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3:37:32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시칠리아 전역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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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아시아 및 태평양 전선 전투목록
전투 이름 교전 국가 및 세력
<rowcolor=#FFF> 공격 측 방어 측
<nopad> 1939년
<colbgcolor=#b31c31> 폴란드 침공
베스테르플라테 전투
단치히 우체국 방어전
바르샤바 전투
비츠나 전투
브주라 전투
겨울전쟁
수오무살미 전투
콜라 전투
<nopad> 1940년
가짜 전쟁
노르웨이 침공
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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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
북아프리카 전역
몰타 항공전
칼라브리아 해전
영국 본토 항공전
독수리의 날
유고슬라비아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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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토 공습
<nopad> 1941년
마타판곶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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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섬 전투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왕국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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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전쟁
은색 여우 작전
뮌헨 작전
제1차 스몰렌스크 전투
우만 전투
모스크바 폭격
제1차 키예프 전투
페르시아 침공
레닌그라드 공방전
뱌지마-브랸스크 포위전
모스크바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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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토폴 공방전
로스토프 전투
알렉산드리아 습격
<nopad>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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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얀스크 전투
영불 해협 돌파작전
마다가스카르 전투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남아프리카 연방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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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작전
보로네시 전투
엘 알라메인 전투
PQ-17 호송선단 전투
자이들리츠 작전
칼라치 전투
제1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
비르벨빈트 작전
디에프 상륙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횃불 작전
튀니지 전투
천왕성 작전
벨리키예루키 전투
화성 작전
겨울폭풍 작전
바렌츠 해 해전
<nopad> 1943년
북캅카스 공세
콜초 작전
이스크라 작전
보로네시-하리코프 공세
스카쵸크 작전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쿠투조프 작전
제1차 돈바스 공세
므가 공세
플로이에슈티 공습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
제2차 스몰렌스크 전투
브랸스크 공세
드네프르 강 전투
도데카니사 전투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무솔리니 구출 작전
슈바인푸르트 공습
제2차 키예프 전투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노스케이프 해전
<nopad> 1944년
칼린코비치-모지리 공세
몬테카시노 전투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안치오 상륙 작전 파일: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국기.svg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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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가체프-즐로빈 공세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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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공방전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nopad> 1945년
보덴플라테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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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VIP
프라하 봉기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저항군
※시기 구분은 전투 및 교전 발생 일자 기준, 전투 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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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99
<colbgcolor=#536349> 연표 사건
1936년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1941년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1942년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Allied invasion of Sicily
Operation Husky
Lo sbarco in Sicili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C180476.jpg
▲ 시칠리아에 상륙하는 연합군[1]
날짜
1943년 7월 10일 ~ 8월 17일
장소
이탈리아 왕국 시칠리아
원인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완전한 장악
교전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영국|]][[틀:국기|]][[틀:국기|]]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캐나다 자치령[2]

[[호주|]][[틀:국기|]][[틀:국기|]][3]

[[인도 제국|]][[틀:국기|]][[틀:국기|]][4]

[[자유 프랑스|]][[틀:국기|]][[틀:국기|]]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이탈리아 왕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조지 S. 패튼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오마 브래들리
파일:영국 국기.svg 버나드 로 몽고메리
파일:영국 국기.svg 아서 테더[5]
파일:영국 국기.svg 해럴드 알렉산더[6]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가이 시먼스[7]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알베르트 케셀링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한스팔렌틴 후베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알프레도 구초니
결과
연합군의 시칠리아 점령
영향
지중해의 완전 확보 및 이탈리아 전선의 개전
병력 약 160,000여 명 약 230,000여 명
피해규모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 제7군
전사자 및 실종자 2,237명
부상자 5,946명
포로 598명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 육군항공대
전사자 28명
실종자 88명
부상자 41명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 해군
전사자 및 실종자 546명
부상자 484명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제8군
전사자 및 실종자 2,062명
부상자 7,137명
포로 2,644명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해군
전사자 및 실종자 314명
부상자 411명
포로 4명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캐나다군
전사자 562명
부상자 1,664명
포로 84명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독일 국방군
전사자 4,325명
실종자 4,583명
부상자 13,500명
포로 5,532명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군
전사자 4,876명
실종자 36,072명
부상자 32,500명
포로 116,681명

1. 개요2. 배경3. 양군의 병력 구성 및 배치 상황
3.1. 연합군3.2. 추축군
4. 전초: 민스미트 작전(Operation Mincemeat)5. 허스키 작전
5.1. 상륙개시5.2. 초반부터 꼬이는 공수 작전
5.2.1. 해안 상륙
5.2.1.1. 젤라 전투
6. 시칠리아 전역
6.1. 연합군의 진격6.2. 미군의 서부 평정6.3. 연합군의 메시나 진격6.4. 트로이나 전투6.5. 메시나 점령
7. 결과8.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시칠리아 침공의 1분 전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인 1943년 7월 10일 ~ 8월 17일, 미군 영국군 연합군이 이탈리아 왕국 시칠리아로 상륙하여 공격한 사건. 이 작전의 성공으로 연합국은 이탈리아 본토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정식적인 작전명은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ey)'이다.

2. 배경

북아프리카 전역 튀니지 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리면서 연합국 간에 다음 공격목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서방 연합국의 의도는 유럽 대륙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동부전선에서 독일군 주력을 상대하는 소련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당시 제2전선 형성에 있어 상륙지역과 시기를 두고 연합국 간에 의견차가 존재했다.

