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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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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
2.1. 삼국시대2.2. 남북국시대2.3. 고려2.4. 조선 ~ 대한제국2.5. 일제강점기2.6. 대한민국
2.6.1. 서울특별시 출범과 1949년 추가 확장부터 1962년까지
2.6.1.1. 6.25 전쟁 이후 부평 · 영등포 수도 이전 논의
2.6.2. 1962년 대확장2.6.3. 1973년 구파발(진관동) 편입과 인접지역의 서울 편입 주장2.6.4. 1980년~1994년2.6.5. 1995년 ~ 2008년2.6.6. 2015년 이후
3. 명칭의 유래
3.1. '서울'과 '특별시'3.2. 명칭 개정 시도3.3. 명칭 개정에 대한 의견들
4. 인구 변천5. 여담6. 관련 문서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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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은 현 대한민국 수도이고 이전에는 백제, 조선의 수도였으며 250여년 정도 고려의 부수도(오늘날의 광역시 역할)였다.[1] 또한 고구려의 3경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하고[2] 신라시대에도 한산주의 중심지라 지금으로 치면 도청 소재지쯤 위상은 가졌었다. 또한 삼국시대 내내 서울을 포함한 한강 유역은 격전지이자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서울은 다섯 국가의 유산이 모두 남아있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고도(古都)다.

2. 연혁

2.1. 삼국시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신하가 간하였다.
"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으로 옥토를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가 막고 있으니 그 천험지리(天險地利)는 쉬이 얻지 못할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짓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서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의 보좌를 받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대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했었다. 수도로서의 최초 기록은 백제 온조왕이 세운 위례성이다. 전통적으로 백제 위례성(한성)과 고려 남경/한양, 조선 한성이 별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반만 맞는 소리다. 현대의 서울시계 기준으로는 같은 서울이지만 현재의 풍납토성 일대는 광주군에서 1962년 12월에 편입되면서 서울로 들어온 것이고, 전통적으로 강북은 양주와 강남은 광주라는 다른 행정체계에 묶여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위례성의 역사가 조선의 한성부와 아예 관련이 없다는 통념 역시 매우 잘못되었는데 한성부의 뿌리인 고려 남경의 근원을 백제 수도 한성으로 보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고려사 지리지에서도 고려 남경을 백제의 고도로 보는 당대인의 인식이 드러난다. 따라서 고려 남경의 후신인 조선 한성부의 뿌리를 백제에서 찾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3][4]

주지하다시피 백제의 기록이 별로 잘 남아 있지 않기는 하지만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의 위치로 보았을 때 서울시계 내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때 이미 강남에 도읍을 정했다고 해놓고 13년에 소서노가 죽자 다시 강남에다가 도읍을 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온조왕 원년의 위례성을 하북위례성, 13년의 위례성을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원년의 위례성도 '일단은' 기록상으로 하남에 있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원년의 위례성은 사천(蛇川)으로 지금의 천안시 직산읍이며, 13년의 도읍은 한산(漢山)으로 지금의 경기도 광주(지금은 분리됐지만 가까운 현대까지만 해도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성남시, 하남시 등이 모두 광주군이었다.)라고 하는데 위례성 직산설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부정되는 상황[5]이고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존재로 비추어 원년의 위례성도 역시 한강 이남의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이 시기의 위례성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로 추정되었으며, 이후 풍납토성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확실시된 상황.[6]

다만 여기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으레 그렇듯 온조 왕조의 기년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단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한강 유역에 백제 건국 세력 중 하나가 유력한 고구려계 유이민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최대로 올려잡아도 3세기 중반이 한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구려계 유이민 세력은 그 전에는 2세기 중반에 임진강에 문득 갑자기 나타나서 약 백 년 동안 그곳에서 세력을 유지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3세기 중반에 갑자기 임진강 일대를 완전히 떠난 다음 한강 유역에 기존 있던 해상 세력과 연합하여 고대 국가를 세운 것으로 드러난다. 하북 위례성은 이 맥락에서, 정말로 있었다면 임진강 유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따라서 강북 일대는 지금 와선 설득력이 떨어진 편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 일대가 개발되면서 많은 한성백제 시대의 고분군이 파괴, 소실되었으나 그 시기에도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를 막으려 했던 학자들이 있었고, 그나마 남은 자료에 대해 이들이 기록을 남겼으며, 어느 학계나 그렇듯 지금 나온 고고학적 결과가 나중에도 옳을거라 맹신하는 태도는 위험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유독 3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계 무덤만 족집게식으로 집어서 부수었다거나, 그 이전 시기 토돈분구묘제 집단 묘제만 보존했을거란 이상한 가설은 더더욱 성립하지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백제의 건국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견해를 열어둬야 하지만 일단 밝혀진 사실로만 보면 서울 정착만큼은 3세기 중반이 상한임을 유념해야 하며, 또한 백제 건국와 온조 남하, 서울 정도 시점은 모두 분리되어서 해석 가능하다는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한편 후대로 오면서 지금의 강남-강북과는 반대로, 그 주위 북서방으로 영역이 확장되자 백제의 도심지인 강남은 한산(漢山), 부도심인 강북은 북한산(北漢山)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다.[7] 중간에 근초고왕이 한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천도하기도 했지만 26년 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개발살내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때 아리수를 건넌 것으로 보아 얼마 가지 못하고 진사왕이 찬탈하고 찬탈당하는 와중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온 듯 하다. 즉 고구려의 침공을 대비하여 한강을 북쪽의 천연 방어선으로 선정했던 것. 실제로 이 작전은 주효하여 고구려 광개토대왕도 한강 이북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고 강남으로의 진출은 저지되었다. 이때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가 그 선에서 멈춘 건 고구려가 딱히 요동 진출에 더 집중해서는 아니었다. 실제로 후연과 백제 모두 만만찮은 상대였기에 고구려가 어느 한쪽에 주력을 집중하면 다른 쪽이 털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고구려가 후연에게 대패하고 요동 방어선에 큰 구멍이 난 건 광개토대왕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군 주력이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마찬가지로 몇 년 후 아신왕이 고구려와의 약조를 깨고 가야와 왜 등에게 얻은 원병과 함께 한북 및 황해도 일대를 수복할 때는 고구려가 후연에게 복수전을 펼쳐 빼앗긴 영토를 모두 수복함은 물론 후연의 수도 용성 일대를 초토화하여 적잖은 인민과 재산을 약취하고 있을 때였다. 후연을 단단히 손봐준 고구려군이 복귀해서 여전히 도발을 멈추지 않는 백제-왜-가야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광개토대왕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신왕이 몇 번 패배는 겪었지만 개성 일대 방어선에서 어떻게든 방어를 굳혀 고구려군을 거기서 저지했다.

일단 원정에 나서면 이렇다할 패배는 겪어본 적 없는 광개토대왕이었지만 거기서 저지당했을 때 한계가 거기까지임을 인정하고 멈춘 것이다. 일단 흥미로운 건 아신왕-개로왕 때 고구려 VS 백제 구도는 흡사 오늘날 남북한 대치 구도와 비슷한데, 여기서 증명되는 것은 경기 북동부-강원 북서부 일대인 한강 상류 산악 지역과, 개성 청목령 일대 방어선 이 모두가 날아간 상황에선 서울 방어가 대단히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개성 없이도 한강 상류 산악 지역에 한해선 근초고왕 때보다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서울을 잘만 방어하고 있으나 적어도 휴전 조약 체결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는 개성 방어선과 영서 일대 방어선이 모두 무너진 뒤 답이 없이 두 차례나 함락당한 한성백제의 사례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현대 대한민국 같은 경우 개성은 비록 없으나 한성백제와는 달리 적어도 영서 일대 방어선 상황에선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을 참작해야겠다.

장수왕 때 한성백제가 망가졌던 건, 개로왕이 도림에게 속아 개성 일대 방어선 구축이나 확보에는 무관심한 채 엉뚱하게 한성 방어에만 열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개로왕이 전사하고 위례성을 빼앗기자 문주왕이 급하게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5세기 이래로도 지금의 서울 지역은 강남의 한산군(漢山郡)과 강북의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단, 지금의 강서구-양천구 일대는 제차파의(조선시대 양천군), 구로구 서부는 주부토(지금의 부평, 부천), 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광명시) 일대는 잉벌노(조선시대 시흥), 서초구-동작구(+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일대는 동사힐(지금의 과천) 소속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서울에 편입되는 것은 후술하겠지만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이러한 강남-강북 구도는 삼국시대가 끝나서도 강남의 한주(漢州)와 강북의 한양군(漢陽郡)으로 정리되었다.

2.2. 남북국시대

북한산주는 통일신라 9주 5소경 한주( 한산주) 소속이 되었다. 지금의 종로구를 중심으로 한 강북 지역은 신라 초기 북한산주(北漢山州)였다가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으로 바꾼다. 지금의 서울 강북 일대와 구리, 남양주 상당 부분(진접, 진건, 오남 제외)에 해당한다. 이 한양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까지 관습적으로 자주 사용되었고 현대에도 한양대학교 등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한강 이남은 대략 반으로 나눠 동쪽은 지금의 광주시인 한주 소속, 서쪽은 지금의 과천시인 율진군 소속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던 발해의 특성상 바로 그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신라와는 당연히 사이가 좋을 턱이 없었다. 물론 신라도 고구려부흥운동에 보탠건 있긴 한데 그게 고구려 좋으라고 한건 아니고 나당전쟁에서 당을 견제할 목적으로 손 안대고 코 풀 심산으로 고구려 유민들에게 대신 좀 싸워달라는 뜻에서 지원해준거라..... 딱히 신라와 친한 관계는 아니었던 북방의 발해와 접한 국경선 전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신라의 지방군인 10정을 9주 중 다른 8개 주에는 1정씩 배치했으나 한주에는 특별히 2정 배치했다. 김헌창의 난의 후속타로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 아래에서 도적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도분 총명에게 잡혀 죽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함규의 영역이었는데 궁예를 거쳐 왕건에 복속됐고 함씨들의 조상이 됐다.

2.3.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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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목 광주 충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황주 }}}}}}}}}
||<|2><tablewidth=100%><width=13%><tablebgcolor=#fff,#1f2023><colbgcolor=#fedc89,#670000> 도호부 ||<-2><width=17%> 안변도호부 ||<width=17%> 안서도호부 ||<width=17%> 안북도호부 ||<width=17%> 안남도호부 ||



강남은 광주(廣州), 강북은 양주(楊州)로 나뉘었다. 한편 문종 때에는 신라의 5소경과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수도 개경을 보완하는 목적으로 성종 때 동경으로 지정되는 금성(지금의 경주), 태조 때 서경으로 지정되는 평양과 더불어 강북 지역이 문종 때 남경(南京)으로 지정되어 양주와 대등해졌다. 이 때 양주의 중심지는 현재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였다.

