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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柳濯(1311 ~ 1371)
고려의 관료. 자는 춘경(春卿). 류청신의 손자.
2. 생애
용기와 지략이 있고 무예를 잘했으며, 문음으로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고려로 돌아와 감문위대호군이 되었다. 세 차례 승진해 고흥군에 봉해졌다가 원나라에서 합포만호에 임명했으며, 충정왕 때 도청의참리가 되어 추성양절익조공신의 칭호를 받았고, 찬성사로 승진했다.공민왕 때 전라도만호로 나가 군사를 정숙하게 거느렸고 공민왕이 옷과 술을 하사해 위로했다. 왜구가 만덕사를 약탈하자 류탁이 기병으로 추격해 포로들을 돌려보냈으며, 류탁이 진에 있을 때는 왜구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장생포 등의 곡을 지었고 공민왕이 소환해 찬성사에 임명되었으며, 좌정승으로 옮겼다가 파직되어 고흥부원군에 봉해졌고 수성양절익조보리공신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원나라에서 홍건적을 토벌하려고 남쪽으로 정벌하기 위해 장수를 구하자 염제신 등 40여 명과 함께 천거되어 원으로 갔으며, 토크토아를 따라 장사성을 공격해 전투마다 공로를 세웠다.
이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정사에 임명되었다가 어떤 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고흥후에 봉해졌다. 1371년에 신돈이 처형되면서 류탁도 신돈의 일당이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3. 대중매체(등장 작품)
MBC
신돈 (2005-2006 방송) 에서 배우 이종만(1937년 생, 주로 KBS 방송에 많이 출연하심)이 정승 류탁 역을 맡아 출연했다.
이종만 배우의 사극 출연작 :
KBS 1994 한명회 - 성종의 후궁 정귀인에 대한 협잡을 부린 점장이 역, 나중에 괴한에게 살해되어 시신이 대로변에 놓임 / 류자광(배우 손호균 역)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속으로 류자광을 비웃으며 그가 눈이 멀어 죽을 팔자라고 함. 당연히 이 대사는 류자광에게는 안 들리는 연출임.
KBS 1995 장녹수 - 연산군(유동근 배우 역) 시기의 정승 류순 역(무진년 위화도 회군공신, 태조 대 찬성사 류만수의 현손 ; 손자의 손자) ; 중종 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오름
KBS 1996-1998 용의 눈물 - 홍내관 역 ; 고려 조 시기부터 잔뼈가 굵은 대궐 고참격 내관이며, 조선 건국 이후 시종일관 태조 이성계를 옆에서 보좌함. 이성계가 양위 후... 나중에 동북면에 가서 조사의를 만날 때도 함께 따라감. 조사의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이성계에게 자신의 소신껏 바른 말(이제 그만 아들 태종을 용서하고 도읍으로 돌아갈 것 등)을 하여 조사의 부하들의 눈 밖에 남. 하지만 조사의(배우 차철순 역)는 태상왕 전하의 최측근 심복 내관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다며 내버려두라고 함.
조사의는 태상왕 이성계를 철저하게 신성시하며, 태상왕의 권위를 배경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함. 따라서 태상왕의 권위를 절대로 훼손하지 않으려고 하며 자신들의 모든 행동은 태상왕의 명령에 의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함
이전의 차사, 내관들과는 다르게 박순이 무사하게 떠난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빨리 뒤쫓아가서 죽이자는 동료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태상왕의 허락이 내린 후에야 손효종(배우 조춘 역) 등을 보내 박순의 뒤를 쫓게 함. 이성계는 박순이 용흥강을 이미 건넜으면 내버려 두고, 만약 아직 건너지 못했다면 죽여도 된다고 함.
이성계는 박순이 떠난 지가 꽤 되었으므로 당연히 강을 건너리라고 생각했지만, 운없게도 박순(반문섭 배우 역)이 도중에 배탈이 들어 한 친절한 백성(박종설 배우 역)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백성의 권유로, 아주 천천히 여유있게 거동함. 결국 용흥강을 건너기 위해 배에 오르기 직전 손효종에게 따라잡혀 죽임을 당함. 백성의 극진한 친절함이 오히려 박순을 죽음으로 내몬 셈임.
