노벨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작안의 샤나 등 일부 인기작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화가 진행되는 등 서서히 성장하던 라이트노벨계는 2003년 출시된 라이트 노벨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공전의 히트, 그리고 2006년 애니메이션이 역대급 신드롬을 일으키며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되었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에 이어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토라도라! 등 여러 작품들이 대흥행을 이어가며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라이트노벨의 애니메이션화 수요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 만화와 함께 애니메이션 시장의 큰 축을 이루게 되었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만화, 애니, 게임에 이어서 라노벨 문화까지 더해져서 오타쿠들과 청소년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라노벨에서 삽입되어 나온 캐릭터들 또한 만화나 애니 못지 않은 인기를 구가하면서 애니메이션화가 되었을 때는 진보적인 모습으로도 나오게 되어서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다.

라노벨의 등장은 엄숙하고 딱딱하거나 어른스러운 면이 짙은 일반소설의 상식을 깨버림과 동시에 소설도 가볍고 만화풍의 일러스트와 함께 보며 보고 느낀다는 점 때문에 청소년 및 오타쿠들이나 가벼운 내용의 소설을 원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중반에 가서야 일본식 라노벨이 전래되었으며 일본에서 수입된 라노벨들이 한국어판으로 번역 발간되었다.

4.3.3. 가상 캐릭터들의 노래와 음악

이 시기에는 유난히 가상 캐릭터들 중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감을 가진 캐릭터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2000년대 중반 보컬로이드 하츠네 미쿠의 등장을 시작으로 그 전부터 있었던 MEIKO, KAITO 등이 더 주목받거나, 이어서 등장한 카가미네 린, 카가미네 렌, 메구리네 루카, 카무이 가쿠포 등,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감을 가진 가상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오타쿠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아이돌 마스터를 통해서 여자 캐릭터들이 성우의 육성 노래를 통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감을 가진 성향의 캐릭터들도 등장하였으며 이후 2010년대에는 러브 라이브! μ's와 선샤인의 Aqours가 등장하였고 여성향으로 노래하는 왕자님이나 앙상블 스타즈 등 남자 캐릭터들이 아이돌 노래를 부르며 등장하는 매체도 생겼다.

여기에 Wake Up, Girls! BanG Dream!도 가세하여 가상 캐릭터들의 노래시장에 가세하였다.

4.3.4. 심야 및 서브컬쳐 애니메이션의 전성기와 강세

이 시대에는 특히 심야 시간대에 방영하였던 애니메이션, 즉 오타쿠들에게 만족을 주는 애니메이션들이 많이 제작되어서 방송되었던 시기였다. 쇼와 시대에도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는 하였지만 이 시대에 들어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영향으로 오타쿠 애니메이션들이 생겨나고 2000년대~2010년대부터 늘어난 심야 방영 애니메이션들을 중심으로 오타쿠들을 시청층으로 끌어들이게 되고, 일명 하렘이나 모에라 불리는 자극적인 애니메이션도 나왔으며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들도 다수 제작되어 본격적으로 방송하게 되었다.

4.3.5. 아동 및 여아, 청소년 애니메이션

이 시대에는 대중적으로 짱구는 못말려, 원피스, 이누야샤, 블리치, 세일러문, 카드캡터 사쿠라, 꼬마마법사 레미, 그리고 현재도 방영중인 프리큐어 시리즈가 처음으로 시작했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크레용 신짱과 원피스, 프리큐어 시리즈는 현재까지도 시대를 넘어서 방영하고 있고 나머지 세일러문, 레미는 헤이세이 시대 안에서 전성기를 보냈던 작품들이다. 이누야샤는 본작은 헤이세이 시대에서 끝났지만 후에 반요 야샤히메를 통해서 후속작으로도 나오게 되었다.

그 외에도 웨딩피치, 달빛천사, 머메이드 멜로디 피치피치핏치, 캐릭캐릭 체인지, 아이카츠!, 프리파라 등 여아들을 위한 애니메이션도 나왔으며 마동왕 그랑조트, 피구왕 통키, 몽키삼총사, 꾸러기 수비대, 포켓몬스터, 디지몬 어드벤처, 요괴워치, 명탐정 코난 등의 아동 시청자들을 위한 애니메이션도 나왔었다.

