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4:02:44

견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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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후백제 말대 국왕
신검 | 神劍
출생
(음력)
880년대 이후[1]
사망
(음력)
936년 이후[2]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후백제 말대 국왕
935년 3월 ~ 936년 9월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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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본관 전주 견씨[3]
신검(神劍) / 성(成)[4] / 수미강(須彌强)(?)
부모 조부 아자개
부황 견훤
모후 상원부인
형제자매 남동생 견양검, 견용검, 견금강, 견능예
여동생 견애복
존호 대왕(大王)
시호 없음[5]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중기2.3. 후기2.4. 사후
3. 평가
3.1. 왕위 찬탈에 대한 해석
4. 대중매체에서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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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장남이며 후백제의 제2대이자 마지막 국왕이다. 동생으로 견양검, 견용검, 견금강, 여동생 견애복(哀福), 막내동생 견능예(能乂) 등이 있었다. 부왕인 아버지 견훤이 장남인 자신 대신에 아우 견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금산사에 유폐한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하였고 이듬해 왕건과 분노한 견훤의 합동 공격에 나라가 멸망했다.

2. 생애

2.1. 초기

신검의 출생이나 초기 일생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기에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이 여러 처첩들과 관계하여 아들을 10명 얻었는데 장남이 신검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사서인 《이제가기》를 인용하여 신검의 어머니가 견훤의 아내인 상원부인(上院不人)이었다고 적어놓았으나 그리 신빙성있는 기록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9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신검이고 다른 이름은 견성(甄成)이었다고 전한다.[6]

《삼국사기》의 견훤 열전과 《 고려사》 태조 세가에 나오는 924년 7월에 군사를 이끌고 동생 견양검과 함께 조물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물러났던 견훤의 아들인 수미강이 신검과 동일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혹은 수미강이 견금강과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있지만[7] 수미강을 신검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가야산해인사고적》에서 왕건을 곤경에 빠뜨렸던 후백제 왕자 월광(月光)을 조물성 전투의 수미강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신검이 수미강이라면 월광 또한 신검의 다른 칭호일 가능성도 있다.

2.2. 중기

934년 운주성 전투에서 통한의 패배를 겪은 견훤은 나이가 나이인지라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정하려 하였다. 호족 간 정략결혼 하면 무려 29명의 부인을 둔 왕건이 유명하지만, 견훤 역시 여러 호족의 여식과 정략결혼을 해 10명의 아들[8]이 있었다. 넷째아들인 견금강은 키가 훤칠하고 총명하여 견훤이 총애했는데[9] 견훤은 결국 견금강을 후계자로 지정했다.

사실을 알게 된 신검은 견양검, 견용검 등과 함께 번민에 빠졌고 급기야 역모를 꾀하기에 이른다. 당시 신검은 후백제의 수도에 머물며 견훤의 곁에 남아 있었으나 견양검과 견용검 등은 각각 강주 무주에 도독으로 발령이 난 상황이었는데 이찬 벼슬을 지내던 능환은 신검과 밀접한 관계라 견금강이 자신을 고이 보지 않으니 견금강이 등극하면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해 신검과 결탁하여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견양검, 견용검과 은밀히 모의했다. 935년 3월 파진찬 벼슬을 지내던 신덕과 영순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신검은 부왕이 점찍은 왕위 계승자였던 이복동생 견금강을 살해하고는 부왕을 폐위한 후 금산사라는 절에 감금해버렸다.

삼국유사》에서는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견훤이 일어나기 전에 대궐 뜰에서 고함과 비명소리가 들려 웬 소란이냐고 묻자
初, <萱>寢未起, 遙聞宮庭呼喊聲, 問「是何聲歟?」

신검이 아뢰었다. " 임금님께서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告父曰: 「王年老, 暗於軍國政要, 長子<神劍>攝父王位, 而諸將歡賀聲也.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두고, 파달과 장사 30명을 보내 절을 지키도록 했다.
俄移父於<金山>佛宇, 以<巴達>等壯士三十人守之

아이들이 동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엾은 완산 아이, 아비를 잃어 울고 있네"
童謠曰. 可憐完山兒, 失父涕連洒.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중에서 견훤 편 일부. 원문출처

