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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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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주명리연구》(김만태 著, 민속원) 〈그림 4〉 점복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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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의 '명당도'.
1. 개요2. 역사3. 과학적 해석4. 한국의 풍수지리5. 구분6. 두침방향7. 기타8. 관련 개념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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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수() 또는 풍수지리()란 '바람과 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이를 길흉화복의 지표로 해석하여 집터나 묏자리 따위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일을 가리킨다.

2. 역사

삼국시대부터 민간에 뿌리내렸던 토속신앙에서 비롯하여 현재의 풍수지리가 되어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이 대세이며, 이후 조선 시대에 완전히 정착해 널리 퍼져나갔다고 한다. 다만 제도화된 풍수지리 사상 자체는 일단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풍수지리라는 말 자체가 중국어이며, 중국의 풍수 사상은 삼국시대보다 천년 이전 시대에 등장했었고 이론으로 정립된 시대는 당나라 곽박의 금낭경에서 이론이 구체화되었다.

기본적으로는 산과 물의 형세, 동서남북의 방위 등을 고려해 입지가 좋은 곳을 찾게 되며, 이렇게 지리적 조건이 좋은 장소를 명당이라고 부른다. 이런 명당에 묘나 집을 짓게 되면 자손 대대로 정기를 받아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보통 배산임수의 형지가 대개 명당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풍수지리 때문에 너도 나도 묫자리로 쓰기 좋은 명당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를 쓰고 싸운 결과, 명당으로 점지된 장소는 순식간에 땅값이 치솟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기에 묫자리를 두고 소송이 벌어지는 건 덤. 또한 사회적 유명인물의 부모나 조상 묘지에는 반드시 이런 풍수가들이 나타나 지형을 살피며 공부(?)를 하려고 한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에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조선의 주요 요지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는 소위 " 일제풍수모략설"도 있다. 대만에도 비슷한 설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로.

다만 풍수이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역시 거의 모든 명리학(서양을 포함)이 갖는 대표적 특징에 기인하는데, 첫째. 음양오행 주역 사상을 기반으로 했고, 둘째. 이 이론이 여간 해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쉬운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로 이 이론을 '제대로' 파악했다 해도 실제 현실에 적용하여 응용하고 풀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리고 어딜가나 돈을 노리는 사람, 실력에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허다하기 때문에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지형을 놓고도 해석이 분분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해당 지역이 갖는 이점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니 두루뭉술하게 표현한 게 풍수지리가 아니냐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길한 자리라고 해도 목적에 맞게 써야 한다. 이건 상식이 부족해서 불러온 참사.[1] 그리고 사실 수맥이라는 개념은 근대 들어 서양에서 도입된 것이라 전근대 풍수학에서는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저 땅을 파봤는데 물이 나오면 다른 자리를 잡는 정도에 불과하다.[2]

서구권에서는 중국어 발음을 따서 Feng shui라고 한다. 현대에도 풍수를 가장 진지하게 따지는 곳은 중국 광둥성 등 남방, 홍콩, 마카오 대만 등지이며 중국 본토는 문화대혁명 대약진 운동을 거치고 난 이후 풍수를 따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홍콩에서 풍수와 관련된 유명한 사례로 HSBC 중국은행 마천루를 짓게 되면서 일어난 해프닝인데, 중국은행이 빌딩을 모양으로 지으니까 바로 옆에 HSBC가 빌딩 옥상에 대포 모양 장식을 해버렸다는 이야기이다.