홍내관은 조사의의 거병 실패 후, 이성계를 따라 당시 도읍 개경으로 돌아가고.... 한양으로 재천도 이후 한결같이 노쇠한 이성계를 옆에서 모심. 이성계가 세상을 떠난 회차(1998년 2월 방송) 에서, 상왕 정종과 현왕 태종 형제가 나란히 팔에 불침을 맞는 연비 의식을 지켜봄. 이성계 승하 이후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음
KBS 1998-2000 왕과 비 - 김수온 역 ; 신미 스님(배우 양영준 역)의 남동생. 과거에 급제했지만 불교에도 관심, 조예가 있는 인물.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사가 시절부터 수양대군 부인 윤씨(후일의 정희왕후)와 자주 만나며 친밀하게 지냄. 정희왕후의 편에 서는 인물로 묘사됨
KBS 2000-2001 천둥소리 - 동인의 거두 김효원 역
SBS 2001-2002 여인천하 - 중종 임금 측근 내관 역
KBS 2002-2003 제국의 아침 - 고려 3대 황제 정종(왕요)에게 소위 사기를 친 사이비 도사로 출연
KBS 2006-2007 대조영 - 미모사의 할아버지 역
4. 류탁의 신도비명
양촌선생문집 제39권 비명류(碑銘類) 에 양촌 권근이 지은, '고(故) 고려국 문하시중 유공(柳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이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에게 보필의 대신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고흥(高興) 유공(柳公)이다. 일찍이 문음(門蔭)으로 원(元) 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숙위(宿衛)하였는데, 날쌔고 용감하기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귀국하여서는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에 임명되니, 이때 공의 나이 27세로 지원(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3년 정축(1337, 충숙왕6) 4월이었다. 몇 해 안 되어 세 번 전임하여 고흥군(高興君)에 봉해지고, 합포(合浦)ㆍ양광(楊廣)ㆍ전라(全羅)의 진무(鎭撫)를 거쳐 충목(忠穆)ㆍ충정(忠定) 두 임금을 내리 섬겼는데, 공민왕이 즉위하여서는 더욱 신임이 두터웠다.
지정 갑오년(1354, 공민왕3)에 순제(順帝)가 승상(丞相)인 탈탈(脫脫)을 파견하여 남쪽으로 고우(高郵)를 정벌하면서 우리나라에 징병(徵兵)할 적에, 공이 아장(亞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전공을 세우게 되었는데, 승상이 참소를 입음으로 말미암아 군사를 철수하고 귀국하였다. 을미년(1355) 2월에 좌정승 판군부(左政丞判軍簿)에 임명되고, 6월에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다.
병신년(1356)에 다시 문하시랑 평장사 판호부(門下侍郞平章事判戶部)가 되었다.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하여 임금은 남쪽으로 파천하고, 신민(臣民)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공은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호위해 가다가 안동(安東)에 어가를 머물고,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군사를 징집 파견하여 적을 토벌하고 옛 왕경을 수복하였으므로 제1등에 책훈(策勳)되었다.
병신년(1356)에 다시 문하시랑 평장사 판호부(門下侍郞平章事判戶部)가 되었다.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홍건적(紅巾賊)이 왕경(王京)을 함락하여 임금은 남쪽으로 파천하고, 신민(臣民)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공은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호위해 가다가 안동(安東)에 어가를 머물고,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군사를 징집 파견하여 적을 토벌하고 옛 왕경을 수복하였으므로 제1등에 책훈(策勳)되었다.
임인년(1362) 정월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임명되고, 계묘년(1363, 공민왕12) 봄에 도첨의정승 판전리(都僉議政丞判典理)를 제수함과 동시 추충병의 동덕보리 익조공신(推忠秉義同德輔理翊祚功臣)의 훈호를 더하였다. 그해 겨울에 반신(叛臣)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참소하여 얽어 넣자, 황제가 그 말에 현혹되어 서얼(庶孼) 덕흥군(德興君)을 세워 국왕(國王)을 삼고 호위병까지 보내왔다. 이때 공이 백관을 깨우쳐 장수를 보내 항전하게 하므로 덕흥군이 대패(大敗)하여 도망갔고, 황제가 최유를 잡아 보내오니 사형에 처하였다.
