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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
잉그리드 버그먼 INGRID BERGMAN |
|
분야 |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759 Hollywood Blvd. | }}}}}}}}} |
}}} ||
<colbgcolor=#4e5c34><colcolor=#fff> 잉그리드 버그만 Ingrid Bergman |
|
|
|
출생 | 1915년 8월 29일 |
스웨덴 스톡홀름 | |
사망 | 1982년 8월 29일 (향년 67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배우 |
신장 | 175cm |
활동 | 1931년 – 1982년 |
학력 | 스웨덴 왕립 드라마 스쿨[1] |
부모 |
아버지 유스투스 사무엘 배리만(1871 ~ 1929) 어머니 프리델 배리만(1884 ~ 1918) |
배우자 |
페터 린드스트롬(1937 결혼 – 1950 이혼) 로베르토 로셀리니(1950 결혼 – 1957 이혼) 라스 쉬미트(1958 결혼 – 1975 이혼) |
자녀 |
딸 피아 린드스트롬(1938년생) 아들 로베르토 로셀리니(1950년생) 딸 이조타 잉그리드 로셀리니(1952년생) 딸 이자벨라 로셀리니(1952년생) |
서명 | |
링크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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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상
아카데미상 7회 후보 지명 및 여우주연상 2회, 여우조연상 1회 총 3회 수상, 에미상 2회 수상, 토니상 1회를 수상으로 영화, TV, 뮤지컬 부문의 3관왕[2]을 달성하고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175cm의 큰 키[3]와 뚜렷한 이목구비로 당대에 엄청난 인기를 끌어 비비안 리, 에바 가드너, 바버라 스탠윅과 함께 1940년대를 상징하는 여배우로 자주 거론된다. 또한 5개국어를 사용하여 다양한 나라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다.[4]
3. 생애 및 활동
스웨덴어로는 잉리드 배리만[5]으로 발음된다. 하지만 미국에선 무명 시절부터 영어식인 잉그리드 버그먼으로 발음했다.스톡홀름에서 스웨덴인 아버지와 결혼 전 성이 아들러(Adler)인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Adler라는 성씨를 쓰는 영미권 사람들 중에 10에 9는 독일계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다 보니 버그먼이 독일계 유대인 혼혈이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었고, 버그먼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었으나, 딸 이자벨라 로셀리니가 2019년 Finding Your Roots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DNA 테스트를 했는데 유대인 혈통이 나오지 않았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3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어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 17세 때 스웨덴 최고의 명문인 왕립 드라마 스쿨(Dramatens elevskola)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영화계에 투신해 스웨덴과 독일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유럽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버그먼의 배우 생활은 1936년에 출연한 < 인터메조>로 새 길이 열리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버그먼을 눈여겨보아 미국으로 초청한 것. 이에 응한 버그먼은 미국으로 건너와 1939년 레슬리 하워드와 함께 <인터메조>의 개작을 찍으며 할리우드에 데뷔한다.
그러나 외국에서 건너온 무명 여배우를 써주는 영화사는 없었고, 버그만은 <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외엔 변변한 출연작이 없는 상태였다. 한편 이 영화를 찍을 때 상대역이었던 유부남 스펜서 트레이시와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2년 셀즈닉이 워너 브라더스에 버그먼을 임대해주면서 출연하게 된 < 카사블랑카>로 세계적으로 일약 스타가 되고 이후 찍은 영화들 역시 호평을 받으며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들 중 한명이 되었다.
당시 버그먼의 인기는 만인의 연인 수준으로, 1943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영화화할 때에는 헤밍웨이가 직접 주인공 마리아 역으로 버그먼을 지명했다. 헤밍웨이는 아예 원작 소설의 여주인공을 버그만에 기초하여 구상했다고도 밝혔다. 한편 이 영화를 찍으면서 버그만은 상대역인 게리 쿠퍼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다.
