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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성 베드로 다미아노
성 베드로 다미아노
스콜라 철학은 9~16세기 중세 유럽에서 성행한 기독교 신학에 중심을 둔 철학적 사상이다. 스콜라주의(Scholasticism)라고 일컫기도 한다. 일반적인 철학적 탐구와 인지와 인식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켰으며 절대자의 아래에서 인간의 이성을 이해하였다.
2. 어원
본디 가톨릭 교회나 수도원에 부속된 학문 기관(Schŏla)[2]에서 가르치던 학문으로, 당시에 이러한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 교수(Scholástĭcus)에서 따 '스콜라철학(Philosophía Scholástica)'이라고 한 것이 시초이다.3. 역사
3.1. 배경
8세기 말 카롤루스 대제 이래 유럽 각지의 교회와 수도원에서 학문 기관을 세우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성경이 곧 진리라는 전제로 후학을 가르쳤으며, 이를 변증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을 사용했다.3.2. 전기(4~12C)
먼저 플로티노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스콜라 철학의 뿌리 부분을 형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의 유출설(emanationism)과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신학의 체계에 널리 받아들였다. 물론 플로티노스의 세계관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전부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특히 하느님의 섭리를 부정한 신플라톤주의와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활동의 자발성을 강조하면서 플로티노스와 대조적으로 하느님이 단 한 순간에 창조했다고 주장했다.[3] 그의 목적은 신플라톤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의 통찰력을 받아들여 자신이 성서적 진리라고 믿는 것과 그것을 결합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이후 안셀무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중세의 정면에 등장하는데,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후대처럼 마음속으로 계시의 진리와 이성의 진리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그에 따라 처신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그 2가지를 조화시키면서 오성에는 종교적 신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안셀무스는 '하느님이 왜 인간이 되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뿐만 아니라 진리, 자유의지, 악, 삼위일체, 논리학 그리고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글을 썼다. 하지만 그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존재론적 증명이라 불리는 하느님의 실존에 관한 독특한 논증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나무위키에는 안셀무스의 신존재증명이라는 이름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논거는 거의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살아 있다.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가 해당 논거를 재구성하고, 라이프니츠가 또 다시 고친 것도 모자라 헤겔까지 그것을 들먹였다. 이 논거는 가능성과 필요성의 논리학인 근대의 양상논리학 측면에서, 그리고 특히 수학자 괴델과 동시대 철학자 플란틴가에 의해 좀 더 최근 것으로 재설정되었다.
3.3. 중기(13C)
이슬람 문화권으로부터 그리스 사상가들의 작품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전까지의 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해 신앙 체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13세기의 스콜라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 하나의 인물로 대거 정리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복음서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와 보에티우스의 저작들과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의 주해서를 집필했으며,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신학 및 철학 주제에 관해 논쟁 형식으로 긴 분량의 논문들을 썼다. 그는 종교의 교리 개요서인 2권의 대전(大全)을 완성했다, 그 중 한권이 '대이교도대전' 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신앙심이 없는 이들이나 유대교 및 이슬람 사상가들과 소통하는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싶어 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쓴 것이다. 다른 한 권은 미완성작 신학대전으로, 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해 백과사전처럼 교리를 설명해 놓은 책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하고 크게 동요하던 여러 다른 중세 신학자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에서 그리스도교와 맞지 않는 부분은 그냥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철학과 신앙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실제로 여러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옹호하였는데, 심지어 그리스도교 교리와 충돌하는 부분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변호해주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는 5가지 방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5가지 방법은 모두가 받아들여야만 사는 명제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관한 사실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사실들에서 거꾸로 추론해 나가 하느님은 각각의 제1원인론이라고 주장했다. 이 5가지 명제는 이와 같다.