아버지를 내쫓고 아우를 죽이며 권좌를 차지한 신검은 곧 대왕을 자칭했으나,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왕건의 등장 이전만 해도 삼한 최고의 무력과 인덕을 갖춘 대영웅이었던 견훤을 충심으로 따르던 나머지 후백제 세력의 반발과 동요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금산사에 감금당했던 견훤이 935년 6월 감금당한지 3개월만에 탈출하여 나주를 통해 고려 귀순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10] 이에 따라 후백제의 호족 백성들 사이에서는 큰 동요가 일어났다. 단적인 예로 견훤의 사위이자 심복이었던 박영규는 군주가 된 신검을 전혀 따르려 하지 않았으며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자 936년 2월에 밀서를 보내 왕건과 내통하기까지 했다.[11]

간신히 국내의 반발을 누르고 권좌에 앉은 신검은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전국에 교서를 내려 사형 이하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사면령을 선포했는데 교서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찬탈이든 선왕의 사망이든간에 새로운 군주가 즉위하면 으레 하는 것이 사면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왕이 즉위하였음을 널리 알리는 가장 편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본기〉를 찾아보면 새로운 군주가 즉위했다는 기사의 뒤를 이어 사면령을 선포했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현대에도 종종 있는 새 정부 출범 기념 특별사면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교지 내용을 풀이하자면 "천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왕좌는 갈 곳이 이미 정해져 있어 나에게 돌아왔다. 선왕(견훤)은 지혜와 총명하심이 고금으로 훌륭하셨지만 갑자기 지혜를 잃어 미련한 견금강을 후계자로 정하셨다. 하지만 하늘이 은혜를 베푸시어 장자인 내가 왕위에 올랐으니 내가 왕위에 적합하다는 뜻이 아니냐? 그러니 내가 은혜를 베풀어 전국의 죄수들을 풀어주겠다."라는 소리였다. 이 때가 935년 10월 17일이었는데 935년 3월에 견훤을 몰아내고 쿠데타를 일으킨지 7개월만의 일이었으며 신검이 반발 세력을 완전히 누르고 온전히 군주가 되는데 7개월이나 되는 시간이 소모되었던 것이다. 교서에서 신검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찬양하면서도 견훤이 나이가 들어 정신이 혼미해서 장남을 제치고 어린 견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실수를 범했으므로 자신이 이를 바로잡았노라고 주장했다.
“여의(如意)가 특히 총애를 받았으나 혜제(惠帝)가 임금이 될 수 있었고,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太子)로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일어나 즉위(卽位)하였으니, 천명(天命)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왕위는 돌아가는 곳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왕(大王)의 신비한 무용(武勇)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영특한 계책은 만고에 으뜸이라, 쇠퇴한 말세에 태어나서 스스로 경륜(經綸)을 맡아, 삼한(三韓) 지방을 순시하고 백제를 재건하여, 도탄(塗炭)에 빠진 것을 깨끗이 정리하니 백성들이 안정되었고, 바람과 우레처럼 고무(鼓舞)되어 도처에서 달려오게 되었다. 공업(功業)은 거의 중흥을 이루게 되었으나, 지혜로운 생각도 갑자기 한 번 실수하게 되어, 어린 아들에게로 사랑이 모이자, 간사한 신하가 권세를 희롱하여, 대군(大君)을 진(晉)나라 혜제(惠帝)의 혼암(昏暗)에 인도하였으니, 자부(慈父)는 (춘추 전국 때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미혹(迷惑)에 빠져서, 대보(大寶)를 철없는 아이에게 주게 되었다. 다행이 상제(上帝)가 정성을 내려 군자(君子)는 허물을 고치고, 나 원자(元子)에게 명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으니, 돌아보건대 장자(長子)의 자질이 아니면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깊은 얼음을 밟듯이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이겠다.”