5. 주요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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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건

연도 표기는 헤이세이 연호와 서기 병기. 이중에서 몇몇에 해당하는 사건은 아래와 같이 표기.
  • 한일 양국과 연관된 사건: <韓日>
  • 일본 국외에서 있었던 사건 중 일본과 연관된 사건: <日外>

6.1. 헤이세이 원년 ~ 헤이세이 9년( 1989년 ~ 1997년)

6.2. 헤이세이 10년대( 1998년 ~ 2007년)

6.3. 헤이세이 20년대( 2008년 ~ 2017년)

6.4. 헤이세이 30년대( 2018년 ~ 2019년)

7. 기타

헤이세이 연호가 사용 개시된 1989년이 지난지 얼마 안되어 일본 버블이 순식간에 훅 꺼져버렸고, 그래서 헤이세이란 단어가 들어간 일반명사 중 가장 먼저 유명해진 건 헤이세이 불경기 또는 헤이세이 불황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버블경제를 상징하는 단어 중에 헤이세이ABC라는 게 있긴 한데 이건 차덕후 아니면 잘 모르는 전문용어.

일본에서 가장 최근에 12월 공휴일이 있던 시대였다.

보통 가면라이더나 건담 같이 오래 시리즈를 이어온 작품들이 쇼와와 헤이세이를 기점으로 호불호가 엇갈리곤 하는데, 이를 버블경제에 의해 팬층이 보다 가볍게 즐기는 것을 선호하게 되어서라는 주장도 있다. 헤이세이 라이더, 헤이세이 건담 문서로.

2010년대 일본에서는 구세대와 신세대를 나누는 기준으로 '쇼와 시대에 태어난 사람'과 '헤이세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즉, 1989년 이전 출생은 쇼와 태생 아재 취급하는 것. 레이와 시대로 바뀐 2024년 현재도 '어리다'는 것을 '헤이세이 출생'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Hey! Say! JUMP에서 실제로 몇몇 일본 가수들이 이 드립을 친 전례가 있다. 멤버는 모두 헤이세이 시대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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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64년에 발행된 500엔 주화
1989년에 발행된 일본 주화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1월 1일부터 7일까지 쇼와덴노의 재위기간 동안 발행되어 유통된 쇼와 64년 발행주화와 1월 8일부터 12월 31일까지 발행되어 유통된 헤이세이 원년 발행주화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쇼와 64년 발행주화는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발행, 유통량이 적었기 때문에 한정판과 다름없는 희귀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심지어 일본 내에서까지도) 한국의 1998년도 오백원 주화와는 다르게 실제 그렇게 귀한 편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즉 미사용의 쇼와 64년 500엔은 우리나라 돈으로 해봐도 단돈 약 5천원 정도이다.[34] 흔한건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구할수 있는 정도로 생각하면 되며, 이따금 운이 좋으면(?) 자판기 거스름돈 등으로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쇼와 64년의 주화가 많은 이유는 쇼와 64년으로 찍힌 주화가 실제로는 1989년 3월까지 주조되었으며 발행량 자체도 무려 1600만개를 넘어가기 때문.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쇼와 64년의 주화가 귀하다는 인식조차도 어디까지나 500엔 주화 한정.[35]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3대 가희를 일본 언론에서는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우타다 히카루를 꼽는다. 일명 헤이세이 3대 가희. 이 3명은 주로 헤이세이 초기에 전성기를 겪었던 가수로, AKB48를 필두로 아이돌 전성시대를 맞이한 헤이세이 후기에 이르러서는 마츠우라 아야 정도를 제외하곤 더 이상 이들에 필적할 여성 솔로 가수가 나오지 않아 우타히메의 명맥이 끊겼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2018년 2월 13일 헤이세이 시대 출생자 중 처음으로 국민영예상 수상자가 나왔다. 주인공은 일본 바둑기사 이야마 유타 九단.( 1989년 5월 24일 생)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은 쇼와 시대까지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하다가 헤이세이에 와서야 겨우 월드컵에 진출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헤이세이 시대에 최초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헤이세이 시대에 마지막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 팀이다. 한신 타이거스[36] 히로시마 도요 카프[37] 2팀을 제외한 모든 팀[38]이 최소 1차례 이상 우승을 차지한 시대이기도 하며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최초이자 유일하게 우승한 시대가 이 시대였다. 헤이세이 마지막 날에는 4명이 마지막 홈런을 쳤는데 넷 중 한 명만 일본인 ( 후쿠다 노부마사)이었다.

'헤이세이'라는 연호가 정해진 뒤, 이 연호와 한자 표기가 똑같은 타이라 시게루(平 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 영화 박스오피스 1위는 다름 아닌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다.

사족으로, 위 사진에서 헤이세이라는 연호를 발표하던 오부치 게이조[39] 당시 관방장관은 연호가 적힌 액자를 드는 장면 때문에 별명이 '헤이세이 아저씨'였는데, 뒷날 실내 골프장에서 만난 한 여대생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여 문제의 저 자세를 직접 재현하면서 "날 알아보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그제서야 그를 알아봤다는 후문이 있다.

