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23:48:18

후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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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1=NondescriptCapriciousThreateningTray, 합의사항1=한사군과 미소군정을 틀에 존치하는 대신 첨자로 추가설명, 토론주소2=AnUtopianAndLudicrousThrill, 합의사항2=대한민국의 역대 공화국들은 글자 크기를 줄여서 존치, 토론주소3=SelfishFaultyLongingTurkey, 합의사항3=부제에 강조 표현을 삽입하기, 토론주소4=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4='구한말(개화기)' 서술을 '개화기'로 서술, 토론주소5=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5='남북국시대'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6=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6='삼국시대' 시대구분 표 내 칸은 세로 3칸으로 분리하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중 첫 번째 칸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 -> 두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서술하며 -> 세 번째 칸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서술, 토론주소7=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7= '주호'는 삭제하되 -> '탐라' / '우산' 서술은 존치, 토론주소8=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8=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술은 존치하되 -> 남북한 / 임시정부 / 미군정 / 소련군정을 제외한 현대의 단체들의 이름 및 수식어는 모두 삭제한다., 토론주소9=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9=세로 열에 height를 모두 동일하게 지정하여 시각적으로 각 칸이 구별될 수 있도록 한다., 토론주소10=SomberAboundingDamagingLanguage, 합의사항10=본 틀 내 가야에 대한 첨자로 '가야는 신라의 복속 이후에도 사료에서 존재가 확인되어 7세기 중엽까지 반독립적 상태로 존속했다는 학설도 있음'을 서술한다., 토론주소11=RealChildlikeExclusiveJewel, 합의사항11=근대시점을 개화기\, 일제강점기로 구분하고 해당 정치체로서 개화기에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링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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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70000,#0a3711>전쟁 교전세력
교전세력
원종·애노의 난
,889,
신라 원종ㆍ애노
비뇌성 전투
,899,
궁예 양길
제1차 대야성 전투
,901,
신라 후백제
나주 공방전
,903~914,
태봉 후백제
제2차 대야성 전투
,916,
신라 후백제
제3차 대야성 전투
,920,
후백제 신라
제1차 조물성 전투
,924,
고려 (무승부) 후백제 (무승부)
제2차 조물성 전투
,925,
고려 (무승부) 후백제 (무승부)
제4차 대야성 전투
,927,
고려 후백제
서라벌 기습
,927,
후백제 신라 고려
공산전투
,927,
후백제 신라 고려
삼년산성 전투
,928,
후백제 고려
제5차 대야성 전투
,928,
후백제 고려
백제의 나주 탈환
,928,
후백제 고려
고창 전투
,929~930,
고려 후백제
예성강 전투
,932,
후백제 고려
사탄 전투· 자도 전투
,933,
고려 후백제
운주성 전투
,934,
고려 후백제
고려의 나주 탈환
,935,
고려 후백제
일리천 전투
,936,
고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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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後三國時代
파일:후삼국시대.gif
889년 ~ 936년
이전 이후
남북국시대 고려 시대

1. 개요2. 명칭과 시기3. 특징4. 진행
4.1. 발생 배경4.2. 초기(9세기 후반 ~ 918년)4.3. 중기 (918년 ~ 927년)4.4. 후삼국 시대의 종식과 고려의 통일 (927년 ~ 936년)
5. 후대에 미친 영향6. 신라의 지위7. 전쟁과 판도8. 군소 세력들9. 주요 사건10. 후삼국시대 주요 인물11. 관련 창작물
11.1. 드라마11.2. 소설11.3. 연극11.4. 영화11.5.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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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는 7세기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의 힘이 시간이 흘러 약해지면서 9세기 말~10세기 초에 다시 삼국시대 때와 같이 세 나라가 대치한 시대를 말한다. 크게는 태봉 고려, 후백제 그리고 신라가 서로 맞서고 그 이외 각지에서 지방 호족들이 난립했던 군웅할거의 전국(戰國)이 펼쳐졌던 시대이다.

2. 명칭과 시기

남북국시대의 북국에 해당하는 발해가 잔존했으니 후삼국시대란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으나, 이는 신라가 적어도 외교력으로는 발해를 압도하여 발해가 고려란 국호 자체를 쓰지 못하게 한 당대의 외교적 현실을 간과한 생각이다.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 주장이 지금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까지 실질이 없진 않았다. '고구려'가 668년에 망한 이래로, 그 국호를 대놓고 다시 써도 바깥의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던 나라는 궁예의 태봉과 왕건의 고려가 처음이므로 후삼국시대라고 구분해도 어색하진 않다.

또한 냉정하게 보자면 발해는 단 한 번도 한반도 내에 수도를 둔 적이 없을 정도로 통일신라에 비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낮고[1] 거란과의 전쟁에 치중한 나머지 이 시기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전무했기 때문에 이질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삼국간의 쟁패에 있어 고구려 후계국을 자처한 고려든 그 전신으로 고구려 색을 빼려 했던 태봉-마진이든 발해와는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달리 관계 자체를 맺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삼국시대 역시 크게 잡아서 최종적으로 남았던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대상으로 보는 것이지, 당장 가야가 소멸된 것은 고작 삼국통일로부터 1세기 전인 560년대의 일이었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나 여러 용어들이 제시되지만 통설은 어디까지나 삼국시대이며 이는 후삼국 역시 마찬가지다.

시기적으로는 가장 넓게 잡아보면 서기 889년 ~ 936년으로, 889년은 원종·애노의 난이 일어난 해이고, 936년은 고려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에 승리해 통일을 이룩한 해이다.[2]

3. 특징

파일:통일 신라 지도.jpg
남북국시대의 통일 신라

이 시기 할거한 국가들의 이름이 삼국시대와 같은 이유는 백제나 고구려가 멸망한지 이미 2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각지에는 삼국의 유민의식을 간직한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200년 동안 유민 의식의 표출 시도가 거의 없었으므로 일단 반란으로 세력을 만든 뒤에 그럴듯한 명분상 이름만 빌린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궁예와 견훤 둘 다 먼저 세력을 만든 후 몇 년이 지나서야 고려(고구려)왕, 백제왕을 자칭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처음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고구려, 백제 부활이 목표였을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당시 구 고구려 및 백제 영역에는 고구려 및 백제 유민의식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사료들이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통일신라 시기 황해도나 패서 지역(개성 등)의 호족은 실제로 고구려계 호족들로써 신라가 직접 지배하지 못했고 간접 지배로 만족했다. 그리고 옛 백제 일대는 신라가 전력투구해서 직접 지배했으나 그 와중에도 8세기까지는 유민 의식의 잔존이 확인되고, 게다가 신라의 지배력이 9세기 즈음 약해지자마자 맥이 그간 끊겨 있던 백제식 불상이 갑자기 우후죽순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관찰된다.[3][4]

세계사적으로도 이런 사례는 드물지 않다. 중동이나 유럽 같은 데선 고구려나 백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세월인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민족 집단은 허다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5]

또한 지방에서의 봉기 시, 망국의 국호를 쓰려면 그전에 먼저 유민 의식부터 있어야 할 수 있다. 물론 야심 있는 지방 세력가가 이용하기에 상당히 좋은 명분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지만, 이런 시도라도 아주 기초적인 공감대와 불을 불일 계기 및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심이 전혀 없이 뭔가 숭고한 정체불명의 애국심만으로 상하가 똘똘 뭉쳐 반기를 든 일은 동서고금에 전혀 사례가 없다. 대표적으로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 의자왕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궁예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나라가 멸망하고 평양이 황폐화되었다며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를 멸도라 불렀다. 궁예와 견훤 모두 신라계 지역 출신이므로 각각 고구려, 백제 유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본인에겐 유민 의식이 없더라도 그가 차지한 땅의 사람들이 유민 의식이 있으니 그 유민 의식을 자극하고 이용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옛 고구려, 옛 백제인들의 유민의식에 궁예, 견훤의 야심이 호응 및 동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복 국가는 정복지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지 않게 멸망시킨 나라의 왕족 관리 및 지방 세력가 포섭에 공을 들이기에, 많은 세월이 지나 부흥 운동이 벌어져도 결국 그 주모자는 오히려 정복 국가 체제에서의 실력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신라인들은 한반도 의식 통합을 이런저런 정책으로 시도했지만 통합 정도는 여전히 부족하여 삼국 공통의 시조는 남북국시대 내내 등장하지 않았고,[6] 삼국 공통의 시조인 단군을 본격적으로 강조하게된 것은 고려 시대부터였다.[7]

그러나 이런 외지인 출신 군주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최종적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패서 출신의 왕건이었다는 사실 역시 특기할 만한 일이다. 왕건이 다른 두 군주와 차별화되는 점은 적극적인 대신라 유화·포용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이는 스스로가 신라에 대한 반감이 상대적으로 낮은 변방 반자치지역인 패서 고구려계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아예 대놓고 백제 계승을 천명한 견훤은 물론이고, 궁예 또한 패서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방편으로 청주 일대의 구 백제계를 택한 탓에 이들의 신라에 대한 복수심을 무리하게 충족시켜줘야 했고 이는 양쪽 모두에게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내전이라는 특성상 건국 핵심세력의 지지와 기존 종주국 혹은 그 종주국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을 모두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 변방이라는 확장성은 발해 유민들의 합류로 나타나 최종적으로 고려의 승리를 이끌었다.

