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0:41:44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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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원
2.1. 科學2.2. Science2.3. 서양철학사적 과학
3. 종류4. 관련 개념5. 교과로서의 과학6. 어록7. 과학자8. 각종 오해와 통념9. 기타
9.1. 과학 드립
10. 창작물에서

1. 개요

/ Science

과학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 지식을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물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천문학, 화학을 포괄한 자연과학을 뜻하며[1], 넓은 의미로는 어떠한 법칙이나 이론 등을 실험과 같은 지적 탐구활동을 통해 수행하는 모든 학문을 뜻한다.
과거에는 철학의 하위분류로 여겨졌으나, 점차 철학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방법론을 이루게 된 학문 범위를 형성했다.[2]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다방면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가장 범위가 넓은 학문이며[3], 보통 좁은 의미에서 자연과학을 칭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과학의 역사를 과학사라 하며, 과학에서 쓰이는 방법들을 과학적 방법이라 부른다. 또한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는 학문을 과학철학이라 부른다. 단,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다루는 대상이 과학일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각각 사학 철학의 하위 분야 학문이다.

과학이 단순히 원래 있는 현상을 규범화, 법칙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론과학, 형식과학이 설 자리가 없다. 또한 대부분의 측정, 실험치들은 오차 대응성 등의 문제로 어떤 명확한 법칙을 이끌어 내기 매우 힘들다. 간단히 말해서 오차와 표본 부족 등으로 신뢰할만한 그래프를 그려내는 것 자체가 어렵고, 그 그래프를 외삽했을 때 실제와 같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며, 특정한 몇 가지 순서쌍을 조건을 만족하는 식은 (순서쌍의 개수+1) 차까지만 가도 무한가지이기 때문에 만족할만한 식을 얻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쨌든 과학이라는 것은 현재 있는 현상을 바탕으로 미래, 혹은 가정된 상황에 만족할만한 예측을 내놓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측정치를 참고하는 것은 물리법칙이 거시적 스케일에서 시간에 대해 불변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법칙이 시간에 대해 가변이기 때문에 과거의 법칙과 현재의 물리법칙이 나아가서는 관찰자와 행위자의 법칙이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4] 이론과 논리로 풀어낸 결과가 오히려 실험보다 나은 예측을 주는 경우도 있으며 어쨌든 이것도 미래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예측을 주기에 과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예측을 이용해서 인간이 어떻게 미래를 바꿀 것인가 논의하는 것은 공학의 영역이다. 따라서 과학과 공학은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흔히들 과학의 개념을 오해하는 건 좁은 의미의 과학(자연과학)과 넓은 의미의 과학을 구분짓지 못하는 데에서 초래한다.

2. 어원

2.1. 科學

조선시대에는 科學(과학)이라는 단어를 과거를 위한 학문의 줄임말로서 불렀다. 철학, 민주주의 등 현대 용어 중에서 한자로 풀이된 것들 중 대부분은 일본의 교육자 니시 아마네(西周)가 번역한 용어이며 과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1874년 니시 아마네(西周)는 서양의 여러 학문 용어를 번역하면서 'Science'의 역어로 科學(과학)을 채택했으며, 명륙잡지(明六雜誌)에 연재된 《지설(知說)》이란 글에서 처음으로 '과학(科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만 처음 사용했을 당시에는 단지 서양식 교육과정에 포함된 '각 분과(分科)의 학문(學)'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당시 용례로는 흔히 말하는 'Science'의 뜻과는 거리가 있었다.[5][6]

이후 Science로서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과학(科學)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고 '격물학'(格物學)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이 논쟁의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바와 같이 '과학'이 이겼다. 결국 어원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현재는 'Science'의 역어로 완전히 정착된 상태다.

2.2. Science

한편 과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science'는 라틴어 동사 scire(알다)의 명사형 scientia(앎, 지식/skiˈen.ti.a(고전),ʃiˈen.t͡si.a(교회))에서 유래됐다.

어원적으로 보면 과학은 특정한 지역의 철학에서 비롯한 방법이다. 고대철학을 분류하는데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 헬레니즘 제국)의 철학을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리스인들[7]의 철학이 매우 특이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에만 몰두하는 성격을 가졌다. 다른 철학들은 뭐가 다른가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식 자연철학을 이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상에 가깝다.[8] 중동의 철학 역시도 인간의 내세와 도덕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9] 그러나 그리스의 지식인계층은 다른 문명과 달랐다. 그들은 인간 자체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문명에 비해서는 놀랄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들의 주된 토론 주제는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였다. 그들은 불이 세상의 근본인지. 물이 세상의 근본인지. 4원소가 세상의 근본인지. 작고작은 원자가 세상의 근본인지. 아예 물질화할 수 없는 개념인 이데아가 세상의 근본인지. 존재하지도 않는 이데아가 아니라 그것을 채우고 있는 진흙덩어리, 질료가 세상의 근본인지를 집요하게 탐구했다.

언론학에서 일단 제일 먼저 누가 질러놓으면 그것에만 떠드는 성격을 흔히 '아젠다'라고 하는데 그리스의 지식인들의 아젠다는 심성이나 종교. 정치. 기술보다는 세상을 구성할 수 있는 근원과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탈레스라는 사람이 자연철학의 최초의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 그는 물을 답으로 내놓았지만 알다시피 틀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의는 이라는 오답에 있지않다. 질문이었다. 도대체 세상은 왜? 어떻게? 이루어져있는가? 이다. 현재로서는 이게 뭐가 특이한 생각인지 의아하다고 할 수 있겟지만 그건 놀랄정도로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를테면 동아시아처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라던가 중동처럼 세상을 누가 조종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실용적인 것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한문명의 지식인들이 그걸 가지고 몇천년간 키배를 한 것에서 과학이 탄생했으니 그 질문의 의의가 결코 작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을 가리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표현이 함축하는 의미는 크다.

한국어로 학문과 과학이라고 다르게 표현하지만 어원적으로는 모두 자연학에 기인한다. 그리스인들이 자연을 연구하면서 발달시켰던 방법론과 설명방식을 모든 방식에 적용하면서 사실상 자연철학 자신은 사라졌지만 대신 존재하는 모든학문을 자연철학의 방법에 종속시켰다. 그렇지 못한 학문체계는 반과학/사이비과학/야만으로 몰아내었으며 학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아직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거나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만 사회 인문의 이름을 붙여 격리했다.

과학의 많은 부분이 변했지만 이러한 '그리스 철학'에 대한 존중으로 학문분과의 명칭은 굉장히 보수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대학을 의미하는 아카데미라는 단어는 그리스의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아를 그대로 쓰는 것이고, 철학, 물리학, 수학, 공학 등의 이름도 Φυσικὴ ἀκρόασις (자연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의 챕터명을 그대로 학문 분과로 삼았다. 철학 중 인문학 쪽에 가까운 것을 제외한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 역시도 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ὰ βιβλία (Ta meta ta physika biblia)에서 기인한 것으로 메타-피지카, 즉 "자연학 다음 장"을 그대로 학문 분과명으로 삼는다. 형이상학이란 단어가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책에서 철학 챕터가 물리학 챕터 바로 다음에 쓰여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거다. 이처럼 그 근원부터 사소한 단어선택까지 현대과학에서 고대 그리스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2.3. 서양철학사적 과학

현대 한국인이 생각하는 과학은 역사적으로 서양철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가장 원시적인 것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으로 올라가는데, 이는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주된 주제로 삼아서 고민하던 것이었다. 현대인이 읽어보면 헛소리의 향연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노력 때문에 나중에 화학의 기초인 원자의 개념이 고안되었고, 그들의 자연을 수학으로 해석하는 노력이 쌓여서 물리학의 단초가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인들의 노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집성되는데, 그는 연역법 귀납법으로 요약되는 논리학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현상을 관찰(=귀납법)하고, 지식을 기술(연역법)하는 체계를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해서 중국, 일본에서는 "왜 동양은 과학이 없었는가?"하는 것이 커다란 철학적 질문이었는데, 그 원인으로 꼽히는 것중 하나가 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부재이다. 다시말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동등한 것을 동양인들은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과학도 못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정말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완벽한 과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훗날 태동할 과학적 방법론의 탄생에 기반이 될 중요한 성과물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과학으로 이어진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부터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나?"라는 신학적인 질문을 답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학문체계가 동원되었는데, 그것이 스콜라주의이다. 이들 신학자들은 주된 '진리', 즉 신의 말씀을 알아내는 방법으로 연역법을 주된 방법으로 쓰느냐, 귀납법을 주된 방법으로 쓰느냐를 놓고 실재론 유명론의 논쟁을 벌인다. 이 이론들은 "신이 만든 세상을 이해하면 신의 뜻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란 믿음에 근거해 서양 사고관에서 자연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전통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르네상스에 들어서면 이성주의 경험주의 간의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각각의 사상이 발전한다. 다만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때까지만 해도 과학적 방법론이 완성 단계에 있지 않고 대체로 학문이 신학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제대로 된 과학이란 학문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끝난 뒤 유명론 경험주의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분위기 속에 뉴턴이라는 천재가 나타나면서 비로서 현대의 우리가 아는 그 '과학'이 탄생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반복되는 현상을 관찰해서(=귀납법), 이를 기반으로 원인(x)과 결과(y)라는 함수로 표현되는 논리(수학)적 설명을 내놓는(=연역법) 과학적 방법론이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성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데카르트가 좌표 그래프로 2차함수를 표현하는 방법을 발명한 것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상술했듯이 갈릴레오 갈릴레이 시대까지만 해도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변호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었지만, 갈릴레이가 사망한 뒤 얼마 지나지 않고 태어난 아이작 뉴턴을 기점으로 과학은 마침내 자신이 변호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폐기하고 서양철학과 종교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분야로 분리되게 된다.