이 시기 앨프리드 히치콕과 여러 영화를 찍었으며, 1944년 가스라이팅의 어원이 된 < 가스등>에 샤를 부아예의 상대역으로 출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버그만은 히치콕이 "어떻게 영화 안에서 존재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빛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1945년 히치콕은 < 오명>을 찍으면서 "버그먼조차도 몰랐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내줬다." 히치콕은 버그먼을 수제자격으로 뒀을 뿐만 아니라 버그만의 자녀들에게도 잘 대해줬다고 한다. 또한 이 영화는 뿐만 아니라 "오만하고 뻣뻣할 거라고만 생각했지만"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평생의 친구 케리 그랜트를 만나게 해준 기회이기도 했다. 그랜트는 현장에서 버그먼에게 "그 어떤 배우보다도 친절하게 대해줬다." 1957년에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고도 아이들과 유럽에 체류하고 있어 가지 못할 때 대리 수상해준 것도 그랜트였다.
< 성 메리 성당의 종>(1945)의 수녀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버그먼은 < 잔 다르크>(1948)로 대중의 신망을 굳히게 된다. 버그먼은 무대에서도 잔 다르크 역을 했다.
이 즈음 버그만은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Germania anno zero)>(1948)을 보고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로셀리니 씨, 당신의 영화 <
무방비도시>(Roma città aperta, 1945)와 <전화의 저편>(Paisan, 1946)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일어는 조금 할 줄 알고,
프랑스어로는 의사 전달이 가능하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사랑해'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버그만은 정말로 로셀리니의 곁으로 달려가 그의 영화에 출연하며 사랑에 빠져 임신을 했다. 문제는 로셀리니가
유부남이었고 버그먼 역시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였다는 것. 이
불륜 사건은 1940년대 후반 미국에 파란을 일으켰다.당시 할리우드는 지금보다 불륜이 더 성행해서,[6]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목록에 오른 50명 중 셜리 템플, 제임스 카그니, 프레드 아스테어+1 팀 막스 형제 이렇게 단 세 명+1 팀만 제외하곤 전부 불륜을 저질렀다. 임신을 한 게 문제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불륜 상대를 임신 시켜 사생아를 뒀거나 낙태를 종용했던 유명 남자 배우들, 몰래 낙태를 감행했던 여자 배우들 역시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당대 연예 기자들은 언제나 이를 다 알고 있었다.
결국 불륜이 포장돼 유야무야 넘어가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그저 언론에서 작정을 하고 끌어내리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었는데, 버그만의 경우엔 외국인이었다는 점과 칼럼니스트 헤더 하퍼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하퍼는 기본 독자수가 3500만 명에 달하는, 그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연예계 칼럼니스트였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제작자들이 벌벌 떤다"는 본인의 자랑이 전혀 허황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퍼는 1940년대에 버그먼의 경력을 강력하게 지원하는 기사들을 썼고, < 성 메리 성당의 종>(1945)이나 < 잔 다르크>(1948)는 하퍼가 따다준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7]
그래서 임신 추정 기사들이 나올 때 버그만이 이를 부인하자, 하퍼는 그 말만 믿고 열렬하게 임신을 부인하는 기사를 썼는데, 하필 당시 하퍼와 앙숙지간이었던 루엘러 파슨스[8]가 동시에 로스 엔젤레스 이그재미너(Los Angeles Examiner) 1면에 버그먼의 임신 확정 특종을 터뜨렸다.