4. 진행

4.1. 발생 배경

파일:나말여초(891).png
891년 호족의 난립 [유의][참조]

통일신라가 성립한 이후, 신라는 220년 이상 전성기를 누렸지만, 말기로 접어들면서 진골 귀족들 간의 끝없는 왕위쟁탈전으로 점차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하는 것을 느낀 전국의 지방관과 호족들은 반란을 일으킬 욕망을 품기 시작했다.

9세기 후반 들어서, 후삼국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에도 이미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874년 이찬 근종(近宗)이, 879년에는 일길찬 신홍(信弘)이, 정강왕 때인 887년에는 지금의 경기도 지방인 한주에서 김요(金蕘)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도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신라의 금군(禁軍)[10]이 신속히 출진해 단기간에 토벌했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반란의 불씨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신라 정부의 위신과 질서는 위태롭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진성여왕 시대에는 지방 통제력 약화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서 서라벌 국고는 텅 비었고, 관리를 보내서 농민들에게 세금을 독촉했는데, 오히려 이것에 농민들이 격분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주요한 반란은 사벌주에서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이었는데, 신라 정부에서는 장군 영기(令奇)를 사령관으로 보냈으나 반란군의 군세를 보고 겁을 먹어 제대로 싸우지 않는 졸전을 벌였고 그 와중에 촌주 우련이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다. 진성여왕은 영기를 처벌하고 우련의 아들에게 포상을 했지만 이미 신라 정부군의 위엄은 곤두박질쳤고, 해볼만한 싸움임을 깨달은 지방 세력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통치력을 뒷받침하던 것은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 해상무역과 여기에서 나오는 재정수입이었다.[11] 이러한 구조 하에서는 무엇보다도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인 당나라의 정세가 중요했는데, 그 당이 안사의 난을 비롯한 8세기 초중반 끊임없는 반란으로 서역의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동아시아의 교역은 관무역 중심에서 사무역 중심으로 바뀌어갔고, 급기야는 청해진처럼 아예 민간이 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군사력을 갖춘 무역기지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의 해상 패권을 확보해 준 청해진이 진골 귀족과 왕실의 권력다툼 속에 해체되었으니 신라의 해상 활동에는 타격이 올 수밖에 없었고, 청해진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신라 서해안과 남해안 지방세력들은 독립적인 사무역에 나서 재력을 축적했다. 헌강왕 재위기인 870년대 후반 내내 남중국 지역 해상기지들을 휩쓸어 초토화시킨 황소의 난은 이러한 신라 조정의 재정 문제에 쐐기를 박았다. 헌강왕 대에는 처용가에서 보이듯 이렇게 난리가 난 중국 대륙을 피해 신라로 넘어온 서역 상인들로 잠시 호황을 누렸으나 결국 진성여왕 대에 들어서는 중원의 분열 속에 신라 또한 지방을 통제할 여력이 고갈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혼란 속에서 두각을 갖춘 몇몇 세력들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국가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점차 옛 삼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통성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는 견훤이 세운 후백제, 궁예가 세운 태봉 그리고 대야성( 합천군)마저도 나중엔 후백제에게 빼앗기고 금성( 경주시) 등의 경상도 일부 지역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신라로 나눠지게 된다.

신라 김씨 왕조는 헌강왕 때만 해도 안정기였으나, 후계자가 없어 동생 정강왕이 왕위에 오르고 1년 만에 죽자, 이번에는 여동생 진성여왕이 올랐다. 그러나 진성여왕 때부터 지방반란을 통제하지 못했고 이에 후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라는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후계자가 없었던 진성여왕은 출생도 미묘한 헌강왕의 서자 효공왕을 왕위에 올렸다. 효공왕도 후사가 없어서 그의 사후 박씨 왕조로 교체되고 신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아달라 이사금 이후, 김씨를 대신해 733년 만에 박씨가 왕위를 계승( 신덕왕)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게다가 신덕왕도 단 5년만 재위하고 아들 경명왕이 계위했으며, 경명왕 2년에 김씨의 반격이 있었지만 진압당했다. 하지만 경명왕도 7년 만에 죽어 경애왕이 올랐는데, 후백제의 침공 이후로 경애왕이 살해되고 김씨가 왕위를 되찾은 것도 김씨의 암묵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도 신라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경주의 신라인들은 아무리 지방 통제력을 일거에 잃었을 망정 200년 이상은 통일 삼한을 잘 다스린 정통성과 경험이 있었고, 박씨 왕가가 구원 투수로 나선 경명왕 때부터는 기회를 잘 엿봐가며 가능한 수단은 뭐든 해보려 했으며 그래도 경북 동쪽 절반 일대에서는 세금 징수, 인력 징발 등 그럭저럭 통제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견훤이나 궁예가 월등한 무력으로 삽시간에 구축한 통제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래도 지방의 어중이떠중이 호족들보다는 물적 지배력이 강했다.

4.2. 초기(9세기 후반 ~ 918년)

파일:나말여초(900).png
900년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성립 당시 판도

지방세력의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890년대는 신라 왕실이 그전 통일신라 영역에 대한 직접 지배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시기로서, 전국에 작은 군벌 세력이 난립해 치안이 매우 나빴다. 아직 궁예 견훤도 세력을 크게 일구기 전이라 공식적으로 고려(고구려)왕 및 백제왕을 자칭하진 못하고 있었다. 특히 둘 중 견훤은 거병 이후로도 10년 동안은 명목상으로는 아직 신라의 신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보물 612호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에 따르면 이 때까지는 여전히 전국 곳곳에 신라 정부의 영이 전해지고 있었다. < 해인사묘길상탑기>에 의하면 해인사도 도적이 침입해 56명의 승군이 전사한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 신라 전역의 어수선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900년이 되면 견훤 궁예가 작은 세력들을 흡수해 왕을 칭하면서 본격적으로 후삼국시대가 시작된다.

후삼국시대는 주로 태봉~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주도권 싸움 같은 양상을 띄었다. 지도 상 영토는 작았지만 전라도 곡창 지대의 생산력과 경제력이 엄청났기 때문에 주도권은 늘상 거의 후백제에게 있었고, 군사력도 태생부터 양길 궁예의 어중이떠중이 군대에서 시작한 태봉 그리고 왕건의 고려에 비해, 힘을 잃기 전 통일신라 정규군의 유산을 보다 충실히 계승한 후백제가 더 강했다고 평가받고 있다.[12]