3. 과학적 해석

기본적으로는 기복신앙과 토속신앙에 근간한 애니미즘 무속, 점복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분석도 있어 과학역사적 가치를 보려는 이들은 있다. 실제로 북반구 기준 북쪽에 산을 두고 남쪽에 물을 두는 배산임수 자체는 과학적으로 따져도 실제로 사람이 살기 좋은 형태에 속한다. 북반구를 기준으로는 남녘에서 햇볕이 잘 드는데다 겨울의 북풍을 막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3] 게다가 좋은 경치가 보장되며, 앞의 강에서 물을 쉽게 길어올 수 있고, 뒷산에서는 땔감과 건축재료를 구할 수 있기에, 전통적인 농경사회 기준으로는 배산임수만한 곳이 없었다. 주변의 산과 앞의 강이 자연적 방어벽이 되기 때문에, 외적을 막는 데에도 용이하다. 이 때문에 풍수지리를 전통적인 농업경제 사회에서 자연스레 발달한 지리적 지식에 훗날 기복신앙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등을 중심으로 제도권 학계에서는 이런 자연과학적 차원에서 풍수지리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론 자체로만 보면 풍수지리는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일종의 인문지리학적인 학설로 현실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풍수지리가 기본적으로 역사적 경험에 의거해 구성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특히 한반도에서 유독 양택풍수에 목을 멘 이유가 산이 많은 지형적 조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본적으로 산을 북쪽에 끼지 않으면 살인적인 북풍을 버틸 방도가 없거니와, 풍수지리를 따르자면 도시 및 거주지를 분지나 구릉지대로 몰아넣어 결과적으로 평야 지대의 농경지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0년대 광주대단지, 1970년대 반월신도시 입지를 선정할 때에도 농경지 침범 여부가 큰 고려사항이었을 정도였는데,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사업 일명 백지계획을 추진할 때에도 실무자들에게 내린 입지선정 지침 중의 하나가 '최대한 평야지대는 (농사 때문에라도) 피하고 구릉지를 위주로 할 것'이었다. 덧붙여 비상식적인 하상계수에 시달리는 한반도 여건상 함부로 평야지대에 주거지를 조성하면 여름마다 마을이 쓸려나가니 도저히 사람이 살 수가 없다. 이런 수해로 아예 마을 전체가 통째로 쓸려나가고 고지대로 집단 이주한 사례가 부지기수다.

물론 이런 식의 접근은 어디까지나 풍수지리에서 설명하는 원리를 현대 과학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일 뿐이며, 이에 따라 앞으로도 풍수지리의 기준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과거 수맥이 근현대 풍수지리에 알게모르게 편입됐듯, 현대 풍수지리에는 난개발로 인한 스카이라인 문제, 주변 건물로 인한 빛공해 등 다른 요소도 편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리학과 교수들의 대다수가 '명당이 어쩌고 산의 기운이 어쩌고' 하는 기복신앙적 요소를 매우 경멸한다.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도 풍수지리를 현대 학문으로 해석하려고 했는데도 학계에서 이런 시선을 받다가 스스로 교수직을 내려 놓았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4. 한국의 풍수지리

한국의 풍수지리의 기본개념은 땅의 형세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켜 설명하는 자연관의 하나로서, 풍수지리, 지술, 음양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풍수에 의하면 땅은 생적의 존재로서 만물을 키우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에게 주는 혜택도 달라진다고 한다. 길한 정기가 왕성한 장소에 터를 잡으면 그 자손들이 부귀영화와 장생을 누리지만 반대로 흉기가 있는 장소를 택하면 불행을 겪는다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인간의 성쇠가 완전히 하늘과 땅에 의해 정해진다고 믿는다. 유래는 흔히 신라 말기에 불교 선종의 승려들[4]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설이 대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생설[5], 신라 중기 도입설 등도 근거가 있어 여전히 논의되는 상태이다. 일단 물기가 샘솟는 땅에 만든 원성왕릉( 괘릉)[6]이나, 여러 신라 왕릉들이 좌북조남의 원칙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사례[7]를 봐도 신라 하대까지는 적어도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는 도입되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었더라도 왕실과 귀족계층도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도입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때도 전불 7처[8] 같은 고유 신앙의 길지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중국식 풍수지리와는 기준이 달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에서 풍수지리학문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신라 말기 이전 도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이전에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의 고급 지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종과 함께 인기를 끌고,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됐을 때였다.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근거지를 서라벌 못지 않은 명당이라고 주장해 자기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지방에서 어느 정도 커진 호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신라에 대한 반란 루트를 타기도 했다.

이후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조선 시대 초기에 하륜을 시작으로 점차 번성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의 풍수학설이 사람이 죽은 뒤에 묻히는 땅, 음택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설화나 야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석탈해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호공의 집을 뺏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왕건의 아버지가 도선대사의 풍수지리로 왕기를 받기 위해 패강진 송악산 부근 즉 개경에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는 주거 중심의 풍수지리의 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묏자리가 좋았던 덕에 이 되었다, 세종의 묘를 잘못 써서 장손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이 묏자리를 '만 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에 잡아서 대한제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등 묏자리 중심의 풍수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풍수지리는 미신 같은 괴력난신이니, 그렇게 풍수가 중요하면 공자님이 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했냐느니 이런 걸 추종해서야 되겠냐'고 신나게 떠들다가 조상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 상으로 좋은 곳에 잡으려고 몇 대에 걸쳐서 산송을 일삼곤 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밑에 보면 알겠지만 하륜과 정도전 모두 유학자였다. 하지만 하륜은 풍수에 유화적이었고 정도전은 강경하게 배척했다.

