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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14~16대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V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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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두상[1]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Cleopatra VII Philopator[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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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69년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A] | ||
사망 | 기원전 30년 8월 10일 (향년 39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A]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51년 ~ 기원전 30년 (약 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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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 |
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15세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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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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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카이사리온,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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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묘사한 동전 | 클레오파트라 7세의 얼굴을 그린 1세기 초상화[6] |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상은 이집트 최후의 왕조인 이집트 왕국 메흐메드 알리 왕조에서도 반복되었다. 이집트 최후의 군주는 푸아드 2세였으나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재위 기간도 극히 짧았던지라 아버지인 파루크 1세가 사실상 마지막 왕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모자의 관계와 흡사한 구석이 있다. 공교롭게도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이집트 왕국 메흐메드 알리 왕조 모두 유럽계 왕조다. 전자는 그리스계, 후자는 알바니아계다.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파라오로 즉위했던 마지막 인물이다. 이 인물을 끝으로 독립 국가 이집트의 군주로서의 파라오는 완전히 명맥이 끊기게 된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이집트에선 파라오의 칭호를 사용하고 이집트의 파라오식 즉위 행사를 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였으며, 이마저도 훗날 기독교의 확산에 따라 중단되었다. 또한 로마 제국 이후 이집트를 다스린 군주들은 파라오 칭호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남자 통치자들은 전부 프톨레마이오스란 이름을 썼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케, 아르시노에라는 이름을 썼다. 그러다보니 당대에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별칭은 테아 네오테라이며, 새로운 여신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 이후 순혈 이집트인 출신의 지도자는 1952년에 이집트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이다. 실제로 이집트 역사 이래 그 이전까지는, 모두 외국인 혈통이 섞여있는 이집트인의 지도자가 통치를 했었다. # 그래서, 순혈 이집트인 출신으로 지도자 계보를 작성한다면, 클레오파트라 7세 다음으로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2.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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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는데,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속의
비너스와 같았다.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25
플루타르코스 <안토니우스> 25
현대 대중 문화에서 그려지는 클레오파트라의 모습들은 당시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일 가능성이 높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 왕국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부터 이어져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출신이므로의 그리스계 소아시아 혈통이다. 이집트 관광-고고부의 논평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갈색 피부색[8]을 가진 고대 그리스 계통의 여성이고 그 판단에 분명한 근거인 그림과 석상들이 있다.
상단에 올라온 당대의 동전이나 두상 따위에서 묘사된 모습을 보면 뽀글뽀글 곱슬머리에 우뚝 솟은 우람한 매부리코, 푹 들어간 눈두덩이 등은 전형적인 그리스 외모이다. 물론 그런 물건들에서 군주를 묘사할 때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기법이 사용되거나 당대 미 의식에 입각한 보정이 들어가게 마련이니,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이집트 방식으로 묘사된 클레오파트라 유물을 보면 생김새가 딴판이지만, 고대 이집트의 인물 묘사는 정형화의 극치를 보여주기로 유명하다.
흔히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졌고 실제로 빼어난 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 재치와 지성을 갖추어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미모로 로마를 좌지우지하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패하여 독사로 자살했다는 이미지와 오리엔탈리즘이 어우러져 마녀, 색기 넘치는 요부, 팜므파탈 같은 이미지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미녀로 묘사된 유물과 작품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관한 이야기가 성립되고 난 뒤에 만들어진 것이고, 실제로 클레오파트라가 살았던 시대 유물에 묘사된 외모는 커다란 매부리코와 살집 있는 목덜미 등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또다른 견해로는 중세시대의 미의 기준은 풍만하고 둥글둥글한 원형미를 갖춰야 미인으로 평가받은데 비해, 현대에서는 날씬한 몸매와 날카롭고 각진 상의 여인들이 미인으로 대접받기 때문에, 당대와 현재의 미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상기한 이미지와 이집트 벽화, 혹은 서구인들의 "동양 미인"(중동 쪽의 아랍계)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 근현대 창작물에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들은 대개 "이국적인 동방 섹시녀"라는 컨셉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까무잡잡한 피부에 샤프한 이목구비, 짙은 눈화장이 깔린 길고 째진 눈, 윤기 흐르는 직모 흑발,[9] 늘씬한 몸매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노출도 높은 패션 등이 있다.