파슨스에게 이걸 제보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워드 휴즈였다. 버그만이 찍기로 약속했던 영화를 취소하자 분풀이를 한 것이었다. 이는 매우 치졸한 처사였는데, 휴즈 본인이야말로 혼외 관계에서 여러 어린 여성들을 임신 시키고 반강제로 낙태하게 만든 뒤 돈과 권력으로 무마했던 걸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특종을 읽고 충격을 받은 하퍼는 유부녀인 버그만이 유부남의 사생아를 가졌다고 비난하는 데 앞장서게 됐고, 그로 인해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다. 성녀 잔 다르크, 수녀 같은 역할들을 도맡아와 청순하고 고결한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것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앨프리드 히치콕도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버그먼은 히치콕을 높이 평가했고 히치콕 역시 버그만을 자신의 작품들에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특별하게 대우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감독을 찾아 떠나버렸으니. 이후 페르소나 자리가 그레이스 켈리에게 넘어갔지만 버그먼 정도의 효과를 낳았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결국 버그만은 할리우드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휴즈처럼 당시 재계, 정치권, 그리고 할리우드 권력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륜을 저지르고 다니며 사생아를 양산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활동했던 것에 비추어보자면, 지나치게 불공정한 엄벌이었다.
1949년부터 이탈리아에서 로셀리니와 함께 영화를 찍었지만 연달아 흥행에 실패했다. 게다가 로셀리니는 버그만이 자신 이외의 감독과 작업하는 것을 매우 반대해서 둘 사이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다만 이때 찍은 <스트롬볼리>나 <이탈리아 여행> 같은 영화들은 소위 모더니즘 영화의 시초라 불리며 재평가받게 된다.
1956년 로셀리니가 인도에 촬영을 하러 간 사이에 < 아나스타샤>에 출연하며 6년만에 할리우드로 복귀하였다.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감독 아나톨 리트박이 버그만이 아니면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촬영할 수 있었다. 당시 최고의 TV쇼였던 "에드 설러번 쇼"에서 에드 설러번[9]은 버그만을 초대할지 말지를 "시청자 여러분의 뜻에 맡기겠다"면서도 "이 정도면 충분히 속죄하지 않았냐"고 말하기도 했다.
< 아나스타샤>로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복귀했지만, 이를 계기로 1957년 로셀리니와 이혼하였다. 한편 로셀리니는 이혼 직후인 1959년 <로베레 장군(Il generale Della Rovere)>으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말년에는 영화와 TV 연출을 병행했다.
1958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스웨덴인 연극 연출가 라스 쉬미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면서 로마에서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연극에 많이 출연하였으며 전세계 순회 공연을 하고 토니상 등을 수상하였다. 1972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으나 계속 연기에 매진하여 1974년 출연한 < 오리엔트 특급 살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75년 세 번째 남편과 이혼하였고 이혼 후에는 런던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978년 마지막 영화 출연작인 잉마르 베리만의 < 가을 소나타>에서 명연기를 펼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노화의 증거를 보여주자는 베리만의 설득을 받아들인 버그먼은 이 영화에서 화장을 다 지우고 실제 삶에서의 자신을 드러냈다. 버그먼이 "내 기존 팬들이 다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자 베리만은 "내가 (이 영화로) 새로운 팬을 얻어다줄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정확히 67세 생일이던 1982년 8월 29일에 사망했다. 그것도 친구들과 파티를 개최한 뒤에 말이다. 유작은 TV 영화 <A Woman Called Golda>. 골다 메이어를 그린 이 영화에서 버그만이 맡은 배역은 당연히 골다 메이어였다.