어쨌든, 궁예의 후고구려는 초기에는 기세가 꽤 좋아서 견훤이 손을 뻗히기 전에 충청도 상당 부분을 장악하였고[13] 신라를 멸도라 부르며 경북 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물론 북쪽으로는 대동강 유역까지 나아가 평양 일대를 수복하기에 이른다. 또한 통일신라 군주들이 혹시 모를 반발을 의식하여 미처 군현을 편성하지 않은 재령강 이서 일대[14]에 군현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직접 지배령으로 편입해 원성왕계 왕실이 오랫동안 고민하다 끝내 못했던 패서 일대에 대한 조치를 너무나도 쉽게 끝내버렸다. 다만 특기할 만한 점이 하나 있다면 경기도 북부 일대는 수월하게 장악했지만, 우리가 왕건 집안의 근거지로 알고 있던 황해도로 진출하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는 것. 거리로 보나 지형으로 보나, 옛 한성백제처럼 거기서 바로 황해도 방면으로 진출하는 게 더 쉬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 잠깐 북진을 멈춘 다음 경기 남부-충청 북부 일대를 장악하는 모습이 보인다.[15] 여하튼 궁예는 패서 지역을 직접 지배 지역으로 아우르면서 고려란 국호가 부끄럽지 않은 체제를 구축했고, 나주 공방전 끝에 나주를 탈취하고 견훤을 수전에서 박살내어 조선 시대 기준이긴 하지만 조선 팔도 일대에 모두에 영토를 걸쳐 적어도 영역만으로 보면 후삼국들 중 최대 판도를 이룬다. 당시 나주는 백제 이전에 마한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남 일대의 큰 세력이었고, 후백제 입장에서 보면 수도 전주에서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런 지역을 통째로 내줬으니 후고구려가 후백제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눈 셈이었다. 게다가 904년에는 신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북 서부 일대 전역까지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계속 이 판도로 유지했다면 후백제도 오래 가진 못했겠지만, 이상하게도 904~907년의 과정을 거쳐 기껏 장악한 삼년산성을 비롯한 추풍령 지역을 별다른 큰 전투 없이 후백제에게 내주고 말았다.[16] 후백제는 그 과정에서 옛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후론 한 번도 되찾지 못했던 충북 남부 지역과, 옛 백제가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했던 신라의 강력한 서부 방어막인 경북 서남부 일대를 장악하게 되는데, 후고구려가 후백제의 뒤통수에 총구를 겨눴다면 후백제는 여전히 정통성 면에서 아직은 중요했던 신라 왕실의 얼굴에 총구를 겨누게 되어 나중에 고려와 신라를 여러모로 괴롭히게 된다.

하지만 궁예 자체는 고구려계가 아니었던지라 그닥 패서 호족들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아 했던지,[17] 고려란 국호를 버리고 국호를 더 넓은 의미의 마진, 태봉으로 바꾸고, 자신을 미륵[18]이라고 자칭하는 등의 지나친 중앙집권화를 진행하는데 이러면서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던 패서 호족들[19]의 인심을 잃었다. 결국 궁예 왕건 역성혁명으로 쫓겨나고, 패서호족 자체인 왕건이 즉위하면서 국호를 고려로 되돌리게 된다(918).

4.3. 중기 (918년 ~ 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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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왕건의 고려 국호 회복 직후 판도

왕건이 고려를 세운 직후만 해도 후백제는 고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서로 볼모를 교환하는 등 평화로운 편이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던 상주 세력가 아자개가 고려에 항복(918)했고[20], 견훤이 패전을 거듭했던 대야성 전투에서 마침내 승리하자(920), 왕건은 견훤이 신라로 더 진격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구원군을 보내어 고려와 후백제는 본격적으로 관계 악화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조물성 전투에서 양군이 맞서다가 화친하기도 했다.(924-925) 그러나 신라의 경애왕이 계속 친고려적 태도를 취하고 후백제가 보낸 인질인 견훤의 생질 진호가 돌연히 죽으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로 와있던 왕건의 6촌 동생 왕신도 보복 살해당했다.

2차 전쟁 초기에는 후백제가 유리하였다. 웅주를 취해 충청도 전역에서 우세를 점하고, 견훤이 친정하여 서라벌을 점령해 경애왕을 죽이고 왕건의 군대를 공산 전투에서 격파하는 등 그야말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다(927). 또한 그간 친아버지 아자개를 의식하여 상주 일대는 후백제군이 아무래도 손을 뻗지 않았던 것 같지만, 적어도 927년도 이 당시에는 견훤의 인내심이 끊겼는지 기어이 군대를 진격시켜 상주와 문경 일대를 후백제령으로 확정짓는다.[21] 그 후에는 나주를 탈환하고(929) 예성강 전투를 벌여 고려의 수도를 위협하면서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932).

한편 이 시기 신라의 경우, 경애왕 때에는 고려와 손을 잡고 후백제를 물리치려 했고 927년에는 고려군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후백제의 용주성을 함락하기도 했다. 또한 대야성은 그 전에도 신라가 2번이나 자력으로 방어에 성공하기도 했고, 추화산성의 손긍훈도 여러차례 후백제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견훤이 공들여 준비한 일격인 경주 습격 이후에는 견훤의 체계적인 국가 체계 파괴 공작[22]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주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모두 잃었다. 이후에는 그저 후백제와 고려의 실질적인 괴뢰국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4.4. 후삼국 시대의 종식과 고려의 통일 (927년 ~ 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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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한반도의 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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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년 후백제의 최대 판도 당시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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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년 후백제 함락 직전 판도

이후 후백제는 발해유민을 받아들이며 인력과 군사력을 크게 확충한 고려에게 점점 밀리게 된다. 또한 공직의 항복이라는 악재가 겹치고야 말았는데(서기 932년), 일벌백계라고 남아있는 공직의 자식과 부인의 다리 힘줄을 지져서 걷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지만 대세는 역전시킬 도리가 없었다. 결국 고창 전투에서의 패배(930)로 후백제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운주성 전투의 패배(934)로 결정타를 입게 된다.

이렇게 대세는 고려로 확실히 기울고, 운주 전투에서 패배한 후백제는 후계자 갈등이 일어나 견훤의 맏아들 견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견훤에게 총애받던 서자 견금강을 죽이고 아버지를 몰아내어 왕위에 오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견신검에게 쫓겨난 견훤은 적국인 고려에 망명하게 되고, 왕건은 견훤에게 상보(尙父)라는 직위까지 내리며[23] 견훤을 우대했다. 한편으로 고창 전투와 운주 전투에서 대세가 고려에게 기울어지자, 오랜 전쟁과 권력층의 부패로 황폐화된 신라는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여 신라를 고려에 바치는 귀부를 고려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와 김굉, 이순유, 이돈유 등은 항복에 반대하며 결사항전하거나 고려의 속국이 되어서라도 사직을 유지해볼 것을[24]주장하며 아버지의 항복 시도에 맞섰지만 끝내 경순왕이 935년 고려에게 '귀부'하여, 고려의 제후국이었으나 명맥은 유지하던 신라는 고려의 일개 지방으로 격하되면서 망하게 된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한동안은 경순왕이 고려의 낙랑군왕이자 사심관으로서 서라벌을 통치했으나, 가장 중요한 '신라 왕'자리가 완전히 삭제되어 김부는 물론 신라 왕가에게서 영원히 박탈되었기에 신라가 망했다고 보는 것이며 이는 고려와 신라 모두가 인정한 사실이었다. 이에 상황은 서라벌과 경상도 동부 지역들을 완전히 흡수한 고려와 아직까진 경상도 일대 서부 내륙 대부분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내분으로 무너져 가는 후백제 두 나라만 남게 된다.

한편, 고려에 항복한 견훤은 왕건에게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쫓아낸 신검을 응징해줄 것을 요청한다. 결국 왕건은 견훤의 의견을 반영, 936년에 전군을 동원해 후백제의 신검을 공격하면서 일리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후백제는 일리천 전투에서 10만 대군과 전 후백제의 왕인 견훤을 앞세운 고려에 패배하며 멸망하고 만다. 이렇게 다시 삼국으로 나뉘었던 시대는 고려의 통일로 막을 내린다.

5. 후대에 미친 영향

왕건은 왕권 전제화에 광적으로 집착했던 궁예를 쫓아내고 임금이 되었기에, 자신이 임금 자리에 등극하는데에 도움을 준 호족들을 왕건 본인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후삼국시대 내내 전국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반복해 유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최소한 왕건이 살아있을 때의 고려 왕권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마치 중세 프랑스 왕이 자기 직할지에 있는 영주들을 순회하며 간혹 손을 봐주듯 왕건은 전국 곳곳을 몸소 혹은 대리인을 보내서 순회하며 말을 듣지 않는 불순한 호족은 처벌하거나 그 세력을 흡수하고는 했다. 즉 여러 호족 중에 왕건 세력이 단연코 강했고 여럿이서 연합해도 왕건에게 대들 힘이 있는 호족은 없었다는 뜻이다. 후삼국통일 이후에 호족의 권한은 실로 막강했다지만 그건 호족들 자체가 강해서 왕실이 속수무책이었다기보다는 왕자들 간 권력다툼에 외척으로서 개입할 딱 그 정도 선까지만 강했다는 뜻이다. 4대 임금 광종 때의 궁예보다 강도가 심하고 기간도 긴 호족 탄압으로인해 호족들은 문벌 귀족으로 모습을 바꾸거나 지방의 향리가 되었다.