을사년(1365)에는 조사(詔使)가 왔는데 그 행동거지가 몹시 교만하여 재상으로 뵙는 자와는 더불어 앉지도 않으려 하며, 왕을 뵙는 데도 역시 오만하였다.
그러나 공이 마루에 오르자 조사가 매우 공손히 예로 접대하니, 첨서(簽書) 이색(李穡)이 동료들에게 말하기를,“시중공(侍中公)은 행동이 예도에 맞고 말이 이치에 맞으니, 화인(華人)들로부터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무신년 여름은 몹시 가물었다. 이때 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을 짓고자 역사(役事)를 크게 일으켰으나 수년이 되어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공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글을 올려 중지하기를 청하니, 왕이 노하여 공을 하옥하고 장차 죽이고자 우사(右使) 이색에게 명하여 대중(大衆)에게 효유(曉諭)하는 경고문을 짓게 하였다. 이색이,
“탁(濯)은 죽을 만한 죄가 없으므로 감히 글을 지을 수 없습니다.”
고 대답하자, 왕이 또 노하여 같이 하옥하였다.
우사가 울면서 왕에게,
“신의 우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왕께서 무죄한 대신을 죽임으로써 후세의 비난을 받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 둘 다 석방하였다. 신해년(1371) 가을에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되자 전날 공주의 영전(影殿) 역사를 중지하게 한 감정이 공에게 미쳐, 7월 18일에 청교역(靑郊驛)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 61세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 이것도 천명이리라.
27년 후 정축년(1397, 태조6) 겨울에 우리 태상왕(太上王 조선 태조)께서, 공이 그 아들 습(濕)을 위해 벼슬을 비는 꿈을 꾸었다. 태상왕이 꿈을 깨고 나서 이상히 여겨 공에게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고흥백(高興伯)을 추증함과 동시에 충정(忠靖)이란 시호를 내리고, 아들 습을 모관(某官)으로 초배(超拜)한 다음 여러 번 관위(官位)를 높여 주었으니, 공의 공덕으로 후손이 받는 경사가 이때부터 시발되었다. 누가 착한 일을 함에 징험이 없다 말하겠는가.
공은 기품이 정민(精敏)하고 도량이 넓었다. 호화로운 귀족으로 생장하였으나 지조가 청렴결백하고 풍채가 근엄하며, 온화함으로 남을 접대하였다. 담력이 남달리 뛰어난 무재(武才)로서 대대로 선명(宣命)을 받았다. 3도(道)에 진무(鎭撫)로 나갔을 때에는 이르는 곳마다 위엄과 혜택을 끼쳐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존경하였다. 전라도(全羅道)에 나갔을 때에는 왜적이 만덕사(萬德社)에 침구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갔는데 공이 경기(輕騎)로 뒤쫓아가 잡아서 그 노획물을 모두 탈환해 오므로 공이 있는 동안 왜적이 다시 침범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장생포(長生浦) 등을 작곡(作曲)하여 지금까지 악부(樂部)에 전해지고 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국사를 경영함에 여념이 없었으며, 언제나 성헌(成憲)을 지키고 분분히 변경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정사는 간략하면서도 잘 처리하여 근세의 어진 보필을 말할 때면 반드시 공을 먼저 일컫는다고 한다.
공의 휘는 탁(濯), 자는 춘경(春卿)으로 성재(誠齋)라 자호(自號)하였으니 고흥인(高興人)이다. 증조의 휘는 승무(升茂)이니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추증되고, 조부 청신(淸臣)은 처음 휘(諱)가 비(庇)인데,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으로서 충렬왕(忠烈王)ㆍ충선왕(忠宣王)ㆍ충숙왕(忠肅王)을 내리 섬겨 사직(社稷)에 훈공이 있으며, 아버지의 휘는 유기(有奇)이니 원(元) 나라로부터 민덕장군 전라도진변만호 달로화적 판밀직사사(民德將軍全羅道鎭邊萬戶達魯花赤判密直司事)를 제수받았으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니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유정(惟正)의 딸이다.