헤이세이 시대의 발매된 일본 노래 중 가장 많이 팔린 노래는 SMAP 世界に一つだけの花이다.(313만장)

헤이세이는 1764년 호레키 이후 325년 만에 は행으로 시작하는 연호이기도 하다.


[1] え단 다음 오는 い는 장음으로 읽으므로 [헤ː세ː\]에 가깝게 발음된다. [2] 이외에 明治, 大正, 昭和를 압축해 전각 문자 한 글자 공간에 넣은 것이 유니코드에 등록되어 있다(㍾, ㍽, ㍼). 비슷하게 가타카나로 단위를 쓴 것을 전각 문자 한 글자 공간에 욱여넣은 환경 의존 문자( 같은 것. 40mP의 명의가 이 글자를 쓴다)나 株式会社를 전각 문자 한 글자 공간에 욱여넣은 ㍿가 존재한다. 또한 한국의 ㈜에 해당하는 ㈱도 존재한다(일본어 IME에서 かぶ를 변환하면 출력되기도 한다). [3] 2022년 2월 22일과 유사하다. [4] 반대로 쇼와 원년도 1주일 정도였다. 이전 덴노인 다이쇼 덴노의 기일이 12월 25일이었기 때문. [5] 이 화면의 남성 앵커는 럭비 선수 출신의 우에다 아키오(上田昭夫)로 2015년에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6] 44초 경에 일본제국 시절에 관한 KBS1 보도가 나오는 일본 방송이 잠깐 나온다. 그리고 그 캠코더는 도쿄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아날로그 위성 전송 혹은 VHS 테이프 특송, 또는 부산발 TV 전파 수신 등의 경로로 입수한 화면이라 원래 화질에 비해 중간에 열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7] 이 동영상 촬영 품질도 당시의 홈 캠코더 치고는 상당한 수준이다. [8] '헤이세이' 발표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생중계된 연호 발표이다. 큼직하게 연호가 붓글씨로 적혀 있는 액자를 들어올리는 장면은 이러한 '최초의 TV 중계'를 의식한 일종의 연출이었다고 하며, 한낮임에도 불과하고 58%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초반에 전중차임이 울리면 다른 방송은 싹 다 중단이기 때문. [원문] 擧八元, 使布五敎于四方, 父義, 母慈, 兄友, 弟恭, 子孝, 內平外成. 팔원을 등용해서 사방에 오교를 전파하게 하니, 아버지는 의롭게, 어머니는 자애롭게, 형은 우애롭게, 동생은 공손하게, 자식은 효도를 다하게 되어 집안은 화목해지고 밖은 안정을 이루었다. [10] 다행히도 헤이세이 시대 동안 일본에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는 기우로 끝났다. 알다시피 오히려 '백성이 밝게 드러나고 만방이 화목하게 되었다'는 《 서경(書經)》구절에서 유래한 쇼와 시대보다 평화로웠다. 그 대신 후술될 일세일원제 확립 이후 연도의 알파벳 표기 문제 때문에 平으로 시작하는 연호를 다시 쓸 일은 없을 것이다. [11] 정부에 의한 미디어 탄압이 소재가 되는 소설 도서관 전쟁에서 연호로 사용되었다. [12] 일본에서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이후의 연도표기에서 연호를 알파벳 이니셜로 표기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쇼와 56년은 S56, 헤이세이 23년은 H23 식으로. [13] 국가에 기부되기 전까지는 다케시타의 외손자인 DAIGO가 예능 출연시에 몇 번 액자를 가져와 보여주곤 했다. [14] 다케시타 총리의 다음다음 계승자 가이후 도시키 총리와 오부치 총리의 바로 다음 후임자 모리 요시로 총리도 와세다대학 동문이었으며 그 외에는 91대 후쿠다 야스오 총리, 95대 노다 요시히코 총리, 그리고 100-101대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있다. [15] 당시 친왕의 신분이자 동시에 황태자 신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천황가 황위계승 서열 1위라서 어칭호도 결혼 후에도 유지가 되었다. 당시 명칭은 皇太子:浩宮徳仁親王이다. [16] 두 나라 모두 전후(日 제2차 세계 대전 / 韓 6.25 전쟁) 경제의 흐름이 비슷했다. 일본은 1950년대 초반 6.25 전쟁 특수에 힘입어 경제 재건을 시작하여 1968년에는 서독을 추월하고 제1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1980년대에는 소련마저 넘어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 올라섰다. 한국도 이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경제 개발을 시작하여 1974년 북한의 1인당 GDP를 추월했고, 이후로도 빠른 성장을 거듭하여 1995년에는 비서양권 국가로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OECD에 가입했다. 