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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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글렌 굴드 Glenn Gou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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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글렌 허버트 굴드 Glenn Herbert Goul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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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2년 9월 25일 | ||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 주 토론토 | |||
사망 | 1982년 10월 4일 (향년 50세) | ||
캐나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 | |||
국적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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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피아니스트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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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홈페이지 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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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묘소 | 마운트 플레즌트 묘지 | |
학력 | 토론토 왕립 음악원 (졸업) | ||
장르 | 서양 고전 음악 | ||
활동 기간 | 1945년 – 1982년 | ||
혈통 |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 노르웨이계 캐나다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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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러셀 허버트 굴드 어머니 플로렌스 엠마 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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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없음 | ||
종교 | 개신교( 장로회) → 무종교[1] | ||
악기 | 피아노, 오르간 | ||
레이블 | CBS 레코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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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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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특이한 연주스타일과 성격으로 평생 괴짜라는 칭호를 달고살았던 연주자이다. 파티장에서도 장갑을 끼는 등 결벽증이 매우 심했다. 실제로 결벽증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신질환을 갖고있던 피아니스트였고, 신경과에서 처방받았던 약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수트케이스에 늘 담고 다닌다는 루머가 있었을 정도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토론토의 사우스우드가 32번지에 자리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굴드는 어린시절부터 천부적인 피아니스트였다. 갓 태어난 굴드가 바로 손가락을 움직이는것을 보고, 의사가 '이 아이는 커서 피아니스트 아니면 의사가 되겠군'이라고 했다고 한다. 에드바르 그리그의 후손이기도 하다.[3]칠레 출신 피아니스트인 알베르토 게레로[4][5] 밑에서 배웠다. 글렌은 어린시절부터 은둔형 폐인끼가 충만했다. 그의 어린시절 친구인 로버트 풀포드는 '글렌은 어린시절부터 늘 혼자있기를 좋아했어요'라고 할 정도였다.
2.2. 데뷔
1955년도에 미국 음반회사인 CBS(콜롬비아)[6]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을 계기로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거장반열에 올랐다. 당시 녹음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7]
이 음반은 1955년에 녹음하여 1956년 출시되자마자 곧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후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이 오늘날까지 잘 팔리고 있다. 이는 엄청난 성공이었으며, 글렌의 주위사람들은 모두 기뻐했으나 조용하고 고독함을 즐기는 그에게는 힘든 점도 있었다. 그의 인터뷰에서 고백했듯이 갑자기 연주해 달라는 요청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왔고, 글렌은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젊은 피아니스트가 한 순간에 세계적 거장 반열에 드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늘 고독함 속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즐기던 굴드에게 주위의 관심을 받고 세계의 무대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힘든 시련이였다. 그 시기에 굴드는 다양한 정신적-신체적 고통과 병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30대에 공연 은퇴를 선언했고, 무대활동보다는 녹음활동에 더 열중했다.[8] 사실상 30대 이후로 굴드는 20세기판 히키코모리나 다름없었다, 그의 음악은 원래부터 개성적이였지만, 30대 이후의 녹음을 들어보면 음악 초보자도 굴드 연주라는걸 알 수 있을정도로 완벽한 굴드표 녹음이라는걸 알 수 있다.
2.3. 말년
쉰에 요절한 말년의 굴드는 정신상태 뿐만이 아니라 육체적 상태도 엉망이었다. 당시 10년만에 굴드를 방문한 굴드의 친구와 그의 아내는 굴드를 보고 깜짝 놀랬다고 한다. 얼굴은 퉁퉁 붓고 피부는 죽은사람 같아서 젊었을 적의 미모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눈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9]이미 그 당시 그는 음악작업보다는 방송작업과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말그대로 피아노는 취미로 치는 수준이었다. 사실 굴드는 젊었을 적부터 자신이 피아노만 잘치는 사람보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모든 분야에 만능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었다. 당시 CBS스튜디오에서 가끔식 연주녹음 작업을 했는데, 죽기 몇 해전부터 굴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며 자신이 사교성이 없어서 친한 이가 거의 없기에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안 올 것이라며 말했다. 이렇게 매우 비관적으로 삶과 동시에 다시 한번 세계적인 업적을 이루고 싶었는지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세월동안 과다한 약물복용으로 인해 그의 몸은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고, 그의 말년 연주 동영상을 보면 손가락이 가끔식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게 약물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굴드의 일기에는 말년에 손가락의 이상을 호소하는 글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굴드는 재녹음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다시 한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81년에 녹음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사실 1982년, 굴드 사후에 발매되었다. 비평가 팀 페이지에 의하면 첫번째 골드베르크 녹음중에서 몇몇 부분이 굴드 맘에 들지 않았던 것도 재녹음의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2.4. 사망
1982년 9월 27일 굴드는 발작을 호소했다. 그의 비서가 의사를 불렀으나, 굴드의 비상 전화에 질린 의사는 그냥 응급실에나 가라고 했고, 병원을 매우 싫어하는[10] 굴드는 계속 버티다가 뒤늦게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어찌할 방법은 없었고 증상은 갈수록 악화되어 의식을 잃고 뇌사 상태에 이르자 아버지의 동의 하에 호흡기를 떼고 장례식을 치렀다.굴드가 나고 자라고 생활하고 죽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골드베르크의 아리아의 처음 몇 마디가 각인되어 있다.