동양 미인 이미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흔히 생각하는 서유럽 계통의 유럽인 이미지였을 것이라는 오해 또한 존재한다. 일례로 일부 커뮤니티나 유튜브 채널에선 '클레오파트라의 복원도'라는 이름의 빨간머리의 백인여성의 ai사진이 역사적 사료인 마냥 돌아다니는 것이 있다. 이는 사실 복원도가 아니라 전혀 고증이 되지 않은 근거없는 창작물이다. 해당 사진은 클레오파트라의 조각상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진저의 리퍼런스로 짜집기 되어있는데, 정작 클레오파트라의 가문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계층에선 전형적인 백인의 금발, 빨간머리와 하얀 피부를 야만과 미개의 증거(= 켈트족)로 여기며 멸시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이집트에서 금발벽안 외모를 지닌 사람들도 무역상이나 군인으로 분명히 유입은 되었지만, 최상류층은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빨간머리를 가졌다는 낭설과 마찬가지로 일각에서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여왕이었다는 이유로 흑인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이집트의 인종비율이 무시된 주장이다.[10] 이집트인들 가운데서 흑인이 아주 없는 건 아니고,[11] 남부 지역에 흑인 혼혈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아랍인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클레오파트라는 윗 문단에 서술되어있다시피 유럽계(정확히는 그리스계 백인이라, 흔히 생각하는 게르만족이나 슬라브족계의 유럽인과는 다르다.)지 중동계 백인도 중동계 흑인도 아니다. 중동계 중에서도 아랍인 같은 셈계 민족보다는 차라리 튀르키예인에 더 가까운데, 오스만 제국 시절 그리스인과 튀르크인(정확히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인 오구즈인) 사이에서의 통혼이 잦아서 양쪽의 외모가 큰 차이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12] 그러므로 사극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 역에 올바른 캐스팅을 한다면 그리스계 배우나 튀르키예계 배우가 맡는 게 좋다. 이는 다른 그리스계 인물들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서양화 속의 클레오파트라들은 보통 전형적인 중근세 유럽계 백인 왕족의 모습과[13] 현대에서 상상하는 검은 머리에 전형적인 오리엔탈 화풍으로 그려놨다. 당시 화가가 이국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얻기 힘들었던 힘든만큼 유럽의 옷차림을 하고 동양적 이목구비와 하얀피부를 가진 유럽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유럽 화가들이 그리스 신화를 재현한 그림에서 신들이 서북유럽인의 금발과 붉은머리, 유럽왕족의 복식을 갖추고 있는 고증적 오류와 동일하다. 잘못된 역사지식과 환상으로 인해 외모가 입맛에 맞게 변형된 건 현대의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며 결국 클레오파트라의 외모는 사실적 고증보다는 소설, 영화의 영향을 받아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어 전해져 왔다.[14]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클레오파트라 7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클레오파트라 7세는 큰 야심을 가진 정치가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그리스어만 사용했던 반면, 토착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였으며, 정치 수완도 뛰어나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휘어잡는 한편 이시스의 현신을 자처하며 토착 이집트 백성들로부터도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또한 카이사르파에 가담하여 자칫 내전에 휘말릴 수도 있는 처지에서 안토니우스가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나선다는 점을 현명하게 파악하여 직접 타르수스까지 가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안토니우스를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후견인으로 삼은 예리함도 있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첫 만남장면을 보면 클레오파트라가 나름대로 호화롭게 기획한 흔적이 역력하다.[15]
하지만 다재다능한 여군주도 다 망해 가는 막장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고립된 소수 그리스 - 마케도니아인 지배층의 인적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고 부정부패와 권력 암투에 빠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는 나라를 건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군사력조차 없었다.[16]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외세를 이용해 생명연장의 꿈을 노릴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악티움 해전에서 군사적 무능을 드러내기도 했다.