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흠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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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삼흠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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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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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1994 |
투수 마일스톤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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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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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1983~1992) 1987년 / 124승 |
최동원 (1983~1990) 1990년 / 103승 |
선동열 (1985~1995) 1990년 / 146승 |
장호연 (1983~1995) 1993년 / 109승 |
윤학길 (1986~1997) 1994년 / 117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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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삼흠 (1985~1996) 1996년 / 106승 |
이강철 (1989~2005) 1996년 / 152승 |
조계현 (1989~2001) 1996년 / 126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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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1985~2000) 1998년 / 126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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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철 (1992~2009) 1999년 / 161승 |
김상진 (1989~2003) 1999년 / 122승 |
이상군 (1986~2001) 2000년 / 100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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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한 (1997~2015) 2009년 / 123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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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1993~2012) 2009년 / 100승 |
박명환 (1996~2015) 2010년 / 103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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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삼 (2006~2020) 2015년 / 121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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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KBO 리그 타자 마일스톤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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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번 | → |
정삼흠 (1985~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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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현 (1990~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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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삼흠 鄭三欽 | Jeong Samhe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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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1년 11월 5일 ([age(1961-11-05)]세) |
경상남도 고성군[1][2]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대구동촌초등학교 (졸업) 명지중학교(서울) (졸업) 명지고등학교 ( 졸업)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 경제학 81 / 중퇴[3])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 입단 | 1985년 1차 지명 ( MBC) |
소속팀 |
포항제철 야구단 (1984) MBC 청룡- LG 트윈스 (1985~1996) |
지도자 |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1997)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1998)[4]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1998~2001)[5]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2001)[6] LG 트윈스 2군 재활코치 (2002~2003)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4~2006) 부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8) 장쑤 호프스타즈 총괄코치 (2016~2017) |
해설위원 | SUPER ACTION 야구 해설위원 (2004) |
[clearfix]
1. 개요
前 KBO 리그 선수. 포지션은 투수. 야간 경기에 강해서 부엉이라는 별명이 있다. 안경 쓴 게 부엉이를 닮아서 지어졌다는 말도 있는데 꽤나 닮았다.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지금은 야구부가 존재하지 않는 명지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7] 문제는 명지고 야구부가 당시 고등학교 야구부들 중에서는 약체였다는 것. 그래서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81학번)에 진학하고 난 뒤 투타를 오가며 열심히 뛰었음에도 선동열-안언학- 한영준 등의 더 힘세고 강했던 유망주급 동기들에 묻혔다.[8]거기다 이미 들어와 있던 선배들, 그리고 그 뒤로 들어오는 후배들에게도 치이던 정삼흠은 팔꿈치 부상으로 신음해야 했고, 이것은 정삼흠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정삼흠은 1983년 이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를 중퇴하고 1984년 일종의 파견 형식으로 한국실업야구 팀 포항제철 야구단에 입단해 실업 신인왕을 수상하고 1985년 드래프트에서 MBC 청룡에 입단하게 된다.
2.2. MBC 청룡
첫 해에 선발과 계투를 겸업한 정삼흠은 무려 192이닝을 소화한다. 이 후유증 때문인지 2년차에는 부진했고, 3년차인 1987년부터 다시 선발투수로 자리를 잡는다. 고려대 동기인 선동열과의 취중 대결도 이 때 벌어졌는데, 1987년 9월 2일 경기를 앞두고 둘이서 술을 왕창 마신 다음[9] 취한 상태로 등판. 그리고 그 결과 정삼흠은 7이닝 5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고, 선동열은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후 “새벽까지 아무리 먹여도 다음 날 보면 싱싱하니, 결국 나만 망가졌지 뭐.”라고 회고하였다. #[10]
1988년 시즌 종료 후 새로 취임한 배성서 감독이 강압적인 스파르타 훈련을 강행하자,[11] 이에 반발해서 여기가 공산당입니까?라는 공개 발언으로 항명하기도 했다.[12][13] 이런 하극상 때문에 1989년은 시즌 후반부가 되어서야 겨우 출장했을 정도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배성서 감독은 선수단과의 갈등과 성적 부진으로, 시즌 종료 후 백인천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여담으로 1989년 9월 24일 열린 해태 타이거즈와의 동대문 더블헤더 2차전에서 세이브[14]를 거뒀는데, 이 경기는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KBO 리그 경기였다. 따라서 정삼흠이 동대문야구장에서의 마지막 KBO 리그 세이브 투수가 된 셈.