3. 음악적 면모
당대 최고의 명성을 지닌 바흐 음악 스페셜리스트 답게 성부를 나눠 경중에 차등을 준 채로 선적인 흐름을 만드는 식의 바흐 음악에 필수불가결한, 가히 귀신을 방불케하는 수준의 비상한 테크닉을 지녔다.[11] 레전드 피아니스트들 대부분이 그렇다고는 해도 극한의 셈여림 컨트롤을 기반으로 한 믿을 수 없는 속주는 역사적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도 굴드만의 독특한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12]낭만음악을 싫어해서[13][14] 낭만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19세기 전반부에 쓰여진 독주 기악곡들은 다소의 베토벤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보잘것없는 실패작들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일반화는 쇼팽, 리스트, 슈만... 등에도 해당된다. 당신도 알다시피 초기 낭만파 작곡가들 중 어느 누구도 피아노곡 쓰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 참, 그들은 페달 사용이나 극적 효과를 내는 것, 사방팔방으로 음들을 흩뿌려 놓는 것은 알았지만 진정한 곡다운 곡은 쓰여진 것이 별로 없다.
그 시기에 쓰여진 음악은 공허한 극적 제스처와 전시효과로 가득 차 있고, 세속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성향이 나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했다. 위대한 음악을 접할 때 내가 바라는 모든 기준이 되는 화성과 리듬의 다양성, 대위법적 창안은 이런 곡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15]
그 시기에 쓰여진 음악은 공허한 극적 제스처와 전시효과로 가득 차 있고, 세속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성향이 나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했다. 위대한 음악을 접할 때 내가 바라는 모든 기준이 되는 화성과 리듬의 다양성, 대위법적 창안은 이런 곡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15]
한 마디로 굴드는 바흐와 하이든, 그리고 베토벤의 걸작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명료한 형식미와 탄탄한 구성, 대위법으로 대표되는 다성음악의 미학을 선호한 반면, 쇼팽과 리스트로 대표되는 낭만파 피아니즘에 대해서는 극불호에 가까웠던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레퍼토리에서는 후기 고전주의, 초/중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후기 낭만주의의 황혼과 현대음악의 태동을 각각 상징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의 피아노곡들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다. 굴드는 이 두 작곡가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오페라인 카프리치오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16]
그리고 쇤베르크와 그 일파의 음악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옹호를 하며 녹음 결과물을 남겼으며, 쇤베르크의 라이벌이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혹평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신고전주의 계열에 무조건 적대적인 성향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게, 파울 힌데미트에 대해서는 또 이례적인 호감을 표하며 그의 묻혀버린 기악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조명하는 데에 힘썼다. 그 외에 그나마 낭만파 작곡가 중에서는 안톤 브루크너를 높게 평가했는데, 보잘 것 없는 낭만파 음악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하는 것보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 연주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굴드가 좋아했던 작곡가들은 대부분 피아노 작품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그의 몇 안 되는 고전, 낭만주의 음반의 해석은 논란이 뜨겁다. 그가 연주한 고전 시대 작곡가 작품의 속도는 대부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거나 전혀 말도 안 되는 듯한 해석을 집어넣기 일쑤여서 그 작곡가의 음악에 정통한 전문가들에게 욕을 밥 먹듯이 먹는 건 양반이고, 그를 매장시키려는 음악가 집단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굴드의 모차르트 소나타는 어처구니없이 빠른데다가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에서 중요시하는 음색과 이음줄(슬러)의 표현 대신 냉정하기 짝이 없는 퍼석퍼석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토벤의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은 또 그 반대로 1, 2악장이 엄청나게 느려서, 1악장의 경우는 트레몰로를 16분음표처럼 연주한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반면 피아노 소나타 16번 Op.31-1의 1악장 연주는 말도 안 되는 속도의 아르페지오를 선보여 지금도 많은 청자들이 기겁한다.