국내 사서의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으나 중국의 사서인 《오대사》에는 936년 1월에 후백제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보아하건데 신검은 왕위를 찬탈한 후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 자신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리고 왕위를 책봉받으려 시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신검은 반역 및 패륜을 저지른 난신적자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민심뿐 아니라 일부 왕실 내의 시선도 쉽사리 바뀌지 않았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견금강을 추모하는 동시에 비참하게 쫓겨난 견훤을 동정하는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다.[12]

2.3. 후기

한편 고려로 귀순했던 견훤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보(尙父)' 호칭과 많은 식읍을 받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13]

이듬해인 936년 견훤은 마침내 왕건에게 군사를 일으켜서 후백제를 치고 역모를 저지른 신검을 벌해줄 것을 강력히 청했으며 왕건은 이에 호응하여 936년 9월 견훤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후백제를 공격해 들어갔다. 신검 역시 이에 맞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일리천[14]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대치했는데 이리하여 후삼국시대를 종결지은 일리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후백제군의 사기는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닥을 치고 있었는데 한때 자신들이 모시던 왕인 견훤이 적군의 선봉에 서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거니와 왕건이 이끌고 온 10만 대군의 위세가 엄청났기 때문이며 결정타로 자기들의 왕이 "후백제의 충신들은 반역자를 버리고 나에게 돌아오라!"라고 외치니 이미 끝난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후백제군의 좌장군 효봉을 비롯해 덕술, 애술, 명길 등은 아예 싸워보지도 않고 견훤의 앞으로 나아가 무기를 버리고 고려군에 투항했다. 좌장군 지위에 있던 인물이 투항함으로서 후백제군의 한축이 뚫려 중군이 노출되었고 투항한 효봉 등은 신검이 후백제군의 중군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는 군사 기밀까지 털어놓았으며 견훤의 사위 박영규는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고려군에 내응하기로 약속까지 해둔 상황이었다.

이에 왕건은 강공훤을 시켜 신검이 지휘하는 중군을 집중 공격했으며 중군이 무너져내리자 나머지도 저절로 붕괴되어 후백제군은 결국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이후 신검은 두 아우인 견양검과 견용검, 장군 부달, 소달, 능환 등과 함께 황산[15]에서 고려군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는데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킨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왕건은 쿠데타의 주모자 중 하나였던 능환이 신검 등을 꼬드겨 패륜을 저지르게 했다 하여 그 죄를 물어 능환을 곧바로 처형시켰으며 신검의 두 아우였던 견양검과 견용검 등도 진주 유배보냈고 몇 년 후 같은 죄목으로 처형했으나 정작 왕건은 쿠데타의 중심 인물이었던 신검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았다. 신검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압박으로 인한 것이며[16] 신검이 스스로 항복해 벌을 줄 것을 청하니 비록 죽을 죄이나 용서해주겠다는 것이었는데 신검은 오히려 왕건으로부터 관직을 하사받았다.

2.4. 사후

다만 후백제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는 신검을 살려두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큰 행동이었기 때문에 견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리에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애초에 견양검과 견용검이 처형당한 시점도 유배 후 몇 년 뒤였는데 그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구심점인 신검이 살아있으면 대놓고 제거할 수 없었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신검을 없애버린 뒤 동생들의 목숨줄도 끊어놓았을 것이다.

귀부한 왕에게 벼슬을 주었다면 그래도 높은 자리를 줬을 테고 그러면 어딘가에는 그 관직을 받아 이러저러한 일을 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신검의 경우 벼슬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온 뒤로 이상할 정도로 기록이 없다.《삼국사기》〈견훤 열전〉에서도 대놓고 말만 안하지 '일설에는 신검 3형제가 모두 벌을 받아 죽었다고 한다'고 주석을 달아 놓아 숙청되었음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당시 왕건이 신검에게 준 벼슬도 명예만 있는 실권이 전혀 없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백제 주민들의 민심이반을 방지하고자 했는지 대놓고 죽이지는 않은 걸로 추정이 된다.[17]