불교적으로는 신라 왕실 중심의 교종을 대신해서 호족들이 섬기기 편한 선종이 융성했으며, 중앙집권적이었던 신라 때에 비해서 후삼국시대는 전국 호족들이 자기 지역이 이런저런 이유로 명분이 있고 잘났다고 주장하기 위해 풍수지리설, 도참설 등도 발달했다.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도 정치적 명분 쌓기에 풍수도참설을 내세우곤 했다. 육두품 세력들이 지배층 주류에 편입된 시기, 즉, 골품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 중간에 발해의 멸망으로 그 중 일부 잔존 세력이 고려로 망명하기도 했다. 발해는 거란을 상대로 요동에서 10여년간 잘 싸우다가 부여성이 함락된 직후 상경용천부로 쳐들어온 거란군에게 왕 대인선이 항복하면서 급작스레 멸망한 데다 고려는 후백제와에 전쟁으로 이들을 도울 시간적, 군사적 여유가 없었다. 대신에 왕건은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유민들을 후대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 거란)를 적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발해의 멸망은 한창 후백제와 대립하던 고려 측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고려로 남하한 발해의 잔존 세력으로 인해 고려의 군사력 및 행정력에 필요한 인적 자원들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6. 신라의 지위

8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지방 세력가들이 딴살림을 차리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태봉 후백제는 세력을 키워 이내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했지만 경주의 신라 중앙정부는 한동안 이들을 지방 반란세력으로 간주할 뿐 신라와 대등한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일절 교류하지 않았다. 수백년간 한반도를 지배한 정통 왕조로서 역사성은 신라의 가장 큰 경쟁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율희, 능문, 왕봉규 등 전국 각지의 여러 작은 호족들은 비록 반독립적 자율성을 가지고 간을 보고 있었지만 일단은 신라 중앙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충성하는 친신라적 입장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920년 고려와의 국교 수립은 여태껏 태봉과 후백제를 지방 반란세력으로 간주하던 기존 30여년간의 신라 정부의 입장을 버리고, 처음으로 고려를 신라와 대등한 하나의 나라로 인정한 일대의 대사건이었다. 그리고 기록에 명시돼 있진 않지만 이후 상황을 보면 이 때 신라는 고려와 군사적 동맹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해서는 경명왕의 실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왔는데, 이 판단으로 신라는 한반도를 다스리던 정통 왕조라는 명목상의 지위까지 포기하고 후삼국 셋 중 하나로 전락했으며 상징성을 크게 잃어버렸다는 것. 게다가 고려군의 지원을 받는 모습은 더 이상 신라 중앙정부가 작은 호족 세력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드러낸 일이었다. 실제로 경명왕 이후로 본격적으로 작은 호족들이 신라를 버리고 고려에 투항하는 사례가 급증한다. 신라-고려 수교 직후 920년 2월 강주 장군 윤웅이 고려에 항복했고, 922년에는 하지성 장군 원봉, 명주 장군 순식, 진보성 장군 홍술이, 923년에는 명지성 장군 성달과 경산부 장군 양문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하지만 당시 신라 왕실이 처했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 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앞서도 언급되었기도 하지만, 신라를 수백 년 동안 백제, 고구려, 당에게서 지켜주던 충북 남부-경북 서남부 추풍령 방어막이 통째로 후백제에게 넘어가버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자존심만 내세우며 지원이 가능한 고려의 존재를 외면해버렸다면, 결국 초래될 결과는 후백제에 의한 서라벌 초토화 뿐이었다. 그보다 오백 년 전 신라 또한 자부심과 자존감이 부족해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불러들였던 건 결코 아니었다. 경명왕이 자존심만 내세우고 고려마저 계속 반란분자 취급하며 무시했다면, 앞서 거명되었던 호족들은 후백제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후백제에게 넘어갔거나, 아예 견훤에게 군사력으로 병탄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경명왕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만만치 않았지만, 대백제 전선에서 신라가 너무나도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라의 '도통' 즉 신라의 명실상부한 정규군 대장군 내지는 신라의 권력자 노릇을 하고 싶었던 신라 군인 출신 반란자 견훤을 아예 정식 백제왕인 신라대왕의 제후왕으로 인정해서 다독이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이건 도저히 실행할 수 없었다. 그나마 왕건은 끝까지 서라벌 일대의 자치를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한동안 인정해주었으나, 서라벌 자체를 손 안에서 흔들어대는 권력자 노릇을 절실히 하고 싶었던 견훤은 결코 그럴 인간이 아니었으며 그 일은 나중에 실제로 벌어지고 만다. 경애왕 제거 후 견훤이 보인 신라 왕실 및 서라벌의 저항역량 무력화 작업이 그 바쁜 시기에도 꽤나 체계적이고 냉철하였다. 견훤이 서라벌에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일찍부터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증거며, 최소한의 사리분별이 있는 말기 신라왕이라면 이런 견훤을 동맹이나 제후왕으로 삼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렇게 경명왕 시절 신라가 고려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일이 일어났긴 했어도, 신라의 명목상 종주국 위치는 한동안 여전했다. 견훤이나 왕건 역시 비록 칭왕했으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대외적으로 완전한 독립국을 자칭한 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나마 신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라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던 것. 이것은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 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견훤과 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 '천지와 같은 두터운 은혜',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다'라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으로나마 상위에 있는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으며, 경애왕을 비명에 가게 한 견훤은 왕망이나 동탁[25]에 비유해 비판하고 있다.[26] 하지만 궁예는 이 범주에서 빠진다. 궁예는 신라에 극도로 적대적이었고, 적어도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대외 교섭은 전혀 없었다.

견훤의 경우 후삼국의 많은 군웅들 중에서 유일하게 무력으로 서라벌을 점령해봤으나, 근본적으로 대야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벌인 기습공격이었고 고려군이 몰려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을 갈아치우며 신라의 저항 여력을 제거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정통성 확보라는 다른 큰 명분을 확보해야 했던 차였기에 일단은 경애왕의 이종사촌이자 김씨인 경순왕을 즉위시킨 후 완산주로 떠났다. 아무래도 실제로 고려가 그랬듯이 신라 조정의 정식 항복 같은 방식을 거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군주에게 칼을 겨눈 역적이라는 인식을 만들었고, 역으로 고려에게 명분이 돌아가는 결과를 낳아 몇 년 안 가서 경북 북부권에서의 확장이 막히고 끝내 고창 전투로 세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적어도 신라에 동정적인 전국의 호족들이 후백제 대신 고려에 붙을 명분은 충분했던 것. 당시 적어도 옛 백제 지역 외의 통일신라 지역 호족들은 강주의 왕봉규나 김해의 소율희같이, 신라 정부에게 적극적으로 충성하기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그 역사성과 정통성을 고려해서 적당히 협조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927년 견훤의 잔혹한 서라벌 침공은 이들 입장에서 가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호족들이 난폭한 견훤 대신 유화적인 왕건 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위와 같이 견훤과 왕건은 신라 조정을 서로 명목상 우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러한 묘한 관계가 무너진 것은 고창 전투에서 견훤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무게추가 기울어 버린 이후다. 930년의 고창 전투에서 승리한지 1년 만인 931년 초에 신라가 고려에 국서를 보내 '순'(順)하면서 신라왕이 정식으로 고려왕의 신하가 되어 상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다. 이로써 형식적인 '존왕의 의'는 완전히 부정되었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왕건이 신라왕의 상전인 고려대왕 자격으로 경주를 방문한다.