남경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인정받아 문종 숙종 연간에 천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숙종 시기에는 남경에 별궁을 세웠으며, 숙종이 직접 남경을 방문하기도 했다.

칭송받을 때는 오덕구(五德丘)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이 오덕구란 중앙에 북악산(면악산), 북에 감악산, 남에 관악산, 동에 아차산(남행산), 서에 북악산(철마산으로 추정)이 오행에 걸맞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시 남경의 범위는 오늘날로 치면 서쪽으로는 연세대 뒤의 안산, 동쪽으로는 동대문 일대의 낙산, 남쪽으로는 신용산, 이촌 일대까지였다고 한다. 충선왕 대에 다시 한양(漢陽)으로 개칭됐으며, 이후 한양이나 한성(漢城)이라고 불리었다.

남경에 있던 고려 별궁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 경복궁을 고려시대 남경의 남쪽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에 경복궁 북쪽인 지금의 청와대 인근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청와대 인근에서 고려시대의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 남경의 시가지는 지금의 청계천을 따라 자리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말에는 더욱 천도하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는데, 이유는 홍건적 왜구의 준동으로 인해 수도 개경이 위협받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는 것과 예성강의 퇴적 현상으로 개경의 수운 활용이 난감해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8] 공민왕은 남경에 궁을 증축하려 했으며, 우왕 공양왕 때에는 서경처럼 분사를 두려고 했으며 비록 대신들의 반대 여론때문에 얼마 안가 개경으로 환도하기는 했으나 일시적으로 천도(1382.9.~1383.2., 1390.9.~1391.2.)를 단행하기도 해 짧게나마 고려 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 따라서 서울은 한국사에서 백제, 고려, 조선/대한제국, 대한민국 4국가의 수도였던 유일한 도시이다.[9] 하지만 서울이 백제와 조선의 수도라는 점은 널리들 아는 반면 고려의 수도인 시기도 있었다는 사실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일단 우왕과 공양왕 대의 두 기간을 합쳐도 1년이 채 안되기 때문인 점이 크고 또 서울에 산재한 백제와 조선의 왕릉이나 왕성 유적과 달리 고려의 왕릉이나 왕성 유적이 단 하나도 서울에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강북이 잘 나가기 시작하는 동안 강남은 여전히 광주의 깡촌(...) 신세로 남았고, 이 곳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려면 1980년대까지 천 년이 더 남아있었다.

2.4. 조선 ~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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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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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파일:attachment/431801_396657003731190_1292874738_n.jpg

사이버조선왕조 링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한동안은 여전히 개경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다 1394년(태조 3) 10월 25일(양력 11월 18일)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한성으로 천도했고 이 시기에 정도전에 의해 경복궁이 건설된다. 그러나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형제들간의 피를 본 한성이 찜짐했는지 1399년(정종 1) 3월 7일(양력 4월 13일) 다시 개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태종 대인 1405년(태종 5) 10월 11일(양력 11월 2일)에 다시 서울로 옮겨왔고 이후 근 600년의 세월 동안 한반도의 중심지이자 최대도시 역할을 거침없이 수행해 왔다.

한양으로 천도할 당시에 한양과 함께 수도 후보지로 꼽힌 곳이 무악(현재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부평, 계룡(현재의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계룡대 일대)이었다.
파일:남산_정상에서_바라본_서울_풍경_조지 클레이턴 포크(1884).jpg
1884년, 조지 클레이턴 포크가 남산에서 촬영한 한양[10]

파일:수선전도.jpg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 서로는 불광천 홍제천, 동으로는 중랑천, 남으로는 한강, 북으로는 북한산에 이르는 지역을 자세히 나타낸다. 이로써 조선 후기 한양의 영역이 어느 만큼이었는지 알 수 있다.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조선말기한성부-02.jpg

당시 서울의 영역은 지금에 비해 좁은 것으로, 오늘날의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동대문구, 성북구, 서대문구, 강북구 일부(우이천 이남), 마포구 일부, 성동구 일부, 은평구 일부 일대까지 포함되지만, 보통 사대문안만을 진짜 서울로 치는데,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인근 10리 이내 지역도 서울이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지만 사실상 주택과 상점이 들어선 시가지인 사대문 안과 근교 농어촌 분위기라서 단순 행정구역상만 한성인 성저십리 지역은 환경상 구분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울(한양)의 범위를 표시하는 뜻으로 금표를 경계에 여러 개 설치했는데 대략 한강(용산포구)-마포-불광동-북한산-우이천-미아리-중랑천을 잇는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성저십리 참조. 이 역시 산이나 강 등의 자연지물을 천연 방어시설로 활용하던 전술의 일환이였다.

한편 조선이 건국하면서 태조 대에 양주의 중심지는 현 광진구 일대에서 양주시 고읍동으로 이전되었다. 여담으로 조선왕조가 남경을 새도읍으로 삼으면서 그쪽 토박이들을 한성부 성저십리나 양주군으로 쫓아냈다는 얘기도 있다(...).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일대 및 송파구 잠실/신천 일대, 강북구 일부(우이천 이북) 및 은평구 진관동(당시 소속했던 신혈면이 양주에서 고양으로 넘어간 것은 1906년)과 불광동 독바위역 주변은 경기도 양주목, 서초구 일부분, 강남구, 송파구(잠실/신천 일대 제외)[11], 강동구는 경기도 광주부, 마포구 일부(상암동 등)와 은평구 남부의 불광천 이서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영등포구(여의도, 양화일대 제외), 구로구 동부(신도림동 등), 금천구(당시 금천/시흥현 현내면 지역으로 금천/시흥의 중심지였다.), 동작구 일부(신대방동, 대방동, 상도동), 관악구 상당부분(남현동 제외)은 경기도 금천현(후에 시흥군), 동작구 일부(노량진,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 서초구 대부분, 관악구 남현동은 경기도 과천현(후에 시흥군에 편입), 강서구 대부분과 양천구 일대, 영등포구 양화지구는 경기도 양천현(후에 김포군에 편입), 구로구 서부(고척동, 개봉동, 온수동 등)와 강서부 일부는 경기도 부평도호부(후에 부천군으로 개편)에 속했었다.

한양(서울)의 진산(鎭山)은 북한산(삼각산)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인한 1895년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대표적으로 오늘날의 중곡동 등 광진구 일부지역)가 한성부 두모방에, 고양군 하도면 일부(현재의 수색역 부근)가 한성부 연희방에 각각 편입되었고, 성내 5부(部 :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를 5서(署 : 동서, 서서, 남서, 북서, 중서)로 개편했다.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1896.jpg

구한말 당시 서울 및 근교 지역을 간략히 나타낸 지도. 이 지도에는 옛 강남구 포이동(현 서초구 양재2동 및 강남구 개포4동의 각 일부) 쪽에 광주군-과천군 간 경계 오류가 있다. 현 서초구 양재동-강남구 개포동 간 경계선( 논현로)에서 그대로 유추한 듯 한데, 원래는 강남대로 선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얼추 맞는다.

한성부 청사는 지금의 KT광화문지사 건물 터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쳐 건물이 아예 소실되어 버렸다.

17세기 실학자인 유형원이 한성부 행정구역 추가 확장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가 제안한 한성부 추가 편입 지역으로 지금의 영등포구, 동작구 북부, 서초구 북부, 강남구 압구정, 송파구 잠실,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구리시, 의정부시, 고양시 덕양구 일대 등이었다.[12]

2.5.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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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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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서울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seoul-expansion(1914-1995)-revised_2.jpg
1914년 이후 현재(1995년)까지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변천도 참고로 1911년 경성부의 영역은 영등포와 잠실 부분을 빼면 1949년 서울시의 영역과 매우 비슷하다. (과거 경기도 소재 서울시 도시계획구역 - 이들 지역은 한때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으로의 정식 편입이 고려된 적이 있다. 이들 도시계획구역은 1982년(광명시 북부), 1986년(부천시 오정), 1990년(과천시), 1995년(고양시 신도, 남양주시 별내, 구리시 갈매)에 차례대로 해제되었다. - 포함)

유감스럽게도, 서울특별시의 경계 변천사를 다룬 지도들 간에 상당한 오류나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서울시에서 발간한 역사 관련 서적에 실린 지도에서는 1973년 진관동 서울 편입 내용이 누락되었다든지,고양시 덕양구 진관동 바로 위에 게시된 1914년 이후 현재(1995년)까지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변천도에는1936년 대방천 및 반포동 쪽과 1949년 잠실 쪽의 경계 오류가 있다든지, 몇몇 중고교 지리부도에서는 구한말 한성부의 경계로 1914년에 축소된 경성부의 경계를 써먹는다는지. 심지어 서울시에서 발간한 자료, 도서에서 조차도 관련 오류가 왕왕보일 정도다.