미국과 소련은 늦어도 1943년 이내에 프랑스 북부에 상륙함으로써 제2전선을 형성하자고 주장한 반면 영국은 지중해의 완전한 장악과 소련의 동유럽 진출 저지 등 소련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줄이기[8] 위한 의도로 추축국의 연약한 아랫배라 불리는 유럽 남부, 즉 이탈리아에 상륙 후 이탈리아를 추축국에서 이탈시키고 독일의 남쪽에서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국은 연합국의 영원한 물주인 미국과 독일 주력군과 피터지게 싸우는 소련의 주장을 거부하고 자국의 주장을 온전히 관철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영국은 결국 일종의 절충안으로 원칙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주장대로 나가되 북아프리카의 완전 장악을 위해 시칠리아 정도는 점령해도 제2전선 형성에 무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미국과 소련이 여기에 동의하면서 연합국 정상들은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1943년 7월 10일 시칠리아에 상륙하기로 합의했다.[9]

3. 양군의 병력 구성 및 배치 상황

파일:external/www.privateletters.net/CampaigninSicily(10July1943).png
지도 기호는 단대호 항목 참조

3.1. 연합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연합군본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연합군 총사령관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장

3.2. 추축군

4. 전초: 민스미트 작전(Operation Mincemeat)

상륙 작전에 앞서 독일군에 연막을 뿌리기 위해 존 고드프리 제독이 이끄는 영국군 정보기관 MI5는 민스미트 작전(Operation Mincemeat)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당시 MI5에 배속되었던 찰스 첨리(Charles Cholmondeley)[12] 영국 공군 자원 예비역[13] 중위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아이디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A body is obtained from one of the London hospitals ... The lungs are filled with water and documents are disposed in an inside pocket. The body is then dropped by a Coastal Command aircraft ... On being found, the supposition in the enemy's mind may well be that one of our aircraft has either been shot or forced down and that this is one of their passengers.
어느 런던 병원에서 시체 한 구를 획득한다. (중략) 폐는 물로 차 있고 안주머니에는 서류가 들어 있다. 그 뒤 시체는 스페인 해안 근처에서 항공기를 통해 투하한다. 적들이 이 시체를 발견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비행기 중 하나가 격추당했거나 사고로 추락하였고, 이 시체는 그 승객들 중 하나로 추정할 것이다.[14]
-당시 첨리 중위가 계획했던 구상안
  • 시체를 하나 구한다.
  • 시체를 영국군 장교로 꾸민 다음 안주머니에 위조한 1급 서류를 넣어 둔다. 이 서류에는 연합군이 시칠리아가 아닌 다른 곳에 상륙할 것이라고 적어 둔다.
  • 마치 해당 시체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 추락하여 사망한 것처럼 보이도록 해안가에 투하한다.
  • 독일군 측에서는 이 서류가 실제 기밀문서이며 우연히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이에 독일군 측은 우리의 계획대로 시칠리아가 아닌 다른 곳에 집중할 것이다.
첨리 중위와 함께 작전을 구체화하고 실행한 유언 몬터규(Ewen Montagu) 영국 해군 자원예비역 소령, 이언 플레밍 해군 자원예비역 대위가 함께 무연고자 시체 안치소를 돌면서 적당한 시체를 물색하다가 한 구를 찾아내 구해 왔다. 일명 "존재하지 않던 남자( 영어: The man who never was/ 웨일스어: Y dyn na fu erioed)로 불리는 이 시체의 정체는 글런두르 마이클(Glyndwr Michael, 1909년 1월 4일 ~ 1943년 1월 28일)이라는 웨일스 출신 노숙자로, 실제 정체는 오랫동안 기밀로 남아 있었다가 1996년에야 정체가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부검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아무 시체나 준비할 수도 없었고 유가족에게 시체를 가져가는 목적을 설명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시체를 구하는 일이 의외로 쉽지 않았다고 한다.

허나 결과적으로 실제 시체의 사인은 익사가 아닌 중독(실수로 쥐약을 복용)이었는데 당시 작전에 협조하였던 병리학자 버나드 스필즈버리(Bernard Spilsbury) 박사는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라 부검에 회의적이므로 사인을 꼭 알아야 하지 않는 이상 부검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한다면 추락 도중 쇼크로 인해 죽을 수도 있으므로 꼭 익사한 것처럼 꾸밀 필요는 없다"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마이클의 시체에는 "윌리엄 마틴 해병대 소령"(Major William Martin, RM)이라는 가짜 신분이 부여됐다. 굳이 윌리엄 마틴이란 이름이 선택된 이유는 매우 흔한 이름이라 설령 스파이가 해군 장교 총원명부에서 그를 찾으려고 해도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 찾아낼 확률이 극도로 떨어지게 될 것을 노린 것이다. 시체에 영국 해병대 전투복을 입히고 서류를 준비해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으며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도록 가상의 가족이 보낸 편지와 가짜 약혼녀의 사진[15], 그리고 여자친구를 위한 약혼 반지 영수증과 극장 티켓까지 위조해 같이 넣어 두는 꼼꼼함을 발휘하였다.

가짜 신분증의 사진은 처음에는 시체의 얼굴을 직접 사진찍어 보았으나 결과물이 누가 봐도 시체 티가 났기 때문에 결국 '마틴 소령'과 얼굴이 대충 닮은 다른 군인의 사진을 찍어 사용했다. 어차피 시체가 물에 불면 얼굴이 어느 정도 망가지기 때문에 사진만으로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해병대는 전시에 증명 사진도 정복이 아닌 전투복을 입고 찍는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조언까지 관계자에게 들어 참고해 모델이 될 이에게 전투복을 입혀서 찍고 옷이 너무 새것이면 의심을 살 것을 우려해 작전 개시를 위해 시체에 전투복을 착용시키기 직전까지 첨리 중위가 해병대 전투복을 입고 다니면서 적당히 낡아 보이도록 했다.