[17][18][19][20] 막대한 돈을 쟁여놓고 돈과 정치적 술수를 주 무기로 삼으며 혈육도 가차없이 제거하는 냉정한 모습은 전형적인 고대 서아시아 전제 군주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당시 그녀가 처한 상황에선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인물들을 살펴보면 정말 클레오파트라 말고는 답이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무능한 인간들 투성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부왕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내정과 외치 모두를 말아먹다가 반란이 터져 왕위에서 물러나 로마로 망명을 간 적이 있을 만큼 막장이었고, 뒤를 이은 클레오파트라의 언니 베레니케 4세는 한 술 더 떠 지나친 사치를 부리고 내정을 말아먹다가 로마의 지원을 받고 돌아온 아버지에게 패해 처형당한 막장 군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정치적인 능력을 보여준 게 없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이집트로서는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5. 여담
- 사치스러움을 과시하기 위해 진주를 식초에 녹여 먹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안토니우스와 하루에 20만 세스테르티우스 상당의 돈을 다 써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내기를 걸어서 진주를 식초에 녹인 다음 원샷으로 승리했다는 일화다. 그런데 사실 진주는 식초 정도의 산도에는 그렇게 빨리 녹지 않고, 강산을 들이부어야 순식간에 녹는다고 한다. 황산이나 염산을 쌩으로 들이켰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마 거짓과 과장이 상당히 많이 가미된 에피소드일 터이다. 역사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진주를 식초에 녹인 척 하고 그냥 삼켜버렸을 것이며 그 진주는 나중에 자연스레 몸 밖으로 배출되어 회수되었을 것이라 한다. 전승에 따라서는 양 귀에 진주 귀걸이를 달고 나와서 연회 끝무렵에 시종에게 식초를 두 잔 가져오게 해 우선 귀걸이 한 쪽을 떼어서 식초에 넣어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른 한 쪽도 떼어내려 했는데 놀란 안토니우스가 패배를 인정하고 두 번째 진주를 먹는 것은 제지했다고도 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식초에 녹여마셨다는 진주 일화에서 쓰인 식초는 와인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 중에서도 마레오틱 와인(mareotic wine)이란 고대 이집트산 화이트 와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 클레오파트라가 와인 목욕을 했다는 말이 있지만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양귀비가 여지를 좋아한 만큼 클레오파트라는 무화과를 좋아했는데 굉장한 대식가여서 하루에 먹어 치우는 무화과나 식사량이 엄청났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원시원하게 먹는 모습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반했다고 한다.
- 클레오파트라의 자녀들 중 카이사리온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살해되었고, 안토니우스와의 사이 두 아들도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요절한 것으로 보이지만[21],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지금의 리비아인 누미디아의 왕 유바 2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고, 이들의 자손들은 로마 귀족들과 오랫동안 통혼했다고 전한다.
- 남녀 태아의 발육에 속도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여자 노예 여럿을 임신시킨 뒤 산 채로 배를 갈라 아이의 발육 정도를 확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막 갖다붙이는 '폭군의 악행' 내러티브의 스테레오타입이라 믿을 만한 출처가 없는 한 걸러 들어야 좋다. 중국 상나라의 제신과 달기,[22] 그리고 더 고대의 파라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 등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붙어있다.
- 이미지로만 본다면 고대 이집트 문명 출신처럼 생각되고 또 그렇게 묘사되지만, 기원전 69년 출신으로 이집트 역사에서는 중간기 정도의 인물이다.[23]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지어졌던 기원전 2560년보다 오히려 현대에 더 가까운 인물이며, 고대 이집트 문명보다 나중에 생겨났던 고대 그리스 문명보다도 더욱 나중에 생겨난 고대 로마 문명( 지중해권 완전 통일 이전)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굳이 말하자면 고대 이집트 말기의 인물이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 시기라고 한 단어로 표현되기는 해도 사실 여러 왕조를 거치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 동안 존속되어 온 시대로, 최초의 이집트 통일은 기원전 3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현대 이집트 역사학계에서는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을 보통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로 입성한 639년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주된 견해로, 역사과목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반영되어 클레오파트라의 일대기를 고대사로 가르치기는 한다.