따라서 그의 연주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음악은 역시 바흐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바흐 음반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대의 현재나 과거,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해석과도 일치하지 않는 독창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해석과, 미켈란젤리 같은 대가들과 비견되는, 굴드만이 낼 수 있는 특이한 피아노 음색으로 많은 평론가들이나 매니아, 전문가들에게 바흐의 음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극찬받는다.
헤럴드 쇤베르크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상당히 많이 참고했다. 일반적으로 추천되는 음반은 대부분 바흐의 곡으로, 골드베르크 변주곡[17], 프랑스 조곡, 영국 조곡, 파르티타,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토카타와 푸가, 이 외에도 리스트 편곡에 의한 베토벤 교향곡 5번(운명), 6번(전원) 등이 꼽힌다.[18]
대부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대표곡으로 뽑지만, 그의 다른 음반들을 듣다보면,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음악으로의 진입을 위한 창문일 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푸가들, 토카타, 하프시코드 협주곡 1번, 그리고 베토벤 소나타 32번 등 조금씩 그가 녹음한 다른 연주들로 영역을 넓히다 보면,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연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모차르트의 경우 대체적인 평은 좋지 않지만 소나타 10번의 경우 실황 연주는 매우 아름답다. 굴드는 녹음된 음반보다는 실황 연주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구하기 어렵다. 게다가 굴드는 연주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어서 레코딩 도중에도 그 콧노래가 희미하게 녹음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굴드의 습관이기도 했는데, 녹음반에 까지 그 소리가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대체로는 이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나 굴드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곡의 감상을 방해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허밍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허밍에서 느껴지는 음악에 대한 자유로운 갈망과 영혼은 그의 음반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낭만파 작곡가의 몇 안되는 레코딩 곡은 말그대로 클래식하게 연주해서 색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대표적으로 쇼팽 소나타 3번[19], 스크랴빈 소나타 5번 등.[20]
3.1. 바로크
Bach, Goldberg Variations (rec. 1955)[21] | Bach, Art of the Fugue, #1, 2, 4 (rec. 1957) |
Gibbons, Fantasy in C major & Allemande (Italian Ground) (rec. 1968) | Bach, Partita No.4 (rec.1979) |
Byrd, Sellinger's Round (rec. 1971) | Bach, Goldberg Variations (rec. 1981) |
3.2. 고전파 및 낭만파
Mozart, Piano Sonata K.330 Mvt.2 (rec. 1958) | Haydn, Piano Sonata, Hob. XVI:52 Mvt.3 (rec. 1981) |
Beethoven, Op.14 No.1 Mvt.2 (rec. 1966) | Mendelssohn, Op.30 No.3 (rec.1970) |
Wagner,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Act I: Prelude (rec. 1973) | Brahms, Op.118 No.6 (rec. 1960) |
3.3. 20세기 음악
Webern, Variations (rec. 1974) | Berg, Piano Sonata, Op.1 (rec. 1958) |
Schoenberg, Op.23 (rec. 1965) | Hindemith, Piano Sonata No.3 (rec. 1966-1967) |
4. 어록
나의 삶은 곧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내가 사는 방식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난 그것이 마음에 듭니다.
생활 방식 그리고 일, 이 두 가지가 서로 완전히 융합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기벽이라고 부른다면 그렇습니다. 나는 기인입니다.
난 그것이 마음에 듭니다.
생활 방식 그리고 일, 이 두 가지가 서로 완전히 융합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기벽이라고 부른다면 그렇습니다. 나는 기인입니다.
청중을 위한 음악은 그들을 명상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녹음이 좋아요. 연주 중에 정말로 멋진 무언가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남길 수 있습니다.
나는 당연히 모든 사람이 나처럼 구름 낀 하늘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왔다.
태양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태양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만약 내가 여생을
무인도에서 보내야 한다면,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듣거나 연주해야 한다면, 그 작곡가는 거의 틀림없이 바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다른 어떤 음악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매우 깊고 일관성 있게 감동시키고, 다소 부정확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의 모든 기술과 탁월함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 즉 그것은 인간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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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굴드에 대한 말들
이렇게 아낌없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압도적으로 드러낸 최고의 피아니스트는 없다.