왕건의 방문은 서라벌을 위무하고 경상도 일대 호족들에게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나, 이미 체결된 상하관계 확인 및 확고한 복종의사 확인도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 당시 서라벌에서 왕건과 김부가 서로를 대등한 국왕으로 대우하는 의식이 성대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931년에 물론 경순왕이 국서를 보내 칭신하긴 했어도 그걸 서라벌인들이 보는 가시적 형태로 확인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 사실 936년에 신라가 정식으로 고려에게 귀부하고 후백제가 멸망하긴 했지만, 931년의 이 신라의 칭신이 당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선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전까진 후당을 비롯한 오대십국과 일본 등이, 고려가 신라의 신하국이니 '급'이 맞지 않는다며 사신 접견을 거부하거나, 접견하더라도 책봉을 거부하는 사태가 왕왕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931년부터 거짓말 같이 줄줄이 고려는 대외적으로 '고려왕'으로 인정받으면서 정식 책봉을 받았고, 이로써 신하국으로 전락한 신라는 완전히 국제사회에서 없는 나라처럼 취급되었으며 후백제와 고려 사이의 외교전 또한 고려의 승리로 결판나게 된다.[27]

이후 왕건의 고려 정부와 신라 사이에 오간 국서에서 경순왕이 왕건을 대왕이라 일컬으며 고려에서 온 사신을 대등 혹은 보다 우위에 있는 국가의 사자로 대우한 반면, 왕건 자신은 이에 대해서 전혀 이의없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면서 신라왕과 고려왕 사이의 서열이 완전 정리된 게 또 다시 확인된다. 신라왕이 사실상 고려대왕의 신하로 떨어진 이 관계는, 왕건보다 약 오백 년 전 앞선 시대에 고려왕들이었던 광개토대왕-장수왕 등이 내물, 실성, 눌지 마립간 등과 맺었던 바로 그 관계의 재현이었다. 그나마 눌지마립간은 무력을 통한 실력 행사로 장수왕과의 관계를 군신간이 아닌 형제간으로 재조정하고 이후 진흥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에 대한 반격에 성공해 상황을 뒤집었으나, 모든 가능성을 잃고 이미 대세가 기울어버린 경순왕은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28]

7. 전쟁과 판도

삼국시대 이상으로 전장과 전선이 방대하다. 여기서 판도도 삼국시대보다 작은데 어째서 전선이 방대한게 말이 되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후백제, 고려, 신라 전선 지역은 맞닿은 지역 전부가 언제 상대편에 붙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전장에서 배신이 수시로 일어났다. 이 때문에 상시 수비와 감시를 병행할 주둔군이 필요했고, 동시에 나주, 경남, 경북 지역 등 동시다발적인 전투도 잦았다. 또한 삼국시대에서도 수십만 단위로 군을 움직인 것은 고구려뿐이고 이 대군마저 삼국 간의 전쟁에선 동원되지 않았다.

수만 단위 전투들마저 삼국시대의 경우 대개 수백년간의 시간동안 간간히 일어난 것에 비해 후삼국시대의 유명한 전투들은 약 35년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치른 여러 전투가 많았다. 가령 일리천 전투 당시 참전한 양군의 병력을 합치면 10만명이 넘는데 이는 전근대 한국사 내전 중 최대 규모이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이를 제대로 재현했는데 공산 전투 에피소드 쯤에 고려와 신라의 군대가 백제 신검의 군대가 주둔한 백제 대야성을 노리거나 또 근시기에 수군을 보내 우회기동시키는 등 짧은 시기에 여러차례 군대 이동을 시켰으며 견훤은 이를 틈타 서라벌 습격을 벌였다. 동시에 왕건도 이를 깨닫고 5천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간다. 대야성 공략 부대를 이용한게 아니라 다시 동원해서 쳤으며 수군 이용도 마찬가지다. 일전이 아니라 전시에 동원된 병력으로 보면 삼국시대 전투를 연상시키는 수만 단위에 들어서게 된다. 당연히 이를 막는 측도 상시 그를 막기 위한 병력들을 주둔시켜야 한다.

실제 이후 통일한 고려는 전선이 줄어들고 시간적 여유가 생겨 고려초 준비 끝에 거란과의 전쟁에서는 수십만 단위의 병력을 운용한다. 사실, 오늘날처럼 모든 지역에 행정권이 미치게 된 것은 조선 시대 들어서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기준으론 동원력이나 인구도 작다고만 볼 수도 없다.

후삼국은 230여 년 이어진 후기신라 체제가 무너지면서 등장했기에, 모든 나라의 당면 목표는 한반도 중남부의 유일무이한 종주국인 신라로부터의 인정 혹은 신라 멸망과 정통성 획득이었다. 후백제는 건국과 동시(901년)에 서라벌로 가는 관문인 대야성부터 공격했고, 태봉 역시 신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죽령 방면으로 남하한 끝에 906년 사화진 전투로 경북 북부 일대를 피로 물들이는 30년에 걸친 공방전의 서막을 열었다. 당대의 간선축은 모두 서라벌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는 태봉-고려의 신라 방면 남하를 차단하기 위해, 태봉-고려는 이 방해를 뚫고 서라벌에 닿기 위해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추풍령-조령-죽령 일대가 핵심 이익선 구실을 했다. 반면 이 두 패권국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호남축선은 후기신라가 건설한 간선도로도 부재했을 뿐더러 금강과 차령산맥이 이중 방어막 역할을 했으므로 양측 모두 전혀 인기 있는 공격로가 아니었다. 심지어 왕건의 즉위 직후 웅천주와 청주 일대의 구 백제계 호족들이 대거 후백제에 귀부했을 때에도 후백제는 이 루트를 이용한 북진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상주의 고려 귀부라는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재차 대야성 공략을 준비해야 했다.

견훤에게 경남 합천의 대야성을 잃고, 고창 전투(930) 이후 안동 주변부까지 고려 영토가 되고 나서는 신라의 영토는 건국 당시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삼국사기만 봐도 왕건 포항 쪽에 성을 쌓고, 경순왕 경주시와 그 주변만 겨우 다스린다고 할 정도. 포항이면 경주에서 고작 3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자전거를 타도 2시간이면 간다. 말 그대로 내 앞 마당까지 남의 영토가 된 것.

그러나 세계사의 많은 왕조가 마지막 5년 정도는 실권을 완전히 잃고 허울뿐인 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런 신라의 상황이 특이한 사례는 아니다. 이성계에 장악당한 말기의 고려[29]나 1910년 경술국치가 이뤄질때까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최후기의 조선, 크메르 제국 몰락 이후에 동남아시아의 신흥강자로 급부상한 베트남 타이를 자력으로 이길 방법을 찾지 못하고, 프랑스에게 자진 합병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주권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나라 자체가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로 흡수당한 캄보디아, 군웅할거가 발생하고 서구의 반식민지가 된 청나라의 멸망 직전 상황은 신라와 다른 의미로 비참했고, 무굴 제국, 동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등도 신라와 비슷하게 멸망 직전 시기에는 수도 근처만 간신히 통제 가능한 상태였다.

8. 군소 세력들

삼국시대의 구도가 다시 재현되었다고 해서 후삼국시대라고 하지만, 이들 삼국이 각 지역을 중앙집권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고 호족들이 전국에서 판치고 있었다. 경남 일대에는 특히 군소 호족들이 세력을 모아 후백제와 태봉, 고려 사이를 왔다갔다했고, 태봉과 고려, 후백제, 신라의 국경선에도 독립적인 호족 세력이 널려 있었다. 결국 태봉, 고려, 후백제라고 해봤자 수도 인근에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정도였고 사실상 다른 지역은 이들에게 신종하는 호족들의 자치적인 지배 아래 있었다. 국경지대에 있는 호족들이 눈치를 보다 다른 나라로 이탈해서 붙는 일도 빈번했다.

이렇게된 이유는 옛 고구려나 옛 백제의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존 삼국시대의 유민의식 자체는 아직 남아있었지만, 그들을 하나로 강하게 묶어줄만한 혈통 정통성을 가진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 가문들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후삼국 시대의 지방 호족들 중에 대대로 이어져오는 족보를 가진 가문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신라 중앙조정의 힘이 약해진 시기부터 힘을 키워서 생겨난 신흥가문들이었다.[30] 그렇기에 많은 호족들은 이념이나 정통성보다는 주변 대호족들의 실제 힘의 균형을 보면서 어느쪽에 붙을지 저울질했다. 궁예, 왕건, 견훤 등의 대호족들은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조작까지 가미하면서 정통성을 내세웠지만, 당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주며 그들의 혈통이 섬겨야할 이유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만약 후삼국시대가 정체된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면 각 왕조에 다시 정통성이 생겼겠지만, 그러기 전에 한 세대만에 통일되었기 때문에 실력이 우선되는 시대로 끝났다.