-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오늘날 모로코에 위치한 로마의 클리엔테스 왕국 마우레타니아(오늘날의 모로코)의 왕 유바 2세와 결혼해 왕비가 됐다. 어머니를 닮아 총명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교양인으로 유명한 현군 유바 2세와 함께 마우레타니아의 부국강병을 이끌어냈고, 마우레타니아의 번영은 클레오파트라의 외손자(유바 2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아들)까지 이어졌다. 이 외손자가 바로 '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로 불리는 프톨레마이오스인데, 그는 자신의 부모를 신격화하고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으로 자처하면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군사원정을 벌이며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외할머니처럼 로마의 친구라는 칭호 속에서 마우레타니아를 지중해 서부의 부유한 국가로 이끌면서, 로마 내 유력자들과의 친분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장한다. 그는 자신이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고, 어머니의 이복자매 소 안토니아와 그녀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와 어릴 때부터 함께 로마에서 자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족들과 원로원 귀족을 남편으로 둔 여동생 드루실라 및 현직 원로원 의원들인 조카들을 통해 인맥으로 이어진 원로원 주요인사들과의 친분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는 60년을 갓 넘은 원수정 체제의 한계와 로마 내 권력구도를 기회 삼아 로마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까닭에 클레오파트라의 외손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증손자로 당시 황제였던 가이우스와 로마 원로원 및 당시 집정관 등 최고위층들에게 과거 클레오파트라처럼 위험인물, 경계의 대상으로 제대로 찍혔다. 따라서 그는 서기 40년 로마를 방문했다가, 이를 크게 경계한 황제와 원로원 수뇌부들의 지령에 따라 암살됐다. 이후 로마는 이집트를 병합할 때처럼 마우레타니아를 속주로 만들 준비에 들어가는데, 이에 베르베르인들은 크게 반발해 무려 3년 가까이 전쟁이 지속됐다. 당시 로마군은 프톨레마이오스 암살 이후 몇 달 되지 않아 공화정 복귀를 원한 원로원 일부 의원과 공모한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및 휘하 20명에게 가이우스 황제가 서기 41년 피살된 상황 속에서 잠시 헤맨데다 베르베르인들의 저항이 거세어 초반에는 고전했다. 그렇지만 애당초 로마의 국력은 피살 전 칼리굴라의 판단처럼 큰 무리가 아닌 까닭에, 다음 황제로 즉위한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1세가 공화정 복귀 움직임을 제압하고 원로원을 물갈이해버린 이후 반격하면서 기어이 마우레타니아를 굴복시켰다. 이때 로마는 칼리굴라 시대 때 계획한 전략에 따라 이 왕국을 2개로 쪼갠 다음 속주로 병합시켰다.
- 이집트 20파운드 지폐 뒷면의 도안이다.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클레오파트라 7세/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이미 생존해 있을 때부터 고대 서양사에서 제일 유명한 여성이었고, 수도 없이 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연장자들에게 클레오파트라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이다. 1963년 개봉한 초대형 사극 영화 < 클레오파트라>에서 리즈 테일러가 주인공을 맡았는데, 세기의 미녀 배우가 펼친 뛰어난 연기력과 관능적인 외모로 클레오파트라 연기에 전 세계 대중을 사로잡았다. 재색겸비의 인물답게, 로마군이 도서관을 태워 먹자 야만인들이라고 빡쳐 하는 장면이 나온다.
초선, 양귀비처럼 시대와 국가를 대표하는 미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미인, 이국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마케팅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당장 '클레오파트라가 먹은', '클레오파트라 화장품' 키워드로 검색하면 클레오파트라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음식과 화장품 재료가 나온다. 물론 까마득한 먼 옛날 유명 사람이 사용한 재료라고 해서 그것이 그 재료가 좋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이 광고하는 물건이라고 그 물건의 품질을 연예인이 보증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이치.
2023년 5월부터 넷플릭스에 등록된 퀸 클레오파트라에서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배역에 흑인이 캐스팅되어 아프로센트리즘에 의한 역사 왜곡 논란이 생겼다.
간단히 얘기하면 클레오파트라의 부계쪽은 조상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마케도니아 출신 장군이었기에 그리스계 백인인 것이 100% 확실하다. 굳이 따지면 모계쪽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근친혼 뿐 아니라 근친 외 혼인도 하긴 했기 때문에 중간에 토착 이집트인(흔히 생각되는 사하라 이남 지역이나 누비아계와 다른 아랍계에 가까운 인종이다)이나 흑인의 피가 섞였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나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흑인 왕조가 아니었고, 당시 이집트 사회도 흑인이 주류가 아니었으며[24], 설령 조상 중 흑인 피가 섞였다고 해도 저렇게 대놓고 흑인일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25] 저 다큐의 내용은 어떻게 봐도 왜곡이다.
[1]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를 방문했을 즈음인 기원전 1세기 경에 제작되었다.
아피아 가도 인근의 한 빌라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곽민수 소장의 발언에 따르면 이것이 클레오파트라의 두상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클레오파트라의 로마 방문 시점에 제작된게 확인되었기 때문이지 이 조각이 클레오파트라를 표현한 것이라고 명시하는 표시나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가능성이 높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 두상은 현재는
독일 베를린 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이명은 '클레오파트라 테아 네오테라(Κλεοπάτρα θεα νεωτερα)'.
[A]
現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A]
現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5]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으로 유명하지만 그건 연인 관계일 뿐 실제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2년에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6]
1세기 고대 로마의 고대도시 헤르쿨라네움에서 전시된 초상화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머리카락이 갈색인 것을 알 수 있다.