1947년 모습으로 추정되는 서울특별시 지도

2.6.1. 서울특별시 출범과 1949년 추가 확장부터 1962년까지

서울시헌장 제1조
「[ruby(京城府, ruby=경성부)]」를「서울[ruby(市, ruby=시)]」라[ruby(稱, ruby=칭)]하고[ruby(此, ruby=차)]를[ruby(特別自由市, ruby=특별자유시)]로함。
서울[ruby(市, ruby=시)]의[ruby(關轄區域, ruby=관할구역)]은[ruby(現, ruby=현)][ruby(中區, ruby=중구)]、[ruby(鍾路區, ruby=종로구)]、[ruby(東大門區, ruby=동대문구)]、[ruby(城東區, ruby=성동구)]、[ruby(西大門區, ruby=서대문구)]、[ruby(麻浦區, ruby=마포구)]、[ruby(龍山區, ruby=용산구)]、[ruby(永登浦區, ruby=영등포구)]로하되[ruby(今後, ruby=금후)][ruby(法律, ruby=법률)]에[ruby(依, ruby=의)]하야[ruby(此, ruby=차)]를[ruby(變更, ruby=변경)]함을[ruby(得, ruby=득)]함。
현대어 해석
‘경성부’를 ‘서울시’로 하고 이를 특별자유시로 한다.
서울시의 관할구역은 현 중구, 종로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영등포구로 하되, 이후 법률에 의하여 변경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인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서울시 또는 한성시(漢城市)로 지칭했지만 미 군정청이 절차를 무시했다며 거부하다가 1946년 중순에 서울시만 수용해 1946년 8월 11일에 공식으로 경기도 서울시로 개칭되었고[13] 9월 28일에 도와 동급인 "서울특별자유시"가 되었으며 동년 10월 1일에 일본식 동명을 정리하였고, 1947년에 행정동의 전신인 동회 명칭 일부- 앵구([ruby(櫻丘, ruby=サクラヲカ)]; 사쿠라오카)동회 등-를 정리하였다. 영문으로는 'Seoul Independent City'였으나 한국인 직원이 ' 독립시'는 이상하다고 하여 번역과정에서 특별자유시로 번역한 것이다. 1948년 광복절, 정부수립기념국민축하식 행사와 함께 대한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구행정구역 신행정구역
중구 태평통1정목, 태평통2정목, 남대문통1정목, 남대문통2정목, 남대문통3정목, 남대문통4정목, 남대문통5정목, 어성정(御成町), 길야정(吉野町)1정목, 길야정2정목, 고시정(古市町), 봉래정1정목, 봉래정2정목, 방산정, 주교정, 임정(林町), 입정정, 수표정, 장교정, 삼각정, 다옥정(茶屋町), 무교정, 황금정(黃金町)1정목, 황금정2정목, 황금정3정목, 황금정4정목, 황금정5정목, 황금정6정목, 황금정7정목, 광희정1정목, 광희정2정목, 초음정(初音町), 화원정(花園町), 앵정정(櫻井町)1정목, 앵정정2정목, 약초정(若草町), 영락정(永樂町)1정목, 영락정2정목, 명치정(明治町)1정목, 명치정2정목, 장곡천정(長谷川町), 본정(本町)1정목, 본정2정목, 본정3정목, 본정4정목, 본정5정목, 병목정(並木町), 동사헌정, 서사헌정, 신정(新町), 대화정(大和町)1정목, 대화정2정목, 대화정3정목, 일지출정(日之出町), 왜성대정(倭城臺町), 수정(壽町), 남산정1정목, 남산정2정목, 남산정3정목, 욱정(旭町)1정목, 욱정2정목, 욱정3정목, 남미창정(南米倉町), 북미창정(北米倉町) 중구 태평로1가, 태평로2가, 남대문로1가, 남대문로2가, 남대문로3가, 남대문로4가, 남대문로5가, 양동(陽洞), 도동(桃洞)1가, 도동2가, 동자동, 봉래동1가, 봉래동2가, 방산동, 주교동, 산림동, 입정동, 수표동, 장교동, 수하동, 삼각동, 다동, 무교동, 을지로1가, 을지로2가, 을지로3가, 을지로4가, 을지로5가, 을지로6가, 을지로7가, 광희동1가, 광희동2가, 오장동, 예관동, 인현동1가, 인현동2가, 초동, 저동1가, 저동2가, 명동1가, 명동2가, 소공동, 충무로1가, 충무로2가, 충무로3가, 충무로4가, 충무로5가, 쌍림동, 장충동1가, 장충동2가, 묵정동, 필동1가, 필동2가, 필동3가, 남학동, 예장동, 주자동, 남산동1가, 남산동2가, 남산동3가, 회현동1가, 회현동2가, 회현동3가, 남창동, 북창동
종로구 누상정, 누하정, 옥인정, 신교정, 청운정, 궁정정, 효자정, 창성정, 통인정, 통의정, 체부정, 필운정, 사직정, 적선정, 도렴정, 내수정, 당주정, 서대문정(西大門町)1정목, 서대문정2정목, 광화문통(光化門通), 서린정, 종로1정목, 종로2정목, 종로3정목, 종로4정목, 종로5정목, 종로6정목, 청진정, 수송정, 중학정, 사간정, 송현정, 소각정, 화동정, 팔판정, 삼청정, 가회정, 재동정, 안국정, 경운정, 관훈정, 견지정, 공평정, 관철정, 인사정, 낙원정, 돈의정, 익선정, 운니정, 계동정, 원서정, 와룡정, 권농정, 수은정(授銀町), 봉익정, 훈정정, 관수정, 장사정, 예지정, 인의정, 원남정, 연지정, 효제정, 연건정, 명륜정1정목, 명륜정2정목, 명륜정3정목, 명륜정4정목, 혜화정, 동숭정, 이화정, 충신정 종로구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신교동,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통의동, 체부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 도렴동, 내수동, 당주동, 신문로1가, 신문로2가, 세종로, 서린동, 종로1가, 종로2가, 종로3가, 종로4가, 종로5가, 종로6가, 청진동, 수송동, 중학동, 사간동, 송현동, 소각동, 화동, 팔판동, 삼청동, 가회동, 재동, 안국동, 경운동, 관훈동, 견지동, 공평동, 관철동, 인사동, 낙원동, 돈의동, 익선동, 운니동, 계동, 원서동, 와룡동, 권농동, 묘동, 봉익동, 훈정동, 관수동, 장사동, 예지동, 인의동, 원남동, 연지동, 효제동, 연건동, 명륜동1가, 명륜동2가, 명륜동3가, 명륜동4가, 혜화동, 동숭동, 이화동, 충신동
동대문구 돈암정, 창신정, 숭인정, 신설정, 용두정, 안암정, 제기정, 청량리정, 회기정, 이문정, 휘경정, 종암정, 답십리정, 성북정 동대문구 돈암동, 창신동, 숭인동, 신설동, 용두동, 안암동, 제기동, 청량리동, 회기동, 이문동, 휘경동, 종암동, 답십리동, 성북동
성동구 사근정, 마장정, 행당정, 응봉정, 금호정, 하왕십리정, 상왕십리정, 신당정, 옥수정 성동구 사근동, 마장동, 행당동, 응봉동, 금호동, 하왕십리동, 상왕십리동, 신당동, 옥수동
서대문구 정동정, 서소문정, 봉래정3정목, 봉래정4정목, 화천정(和泉町), 의주통1정목, 의주통2정목, 중림정, 합동정, 죽첨정(竹添町)1정목, 죽첨정2정목, 죽첨정3정목, 대현정, 노고산정, 창천정, 연희정, 신촌정, 봉원정, 북아현정, 평동정, 송월정, 교남정, 냉천정, 천연정, 옥천정, 관동정(官洞町), 교북정, 홍파정, 행촌정, 현저정, 홍제정, 홍지정, 신영정, 부암정 서대문구 정동, 서소문동, 만리동1가, 만리동2가, 순화동, 의주로1가, 의주로2가, 중림동, 합동, 충정로1가, 충정로2가, 충정로3가, 대현동, 노고산동, 창천동, 연희동, 신촌동, 봉원동, 북아현동, 평동, 송월동, 교남동, 냉천동, 천연동, 옥천동, 영천동, 교북동, 홍파동, 행촌동, 현저동, 홍제동, 홍지동, 신영동, 부암동
용산구 서계정, 삼판정(三板町), 강기정(岡岐町), 연병정(練兵町), 한강통1정목, 한강통2정목, 한강통3정목, 용산정1정목, 용산정2정목, 용산정3정목, 용산정4정목, 용산정5정목, 용산정6정목, 이태원정, 한남정, 보광정, 주성정, 동빙고정, 서빙고정, 이촌정, 청엽정(青葉町)1정목, 청엽정2정목, 청엽정3정목, 경정(京町), 영정(英町), 원정(元町)1정목, 원정2정목, 원정3정목, 원정4정목, 암근정(岩根町), 산수정(山手町), 청수정(清水町), 미생정(彌生町), 대도정(大嶋町), 금정(錦町) 용산구 서계동, 후암동, 갈월동, 남영동, 한강로1가, 한강로2가, 한강로3가, 용산동1가, 용산동2가, 용산동3가, 용산동4가, 용산동5가, 용산동6가, 이태원동, 한남동, 보광동, 주성동, 동빙고동, 서빙고동, 이촌동, 청파동1가, 청파동2가, 청파동3가, 문배동, 신계동, 원효로1가, 원효로2가, 원효로3가, 원효로4가, 청암동, 산천동, 신창동, 도원동, 용문동, 효창동
마포구 아현정, 공덕정, 신공덕정, 도화정, 마포정, 토정정, 용강정, 염리정, 대흥정, 신수정, 구수정, 현석정, 신정정, 하중정, 창전정, 동교정, 서교정, 상수일정(上水溢町), 하수일정(下水溢町), 당인정, 합정정, 망원정, 율도정(栗嶋町) 마포구 아현동, 공덕동, 신공덕동, 도화동, 마포동, 토정동, 용강동, 염리동, 대흥동, 신수동, 구수동, 현석동, 신정동, 하중동, 창전동, 동교동, 서교동, 상수동, 하수동(下水洞), 당인동, 합정동, 망원동, 율도동(栗嶋洞)
영등포구 여의도정, 동작정, 흑석정, 본동정, 노량진정, 상도정, 번대방정(番大方町), 신길정, 도림정, 영등포정, 당산정, 양평정, 양화정, 사옥정(絲屋町) 영등포구 여의도동, 동작동, 흑석동, 본동, 노량진동, 상도동, 대방동, 신길동, 도림동, 영등포동, 당산동, 양평동, 양화동, 사옥동(絲屋洞)

1949년 8월 13일에 경기도 고양군(現 경기도 고양시) 뚝도면, 숭인면, 은평면과 시흥군 동면 도림리, 구로리, 번대방리 등(현재의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영등포구 대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일대)을 편입하여 시역(市域)을 확장하였다. 이 때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신설되었다(9구). 1949년 확장은 강북쪽은 1914년에 일제에 의해 고양군으로 넘어간 성저십리[14]를 도로 서울시로 되찾아오는 것이라는 의미와 영등포쪽은 1936년에 시흥군 동면으로 되었던, 경성부로 편입되지 못한 시흥군 북면 잔여 지역을 정리하는 차원이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사실 월곡동, 미아동, 정릉동 일대 주민들이 서울 편입 추진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해당 지역에는 일제 말기에 경성부 추가 편입이 고려된 지역이었다고 한다.[15]

1949년 8월 15일, 광복절에 서울특별시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서울특별시로 확정될 때까지 정식 명칭은 서울특별자유시였다.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굵은 글씨 처리된 곳은 서울시에 재편입된 옛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 현 은평구 대부분, 종로구 구기동, 평창동, 서대문구 서부(홍은동, 북가좌동, 남가좌동), 마포구 서부(상암동, 성산동 등)
  •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구 북부(정릉동, 길음동, 석관동, 장위동, 상·하월곡동), 강북구 전역
  •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 현 광진구, 송파구 잠실 일대, 성동구 중 중랑천 이동지역(성수동 등), 중랑구 면목동, 동대문구 장안동
  • 경기도 시흥군 동면 일부 : 현 영등포구 대림동, 구로구 구로동, 신도림동, 동작구 신대방동. 도림리와 번대방리(대방동)가 1936년과 1949년에 나뉘어서 편입되었기 때문에, 1949년에 편입된 지역에 '신'자가 붙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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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16] 이 시기에 편입된 동네는 '동'이 아닌 '리'로 편입되었으며 (예: 경기도 시흥군 동면 도림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도림), 1950년 3월 15일에 동으로 전환되었다.
개칭된 경우
  •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홍제외리 →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홍은동
  • 성동구 둑도출장소 서둑도리 → 성동구 둑도출장소 성수동일가
  • 성동구 둑도출장소 동둑도리 → 성동구 둑도출장소 성수동이가
  • 영등포구 번대방리 → 영등포구 신대방동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인민군이 전면 남침을 개시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미아리, 창동 일대에서 방어전이 치열했는데 당시 그곳이 서울시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미아리, 창동이 아니라 도봉동, 상계동, 의정부 호원동이었겠지... 당시 서울시 최북단은 우이동, 최남단은 구로동과 신도림동, 대림동이었다. (현재는 최북단은 도봉동, 최남단은 내곡동)