이들 후삼국 외에 공식적으로 독립된 나라임을 선포한 세력으로 경명왕의 아들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에 의해 세워진 후사벌국(後沙伐)이 존재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후사벌국은 족보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신빙성 논란이 있다. 그밖에도 탐라국, 중국에 독자적으로 통교한 호족 왕봉규나 승려를 보호하고 불교의 안식처를 만든 소율희, 후삼국시대 막판까지 통제를 받지 않던 왕순식 등이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 920년대, 930년대까지 있었다. 후삼국 시대의 사료가 부실하여[31] 알 수 없게 되었을 뿐, 실제로는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한 세력들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9. 주요 사건

후삼국 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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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70000,#0a3711>전쟁 교전세력
교전세력
원종·애노의 난
,889,
신라 원종ㆍ애노
비뇌성 전투
,899,
궁예 양길
제1차 대야성 전투
,901,
신라 후백제
나주 공방전
,903~914,
태봉 후백제
제2차 대야성 전투
,916,
신라 후백제
제3차 대야성 전투
,920,
후백제 신라
제1차 조물성 전투
,924,
고려 (무승부) 후백제 (무승부)
제2차 조물성 전투
,925,
고려 (무승부) 후백제 (무승부)
제4차 대야성 전투
,927,
고려 후백제
서라벌 기습
,927,
후백제 신라 고려
공산전투
,927,
후백제 신라 고려
삼년산성 전투
,928,
후백제 고려
제5차 대야성 전투
,928,
후백제 고려
백제의 나주 탈환
,928,
후백제 고려
고창 전투
,929~930,
고려 후백제
예성강 전투
,932,
후백제 고려
사탄 전투· 자도 전투
,933,
고려 후백제
운주성 전투
,934,
고려 후백제
고려의 나주 탈환
,935,
고려 후백제
일리천 전투
,936,
고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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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후삼국시대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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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창작물

궁예라는 인물의 매력 덕분에 일제강점기 때 마의태자[32], 일목대왕의 철퇴 등 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나왔으며, 김동인의 장편소설인 견훤도 있었다. 현대에도 후삼국기, 궁예, 왕건 등으로 몇 차례 소설이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인기 자체는 사극 태조 왕건을 기점으로 폭발했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정도. 태조 왕건 유튜브 스트리밍과 KBS 정주행 스트리밍을 기점으로 많이 언급되기는 한다.

한국사 유일의 전국시대임에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소재로 인기가 높은 것과는 반대로 창작물로는 무시되는 편이다. 우선 게임만 보더라도 삼국지 시리즈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와 같은 대전략 게임이 한국에선 제작 구상조차 존재하지 않으며[33] 만화나 웹툰 중에서도 후삼국 배경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중국의 삼국지, 일본의 전국시대와는 달리 남아있는 기록이 너무 적어서 한계가 있다.

한국 사극의 경우 대체로 외국의 침공이나 내부 권력 암투의 비중이 높은 편이고, 무엇보다 이 시대를 다룬 최고의 히트작 태조 왕건 때도 큰 문제였듯 시대배경상 연출해야 할 대규모 전투가 너무 많아서 제작비가 치솟을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궁중암투물이 아닌 이상, 전쟁이야 어느 시대나 어느 정도는 있지만 후삼국시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으로 연출해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만들기가 어렵다.

물론, 임진왜란 시기가 배경이었던 징비록 부산진 전투, 행주 대첩, 옥포 해전 등 주요 전투 장면을 제외한 채 전쟁 연출 장면을 생략하고 저예산 비용으로 제작한 것처럼 주요 전투를 제외한 채, 전쟁 장면을 생략하거나 예산을 적게 들여서 전투 장면을 찍는 식으로라도 후삼국시대 사극을 새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제작하려면 제작할 수는 있다는 이야기. 실제로 이웃나라 일본의 사극도 이런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다.[34][35]

한편으로는 후삼국시대를 다룬다고 해서 이 시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다루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예를 들어 궁예를 진 주인공이 아니라 정말로 주인공으로 내세운 경우라면 공산 전투나 고창 전투, 일리천 전투 등은 당연히 다루지 않아도 무방하며, 반대로 신검이 주인공이라고 할 경우 초기 생애가 잘 알려지지 않았긴 하지만 비뇌성 전투 같은 건 생략하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으며 아예 고려 건국 이후부터 시작해도 큰 문제가 없다. 실제로 정도전 같은 경우 1차 왕자의 난에서 막을 내렸지만 조선 건국 이후가 왜 이렇게 빨리 전개되냐는 비판은 받았어도 2차 왕자의 난은 어디 갔느냐는 평은 받지 않았으며, 대조영은 고구려 말기부터 발해 건국까지를 판타지로 써제낀 물건이지만 대조영의 왕으로서의 치세가 생략됐다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36] 따라서 후삼국시대의 일부만을 다루었다고 해도 엄연히 후삼국시대가 배경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란의 시기였던 후삼국시대라고 반드시 전쟁 위주로 작품을 구성하라는 법은 없는데, 중국 드라마지만 중국 삼국시대를 가지고 정치극을 찍은 대군사 사마의 같은 경우도 있다. 이 작품도 제작비가 꽤 들어가긴 했지만, 적벽대전이나 흥세 전투 같은 대규모 전투마저 생략해가면서 정치극에 집중하는 구성을 갖고 있다. 방향성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도 좋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사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시대이자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엮여 만들어내는 난세라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인 만큼 사극이 부활한다면 다시 다뤄질 수 있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넷플릭스 등 해외 OTT와 협업하는 방안도 생겨나 제작비 문제도 좀 더 대안이 많아졌으니 좋은 기획만 나온다면 명품 후삼국 사극도 꿈은 아닐 것이다.

11.1. 드라마

11.2. 소설

  • 일목대왕의 철퇴[37] ( 신채호 저)
    궁예를 주인공으로 다룬 단편소설. 작가인 단재 신채호의 육필원고가 남아있으나 미완성작이다. 정확한 집필 시기는 알 수 없으며, 1910년대 후반 즈음으로 추정될 뿐이다. 북한에서 출간된 신채호 유고집인 《룡과 룡의 대격전》(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6)에 수록되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 마의태자 (1928, 이광수 저)
    신라 마의태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사실상 궁예를 주인공으로 다룬 장편소설. 1926~1927년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1928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저자의 친일파 논란을 제하면 한국 근대문화사상 최초의 역사소설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그만큼 판본도 매우 많아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다.
  • 후백제비화 (1935, 윤백남 저)
    견훤을 주인공으로 다룬 단편소설. 1935년, 작가인 윤백남이 창간한 월간야담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1952년, 삼중당에서 같은 제목의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 견훤 (1940, 김동인 저)
    견훤을 주인공으로 다룬 장편소설. 1938~1939년에 걸쳐 월간지 조광에서 《제성대》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이후 1940년에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태조왕건 (1967, 최인욱 저)
    왕건을 주인공으로 다룬 대하소설. 1967~1969년에 걸쳐 경향신문에서 《태조왕건》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이후 단행본으로 출시되지는 못한 듯 하다.
  • 왕건 (1983, 김성한 저)
    왕건을 주인공으로 다룬 대하소설. 1981~1983년에 걸쳐 동아일보에서 《왕건》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1982년, 동아일보사에서 《왕건》(전 6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1992년, 포도원에서 《왕건》(전 5권)으로 재출간되었다. 1999년, 행림출판사에서 《고려태조 왕건》(전 6권)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2016년, 산천재에서 《고려태조 왕건》(전 5권)으로 복각되었다.
    후대에 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창작물들에게 특히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인덕의 군주 왕건, 비운의 혁명가 궁예, 야전의 명수 견훤이라는 세 캐릭터를 확립시켰다. 또한 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전의 작품들이 왕건, 궁예, 견훤의 세 사람 중 어느 하나에 비중이 몰려있는 반면에 김성한은 이들을 모두 주연의 위치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 거꾸로 흐르는 강 (1993, 강병석 저)
    궁예를 주인공으로 다룬 장편소설. 1993년, 중앙M&B에서 《거꾸로 흐르는 강》(전 2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00년, 태동출판사에서 《궁예》(전 3권)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그리고 2012년, 계간문예에서 《미륵 궁예》(전 3권)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 후삼국기 (1999, 박영규 저)
    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다룬 대하소설. 1999년, 들녘에서 전 5권으로 출간되었다.
  • 태조 왕건 (2000, 이환경 저)
    왕건을 주인공으로 다룬 대하소설. 2000년, 밀알에서 전 10권으로 출간되었다. 후삼국시대 배경의 창작물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 태조 왕건》의 각본가인 이환경이 자신의 극본을 소설화한 것으로, 덕분에 후삼국시대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 중에서는 여전히 인지도가 높다.
  • 책략 (2005, 박영규 저)
    1권부터 5권까지 있다. 후고구려, 고려, 후백제뿐만 아니라 신라 시점으로도 쓰였다.
  • 전화앵 (2017, 이양훈 저)
    고려 시기의 기생이지만 신라 말의 명기로 와전된 전화앵을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로 출판사 좋은땅에서 1권으로 출간되었다.