아마도 충분한 시간이 충분한 사랑을 위해 노력한 어느 날 우리는 글렌의 천재성에 대한 진정한 감상에 도달할 것이다.
― 예후디 메뉴인 #
아마도 충분한 시간이 충분한 사랑을 위해 노력한 어느 날 우리는 글렌의 천재성에 대한 진정한 감상에 도달할 것이다.
― 예후디 메뉴인 #
글렌 굴드, '바흐의 가장 위대한
통역사'. 글렌 굴드는 바흐에 대한 자신만의 접근방식을 찾았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그의 명성을 받을 만하다. 내가 보기에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바흐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색인 음성 수준에 있는 것 같다.
―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
바흐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며, 그의 녹음은 그의 영구적 유산을 구성한다. 때때로, 파르티타(Partitas)에서처럼, 그는 전문가, 음악 애호가 그리고 비평가들에게 음악을 재고하도록 강요했고, 모든 선입견들을 배반했다. 그는 훌륭한 손가락과 음악의 선형적인 요소를 명확히 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물론 많은 피아니스트는 아니지만 다른 피아니스트들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특정한 종류의 확실한 음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전문가인 피에로 라탈리노(Piero Ratalino)가
호로위츠,
리히터,
미켈란젤리같은 위대한 색채 연주자들이 불러 일으키는 소리와 비교되는 음소리다. 무엇보다도, 굴드의 바흐 해석은 음악을 다르게 들리게 했다 – 템포, 구절, 역동성, 개념에 있어서. 이전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요소들이 갑자기 크게 부각되었다. 하지만 그 공연에는 별나거나 매너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음악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다른 피아니스트들과는 다른 전제와 원칙에 따라 작업한 것은 독창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전통적인 바흐 연주, 낭만적인 바흐 연주, 신고전주의 바흐 연주, 현대적 바흐 연주, 음악학적 바흐 연주라고 표현할 수 없다. 어떤 것이든 바흐 연주 역사상 독특한 생명과 정신을 불어넣었다.
― 해럴드 C. 숀베르크[22], The Great Pianists (1987) #
― 해럴드 C. 숀베르크[22], The Great Pianists (1987) #
그는 매우 총명했다. 그의 재능은 천재적인 재능이었다. 바흐에 대한 그의 레코딩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의 뛰어난 정신력과 절대적인 식감의 명료성은 독특하다.
―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23] #
―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23] #
굴드는 음악가가 아니라 다른 작곡가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작곡가이다.
굴드는 바흐의 작곡에서는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실행자의 역할은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자극하고 따라서 가장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 머리 퍼라이아[25] #
굴드는 바흐의 작곡에서는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실행자의 역할은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자극하고 따라서 가장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 머리 퍼라이아[25] #
생동감 넘치는 타건과 파격적인 해석으로 고전에 새 생명을 부여한 피아니스트
― Apple Music
― Apple Music
굴드를 고독한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하는 것을 잘못됐습니다.
그의 내면세계는 풍요로우니까요. 단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조지프 로디 (Joseph Roddy)
그의 내면세계는 풍요로우니까요. 단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조지프 로디 (Joseph Roddy)
굴드는 정말 특별해요. 그는 삶의 모든것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는 셈하고, 필기하고, 결산표나 도표를 작성합니다.
그 노트들은 연도별로 나뉘어 있죠. 그것은 강박장애입니다.
― 캐나다의 한 저널리스트
그는 셈하고, 필기하고, 결산표나 도표를 작성합니다.
그 노트들은 연도별로 나뉘어 있죠. 그것은 강박장애입니다.
― 캐나다의 한 저널리스트
무라카미 하루키: 굴드의 연주를 들으면서 흥미를 끄는 것은
베토벤 연주 같은 것에서도 대위법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가져가는군요. 단지 오케스트라와 조화롭게 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음악을 엮어 긴장감을 만들어 가는겁니다. 그런 베토벤씨는 신선했어요.