이후 영국 해군의 잠수함 HMS 세라프 함을 통해 "마틴 소령"을 스페인 해안가에 유기하였는데 초기 기획안은 항공기에서 추락한 시신처럼 보이도록 공중 투하할 예정이었으나 투하 과정에서 시신이 훼손되어 신원 확인이 힘들어지거나 일부러 노획하게 놔둬야 할 서류 등이 유실될 수 있었으므로 잠수함에서 흘려보내는 것으로 변경됐다. 이 "탈출했다가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은 조류를 타고 해안에 닿았고 이후 소령이 지니고 있던 소지품이 아프베어 요원의 손에 들어갔다가 영국이 스페인에 요청하여 반환되었는데 반환받은 후 MI5측에서 정밀 검사를 통해 서류들이 한 차례 개봉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MI5의 계획대로 독일군은 이 가짜 1급 기밀 문서를 통해 연합군이 그리스나 사르데냐 섬에 상륙한다고 오판해 버렸다.
William Martin, born 29 March 1907, died 24 April 1943
(윌리엄 마틴, 1907년 03월 29일생, 1943년 04월 24일 사망)
Beloved son of John Glyndwr Martin and the late Antonia Martin of Cardiff, Wales
(존 글런두르 마틴과 고 앤토니아 마틴의 아들 웨일스 카디프 출신)
Dulce et Decorum est pro Patria Mori, R.I.P.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은 영예이다. 평온 속에 잠들지어다.)
Glyndwr Michael Served as Major William Martin, RM
글런두르 마이클, 영국 해병대에서 윌리엄 마틴 소령으로 복무[16]
"마틴 소령"의 묘비명. 시체는 스페인 우엘바(Huelva)에 위치한 한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작전은 기밀 공개가 되려면 한참 남은 1956년에 벌써 영화 <존재한 적 없는 사나이(The Man Who Never Was)>로 만들어졌다. 기밀 해제 이전에 처칠이 이 완벽한 작전을 전쟁이 끝나자마자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기 때문에 이를 들은 영화 관계자들이 후딱 줏어듣고 영화화해 버린 것이다. 작전 관계자들은 뒷목을 잡았으나 되려 처칠은 전반적인 내용을 대중에 공개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책, 그리고 그 책에 기반한 영화가 나왔으며 2022년에도 영화 민스미트 작전으로 영화화되었다. 아울러 글런두르 마이클은 정보 공개 이후 공식적으로 해병대 소령 계급과 서훈을 받았다.

그리스에서도 동물 작전(Operaion Animals)이라는 코드명이 붙은 영국 특수작전사령부(SOE)와 그리스 레지스탕스가 교량 및 터널 파괴 등의 사보타주 행위를 통해 추축군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작전이 시행되었다.

5. 허스키 작전

5.1. 상륙개시

5.2. 초반부터 꼬이는 공수 작전

상륙 전에 수 많은 함포 지원 사격과 공중 지원으로 상륙 지점을 폭격한 연합군은 7월 9일 자정부터 공수부대 투입을 시작으로 시칠리아 상륙작전인 허스키 작전을 실행한다.

이 공수작전은 9일 밤 11시 30분에 실행되었으며 미 제82공수사단과 영 제1공수사단이 투입되어 젤라와 시라쿠사 근방에 낙하할 예정이었으나 때마침 불어온 최대 45마일(약 72km/h)의 강풍이 불어 대부분의 병력이 집결지로 모이지 못하고 분산 낙하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영국군은 글라이더 147대를 통해 병력을 공수하려고 시도했는데 단 12대만 목표지점에 도달했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불시착했으며 69기는 바다로 떨어지는 등의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으나 이렇게 넓은 지역에 산개된 공수부대원들이 착륙 지점 주변을 습격하고 기습을 가하면서 혼란을 야기했다.[17]

그러나 시칠리아의 방어를 맡았던 이탈리아군은 이미 9일 오전부터 상륙부대가 접근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공수부대 강하 1시간 30분 전인 22시에 벌써 전 부대에 비상을 걸어놓은 상태였다. 구초니 장군은 자정까지 공수부대가 강하했다는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고 연합군이 섬의 남동쪽으로 상륙을 시도하리라는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리고 첫 제파가 상륙을 개시하기로부터 거의 1시간 전인 오전 1시 45분에 해안부대에 방어 명령을 하달했다.