[7]
한국에서는 종종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라고 번역하는데, 프랑스 원문을 살펴보면 "Le nez de Cléopâtre s’il eût été plus court toute la face de la terre aurait changé."이다. 여기서 la face de la terre를 "지구의 표면"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지상의 모습"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8]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계층에선 그리스인들의 그을린 갈색 피부색을 지성인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이를 켈트족등의 유입민족과의 차별성으로 여기며 왕권을 공고히 하는데 쓰였다. 다만 아프로센트리즘에서 말하는 피부와는 다르다.
미노스 문명 문서에서 추정할만한 피부색을 볼 수 있다.
[9]
높은 확률로 칼
단발이나
히메컷으로 묘사된다
[10]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아프리카와 중남부 아프리카로 나뉘는데 전자는 백인계 아랍인이 주류인 화이트 아프리카, 후자는 흑인계 아랍인이 주류인 블랙 아프리카로 부른다.
[11]
고대 이집트 역사에 누비아계 흑인 왕조가 들어선 적도 있다! 당연히 이때는 파라오도 흑인.
[12]
고대 이집트의 후기 왕조들은 외부에서 유입된 경우가 많이 있다(아시리아, 페르시아, 누비아, 그리스) 물론 지배층만 교체되었을 뿐 인구의 대부분은 아랍계인 기존 이집트인이었으며, 클레오파트라의 부계 조상이다 왕조의 창립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확실한 마케도니아인(그리스인)이었다. 아무리 당시 왕조 내 근친혼이 흔했더라도 수백년간 수도 많지 않은 그리스인들끼리만 결혼해 이어오는 건 무리니, 클레오파트라의 밝혀지지 않은 모계혈통을 통해 그녀가 주류 인종이었던 이집트인과 혼혈이었을 가능성은 있긴 하다. 그러나 인구비가 높은 편도 아니었을 중남부나 서아프리카(흔히 흑인이라 불리는) 출신 혼혈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애초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부터가 흑인 인구가 이집트 남부에 비해 거의 드물다시피 한 이집트 북부에 있는 도시이기도 하고), 당연히 이집트가 흑인 문명이었다는 건 그냥 대놓고 헛소리다. 흑인이 지배층이었던 적은 누비아가 정복한 25왕조 뿐이며 백년도 못 갔고, 이 지배층도 결국 이집트화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란 주장을 동양에 비유하면 중국의 주류 민족이 한족이고 비교적 짧은 시간 몽골계, 여진계 왕조들이 존재했는데, 과거에 몽골이 잠깐 제국을 새웠었다고 한참 후인 청나라 황제 인종을 몽골계일 수 있다고 추정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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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위 상상하는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스타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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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상한 것도 아닌 게
천일야화에 나오는 중국 왕조도 실제 중국과는 전혀 다르게 아랍풍으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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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금으로 장식된 뱃머리, 은으로 된 노를 갖춘 호화로운 선박에
비너스처럼 장식한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별실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주위는
큐피드 신을 닮은 아이들이 부채질을 하며 서 있었다. 바다의 요정
네레이드처럼 꾸민 시녀들은 키와 돛줄을 잡아 배를 몰았다. 이 배에서부터 풍겨나는 야릇한 향기는 강기슭까지 퍼져 나갔다. 클레오파트라가 도착하자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초대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배를 방문해줄것을 요구했다.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기 위해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도 성대한 준비를 했다. 안토니우스를 놀라게 한 것은 엄청나게 밝은 실내였다. 천장에 매달린것,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벽면에 비스듬이 세운 것,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것 등 사방 가득 등불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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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집트 군대를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 군대의 구성원은 대부분 토착 이집트인들이었고 그들은 아쉬울 때만 자기들을 찾고 정작 전쟁 후에는 봉급도 제대로 안 주는 이방인 왕조에 대한 충성심 따위 그리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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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가 탑승했던 선박이 아직 전투가 어느 한 쪽의 판정승으로 흘러가기도 전에 중도 탈주해 버린 것이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세력이 패배한 원흉이기도 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선박은 후미에 위치해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황에서 다른 배들의 해전과 그 판도를 모두 관망할 수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그런 선박이 튈 경우, 지휘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우리 세력이 지는가?" 생각해서 튀기 마련이고 안토니우스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오판을 그대로 따라가버렸다. 그런데 정작 클레오파트라가 튈 당시의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중 어느 쪽도 크게 유리할 것은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후대 역사가들의 분석이며, 클레오파트라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뱃머리를 돌려 튀어버린 건 그냥 전쟁이 익숙지 않아서 그 상황을 오래 견디지 못했기에 성급하게 행동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애초에 클레오파트라는 암투에는 능했지만 전쟁을 직접적으로 현장에서 경험한 건 악티움 해전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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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안토니우스의 경우 카이사르 밑에서부터 경험을 쌓은 유능한 2인자이자 군인이긴 했으나 그 역시 악티움 해전에선 너무나도 큰 오판을 두 개나 저질렀다. 