신학, 윤리, 과학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라 믿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추종하던 기성 자연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는 열 받는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반대로 이러한 뉴턴의 성과를 계기로 르네상스 정신을 이어받은 신세대 철학자인 인간중심주의 계몽사상가들은 크게 흥분한다. 그간 기독교적 신앙과 막연한 철학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을 마침내 인간의 이성으로 완벽하게 파악하고, 이에 근거해 논리적으로 완전한 도덕법칙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종래의 미신적인 중세적 사고관을 타파하기를 꾀했던 철학자들이 신학자들에게 제대로 반격할 기회로 다가왔다. 때문에 과학이 더이상 철학의 그늘에 속하지 않게된 뒤에도 서양철학자들은 과학의 방법론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했으며, 과학이야말로 종교를 대체할 인간과 사회적 진리의 새로운 인도자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했다. 과학적 방법론을 사회정의와 도덕에 적용한 새로운 형태의 사상, 즉 이데올로기라는 '근대적 이념'의 기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적 진리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으나 시대적 한계에 의해 그리하지 못했던 계몽사상가들의 '종교적 도그마'와, 비교적 아주 정확한 지식의 창출 방식으로 새롭게 떠오른 '과학적 방법론'이 혼합된 형태의 지식들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 흐름이 정점을 찍은 것이 훗날 세계를 휩쓸 카를 마르크스의 '방법론적 유물론'으로 탄생한 과학적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다. 계몽사상의 흐름은 신학과 도덕 간의 기나긴 굴레를 끊어냈지만, 20세기 중반에 이를 때까지도 도덕과 과학 간에 긴밀한 연결이 있을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을 끊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념을 설계했지만, 서로의 이념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가장 열성적으로 그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점을 파악하려는 고민도 했다. 경험주의자였던 이 소위 '귀납의 문제'라 불리는 귀납법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인간의 감각 위에 쌓여진 과학적 지식이 곧 '진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서양지식인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창출한 지식이 '진리', 그러니까 신의 말씀을 대체할 사회법칙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대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학에 결정적인 한계를 지적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의 탄생에 지분이 큰 경험주의에서 나왔는데, 과학이 무결한 체제임을 논증하려는 노력은 또 그 반대편인 이성주의자인 칸트 헤겔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과학적 지식 비록 진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더 나은 방법이 없으므로 일단은 "귀납법에 기반한 과학이 최선이다."라는, 당대 학자들 기준에서 다소 아쉬운 결론을 내린다.

한편 서양철학의 인식론은 이 과정에서 과학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형성한다. 칸트가 위 귀납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로 인간이 우주를 이해를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비록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 관점이 과학이 진리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논증할 수 있으리란 기대로 제시한 것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관점은 서양철학 내에서 '절대적 진리'는 인간이 알 수 없고, '해석(설명)'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관주의적 기류로 발전한다. 훗날 토마스 쿤이 말했듯 과학은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역동적인 학문이므로, 오히려 이런 주관주의적 접근은 과학적 성과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적절한 태도를 제공해주었다. 그 어떤 외부에 기술된 지식도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구속하기를 원하는 종교적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이 주관주의는 마르크스와 함께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사상가로 꼽히는 프리드리히 니체 아포리즘에 의해 구체화된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시대인 20세기 들어서 서양철학은 자신들이 탄생시키는데 기여했던 그 과학과 오히려 충돌하는 양상을 보인다. 철학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과학적 성과만을 고집하여 자신들의 이념을 정당화하려 하고, 이에 반하는 새로운 과학적 결과들은 거부하는 확증편향에 빠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주된 원인은 위 주관주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념과 과학이 당장에 완전무결한 지식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라는 대중들과 상당수의 학자들 때문이었다. 상기했듯이 공산주의처럼 아무리 과학적 방법론을 최대한 적용했다고 한들 이데올로기 자체가 종교적 도그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념이었음을 고려하면, 이데올로기 시대 사람들의 이러한 객관주의에 치우친 반응은 당연한 결과였다. 일부 주관주의파 철학자들은 이렇게 잔존해 있는 객관주의가 기독교의 아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다시말해서 기존의 기독교인들이 신을 받들듯이 기존의 과학적 지식을 무결하고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이 추종하는 정치체제를 무조건 옹호하는 사회분위기가 있었다고 본것이다. 과학 자체의 역동적인 자기혁신 특성과 위 귀납의 문제로 볼때 이 믿음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객관주의를 무너트리려고 총력을 다하게 되는데,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문제는 아직 서양철학 내에서도 주관주의적 접근법에 대한 고민이 아직 설익은 시점에 칼을 뽑았다는 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1970년대의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지만, 결국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리한 주장을 펼치면서 급속도로 몰락해버렸다. 아마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관점에 우열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한 지점일 것이다. 다만 사상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몰락했지만, 학계에 만연한 구세대적인 악습을 제거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덕분에 과학자들이 이전 세대가 겪었던 구태연연한 편견이나 권위주의적인 체제에서 훨씬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그들의 주관주의적 이상을 이루는 데 실패했지만, 철학계에서 과학이 진리인가 아니냐의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학문적으로 극적인 합의를 통해 해답을 얻는 데에 성공한다. 이성주의와 경험주의가 과학의 탄생에 동시에 기여했듯이 현대적인 과학 해석론의 완성에는 객관주의와 주관주의가 동시에 기여를 하게 된다. 바로 객관주의 사상가인 칼 포퍼와 주관주의 사상가인 토마스 쿤의 이론으로 과학사라는 학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이란 단순히 이성적인 사고와 관찰을 통해 절대적 지식을 갑자기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반증의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또 토마스 쿤은 종래의 과학 체계 자체에 큰 오류가 있다는 것이 반복된 실험을 통해 밝혀지면, 뉴턴, 다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같은 천재를 통해서든 양자역학처럼 과학자 사회 전체의 협력을 통해서든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혁신적인 패러다임이 등장하는 과학혁명이 발생함으로써 과학이 발전한다는 것을 입증해낸다.

즉, 과학은 철학자와 종교인이 찾는 절대적 가치를 규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자연과 현상에 대한 가장 유용한 지식과 합리적인 설명방식을 제시할 뿐인 철저하게 객관적인 학문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로서 과학이란 서양철학의 일부분으로서 자연철학처럼 어떤 도그마를 통해 당장 절대적 지식을 제공하고 신학을 대체할 종교적인 진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계몽사상가들의 오랜 믿음은 그들이 무너트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가들의 믿음처럼 산산조각나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과학사의 연구결과를 통해 과거 그들이 열망했던 것처럼 과학은 현상에 대한 가장 유용하고 최선의 이해와 지식을 제공하는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이자 신뢰할 만한 독자적인 체계로서 입지를 공고히 하게된다.

이렇듯 서양철학은 전근대에 과학이 탄생하고 발전하는데 기여했으며, 과학이 철학에서 완전히 분리된 근대부터는 과학으로부터 끊임없이 사상의 단초를 제공받았다. 데카르트는 당대 최신 천문학과 해부학을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했으며, 뉴턴이 근대철학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고, 마르크스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 과학적 방법론을 자신의 이념에 가장 엄밀하게 적용하고자 노력했으며, 니체의 계보를 잇는 예술가와 철학자들은 진화론의 발견에 힘입어 사상을 전개했다. 현대에는 인공지능 가상현실처럼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철학자들이 상상했던 철학적 물음을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렇듯 철학과 과학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온 것이다. 철학과 과학이 서로의 지식에 힘입어 기존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깨부수고 다시 그 상상력에 기반하여 새로운 설명을 내놓는 선순환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3.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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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 즉 경험과학은 크게 자연과학 사회과학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가, 아니면 인간 사회를 연구하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경험에 기반하나, 예외적으로 경험이 아닌 추상적 공리에 기반하여 전개되는 과학 분야가 존재하며, 이를 형식과학이라 한다. 응용 방법에 따라 응용과학 순수과학으로도 분류할 수 있으나, 이러한 분류는 너무 낡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으며,[10] 세계 각국의 과학계(한국의 경우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에선 과학의 분류를 주기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체계 문서 참고.