5.2.1. 해안 상륙

파일:external/www.istitutobartolo.it/invasione.jpg
<rowcolor=white> ▲ 상륙작전 배치도[18]
병력 공수시 발생한 강한 바람은 상륙 부대에게도 영향을 끼쳐 약 6시간 가까이 지연되어 7월 10일 이른 시간에 상륙 작전이 개시됐다. 시칠리아 남단에 위치한 젤라에는 미 7군이, 시라쿠사와 포잘로엔 영국 8군과 캐나다군이 각각 상륙하기 시작했다.[19] 사실 연합군의 상륙 지점의(특히 남부 해안의) 모래톱 때문에 상륙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고, 일부 부대는 정해진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상륙하는 경우가 있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독일군을 만났다면 그놈의 MG42 벌집이 되었겠지만, 상대가 이탈리아군이였기에 상륙에 혼선을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피해 없이 상륙에 성공한다. 그러나 약체라고 평가받던 이탈리아군 중 젤라 해안에 주둔하던 429해안 부대는 미 레인저를 맞아 부대의 45%가 전투 불능에 빠질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45%면 전멸을 넘어 섬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탈리아군을 마주친 제1레인저 대대와 제4레인저 대대는 제39전투공병연대 제1대대, 제531해안공병연대 제1대대, 제83화학대대의 박격포 사격, 해군의 함포사격의 지원에 힘입어 이들을 몰아내었다. 이탈리아군의 보병들의 공격 이외에도 13대의 전차가 공격을 시도했으나 레인저들이 격퇴하는 데에 성공했다. 7~8대의 전차가 레인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가 했으나 난전 끝에 격파되었다. 영국군이 상륙한 시라쿠사 인근에서도 이탈리아의 나폴리 보병 사단이 반격에 나섰으나 영국군은 이를 쉽게 격퇴한다.

7월 11일에는 독일 공군의 공습이 개시되어서 일부 함선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 중 리버티십인 수송선 로버트 로언(Robert Rowan)은 피격 직후 대폭발을 일으켰는데, 하필이면 이 함선이 탄약 수송함이었기 때문이다. 본 문서 사진에 있는, 어마어마한 폭연의 정체가 이 로버트 로언 호의 폭발이다.

중요한 진격 루트인 피아노 루포[20] 사거리에서는 이탈리아군 전차 20대가 진입하였으나, 강하한 소수의 공수부대가 해군의 함포사격과 제16연대전투단의 도움에 힘입어 격퇴시켰다.
5.2.1.1. 젤라 전투
젤라 인근에서 이탈리아 해안 방어 부대의 저항이 일소된 후 이 해안에 미 제1보병사단[21]과 제45보병사단이 상륙한다. 이에 독일군은 이들을 축출하기 위해 주변에 주둔하던 공군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과 이탈리아 육군 제4산악보병사단을 동원하여 젤라를 향해 반격을 시도했다. 당시 미 7군은 2~4마일 정도의 깊이밖에 교두보를 형성하지 못했고, 더욱이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공습도 있었고 해안이 가득차 탱크와 같은 중장비를 하역하려는 오마 브래들리 장군의 시도도 실패했기 때문에 티거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젤라에 상륙해있던 미 1사단과 45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었는데,[22] 그 순간 뒤에서 포탄이 날아와 티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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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글리브스급 구축함 슈브릭(Shubrick)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보이시(Boise)
위의 사진의 주인공인 슈브릭과 보이시가 이들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해오고 있던 것이였다. 여기서 2차대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전차와 군함 간의 포격전이다. 티거가 해안의 군함을 향해 포탄을 발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삽질에 불과해 별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23] 두 전투함은 전차와의 포격전에서 전차를 여러 대 파괴하고,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포격으로 인해 추축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독일의 504중전차대대는 17대의 티거 중 14대를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인해 손실한다. 이런 뼈아픈 손실에도 불구하고 추축군은 젤라 교두보를 향해 3방향으로 반격을 가했다. 전투함의 포격 지원에도 불구하고 젤라 교두보에서 가장 취약했던 남동쪽 부근에서 독일군 전차가 교두보에 진입하는 등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나 미군은 이를 겨우 막아낸다. 이 전투에서 젤라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나, 이 하루동안 전투에서 미 육군은 2,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24]

그 이후 미군의 피해를 보충하기 위해 패튼은 젤라 인근에 제82공수사단을 추가로 야간에 공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2차 공수작전이 지상의 대공포 부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당시 82공수사단장이었던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은 1차 공수작전 [25] 이후 해안에 상륙하여 2차 공수작전을 지켜보기로 하였는데, 내친김에 인근 대공포 기지 몇군데를 불시 점검해보았더니 2차 공수작전(허스키 II)[26]이 있다는 것을 대공포 부대원들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겁한 리지웨이는 급히 인근 부대에 2차 공수작전이 있다는 사실을 전파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더군다나 공교롭게도 공수작전 직전에 소수의 독일 공군기들이 경미한 폭격을 실시하였다. 이 때문에 안 그래도 대공포 병력들이 긴장해 있는데 튀니지에서 이륙한 82공수사단 504공수보병연대를 태운 C-47 대편대가 해안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한 대공포좌가 발포하기 시작하자 나머지 대공포좌들도 따라서 죄다 발포, 이를 지켜본 해안의 미 구축함들도 상공에 보이는 수송기 편대에 일제사격. 결국 C-47 수송기 23대 격추에 37대가 손상 되었고 제82공수사단 504연대 정예 공수병들이 400명 넘게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27]이 오인사격 참사를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빡칠 대로 빡쳐서 현장 지휘관 패튼에게 반드시 책임자를 파악해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패튼은 이날의 일기에 "내가 확실한 책임자를 잡아 처벌을 하지 않으면 아이크는 아마도 나까지 용서하지 않으려는 듯 하다"고 적었다.[28]

6. 시칠리아 전역

6.1. 연합군의 진격

젤라 전투 이후 패튼은 교두보 북쪽에 위치한 고지대를 정리하기 위해 미 1사단과 3사단을 보내 1사단이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을 상대하는 동안 제2기갑사단의 지원을 받은 3사단이 니셰미(Niscemi)를 점령하고, 젤라 서쪽에 위치한 리카타를 점령해 1차 목표였던 옐로 라인까지 진격한다.