공이 원(元) 나라에 벼슬할 때 대경(大卿)인 타아적(朶兒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운(雲)으로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叅贊議政府事)이다. 귀국해 또 육창 유씨(陸昌柳氏)에게 장가들었다. 유씨는 진혜택주(眞惠宅主)에 봉해졌는데 증 문하평리(贈門下評理) 휘 기(棋)의 딸로서 동본(同本)이 아니다. 아들 둘을 낳았으니, 습(濕)은 전라도 병마도절제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이고, 담(澹)은 낭장(郞將)으로 근자에 죽었으며, 딸은 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셋인데 낭장이 낳은 아들 모(某)는 유학(幼學)이고, 파평군이 낳은 장남은 희이(希夷)니 공정고사(供正庫使)이며, 차남은 희제(希齊)니 제주감무(提州監務)이다.
공이 죽을 때 습(濕)은 5세였다. 뜻밖의 재난을 당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하지 못하고 임시로 해풍(海豊)의 백마산(白馬山)에 엄토(掩土)해 두었었다. 그러다가 35년이 지난 을유년(1405, 태종5) 11월 10일에 진혜택주가 향년 69세로 별세하자, 이듬해 병술년 3월에 덕수(德水)의 역산(櫟山)에 예를 갖추어 합장(合葬)하였다. 그 이듬해 가을에 습이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선공(先公)의 덕망과 공렬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고, 또 국사(國史)에 실려 있어 충분히 후세에 밝힐 만하되, 습이 어려서 철모를 때에 흉화(凶禍)를 당하였으니, 극도의 슬픔이 일찍이 형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묘도(墓道)에 비(碑)를 세우지 못하여 그 아름다움을 밝힐 수 없으니, 더욱 자식된 도리를 행하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 감히 글을 부탁합니다.”하였다. 내가 진신(縉紳)들과 종유하면서 전부터 공의 훌륭함을 들었으며, 참찬(參贊 운(雲)을 가리킨다)과 같이 추부(樞府)에 올랐다. 또 지금 절제(節制)의 간청이 애절하니 내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곧 그의 청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예부터 훌륭한 장상(將相)은 그 충훈(忠勳)을 시기당해 천명을 누린 이 드물었도다. 소하(蕭何)는 옥에 갇히고 한신(韓信)은 멸족되어 그 원한이 천지에 찼으니 이것이 천명이라 한들 덕에는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당당한 유공(柳公)은 오랫동안 재상의 권한을 잡아, 순경에나 역경에나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큰 난을 평정하였도다. 국사에 여념이 없이 우리 밝은 임금을 도왔는데, 억울하게 죄에 걸렸으니 관작인들 영화로울 것이 무엇이랴. 가뭄에 백성을 걱정한 것은 오직 재상의 어짊이라, 공사를 중지하자 간청하여 대궐에 글을 올렸도다. 임금이 노하고 감정을 품으므로 마침내 죽게 되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우는 이 있어 나라 사람들을 슬픔에 잠기게 하였도다. 한때 잠시 몰렸으나 끝내 백세에 신원하여, 그 원한을 씻고 사책(史策)을 빛냈도다 영험이 밝게 현몽하여 여경(餘慶)이 열렸도다. 묘도에 비를 새기거니 후인들은 살펴 보라.
류탁의 딸은 파평 윤씨 익대좌명공신 소정공 윤곤(?-1422)의 첫번째 부인으로, 아들 윤희이와 윤희제(1380-1467)를 두었다. 대표적인 훈구파이며 연산군 시기 갑자사화 때 사약을 받은 윤필상이 윤희제의 손자이다.
인조반정 이후 처형되었다가 후에 신원된
류몽인이 류탁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