3.1. 좁은 의미에서

3.1.1. 자연과학

자연과학은 여러 자연 현상 속에 숨겨진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가장 좁은 의미의 과학은 이 자연과학을 뜻한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이성과 관찰 가능한 증거를 바탕으로 물리적 세계, 특히 인간의 행동에 의해 나타난 것이 아닌 자연의 원리에 대해 검증 가능한 방법을 통해 알아보는, 또는 더 잘 알아보려는 노력이자 그러한 노력의 산실이다. 즉, 결과 자체로 미래를 추정하는 학문이 아니라 과정을 토대로 하여 자연의 규칙성을 찾아내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궁극적인 목표가 애매한 편이나 대충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일반인과의 타협의 선이 되지 않는가 싶다. 이런 의미가 깊숙히 들어간 단어로는 코스모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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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넓은 의미에서

3.2.1. 형식과학

형식과학은 추상적 구조에 기반한 여러 가지 규칙인 형식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일반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의 다른 분야와 달리, 추상적으로 정의되어 더 이상 원시화될 수 없는 명제 공리를 학문의 초석으로 둔다. 그리고 이 공리에 모순되지 않는 명제들을 증명을 비롯한 여러 방법들을 통해 쌓아나간다. 그래서 다른 과학 분야와 달리 공리를 정의하고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학문의 근간이 달라질 수 있게 된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또한 형식과학은 현실의 현상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는 않지만, 다른 과학 분야에 필요한 여러 과학적 방법을 제공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하여 형식과학은 과학 내에서 독특한 입지를 갖고 있다.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형식과학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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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응용과학

응용과학은 다른 과학 분야, 특히 자연과학에서 발견된 이론이나 사실을 바탕으로 실생활이나 여러 산업 분야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이나, 세부 적용 사례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다. 응용과학의 특징으로는 자연과학과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응용과학의 대표적 학문이라 할 수 있는 공학은 자연과학과의 관계가 깊으며, 서로가 상호 견제 및 교류를 통해 발전해 왔다, 또 다른 주요 분야인 의학은 이미 생물학과의 학제간 교류 및 공동연구가 보편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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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사회과학

사회과학 인간이 이루어놓은 단체, 구성 모든 것들과 사회, 제도 등등을 과학적 방법론 등을 사용해 기술되는 학문이다. 자연과학에서처럼 모델을 만들어서 사회를 설명하거나 예측하기도 한다.[11] 인간이 이룩한 것을 연구하는 측면에서는 인문학과 같으나 인문학과 구별하자면, 인문학이 인간세계의 현상에 대한 규범적 성찰에 무게를 두는 반면, 사회과학은 인간세계의 현상을 가능한 한 가치중립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12] 물론 이것이 완벽하지는 않다. 심지어 자연과학이라 할지라도 그럴 정도. 또한 사회과학은 인간사회를 연구하기 때문에 물질계를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달리 잘 통제된 실험이 어렵고, 주로 관찰을 기반으로 한 통계연구/사례연구/참여관찰로서 이론을 실증한다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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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개념

5. 교과로서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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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록