이는 경순왕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경순왕은 투항 이후에 어떻게 살다 언제 죽었으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었으며 사후에 왕릉이 만들어지고 시호까지 받으며 죽어서도 왕으로 대접받은 것과는 반대로 신검은 투항 이후 관직을 하사받았다는 기록 이후로는 경순왕과 함께 망국의 군주라는 중요한 인물임에도 경순왕과는 달리 사후에 왕릉이 만들어지기는커녕 아예 무덤의 위치조차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시체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는 혹시 모를 백제부흥세력의 결집을 막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후에 그냥 외딴 곳에다가 어떤 표시도 하지 않고 시체를 묻었고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은 물론 시신 자체가 유실되어 결국 찾지 못하게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어쨌든 시호도 없는 것으로 보아 죽은 후 왕으로 대접받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그의 아버지 견훤도 사후에는 왕으로 대접을 못 받았지만 그래도 살아있을 때는 어르신으로 대접을 받았다. 반면 신검의 경우 별다른 대접도 못 받고 사망하면서 자기 아버지보다도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3. 평가

결과적으로 신검의 쿠데타로 인해 후백제가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검이 왕위를 찬탈할 당시 후백제는 몰락하지 않았다. 927년 공산 전투로 고려군에 대승을 거두고, 929년에는 후백제의 오랜 후환 거리인 나주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며, 930년 고창 전투에서는 후백제가 크게 패했지만 932년 예성강 전투로 고려에 반격하는데 성공한다. 그것도 고려의 수도이자 왕건의 고향인 개경 앞에서 함선 100척을 불태워 고려 수군을 궤멸시키고, 일대를 약탈하는데 성공한다. 다시 933년에도 후백제는 공세에 나서 고려의 혜산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한다. 비록 934년 벌어진 운주성 전투에서의 참패로 인해 견훤이 자랑하던 경기병의 절반 이상을 잃고 공주 일대까지 상실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보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후백제는 고려와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지 망해가는 나라의 행보는 아니었다. 넓게 봐서 후백제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후백제 국력을 지탱하는 호남의 곡창지대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으며 서부 전선의 후퇴가 손실이긴 해도 애초에 당대 간선도로망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와 후백제 모두 주력전선은 아니었다. 상주 지역을 내어주면서 고려-신라의 연결로가 본격적으로 개통되긴 했지만 핵심 방어선인 추풍령 일대는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기에 고려도 섣불리 후백제에 대한 전면전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후백제는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어부지리를 보았던 918년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갔을 뿐이지 그 이상으로 국가가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고 전주와 무주라는 핵심 강역에 대한 지배력은 굳건했다. 제대로 준비된 후백제 태생의 2세대 군주가 잘 이끌어만 나간다면 후삼국 혹은 고려와의 남북국 체제를 이어나가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935년 신검이 왕위를 찬탈하고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자, 대세가 완전히 넘어갔다고 판단한 신라의 경순왕 역시 고려에 귀순했고, 후백제 내부는 신검 지지층과 견훤 지지층으로 분열하고 만다. 그리고 936년 일리천 전투의 패배 한 번으로 후백제는 완전히 멸망한다. 당시 후백제 좌군의 장수들은 견훤을 본 순간 모조리 투항해 오히려 신검이 있던 중군을 공격했고, 더구나 견훤에게 내응을 약속한 박영규까지 있었으니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일 수가 없던 것이다. 932년 예성강 전투에서 고려에 승리한지 고작 4년만에 후백제는 망한 것이다.

이런 사태의 책임은 왕위를 찬탈한 신검에게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금강이 왕위에 오르면 신검이 정적으로서 제거될 수도 있기에 왕위 찬탈이 어쩔 수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역사의 평가는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반으로 하여 평가하는 것이지 만약이라는 가정을 두고 이렇기 때문에 이런 것이다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성공하면 혁명이오, 실패하면 반란이다." 라는 말처럼, 결국 신검은 실패했기에 후백제 멸망의 모든 책임을 져야만 했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원인을 제공한 견훤의 책임도 당연히 있다. 신검이 아닌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면[18], 신검과 그를 따르는 세력들의 권력을 철저하게 없애야 했다. 그러나 견훤도 아들에게 아주 모질지는 못했는지 결과적으로는 찬탈의 여지를 남기고 말았다.[19] 원소, 유표, 연개소문이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지 않았다가 골육상쟁으로 자멸해버린 것과 꽤 비슷한 부분. 참고로 조선의 태종 같은 경우는 냉철한 철혈군주로서의 모습과 달리 사적으로는 당대에 알아주는 아들바보였으나[20] 공적으로는 나라를 위해 새로이 후계자로 지명된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세종)을 왕위에 올려 입지를 다져주는 밑작업을 하며 기정사실화 하였고, 폐위한 세자 양녕대군의 권력을 완전히 죽여놓았다.