전쟁 발발 3일 후인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되었고 정부는 수도를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역으로 북한 지역으로 진격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도달하자 전쟁이 끝났다 생각한 정부는 10월 27일 서울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인해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기면서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3월 14일에 유엔군이 서울을 재수복하였으나 유사시를 대비해 정부는 계속 부산에 남아있다가 휴전 후인 1953년 8월 15일 서울로 환도하였다. 부산 임시수도 시절에는 부산으로 피난온 서울시민들의 행정지원을 위한 기구인 서울특별시 부산출장소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파일:서울특별시기(1946-1996).svg
시기의 모습
사실 지금도 서울특별시기(旗)가 있다. 다만 저 시기와 다르게 색상에 변화를 준 건 아니고, 하얀 깃발에 1996년에 제정된 현 서울시 휘장을 박아놓은 수준이지만.[17]

1955년에 행정동제가 시행되면서 신설동 일부로 보문동(보문사에서 유래되었다.)을 분리하여 설치하였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청계천 복개공사를 했다.
2.6.1.1. 6.25 전쟁 이후 부평 · 영등포 수도 이전 논의
서울 수복 이후에는 강북이 군사적으로 전방 지역에 있다는 문제와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 구 도심을 복구하는 대신에 아예 한강 이남의 새로운 땅에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게 도시계획상으로 낫다는 의견이 대두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서울 사대문안 지역은 역사적 상징으로 남겨두고 아예 수도를 지금의 부평(구 부평도호부 지역 중 1940년 인천으로 편입된 곳.), 부천(지금의 시흥시 북부인 소래읍 포함.), 영등포(지금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 서부 일대. 다만 이 지역은 이미 행정상 6.25 전쟁 이전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의 영등포는 행정구역은 서울 소속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독자적인 지역 정체성이 남아있었다.), 시흥(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광명시 일대. 1963년 서울 대확장 이전에는 '시흥'이라고 하면 보통 지금의 금천구 일대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일대로 옮기자는 논의가 나온 적이 있었다.

해당 블로그글 당시 기사 영등포와 부평은 한강이라는 거대한 자연 장벽의 남쪽에 있어서 강북 지역보다 수도 방위에 유리한 구조인데다가 영등포와 부평에 걸친 넓은 평야지대인 부평평야 는 신시가지 후보로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과거 북쪽 왕조를 막으려고 강남에 자리를 잡은 백제의 전술의 재림이라 할 수 있다.)

계획된 신도시의 예상 행정구역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부평구, 동쪽으로는 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일대로 잡혔다. 만일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전쟁 이전에 이미 서울에 편입된 지금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동작구를 비롯하여 지금의 관악구, 금천구(안양 석수동 포함), 광명시(안양 박달동 포함), 강서구, 양천구, 부천시, 부평구, 계양구, 시흥시 북부 일대가 신수도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대신에 지금의 도봉구, 노원구, 강남3구, 강동구 일대는 그저 경기도로 남았을 듯[18] 그리고 수도 서울에 둘러싸인 인천(...) 다시 말해 한때 일제가 경성부 추가 편입 대상으로 검토했던 지역들이 새로운 수도에 편입될 수 있었던 상황.[19]

수도 서울을 북한에게 털렸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던 시대 상황 때문인지, 이러한 계획에 서울특별시는 가시적인 반발 대신에 새로운 수도 후보지 입지 조사에 협조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빈곤국이었던 한계가[20]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2.6.2. 1962년 대확장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서울특별시 국무총리 직속이 되었으며, 서울특별시장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1962년 12월 11일에 서울특별시 면적의 대대적인 확장이 이루어져 오늘날 서울시 모양새의 기반이 되고 있다.[21] 이 때에도 이 아닌 로 편입되었으며, 이듬해 2월 1일에 동으로 개칭되었다. 아카라이브 '1963년 서울특별시 법정동, 행정동, 구 출장소' 당시 정부가 서울시 편입 대상지를 물색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에 지역 조사를 위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대규모로 확장하고 나서도 뭔가 아쉬웠던지 1963년 9월 17일에 서울 편입을 염두에 두고 경기도 일부 지역도 서울시 도시계획에 포함시켰다.[22]( 건설부 고시 제547호 원문) 참고로 1963년 서울시 신규 편입지들이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된 것은 1963년 8월 28일이다. 건설부 고시 제524호 원문

사실 1962년 서울 대확장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서울 대확장 계획에 대해 박경원 내무부 장관과 박창원 경기도지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당시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이 군사정권의 실세였다는 버프로 내무부 장관과 도지사와의 기싸움에서 승리하여 대확장을 단행했다는 설이 있다. 강남 개발을 담당했던 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 때 서울 대확장이 단행 안 되었다면 강남 개발이 지지부진 했을 거라고. 그리고 시흥군 동면(지금의 금천구, 관악구)은 원래 서울시 편입 대상지가 아니었는데, 도시계획상 서울 편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서울 편입 대상지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도시공학을 전공한 박사가 출연한 모 팟캐스트에 따르면 1960년대 서울 대확장 추진 초기에 당국에서 눈독을 들인 곳이 경인선 지역(부천, 광명북부, 부평, 인천 방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방침이 바뀌어서 부천군 소사읍이 반토막난 채로 동부지역이 서울로 편입되는 데 그쳤다는 야사가 있었다고.

이 때 경기도 김포군, 부천군, 시흥군, 광주군, 양주군 일대를 영등포구나 성동구, 성북구로 각각 편입하였는데 그 중 편입된 광주군 일대와 시흥군 신동면은 바로 오늘날의 강남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60년대 사이 인구가 250만에서 550만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면서 확장이 불가피해졌다. 이와 같은 인구증가 추세를 당국이 의식한 듯이 당시 시골이었던 강남, 강서, 노원 등지 또한 서울로 편입시킨 것으로 보인다.
1962년 12월 1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및 경계 조정
구 법정구역 신 법정구역 비고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상봉리, 중하리, 묵동리, 망우리, 신내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상봉리, 중화리, 묵동리, 망우리, 신내리 중랑구(면목동 제외) 1914년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구리면으로 통합되기 이전, '망우리면'의 영역에 해당된다. 현재의 구리시는 '구지면'만 해당되는 셈. 편입과 당시, 중하리 주민들의 요구로 인하여 중화리로 개칭.
서울특별시 성동구 면목동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면목동 현 중랑구 면목동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월계리, 공덕리, 하계리, 중계리, 상계리, 도봉리, 방학리, 쌍문리 서울특별시 성북구 창동리, 월계리, 공덕리, 하계리, 중계리, 상계리, 도봉리, 방학리, 쌍문리 도봉구, 노원구 전역. 1963년 2월에 동으로 전환할 때, 중복 지명을 피하기 위하여 공덕리를 공릉동으로 개칭.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시흥리, 독산리, 가리봉리, 신림리, 봉천리 금천구 전역, 관악구 봉천동과 신림동, 구로구 가리봉동. 시흥군 동면 중 유일하게 편입되지 않고 남은 안양리는 안양읍으로 편입되어 '신안양리(新安養里)'가 되었다가, 안양시 승격과 함께 석수동이 되었다.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양재리, 원지리, 우면리, 사당리, 방배리, 서초리, 반포리, 잠실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재리, 원지리, 우면리, 사당리, 방배리, 서초리, 반포리, 잠원리 서초구 대부분, 동작구 사당동, 관악구 남현동. 중복 지명을 피하기 위하여 잠실리와 신원리를 잠원동과 원지동으로 각각 개칭.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오류리, 고척리, 개봉리, 궁리, 천왕리, 항리, 온수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리, 고척리, 개봉리, 궁리, 천왕리, 항리, 온수리 구로구 안양천 이서지역(고척동, 오류동, 개봉동, 온수동 등)으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는 부평군 수탄면과 옥산면 항동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오곡리, 오쇠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곡리, 오쇠리 강서구, 양천구 전역.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는 오곡동, 오쇠동을 제외하고는 전부 양천군이었다. 김포국제공항 김포시가 아닌 이곳에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1963년 2월에 동으로 전환할 때, 중복 지명을 피하기 위하여 신당리와 송정리를 신월동과 공항동으로 각각 개칭.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내발산리, 외발산리, 송정리, 과해리, 방화리, 개화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내발산리, 외발산리, 송정리, 과해리, 방화리, 개화리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 마곡리, 염촌리, 등촌리, 목동리, 신당리, 신정리, 화곡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가양리, 마곡리, 염촌리, 등촌리, 목동리, 신당리, 신정리, 화곡리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역삼리, 양재리, 포이리, 반포리, 논현리, 신사리, 학리, 압구정리, 청담리, 삼성리, 대치리, 염곡리, 내곡리, 신원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역삼리, 도곡리, 포이리, 반포리, 논현리, 신사리, 학리, 압구정리, 청담리, 삼성리, 대치리, 염곡리, 내곡리, 신원리 강남구(수서동, 세곡동, 율현동, 일원동, 자곡동 제외), 서초구 내곡동, 염곡동, 신원동. 중복 지명을 피하기 위하여 양재리를 편입과 동시에 도곡리로, 이후 1963년 2월에 동으로 전환할 때 반포리를 개포동으로 개칭.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일원리, 수서리, 자곡리, 율현리, 세곡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일원리, 수서리, 자곡리, 율현리, 세곡리 현 강남구 수서동, 세곡동, 율현동, 일원동, 자곡동. 대왕면의 남은 지역은 이후 이 지역이 성남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편입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석촌리, 삼전리, 가락리, 문정리, 장지리, 거여리, 마천리, 이리, 방이리, 오금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송파리, 석촌리, 삼전리, 가락리, 문정리, 장지리, 거여리, 마천리, 이리, 방이리, 오금리 잠실을 제외한 송파구 전역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명일리, 하일리, 고덕리, 상일리, 길리, 둔촌리, 성내리, 풍납리, 곡교리, 암사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명일리, 하일리, 고덕리, 상일리, 길리, 둔촌리, 성내리, 풍납리, 곡교리, 암사리 강동구 전역 및 송파구 풍납동. 1963년 2월에 동으로 전환할 때, 곡교리를 천호동으로 개칭.
서울특별시 조례 제276호
명칭 위치 관할구역
동대문구 망우출장소 동대문구 망우동 동대문구 상봉동, 중화동, 묵동, 망우동, 신내동
성동구 천호출장소 성동구 천호동 성동구 명일동, 하일동, 고덕동, 상일동, 길동, 둔촌동, 성내동, 풍납동, 천호동, 암사동
성동구 송파출장소 성동구 가락동(현 송파동) 성동구 송파동, 석촌동, 삼전동, 가락동, 문정동, 장지동, 거여동, 마천동, 이동, 방이동, 오금동, 일원동, 수서동, 자곡동, 율현동, 세곡동
성동구 언주출장소 성동구 역삼동 성동구 역삼동, 도곡동, 포이동, 개포동, 논현동, 신사동, 학동, 압구정동, 청담동, 삼성동, 대치동, 염곡동, 내곡동, 신원동
성북구 노해출장소 성북구 창동 성북구 창동, 월계동, 공릉동, 하계동, 중계동, 상계동, 도봉동, 방학동, 쌍문동
영등포구 신동출장소 영등포구 양재동 영등포구 양재동, 원지동, 우면동, 사당동, 방배동, 서초동, 반포동, 잠원동
영등포구 관악출장소 영등포구 시흥동 영등포구 시흥동, 독산동, 가리봉동, 신림동, 봉천동
영등포구 양동출장소 영등포구 등촌동 영등포구 가양동, 마곡동, 염촌동, 등촌동, 목동, 신월동, 신정동, 화곡동
영등포구 양서출장소 영등포구 공항동 영등포구 내발산동, 외발산동, 공항동, 과해동, 방화동, 개화동, 오곡동, 오쇠동
영등포구 오류출장소 영등포구 오류동 영등포구 오류동, 고척동, 개봉동, 궁동, 천왕동, 항동, 온수동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1963.jpg
1962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김포군, 부천군, 시흥군을 편입해온 영등포구, 광주군을 편입해온 성동구, 양주군을 편입해온 성북구가 엄청나게 넓어졌다. 특히 성동구는 1975년까지 한강 남북에 모두 걸쳐있던 유일한 구였고, 영등포구는 1970년 인구조사 당시 1,182,759명으로 최다치를 찍은 구였다. 당시의 영등포구는 약 60년 전'의 인구가 현재 경기도 제 1도시인 수원, 광역시인 울산에 맞먹는 구였고, 이는 현재까지도 필적할 만한 자치구가 없는 수치이다.