오자와 세이지: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가 사망한 후 그러한 자세를 계승하여 발전시킬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안 나왔어요. 역시 그 사람은 천재였나?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그 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어요. 첫째, 그렇게까지 용기 있는 사람이 없죠. 내가 보기엔. #
오자와 세이지: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가 사망한 후 그러한 자세를 계승하여 발전시킬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안 나왔어요. 역시 그 사람은 천재였나?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그 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어요. 첫째, 그렇게까지 용기 있는 사람이 없죠. 내가 보기엔. #
그렇다면 글렌 굴드가 대중의 마음속에 확고히 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점점 더 인기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악스는 오늘날의 글렌 굴드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그들의 특성 때문에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두 명이라고 믿고 있다. 당신이 굴드의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이후 모든 피아니스트는 굴드의 영향을 받아왔다고 액스는 말한다. 그의 의사소통 능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굴드의 연주에는 황홀감도 있었다.
(중략)
글렌 굴드 리더(Glenn Gould Reader)의 작가인 팀 페이지는 굴드의 명성의 장수 비결은 그의 독창성에 있다는데 동의한다. "골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중단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라고 그는 유명한 조지 셀 킵을 언급하며 말한다. 악에서 굴드의 사랑, 황홀감, 강렬함은 전염성이 있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처럼 굴드는 보기에 좋았다. 둘 다 음악에 솔직하고 진실되게 반응했고, 공연의 열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흥분이 있었다. 어느 콘서트도 같지 않았다. 즉시성과 즉흥성이 있어 청중을 긴장시킬 수 있는 열광케 하는 품질을 만들어냈다.
(중략)
그의 생애 동안 굴드는 북미, 특히 캐나다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명성은 영국과 유럽 일부에서 더 최근에 나타났다. 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굴드는 처음에는 화려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라모폰의 롭 코원(Rob Cowan)에 따르면 그는 새롭고 젊고 신선하고 반항적이었다. 일종의 음악적 제임스 딘이었다. 굴드는 그가 죽은 후에야 재발매의 현상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삶 동안 굴드는 오랜 음악적 전통과 가치관을 깨고 신뢰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재발매를 통해 헌신적이고 매혹적인 예술가가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그가 우리를 깨웠고 귀를 열어 주었다"고 말한다. 굴드라는 거의 광적인 요소와 결합된 기교, 명료성, 리듬감 있는 추진력은 계속해서 새로운 청취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글렌 굴드는 피아니스트 이상이었기 때문에 그를 한 분야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그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지성이었다. 글렌 굴드는 우리에게 종종 도전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강요한다.
― 그라모폰 #
(중략)
글렌 굴드 리더(Glenn Gould Reader)의 작가인 팀 페이지는 굴드의 명성의 장수 비결은 그의 독창성에 있다는데 동의한다. "골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중단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라고 그는 유명한 조지 셀 킵을 언급하며 말한다. 악에서 굴드의 사랑, 황홀감, 강렬함은 전염성이 있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처럼 굴드는 보기에 좋았다. 둘 다 음악에 솔직하고 진실되게 반응했고, 공연의 열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흥분이 있었다. 어느 콘서트도 같지 않았다. 즉시성과 즉흥성이 있어 청중을 긴장시킬 수 있는 열광케 하는 품질을 만들어냈다.
(중략)
그의 생애 동안 굴드는 북미, 특히 캐나다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명성은 영국과 유럽 일부에서 더 최근에 나타났다. 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굴드는 처음에는 화려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라모폰의 롭 코원(Rob Cowan)에 따르면 그는 새롭고 젊고 신선하고 반항적이었다. 일종의 음악적 제임스 딘이었다. 굴드는 그가 죽은 후에야 재발매의 현상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의 삶 동안 굴드는 오랜 음악적 전통과 가치관을 깨고 신뢰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재발매를 통해 헌신적이고 매혹적인 예술가가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그가 우리를 깨웠고 귀를 열어 주었다"고 말한다. 굴드라는 거의 광적인 요소와 결합된 기교, 명료성, 리듬감 있는 추진력은 계속해서 새로운 청취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글렌 굴드는 피아니스트 이상이었기 때문에 그를 한 분야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그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지성이었다. 글렌 굴드는 우리에게 종종 도전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강요한다.
― 그라모폰 #
6. 여담
1955년 6월 미국 뉴욕의 오래된 교회에 23세의 청년 피아니스트가 찾아왔다. 한여름이었지만 외투에 베레모까지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그의 장비에는 악보 뭉치 외에도 수건 묶음, 큰 생수 두 병, 서로 다른 색깔과 용도를 지닌 작은 알약 다섯 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음반 녹음을 앞두고 언제나 몸을 움직이는가 하면, 흥분에 들떠서 지휘를 하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발레를 하기도 했다. 비스킷을 우걱우걱 씹어먹기도 했다.