3.1. 왕위 찬탈에 대한 해석

한편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부왕의 왕위를 빼앗은 사실에 있어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사실 신검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는 부정적이다.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영웅인 아버지 견훤에 비해 가시적인 활약도 턱 없이 모자랐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아버지를 감금하는가 하면 심지어 동생까지 살해하는 등 패륜적인 행위도 벌였기 때문이다. 다만 후백제의 인물들은 왕인 견훤을 제외하면 기록이 대부분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신검이 활약을 충분히 했는데 기록에 적히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후백제에도 유능한 장군과 재상들이 있었을텐데 다들 이름 정도 기록밖에 안 남아있는 실정이다. 드라마에서 신검이 견훤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개연성을 주려고 무능한 묘사를 워낙 많이 보여줘서 대중에게 무능했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버려서 그렇지, 실제로는 관련 기록이 더 발굴되기 전에는 신검의 능력과 활약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팩트.

사실 신검이 보인 행적은 500년 후의 조선 태종 이방원과 매우 비슷하다. 당대 최강 무장이자 창업 군주의 아들이면서 아버지의 후계자 선정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동생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가 된 건 비슷한데, 사실 난의 이유만 따지면 신검 쪽이 더 설득력있다. 5남으로 손위 형제들이 있어서 왕위 계승권과는 멀었던 이방원과 달리 어쨌든 신검은 장자이므로 정통성 면에서는 오히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황태자 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제가 된 당태종 이세민과도 얼추 비슷하다. 그러나 상기 태종들은 일단 난이 끝난 후에는 아버지를 꽤나 극진히 모시면서 상왕 대접을 해주었고[21] 본인들 또한 뛰어난 업적이 있었기 때문에, 한쪽은 아버지의 사업을 망친 패륜아 취급을 받지만 한쪽은 국가의 기틀을 다진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종과 신검의 내, 외부 사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이미 한반도는 고려 이래 500년동안 왕 중심의 하나의 국가로 통일이 되어있었고[22],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는 언어도 문화도 전부 이질적인 중국의 명나라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라가 왕자의 난으로 뒤집어지더라도 당시 신흥국으로 중원에 세력을 넓혀가던 명나라의 경우 태종이 명나라를 적대하지 않는 이상 굳이 동쪽 끝으로 군사를 몰아 조선을 침략할 이유가 없었다. 즉, 말하자면 이성계는 그다지 갈 곳도 없었기에 태종은 아버지의 화가 풀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반면 신검이 임금 자리에 오른 후백제 시대의 한반도는 여러 호족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던 것과 더불어 바로 위에 같은 언어와 동질성 강한 문화를 가진 고려라는 나름 강한 세를 가진 적국이 있었다. 당연히 적대 세력에서는 이를 명분 삼거나 어떤 식이라도 이용할 것이 뻔하고, 이는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로 귀부하는 것으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이세민의 경우를 보더라도 당나라라는 강력한 통일 왕조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었고, 한족들 간의 동질감은 이미 전한시대에 정립되었기 때문에 이세민 역시 신검과 입장이 많이 달랐다.