"자연은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13]
- 아이작 뉴턴
"과학적 발견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과학의 실천 과정은 도덕적 행위이다."
- 브로노프스키
"현실에 비하면 우리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초보적이고 유치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다."[14]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과학에서 새로운 발견을 알리는 가장 신나는 표현은 '유레카!(찾았다!)'가 아니라 '그거 재미있네'이다."
- 아이작 아시모프
"인생의 가장 진실된 조언자는 과학이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과학은 시로부터 탄생했다. 시대가 변하면 과학과 시는 더 높은 수준에서 친구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15]
과학은 훈련되고 조직화된 상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 토마스 헨리 헉슬리
과학에 전념하려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내가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첫째,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심있는 과학 연구의 가장 중요한 이 조건에 대해 나는 감격 없이 말할 수 없이, 점진적으로, 점진적으로, 또 점진적으로, 너의 공부의 가장 시초부터 지식을 축적함에 있어서 엄격히 점진적으로 할 것을 훈련하라. 네가 과학의 정상에 오르려고 하기에 앞서 과학의 기초를 배우라. 둘째는 겸손이다. 네가 벌써 다 안다고 결코 생각지 말라. 네가 아무리 큰 칭찬을 받을지라도 항상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용기를 가져라. -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셋째로 정열이다. 과학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약 두 개의 인생을 가졌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과학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완전한 충성을 요구한다. 너의 공부란 너의 연구에 항상 정열이 있어야 한다.
- 이반 파블로프
집이 돌로 세워지듯이 과학은 사실로 세워진다. 그러나, 돌무더기가 집이 아니듯이 사실의 집적이 과학은 아니다.
- 앙리 푸앵카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예술과 진정한 과학의 요람 앞에 서 있는 기본적인 감정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사실의 정확하고 부분적인 분석으로 정신을 훈련시켜가는 현재 과학은, 건전한 시민 정신을 증진시키기에 특히 알맞은 교육이다.
- K.피어슨(영국의 과학자)
과학은 열광이나 미신의 독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이다.
- 애덤 스미스
과학의 가치와 예술의 가치는 만인의 이익에 대한 사욕 없는 봉사에 있다.
- 존 러스킨
실험실에 있어서의 위대한 과학자의 생활은 사물에 대한, 주위에 대한 집요한 투쟁이다.
- 마리 퀴리
관찰은 수동적 과학이요, 실험은 능동적 과학이다.
- C.베르나르(프랑스의 생리학자)
자연 철학은 미신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신의 말씀 다음 가는 확실한 약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7.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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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각종 오해와 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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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 국한된 오해와 통념들은 해당 문서 참조.
  • 과학은 "왜(Why)" 에 대해 설명하는 학문이다.
    • 틀린 말은 아니지만, 주의할 것은 "왜(why)"라는 질문의 초점이 무엇이냐에 따라 과학이 다루는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주어진 현상에 대한 더 근본적인 원인을 묻는 질문은 다루지만 목적을 묻는 질문이면 과학에서 다루지 않는다.[16] 중력이란게 존재하는지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긴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이지[17] 어떤 의도 혹은 목적에서 그렇게 되는지의 관해서는 과학자들에게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다. 자연현상에 의도와 목적을 설정한 순간 그것은 과학을 벗어나서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왜 가능한가"와 "왜 했는가" 정도의 차이가 나는 질문들로 "왜(why)"를 분류할 수 있고, 과학자들은 그 중 전자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가능한가" 같은 질문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바꿀 수 있긴 하고, 그러면 정말로 자연과학이 "어떻게(how)"를 설명하는 학문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 수학은 자연과학의 일부이다.
    • 절대 아니다. 과학은 맞으나[18] 자연과학이라고는 할 수 없다. 수학은 자체 완결적이고 논리적 정합성만 맞으면 어떤 상상이든 가능한 자유로운 학문이며, 그렇기에 자연과학의 기초가 되면서도 철학이나 사회과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면, 자연과학은 이미 정해져 있는 자연의 섭리에 대한 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이러한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어떠한 학문도 자연과학으로 부를 수 없다. 예컨대 논리적 타당성에 문제가 없고 일관적인 자연과학의 이론이라 할지라도 실험적으로 반증된다면 '잘못된 이론'이 되지만, 수학 이론은 학자 개개인이 출발점으로 선택한 공리(기본적인 가정)로부터 논리 전개에 문제가 없다면 일단 '잘못된 이론'은 아니다. 그래서 자연과학 이론의 가치를 결정할 때는 얼마나 자연을 정확히 설명하는가가 1차적인 기준이 되지만, 수학 이론을 평가할 때는 얼마나 (수학자들의 관점에서) 유용하고 흥미로운 성질을 기술하는 이론인가가 기준이 된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수학은 보다 이론적이고, 과학은 보다 현실적이다. 따라서 실증된 과학 이론은 언제나 수학적이지만, 수학 이론이 언제나 과학적이지는 않다.[19]
    • 자세한 내용은 수학-물리학 관계 문서 참조.
  • 수학이나 자연과학 역시 믿음(Belief)의 한 종류일 뿐이며, 절대적 진리는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
    • 과학은 종교인들이 말하는 진리를 찾는 학문이 결코 아니다. 자연과학에서의 '진리'와 신학자, 철학자들이 말하는 진리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으며, 기본적으로 과학은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끊임없는 가설과 검증, 반박을 통해 발전해 온 학문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라는 용어에 극도로 부정적이다.[20] 즉 과학은 이론의 기반이 되는 개념과 가정들을 추상적 대상에 대한 믿음으로 무작정 신뢰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도입해서 계산을 진행했을 때 반례가 없고 해석, 예측, 계산이 성공적이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의 가장 중요한 본질 중 하나는 자기 자신마저 실험, 관찰, 새로운 패러다임 등에 얼마든지 부정될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법론적 회의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렇기에 가장 신뢰도가 높은 체계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건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라 일정한 통계학적 신뢰 수준 하에서의 믿음이며, 논문 및 저널에 대한 사려깊은 검토 등을 근거로 반대되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만 일단 신뢰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21] 방법론적 자연주의 문서도 같이 참고. 사실 앞서 언급했던 "자연과학은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때문에 실험적 제약이 있다"는 말도 모든 영역에 100% 적용되지는 않으며, 본질적으로 들어갈수록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영역이 깨어지곤 한다. 예컨대 "빛이 직진한다"는 현재까지 알려진 빛의 본질로부터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실험적으로도 옳다고 증명된 명제이다. 그러나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의 입자들은 당연히 눈으로 직접 관찰된 적도, 인간의 인지 범위 내에서 관찰할 수도 없기에, 어디까지나 그게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예측되는 현상들을 실험적으로 확인함으로서 입증한다.[22] 어찌 보면 현대 물리학자들은 일련의 물리 현상을 설명하기 편하게 기본입자라는 형태로 일종의 합리적인 체계를 합의하고[23] 그 위에서 자연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 한마디로 결론짓자면, 자연 "현상"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을 기술하는 자연 "과학"의 체계는 결코 유일하지도 않고, 유일성을 증명할 수도 없으며, 절대적이지도 않다. 자연과학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는 오직 과학적 방법론만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며, 이는 현생 인류의 사고 체계 내에서 이보다 더 합리적으로 자연을 기술할 논리를 아직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뭔가 기존의 모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면 보통 속임수를 의심하지만, 만약 그것이 속임수가 아니라면 비과학적인게 아니다. 그 현상 자체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생길거고, 그 후 설명을 만드는 순간부터 그 현상도 과학에 포함될 것이다. 괜히 마법이란게 존재한다면 과학으로도 해결할지도 모른다는게 얘기가 나오는게 아니다. 당장 전자기력, 중력 같은 단순한 힘들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뿐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고, 과학자들도 현재의 패러다임으로는 그것까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꼭 설명해야 할 필요성도 딱히 느끼지 못한다.[24] 사실, 과학의 방법론적 회의주의를 엄밀히 적용해 말하자면 어떠한 사실도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모든 사실 중 뒤집힐 수 없는 사실은 없다. 그것이 설사 중력이나 1+1=2라는 절대 바뀔 수 없어 보이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 다만, 수학같은 형식과학의 경우 현실의 자연현상과는 무관하게 내적인 연역 논리체계로만 작동하므로 (사용된 공리가 무모순이면서 모호하지 않다면) 일단 증명된 명제는 절대적으로 참이다. 물론 상황, 혹은 공리를 바꾸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겠지만[25] 그건 조건을 바꾸었을 때 해결해야 할 또다른 문제이지 이전의 명제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자연수의 사칙연산을 포함하는 이상 완벽한 공리 체계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해서 수학이 불완전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더러 보긴 하는데, 이건 거의 "상대성" 이론 가지고 모든 게 상대적이다라고 오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가지고 있는 공리 체계가 무모순이면) 참인지도 거짓인지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걸로는 이미 참 혹은 거짓이라고 판명된, 혹은 판명될 명제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는 명제라면 참이라고 놓아도 상관 없고 (즉, 무모순이고) 거짓이라고 놓아도 상관 없다.[26]
  • "이건 그저, 단지 이론일 뿐이잖아요!" 또는 "이론이니까 현실에선 틀리는 게 당연하다!"
    • 흔히 사람들은 이론(Theory)을 "그럴듯해 보이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뢰하기 어려운 학설"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 사람들이 이론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의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면 사실상 '가설', 또는 진지한 가설조차도 되지 못하는 '음모론', '유사과학'에 가깝다. 이것은 이론이라는 단어가 일상생활과 미디어 등지에서 너무 많이 오남용되어 여러 다른 관념들과 겹쳐 의미가 오염된 것에 불과하다. 사실 본례의 의미는, 가설 중에서 특별히 더 많은 검증과 비판을 이겨내고 살아남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가설들을 통해,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해내는 폭넓은 체계를 이론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상대성 이론은 상식과 상반되는 결과들을 내놓아서 그런지 숱한 검증과 비판을 받아왔음에도 전부 이겨냈고 그 자체만으로도 뉴턴 역학이 유효한 영역(광속보다 턱없이 느린 영역)보다 더 넓은 영역을 설명하는 체계이기에 여기서 말하는 "이론"이라는 칭호에 부합하는 체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 동료평가까지 엄격하게 거쳐 학계의 공인까지 받았다는 가정 하에, 그것을 일컬어 "단지 이론" 이라 치부하는 태도는 그래서 틀렸다. 만약 그것이 학계의 공인을 거치지 않은 이론이라면 상술했듯이 이론이 아니라 일각에서 주장하는 '주장' 내지 '가설'이라고 표현함이 옳다.[27]