1955년 첫번째 레코딩 때의 일화.
*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았으면 전업적가(Writer)가 되었을 거라고 했고,[27] 실제로 피아니스트 활동을 하면서 음악에 대해 많은 저술을 했다. 피아노 실력 못지 않게 필력도 대단했는데, 방대한 어휘력을 바탕으로 여러 1955년 첫번째 레코딩 때의 일화.
- 아버지가 모피상이었던 탓에 굴드는 어렸을 적부터 집 근처에서 가죽이 벗겨저 죽은 동물들을 많이 접했다고 한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동물애호가가 되었다고 한다.
- 상기한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고기를 절대 입에 대지 않았으며, 젊었을 때는 생선을, 말년에는 스크램블 에그를 먹었다고 한다.
- 그가 워낙 괴짜라서 완전히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굴드의 변호사이자 친구인 스티븐 포센에 따르면, 그는 따뜻하고 재미있었으며, 반사회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그는 완벽주의자였고, 자기 방식대로 완전한 통제를 추구했다. 물론 이것이 그가 은퇴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레코딩 스튜디오는 굴드가 음악적 완벽함에 가까워지도록 도왔다. 그러나 완벽의 목표는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있었다. 포젠은 굴드가 자신의 생각과 말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애쓰면서 종종 비틀거리곤 했던 빈번하고 긴 전화 통화를 회상한다. 그는 또한 포젠에게 전화를 자주 걸었고, 스스로 완벽해지려고 애쓴 후에 전화로 그의 생각과 글을 읽곤 했다고 한다. #
- 청중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그리고리 소콜로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이다.
- 악보를 외워서 피아노를 치는건 기본이고 세 살때부터 이미 악보를 읽을줄 알았으며, 다섯 살때부터 작곡을 했다고 한다.
- 굴드의 활동과 작품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클래식 음악 애호가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은 팬을 획득해 오고 있다. 국내에도 많은 팬이 있다. 그의 유명한 팬으로 오스카 피터슨, 브라이언 존슨, 아스토르 피아졸라, 사카모토 류이치와 같은 다른 장르의 음악가나 에드워드 사이드나 롤랑 바르트 같은 현대 철학의 철학자들에게도 팬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그의 광팬이기도 했다. #
-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인 브뤼노 몽생종의 회고에 따르면 굴드는 영상 촬영을 위한 인터뷰를 끝마치고 나서 방송용 마이크에 머리가 살짝 부딪혔다고 한다. 그 직후 굴드는 "나는 이제부터 뇌일혈이 올지도 몰라. 한 시간후에는 어지럼증이 올것이고, 또 몇시간 후에는..."이라고 하며 뇌일혈 증상을 상세히 나열했다고 한다. 몽생종은 굴드의 이런 행동을 보고 어이없어 했다고 한다.
- 상술했듯 굴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을까 항상 걱정했다. 그래서 약물을 남용했는데, 항생제, 진통제, 안정제는 물론이고, 심지어 공연 전 긴장 때문에 잠이 안온다고 펜토바르비탈도 복용했다.
- 뉴스를 보면 걱정과 근심이 많아진다면서 뉴스나 신문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한다.
-
1967년 3월에 방영된 한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하기 전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는
슈로더라고 짧게 언급했다.
- 민감한 성격이었다. 굴드랑 대화하며 친하게 지내던 피아노 기술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굴드랑 대화를 마치고 피아노 기술자는 친근감의 의미로 어깨를 살짝 툭 쳤다. 그러자 굴드는 그로 인해 어깨가 탈골되고 부러졌다며 피아노 기술자를 고소하고 병원에 4주 동안 입원하였다. 당연히 의사들은 정밀진단 끝에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었고, 굴드의 정신적인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그 이후 서로 절교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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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올라온 그의 관한 단편 다큐멘터리. 이 다큐멘터리에서 캐나다 콘서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호숫가의 오두막에서 휴식을 즐긴다. 이것은 굴드가 숲 속을 서성거리는 것, 그의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노를 쉬고 있는 어부들, 그리고 굴드가 작곡을 이야기하는 프란츠 크라메르와 같은 동료 음악가들에게만 알려진 이야기다.
- 1970년 캐나다 정부가 수여한 캐나다 최고 훈장인 1등급 훈장을 거절하기도 했다. # 그의 사후인 1983년 글렌 굴드는 캐나다 음악 명예의 전당(Canadian Music Hall of Fame)에 헌액됐다.