그래도 신검의 행적은 당대 현실로 생각해보면 마냥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옳다고 할 수 없다. 그 이유를 들자면 우선 본인이 왕위 계승권이 가장 우선인 장남이라는 것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비록 견훤이 밀어준다고 하더라도 넷째인 금강이 상대적으로 왕위 정통성은 더 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므로 만약 금강이 후백제의 왕위에 올랐다면 숙청 대상 0순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반대로 만약 견훤이 신검에게 왕위를 자연스럽게 물려주었을 경우 신검은 자신보다 후순위인 금강을 함부로 죽였다가는 명성이 깎이므로 상대적으로 피바람이 불 여지가 적어진다. 그렇다고 견훤 마냥 고려로 귀부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이 견훤이야 패륜으로 찬탈당했다는 명분이라도 있지 신검의 경우 그냥 매국노 취급을 받는다. 당연히 통일 되고 나서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고려에서 숙청당할 것이 뻔하다. 그나마 자신이 장남이고 지지자들이 많을 걸 이용해 찬탈을 하는 게 그나마 본인의 생존할 가능성이 높은 건 당연한 이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신검은 노쇠하고 병환까지 시달리는 아버지가 죽는 순간 바로 숙청 당할 것이 뻔한 본인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난을 일으키고 패륜아의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불행한 인물 중 하나다. 만약에 금강이 무사히 왕위를 물려 받은 후 신검의 숙청을 시도했다면 후백제는 내전이 벌어지거나 오히려 신검이 고려로 귀부해서 후삼국 시대가 더 장기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신검의 왕위 찬탈에 대한 인과를 따지자면 장남 적통의 전통적인 왕위 정통성의 크기를 무시하고 본인의 감정만을 앞세워 후계를 정하려 한 견훤의 고집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금강의 지지자들이 이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장자에게 왕권을 물려주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한 의도가 크다. 장자계승 원칙에서는 후계자가 명확하기에 지지자들이 나뉘면서 파벌이 생기는 걸 방지하거나 최소한으로 할 수 있으며 매번 왕위를 계승할 때마다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피하고 최소한의 내부숙청만으로 차기 군주의 권력을 공공히 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위의 말이 전부 맞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장자 상속제가 원칙이고 이점이 많은 제도긴 하지만 차남 이하로 왕이 되어 훌륭히 정치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23] 또, 택현이라고 해서 반드시 장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제도도 존재한다.[24] 결국 견훤이 장자라 가장 왕위에 가까웠을 신검을 배제하고 금강을 태자로 세운 것은 그만큼 신검이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고려에 대항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견훤의 실수는 어디까지나 금강을 태자로 세운 뒤 사전작업을 제대로 못해서 신검에게 반격의 기회를 허용했다는 점이지 금강을 태자로 세운 것을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25]