    • 이런 오해는 대중매체에서 흔히 소재로 써먹는 "이론과 실무" 라는 특유의 표현 때문인 것도 있다. 여기서 이론이란 "듣기에는 좋고 이상적이기도 하지만, 너무 교과서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써먹을 가치가 별로 없는 생각" 쯤을 의미하기 때문.[28] 이런 이미지들 탓에 "이론"에 대한 반감이 더 커질 수도 있는데, 상술했듯이 과학계에서 사용하는 이론과 여기서 흔히 표현되는 이론의 뜻은 의미와 맥락이 다르다. 그리고 설령 해당 표현이 과학 혹은 공학 실험과 연관되어 사용되더라도, 절대 다수의 표본들을 체계적으로 다뤄서 뽑아내고 논리적 패러다임에 의거해 해석한 뒤 일반화한 결과가 고작 한두 명의 사례보다 더 가치있음은 분명하다. 아니, 그 전에 상술했듯이 과학계에서 아직 합의되지 않고 논쟁 중인 대상은 가설이라고 칭하지 이론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이런 문서 역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이론'과 과학계에서 사용하는 '이론'의 의미가 다소 달라 이를 구분해야 하지만 대다수의 일반인이 그 차이에 무지하기에 오해가 발생한 경우다. 해당 표현과 과학계에서 말하는 이론을 과학 비전공자들이 혼동한 탓도 있는 듯도 하니 이를 감안하면 좋을 듯하다.
    • 예를 들어, 여러분이 기존의 이론에 반하는 것 같은 경험을 얻었다고 하자. 이론이 너무 교과서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시 이론일 뿐이네" 라고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건 그 사람이 해당 이론을 잘못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의 유효 범위를 넘어서는 상황을 무시했다든가, 아니면 이론을 전개할 때 상정한 가정과 전혀 다른 상황에다 자신의 계산을 대입하려고 했다든가, 아니면 심지어 이론을 잘못 배워놓고 엉뚱하게 썼다든가. 어느 경우든, 제대로 된 실무자라면 이론을 무작정 비난하고 넘어갈 게 아니라 자기 지식에서 도대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면밀하게 파악하고 그 문제를 고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쨌든 다름 아닌 자신의 지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물론 이론이 틀렸을 수도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면 해당 이론을 전공하는 학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상의를 하는 게 올바른 방향으로 일하는 것이다.
    • 덧붙이자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다루는 자연과학에서도 이론적으로 계산된 수치와 실제 실험값은 절대로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수학 기호라는 추상개체와 물질의 운동이 100% 완벽하게 치환되는 방법은 아직 고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29] 모든 실험은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오차를 가지고 있고, 아무리 이론이 옳고 실험이 정확하다 하더라도[30] 이론값과 실험값의 차이는 오차 범위 내에서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공계 계열 대학생 수업 중에서도 일반물리학 수업을 들은 사람은 알겠지만, 예를 들어 자 같은 걸로 길이를 측정할 때 길이가 눈금 중간값에 걸쳐 있으면 눈금 안쪽의 값은 무시하라고 들었을 것이다. 그 눈금 하나가 오차에 해당하는데, 예를 들어 자 최소 눈금 하나가 1 mm이고 물체가 닿은 눈금 값이 36 mm이면 측정값은 36 mm ± 1 mm가 되는 것이다.[31] 1mm 눈금의 자 말고 버니어 캘리퍼스 같은 더 정밀한 기구를 쓰면 더 낫겠지만 이 역시 측정 결과가 더 정밀해지는 것일 뿐 오차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상술했듯이 이것은 장비의 정밀성을 떠나 수학과 현실의 괴리로부터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32] 따라서 오차를 아예 없애는 대신에 오차가 발생하더라도 그걸 무시할 수 있을 만큼(즉 오차가 0에 수렴하도록) 더 정밀한 측정장치를 만들고 고성능 컴퓨터까지 동원해서 고도의 알고리즘과 데이터 양으로 밀어붙여 쓸만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실험 장비 중 하나라고 칭송 받는 LHC와 그 검출기들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오차는 생기는 게 당연하다는 걸 받아들이면, 그 차이가 정밀도 안에 들어오는 이상 이런 상황이 전혀 문제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모든 것의 이론과 그에 걸맞은 측정장비가 만들어지지 않은 한, 모든 이론과 장비들은 측정할 때 오차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정확히 측정했다 해도 무한으로 쿼크[33]보다도 작게 들어가면 0.0000000...01의 오차는 언젠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앞서 말했듯 물리학 수업에서도 완벽히 정확한 값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 그래도 이론일 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답하자. 지금 우리의 상황은 그 이론의 유효 범위[34] 안에 들어 오고 우리가 가진 장비는 충분히 정밀하다고 말이다.
  • 과학은 오로지 자연에 대한 관찰 및 탐구를 하는 학문이다.
    • 이러한 인식은 오히려 자연과학에 더 적절한 설명이다. 그러나 과학의 한 축에는 사회과학 역시 포함된다. 이는 과학이 방법론이라는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니, 자세한 내용은 사회과학 문서를 참고할 것.
  • 각양각색의 부글부글 끓는 비커와 플라스크, 어두컴컴한 실험실, 수식들과 숫자들이 난잡하게 적힌 채 어지러히 흩어진 종이들, 이리저리 얽힌 기계들은 과학을 상징한다.
    • 분야 별로 상이하다. 정말 저 요소들을 다 갖춘 실험실도 있지만 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다. 그런 이유가 없다면? 과학자도 사람이라 가급적 밝은 분위기에서 작업하는 걸 선호하긴 한다. 게다가 어둡고 지저분한 곳에서는 위험 요소들을 감지하거나 통제하기가 어려우니, 화학 물질을 취급하는 곳에서는 가급적 밝고 깨끗하게 시설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이론물리나 계산물리와 같이 화학 물질 같은 걸 취급하지도 않고 계산에 필요한 컴퓨터마저 다른 시설에서 원격으로 쓰는 경우면[35] 위에서 말한 요소들은 하나도 없고 볕 잘 드는 방 한 칸에 책상들과 데스크탑 몇 대만 놓인 경우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 수식이 어지러히 갈겨진 칠판과 종이 뭉치들이 쌓인 책상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경우도 있다.
    • 그리고 이런 것들은 과학에 필요한 도구들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은 곧 "방법" 이다! 자세한 내용은 과학적 방법 문서를 참고.
  • 과학에 속하는 학문과 그렇지 않은 학문은 확실히 가려낼 수 있다.
  • 무조건 질적 연구보다 양적 연구가 더 좋은 연구이다. 또는, 질적 연구는 주관적이므로 학계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또는, 질적 연구의 비중이 높은 학문 분야일수록 양적 연구의 비중이 높은 학문 분야에 비해 "지적 수준" 이 떨어진다.
    • 학문 분야에 따라서 양적 연구가 설득력이 있는 경우가 있고 질적 연구가 더 잘 먹혀드는 경우가 있다. 가장 흔히 거론되는 질적 연구의 가치는 그 개방성에 있다. 즉, 연구자조차 명확히 알기 어려운 사회과학적 대상을 연구할 때 질적 연구가 가능하다. 예컨대 성 소수자들에게 "이번 인권선언을 통해 사회 주류 집단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까?" 의 면접법을 실시할 경우, 뜻밖에도 "아니오, 용서할 마음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할 수 있습니다" 의 제3의 답변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수도 있다. 또한 아동보육 문제를 다룰 때에도 학령전기 어린이에게 "우리 친구는 엄마랑 더 많이 놀아요, 아빠랑 더 많이 놀아요?" 라고 물었을 때 "저는 학원 가고 엄마 아빠는 일하셔서 거의 못 놀아요" 라는 답변들을 얻음으로써, 뜻밖에도 남성의 육아 참여보다 맞벌이와 조기교육 열풍이 더 큰 문제라는 터닝 포인트를 만날 수도 있다.[36] 다른 예를 들자면, 군인들에게 "이번 대적관 교육을 통해 전장에서 적을 격멸할 용기가 생겼습니까?" 라고 물을 경우, "대적관 교육은 솔직히 너무 뻔한 내용이라 의미가 없었지만, 오히려 주특기 교육을 통해 용기를 얻곤 합니다" 와 같은 답변들을 얻음으로써, 구시대적인 이념 교육이 아닌 체계적 전투원 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과학의 묘미이자 동시에 사회과학 연구의 어려운 점이라 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양적 연구는 p-값만 맞춰놓으면 출판된다지만 질적 연구는 자신의 연구가 얼마나 통찰력 있는지에 대해서 백 퍼센트 연구자 본인의 역량에만 의존해야 한다.
      질적 연구가 대세인 학문분야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간호학이 있다. 이 분야에서는 근거이론(grounded theory)이라고 불리는 질적 접근법을 활용한 연구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학문적인 체계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질적 연구와 양적 연구 간에 어떤 차등을 두는 것 자체가 이미 학문 간의 관계에 대한 통찰 없이 함부로 내뱉는 지적 모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류의 지적 오만(intellectual arrogance)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진지한 성찰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 또한 질적 연구는 초기 연구 이후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양적 연구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자기평가와 동료평가, 철칙들에 의하여 통제된다. 이 둘은 진리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인데, 가장 단순화하자면 귀납과 연역으로도 나눌 수 있다. 더 자세한 것은 서양과학사의 진리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 양적 연구의 또 다른 문제점은 실험자와 통제된 실험 환경이 존재하는 이상 실험 객관에 대한 오염과 주관과 편향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적 연구는 이런 실험자의 영향을 최대한 제거하는 쪽으로 발달해왔으며, 반면에 질적 연구는 이런 영향을 인정하고 어떻게 이용할지를 생각한 방법론이다. 때문에 입장 차이가 있는 것이지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 하기 힘들다.
  • 사례연구는 쉽다. 또한, 수준 낮은 연구다.
    • 해당 문서 참고. 사실 이는 사례연구가 수준이 낮아서라기보다는 체계화가 굉장히 늦게 이루어졌던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례연구는 더 이상 주먹구구식의 끼워맞추기가 아니다.
    • 사례연구는 자료주도적(data-driven)이라기보다는 이론주도적(theory-driven)인 연구에 속하며, 사례가 특정 이론적 조망을 입증하는지를 본다. 따라서 양질의 사례연구일수록 그 사례를 통해서 특정 이론에 많은 통찰을 제공한다. 즉, 논문에서 소개하는 사례가 4건이라면 N=4의 소표본 연구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이론이 특정한 사례들에서 네 번씩이나 일관되게 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심사 과정에서는 그 사례가 어떤 합당한 기준으로 선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한 요소이므로, 아무거나 맘대로 뽑아다가 사례라고 내세울 수 없다.
  • 주류 과학자들은 이미 고여서 썩은 물이다.
  • 현대과학은 서양과학이다. 동양인에게는 맞지않는 학문이다.(...)
    • 헛소리다. 대표적으로 관상가나 역술가들이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데 현대과학은 현대과학이지 서양과학이 아니다. 물론 서양인들이 시작하고 주도한 것은 맞지만 동양인이나 그 외 인종이 못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 말이 맞다면 동양인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히려 서양권에서는 동양인에 대한 대표적인 스테레오타입 중 하나가 수학, 과학 엄청 잘하는 인종이다. 한 마디로 이건 완전히 현대과학에 뿌리깊게 열등의식과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의 끝없는 헛소리이다. 심지어 한의사들도 오늘날에는 통계 및 과학을 활용한 협진에 적극적이기 때문에[37] 이런 소리는 실드쳐 주지 않는다.
      단, 방법론이 아닌 의학적 효과나 각종 임상 장면에서는 실제로 국적이나 민족마다 차이가 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단적으로 미국 정신의학계에서는 히스패닉계 내담자에게 특성화된 심리검사 및 정신질환 치료법을 고안하기 위해[38] 문화심리학자들과 협업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심지어 의학의 경우, 대표적으로 혈당강하제인 설포닐 우레아(sulfonyl urea)가 독일에서는 심장병 발병률을 높이지만 미국에서는 그와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각국의 식생활과 생활패턴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추정되며, 따라서 미국인에 대한 약효가 한국인에게도 똑같이 작용할 것이라고 100% 확신할 수가 없다.
  • 토머스 쿤에 따르면, 어차피 모든 과학 지식은 상대적이므로 언젠가는 무너진다. 따라서 이를 신뢰할 필요도 없다.
    • 역시 유사과학, 병적과학, 쓰레기 과학 신봉자들이 키배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정신승리하고 도망갈 때 쓰는 단골멘트다. 상술했지만,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패러다임이 과학혁명에 의해 변화되는 형국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사 이론'이지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비논리적 회의주의를 정당화하는 사상'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주류 패러다임은 온갖 이론들이 충돌하는 격동기에서 최종적으로 그간 설명하지 못했던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과 검증에 있어 통계적인 승리를 거둔 패러다임이므로 더 설득력있는 패러다임이 나타날 때까지 신뢰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이론이다.[39] 즉 해당 통념은 맞는 말도 아니며, 심지어 토마스 쿤의 의도를 완전히 곡해하는 발언일 뿐이다.