현재의 풍수학설은 민간에서는 토착신앙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묏자리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미신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조상 묘는 명당에 모시려 기를 쓰고 있으며 관공서나 건물의 입주 등 실생활에도 응용되고 있다. 국립묘지, 박물관, 시청과 도청 급의 건물들은 모두 풍수를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한다고 하며[9], 홍콩은 도시 자체가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에서도 풍수지리가 고려되었다.[10]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물론 정치에 이용된 것치고 좋은 결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기업 건물이 풍수지리 자문을 받아 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

위에서 풍수지리의 본격적 도입이 후삼국~고려초라고 했듯, 한국사에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는 단연 개성으로, 도시 배치 자체가 송악산 자락의 지형에 최대한 맞춰져있다. 궁궐인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시가지 서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고, 궁궐의 정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도로망 역시 바둑판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 당나라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아 궁궐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둑판처럼 방리 구획으로 도시를 개발한 부여군, 경주시[11], 서울특별시를 생각하고 개성시가지 지도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도 어찌하지 못한 개성의 그 난개발스러움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고려는 한국 양택풍수의 최전성기였던 시기로, 묘청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대상지로 건설한 평양 대화궁도 드넓은 대동강변이 아닌 평양 동북쪽 입불산 기슭에 있다. 서울로 따지면 풍수지리 좋다고 경복궁을 우이동에 박아넣은 꼴이다.

지금의 경복궁 한성부는 세간에 파다한 인식과 달리 그다지 풍수지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시는 아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북악을 좌청룡, 목멱산(남산)을 우백호로 동향하여 궁궐을 배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타산(동대문 옆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여 南面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통 유학자인 정도전은 중국의 모든 황궁과 고려의 궁궐도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임금이 남면해아 하는 것이 유학의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형세가 좋다고 하여 처음 도성공사를 시작한 곳은 계룡산 신도안이었고, 신도안 건설이 중지된 이후 천도논의에서 이 분야 전문직인 서운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소명당, 즉 송악 잔류를 강력하게 밀었으며, 그 와중에 하륜의 무악천도론도 제기되었다.[12] 이런 모든 논란을 일거에 잠재운 것이 명에 사신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온 정도전으로, 그는 "쟤들이 음양술수 소리만 해대는데 중국사 봐도 그딴 거 없습니다."라며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풍수쟁이들을 대차게 디스하기도 했다.
이곳[13]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중략)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14],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후략)
태조실록, 태조 3년(1394) 8월 12일자 2번째 기사.
도시의 입지 선정에 있어서 북악을 진산과 주산, 주맥 등을 따지는 수준의 기본적인 배려는 있었으나 기존에 아마도 풍수에 입각해 지었을 남경 이궁은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대신 북악산 아래에 네모 반듯한 형태로 경복궁을 새로 지었다. 처음부터 풍수지리를 최대한 따졌다면 아마도 창덕궁과 같이 비뚤어진 모양새가 되었을 것이다.[15]

과학적 근거는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숭례문 화재 당시 수호상인 해태상이 이전되고, 서울역 앞에 있다던 화기를 가라앉히는 연못은 사라진 지 오래고, 군부 군사 정권 하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육사 출신이 정부 관료들이 퇴진하고 관악산 서울대학교 출신 고위직이 많아졌을 때 비로소 숭례문에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사실 명당의 조건을 다 갖춘 곳은 극히 드물다. 때문에 나무를 심거나 숲을 만들거나 못을 파거나 비석, 탑, 절 등을 세워 인위적으로 명당에 맞게 개조하는 비보(備補) 풍수도 많이 이루어졌는데, 마을마다 하나씩 있는 당산(堂山) 나무가 그 흔적이다.

오늘날 매스컴에서 논하는 풍수는 거의 말장난으로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이 많다.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오면 대충 말로 둘러대서 이러쿵 저러쿵하여 말빨로 대충 처리한다.

미스터리, 심령 프로그램도 많이 다루는데, 프로그램 연출을 아주 무섭게 한다.

5. 구분

양택 풍수 사람이 사는 집을 지을 자리의 위치나 방향 등을 따져 좋은 자리에 집을 짓고 거주자와 후손들이 좋은 기운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풍수다.
음택 풍수 죽어서 묻힐 때 무덤 자리를 따져보고, 좋은 자리에 묻어 그 후손이 이익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풍수다. 대한민국은 현재 이 음택풍수가 과열되어 지나칠 정도로 호화롭게 장례를 하는 문화가 생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실내 풍수 홍콩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더 이상 음택 풍수를 논하기 힘들어지자[16] 그 대신 실내의 가구 배치나 배색 등으로 복을 불러들이고자 하는 풍수다. 홍콩 외의 경우 일본에서 상당히 성행하고 있다.