- 2012년에는 캐나다 정부가 지정한 국가사적 중요인물(Persons of National Historic Significance)에 선정됐다.
- 그의 모교인 토론토 왕립 음악원(현 왕립 음악원)에는 클래식 음악 연주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위한 센터가 있는데, 1997년 글렌 굴드를 기념하기 위해 글렌 굴드 학교(The Glenn Gould School)로 이름을 바꿨다.
- 그의 이름을 딴 예술상인 글렌 굴드상(The Glenn Gould Priz)은 캐나다의 굉장히 권위있는 상이다. 예술에 대한 큰 업적을 세운 예술가들에게 선정되는데 캐나다인이 아니라도 받을 수 있다.[29]
- 1977년 미국은 무인우주선 보이저호를 쏘아올렸다. 보이저호는 외계 생명체와 맞닥뜨릴 상황까지 대비했다. NASA는 우주선 안에 외계인에게 소개할 만한 인류 유산을 데이터화해 담았고, 여기엔 지구를 대표하는 음악도 포함됐다. 이것이 바로 골든 레코드인데 선곡 리스트엔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곡이 있다. #
- 대중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페툴라 클라크는 마음에 들어했고, 어릴 때부터 재즈를 꽤 좋아해 재즈 공연도 보러 갔다. 빌 에반스에 대해서는 "재즈계의 스크랴빈"이라는 극찬을 하며 교류를 이어갔으며, 에반스가 1963년에 앨범 'Conversations with Myself'를 녹음할 때 자신이 아끼던 스타인웨이 CD 318 그랜드 피아노를 빌려주기도 했다.
- 워낙 특이한 괴짜로 알려진 만큼 평전이나 문학의 소재로 자주 쓰이는 인물이다. 굴드의 성장 배경, 예술관, 사고 방식 등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볼 만한 평전으로는 굴드와 절친하게 지냈던 의사 피터 오스왈드(Peter F. Ostwald)가 쓴 '피아니즘의 황홀경(Glenn Gould: The Ecstasy and Tragedy of Genius)'가 있다.
-
인기가 많은 피아니스트라
리마스터 앨범이나 관련 박스세트가 꾸준하게 나온다. 2007년 녹음 전집, 2012년에는 바흐 녹음만 모은 세트가 출시되었다. 2015년 사후 30주년을 맞이하여 음원을 리마스터한 전집이, 2020년에는 여기서 바흐 음반만 추린 세트가 발매되었다.
특히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소니가 2022년 미공개 세션을 포함한 앨범 세트를 또 낼 정도로 우려먹고 있다.
- 2020년에 빌리 와일드(Billy Wild)와 게이브 픽(Gabe Pick)이란 2명의 힙합 프로듀서가 그의 연주를 샘플링한 힙합 앨범' Uninvited Guests'을 냈다.
7. 관련 서적
- 뜨거운 얼음 : 글렌 굴드의 삶과 예술(Wondrous Strang)
- 피아니즘의 황홀경
- 글렌굴드-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 (주로 인터뷰 모음집)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글렌 굴드 : 그래픽 평전 [30]
- 굴드의 피아노
-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가상의 캐릭터로서 '글렌 굴드'가 나온다)
[1]
내세와 영적 존재를 믿었다. / "
Gould on God", ishmaelite.blogspot.com, 2008.1.23.
[2]
미국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엄연히 캐나다인이다.
[3]
그리그가 굴드의 외할아버지의 삼촌이었다.
[4]
굴드의 스승으로서, 피아노 교수법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피아노에 관해서 둘은 항상 생각이 달랐으며, 실제로 굴드가 성공한 후에 인터뷰 등에서 게레로에 대해 한번도 언급해 주지 않자 게레로는 무척 상처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굴드와 게레로는 할아버지와 손자같이 친했다)
[5]
후에 굴드가 말하길, 본인의 스승인 알베르토 게레로는 아주 매력적이고 훌륭한 스승이였다고 회상했다. 그 이유는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나이 어린 굴드와의 대립을 항상 허용해 주었다는 이유. 다른 말로 하면 도제식 교육으로 스승의 말에 절대 복종하며 배우는 것이 아닌, 어렸지만 똘끼 많은 굴드의 음악적 견해를 항상 존중해주고 귀담아 들어주었다는 이야기.
[6]
현 소니 클래식의 전신.