  • 과학은 어느 배척받는 천재 과학자가 자기 지하실에서 발견한 놀라운 실험 결과를 통해 발전한다.
    • 과학사를 초중고 위인전 수준의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운 일반인들의 오해다. 극소수의 천재 과학자가 큰 일을 해내는 건 기존의 패러다임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 과학혁명' 시기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 외 과학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상과학' 시기는 패러다임에 오류가 다소 발견되더라도 수많은 과학자들이 공동 협업을 통해 그 오류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걸 밝혀내거나 주변부 지식을 수정하고 확장하며 발전하는 것이다. 자세한 건 토마스 쿤 패러다임 문서 참조.
    • 지금은 절대다수의 과학자가 혼자 일하지 않는다. " 과학 공동체" 라는 용어도 있고, " 동료평가"(Peer Review) 라는 용어도 있으며, " 저자권"(Authorship) 이라는 용어도 있고, " 영향력 지수"(Impact Factor; IF) 라는 용어도 있다. 현대과학은 외로운 천재의 개인 실험실을 통해 발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40] 물론 상기한 대로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다윈 등처럼 거의 독자연구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낼 정도의 천재가 존재한다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필연적으로 입자, 양자 등 미시세계를 다뤄야하는 현대과학 특성상 그 이론을 실험하고 검증하려면 연구소 단위의 투자와 동료 과학자 집단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41][42]
    • 사실 옛날에도 과학은 배척받는 과학자가 아닌,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 학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발전해왔다. 가령, 그 '배척받는 과학자'의 예시로 자주 거론되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만 해도 요하네스 케플러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당대의 유명한 과학자들과 성직자[43]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44][45] 이미 살아 생전부터 조국, 아니 유럽을 빛내는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았고 사후 조국의 위대한 인물들이 잠든 곳에 묻힌 뉴턴은 말할 것도 없다.
      이와 비슷한 편견은 비단 과학계 뿐 아니라 철학이나 예술, 문학 등 다른 분야에서도 흔하다. 오늘날 유명한 학자나 예술가, 작가들 대부분이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했다는 편견인데, 물론 그런 케이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상 오늘날 일반 대중이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학자나 예술가의 대다수는 이미 생전에도 명성과 명예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았다.[46] 설령 인생에서 부침이 있었대도 막상 이유를 따져 보면 본인의 독선적이거나 괴팍한 성격 등으로 인한 자업자득이었던 경우가 더 많을 정도.[47] 다만 각종 매체에서 소수의 사례를 확대하고,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도 그냥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보다는 고난과 역경의 스토리가 더 잘 먹히기 때문에 그런 편견이 생긴 것이다.
  • 과학자들의 지하 실험실에는 각양각색의 키메라 같은 동물들이 길러지고 있거나 내지는 잔혹한 동물실험이 자행되고 있을 것이다.
    • 언론을 너무 많이 접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이런 식의 생각은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과학자의 이미지에 크게 기대고 있다. 실제로는 연구윤리에 위배되는 실험이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대학교 및 연구소마다 연구윤리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무언가를 새롭게 개발/발명/발견했을 경우에도 이를 학계에 발표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선을 넘었다 싶으면 대학교, 저널, 학회 등지에서 벌떼같이 들고 일어난다. 저 유명한 밀그램의 복종 실험이 결국 기승전징계로 끝났다는 걸 상기해보라(…)[48].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과학자들이란 교양과 상식을 갖춘 성인들이다.
  • 과학은 항상 가치 중립적이다.
    • 장기적으로 가치 중립을 지향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먼저, 과학은 " 발표 편향" 에 노출되어 있다. 과학자들도 연구비를 타서 쓰는 입장이고, 성과에 집착하는 대학교들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당하곤 한다. 실패한 실험, 틀린 가설을 다루는 논문을 찾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 이에 대한 과학계 내적인 비판도 많다.
      다음으로, 과학은 " 후원 편향" 에도 노출되어 있다. 대기업의 후원에 의해 어떤 식품이 항암효과가 있다더라, 노화를 막는다더라 하는 연구논문 쏟아져나오는 것은 금방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 기생충 연구자 서민 교수도 지적한 바 있다. 해당 강의 링크
  • 과학자들이 간혹 사기를 치거나 비도덕적 행위를 하기도 하는데, 이걸 보고도 과학을 어떻게 신뢰하나?
    • 현대인이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항상 진실만을 말하거나 정직해서가 아니라,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과학계 내부에서 자정작용을 통해 걸러지고 교정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지식을 향하여 그렇게 힘겹게 헤쳐나가는 학문이다. 물론 과학자의 윤리의식 역시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그리고 좀 잔인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사기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과학자의 비도덕적 행위와 그 객관적인 실적은 구분지어서 판단해야 한다. 가령 제약분야에서 실행하는 동물실험과 저소득층에게 금전을 대가로 행하는 임상실험은 비윤리성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지만 그 덕에 아주 효율적이고 빠른 검증과정을 거칠 수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이 관점이 극단적이면 오히려 비합리적인 과학만능주의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과학자 집단의 자정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할 것이다.
  • 오늘날의 수많은 전쟁과 살육의 비극에는 과학이 책임을 져야 한다.
    • 과학 그 자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과학은 방법일 뿐이다. 이 도구를 활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좋게 쓰면 한없이 좋은 도구가 되지만, 나쁘게 쓴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절규하게 된다.[49] 예를 들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해서 "칼이 잘못했다!"라거나 "칼을 만든 사람이 잘못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합리적으로 보았을 때 아무도 없다.
    • 그런데 일부 매체를 보면 어떤 칼을 가리켜 '요도(妖刀)'라고 칭하면서 그 칼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도 그런 취급을 받은 요도들이 있기도 했고. 물론 이런 태도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지만, 인간이 인간 자기자신이 아닌 어떤 도구에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는 비합리적인 모습은 해당 편견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 인문계 고교에서 3년동안 가르치는 수학, 과학 지식은 실생활에 쓸모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고,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 육성에는 쓸모가 없다. 실업계 고교나 직업훈련원 등에서 가르치는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기술이 더욱 유용하다.
    • 당연하지만 고등학교에서의 미적분학, 기하학, 대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을 모르고서 현대 공학, 농학, 자연과학 등에서 유용한 결과를 얻어내는 전문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 무엇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과정은 학문이 아니라 교과적 성향이 강하다. 다시 말해, 고교 수학을 통해 논리력과 추론, 고교 자연과학을 통해 수리력과 해석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학생들의 학습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불필요한 학문을 강제적으로 교육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안되고, 수리논리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 수학과 과학에서의 개념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당장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과학탐구 영역은 과학에서의 개념을 이용하여 문제에서 요구하는 것을 찾아내는 논리적 퍼즐 게임 형태이다.
    • 만약 문과로 진로를 잡는다 할지라도, 사회과학이나 경제학, 혹은 그에 관련된 학문의 분야를 선택한다면 수학과 친해져야 한다. 당장 개인의 경제활동을 편미분을 이용한 함수식으로 증명[50]하는 경제학이 있고(…) 경영학, 행정학 역시 고급 통계기법의 이치에 통달해야 한다. 심리학은 우리가 이과지 왜 문과냐고 전공자들이 투덜거릴 정도. 특히 심리학을 닥터 프로스트 정도쯤으로 받아들이고 진로로 삼으면 큰일난다. 아무튼 오히려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기술을 원한다면 수학을 해야 한다. 괜히 사회과학대학이 아니다. 수학을 아예 하지 않는 학과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51]
  • 과학 = 기술 = 공학이다.
    • 한국 한정으로 과학(Science)이라는 단어에는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이라는 의미까지 포괄하기는 하지만, 세 가지 개념들이 전부 같은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확히 구분해서 쓰려는 노력과 저작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술이라는 용어만 보아도 skill, craftsmanship, technic, technology 이런 단어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technology를 일반적인 기술과 구분해서 과학기술로 변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technology는 제대로 된 한국어 번역이 없다. 이렇다보니 국가에서 설립한 KAIST 라는 곳도 정확한 번역을 하면 한국과학과과학기술원이 되어야 한다. 참고로 Brian Authur 의 The Nature of Technology 라는 원서를 번역하려고 했던 어떤 사람이 포기하게 된 이유도 책 내용이 이렇게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술이 모여서 기술이 되고 기술이 발전하면 기술과 기술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 과학을 하려면 즉, 과학의 발전에 기여를 하려면 무조건 어렸을 때부터 천재나 영재소리를 듣고 지능지수가 엄청나게 높아야 한다.
    • 주로 비범하게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과학에 대해 막연한 경외감이나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이 많이 하는 고정관념중의 하나. 물론 수학, 컴퓨터공학, 이론물리학같은 이해력, 수리력, 응용력이 필요한 과학분야에는 높은 지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평범한 시골 초등학생들이 55년동안 백조들을 관찰한 일지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이 되어서 실리는 사례도 있듯이 천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바보도 아닌 평범한 지능지수를 가지고도 충분히 과학에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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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 또한 이에 대한 만능주의도 존재한다. 과학만능주의 참조.
  • 수포자 못지 않게 과포자도 문제가 있다. 해당 문서 참조.
  •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 물화생지 시리즈가 유일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만, 그 내용만 조금씩 바뀌었을 뿐이다.
  • 수학 못지않게 꽤 많은 학생들이 기피하는 과목이다. 이유는 외워야 할 게 많아서...[52] 초등학교 시절엔 과학에 흥미가 있다가도 특히 중학생이 되고 나면 계산도 복잡해지니 설명을 제대로 이해 못 하면 피 보는 과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등학교때와는 달리 중학교 이후부턴 과학실험이 사실상 없거나 매우 드물다.
  • 일본에서는 이과(理科)[53]라는 이름으로 이 과목을 배운다. 물론 이것도 중학교때까지이고 고등학교부터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목을 배운다.
  • 2000년대 초반까지, 정확히는 제6차 교육과정 이전의 초등학교의 경우 과학 대신 "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을 배웠다.