2.6.3. 1973년 구파발(진관동) 편입과 인접지역의 서울 편입 주장

1973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어 현재의 서울특별시 경계선이 바로 이 당시 완성되었고(1995년의 안양천, 창릉천 과 2015년의 위례신도시쪽 경계 미세조정을 제외하면),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1구) 이와 함께 영등포구 중 신동출장소 지역(방배동을 제외한 오늘날의 서초구 지역)을 성동구로 넘겨주었다.[23]
1973년 7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및 경계조정
  •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 진관외리, 구파발리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진관내동, 진관외동, 구파발동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으로 변경되어 서울 편입
  •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현 광명시 광명동)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개봉동 (현 구로구 개봉동) 간 경계조정
해당 법률 원문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1973a.jpg
1973년 신도면 구파발(진관동) 일대 편입 및 도봉구·관악구 분구 당시 상황. 편의상 영등포-관악간 경계는 1975년 이후의 것을 사용했다.
1975년에는 한강정비사업으로 정리된 한강을 경계로 하여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2구)[24] 이와 함께 각 구(區) 간에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아래 표에 언급되지 않은 동네인 안암동-제기동 등에서도 자잘한 경계조정이 이루어졌다. 언급한 동네 간 경계가 직선화 된 것은 그 시기로 보면 된다.
1975년 서울특별시 각 구(區) 간 행정구역 조정
  • 서대문구 구기동, 평창동, 신영동, 홍지동, 부암동, 무악동, 교남동 및 동대문구 숭인동, 창신동( 동대문이 있는 동네이다.) : 종로구에 편입. 이로서 동대문이 동대문구에서 종로구 영역 내로 편입되게 되었다. 현재 동대문구에 동대문이 없는 이유가 이 때의 조정 때문.
  • 서대문구 정동(덕수궁이 있는 동네이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서울시청 바로 코앞까지가 서대문구 관할이었다.), 서소문동, 순화동, 의주로, 충정로1가(충정로2~3가는 서대문구로 남았다.), 중림동, 만리동 및 성동구 신당동 : 중구에 편입
  • 서대문구 상암동, 중동, 성산동, 연희동 일부 : 마포구에 편입, 연희동 일부는 '연'희동의 '남'쪽이라 하여 새로 이름지었던 연남동으로 신설
  • 중구 동자동 : 용산구에 편입
  • 동대문구 보문동, 도봉구 미아동 일부 : 성북구에 편입, 미아동 일부는 길음동-미아동(혹은 미아리)이라 하면 과거에는 좋지 않은 시스템이 있기도 했으나 현재는 다양하게 개선되었다.
  • 동대문구 용두동, 답십리동 각 일부 : 성동구에 편입하여 '용'두와 '답'십리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는 용답동 신설
  • 성동구 중곡동, 능동, 군자동 각 일부 : 동대문구에 편입하여 장안동 신설
  • 영등포구 독산동 일부 : 관악구 신림동에 편입. 현 조원동( 행정동)의 서쪽 절반( 구로디지털단지역 인근)에 해당된다.
  • 관악구 대방동, 신대방동 일부 : 영등포구 신길동에 편입. 원래 현 신길6동의 대부분은 신대방동, 신길7동의 대부분은 대방동이었다가(당시 대방동과 신대방동의 경계는 현재는 복개되어 대방천로가 된 대방천이었다), 대방로(현 여의대방로)를 기준으로 경계를 조정하면서 신길동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해당 지역에는 현 주소로는 신길동이지만 이름에 '대방'이 들어간 시설이 여전히 꽤 남아있다( 대방역, 대방초등학교, 대방동아파트, 천주교 대방동성당 등).

1977년 영등포구에서 안양천을 경계로 하여 강서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3구) 1979년에는 강남구에서 탄천을 경계로 하여 강동구가, 서대문구에서 은평출장소 관할지역으로 하여 은평구가 각각 분리·신설되었다.(15구)

1970년대를 거치며 인구는 550만에서 830만으로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세계 10대 대도시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1970년 당시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이 박정희에게 서울시 추가 확장을 건의하였는데, 당시 건의안에 포함되었던 편입대상 지역은(굵은 글씨는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이 아니었던 곳) 당시 시흥군 서면(현 광명시), 과천면(현 과천시), 안양읍(현 안양시)과 광주군 서부면, 중부면, 대왕면(현 성남시 일부, 하남시 일부, 광주시 일부), 부천군 오정면(현 부천시 오정구), 고양군 신도면, 원당읍, 지도면(현 고양시 덕양구)이었다. 기사 특히 시흥군 서면 광명출장소(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는 서울 개봉단지와 구로공단 계획과 맞물려 서울편입이 추진되었지만 결국 배제당한, 1981년 광명시 승격의 역사가 있다. 여담으로 1980년대 초반에 서울올림픽 요트 경기장 건설문제와 관련되어 당시 남양주군 구리읍 토평리(현 구리시 토평동)의 서울편입이 검토된 적 있었다. 기사 하지만 1973년 이후 '동' 단위 이상의 서울시 확장이 이루어진 적은 2015년 현재까지 없다.

1963년 서울시의 대대적인 확장과 함께 주변 경기도 일부 지역이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에 편입되었다. 도시계획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장기적으로는 서울시 행정구역 편입을 염두에 둔 지역이었으나 1973년 진관동 편입을 빼고는 끝내 서울시에 편입되지 못하였다. 위성도시 육성을 통한 서울(대도시) 집중 문제 해소가 가장 큰 이유였고, 편입 예정지에 대한 부동산 투기 문제도 있었다.[25]

정부가 이들 지역의 서울 편입을 배제했을 정도로 서울 인구 분산에 집착했던 진짜 계기는 월남 패망으로 안보적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 정책에서 서울 인구 분산 정책으로 선회했다는 뒷말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차례대로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서 해제되었고 1995년에 잔여 지역이 본격 해제될 당시에는 광명시 철산동 일부 월경지(현재의 광명롯데물류센터 자리와 1995년에 서울 가산동으로 편입된 철산3동 월경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제되었다. 고양 신도지구, 광명, 과천 일대의 전화번호가 경기도의 031이 아닌 서울의 02인 것도 그 시절의 흔적인 셈.

1963년에 대대적으로 확장해놓고도 당시에 행정편입되지 않은 주변 경기도 일부 지역을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 포함시키고 아까 서술한 대로 1970년에 서울시장이 박정희에게 직접 추가확장을 건의한 것을 보면, 서울시가 1963년 대확장에도 성이 차지 않아 추가 확장할 생각은 조금이라도 있었던 모양.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지구 편입지 (경기도 소재)
굵은 글씨는 1963년 도시계획 편입, 나머지는 1970년 도시계획 편입.
  • 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 광명리, 하안리 (현 광명시 철산동, 광명동, 하안동)
  •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현 과천시 전역)
  •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 지축동, 화전동, 덕은동 등, 이른바 '신도지구') : 현 은평구 진관동 지역(당시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 진관외리, 구파발리)만이 1973년에 서울시에 행정편입.
  •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갈매리 일부, 별내면 일부 (현 구리시 갈매동, 남양주시 별내동 일부) : 이쪽은 다른 곳과 다르게 1970년 5월경에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 편입되었다. 육군사관학교 부지 확장과 관련하여 도시계획 구역으로 편입.
  •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고강리, 원종리, 작리 (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원종동, 작동) : 김포공항 주변 지역 관리 및 화곡동 택지지구 개발과의 연계를 위해 편입한 것으로 보인다. 작동에서 발원해 원종동, 오정동, 대장동을 거쳐 굴포천으로 흘러나가는 베리내(대부분은 복개되어 '성오로(구 베리내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됨)가 서울 도시계획구역과 소사(부천) 도시계획구역의 경계였다.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greenbelt.jpg

자세한 것은 관련 자료 사이트를 참고하면 된다.

파일:attachment/서울특별시/역사/seoulurbanplan-map-official.jpg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구역 변천 지도

광명지구는 1982년에, 오정지구는 1986년에, 과천지구는 1991년에, 고양신도지구와 갈매지구는 1995년에 도시계획에서 해제되었다.

아래는 해당지역에서 서울시 도시계획 하에 조성된 것들 목록이다.
  • 과천지구 : 서울대공원, 렛츠런파크 서울
  • 광명지구 : 광명동 한진아파트, 철산동의 재건축 아파트단지의 전신에 해당되는 옛 주공아파트단지, 하안동 서울시립근로청소년복지관 및 미혼근로여성 임대주택단지(원래는 지금의 철산동, 하안동 일대에 구로공단 근로자를 위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조성이 예정되어있었으나 당시 시흥군 서면 북부지역의 서울 편입이 무산되면서 지금과 같이 소규모 단지로 축소된 것)
  • 신도지구 : 서울시립승화원(화장장), 난지물재생센터(분뇨/하수처리장), 지축차량사업소

1978년에는 서울시내 일부 변두리의 서울통화권 편입이 완료되었고, 1980년에는 고양군 신도면 전역, 원당면 신원리, 시흥군 서면 전역, 광주군 서부면 전역의 서울통화권 편입이 완료되었다.