하나는 후미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배가 도망치는 모습을 보곤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졌다고 판단해서 철수하기 시작한 것. 클레오파트라와는 달리 노련한 군인인 안토니우스의 입장에선 후미의 배가 먼저 튄다면 경험이 경험인 만큼 상황이 나빠졌다고 계산할 법도 했지만, 정작 상황은 정반대로 아직 옥타비아누스와 대치 구도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모든 걸 각오하고 승부를 확실하게 내기 위해 좀 더 싸웠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으리라는 부분이 최대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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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이 중요한 전쟁이 아니라고 여기며 좀 져도 나중에 만회하면 그만인 사소한 항쟁이라고 판단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는데, 옥타비아누스 쪽이 보다 견고한 지지를 얻고 승리의 기반을 닦는데 너무나도 큰 도움을 주고 말았으며 안토니우스는 살아생전 악티움 해전에서 말아먹은 부분을 만회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사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막대한 재산과 경험 많은 군대를 쟁여두고 있어서 설령 해전 한번 졌다고 해도 충분히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듯하지만, 세상에서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둘뿐이었고 그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악티움은 모든 승패를 좌우하는 결전의 전장이었던 것이다. 당장 안토니우스군의 병사들은 원래 로마인이므로 안토니우스의 군에 소속된 것만으로 반역자라는 자신들의 처지에 큰 불안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이미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적으로 선포되었고 그렇게 여겨질 만한 짓을 저질렀다) 로마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집트의 여왕에게 충성을 바칠 의리 따윈 눈곱 만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와해되지 않고 로마와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이집트의 막대한 부와 안토니우스 개인의 능력 덕분이었고, 결국 안토니우스는 상어가 물속에서 움직임을 멈추면 죽듯이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할 경우 휘하의 군대는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 불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로마와 이집트 사이에 낀 그리스 계열 도시들도 과거
카이사르의 내전 때 경솔하게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었다가
학살당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만큼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쪽에 둘 다 발을 걸치며 입장을 애매하게 유지하다가 이후 승리가 확실해진 사람에게 붙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만큼 이들에게 악티움 해전은 자신의 미래와 생명까지 결정할 중요한 방향키였고, 여기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미련없이 그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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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보면 로마의 정치인 중 1인에 지나지 않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군인들의 힘으로 이룩한 영토 중 대부분을 임의로 타국에게 할양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에, 명분 및 정당성 자체가 크게 결여되어 힘의 우위를 본인들 능력으로 증명하는 것만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어진 대안이었는데 바로 그 힘의 우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악티움 해전에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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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리온과 달리 이쪽은 일부러 죽였을 가능성은 적다.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에서 카이사리온은 유일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남기 위해서 반드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위험분자이자 라이벌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아들들은 정치적으로 입지가 없어 문제될 것도 없었기 때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안토니우스의 전 부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가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22]
주왕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나라 마지막 군주 제신과 그의 아내
달기에 관련된 흉악한 기록들은 주나라가 크게 과장했다는 설이 현재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여기서 소개되는 클레오파트라의 악행들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토록 망국의 군주들에 관한 고대의 기록들은 왜곡되거나 과장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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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집트 기준이다. 기원전 69년은
박혁거세가 출생했다고 알려진 해이니, 전세계적으로 보면 21세기 시점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어마어마하게 옛날 사람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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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이집트인이 흑인이 아니었던 건 팩트이지만 당시 이집트는 다른 인종이 사회에 편입되는 것에 상당히 관대한 편이라 흑인이나 아시아인 출신 고위직도 적잖게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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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근친혼만 하던 이집트 왕가에서 흑인 피가 섞인 클레오파트라가 여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흑인 이전에 혼혈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 그런데 이집트 왕가는 그리스 출신 백인이기 때문에 흑인 혈통이 섞였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