4. 주요 작품
<rowcolor=#ffffff> 연도 | 작품 | 배역 | 비고 |
1936 |
인터메조 (Intermezzo) |
아니타 호프만 | 구스타프 몰란데르 연출 |
1938 |
Dollar (달러) |
율리아 발사 | 구스타프 몰란데르 연출 |
En kvinnas ansikte (여자의 얼굴) |
안나 홀름/안나 파울손 |
구스타프 몰란데르 연출 1941년 조운 크로퍼드 주연으로 개작 |
|
1939 |
En enda natt (하룻밤) |
에바 벡크만 | 구스타프 몰란데르 연출 |
이별 (Intermezzo : A Love Story) |
아니타 호프만 |
1936년작 개작 레슬리 하워드 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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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
Juninatten (6월 밤) |
쉐스틴 노르드백/사라 노르다노 | 패르 린드배리 연출 |
1941 |
천국으로 가는 장의사 (Rage in Heaven) |
스텔러 버건 | 로버트 몽고메리, 조지 샌더스 출연 |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아이비 피어슨 |
빅터 플레밍 연출 스펜서 트레이시, 라나 터너 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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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카사블랑카 (Casablanca) |
일자 런드 |
마이클 커티즈 연출 험프리 보가트 출연 |
1943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
마리아 |
샘 우드 연출 게리 쿠퍼 출연 |
1944 |
가스등 (Gaslight) |
폴러 앨쿼스트 앤턴 |
조지 큐코어 연출 샤를 부아예 출연 |
1945 |
성 메리 성당의 종 (The Bells of St. Mary's) |
메리 베너딕트 수녀장 |
리오 맥캐리 연출 빙 크로즈비 출연 |
망각의 여로 (Spellbound) |
칸스턴스 피터슨 |
앨프리드 히치콕 연출 그레고리 펙 출연 |
|
사라토가 본선(本線) (Saratoga Trunk) |
클리오 듈레인/샹프레 백작부인 |
샘 우드 연출 게리 쿠퍼 출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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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오명 (Notorious) |
얼리시어 후버먼 |
앨프리드 히치콕 연출 케리 그랜트, 클로드 레인스 출연 |
1948 |
개선문 (Arch of Triumph) |
조운 마두 |
루이스 마일스톤 연출 샤를 부아예 출연 |
잔 다르크 (Joan of Arc) |
잔 다르크 | 빅터 플레밍 연출 | |
1949 |
염소자리 (Under Capricorn) |
레이디 헨리에터 플러스키 |
앨프리드 히치콕 연출 조셉 코튼 출연 |
1950 |
스트롬볼리 (Stromboli) |
카린 비욘슨 | 로베르토 로셀리니 연출 |
1952 |
유로파 51 (Europa '51) |
아이린 지라르 | 로베르토 로셀리니 연출 |
1953 |
Siamo donne (우리, 여자들) |
본인 |
"Ingrid Bergman"편 로베르토 로셀리니 연출 |
1954 |
이탈리아 여행 (Viaggio in Italia) |
캐서린 조이스 |
로베르토 로셀리니 연출 조지 샌더스 출연 |
불안 (Angst) |
아이린 와그너 |
로베르토 로셀리니 연출 슈테판 츠바이크 원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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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엘레나와 남자들 (Elena et les hommes) |
폴란드 공주 엘레나 소코로프스카 |
장 르누아르 연출 장 마레 출연 |
아나스타샤 (Anastasia) |
아나 코이프/아나스타지아 | 율 브리너, 헬런 헤이즈 출연 | |
1958 |
무분별 (Indiscreet) |
애너 캘먼 |
스탠리 도넌 연출 케리 그랜트 출연 |
여섯 번째의 행복 (The Inn of the Sixth Happiness) |
글라더스 에일워드[10] | 로버트 도냇, 쿠르트 위르겐스 출연 | |
1961 |
이수 (Goodbye Again) |
폴라 테시에 | 이브 몽땅, 앤서니 퍼킨스 출연 |
1963 |
Hedda Gabler (헤다 가블레르) |
헤더 가블러 |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랠프 리처드슨 출연 |
1964 | The Visit | 칼라 재커나시안 | 베른하르트 비키 연출 |
노란
롤스 로이스 (The Yellow Rolls-Royce) |
거다 밀렛 |
오마 샤리프 출연 앤터니 애스퀴스 연출 |
|
1969 |
선인장 꽃 (Cactus Flower) |
스테퍼니 디킨슨 | 월터 매사우, 골디 혼 출연 |
1970 |
봄바람 (Walk in the Spring Rain) |
리비 메러디스 | 앤서니 퀸 출연 |
1974 |
오리엔트 특급 살인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
그레타 올손 |