9.1. 과학 드립

파일:sciencebit.jpg
브레이킹 배드 제시 핑크맨

각 분야에서 어떤 현상이 계속 반복된 나머지 규칙이나 법칙으로 불릴 정도에 이르면 "같은 패턴이 쌓이고 쌓여 과학 이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일명 ××는 과학 이라고 비꼬는 드립. 또는 실험 연구 대상같은 미개한 존재라 비꼬는 의미로도 쓰인다. 스포츠계에서 아스날 FC 팬들이 과학 유머를 만든 게 시초. 유행 전에도 DTD 등에 알음알음 쓰이기는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같은 팀에 야스오가 있으면 반드시 패배한다는 의미에서 야필패는 과학이라고 쓰이기도 한다.

또한 유명인에 대한 부정적인 논란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마치 본인들이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며 "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기도 한다.[54]

자동차 분야에서는 흰색 K5가 난폭운전으로 유명해 과학 5호기로 불린다. 카니발 또한 K5 못지않게 악명이 높아 과니발[55]로 불리고 있다.[56] KG모빌리티는 티볼리가 떠오르는 과학이며 액티언 스포츠, 코란도 스포츠 렉스턴 스포츠는 구난차로 유명하다. 영국은 코르사[57], 미국과 일본에선 프리우스가 거의 과학에 가까운 밈으로 유명하다.[58] 또한 전세계 공통적으로 3시리즈가 과학으로 통한다 # #[59]

바이크에서는 각종 모타드[60] 바이크, SYM 크루심[61], 혼다 PCX[62]가 과학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BMW R1250GS[63] 혼다 골드윙[64]도 과학으로 불린다.
물론 해당 차량의 오너들을 싸잡아서 과학취급 하면 안된다.[65]

2020년대 들어 MBTI가 국내에서 밈으로 자리잡으면서 MBTI가 서로 반대인 사람들끼리(예를 들어 INTP- ESFJ, ESTP- INFJ 등…) 인연이 이어졌을 때 MBTI는 과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틱톡에서 각종 무개념 저연령층 틱톡커들을 통칭하는 드립이 되면서 오글거리는 영상 및 뇌절,영상 불법유포를 일삼는 이들을 보고 과학이라 한다.