6. 두침방향

사주팔자를 좋아하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띠(년지)를 기준으로 잠잘 때 머리 방향을 정하는 것이 풍수 개운법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위 영상에서 1분만에 확인이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풀 영상 시청 바람.

7. 기타

명당자리는 분지 지형을 한눈에 바라볼(조망) 수 있는 자리를 말하며, 또한 산에서 분지 지형으로 내려가는 요충지에 위치한다. 풍수지리 사상에 따른 명당은 좌청룡, 우백호로 개념 지워진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여건을 갖춘 곳이다. 좌청룡은 나무산, 우백호는 바위산을 뜻하며 분지 좌우에 나무와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배산임수는 뒤의 산은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고 앞의 물은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명당은 군사적 목적에서 개발되어 생활적 측면으로 전승되었으며 음양이론의 도입과 함께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설은 떼놓고 보기 어려운 입지를 가지게 됐다.

과 땅, 의 흐름을 읽어 이것을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지리. 바람은 기운을 흩고 물은 기운을 모이게 하여서, (바람을 막는 것은 아니고)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장풍득수(藏風得水)로 풍수(風水)다.

본 문서 상단의 명당도는 사회과 부도나 인터넷 백과사전 등에서 자주 봤을 아주 전형적인 모습인데, 사실 한국 지형에서 저 정도로 외청룡 외백호 주산 안산 태조산에 하천까지 모두 다 포함하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있어봤자 이미 거긴 빈 땅이 아니다. 우청룡 좌백호는 좌청룡, 우백호라는 것은 묘지나 양택을 중심으로 뒤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산줄기 및 어떠한 형상이 안아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좌청룡이란 좌측에는 용이 지켜주고 우백호 우측에서는 호랑이가 지켜준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하면 드물기까지 한 건 아니지만, 저렇게 완벽한 음택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미 누군가가 묏자리를 써 놓은 후라는 게 문제. 그래서 보통 풍수 따져서 묘를 쓴다고 할 때는 주산의 좌청룡 우백호를 따지는 경우보다, 산줄기가 주산으로부터 한쪽으로 뻗어나가는 중에 갈라져나온 산줄기가 고사리 손처럼 묫자리를 감싸주는 식으로 풍수를 해석한 경우가 훨씬 많다. 머리 빗는 빗처럼 생긴 산줄기가 있다치면, 빗금 사이사이 골짜기의 작은 둔덕에 묫자리가 들어서 있는 셈.

명당도를 보고는 그림의 정체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이거 서울 고지도인가?"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서울의 사대문안 지형이 정석적인 명당 지형이다. 또, 개성 지도를 보면 서울 고지도와 착각하기 쉬운데, 개성 역시 풍수지리설에 의해 자리가 정해진 도시이기 때문이다.그런 도시가 지금은 삼돼지 치하 아래에서..

명당도의 모습이 우연히도 여성 음부와 유사해서 이와 연관된 고전 음담패설들도 있다.

기원이 도가 사상에 가깝다보니 중국에서는 도사, 일본에서는 음양사들이 풍수의 전문가로 취급된다.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정원서인 작정기에 귀문을 언급하며, 귀문을 막기 위해 일부러 남동쪽 문을 함몰되게 배치하는 구조를 불교 건축[17]에서 발견할 수 있단 점, 일본식 정원문화나 가정용 불단 등을 통해 일본은 일상 문화 내지는 풍습에 가까운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도교가 자리잡지 못했거나, 풍수지리를 학문으로 연구하다가 결국 잡학으로 취급하거나, 일부 풍습으로만 여기던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일본은 도교의 파생종교인 음양도와 신토가 아닌 종교에도 풍수지리를 차용했단 점을 보면 일본은 학문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뿐, 일본인의 생활상엔 더 깊숙한 입지를 다졌다고 볼 수 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사원 조성 및 배치 등의 용도로 풍수지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여기에는 인도 불교에서부터 이미 '와스뚜샤스뜨라(vāstu-śāstra)'라는 인도판 풍수지리 전통이 전해 내려와서 가람 건축에 활용되고 있었던 배경도 한몫했다. 한국사에서도 신라 말기부터 고려 전반에 걸쳐 풍수를 보는 승려들이 많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풍수 전문가를 지관(地官)이라 하였다. 몰락 양반들이 밥벌이 삼아 지관으로 활동했다.[18]

지관 중에 잘하는 지관은 명지관 명풍수로 불리지만 실력없는 지관은 '얼풍수'나 '반풍수'라고 깔보았다.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속담도 있다.