시드니 루멧 연출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
1976 | A Matter of Time | 루크레치아 산치아니 백작 부인 | 빈센트 미넬리 연출 |
1978 |
가을 소나타 (Höstsonaten) |
샬롯 안더가스트 |
잉마르 베리만 연출 리브 울만 출연 |
1982 |
A Woman Called Golda (골다라고 불린 여인) |
골다 메이어 | TV 영화 |
2021 |
아이 앰 알프레드 히치콕 (I Am Alfred Hitchcock) |
다큐멘터리 |
5. 여담
영국의 대배우 존 길구드는 "아, 불쌍한 잉그리드. 5개 국어를 하지만 그 중 어떤 언어로도 연기는 못한다네"라는 영국인 특유의 위트있는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본인도 할리우드 데뷔 4년차였던 히치콕의 < 오명> 에 출연했을 당시 영어 연기에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 실제로 스웨덴어를 제외하곤 해당 언어들을 모국어로 쓰는 사람의 입장에선 외국인 특유의 악센트 때문에 외국인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우며, 또 하나의 모국어인 독일어 역시 스웨덴어 억양으로 말했다.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특징이듯이,해당언어의 본토 사람들에겐 그 언어가 어색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이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영어 영화에선 북유럽인, 프랑스어 영화에선 동유럽인으로 나오는 식으로 해당 언어의 원어민 구사자가 아니라는 설정이 자주 들어갔다. 그럼에도 버그먼의 출중한 연기력은 그런 약점을 상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평생 잔 다르크를 연극에서 두 번, 영화에서 두 번 총 네 번 연기했다. 버그만은 어릴 때부터 평범한 소녀가 영웅이 되는 잔 다르크의 서사를 사랑했다고 하며 잔 다르크를 연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첫 잔 다르크 역인 < 잔 다르크>는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잔 다르크 역할을 맡았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으며[11]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인 동레미, 오를레앙, 랭스와 루앙을 방문했으며 동레미의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버그만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잔 다르크의 환생처럼 여겨서 당황했을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또한 잔 다르크의 고향 동레미를 굉장히 사랑했다고 한다. 다만 이 영화를 찍을 때 버그만이 이미 30대를 넘어서 10대 소녀인 잔 다르크를 연기한 게 어색하다는 평도 있다.
- 자녀들에 따르면, 버그만은 카메라는 편안하게 대했지만 무대공포증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연극에 출연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고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고.
- 출연작 <가을 소나타>(1978)를 연출한 잉마르 베리만과 성이 같지만 혈연 관계는 아니다.
- 데뷔 전 코가 너무 크다고 성형 권유를 받은 적이 있으나, 자신은 코가 맘에 든다며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여배우가 키가 너무 커서 [12] 성공하지 못할거라는 평가도 받았다고 한다.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에 미군 위문공연으로 유럽에 방문했다가 로버트 카파와 만나 연인이 되었다. 당시 버그먼은 첫 번째 남편과 혼인관계였다. 로셀리니 이전 연인이 카파였던 것. 버그만은 카파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카파는 전쟁터에서 자신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버그먼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 죽은 자신의 첫 애인 생각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예감대로 카파는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
-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었을 때도 복귀했을 때도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준 것은 배우 케리 그랜트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전술했듯이 이 당시 할리우드는 대다수 배우가 불륜 경험이 있던 시절인데, 많은 또래 배우들이 자신들은 대중에게 들통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젠체하며 버그만과 내외했던 것이다. 버그먼은 평생 함께 연기한 모든 남자 배우들 중에 그랜트를 가장 존경했다.