또한 신검과 금강의 모계 가문 사이에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있었는가 하는 것도 사료 부족으로 전혀 알 수가 없다. 흔히 알려져있는 금강의 어머니가 박영규 가문 여자라는 것 또한 드라마의 창작이고, 실제론 형제의 모친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다.[26] 사료가 남아있는 고려 왕자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서로 이복 형제였다면 각자의 모계 가문의 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견훤의 굳건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신검의 쿠데타가 손쉽게 성공한 걸로 봐서는 금강의 모계 가문의 힘이 신검 쪽보다 미약했고 그 탓에 호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한편으로는 견훤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데, 후백제 왕인 견훤 본인은 물론이고 신료들 중에서도 최승우 등 서라벌 중앙 출신의 인사가 나타나고, 또한 서라벌 기습 이후 서라벌 주민들을 전주 일대로 사민한 바가 있다. 이 점은 철저히 패서 호족 출신이며 또한 패서를 비롯한 지방 세력들로 중앙 조정을 꾸렸던 왕건의 경우와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실제로 신검의 쿠데타가 발생했을 당시 견양검 견용검은 각각 강주와 무주 도독으로 내려가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볼 때 최승우를 위시한 서라벌 출신 국왕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국토 전체는 아니어도 주요 요충지에는 왕족들을 내려보내 통치할 정도의 중앙집권책이 추진되고 있었고,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구백제계 호족집단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 신검을 내세워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검에 대한 호족 출신 신료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그에 대비되는 싸늘한 민심의 괴리도 어느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건 신검(태조 왕건) 참조. 참고로 배우는 이광기다.
  • 게임 <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려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미션에서는 역사대로 왕건과 견훤에게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게임에서의 활용도는 꽤 높다. 궁기병 영웅으로 연사력이 상당히 빠르다. 참고로 대사가 굉장히 건방지다. "내가 왕이다!" "나에게 군사를 다오!"
  • 과거 < 조선일보>에서 연재되던 아동 만화 <맛있는 한자> 시리즈에 등장한다. 일단 인물부터가 문약하고 비리비리하기 그지없어 군사적으로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나온다. 성품은 야심은 전혀 없고 착하기 그지없어 원래는 모든 것을 인정한 뒤 견금강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는데 견양검 견용검이 짜고 반란을 일으킨 다음에 억지로 왕위에 올렸다고 하고 일리천 전투에서 아버지가 나오는 걸 보고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직접 견양검과 견용검을 체포한 다음에 항복한 것으로 나온다. 이 때 대사는 "백제는 너희가 반란을 일으킨 순간 이미 멸망했다." 이후에는 신라가 항복할 때 왕건 옆에서 축사를 올리기까지 한다. 일리천 전투에서 항복한 신검이 그 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는 자리에 참석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라의 항복은 935년, 일리천 전투는 936년의 일이기 때문. 게다가 이 때 항복의 의미로 바친 금관을 보는 왕건과 신검은 수염이 하얗게 변하고 주름진 걸로 묘사된다. 연출로 보면 신검이 항복하고 최소 10여 년은 더 지나서 신라가 항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신라가 원래보다 약 15년 정도 더욱 존속하여 항복한 셈이 된다. 편집자의 실수가 아니라 그냥 만화가가 잘못 그린 것.[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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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상원부인
장남 견신검 · 차남 견양검 · 3남 견용검 · 4남 견금강 · 7남 견능예
관련 문서 후백제 · 검교태위 · 신라 서면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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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견훤이 867년생이면 그의 장남인 신검은 880년대 이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신검을 살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일설에는 죽였다는 각주도 덧붙이고 있어 생몰년도가 확실치 않다. 우선 936년까지는 살아있었으므로 그 이후에 죽은 것은 확실하다. [3] 진은 《동사강목》에 등장하는 성씨. 신검은 진신검, 신검의 이복 동생인 금강은 진금강으로 표기되어 있다. [4] 삼국유사가 인용한《이제가기》(李磾家記)에 기록된 이름. [5] 고려는 같은 망국의 군주 경순왕에게는 시호를 지어준 것과는 달리 견훤, 신검 부자에게는 시호를 지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신검 본인 재위시 자칭 밖에 없다. [6] 공교롭게도 같이 전주에 연고가 있는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신라)(李翰)의 자 혹은 호가 견성(甄城)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전주 이씨와 견훤 가문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다고 나타내주는 자료는 없고 설령 어떤 관련이 있었다 해도 이제 와서 찾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여담으로 견성은 전라북도 전주시의 별칭으로, '견훤의 도읍지'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7] 《이제가기》에는 총미가 견금강이라는 설을 채택했다. [8] 《이제가기》에는 9명이라 한다. [9] 다만 이 외모 기록과 모순되게도 신검의 즉위 교서에서는 금강을 어린 아이(頑童)로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충북대 