11.3. 연극

  • 마의태자 (1964)
  • 풍월주[38] (2012)
  • [39] (2012)
  • 태봉국의 왕 궁예[40] (2017)
  • 왕의 나라 II - 삼태사[41] (2017)

11.4. 영화

11.5. 게임



[1] 애초에 해외 학계에서도 고구려는 확고한 한국사의 영역으로 보는 편이지만 발해에 대해서는 훨씬 미온적이다. [2] 그 외에도 견훤이 할거한 892년 혹은 후백제가 공식적으로 성립한 900년을 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후삼국시대의 끝에는 논란이 없다. [3] 망한 나라를 일으키려면 지배국이 진압하지 못하게 실력을 갖춘 다음 캐치프레이즈를 대놓고 거는 것이지, 누가 어떻게 동조할지 사전에 미리 알고 깃발부터 일으키는 부흥운동이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고려 시대에 이런 식의 삼국부흥운동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4] 한편 백제식 작품들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신라 본국에서 파견되던 장인들이 더 이상 옛 백제 영토에 갈 수 없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이러한 미술작품들은 대체로 굉장한 노동력과 정교한 설계도가 필요한 작업물로서, 특히 신라 본토 밖에서 발견되는 신라 양식이 가미된 작품들은 신라 조정에서 삼국이 공유하던 사상인 불교를 통해 유민들의 마음을 달래고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파견한 장인을 통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우리는 이질적인 존재가 아닌 너희와 사상을 공유하는 동지이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옛날부터 내려오던 장인들의 기술은 현지에서 전승되며 여전히 유지되었을 것이고 파견된 장인들과 협업을 하다 보니 때때로는 서로 간에 기술혼합이 나타났던 걸로 추정된다. 이런 와중에 신라 말기부터 후삼국시대의 혼란기에는 더 이상 본토의 장인들이 지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형편이 안 됨은 물론, 현지에서의 작품 제작을 지원하던 조정의 후원도 얻기 힘들어짐에 따라 본토에서 지방으로 때때로 보급되던 양식은 흔적만 남긴 채로 쇠퇴하고 현지에서 내려오던 전통적인 양식이 다시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달리 말하면 나라는 망했어도 그 자리에서 계속 살아간 현지인들에 의해 여전히 현지의 문화는 계승되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5] 영국 옆의 아일랜드의 경우 무려 800년이나 지배를 받았고 고유 언어도 사멸되어가는 와중에 정체성을 지켜서 독립했고, 아시리아인은 나라를 잃은 지 26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리스와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 발칸 반도의 국가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300년 넘게 받았으나 민족과 언어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19세기 말에 오스만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틈을 노려서 독립을 쟁취했다. [6] 기자가 있었지만, 기자는 현대의 연구가 아닌 당시 기준으로 봐도 동방의 문명화를 상징했지 시조 같은 존재라고 보긴 어렵고 고구려 때부터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듯이 신라가 딱히 더 부각시킨 존재도 아니다. [7]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 청나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 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중심 세력과 한참 떨어져 방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변방 호족급의 여진족들이 원나라 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 [유의] 상기 지도부터 이하의 모든 지도는 21세기 현재 한반도의 해안선을 기준으로 그려졌다. 9~10세기 당시 서남해의 해안선(특히 오늘날 호서/호남 연안 및 김해평야 등)은 오늘날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므로 참조 및 유의를 요함. [참조] 과거의 해안선을 참고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대략 7~9m Sea Level Rise를 놓으면 기원후 고대 및 중세 초기의 평균 해안선과 유사한 것으로 비정(比定)되는 편. 다만, 한반도 서해안은 고려~대한민국에 걸쳐 간척 사업이 활발히 이뤄졌으므로 이또한 아주 같지는 않다. [10] 금군은 국왕 직속의 친위대를 의미하는 말인데, 신라 정부군 중에서 정예 부대를 투입한 듯 하다. [11] 신라가 경주의 불리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이전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12] 견훤은 14살에 신라 수도인 서라벌로 상경해 군졸부터 시작하여 부정부패가 만연한 신라 말기에 어떤 뒷배경도 없이 자기 힘으로 승진해 명을 받아 직접 중앙 정규군을 이끌고 서남해의 해적 토벌을 맡았다가 현지에 눌러앉은 케이스였다. 훗날 공산 전투에서 크게 이기게 된 배경도 그가 신라 정규군 출신이었던 게 크게 작용했다. [13] 옛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부여 일대는 오히려 후백제의 변방 국경 지역이 되어버렸다. [14] 오늘날 황해도 서부 지역. [15]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다른 신라 치하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큰 자율을 누리던 패서 지역이 약간 더 비협조적이었거나, 아니면 경기 남부가 보다 저항이 적었던지 등의 이유로 추측되고 있다. [16] 이 시점부터 궁예가 3년만에 고려란 국호를 버리고 마진 국호를 택하면서, 백제계 호족들을 끌어들여 패서 호족들을 탄압하려고 하던 때인데 그런 영향일지 모른다. [17] 패서계 호족은 후고구려 건국에 기여했지만 그들은 이해관계가 맞아 궁예에 협력했을 뿐, 궁예의 친위 세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궁예의 친위세력은 청주 호족이었다. 철원으로 천도할 때도 친위세력을 키우기 위해 청주의 주민들을 사민했었다. [18] 미륵신앙은 6세기경 백제 웅진성 일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해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데 혼란기인 후삼국시대에 대히트를 치게 된다. [19] 현재의 황해도와 평안도의 옛 고구려 지역 출신. [20] 그는 다름 아닌 견훤의 아버지였다. 동명이인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왕건이 직접 마중나가 맞이했다는 구절 등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21] 이 시기에 아자개가 세상을 떠나 있었거나 혹은 살아 있었어도 견훤이 더 이상 참아주지 않기로 모질게 마음 먹었든지,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다만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후 아자개의 이복 동생들이 성씨를 견씨로 바꾼 걸로 봐선 후백제가 아자개 집안을 나름대로 꽤 우대했을 개연성은 높다. [22] 무기 만드는 대장간을 파괴하고, 장인 및 숙련병을 모조리 압송. 임금을 죽인 것도 큰 충격이지만 이것도 상당한 여파였다. [23] 한마디로 견훤을 아버지처럼 대한다는 것으로 이미 화평을 맺었을 때부터 이렇게 불렀다. 물론, 견훤이 연장자인 건 맞지만 왕건이 그렇게 부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은 건(10살 차이) 아니었지만 후삼국통일 과정에서 견훤까지 포용하여 활용하기 위해 우대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24] 물론 이때는 아직 유교적 정통론이 일반화된 시대는 아니었고 또한 고려는 이미 다른 정통성으로 고구려 계승과 삼한통일을 내세운 데다가 실질적인 파워로도 압도적이었다. 