2.3. LG 트윈스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한 럭키금성은 팀명을 " LG 트윈스"로 바꾸었고, 백인천이 선수들의 지지를 받으며 첫 감독이 되었다. 백인천은 정삼흠에게 고정 마무리 투수 자리를 주었고, 8승 23세이브를 거두며 기대에 보답했다. 그리고 첫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2차전(연장 끝에 10회말 밀어내기 승리)을 제외한 나머지 3경기에서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다.[15] 마지막 4차전에서 삼성의 이종두를 삼진으로 잡고 우승의 순간을 마운드에서 함께 했던 것도 정삼흠이었다.[16]
왼쪽부터 정삼흠, 노찬엽, 김용수, 김상훈
그 후 1991년부터 1994년까지 4년 연속으로 두자릿수 승수를 거두며 선발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1995년 163이닝에 8승 9패, 3.81의 ERA로 스탯이 하락했다. 전반기에는 다소 부진하다가 후반기에 페이스가 돌아왔지만 유독 그가 나오는 날에 득점지원이 적었다.[17]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LG는 2승4패로 탈락했지만 그래도 그가 선발등판한 2경기에서는 모두 이겼다.[18][19]
1996년 4월 28일 광주 해태전에서는 통산 6번째로 100승을 달성했다. 이상훈이 척추분리증으로 이탈하고 김기범이 부진에 빠진 가운데 1선발 역할을 하며 김태원과 함께 무너진 선발진을 이끌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전 전반기 8승5패를 올리며 1선발 역할을 충실하게 했지만 후반기에는 승리 없이 3패만을 떠안았고 그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20][21]
후문으로는 사실 2-3년 더 뛸수 있었는데, 이후의 감독직을 노리고 코치경력을 쌓기 위해 일찍 은퇴했다고 한다. 코치를 거부하고 현역을 연장하려던 김용수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통산 성적은 12시즌 106승 121패 47세이브 1,894.2이닝[22] ERA 3.62 50완투 11완봉승. 노송 김용수가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정삼흠도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맹활약했고 2번의 우승을 견인한 핵심 멤버였다.
LG 최전성기의 대표 투수진이었던 김용수, 이상훈, 김태원, 정삼흠 4인방[23] 중 한 명.
특이한 점으로 포스트시즌이나 잠실 라이벌 OB, 당대 최강팀 해태에게 강했던 빅 게임 피쳐지만 이상하게도 태평양, 쌍방울, 빙그레 등 약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패전이 많았다. 다만 LG의 마지막 우승 시즌인 1994년에는 태평양을 상대로 정규시즌 4경기 4완투승(1완봉), 한국시리즈 포함 5완투(2완봉)을 기록하기도 했다.
3. 지도자 경력
현역에서 깨끗하게 물러난 정삼흠에게 LG 트윈스는 코치직을 제안했고, 정삼흠은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트윈스가 기대한 만큼의 실적을 내지 못한 채 LG를 떠나게 되었다.[24] 당시 외야수로 뛰던 심재학에게 투수 전향을 꼬드겨서 애매해지게 만든 것에도 책임이 있다.[25][26] 물론 천보성감독의 지시가 있긴 했지만. 심재학 항목 참조.2004년에는 SUPER ACTION에서 일본프로야구 해설을 하기도 했으며, 이후 신일고, 부천고 감독을 지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선수 스카우트와 관련한 비리 문제로 구속되었던 일로 인해 사실상 지도자로 다시 서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2012년 12월 현재 성남 분당구 야탑동의 한 야구교습센터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포착되었다.
2016년 10월 현재 중국야구리그 장쑤(江蘇) 천마팀에서 총괄코치로 활동 중이며 내년에 4년 정식계약을 체결하기로 되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2017년 5월 초 팀 운영과 성적을 둘러싼 장쑤성 측과의 시각차가 주요 원인으로 인해 퇴임했다.
2019년부터 이종도와 함께 분당구 오리역 근처에서 연습장을 하고 있다.