영국군도 이에 보조를 맞추어 진격해 연합군은 13일 무렵에는 동쪽으로는 아우구스타, 서쪽으로는 비치니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지형상 진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데다 프랑스로부터 독일군 정예인 제1팔쉬름예거 사단이 증파되었기 때문에 돈좌된 상태였다. 지지부진한 진격에 넌덜머리를 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해럴드 알렉산더 장군에게 패튼의 미 7군과의 서쪽 전투지경선을 조금 수정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즉, 지금 적의 방어선이 굳건하니 적의 방어선을 우회해서 시칠리아 중부로 찔러 들어가자는 뜻이었다. 7월 13일 자정에 알렉산더 장군은 패튼 장군에게 전투지경선의 변경을 통고했고 미 7군은 124번 고속도로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영국 8군의 일부가 124번 고속도로를 통해 엔나로 진격했다. 엔나는 중부 시칠리아로 진입하기 위한 중요한 길목이었고, 북동쪽 메시나로 진군하기 위해 필요한 지역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알렉산더 장군은 노골적으로 영국군을 미군과 독일군 사이에 끼워 넣어 메시나를 먼저 탈환함으로써 시칠리아 해방의 공로를 독차지하려는 의도를 내보인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미 7군은 영국군의 서쪽 측후방을 지켜줄 수 없게 되었는데다 영국군이 대놓고 미군 햇병아리들은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내보인 셈[29]이라 그 성질머리 더러운 패튼의 속은 부글부글 끓게 되었다. 더군다나 124번 고속도로로 잘 가고 있던 미군을 강제로 끌어내고 영국군을 보낸 참이라 카타니아에서 엔나로 이어지는 추축군 방어선이 구축될 시간이 생겨버렸다. 결국 그대로 미 7군에게 맡겨두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고, 알렉산더 본인이 승인을 내리기는 했지만 몽고메리가 강하게 주장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패튼은 몽고메리에게 이를 갈게 되었다.

6.2. 미군의 서부 평정

당연하게도 패튼과 미군 장성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당연히 영국 8군의 측면을 따라 옐로 선을 넘어 중부 시칠리아를 거쳐 북부 메시나까지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장군의 일방적인 통고로 인해 그 희망은 산산조각났으며, 따돌려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평범한 장군이라면 그저 분을 삭이고 순순히 영국군의 의도에 맞춰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 7군의 지휘관은 다름아닌 조지 S. 패튼이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주도권을 강탈해 올 작전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 7군의 목표가 정해졌다. 미 7군은 팔레르모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의 수도로서 정치적인 중요성도 상당히 높을 뿐더러 미 7군이 재보급을 받고 작전을 속행할 수 있는 새로운 군항 및 거점이 될 수 있었다.

패튼은 먼저 알렉산더 장군을 꼬드겨 3사단 수 마일 앞인 아그리젠토로 '정찰'을 나가겠다고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라 '정찰'을 나갔던 트러스콧 장군은 아그리젠토를 '점령'하게 되고, 아그리젠토는 미 7군이 시칠리아 북동부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가 된다. 패튼은 그대로 알렉산더의 사령부로 쳐들어가 자신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한편 브래들리 장군의 2군단을 북쪽으로 보내 섬을 종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알렉산더 장군은 마지못해 승인했지만 이내 미 7군은 몽고메리의 좌측을 엄호하기 위해 북쪽으로만 가고 서쪽으로는 가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30] 당연히 패튼과 미군 장군들은 뿔이 단단히 나 있었기 때문에 메시지를 상큼하게 씹었다. 핑계도 걸작인데 알렉산더의 메시지가 혼선을 빚어 의미를 알 수 없었고, 그 메시지가 정확히 밝혀졌을 때는 이미 패튼이 팔레르모의 정문에 있었다는 것이다.

7군의 서부전선은 동부의 영국군 전선과는 달리 거의 저항이 없었다. 구초니 장군은 연합군이 침공하자마자 제15장갑척탄병사단의 증파를 요청했지만 이 시점에 시칠리아 서부에 남은 병력은 전의를 거의 상실한 이탈리아군 병력 뿐이었다. 브래들리 장군의 2군단이 시칠리아를 북으로 종단하는 사이 패튼은 제82공수사단과 제2기갑사단, 제3보병사단을 임시 군단으로 묶어 조프리 장군에게 맡기고 서부로 진군을 개시했다. 72시간만에 팔레르모가 함락되었고 7월 24일까지 시칠리아 서부는 완전히 평정됐다. 미군은 272명의 전사자를 내는 동안 400대의 차량을 노획하고 53,000여 명의 이탈리아군을 포로로 잡았다.

6.3. 연합군의 메시나 진격

7월 25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적들에게 축출되었다. 원래부터도 허스키 작전을 통해 파시스트 정권에 타격을 주고자 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급격한 상황 변화는 연합군에게도 충격이었다. 무솔리니의 실각이 단번에 종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이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추축(Axis)의 근간을 흔들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팔레르모가 함락되고 미 7군이 섬의 서부를 완전히 평정하자 알렉산더 장군도 별 수 없이 7월 23일 패튼에게 메시나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 8군이 카타니아에서 돈좌된 상태로 도저히 단독으로는 메시나로 갈 수 없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알렉산더 장군은 양군의 전투지경선을 다시 그어 패튼이 메시나로 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고 몽고메리는 계속 남부에서 공격하도록 조치했다.