2.6.4. 1980년~1994년

1980년 4월 1일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리하고, 이와 동시에 방배동과 동작동 일부(현 반포본동)를 강남구로 이관했다.[26] 이때 사당동 중 남부순환로 이남 지역은 관악구에 잔류하여 남현동이 되었다. 그리고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이 때 신도림동 중 도림천 동쪽 지역은 영등포구에 잔류하여 대림동이 되었다.(17구)[27]

1984년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 지역은 군사적 의미에서는 온전히 '서울'은 아니었는데,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방사) 위수지역이 서울 강북 지역뿐이었고, 강남 지역은 경기도 남부와 인천을 관할하던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 위수지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에 수도경비사령부가 수도방위사령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위수지역이 서울시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88년 1월 1일 강서구에서 양천구, 강남구에서 서초구, 도봉구에서 노원구, 동대문구에서 중랑구,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되었다(22구).[28][29][30]

1988년에는 서울 인구가 1000만명을 돌파했고, 1992년에는 1090여만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였다. 1988년~1992년에는 사실상 세계 인구 최다 도시였다. 왜냐하면 현재 서울보다 인구가 많은 인도의 델리, 뭄바이와 파키스탄의 카라치, 라호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러시아의 모스크바, 브라질의 상파울루는 당시에는 인구가 1000만 명이 되지 않았고, 당시 서울보다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 경계 내 인구가 더 많았던 도시는 일본의 도쿄도와 중국의 상하이, 베이징 3개 도시밖에 없었는데, 세 도시 모두 한국의 서울, 인천, 경기도 등 수도권 전체를 한 도시로 지정하는 수준으로 도시지역이 아닌 지역까지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로 지정했기 때문에 국제적 기준으로는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 전체가 도시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 도쿄시에서 확장된 도쿄도의 전체 인구는 서울보다 많지만 구 도쿄시 지역인 도쿄도 구부의 인구는 당시 900만 명 미만으로 서울보다 적었고, 베이징, 상하이는 당시 도시권 전체를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로 지정했음에도 인구가 1100만~1300만 명 수준에 불과했고, 도시 지역은 인구가 서울보다 적었다.[31] 현재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 인구 세계 1위는 인구 3000만 명의 중국 충칭시이지만, 충칭의 경우 어지간한 성(省)급으로 면적이 넓으며 남한 전체 면적의 80% 수준이다. 도심 지역 인구로만 따지면 700만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단일 도시 기준으로, 사실상 모든 광역권을 쌈싸먹는 중국의 도시이기에 가능한 것. 베이징의 면적은 서울의 27배, 상하이의 면적은 서울의 10배다. 애초 중국은 광역권 그 자체를 그냥 한 도시로 쌈빡하게 묶어버리고 각개의 시를 구로 묶어서 중국인들은 한국인처럼 행정구역에 따른 칼 같은 구분 없이 그냥 다 무시하고 생활권으로 한 도시인지 따진다. 참고로 세계 최대 인구 광역권은 도쿄이다. 베이징, 상하이, 충칭 등 중국의 대도시는 한국의 서울, 인천, 경기도 등 수도권 전체를 한 도시로 지정하는 수준으로 도시지역이 아닌 지역까지 단일 도시로 지정하는 일이 많아 국제적 기준으로는 전체가 도시라고 할 수는 없다. 인구 밀도가 대도시급인 1평방킬로미터당 3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구만 계산한다면 현재 상하이는 2100평방킬로미터에 1500만 명이 거주하고, 베이징은 1400평방킬로미터에 1300만 명이 거주한다.

2.6.5. 1995년 ~ 2008년

1995년 대한민국의 행정구역 개편 속에서 성동구, 도봉구, 구로구에서 동일로, 우이천,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하여 각각 광진구, 강북구, 금천구가 신설되고 광명시 철산동 일부가 금천구에 편입된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확장은 없었다. 이 때, 성수동 중 동일로 동부 지역은 노유동이 되었고, 가리봉동 중 남부순환로 이남 지역은 금천구 가산동이 되었다. 이 중 노유동은 이후 2008년 8월 자양동에 흡수되었다.
1995년 3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경계조정 차원)

자잘한 경계조정차원에서 소규모의 추가 편입이 이루어진 것. 참고로 지금도 일부 지도는 1995년 경계 조정 이전의 경계를 쓰는 경우가 간혹 보인다.
  •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일부 (현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일부) : 지금의 한진택배 물류센터, 국민일보 인쇄공장 등 철산교 서울방향 인근. 구로쪽에 유수지 일부와 당시에는 정비소나 공장이었던 지금의 롯데물류센터 자리는 서울에 편입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안양천 쪽은 경계조정이라기 보다는 철산3동 월경지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에 가깝다.
  •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소하동 일부 (현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 시흥동 일부) : 안양천 둔치내부의 구불한 경계를 조정한 것. 다만 그 문제의 독산동(12단지옆 근린공원, 안천중, 안천초, 독산한신 등)은 서울로 계속 남게되었다.
  •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 일부 (현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천왕동 일부) : 1973년 목감천쪽 경계조정 당시에 정리되지 못한 일부 경계를 조정한 것. 너무나 자잘하게 꼬여서 그런지 1995년 경계 조정때는 안양천쪽과 다르게 주민들의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 일부 (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일부) : 이쪽은 안양천변, 목감변 주변과 달리 1:1 교환이다.
1995년 경계구역 조정 법률 원문

그러나 광명시 쪽 경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안양천, 행정구역 개편/수도권/서울개편론/광명시 서울 편입 항목 참조.

한편, 1995년 행정구역 대개편을 앞두고 서울특별시 분할안이 검토된 적이 있었다. 서울특별시를 서울시(강북), 영등포시, 강남시 이런 식으로 쪼개자는 것. 물론 서울쪽의 반발이 뻔히 나왔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 분할은 없다"고 일축하는 바람에 이 떡밥이 쏙 들어가버렸다. 노무현 정부때 이와 비슷한 떡밥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 떡밥 및 현재까지 이루어지는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 문제에 대해서는 서울특별시/행정구역 개편 문제 참조.

2008년에는 몇몇 법정동이 통합되었다. 노유동, 포이동, 모진동 등이 바로 이 당시에 사라졌다.

1992년의 절정을 끝으로, 1993년부터 서울 인구가 점차 줄어들더니 2003년에 경기도 인구에 역전당했고, 2016년 5월에 1000만명의 선이 28년만에 깨졌다.

2008년에는 일부 법정동의 통폐합(포이동, 노유동 등)이 이루어졌고, 광명시와의 도시계획구역 경계조정(행정구역 경계와 일치화) 역시 이루어졌다.

2.6.6. 2015년 이후

그리고 2015년 12월 7일, 위례신도시와 관련한 행정구역 경계 조정이 실시되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와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 이로써, 1995년 안양천변 경계조정 이후 20년만에 서울시 경계가 소폭 변경되었다. 관련기사
2015년 12월 7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경계조정 차원)

자잘한 경계조정 차원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과 장지동의 각 일부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복정동 , 하남시 학암동 각 일부와의 1:1 교환 형식으로 소규모의 추가 편입이 이루어진 것.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복정동 일부
  •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일부

하지만 이미 문제가 해결된 위례신도시쪽( 위례신도시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위례신도시는 이곳에 있던 여러 군부대(일명 남성대)를 이전하고 남은 땅에 만든 신도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개발될 때까지 오랫동안 아무런 논의가 없었던 것.)을 제외한 몇몇 서울시계 지역에서 아직도 경계 문제를 둘러싼 지자체간 갈등은 진행 중.

3. 명칭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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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서울'의 역사적 유래에 관한 내용은 '서울특별시' 문서의 '어원' 단락을 참조.

3.1. '서울'과 '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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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경성과 같은 한문지명은 공식 명칭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조선 시대에 이미 백성들이 일상에서 서울을 칭하는 이름은 '서울'이었다. 1896년 발행된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발행지를 “조선 서울”로 적어 ( 대한제국 수립 이후 “대한 서울” 또는 “대한 황성”이라고 기재해) 발행했으며, 해당 신문의 영문판 역시 발행지를 “SEOUL, KOREA”로 기재하였다. 아울러 1899년 서울에서 최초로 개통된 전차 역시 태극 마크와 함께 “ELECTRIC DE SEOUL”이라는 현판을 달고 달렸다.

일제 강점기 한성부가 경기도 경성부로 개칭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를 보면 창간호부터 신문의 영문 타이틀을 보면 THE DONG-A DAILY, SEOUL, 즉 경성의 일본식 표현인 'KEIJO'가 아니라 'SEOUL'로 표기하고 있고 동 창간호에서 '서울호텔'이라는 등의 '서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1920년 4월 2일자 제2호의 영문기사에서도 Seoul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해방 후 미 군정은 1년이 지나도록 서울의 명칭에 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일제가 지은 '경성부'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떠나가고 한국인만 남게 된 경성부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왕이 살던 도읍을 뜻했던 '서울'이라는 우리말을 써서 '서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그냥 자기들끼리 그랬던 것이고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서울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미 군정청이 1946년 8월 15일 발표한 '서울시 헌장' 이고 '서울특별시'란 이름이 법적 효력을 갖게 된 것은 미 군정청이 1946년 9월18일 '서울특별시의 설치'라는 군정법률 제106호를 공포하고, 그해 9월 28일 법이 발효되면서부터다.

서울시가 '특별시'가 된 이유는 미 군정이 서울을 경기도에서 분리시킨 뒤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려고 하면서 미국 각지에서 시행되고 있던 ' 독립시(Independent City)' 제도를 참고했는데[32]원래 영문으로 작성됐던 군정법령을 직역하면 `서울독립시(Seoul Independent City)'가 돼 어색했기 때문에 결국 '서울특별시'로 번역한 것이다. 사실 한자 뜻만 보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 特(달리하다), 別(나누다). 원문에는 분명히 경기도에서 서울을 분리한다라는 의미를 사용하였다. 결국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별이란 말을 적은 것. 지방행정학계에서는 희대의 오역으로 취급한다. 덕분에 수도권-지방간 격차문제를 지적할 때 "왜 서울특별시만 '특별(Special)'하냐?"는 (...) 지적의 빌미를 남겨두게 되었다.