신호철 교수는 금강을 견훤이 뒤늦게 얻은 아이로서 935년 당시 어린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 설대로라면 큰 키나 지략은 구실일 뿐이고 사실은 두 왕자를 미는 각 정치세력 간 알력이 더 컸다는 것이다. [10] 《삼국유사》에서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폐위 1달 뒤인 935년 4월에 견훤이 절을 지키던 장사들에게 독한 술을 내주어 취하게 해놓고는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나주를 통해 고려로 귀순한 것으로 되어 있다. [11] 이 덕분인지 박영규는 장인인 견훤이 씁쓸한 최후를 맞고 그 이후에 신검과 양검, 용검이 하나 둘씩 제거되는 와중에도 모든 재산과 세력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토지까지 하사받고 뒤이어 국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12] 이후부터 후백제에는 "가련하다, 완산 애기. 애비 잃고 눈물 짓네."라는 노래가 퍼졌다고 한다. 완산 애기는 신검을 뜻하고 애비는 유폐된 견훤으로서 견훤이 외국으로 망명할 것이라는 예언과 동시에 아버지에게 패륜을 저지른 신검에 대한 연민이 담긴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13] 고려의 왕건이 귀순해 온 견훤을 이용해 후백제를 완전히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자신이 직접 나서 군사를 일으키면 투항해 온 견훤 및 후백제 출신들에게 불만 및 반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견훤이 직접 요청을 할 때를 기다려왔다. [14] 오늘날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15] 공교롭게도 과거에 백제의 장군인 계백이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황산벌과 같은 곳이다. [16] 이 말은 한 국가의 왕이었던 신검을 죽이기는 부담스러웠던 까닭에 신검을 살릴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한 말이지 정말로 신검이 자기는 왕위에 뜻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억지로 왕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학계에서는 신검은 능환과 호족들이 내새운 일종의 바지사장이었다는 의견도 있는 편. [17] 과거에는 명예를 매우 중요시했기에 자결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상 고려 정부에 의해 자살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는 셈. [18] 신검과 금강이 군주의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가 부족하여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검은 군대를 이끌고 몇 차례 패배를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에 반해 금강은 외교 및 군사적 재능을 검증할만한 사료 자체가 없다. [19] 다만 고려와 전쟁중인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태자를 폐한다면 당연히 따르던 세력들이 반발할께 자명한데 자칫 내분으로 멸망할수 있었다. [20] 양녕대군의 폐세자가 확정되자 신하들 보는 앞에서 울 정도였다. [21] 이 극진히 모신 것은 정치적으로는 자신들이 아버지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딴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즉 감시가 용이한 수도에 붙잡아 둔다는 이점도 얻을 수 있다. 이성계의 경우 한양을 떠나 본거지였던 동북면으로 떠나고 얼마 안지나 조사의의 난이 벌어졌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어쨌든 아버지와 화해하고 잘 지내기 위한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가족이기 이전에 왕실 혈육끼리 서로 다투는 걸 넘어 죽고 죽이려드는 모습을 건국 초기부터 외부에 보여주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다. [22] 물론 고려의 경우 후삼국 통일 이후 신라부흥운동이나 백제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 등 옛 삼국에 대한 부흥운동이 일어나긴 했었지만 이전의 고구려나 백제, 발해 부흥 운동 만큼이나 거대한 파급력을 갖지 못하고 고려 조정에 의해 진압 되었다. [23] 여기 단락에 함께 언급된 이방원도 장남이 아니었고, 바로 다음 임금인 세종대왕도 장남이 아니었다. [24] 물론 일반적으로는 장자 상속이 원칙이다. 사실 택현은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 좋아 택현이지 실제로는 왕자들의 배틀로얄인 경우도 있었다. 다만 이런 경우는 어차피 뭘 어떻게 하든 불만이 남아서 배틀로얄이 일어날 게 뻔하기 때문이라 어떻게든 말로 끝내자는 것이 택현의 논지였다. [25] 당장 위에서 말한 태종의 경우도 결코 신검보다 명분 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지만 이는 전통적인 장자 상속으로 봐도, 택현으로 봐도 무리수였기 때문에 당시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었던 상태였다. 그렇기에 태종이 왕위를 계승했는데도 정작 반란은 태상왕 태조가 사주한 조사의의 난 외에는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26] 드라마의 창작은 견훤이 고려로 망명한 것과 박영규가 결정적일 때 왜 견훤을 거들었는지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다. [27] 사실 이 만화는 여러모로 교육용으로 부적절한 점이 매우 많았다. 고려시대 묘청의 난을 다룬 편에서는 마치 묘청의 난의 승패 여부가 향후 한반도 역사에서 사대주의로의 굴종과 자주 국가로서의 성립을 결정할 만한 분기점인 듯 과장과 미화를 일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성종 훈구파가 마치 실리적인 성향을 지닌 세력으로 묘사된 반면 사림파를 허례허식에 매몰된 몽상가들인 것처럼 묘사했는데 훈구파와 관학파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긴 무지인 셈. 광해군~ 인조 편에서는 인조와 서인 정권이 마치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들의 자존심과 이익에만 몰두하여 호란을 일으킨 주범[28]마냥 악의적으로 왜곡했다. 반면 광해군의 온갖 악행에 대해서는(예를 들면 영창대군) 왕권의 안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식으로 미화하고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