메시나 공략전은 여태까지 패튼이 보여준 정석적인 기병전술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메시나는 험준한 카로니에 산맥과 에트나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진격하기가 어려웠고 영국군이 뻘짓하며 벌어준 시간 덕분에 추축군은 카타니아를 기점으로 북쪽으로는 해안선인 산 프라텔로까지, 동쪽으로도 해안선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선도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휘하 대다수의 이탈리아군을 상실한 구초니 장군이 아무리 시칠리아를 사수해야 한다고 우기더라도 독일은 점진적으로 시칠리아에서 발을 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점부터 시칠리아 추축군의 작전권은 독일군 제14기갑군단장 한스팔렌틴 후베에게 넘어간다.

후베 장군은 점차 에트나까지 물러설 의도가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점차 퇴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러서서 방어선을 줄이고, 줄어든 방어선에서 빠질 수 있는 병력부터 메시나 해협을 건너 이탈리아 본토로 물러난다는 계획이었다. 후베 휘하에는 이탈리아군 잔존병력, 제1팔쉬름예거 사단,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 제15장갑척탄병사단, 제29장갑척탄병사단이 있었다.

메시나까지 이어지는 통로는 협로 4곳이 있었고 이 중 둘은 에트나를 거치지 않고 메시나까지 직접 이어졌다. 영국 8군의 일부는 에트나 산 서쪽 능선을 끼고 도는 아드라노와 란다초를 잇는 가도를 통해 진군했으며 나머지는 동부 해안선의 114번 도로를 따라 메시나로 진군했다. 미 7군에게는 니코시아-트로이나-란다초를 잇는 내부 축선의 120번 도로와 북부 해안을 통해 바로 메시나와 이어지는 113번 도로가 주어졌다.

패튼의 주의를 끈 것은 에트나 방어선 거칠 것 없이 바로 메시나로 이어진 113번 도로였다. 영국군이 미군을 얕잡아 봤다는 것에 단단히 열받은 패튼은 메시나로 먼저 도착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패튼은 이 113번 도로로 진군하는 45사단장 미들턴 장군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이번 경주는 미군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반드시 영국 놈들보다 먼저 메시나를 점령해야 한다. 귀관이 우리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그러나 패튼의 애가 타든 말든 진척은 매우 느렸다. 날이 더워서 병사들이 열병으로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말라리아까지 돌아서 1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감염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추축군이 산악지형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미군은 북쪽 113번 도로로 45사단을 진군시키는 한편 내륙 쪽 120번 도로로는 1사단을 진군시켰다. 45사단이 산토 스테파노의 '피의 능선'[31]을 차지하자 45사단을 트루스캇 장군의 3사단과 교대해 주었다. 1사단은 니코시아를 점거하고 트로이나를 점거하면 교대될 예정이었다.

6.4. 트로이나 전투

하지만 시칠리아 전역에서 가장 처절하면서도 가장 규모가 큰 트로이나 전투가 1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나는 추축군이 설정한 방어선의 주요 거점이었으므로 독일군 제15장갑척탄병사단과 이탈리아군 아오스타 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미군 1사단은 9사단으로부터 제39보병연대를 증원받았다. 이 39연대가 7월 31일 트로이나에서 추축군 방어선 돌파에 실패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추축군은 트로이나가 잘 감제되는 고지에서 참호를 깊게 파고 눌러앉아 있었으며 인근은 불모지라 마땅한 엄폐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격하기에는 정말 더러운 조건이었는데, 이에 미군은 대규모 포병을 운용했다. 105mm 견인곡사포 9개 대대, 155mm 곡사포 6개 대대, 155mm 롱 톰 곡사포 1개 대대로 구성된 포병대는 총 165개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연합군 특유의 공습이 더해졌다. 이러한 대규모 포병 화력과 항공기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6일간 서로 박터지게 고지를 뺏고 뺏기는 혈전이 벌어졌는데, 이는 2군단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1사단장 테리 앨런 장군을 당황시켰다.

전투 도중이던 8월 2일, 지휘부는 지지부진한 상태를 깨고자 존 보웬 대령의 1사단 26연대를 트로이나에서 추축군 쪽 2마일 후방에 위치한 몬테 바실리오[32]로 우회시켰다. 독일군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아서 26연대는 강력한 포화를 뒤집어썼으나 1개 대대가 먼저 들어가 포화를 얻어맞으면서도 진지화에 성공하여 추축군의 뒷목을 잡아챈 격이 되었다. 바로 그날 오후 독일군 제29장갑척탄병 연대가 반격을 개시했으나 26연대 병사들의 분투와 포병의 화력지원으로 격퇴되었다.

추축군은 트로이나에서 되도록 시간을 오래 끌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26연대를 몬테 바실리오에서 치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포병 화력을 집중시키는 한편 끊임없이 공격부대를 파견했으나 8월 5일까지도 26연대를 몰아내지 못했다. 이러는 중에 26연대는 상위부대인 1사단과는 사실상 단절된 채 고립된 데다 기껏 시도한 항공 보급도 시원찮아서 보급품이 거의 떨어진 상태였다. 인명 손실도 심각해서 1개 중대에 전투가 가능한 병력이 17명 뿐인 중대도 있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독일군 보병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는데, 제임스 W. 리즈 일병[33]은 자신이 뛰쳐나가 기관총좌의 시선을 끌고는, 자신이 소속된 박격포반이 3발 남은 포탄을 쏘도록 유도하여 마지막 포탄으로 기관총좌를 끝장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적의 집중포화에 전사하기 전까지 그는 끈질기게 사격하며 저항했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그에게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8월 5일까지 26연대를 몰아내려는 모든 시도가 좌절된 데다, 규모가 9사단 39연대로 증강된 1사단의 파상공세로 인해 제15장갑척탄병 사단은 매우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결국 후베 장군은 15사단을 물렸고, 8월 5일 밤에 추축군은 철수한다. 그리고 드디어 1사단은 힘겹게 휴식을 쟁취하여 후방으로 물러설 수 있었다.