기아 K5에서 따와서 군대에선 K2소총을 과학 2호기 소총, K5권총을 과학 5호기자동차와 동일별칭 권총으로도 부른다.

10. 창작물에서

판타지 물의 경우 마법이나 같은 초자연적인 힘과 대립하거나 그런 초자연적인 힘과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예 순수하게 과학만을 중심 소재로 다룬 장르를 SF라고 한다. 가끔 유사과학이나 초능력을 과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게 되어 너무 만능으로 묘사되거나, 특정 국가가 모든 과학 분야에서 최고로 묘사되거나, 작가의 잘못된 지식으로 엉뚱한 것들이 과학으로 포장되어서 전공자들이 뒷목잡는 사태가 발생한다.

재밌게도 초능력자와 괴물들이 공존하는 SCP 재단 세계관에는 프로메테우스 연구소나 GOC등이 과학과 접목하여[66] 마법을 사용하기도 하며 2060년을 배경으로 마법이 모두 과학으로 해명되는 세계관도 있다.
[1] 대한민국 초·중등교육 과학 교과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2] 이렇게 분리되고 남은 나머지가 바로 인문학이다. [3] 넓은 범위로는 형식과학, 사회과학, 응용과학도 포함된다. 심지어 언어학, 역사학 등의 인문학까지 포함시키는 시도도 있다. [4] 물론 상대성 이론은 이 법칙들이 속력이라는 변수에 대해 종속적임을 밝혀냈기에 의미는 있다. [5] 출처: 인물과학사 2 세계의 과학자들. 저자 박성래. [6] 「哲学」の訳語考, 遠藤智夫, 1994 [7]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 3세 라인업이 유명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과학적 논증과 관련이 깊다. [8] 자연의 일을 설명하기 보다는 유교와 도교에서 보이듯이 인간의 행동과 도덕, 정치에 관한 관심에서 이루어졌다. 제자백가라 불리는 수많은 철학체계 속에 인간의 심리와 올바른 행동. 군주의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없는 반면에 자연 그 자체를 설명하고자하는 관심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부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과학자라기 보다는 사상가에 가까웠다. [9] 현대의 3대종교를 낳은 것을 봐도 알듯이, 이들은 신의 모습과 의도. 역사. 위대함과 속성에 대해 논의했고 세상의 근원을 탐구했지만 그건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계시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예언가라 부를 수는 있어도 과학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10] 그러나 일반 사회에서는 이런 지적과는 별개로 전술한 분류 방식이 여전히 통용된다. [11] 사회과학 중에서 모델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학문이 경제학이다. [12] 무엇을 인문학으로 봐야 하고, 사회과학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견해가 엇갈리기 때문에 이 주장이 늘상 들어맞지 못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법학과 역사학. [13] 이는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증명이 가능한 표현이다. 향수의 예시를 들자면, 향수의 병을 열었을때 냄새가 퍼지는 이유는 입자들이 병안에 가만히 있는것보다는 넓은 공간으로 퍼지는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즉 다른 변수가 존재할수 없기때문에 향기가 다시 병으로 저절로 돌아가지않고 무조건 퍼질수밖에 없다는것이다. 다른 변수는 현실세계에서 존재할수가 없다. [14] 귀납이 논란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방법의 수단으로써 당당히 채택되는 이유이다. 이것말고는 현상의 진리를 파악할 별다른 논리모델 자체가 없기때문이다. [15]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명한 괴테는 여러 자연과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화강암 연구 Über den Granit>를 비롯한 다수의 지질학, 식물학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16] 근대 이전 아리스토텔레스 패러다임의 목적론적 자연관에서는 이 역시 중요한 주제였으나 뉴턴 이후 철학과 과학이 완전히 분리되면서 더이상 과학계는 자연현상에서 목적을 찾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17] 이는 결국 어떻게 탄생했는지 묻는 질문인 것이다. [18] 수학은 형식과학에 속한다. [19] 이와 관련한 이론이 천동설의 핵심 개념인 주전원이다. 주전원의 경우 잘만 설정하면 천체가 미키마우스 형태로 움직인다고 가정해도 성립한다. 순수하게 수학적으로 접근하면 어떤 형태든 끼워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주전원은 실제하지 않으며, 수학적이지만 과학적이지 않은 개념의 대표적인 사례다. [20] 물론 순수과학의 세계로 들어가면 과학자들이 "믿고",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항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대표적인 것이 첫번째로 '힘', '에너지', '중력', '시공간' 등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 해당하는 개념 및 그 성질들이다. 이 개념들은 원자처럼 존재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물론 중력 양자화 가설처럼 이런 개념들을 실체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도 존재하나 아직 성공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했다.) 이론의 전제로 기능하면서 계산의 상수 및 변수로 작동하여 수많은 물질 현상에 대해 성공적인 해석과 예측을 가능하게 하므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두번째는 실험과 관찰에 근거한 가정 명제들이다. 예컨대 "빛이 우주에서 가장 빠른 물질이다"라는 명제는 실험적으로 확증되지 않았으며 왜 그런지 이유도 알 수 없지만 통계적으로 수많은 도전을 이겨내고 그 반례를 찾을 수 없기에 특수상대성 이론의 전제로서 유효하게 작동한다. 이들은 계산에 불필요한 요인은 최소화하면서 이론과 가설을 위배하지 않고 현재까지 관찰된 모든 물리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공리처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것이다. [21] 더 자세한 내용은 통계학의 기초를 배우면 정확히 배우게 될 것이다. [22] 순수물리학자들이 가속기니 중력파 검출이니 우주 방사선이니 하는 것에 매달리는 이유가 다 이런 맥락이다. [23] 여기에는 고도의 수학적인 기술이 숨겨져 있다. 대칭성, 이를 양자역학 영역에서 기술하는 방식, 그로부터 요구(혹은 유도)되는 양자화 과정이 수반되며, 그 결과를 기본 입자들과 그 상호작용들로 간편하게 해석하고 기술하는 것이다. 일례로 파인만 다이어그램은 언듯 보기에 입자가 상호작용하는 수식을 간편하게 도식화한 것이지만 양자 전기역학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입자들의 운동 패턴에 대해 물리학자들의 검증하고 합의한 규칙들을 총망라해 집대성한 결과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대다수 입자의 전자기적 운동과 그 운동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기에 도식이 실제 현상과 100%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어도 그 유용성 하에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파인만 다이어그램이 양자장의 실제적인 작용 등 입자 운동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이론은 아니지만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학자는 아무도 없는 이유이다. 또한 이는 과학 이론이란 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나 현실과의 피상적인 일치함을 몇 가지 실험만으로 단순하게 결정 짓는 것이 아닌, 유용성, 예측가능성, 더 나아가 전체 패러다임 및 현실과 합치하는 정도에 입각해 신뢰도가 결정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24] 중력과 전자기력 등 현대과학의 근본적 전제가 되는 개념들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신학이나 시뮬레이션 우주론 등 과학의 논의 대상에서 벗어난 실험적 검증 불가의 주제로 변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까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새로운 발견과 예측까지 가능하게끔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사실 현대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중력 역시도 뉴턴이 자신이 만든 패러다임 내에서 물질 간 인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요인(힘)이자 계산 상수로 놓아서 문제가 없는 것이지 뉴턴 이전 아리스토텔레스 패러다임 내에서는 해결해야 할 자연의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이처럼 무엇이 문제가 되고 그것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냐의 주제조차도 패러다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25] 유명한 예로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사실이 휘어진 곡면에서는 더 이상 참이지 않다는 것 [26] 대표적인 예로 ZFC 공리계에서 선택 공리는 이걸 참으로 놓든 거짓이라고 놓든 이 공리계의 다른 공리들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즉, 선택 공리를 제외한 ZFC의 다른 공리들만 가지고 공리 체계를 꾸리면 선택 공리는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연속체 가설을 들 수도 있다. [27] 이론의 신뢰성과 권위를 논하는 과정에서 '동료평가'와 '검증된 학회의 공인'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자들이라고 다 과학적 방법에 잘 기반한 좋은 이론만 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실험 설계와 수행을 하고 이론ㆍ논문을 작성할 때 충분한 근거와 논리가 없고 문제가 많은 실험을 진행한 뒤에 비약적인 결론을 내는 사례도 매우 많다. 이런 신중하지 못한 과학자들 탓에 "이론은 이론일 뿐 실제와 다르다"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일 것이다. [28] 반면 실무란 대략 "현장의 목소리, 정말로 도움이 되는 정보" 등을 의미하곤 한다. [29] 역으로 말하면 이 방법을 고안하는 게 물리학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게 모든 것의 이론이다. 사실 계산 대상을 물질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도 아직 의견이 분분하고 이는 과학철학과도 연관된 문제라 아직 해결이 요원한 부분이다. [30] 정밀하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31] 사실 어떤 실험이든 이런 식으로 오차(error) 혹은 불확정도(uncertainty)를 적어줘야 한다. 만약 어떤 결과를 봤는데, 오차가 없으면 적어도 현재 과학수준에서 입각해 생각했을 때 그 결과를 사기라고 단언해도 좋다. 물론 아주 극히 미세한 확률로 오차가 전혀 없을 수도 있기야 하지만 그거야말로 이론상의 이야기이다. [32] 숫자라는 추상기호는 개념적으로 경계가 명확하게 존재하지만 현실의 물질은 그 경계를 구분짓기 매우 어렵다. 따라서 경계의 기준을 어디에 잡든 아주 미세한 오차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또 이론마다 이 경계에 대한 기준이 상이할 수 있고, 따라서 어떤 이론이냐에 따라 오차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물론 어떤 이론을 선택하냐는 그 학자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에 이 기준이 달라진다고 그 이론의 신뢰성이 낮다는 것도 아니다. 결국 과학 이론이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현상을 해석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서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33]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작은 물질 입자. [34] 모든 이론은 유효 범위를 가진다. 예를 들어 뉴턴 역학은 지구 내에서만 잘 작동하고,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기술되는 양자역학 체계는 아광속 영역 안에서만 잘 작동한다. 유효 범위가 넓을수록 좋은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자연과학 연구 현장에서는 필요하겠지만 공학 현장에서는 같은 현상이라도 유효 범위가 훨씬 더 넓은 이론을 써서 기술하면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다루는 데 드는 비용이 커진다. 가령 기계공학과 토목공학에서 양자역학이 잘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뉴턴역학으로 해도 결과는 똑같은데 양자역학으로 계산하면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전자공학이나 우주공학에서는 뉴턴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기 때문에 양자역학이 이용된다. 이렇듯 패러다임을 선택하는 기준은 해당 현상이 두 체계 모두의 유효범위 안에 들어온다면 어디까지나 실용성에 의해 결정된다. [35] 예를 들어 CERN과 협업하는 연구실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에 해당한다. [36] 이건 크게는 아예 학회 수준의 차원에서 연구의 트렌드를 바꿀 수도 있을 정도로 큰 문제다. [37] #예시1 #예시2. 물론 이것에 대해서 현대의학계가 뭐라고 평가할지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움직임 자체는 나타나고 있다. [38] 이들은 권위주의적인 대가족제를 유지하고,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을 사회적 상황에서 숨기려 하기 때문에 기존 유럽계 백인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질환 치료법을 고스란히 적용할 경우 그 예후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39] 반대로 말하면, 어떤 패러다임이 온 우주의 모든 물리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그 이론은 인류 문명이 사라질 때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40] 현대과학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CERN에 상주하는 과학자 수만 세어봐도 이 고정관념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41] 그래서 비판받는 게 대표적으로 초끈이론이다. 아주 난해해서 몇몇 소수의 과학자가 주도하는 영역인데 검증할 방법도 없고 이 이론 자체가 기존의 현상을 설명하기만 할 뿐 상대성 이론과는 다르게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는 데 기여하지도 못하니 최근에는 주류학계에 그저 수학적 설정놀음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이 역시 과학에 동료평가가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42]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 역시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영향력과 별개로 아인슈타인 본인이 입증한 게 아니라 그것이 발표된 이후 몇십년 동안이나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실험적인 검증이 이루어지고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아인슈타인이 박해받는 입장이었다면 특수상대성 이론은 검증 전에 유명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43] 전통적으로 유럽 기독교 성직자들은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을 보유하고, 이를 다른 성직자나 평신도들에게 전수해왔기에, 전근대 시대에는 교황 실베스테르 2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같이 과학자를 겸한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그래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살던 시절의 성직자들은 그 자체로 신학자를 겸하는 과학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44]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몰락한 원인은 천동설을 부인하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30년 전쟁으로 인해 전 유럽 가톨릭이냐 개신교냐로 갈려 싸우는 와중에, 개신교인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이거나 되려 가톨릭 교회 내의 높으신 분들을 까는 등의 친 개신교적인 입장을 보여서 교황청의 분노를 산 것이다. [45] 조르다노 브루노라는 유명한 지동설 옹호자가 탄압받은 사례는 있다. 다만 이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 사상가였다. 그가 사형을 당한 것도 지동설 자체보다는 당시 이단으로 간주했던 다른 종교적 신념이 문제였다. [46]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그 유명한 피카소다.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커리어에서나 사생활에서나 사후 명성에서나 그야말로 인생의 승리자 그 자체인 인생을 살았다. [47] 상기 서술된 갈릴레이 역시 당대에 비판받았던 건 본인의 괴팍하고 조급한 성격으로 인한 자업자득이었던 게 더 크다. 워낙 불필요한 논쟁과 싸움을 밥먹듯이 하고 다닌 탓에 갈릴레이가 재판에 회부된다고 하자 그를 고발하겠다는 학자가 우르르 나올 정도로 평소 적이 많았다. 또 의외로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다. 지동설의 근거로 조석 현상을 들고왔으나 완전히 틀린 설명을 하는 등 당시 토론 과정을 살펴보면 당대 학회와 카톨릭 교회 입장에서도 지동설을 받아들일 충분한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갈릴레이의 이론이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그의 사후 케플러와 뉴턴의 연구로 지동설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갈릴레이 생전에 그의 지동설이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도 그가 원래부터 박해받았냐 묻는다면 절대 아닌 것이 이미 갈릴레이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별자리 발견에 기여한 공로로 연줄을 잘 타서 충분히 대접받고 인정받는 과학자였다. [48] 그래서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연구해보라고 할 때는 연구윤리 상, 실제로 사람을 패라고 할 수는 없으니(...), 대신 참가자들에게 얄미운 기분이 들 때마다 다른 참가자가 먹을 음식에 핫소스를 치라는 식으로 대체하는 형편이다. [49] 사실 이 지적은, 과학자들과 공학자들 역시 최소한의 인문학적 감수성을 필요로 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50] 그런데 그보다 라그랑주 함수를 이용한 증명법이 더 보편적인 것 같기도. [51] 참고로 고대 그리스 시절 미성년자들이 배워야 했던 교양과목인 리버럴 아츠나 동아시아에서 선비들의 필수 과목이라 할 수 있는 육예에서 수학은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달리 말하면 아주 오랜 옛시절부터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수학이라는 학문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사고 배양이나 창의력 향상같은 두뇌 개발에 이만한 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52] 초등학교 한정으로는 사회 과목도 많은 학생들이 기피하는데, 상기한 이유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사회는 중학교 이후부터 시사나 지리, 역사 쪽에 흥미를 가지는 일명 지리덕후, 역덕후 학생들이 꽤 있어서 좋아하는 학생들이 어느 정도 있기도 하다. [53] 일본 발음은 りか. 우리가 알고 있는 '이학/공학/의료 계열'이라는 의미의 이과는 理系라고 쓰고 りけい라고 읽는다. [54] 이는 사후소급가설의 오류에 해당한다. 더 쉬운 용어를 쓰자면 자기합리화다. [55] 과학 + 카니발의 합성어. K5 운전자가 결혼을 하면 카니발로 갈아탄다는 유머가 있을 정도다. [56] 그 외 과학이라 불리는 차는 니로, 과학 3호기 K3, 과학 7호기 K7, 스포티지가 있다. 모두 기아에서 만든 자동차다. 기아와 같은 그룹인 현대자동차도 과학으로 불리는 차량이 있다. 스타렉스는 법타렉스와 구난차로 유명하여 후속 모델인 스타리아는 법타리아로 불릴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포터 포터르기니 무얼실을라고로 불리고 있다. 그 외 아스, 아N, 벨N, 젠쿱, G70 3.3 등이 있다. 1990년 중후반~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구아방이나 투스카니, 티뷰론이 현재의 과학 드립과 비슷한 인식을 가진 자동차였다. [57]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많은 사회초년생들이 생애 첫 차로 많이 구매하기 때문에 온갖 사건사고에 많이 휘말려 악명이 높다. [58] 미국에서는 교통흐름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차가 프리우스라고 할 정도로 이미지가 매우 안좋으며, 일본에선 今日のプリウス(오늘의 프리우스) 및 プリウスミサイル(프리우스 미사일)이라는 인터넷 유행어가 있을 정도다. [59] 스포츠 세단 자체가 스포티한 디자인, 스포츠카 대비 저렴한 가격, 일반 세단 보다 높은 성능으로 운전자들이 과속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양아치 카푸어의 선택을 많이 받는다. [60] 공도에서 난폭운전, 윌리를 정말 많이 한다. 바이크 대표 카페인 바이크 튜닝 매니아에서도 크게 논란이 되었던 장르이다. [61] 보통 일수명함 뿌리고 다닌다 [62] 딸배 특히 흰색이 많다. 자동차로 치면 흰색 K5와 같다고 보면 된다. [63] 신호 위반, 동차선 추월은 물론이고, 윌리도 한다고.. [64] 운전자들 평균 연령대가 높은데, 과거에 운전하던 습관이 남아있는듯 하다. [65] 과학으로 불리는 차량 대다수가 판매량이 많다. 판매량이 많은 차량은 당연히 더 눈에 띌수 밖에 없고, 해당 차량 구매층이 다양하고 제각각 운전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과학적인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66] 묘사상 막대기로 마법진 그리는 것보다 노트북으로 도형 복사해서 그리는 것이나 자체적인 수학 공식을 통해서 구현해내어 만드는 것이 더 빠르고 강력하다고. 그리고 나름의 법칙들로 과학으로 밝혀내어 무기로 사용하는 중. 핸드폰과 노트북을 들고 마법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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