두 나라 모두 1980년대 거품경제 3저 호황으로 일컬어지는 경제 최전성기로 기억되며, 일본은 1990년대 초반, 한국은 1990년대 후반에 큰 경제 위기를 맞고 고도성장기가 끝나며 고용 시장이 얼어붙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그 후로도 일본은 침체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한국은 고도성장기만큼은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경제 성장을 지속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17] 이 또한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8] 일본 정치권의 잇따른 과거사 관련 혐한 발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 욱일기 사용 논란, 독도 영유권 주장, 동해 표기 분쟁 등. [19] 일본 정치권의 잇따른 과거사 관련 혐중 발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 일본군 위안부 문제, 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 등. [20] 사실 헤이세이 초기인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무라야마 도미이치 같은 진보 성향 총리나 오부치 게이조 같은 온건 보수 성향의 총리가 재임했었기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에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나, 2000년대 들어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소 다로 등 대외 강경파 총리들이 등장했고 2010년대 아베 신조 집권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21] 대략 1992년부터 2001년까지 [22] 잃어버린 10년이 끝나고, 20년이 시작된 2002년부터 2010년까지 [23] 2011년부터 현재 [24] 한국에서의 2000년~ 2001년생들을 보면 전반적으로 1990년대생이 적용된 제도와 경험했던 문화가 그대로 연장되어 1990년대생을 마무리한 세대로 풀이된다. 그래서 이들은 1990년대생과 저출산 시대와 맞물려 진정한 2000년대생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2002년 이후 태생 사이에 끼인 과도기 세대로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어중간한 세대이다. 따라서 1990년대생에서 2000년대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케이스로 일본에서 쇼와 태생과 헤이세이 태생 사이에 끼인 쇼와 64년생(1989년 1월 1일생~7일생)이 있다. [25] 대표적으로 도라에몽, 키테레츠 대백과, 짱구는 못말려, 개구리 중사 케로로, 포켓몬스터, 명탐정 코난, 나루토 등이 있다. [26] 이들조차도 방송법에 따라 한국식으로 대부분 수정하였다. [27] 물론 그러면서도 일본방송 포맷이 몰래몰래 들어오기는 했다. [28] 하야시바라 메구미 외에도 동시대 대표 성우로는 미츠이시 코토노, 히사카와 아야, 야지마 아키코 등도 있었지만 이쪽은 아이돌 성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29] 전에는 발성이 뛰어난 성우들이 배출되었다고 적혀있었으나, 성우들의 발성은 2000년대 이후인 헤이세이 중반 이후로는 오히려 평균적으로 약해졌다. 물론 2000년대 이후에도 발성이 좋은 성우들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그들조차도 8~90년대 성우들에 비하면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 이유를 코야스 타케히토가 언급한 적이 있는데, 본인이 데뷔한 쇼와 말기나 헤이세이 초반까지만 해도 녹음하는 마이크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당시 성우들은 기본적으로 발성이 단련될 수 밖에 없었다고. 반대로 지금은 마이크가 좋아진 탓에 지르는 발성이 안좋은 성우들이 많다고 하였다. [30] 피해자가 사망한 당일은 쇼와 64년이지만, 사건이 발각된건 헤이세이 원년이다. [31] 1975년 8월 27일부터 시작됨 [32] 사건발생은 쇼와 63년(1988년) 8월 22일부터이다 [33] 히가시요도가와역의 교상화 공사 및 통로신설로 인해 폐지되었다. [34] 언뜻 봐서는 높은 것 같지만 500엔의 액면가를 생각하자. 무려 5천원 내외이다. [35] 이전 글에는 쇼와 62년도(1987년)의 500엔 주화가 비싸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도 사실 500엔 중 제일 귀한건 맞지만 미사용이 2만원을 못 넘겨 낱개로는 별로 거래되지 않고 대부분 n개 묶음이나 심지어 50개들이 주화묶음, 간간히 500개짜리 동전마대(이건 좀 보기 드물지만)채로 거래되는 실정이다. [36] 마지막 우승이 1985년, 그 다음 우승이 2023년이었다. 그나마 2003년에 우승에 상당히 근접했다. [37] 마지막 우승이 1984년이었다. 그나마 1991년에 우승에 상당히 근접했다. [38] 비운의 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는 이 시대에도 우승을 하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39] 1998년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2000년에 과로사할 때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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