3.2. 명칭 개정 시도

다만 그 당시 일상에서 민중이 사용했던 ‘서울’은 지명으로서의 서울이라기보다는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의 서울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서울’은 당시 공식 명칭이었던 한성, 경성부 등과도 별 탈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기에 경성 대신 보통명사였던 ‘서울’을 지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서울’은 본래의 의미를 점차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한국전쟁이 중단되고 난 1950년대 중반에 들어 개칭 논란이 일어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았다. 사람들이 보기에 영 껄끄러웠던 작명이었기 때문.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수도명칭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대통령 담화문에서 ‘서울이란 말이 수도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이지 땅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서 어떻게 발음해야 되냐고 늘 문제가 되고 있으니 민간에서 도성의 좋은 이름을 만들어 주길 바라며 만일 다른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면 한양으로 고치겠다.’고 발표하며 새이름을 공모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학계 인사들은 찬성했는데, 대표적으로 한글학자로 널리 알려진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있다. 외솔 최현배는 1955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나라의 머리가 되는, 정부의 모든 기관의 중심이 있는 곳을 뜻하는 서울이라는 순우리말 단어를 잃어버리고 땅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유한 칭호 하나 없다는 것으로서 우리의 수치라면서 바꾸자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병원병원이나 대학대학교 같은 단어가 고유명사로 쓰인다고 상상해보면 최현배 선생의 기분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다. 최현배 선생은 서울의 대체이름으로서 순한글이름인 한벌(큰 벌판)과 삼벌(삼각산의 벌판)을 제안했다. 그 외에 찬성한 당시 지식인들로 최남선(한양 주장), 이병도(한성 주장), 국어학자 김윤경(한벌 주장) 등이 있다. 역사학자들은 한자어 이름을, 국어학자들은 순우리말 이름을 밀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대통령의 담화 이후 서울특별시에서는 수도명칭조사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1위는 우남(이승만의 호),[33] 2위는 한양, 3위는 한경, 4위는 한성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내가 봐도 이건 아니다. '우남' 으로 부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라는 입장을 밝혔고, 직접 내세웠던 이름은 '한도(韓都)'라는 지명을 제안하였다.[출처] 그러나 여론조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고,서울시민들도 이 대통령이 내세웠던 한도(韓都)랑 정해져 있는 수나 양의 뜻인 한도(限度)를 제대로 구별을 못하고 있을 뿐더러 김형민 당시 서울시장마저 '한도'라는 동음이의어(限度와 韓都)를 구별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서울이라는 이름을 강하게 주장해버려 결국 흐지부지되어 서울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쭉쭉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서울’이 서울특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거의 굳어져 논란이 사그러들었지만, 2005년에 서울특별시에서 서울의 중국어표기를 ‘수이( 首爾, 서우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을 때 여기에서 불똥이 튀어서 서울의 명칭의 정당성 논란이 다시 한 번 불거진 적이 있다. 당시 성균관대학교 이대근 명예교수는 ‘서울은 首爾가 될 수 없다’는 칼럼에서 "‘서울’은 처음부터 잘못 붙여진 이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카자흐스탄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수도 이름인 아스타나는 카자흐어로 수도를 가리키는 단어인 아스타나를 그대로 쓴 말이었다. 2019년에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퇴임을 기념하며 도시명이 누르술탄으로 변경되었다가 2022년 다시 아스타나로 환원되었다.

3.3. 명칭 개정에 대한 의견들

한성(漢城)이나 한양(漢陽)이라는 옛 이름은 과거 중국 한족(漢族) 왕조의 속국임을 자처했던 지명이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한(漢)이야말로 도시 서울을 상징하는 한자이다. 왜냐하면 한(漢)이 서울의 한강(漢江)을 뜻하기 때문인데, 북한산(北漢山), 남한산성(南漢山城), 한양(漢陽), 한성(漢城) 다 한강과 관련되어 지어진 명칭이다. 그만큼 이 지역에서 한강의 의미는 아주 오래전부터 각별했었다. 한강은 백제에서 불렀던 한수(漢水)에서부터 이어져온 이름인데, 한수(漢水)는 순우리말 ‘큰물’을 음차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의 민족 한족(漢族)과는 단순 음차 이외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 왜 한강의 한은 韓이 아니라 漢인가? 간단하다. 漢이 물과 관련된 한자이기 때문이다. 종종 한족(漢族)을 의식하여 한강을 漢江에서 韓江으로 부르기도 한다.

보통명사를 고유명사화해서 사용하는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흔히 있는 언어관습이기 때문에 명칭을 개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렇게 ‘서울’을 고유명사화해버리면, ‘미야코(みやこ)를 교토(京都)에서 도쿄(東京)로 옮겼다.’와 같은 문장을 우리식으로 바꿀 때 상당히 이상해진다. ‘서울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겼다.’고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유명사화를 하더라도 표준 한국어에(알다시피 표준 한국어는 한자어와 일부 표준으로 인정된 외래어를 포함한다.) '서울'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보통명사가 있으므로 큰 문제가 없다. 애초에 반세기가 넘게 지난 21세기 현재로써는 "서울"이란 단어 자체도 보통명사의 기능이 거의 퇴색한 상태이다. 즉, 위 문장을 우리식대로 바꾼다면 '수도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내지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천도했다' 라고 쓰는 게 일반적이지, 굳이 '수도' 대신에 '서울'을 보통명사의 용법으로 쓰는 경우는 21세기 현재로써는 극히 드물다. 1950~1970년대정도까지만 해도 나름 의미가 있고 용례가 있었지만, 2010년대 현재는 70~80대 이상 노년층을 제외하면 사실상 고어 사어 취급. 또한, 굳이 '서울'을 위 용례같은 경우에서 보통명사로 사용하고 싶은 경우, 몇가지 수식어를 덧붙여 '서울(수도)의 기능을 서울특별시에서 부산특별시로 옮겼다' 라고 우회적으로 보통명사 용법으로 사용되었음을 표현할 수도 있다. 애초에 언어 자체는 역사성이 있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하다못해 해당 보통명사를 대체할 다른 동의어가 없어서 말을 지어내야 하는 상황도 아니므로, 오히려 위와 같이 번역의 어색함과 보통명사의 필요성을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 억지에 가깝다. 애초에 '서울'의 보통명사로의 용법은 사실상 쇠퇴되어 사장되었기 때문. 거의 고어(옛말) 취급이다. 요즘엔 '서울'을 보통명사처럼 쓰고 싶은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99.999% 서울 수준의 XX시 내지는 서울 격의 XX시, 서울과 동급인 XX시, 혹은 우리나라의 서울에 해당하는 XX시 형태로 '서울'이란 단어 자체는 고유명사 취급하되, 대신 비교의 수식어를 덧붙여 수도의 의미를 강조하는 형태로 쓰기 때문.

서울이라는 이름은 이미 국내외적으로 정착됐기 때문에 바꾸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미 한 번 굳어진 서울이라는 이름을 한성이나 한양으로 억지로 바꾸게 된다면, 당장 서울 전역에 설치된 I·SEOUL·U 부터 다 갈아엎어야하며, 이 외에도 국내에 있는 수많은 '서울' 표기들을 싹 다 뒤짚어 엎어야 한다. 모든 교과서도 싹 다 수정하고, 관광 홍보물도 싹 다 수정하고, 서울교통공사, 서울주택도시공사 등 서울특별시 소속 지방공기업들의 사명도 변경하고, 여러 공/사기업의 전산망에 등록된 지명도 엎어야 하는 등 바꿀게 한두개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만 바꾼다고 되는것도 아니고 세계 각국에게 공문을 새로 보내서 서울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음을 설명하는데 한세월 걸린다. 당장 세계 각국에 서울 관광을 목적으로 돌리고 있는 각종 홍보물들을 싹 다 폐기하고 새로 제작해야 하는, 의식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굉장한 비용이 들텐데, 명칭 변경이 과연 그만한 비용을 들일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국민들의 충분한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서울이 고유명사처럼 자리잡기도 하였고, '서울'은 본래 보통명사라는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순우리말 보통명사를 한자로 음차하여 보통명사 지위를 무력화시키면 그만이다. 가령 서울(西亐)[35]이나 서울(西𠃗), 차자표기인 서울( 徐菀)같은 식으로 바꾸면 해소된다는 것이다. 《二十一都懷古詩》(이십일도회고시 #), 《漢京識略》(한경지략 #), 《增補文獻備考》( 증보문헌비고)에 (서울)로, 《東史綱目》( 동사강목), 《北學議》( 북학의)에 (서울)로, 《大東地志》( 대동지지)에 (서울)로, 《盎葉記》(앙엽기 #)에 (서올)로 음차해 기록한 예시가 있다. 이런 식이면 '서울'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고 우려하는 영문 표기도 유지시킬 수 있다. 하지만 보통명사를 고유명사화한다는 비판은 여전히 피하기 어렵다. 태국의 수도처럼 국내용 지명(끄룽텝)과 국제용 지명(방콕)이 공존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화 되는 경우는 더러 있다. 이스탄불 같은 경우는 그 도시라는 뜻이고, 교토의 한자는 경도인데 경도라는 말은 수도라는 말로서 한중일 다 오래전부터 수도를 이야기 할 때 쓰던 보통명사다. 서울이나 한성 또한 경도라고도 불렸다. 일제시대 때 쓰였던 공식 명칭인 경성이라는 말도 한중일에서 수도를 표현하던 보통명사적 표현이었다. 경성이라는 말도 일제시대 때 새로 생긴 표현이 아니라 그전부터 서울을 부르던 수많은 이름 중 하나였던 것. 일제시대 때 영화를 보면 일본어 자막으로는 경성이라 하지만 또 대사로는 서울이라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 북경은 수도라는 의미의 경에 방위명인 북 북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고, 일본의 수도인 동경인 도쿄는 동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중화민국의 명목상의 수도 남경 난징 또한 남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이다. 이것도 역사적으로 따지면 겹친다. 북경, 동경, 남경등은 수도에 방위명을 붙힌 뜻이기 때문 예를 들면 동경은 북송 때 개봉부의 명칭이었고, 원래 서울도 고려 때는 남경이었다. 고려 때 동경은 경주였다. 금나라 때남경은 개봉이었다.

4. 인구 변천

1992년 1097만까지 증가한 인구는 1기 신도시의 분양으로 경기도와 인천으로 인구가 분산되고 서울 자체의 출산율도 떨어짐에 따라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 중반 뉴타운 건설로 다시 인구가 증가할 때도 있었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서 2023년 기준으로 940만까지 줄었다. (물론 여전히 많지만) 관할 구의 개수는 여전히 25개다.

