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및 고려의 호족과 군벌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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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삼한벽상공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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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ce5b6><colbgcolor=#1b0e64> 신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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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안동(安東) |
품계 |
삼중대광(三重大匡) 대상(大相) |
공신호 |
통합삼한보사벽상아부공신 (統合三韓保社壁上亞父功臣)[1][2] |
삼사 | 태사(太師) |
성씨 | 김(金) |
이름 | 선평(宣平) |
생몰연도 | 미상 |
[clearfix]
1. 개요
신 안동 김씨의 시조로 후삼국시대 및 고려 시대의 인물이다.2. 상세
족보에 따르면[3], 김선평은 신라 효공왕의 아들로 신유(辛酉, 901)년 흥덕궁(興德宮)에서 봉안용수(鳳眼龍鬚)와 성정호위(星精虎威)의 기상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경애왕 3년(926) 26세에 고창[4]의 성주(古昌城主)로 부임했다.[5] 929년 12월 ~ 930년 1월 치러진 고창 전투에서 김선평은 다른 고창 호족들인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왕건에게 투항하여 군대와 식량을 대주는 등 전쟁에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왕건은 후백제군의 식량 보급대로 공격해 보급로를 끊고, 고창 병산으로 진격해 3~4일간의 접전 끝에 후백제군 8,0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두고 결국 후백제를 몰살시켰다. 김선평은 고려 삼중대광 통합삼한벽상아부공신 태사(高麗 三重大匡 統合三韓壁上亞父功臣 太師)에 임명되었다.3. 관련 작품
경북도·안동시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실경뮤지컬 왕의 나라 시즌2 '삼태사'가 안동민속촌 성곽 야외 특설무대에서 펼쳐졌다. 뮤지컬 삼태사는 1천년 전, 고려 개국공신으로 당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막아낸 공로로 삼태사란 칭호를 받으며 현재 안동을 있게 한 김선평·권행·장정필과 고창(안동 옛 지명) 백성의 치열했던 삶을 재조명한 작품이다.4. 관련 문서
[1]
현재는 고려왕조실록 및 고려초기 역사서나 사료들이 모두 망실되어, 안동을 본향으로 하는 삼태사의 정확한 전체 시호를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안동 태사묘나, 전국에 흩어져있는 관련 유적지의 비석들과, 삼태사 묘지석, 족보들, 관련 문헌들에도 시호가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안동 삼태사의 관련 유적지 숫자가 전국적으로 꽤 많기에, 각 유적지 비석에서 공통되는 부분을 취합하여 전체의 온전한 시호를 추론할 따름이다.
[2]
현재 태사묘 위패에 모셔진, 기존에 알려진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이라는 시호는 조선 광해군 때 태사묘를 중건하면서 삼태사의 정확한 전체 시호를 상고할 수 없어서, 그 때 당시 세 가문의 종손이 합의하에 추론한 시호이다. 요즘 세상에는 인터넷으로 전국의 삼태사 관련 유적지 비석들을 모두 볼 수 있으므로, 조선 광해군 때 추론하여 추합한 시호보다는 현재의 정확도가 더 올라갔다 하겠다.
[3]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지 않고, 오직 족보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다.
[4]
현재의
경북
안동 지역.
[5]
족보에서는 효공왕이 숨졌을 때 나이 11세라 어려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