6.5. 메시나 점령

1사단이 트로이나에서 분투하는 동안 3사단도 추축군 에트나 방어선의 최북단인 산프라텔로에서 제29장갑척탄병사단의 저항과 마주쳤다. 트루스캇 장군은 정면돌파를 하는 대신 소수의 부대를 적 후방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선택했고 적의 의표를 찌르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29사단의 주력이 이미 간밤에 빠져나간 뒤인지라 1000명의 포로를 잡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3사단은 8월 11일 재차 이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이번에는 투입된 침투부대의 규모가 너무 작아 29사단의 철수를 막지 못했다.

이후로는 독일군이 지뢰밭을 조성한 탓에 진군이 늘어지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후베 장군의 추축군은 속속들이 메시나 해협을 건너고 있었다. 이 와중에 8월 16일 미군이 최후로 후방상륙을 다시 시도했으나 '내리고 보니 아군 후방'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결국 17일 살아남은 모든 추축군이 시칠리아를 떠났고, 마지막 수송선이 떠난 지 한 시간 쯤 지나서 미군 3사단 7연대가 가장 먼저 메시나에 입성했다. 패튼은 혹시나 영국이 전공을 가로챌까봐 윌리엄 이글스 장군의 증원군을 급파했다. 그러나 패튼의 걱정과는 별개로 영국군은 패튼이 메시나의 공식적인 항복을 접수한 뒤에나 등장했다. 패튼으로서는 완벽한 승리로 복수라는 목적을 달성한 셈.

7. 결과

메시나의 점령과 함께 시칠리아 전역은 완전히 끝을 맺었다. 미군이 서부를 완전히 평정한데다 추축군이 침착하게 병력을 온존하며 퇴각한 덕분에 잔당 소탕도 거의 필요 없었다.

시칠리아를 점령하게 되면서 사실상 지중해의 제해권은 완전히 연합군에게 넘어갔다. 애초에 이탈리아나 독일이나 지중해에서 산발적인 저항만 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축군의 주력의 상당수가 무사히 이탈리아 본토로 탈출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서는 반쪽짜리 승리에 그치고 만 셈이 되었다. 퇴각전 지휘를 맡은 한스팔렌틴 후베 장군이 효과적으로 시간을 벌면서 차근차근 병력을 물렸기 때문에 추축군은 비교적 온존한 병력으로 본토에서 저항을 이어가게 된다. 더군다나 메시나 해협 건너편을 해안포로 도배를 해 버려서 연합군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패튼은 이 전역에서 있었던 일로 몽고메리라면 완전히 이를 갈게 됐으며 몽고메리도 자신이 노린 전공을 가져간 패튼을 경계하게 되었다. 추가적으로 몽고메리는 자신이 보여준 이기적인 처신 때문에 많은 미군 장성들과도 척을 지게 되었다. 온화한 성격으로 대부분의 장병들과 잘 어울렸던 오마 브래들리 장군조차도 몽고메리라면 학을 뗐다.[34]

또한 이 침공은 동부전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침 시칠리아 침공이 시작될 당시 동부전선에선 최대의 전투인 쿠르스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패색은 이미 짙어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시칠리아 침공이 벌어지면서 히틀러는 병력을 이탈리아 쪽으로 차출해야 했다. 차출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일군이 쿠르스크에서 당초 의도했던 돌출부 절단과 소련군 섬멸은 당시 독일군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엉망이었던 공수작전에 대해 조사를 한 미군은 영국 공수부대에서 이미 운용중이던 패스파인더[35]가 없어서 효율적인 공정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후 영국에게서 패스파인더 노하우를 받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실전투입은 했지만, 운용에 미숙해서 사실 그렇게 효율적으로는 돌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전 공수작전에 비해 나아졌기 때문에 각 공수부대에 패스파인더가 도입되었고. 전후에는 패스파인더보다 더 정밀한 공정통제에 대해 필요성을 느껴서 1953년에 공정통제사( CCT) 부대를 만들었다.

시칠리아 침공 중 이탈리아군 및 독일군 포로 73명이 학살당하는 전쟁범죄가 일어났다. 비스카리 학살이라 불리는, 연합군에 의한 학살사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다.[36]

또한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탄압받아 세력이 많이 위축되었던 마피아 조직들이 미국에 있는 친척 마피아 조직들의 중개를 받아 점령군인 미군의 군수 및 민사행정에 협조하면서 세력을 다시 회복하기도 했다. 이들은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기 전부터 연합군에게 상륙이 원활한 지역과 추축국군의 배치와 순찰시간을 알려주는 등 정보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8. 매체에서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영화 말레나에서 독일군의 시칠리아 점령, 그 뒤를 이은 연합군의 폭격과 미군의 진주가 묘사된다.