5. 여담

  • 일제강점기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의 수도 도쿄가 폐허가 되자 수도 천도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엔 서울 혹은 용인 모현읍 외대캠퍼스 부지 일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지진 이후로도 수도 천도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진 적도 있었으며, 일제의 본토 사찰단이 서울 및 용인이 일제의 수도로 적합한지 여러가지 시찰을 행한 적도 있었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식민지에 수도를 둔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36] 만약 이 상태로 광복이 되었다면...[37]

6. 관련 문서

7. 관련 사이트

  •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
  • 항공사진의 변천을 보고 싶다면 여기로 들어가면 된다. 허나 인천시와 다르게 서울시는 전산시스템의 문제 때문인지 항공사진 조회 절차가 복잡하다(...). 1972년(정확히는 1971년 말부터)부터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


[1] 서열은 3~4위였다. 위로는 개경, 서경이 있었으며 동경보다 처음에는 낮았으나 여몽항쟁기 이후 남경의 지위는 동경보다 확실히 우위에 서게 된다. [2] 한성이 재령군이라는 견해가 통설이지만 한성이 서울에서 재령으로 옮겨왔을 가능성 또한 부인할 수 없다. [3] 다만 근초고왕대 남한산에서 남경이 위치한 한성으로 옮겼다고 적힌 것으로 보았을 때 한성백제 전체 역사와는 별개로 풍납토성이 위치한 남한산은 별개의 지역으로 보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남한산은 광주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그러나 한양 근교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의 존재와 23부제 시행 당시 한강 이남 고을 중 유일하게 한성부에 편입한 것으로 보았을 때 광주 역시 완전히 별개의 지역이라기보다는 한양 근교의 배후지로 인식하였다. [4] 거기다 다른 고도의 예를 봐도 그렇다. 중국 7대 고도로 유명한 시안조차 사실 옆 도시인 셴양에 위치했던 진나라의 역사마저 자기 도시의 역사로 간주하지 별개의 도시의 역사로 여기지 않는다. 시안과 셴양은 하남위례성과 한양도성간의 거리와 비교해서도 훨씬 멀다. 다른 도시이기는 하되 분명히 같은 지역에서 일어났기에 같은 뿌리의 역사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5] 오히려 천안 직산 근처는, 백제의 위례성이 아니라 백제 이전 마한 맹주였던 목지국으로 비정된다. [6] 이는 삼국사기에서 백제 위례성이 남성과 북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기록과 합치된다. [7] 지명 '북한산'은 나중에 '한양(漢陽)'이 되었다. 중국 전한 시대 이후로는 한자지명을 만들 때, 성읍이 강의 남쪽에 있다면 뫼 산(山)을 붙이고 강의 북쪽에 있을 땐 볕 양(陽)을 붙여 이름 짓는다. (태양 남중에 따른 일조량과 관련함) 우리나라는 8세기(신라 경덕왕)부터 율령제/한자식 지명을 수용한 바 있다. [8] 다만 예성강은 원래부터 은근히 개경과 거리가 있어서 개경이 수도 치고는 수운에 불리한 입지였다. 거기에 구릉지가 많아 시가지가 발전함에 따라 확장할 만한 평야지대가 좁다는 문제도 있었다. [9] 명목적인 수도였던 조선인민공화국까지 하면 5국가이다. [10] 시기상으로 강화도 조약 8년 후에 촬영된 사진이 된다. 현 광화문 광장 남대문로의 옛 모습이 관측된다. [11] 1914년에 잠실/신천 일대가 고양군 편입. 여기에 대해 부연한다면 당시의 한강은 지금의 잠실 인근에서 마치 여의도 부근처럼 중간에 섬을 두고 위/아래로 흘렀다. 위로 흐른 개울은 지금의 한강이고 아래로 흐른 개울은 지금의 석촌호수 부근이다. 그런데 1914년 당시에는 위쪽보다 아래쪽이 더 넓어서 아래쪽 경계를 강북/강남 경계로 보았고 그 결과 지금의 잠실지역(석촌호수 북쪽)이 고양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이후 을축년 대홍수로 위쪽 강이 더 넓어졌고 결국 1970년대 잠실지구 개발 당시 아래쪽 강은 아예 매립해서 강(개울)으로의 역할이 소멸되고 그 흔적으로 석촌호수 정도를 볼 수 있다. [12] 논문 출처: 楊普景. (1994). 서울의 공간확대와 시민의 삶. 서울학연구, (1), 48-77. [13] 서울역사박물관, 1945년말 초등 국어교본 상 소개문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프레시안, "우리의 수도는 아직도 '게이조(京城)'입니다!", <서울신문> 1946년 5월 25일자 기사 "서울의 명칭이 경성부로 존속" 및 <서울은 깊다>(전우용 지음, 돌베개 펴냄), 19쪽에서 재인용
아카라이브 도시·지리 채널, 해방후 경성의 이름 변경에 대한 혼란 관련 자료
[14] 단, 신도면 북한리, 효자리 지역은 재편입되지 못하였다. 그래도 이곳은 지역번호로 경기도 번호인 031이 아닌 서울 번호인 02를 쓰고, 후술한 대로 1963년부터 1995년까지 이곳을 포함한 신도면(현 고양시 덕양구 관할 행정동 효자동, 삼송동, 창릉동, 화전동, 대덕동) 일대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했다. [15] 출처 : 김만희의 서울대 행정학 석사 논문 <대도시 자치구 분구(分區)에 관한 실증 분석 : 서울시 자치구 분구를 중심으로> (2006) [16] 면적 268.35㎢ [17] 서울특별시기가 사용되고 있을 당시에 울진군도 비슷한 깃발을 사용했다.(1962년 12월 경상북도 편입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 다만 차이점이라면 중앙 원의 크기가 조금 크다는 점과 배경색, 로고 색상이 다르다는 점이다. [18] 대신 이렇게 되어 그 후에 서울 수도권이 팽창되어 현재까지 내려온다면 도봉구 및 노원구는 남양주 다산 신도시와, 강남3구와 강동구는 분당신도시처럼 바뀌었을 것이다. [19] 이들 지역을 서울특별시와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만들기보다는, 서울특별시에 편입시키고 경무대, 서울특별시청 등의 주요 관공서를 신수도 지역으로 이전하고 기존의 강북 지역은 이름만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으로 남기는 식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20] 단순한 저개발국이 아니라,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식량 원조로 버텨내기에도 빠듯한 상황에 거창한 도시계획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는 얘기다. [21] 서울特別市·道·郡·區의管轄區域變更에關한法律(서울특별시·도·군·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 법률 제1172호, 1962.11.21. 공포)
大韓民國憲法第5號(대한민국 헌법 제5호, 1960.11.29. 일부 개정)
公布式令(공포식령, 대통령령 제429호, 1950.12.30. 일부 개정 · 공포)
[22] 신규편입지가 서울시 행정구역 편입과 동시에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행정구역은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도시계획구역은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소관이기 때문. [23] 같은 날 시흥군 안양읍, 부천군 소사읍, 오정면, 광주군 낙생면, 돌마면, 대왕면 일부가 각각 안양시, 부천시, 성남시로 승격,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 동구로 분구, 경상남도 동래군 양산군에 통합되었다. [24] 같은 해에 정부 직할 부산시 부산 동구, 부산진구, 동래구의 일부가 부산 남구로 분리되었다. [25] 2014년 해양수산부 장관 인선때 이주영 장관후보자가 1970년대 말에 지금의 광명시 지역의 땅을 사둔 전력때문에 투기 논란이 있었다. 해당 후보자가 광명시(당시 시흥군 서면) 땅을 사두었을 시절에는 당국이 광명리, 철산리의 서울 편입 여부를 두고 갈팡질팡했었고 부동산 업계에서는 해당 지역의 서울 편입설이 나돌았었다. [26] 실제로 이 일대는 강남구로 넘어간 후에도 1998년 학군 조정때 까지는 8학군이 아닌 9학군에 속했었다. [27] 같은 날 정부 직할 부산시, 경상북도 대구시(1981년 대구직할시로 승격), 전라남도 광주시 해운대구, 수성구, 광주 북구가 각각 신설되었으며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 충청북도 제천군 제천읍,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읍, 경상남도 창원지구출장소도 각각 동해시, 제천시, 영주시, 창원시(잔여 지역은 제원군, 영풍군, 의창군으로 분리)로 승격되었다. 또한 서울 근교의 양주군 구리읍, 미금읍 등 일대도 남양주군으로 분리되었다. [28] 이 때 도봉동과 창동은 노원구 도봉구에 도봉동이 없다니, 도곡동은 서초구로 보냈으나, 1년 만에(1989년) 각각 도봉구와 강남구로 환원되었다. [29] 1980년대 주택가가 형성되었던 목동 지역의 대문들에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목동이라는 패찰이 붙어 있는 곳이 2015년 현재, 아직도 많다. 그 패찰들은 모두 80년대부터 붙여진 아주 오랜 유물인 것. 이 패찰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에서 1978년에 제정되어 1988년까지 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우편번호(OOO-OO형식의 5자리) 표기 없이 주소만 표기되었으나 1983년부터는 우편번호도 같이 표기하였다. 그 외에도 공릉동 지역의 대문들에도 목동과 마찬가지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공릉동이라는 패찰이 있는 집도 있다. 또한 서울 외에도 인천광역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등의 대도시에도 동일한 패찰이 붙어있는 곳도 있다. [30] 같은 날 인천직할시, 부산직할시, 대구직할시, 충청남도 대전시(1989년 대덕군과 통합하여 대전직할시로 승격), 경상남도 울산시(1997년 울산광역시로 승격)는 인천 서구, 남동구, 금정구, 달서구, 대전 서구, 울산 동구가 각각 신설되었으며 광주직할시 광산군 송정시를 편입하여 광산구로 출범하였다. 또한 서울 인근의 부천시도 중구와 남구로 분구되었다. [31] 현재는 도시 지역도 서울보다 인구가 많다. [32] 그러나 독립시라고 해도 결국에는 주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로서의 개념을 제대로 살리려면 워싱턴 D.C.처럼 서울특별구역(District of Seoul)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것이 더 정확했다고 여겨진다. [33]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이 일단 적어도 이 시기까지 이승만은 국가의 창립자로 칭송을 받던 시기이다보니 민중들이 단순히 창립자의 이름(정확히는 호)을 수도의 이름으로 하길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실제로 미국도 수도를 국부인 조지 워싱턴에서 딴 워싱턴 D.C.로 지었다. 물론 후일 이승만의 평가의 역전을 고려해보면 우남이 되지 않은건 천만다행이였다고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외솔 최현배 선생은 우남시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고 "지금 장난치냐?" 라고 격노했다. 평소 엄격 근엄 진지하고 강직했던 외솔 선생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출처] 이 대통령은 동 담화에서 지난 번 "서울시와 각부에서 협의해서 민간에서 투표를 받아본 결과 보통사람들은 '우남'이라고 해서 작정했다고 하는데 이는 원치 않는 바" 라고 하여 '한도'가 좋을 것이라고 의견을 말하였다. (동아일보 1957.1.20.) [35] 공교롭게도 '서쪽 땅'이라는 직역이 된다. 실제 서울이 한반도 지리상 딱 서쪽에 자리한다. [36] 포르투갈 왕국이 그러한 경우인데 나폴레옹 전쟁으로 포르투갈 왕가가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잠시 망명하면서 한동안 리우데자네이루를 수도로 삼았다. [37] 다만 경성이나 용인이 케이죠우핫 꼴을 당하는 그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애초에 미국은 ‘식민지’인 조선을 일본 본토와 철저히 구분하여 실제 역사에서도 일부 소규모 폭격을 제외하고는 큰 공격이 없었고,설사 경성에 천황이 눌러앉았다 해도 히로히토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던 미국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