1. 운동의 실재
2. 인과 관계
3. 사물들 간의 의존성
4. 어떤 자질들은 정도의 규모로 비교될 수 있다는 사실
5. 본래 목적 지향적으로 보이는 사물들
5번째 논증을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4. 후기(14~16C)
근세 철학의 등장으로 쇠퇴하였다.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1486-1546)로 대표되는 스페인의 살라망카 학파가 이 시기 학파이다. 도밍고 데 소토(1494-1560), 멜키오르 까노(1509-1560), 루이스 데 몰리나(1535-1600), 프란시스코 수아레즈(1548-1617) 등이 이에 속한다. 살라망카 학파는 광의의 의미로는 스페인 스콜라철학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3.5. 개신교 스콜라주의(16-18C)
자세한 내용은 개신교 정통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Protestant Scholasticism
칼뱅 이후 개신교 신학자들은 철학과 종교개혁 신학을 결합했다. 이 사상은 크게 루터파 스콜라주의와 개혁파 스콜라주의로 나뉜다.
3.6. 신스콜라철학(19C)
Neo-scholasticism토마스주의, 신토마스주의
19세기 후반에 가톨릭 교회에서는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 정신을 따르는 신 스콜라 철학이 생겨났다.
4. 특징
스콜라적 방법은 구체화, 엄격성, 명료함, 선명성, 목적성, 체계성이라는 장점이 있다. 이 모든 것은 그 결과로서 일정한 차가움, 비역사성, 추상성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신학을 포함하여 어떠한 학문이든 간에 자신이 학문이기를 원한다면 치러야 할 대가다.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ca) 제1권, 조규만 등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2, p.818
바티스타 몬딘(Battista Mondin), "신학사"(Storia della Teologica) 제1권, 조규만 등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2, p.818
- 교의를 체계화하여 내용이 상세하고 방대하다.[4]
- 이성적인 사유를 중시하나, 이를 하느님의 전지전능 아래서 이해하고자 힘썼다.
- 비판적 논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는 논리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 중세의 대학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며, 신앙 외에도 현실의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가령 중세 시절까지만 하여도 빈이 긍정적 가치, 더 나아가서 신성한 가치이고, 부는 지극히 부정적 가치였지만 이윤 추구를 정당화한 스콜라 철학의 논리 제시로 초기 자본주의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었다. 이윤 추구를 정당화한 스콜라 철학… 초기 자본주의 문을 열다
스콜라철학과 교부철학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일단 둘 사이의 역사적 환경 차이에서 시작하는 게 쉽다.
교부 시대는 상당 기간에 걸쳐, 헬레니즘 다신교, 마니교, 아리우스파 등이 교부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교부들의 문체는 자연스럽게 사목적, 호교적, 수사학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상대를 설득하여 올바른(최소한 교부들이 보기엔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문학적이고 명료한 화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고대 수사학의 특성상 문장이 다소 반복적이고 지루하다는 느낌은 줄 수 있지만, 적절한 해설의 도움을 얻는다면 대학 학부생 정도의 교양만 있어도 충분히 독서에 도전할만하다. 물론 '안' 어렵다는 것은 아니지만, 수사학적 문체 때문에 읽는 맛이 좋아 체감 장벽은 낮다.
반면 스콜라 시대는 이미 가톨릭이 서방을 통일한 상태였고, 유다인, 무슬림, 각종 이단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통일된 세계였던 건 분명하다. 톡 까놓고 말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랑 둔스 스코투스 중 누가 더 옳은지는 대중과는 별 상관이 없는 신학 내부의 문제였고, 학자가 설득해야 할 건 이단자/이교도가 아니라 동료 대학교수들이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스콜라학자들은 호교적이고 수사학적인 '사목자의' 문체보다는 사색적이고 논리적인 '대학교수의' 문체를 사용했다. 따라서 이런 '교수들의' 문체에서 차갑고 건조하단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 대신 이전 시대보다 훨씬 정교한 논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 철학자
5.1. 전기
5.2. 중기
5.3. 후기
[1]
요셉 피퍼, 중세 스콜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김진태 옮김, 서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3, p50
[2]
라틴어로 '학교', '학원'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어 '
school', 'scholarship'의 어원
[3]
플로티노스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4]
다만 훗날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쓸데없이 형식적이고 까다롭다고 비판하여 종파간의 신학적 논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