2019년 이후 성남시 SB리그 토요 루키리그( 사회인야구 4부)에서 뛰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소속팀 로스터
2023년에는 사회인야구에서 8경기 1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4. 플레이 스타일
LG 트윈스가 "신바람 야구"를 이끌며 승승장구하던 1990년대의 에이스로, 뒤늦게 터진 김태원, 신인 이상훈[27], 소방수 김용수[28]와 함께 LG 트윈스의 마운드를 이끌었다. 최고 145km/h 내외의 빠른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었지만 사실 평균 구속은 138km/h 전후다.[29]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신문 기록지에 기자들이 그날의 최고구속을 써주는데[30] 빠른 구속이 찍혀서 나오는게 좋으니까 주자 없을 때 있는 힘껏 패대기를 치면 144나 145 정도가 나와서 그렇게 던졌다"고 했다. 전성기 때에는 체인지 오브 페이스를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완급 조절에도 능한 모습을 보였다.특유의 심리전과 체인지 오브 페이스 덕분에 90년대의 두뇌파 에이스 하면 빠질 수 없는 투수이기도 하다. 장호연- 양상문 이후 KBO 아이큐 피처의 대표주자.[31]
박재벌에게 약했으며 박재벌이 1시즌에 치는 안타 중 절반을 정삼흠에게 뽑아냈고 정삼흠은 박재벌에게 3연속 몸에 맞는 볼을 던진적이 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박재벌이 이 일화를 설명했고 둘은 같은 해 은퇴했으며 지금도 종종 만난다고 한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1985 | MBC 청룡 | 41 | 192⅔ | 9 | 12 | 5 | 0 | 3.13 | 169 | 84 | 99 |
1986 | 18 | 52⅔ | 1 | 2 | 1 | 0 | 4.61 | 57 | 38 | 21 | |
1987 |
33 (4위) |
195⅓ | 6 | 13 | 2 | 0 | 2.86 | 171 | 80 |
85 (5위) |
|
1988 | 27 | 139⅔ | 5 | 16 | 0 | 0 | 5.67 | 163 | 75 | 43 | |
1989 | 21 | 100⅔ | 5 | 7 | 3 | 0 | 3.67 | 92 | 51 | 37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ERA | 피안타 | 사사구 | 탈삼진 |
1990 | LG 트윈스 | 55 | 168⅓ | 8 | 9 |
23 (2위) |
0 | 2.78 | 133 | 66 | 85 |
1991 | 39 | 180⅔ | 12 | 15 | 8 | 0 | 4.18 | 176 | 59 | 114 | |
1992 |
46 (2위) |
180⅓ | 14 | 11 | 5 | 0 | 4.04 | 172 | 79 |
128 (5위) |
|
1993 | 30 |
198⅔ (2위) |
15 (2위) |
11 | 0 | 0 | 2.99 | 184 | 64 | 93 | |
1994 | 27 | 186⅓ |
15 (5위) |
8 | 0 | 0 | 2.95 | 173 | 54 | 76 | |
1995 | 26 | 163 | 8 | 9 | 0 | 0 | 3.81 | 154 | 72 | 82 | |
1996 | 25 | 136⅓ | 8 | 8 | 0 | 0 | 4.29 | 139 | 68 | 76 | |
통산 | 12시즌 | 388 | 1,894⅔ | 106 | 121 | 47 | 0 | 3.62 | 1783 | 790 | 939 |
6. 관련 문서
[1]
#
[2]
대구광역시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청소년이 된 후 서울로 상경했다.
[3]
1983년 이후 중퇴했다.
[4]
~6월 8일
[5]
1998년 6월 9일~2001년 4월 15일
[6]
4월 16일~
[7]
보통 한국프로야구 선수들이 초~중학교 때부터 야구에만 몰두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정삼흠의 경우는 대단히 늦은 편이다.
[8]
나중에 정삼흠이 프로에서 나름 활약하자,
고려대학교 고위 관계자가 야구팀 코칭스텝에 "저런 재목감을 왜 4년간 썩힌거냐?"며 아쉬워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9]
MBC 청룡
감독이
선동열의 컨디션을
영 좋지 않게 만들려고 지시했다고 하는 소문도 있다. 그러나 인과 관계가 제대로 확인된 건 아니니, 설레발은 금물.
[10]
그런데 다른 말로는 정삼흠이 7이닝 2실점을 했다거나 5실점 완투패를 했다거나 심하게는 조기강판을 당했다고도 한다. 서로 음주등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상대편인 선동열에 대한 증언은 9이닝 완봉승을 거뒀다. 딱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일단 당시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1987년 9월 2일 경기에서만 놓고 보면 정삼흠이 5실점을 당했다.
[11]
참고로
배성서 감독은
이현세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캐릭터인
손병호 감독의 실제 모델이다.
[12]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있는데,
김재박,
이광은,
신언호 등 고참 선수들이 배성서 감독의 강압적인 훈련을 꺼렸고, 당시 주장이던 김재박은 배성서가 자신의
영남대 시절 스승이었기 때문에 직접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신진급인 만만한 정삼흠을 사주하여 항명 사태를 일으켰다는 루머도 있다.
[13]
여기서 문제가 됐던 것은 '공산당'이라는 단어 선택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평안북도 출신의
배성서는
진짜 공산당이 싫어서 남쪽으로 내려온 인물이다. 더구나 공산당 발언이 등장했던 1980년대 말은 여전히
레드 컴플렉스가 상당했던 시절이다. 그런 시기에 공산당을 혐오하는 사람에게 공산당 당수로 비유했으니
배성서 본인의 기분이 매우 나빴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배성서의 아들이 바로 케네스 배로,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그 사람이다. 아들이 풀려났다는 소식에 배성서 본인은 "다시는 북한에 못 가게 막겠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
[14]
승리투수는
김태원이다.