본문에서 언급한 기만 작전인 '다진고기 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2022년 개봉했다. 제목은 작전 이름과 같은 OPERATION MINCEMEAT. 티저 트레일러 영상


[1] 함선들 뒤로 엄청난 크기의 연기구름이 보이는데 탄약수송선인 로버트 로완(Robert Rowan)이 공격을 받아서 폭발한 장면이다. 본문 참조. [2] 영연방 왕국 [3] 영연방 왕국 [4] 영국의 식민지 [5] 영국 지중해 항공 사령관 겸 연합 공군 사령관 [6] 영국군 제15 집단군 사령관 [7] 캐나다 제1보병사단장 [8] 윈스턴 처칠 철의 장막 발언에서 알 수 있다시피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매우 경계했으며 이러한 그의 성향을 반영하듯 영국 정보부에서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스파이만큼 꾸준히 감시한 것이 소련의 간첩망이었다. 물론 케임브리지 5인조의 사례를 보면 그닥 효능은 없었다. [9] 당시 시칠리아에는 남동해안을 따라 비행장이 여럿 들어서 있었고 팔레르모 같은 항구 도시들이 발달해 있어서 이곳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지중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어도 딱 중앙에 위치한 시칠리아로 인해 수송로가 위협받을 수 있었다. [10] 제12군단, 제16군단, 4개 보병사단 지휘 [11] Hans-Valentin Hube. 발터 모델의 절친이자 입대 동기였다. 본 전역에서의 공으로 1944년 4월 20일 백엽 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고 상급대장으로 진급하였다. 그러나 진급 하루만인 4월 21일 공항에서 이륙 도중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였다. [12] 철자와 실제 발음이 많이 동떨어진 성씨인데 영어 위키백과 기준으로 /ˈtʃʌmli/로 읽는다. 음차하자면 "첨리" 정도가 될 것이다. [13] Volunteer Reserve. 현역으로 복무하다 전역한 일반 예비역과 달리, 처음부터 예비역으로 입대하는 제도. [14] 출처 Deathly Deception: The Real Story of Operation Mincemeat. London, Denis Smyth, 2010, pg 19 [15] 이 "약혼녀"의 정체는 당시 정보부에서 일하던 여성 직원 진 레슬리(Jean Leslie)였으며 편지에서는 팸(Pam)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녀는 전후 시칠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던 미 육군 참전자와 결혼했다. [16] 이 마지막 문장은 1998년 기밀 해제 이후 추가되었다. [17]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 예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노르망디 공수 이후의 상황. [18] 파랑색이 연합군, 초록색이 이탈리아군, 주황색이 독일군, 낙하산 기호는 공수지역, 비행기 기호는 공습 [19] 상륙 병력 수만 따지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8만 명)보다 더 큰 규모다. [20] 콜 오브 듀티 2: 빅 레드 원에서 가장 어려운 임무로 손꼽히는 '피아노 루포'가 여기서 따왔다. [21] 빅 레드 원으로 유명한 사단 맞다. [22] 1사단과 45사단은 포병과 해군의 함포사격 등 화력지원 이외에 기갑 전력의 지원은 전혀 받지 못했고, 조리병, 행정병, 해군의 연안 요원까지 전부 전투에 투입될 정도로 상황이 긴박했다고 한다. [23] 당연한 것인데, 티거의 88mm 주포는 육상에서야 공포의 전차포였지만 해군에게는 잠수함 덱건이나 전간기 함선용 대공포 수준의 작은 구경이었다. 관통력 자체는 장갑이 거의 없다시피한 구축함의 선체를 뚫고도 남을 수준이지만, 문제는 포탄 작약량이 한참 작아서 구축함 상대로 함교나 탄약고 등을 우연히 직격시키는 게 아닌 이상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가 없었다. 구축함과 비교해도 이 정도인데 한 체급 더 높은 경순양함 상대로는 말 할 것도 없을 수준이다. [24] 지옥도라 불리는 이오지마 전투의 첫날 상륙전에서 미 해병대 2,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젤라 전투의 사상자와 비슷한 숫자 젤라 전투의 사상자가 시칠리아 전역에서 연합군이 입은 가장 큰 피해다. [25] 1차 공수작전 편제 : 제505공수보병연대, 제504공수보병연대 3대대, 제456공수야전포병대대, 제80공수대공대대 D 포대, 제307공수공병대대 B중대 [26] 2차 공수작전 편제 : 제504공수보병연대(3대대 제외), 제376공수야전포병대대, 제307공수공병대대 C중대 [27] 82공수사단 부사단장인 찰스 키런스 주니어 준장은 이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육해군 대공포 부대의 오인 사격으로 인해 바다로 추락해 실종되었으나 익사하는 걸 보니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2개월 반 동안 부사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1943년 10월 제임스 M. 개빈이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505연대 1대대장이자 최연소 중령이였던 아서 F. 고럼도 티거의 주포로 인해 전사했다. [28] 이 사건은 패튼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 이는 항목 참조. 이 아군 오사는 메달 오브 아너: 에어본에서도 묘사된다. [29] 위의 피해 규모만 참고해도 알겠지만 전혀 근거없는 편견이었다. 어찌 보면 영국군보다 훨씬 잘 싸웠다. [30] 즉, " 팔레르모 먹지 마!" [31] 격전지가 능선이면 항상 붙는 별명이다. [32] 이름을 보면 유추하겠지만 산이다. [33] Private. [34] 이러한 반목이 이후 작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저 개인적인 반목이라고 봐도 좋다. [35] 선두에서 먼저 강하해 후발대의 강하 지점을 확보하고 표시하는 조. [36] 해당 학살을 주도한 관련자들은 패튼의 강경한 발언을 자신들의 학살 행위의 근거라고 주장했지만 조사단은 패튼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