명심해둘 것은 이 시기에 이미 신라 왕은 고려 대왕의 신하로서 복속된 시기였다는 점이다. 931년도에 이 복속 후 신라는 국제 무대에서 완전히 없는 나라처럼 존재가 지워졌고 그 시기에는 고려가 이미 국제 무대에서는 '한반도 정통 왕조'였다. 하지만 원신라 지역 중 견훤의 고향이라는 점을 고려해봐도-물론 아자개와 흥달의 예를 보듯 여전히 친신라파도 없진 않았으나 의외로 소수였다-기이하게 신라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졌던 경북 서남부를 제외하더라도, 경북 서북부와 경남은 마지못해서 고려와 백제를 따르는 형편이었다. 이런 신라를 계속 놔둔다면 고려 입장에서는 눌지 마립간이 고(구)려 장수왕에 대한 반항에 성공했듯 삽시간에 소백 산맥 방어막을 회복하고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경순왕 또한 상당히 유능하여 방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경순왕이 막판까지 후백제의 힘을 역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고 견훤이 무너뜨린 서라벌 방어 체제를 자력으로 다시 일으킨 걸 왕건이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25] 둘 다 신하로서 천자를 살해한 자들이다. [26] 춘추 시대의 서주와 비슷한 형태.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왕의 장인 등 가까운 친족에게 ' 갈문왕' 칭호를 내렸던 것도 외왕내제적 체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삼국시대의 전문 연구자 중 하나인 신호철 교수는 후백제의 견훤이 반신라적이었다고 기술하는 개설서나 교과서의 내용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미 이전 시대인 삼국시대에도 비슷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고구려는 전성기에 신라를 속국으로 삼기도 했고 마한이나 가야의 소국들을 비롯한 작은 나라들이 삼국에 종속된 형태로 존속하기도 했다. [27] 더 자세히 들어가면 후백제나 고려가 내내 없는 나라나 신라의 속국으로만 취급당한 건 아니었고, 신라는 이미 망해가고 있었던데다 후백제나 고려나 실질적인 국력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양국 모두 나름 필요한 대외관계는 수립하고 있긴 했다. 요나라의 경우 태봉은 요나라와의 외교에 공을 들였고 요나라 또한 중원에선 아웃사이더인 거란족의 세력이었으니만큼 그냥 흔쾌히 태봉과 관계를 수립하고 잘 지내다 중원 및 발해와의 관계를 더 중시한 고려 왕조가 들어서며 관계가 냉각된다. 후백제 또한 요나라와 친하게 지내려 노력하긴 했으나 가는 길이 온통 후백제 혹은 요나라의 적대국뿐이라 교통이 여의치가 않아서 흐지부지된다. 십국 중 오월은 후백제가 아주 공을 들여 매우 친밀한 관계였고, 고려는 오월이 후백제를 지원하는 걸 막기 위해 역시 관계에 공을 많이 들였다. 그런데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전통적인 센터 국가들이라 할 수 있는 중원의 오대와 일본의 경우 한반도에서는 역시 같은 센터 국가들로서 전통적인 지위가 있었던 신라와 발해를 중시했기에 후백제나 고려나 대우가 여의치가 않았는데, 후백제나 고려 또한 당장 필요한 요나라나 오월과의 관계를 중시하기도 했고 또 오대 왕조들과 아예 관계를 안 맺은 건 또 아니었기에 그저그런 상태가 이어지다 아직 신라가 고려에 칭신하기 전인 928년부터 반전되기 시작하여 오대의 후당 정부는 고려를 신라 및 발해와 동등한 예로 대우하기로 결정하고, 신라가 고려에 칭신한 931년부터는 상기한대로 흘러간다. 후백제의 경우 저런 상황 속에서 고려보다 예우는 못할지라도 나름 망하는 해인 936년까지 오대에 책봉을 받기는 했다. 여기서 신라와 관계가 그렇게 좋을 것 같지 않은 일본이 의외로 끝까지 신라 외에는 신하국 따위와는 통교를 하지 않겠다며 의리(?)를 지키는데, 신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 또한 심각한 내전 및 전쟁 상태로 흘러가면서 결국 고려와 제대로 된 국교를 맺지 않게 되고, 중간중간 고려의 통교 시도가 있긴 했지만 카마쿠라 막부가 들어설 때까지 그런 상태가 이어진다. [28] 다만 이 대목에서 신라-고려의 관계를 중국 삼국 시대의 한-위로 보면서 경순왕을 헌제로 보는 시각이 간혹 나타나는데, 이것은 크게 틀린 생각이다. 헌제는 직접 지배 영역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데다, 위(魏)는 한(漢)의 승상직을 세습하는 조씨 가문의 봉국이었지 한과 관계가 대등한 이웃나라가 아니었다. 즉 어디까지나 한 제국의 강역에 속해 있는 봉건국이었다. 한편 935년 고려로의 귀부 당시 경순왕의 신라는 비록 고려를 상국으로 섬기는 속국이었을망정 고려, 후백제와는 엄연히 별도로 존재하는 이웃 나라였다. [29] 다만 이 경우는 왕조의 교체였지 국가가 정복당하고 멸망하는 과정은 아니었다. [30] 난세에는 대부분 이렇게 신흥 중간계급이 두각을 드러내며 성장한다. [31] 거란의 침입때 고려 초기의 왕조실록들이 완전히 소실되고 후대에 복원했기 때문에 후삼국 시대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실해졌다. 왕건의 업적을 돋보이게 할 주적인 후백제의 인물들조차도, 국왕인 견훤을 제외하면 미비하여 이름과 관직명 정도 기록만 남아있다. [32] 이광수의 소설로 마의태자는 페이크 주인공이고 진 주인공은 궁예. 왕건은 여기서 사실상 악역으로 나온다. [33] 아래에 소개되는 게임들은 스타크래프트류의 RTS 게임이라 완전히 다르다. [34] 한국이나 중국의 사극 드라마의 경우 의외로 외국에서 고평가 받는 부분이 태조 왕건이나 불멸의 이순신, 삼국지, 초한지, 주원장 등에서 등장하는 화려한 전투 장면이다. 미국 같은 경우 드라마의 위상과 제작비는 높지 않다보니 전쟁씬이 과장하면 거의 동네 전쟁놀이 수준으로 묘사되는 반면 태조 왕건은 대규모 전투가 웬만한 중소규모 영화급 스케일을 보여줬다. 그에 비해 일본 사극은 영화를 제외하면 드라마에선 대부분 최대한 전투씬을 줄인데다가 선보이는 전투씬이 중국이나 한국 사극 드라마의 전투 장면에 비해 다소 밋밋한 편이다. 실제로 일본 NHK 대하드라마의 경우 최대한 전투 장면을 생략하고 지도상의 CG 설명 등을 활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빈도가 높아진지 좀 되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과거에 비해 사극 드라마의 제작비를 아끼는 경향이 강해진 셈이다. [35] 하지만 2015년 징비록조차도 방영 당시에 임진왜란 불멸의 이순신보다 못하게 묘사하고 일부 전투도 나레이션으로 대충 넘어갔다고 사극 팬들로부터도 비판받은 것을 고려하면 후삼국시대도 징비록과 같은 방법으로 드라마 촬영을 찍게 될 경우, 인기가 저조할 가능성이 있다. [36] 다만 정도전의 경우 주인공이 죽었으니 이쯤에서 끝낸다는 것이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만, 대조영 같은 경우 왕으로서의 업적 중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는 하여도 시간대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받았다. [37] '일목대왕의 철추'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38] 해당 뮤지컬에서 실존인물로 진성여왕이 등장하며, 2012년의 초연에서 구원영 최유하가 연기하였다. [39] 경순왕을 다루는 작품이지만, 통상적인 역사극과는 반대로 등장인물들의 의상, 행동, 말투 등이 모두 현대식이다. 배우 정보석이 주연인 경순왕 역으로 출연하였다. [40] '태봉의 왕 궁예'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41] '왕의 나라 - 삼태사와 병산전투'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42] 위에 적힌 동명의 1969년 영화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43] 다만 기본적으로는 전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함 게임이며, 고구려 진영의 영웅 유닛들만 후삼국시대 인물들로 바꿔 고려 진영을 추가하고 임무 네 개 짜리인 짧은 캠페인을 하나 새로 만들어 후삼국시대를 다룬 정도다. 바로 아래의 게임과 함께 드라마 태조 왕건의 인기를 이용한 것이다. [44] 태조 왕건이 방영 되었을 당시 트리거 소프트에서 제작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그만큼 태조 왕건이 당시에 인기가 높았던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