[15]
한국시리즈 1차전은 팀이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 경기 감각을 익히는 차원에서 등판한 것이다.
[16]
즉 LG의 첫 번째
헹가래 투수.
[17]
후반기에는 이광환 감독의 3일 휴식 4인 선발 등판 간격이라는 무리한 운영도 원인이었다.
[18]
이상훈이 나온 2경기에서 패배한 것이 탈락의 원인이었다.
[19]
이상훈이 나온 경기도 이겼으면 한국시리즈에 올라갔고 우승했을지도 모른다.
[20]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서 자신의 최다패 기록을 경신한다.
[21]
현역 마지막 승리경기는 1996년 7월 14일 잠실 해태전으로 해태의 에이스
이대진을 상대로 승리투수가 됐다.
[22]
은퇴당시에는 KBO리그 통산 1위 기록이었다. 그 후 여럿이 이 기록을 추월해 2023시즌 종료 후에는 통산 11위 기록이다.
[23]
90년에는 김기범이 힘을 보탰고, 94년 우승에는 인현배가 있었다. 다만 위의 네명은 확고부동한 에이스 급들.
[24]
2003년
김재현이 음주측정 거부로 입건 되었을때 김재현의 차량에 같이 동승했었는데, 이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시즌 후 잘렸다.
[25]
커리어를 망쳤다는건 지나친 비약이다. 당시 심재학은 분명 기대치만큼 성적을 내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많은 팀으로 트레이드를 당했다. 심재학은 고교시절까지 투수경험이 있었으며 타자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길게 억지로 투수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다. 김광삼처럼 계속 투타를 왔다갔다 한 것도 아니었다. 2020년 현재 백승현이 팀의 권유로 유격수에서 투수로 전향중인데 이런 일은 자기 포지션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는 선수에게 심심치않게 종종 일어난다. 심재학의 경우 부진한 시절 잠시 투수를 했다가 다시 타자로 돌아와 꽤나 나중에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기 때문에 커리어를 망쳤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26]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대부분의 야수의 투수 전향은
외국인타자의 존재 등으로 자리가 없거나 혹은
본인이 주로 보는 야수 포지션에서
1군 레귤러급이 되지 못한 경우 일어난다. 심재학이 기대만큼이 아니었다고해도 1군 레귤러급이 아니었냐면 그 또한 아니었고 아마가 프로지명이 되는 것도 어렵지만 지명 이후 1군 레귤러급 포지션 플레이어가 되는것도 어려운 일인데 심재학은 공격에서는 충분히 1군 레귤러급은 되었으며 수비는 발군급인 외야수였고 이런 선수를 투수로 전향시키는건 실책이다. 실제로 타자 재전향하자마자 이적 후 구장이 바뀐 영향도 있었겠지만 20홈런에 OPS .840을 넘기며 활약했다. 생각보다 선수에게 타격이 크지 않았고 커리어를 망칠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다고 해도 실제로 포지션 변경한 선수들은 부상 위험도 높고 또 심재학 본인도 독한 진통제에 의존했음을 고백했다. 심재학이 투수 전향 당시 큰 부상을 당하지 않은건 천운일 뿐이다. 그리고 선수가 야수로 활약할 때는 복용하지 않던 진통제를 투수로 뛰었기 때문에 복용하게 된 경우 신장이나 간 등 체내 독소 분해와 관련된 장기에 누적되는 무리는 온전히 선수 본인만이 감내해야만 하는 위험부담이며 이건 강권한 감독 및 코칭스태프가 같이 책임질 수 있는 부작용이 절대 아니다. 게다가 해당 시즌이 종료된 후 투수전향에 실패해서 타자로 재전향해 가치저하가 발생한 선수를 역시 1군 레귤러급은 충분히 수행할 가치가 있는 투수였던 최원호를 내줄만큼의 외야수로 타팀에서 평가했다는 점에서 '트레이드 카드로서의 활용' 측면에서도 실책이 맞았다.
[27]
두 선수와의 공통점이 있다면 LG 시절 장발로 마운드에 등장했던 적이 있었다.
[28]
1990년 첫 우승 당시에는 김용수가 선발, 정삼흠이 마무리였다. 한국시리즈 4차전 마지막을 삼진으로 잡고 포효한 것도 정삼흠.
[29]
참고로 1980~90년대 투수들의 평균 구속은 130km/h대 중반이었다.
[30]
그 당시 스포츠 신문 기록지들은 승패와 최고구속 수치를 같이 적어주곤 했다.
[31]
기자들과
훌라를 쳤는데 계속 이기자 기자들이 서로 짜고 쳤는데, 거기서도 이기자 기자들이 두뇌파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는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