[7]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간구간 굴드의 흥얼거림이 녹음되어 있다.
[8]
표면적으로 드러낸 그의 조기 은퇴 이유는 전자 기술의 중요성이라고 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공학은 예술가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고도 곡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최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자유로움을 줄 수 있다. 공학은 음악회가 줄 수 있는 끔찍하고 혐오스러우며 인간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치명적 불확실성을 제거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라고 장황히 설명했다고 한다.
[9]
그래도 굴드는 친구 부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10]
결벽증이 심했던 굴드는 병원을 병균 창고로 생각했기 때문에 병원 가기를 평생 싫어했다. 실제로 그는 일생에 걸쳐 유일하게 마음 놓고 대할 수 있었던 존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까지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 가지 못하고 전화로만 어머니와 대화했다.
[11]
왼손-반주/오른손-선율의 구조를 띄는 피아노곡보다 양손이 고르게 역할을 분담하는 바흐의 곡에 더 유리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한다.
[12]
그의
바흐 이탈리안 콘체르토 3악장이 이런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시 중 하나다. 저런 속도로 연주하면 중반부에 특히 난무하는 이음줄에 의해 손이 꼬이기 십상인데, 너무나도 깔끔하게 지나가며 셈여림 컨트롤까지 완벽하게 처리한다.
[13]
그는 '나에게는 1세기의 긴 공백이 있는데 그 경계의 한쪽 끝은 대략 푸가의 기법(바흐의 곡)이고, 다른 한끝은 트리스탄이다(바그너의 악극). 그 사이에 쓰인 모든 음악들은 사랑한다기 보다는 기껏해야 때때로 칭찬이나 할 수 있는 그런 것들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14]
다만 브람스 1번 협주곡은 종종 연주했다. 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까기도 했으며 어떤 작품은 극찬한 반면 어떤 작품은 후려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낮게 평가했다. 그는 4번을 포함한 몇몇 피아노 협주곡과 말기 3개 소나타를 상당히 많이 연주했고,
대푸가(Grosse Fuge)같은 경우는 "베토벤이 쓴 가장 위대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음악 역사상 가장 경탄할 만한 작품"이라고 호평할 정도였는데 비해 나머지 교향곡, 소나타, 상당수의 협주곡들은 유명해진 이유에 대해 "황당함을 금치 못할 정도"라고까지 혹평했다.
[15]
이런 견해를 반영하듯 그의 여러 낭만파음악 녹음은 아예 고의적으로 희화한 것이[31] 아니냐는 의심이 자자할 정도다. 19세기 초반 바로 직전의 활동하던 모차르트도 굴드의 까임 대상이었는데 (특히 후기 모차르트), 대표적인 예시가 그의
모차르트 소나타 8번이다.
[16]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무인도에 갇혀서 평생 한 곡만 듣고 살아야 한다면 선택할만한 곡이 있냐는 질문에 R.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카프리치오라고 답했다.
[17]
유튜브에서는 1964,59,54년도 연주도 볼 수 있다. 55년도와 81년도 앨범도 존재.
[18]
유튜브에 글렌굴든의 이름으로 리스트 편곡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이 업로드되어 있는데 굴드의 연주가 아니므로 주의하도록 하자.
[19]
바그너나 베토벤이 생각나게 플레이한다. 직접 들어보는 것을 추천.
[20]
말이 좋아서 색다름이지 엄청난 혹평을 가한 사람들도 많다. 즉 엄청나게
호불호가 갈린다는 소리.
[21]
원본은 아니고 실제 굴드의 녹음을 바탕으로 컴퓨터로 연주한 것이다. 그래서 허밍도 들리지 않는다.
[22]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평론가다.
[23]
다만 아슈케나지는 바흐 이외의 굴드의 레코딩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24]
헝가리 태생의 미국의 지휘자
[25]
미국의 거장 피아니스트.
[26]
캐나다의 거장 피아니스트. 바흐 스페셜리스트 중 한 명으로 알려져있다.
[27]
출처: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1955년) CD 커버에 수록되어있는 본인의 서술.
[28]
굴드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의 사람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깔끔하고 간결한
영어 문체에 비하면 심각할 정도로(...) 고전적인데, 이건 뭐 개인의 스타일이니...
[29]
대표적으로 1986년
다케미쓰 도루가 이 상을 받았다.
[30]
이 문서의 글렌 굴드의 어록이나 평가들은 해당 책을 많이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