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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浿江鎭통일신라 후기에 한반도 서북부에 설치해 지금의 송악 일대 황해도와 평안남도 일대를 관할한 진(鎭), 혹은 행정구역이다.[1]
2. 역사
일단 신라 당시 지방 행정구역 체계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정리되어있으며, 일명 9주 5소경이다. 여기에서 신라 서북부는 대부분 한주 소속으로 되어있다. 통일신라는 약 2백 년을 존속했고 끊임없이 행정구역이 조정되었을 텐데, 지리지에 기록된 행정구역 체계는 통일신라 중기의 어느 시점의 행정구역 체계를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그러나 통일신라 하대에 북진을 계속하며 서북쪽에 군현이 계속 늘었고, 성덕왕 34년(735)에 나당전쟁의 앙금으로 통일신라의 영토를 인정하지 않아왔던 당나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 영유를 완전히 인정받아 수자리를 설치한다. 선덕왕 3년(782)에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으로 비정되는 대곡성(大谷城)에 패강진전(浿江鎮典)이란 관청을 설치, 패강 지역을 군정 형태로 통치하게 되었다.[2]
헌덕왕 때 패강진의 관할지역이 더욱 북쪽으로 확대돼 대동강 유역까지 패강진이 관할하게 되었다.
신라 하대의 진(鎭)들은 장보고로 유명한 청해진을 비롯해 대부분 군사적 거점으로 전국 각지에 설치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유독 패강진만은 26개의 군현을 관할하는 군사적 특수구역으로 편제됐다. 그리고 다른 진들은 그 조직체계에 관한 기록이 지금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데 반해 패강진의 경우에는 패강진을 관장하는 외관직제(外官職制) 체계가 상세하게 전해지고 있으며 이 체계가 다른 9주에 준하는 형태라 신라 당시의 전국 다른 진들과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패강진은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하대의 사실상의 행정구역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패강진의 중심지를 평산군이 아닌 봉산군, 혹은 평양시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신라 말기에 이르면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지역까지 신라가 잠깐이나마 통치했던 것이 된다. 사실 신라말 반란을 일으킨 궁예가 패서 13진을 평정하자, 평양성주를 자처하던 검용이라는 호족이 궁예에게 항복하는데, 검용이 신라계 호족인지 아니면 발해계나 더 나아가 아예 말갈계였는지 뭔지 기록이 모호하다. 일단 궁예의 일차적 목표가 무리한 만주 북진보다는 우선 남쪽을 공격해 한반도 통일을 우선시했던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집권 초기에 평양 지역까지 신속하게 공략한 점, 신라 영역일 가능성이 높은 '패서' 13진을 평정하자 바로 평양까지 자동으로 굴러들어왔다는 점은 평양 역시 통일신라 말기 한정으로는 신라 세력권이었다고 볼 여지는 있다. 다만 잡초가 무성하다는 등 어느 세력권과 연관이 있든 그다지 잘 관리되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렇게 중요지역 치고는 잘 관리되지 않았다는 점을 비롯해 또 평양 지역에 무언가 중요관청이 설치되었단 기록도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세력권 여부와는 별개로 통설은 패강진의 치소가 평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발해 무왕 때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이 신라군을 이끌고 발해를 침공했는데 한파와 폭설에 의해 패강진에서 후퇴했다는 신당서 기록이 존재한다. 이때 발해의 세력권이 거기까지 닿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편, 따로 다른 지역에서의 발해군과의 교전기사도 전혀 없었기에 이 기사에 대해서는 보통 당나라와는 달리 발해와의 교전의사가 별로 없었던 신라가 마침 내린 폭설을 이유로 군사를 물린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