- 첫 남편 피터 린드스트롬과의 사이에서 딸 피아 린드스트롬을 두었고,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베르토 로셀리니[13], 쌍둥이 딸 잉그리드 이조타 로셀리니와 이자벨라 로셀리니를 두었다. 엄마를 닮은 이자벨라 로셀리니는 여배우로 활동했고 랑콤 전속 모델이기도 했다. 버그먼의 손녀이자 이자벨라 로셀리니의 딸 얼레트러 로설리니 위더먼 역시 랑콤 모델로 활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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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관계는 복잡했지만 자녀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줬으며 아무리 바빠도 같이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최선을 다하는 가정적인 어머니였다고 한다. 다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질 못하는 성격이어서 아이들과도 같이 살지는 못하고 항상 떠돌아 다녔다. 이런 버그먼의 행동을 자녀들은 이해하면서도 그리워 했다고 한다. 자녀들은 이부남매끼리도 사이가 좋아서 그녀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연락을 하고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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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작 <A Woman Called Golda>(1982)가 TV 영화였기 때문에 <
레이더스>(1981)의 포스터를 그린 바 있는 유명 삽화가 리처드 앰슬[14]이 TV 프로그램을 다루는 잡지 TV GUIDE의 표지를 위해 그해 버그만의 초상을 그린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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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잉그리드 버그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칸 영화제 포스터에 등장하였다. 또한 일기, 편지, 가족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Jag är Ingrid)>이 상영되었다.
2015년 칸 영화제 공식 포스터 |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포스터 |
6. 어록
나는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전부를 원할 뿐이다.
나는 성녀였다가, 창녀가 되었다가, 다시 성녀가 되었다. 단 한 번의 인생에서.
한 일은 후회되지 않는다. 하지 않은 일들이 후회될 뿐이다.
[1]
현재 스톡홀름 드라마 예술 아카케미(SADA).
그레타 가르보,
잉마르 베리만 등을 배출한 스웨덴 최고의 드라마 스쿨이다.
[2]
알 파치노같이 온갖 무대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하는 배우가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다.
[3]
초반엔 큰 키가 흠이었다고 한다. 잉그리드의 전기영화 <그녀,잉그리드 버그만>에서 말하길 한 남자가 자신에게 “키가 커서 배우 하기는 글렀네요.”라고 말해서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알아?”라고 생각했다고.
[4]
다만 후술될 내용과 같듯이, 다양한 언어를 쓰는 대신에 그 나라 본토 사람들이 듣기엔 어색한 발음이기 때문에 외국어 영화 출연 후에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5]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베리만.
[6]
비단 할리우드 뿐만이 아니라 사교계를 중심으로 상류층 전체에 이혼과 불륜이 매우 흔했다. 현재도 상류층 대다수의 결혼생활이 모범적이진 않으나 과거엔 빈도수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태가 부도덕했다.
[7]
경력이 크게 흔들리던 시절의
조안 크로포드에게도 강렬한 지지를 보내 업계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이었던 크로포드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바꿔놓았다. 하퍼는 고전 할리우드 시대를 다룬 드라마
퓨드의 중심인물 중 하나다.
[8]
Louella Parsons. 파슨스와 하퍼의 원한 관계는 매우 유명해서 이를 자세히 다룬 <Malice in Wonderland>(1985)라는 TV 영화까지 있다.
CBS 방영 당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파슨스 역이었고,
팀 로빈스가
조셉 코튼 역으로 나왔다.
[9]
Ed Sullivan.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평생 아내 한 사람에게만 충실했다.
[10]
Gladys Aylward. 1902 - 1970. 선교사.
[11]
영화의 작품성, 연기력 부분에서는 <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의 마리아 팔코네티가 최고의 잔 다르크로 여겨진다.
[12]
당시 잉그리드의 키는 같은 시대 남성들의 평균키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남자보다 확실히 키가 작고 아담한 ,여자다운 매력을 훨씬 더 강요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13]
불리는 이름은 아버지와 같지만 가운데 이름이 다르다.
[14]
Richard Amsel. 1947 -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