문명 시리즈를 초반 위치가 중요하다고 농담삼아 풍수지리 게임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실제, 산 하나를 끼고 뒤에 강이 흐르면 높은 식량생산력과 과학력(산 위에 천문대)을 둘다 잡을수 있다. 특히 과학력 특화진영인 한국에 최고효율을 발휘하는게 이 배산임수 지형 완벽고증

임프레션 건설 시뮬레이션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엠퍼러:라이즈 오브 미들 킹덤에서는 게임 상의 시스템으로 풍수(feng shui)를 도입하였다. 오행의 원소에 기반해 건설에 적합/부적합한 장소가 나누어지며 부적합 자리에 건물을 많이 지으면 만족도가 떨어져 주민들이 살고싶어하지 않는 등의 모습으로 게임에 반영하였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6부 스톤 오션에서도 풍수지리를 이용해 길흉을 따져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켄조 드래곤즈 드림이라는 스탠드를 통해 암살풍수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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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처에 이 있었다고 한다. [2] 수맥이 파자마자 나오면 피할 수라도 있지만, 물기가 천천히 고여 물구덩이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과거에는 일치감치 무덤 자리를 파놓고 몇 달~몇 년간 내두어 물이 올라오는지 살피는 집도 있었다. [3] 남향 주택이 북향 주택보다 평균적으로 집값이 비싼 것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아파트들이 최대한 남향을 존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4] 도선 등 [5] 이쪽은 입지가 좁다. [6] 왕릉에 걸 괘 자를 쓰는 이유가 늪지를 메워 만들어서 물기가 항시 고이는 땅이라 관을 걸어놓는 장치를 했기 때문이다. [7] 여러 왕릉급 고분군 중 조성 시기가 이른 대릉원에서는 중국식 풍수지리의 영향을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고, 좀 더 이후 시대에 조성된 서악동 고분군은 두 산이 둘러싼 산허리에 있고 앞으로 넓은 평원이 바라보이는 위치로 중국 위진남북조의 풍수 사상이 부분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동향으로 전형적인 풍수지리와 거리가 있다. [8] 천경림, 신유림 등 불교 이전 고유신앙의 7대 성지를 말한다. [9] 남악신도시 경북도청신도시 전라남도청, 경상북도청을 보면 은근 서울 축소판 속 경복궁처럼 보인다. 두 도청은 21세기에 해당 자리로 이전했다. [10] 당시 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단에 풍수지리학자인 김두규 우석대 교수가 포함되 있었다. 다만 김두규 교수는 지금의 세종시 위치는 관료과 정치인들의 힘겨루기 끝에 나온 타협의 결과물이며, 풍수학적인 선정은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지금도 세종시 일대가 풍수로 볼 때는 도읍지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1] 경주는 어느 순간에 신도시로 지은 도시가 아니라 상고시대부터 쭉 신라의 수도였기 때문에 중국식 도시계획과 토착 도시계획이 뒤섞여 있다. 일단 고대 경주의 기본 틀은 보존하면서도 중국식 바둑판형으로 최대한 재개발한 것에 가깝다. [12] 하륜은 계룡산은 나라 망칠 땅이라고 하였는데 이 하륜은 무악천도에 얼마나 열을 올렸으면 태종때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려고 할때도 무악천도론을 내세웠다. [13] 무악. 이 때가 태조가 하륜의 주선으로 무악을 돌아보던 시기였다. [14] 말뜻을 그대로 풀어본다면 중국처럼 큰 나라조차 역사를 통틀어도 도읍지는 세어봐야(數) 4곳(四處)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즉, 중국에서도 역대 수도들을 보면 죄다 장안 낙양 금릉 등등 몇 곳을 계속 돌려쓴다는 말이다. [15] 게다가 세종 시절 풍수학자들 간에도 경복궁 자리가 명당이야 아니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16] 현재 홍콩은 공동묘지가 특별한 매장 방식(그냥 일반적인 매장은 당연히 아니고 홍콩이 많은 인구에 비해 땅이 너무 좁아터져서 일본처럼 화장 후 유골함과 같이 매장함.)이며 그 공동묘지에서 산책을 하고 점심식사를 할 정도로 주거지와 밀접해 있다. [17] 대표적으로 니시혼간지에 귀문이 있다. [18] 영화 강시선생을 보면 임정영이 맡은 구숙이 초반에 양대인 아버지 묘를 이장하면서 풍수를 따지는 장면이 있다. 임정영은 극중에서 모산도사로 부업으로 지관도 하고 장의사도 한다.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와 우군칙 등 반군 지도부 일부가 몰락한 양반 내지 보잘 것 없는 평민 출신들로 반란일으키기 전 곳곳을 떠돌며 지관으로 밥먹고 살던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