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지금의 부천시 지역은 원래는 부평도호부의 일부였으나 근대화 이후로 소사읍의 중심이었던 경인선 부천역 주변 지역이 자연스럽게 도시화되면서 시로 승격하였다. 시 승격 동기인 안양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울특별시의 인위적인 도시계획(광명/과천/구성남의 경우)이 아닌 산업화와 수도권 팽창에 따라 서울과 인천이라는 두 대도시 사이의 요충지에 자생적으로 생긴 위성도시라 할 수 있다.2. 삼국시대 ~ 고려
원래 근대까지 부평과 부천은 단일 지역으로서 공통의 역사와 문화권을 공유해왔다. 부천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1914년이며 이마저도 부평에서 파생된 명칭이다. 1914년 이전의 역사는 부평구/역사를 참고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부천 고강동 출신인 시인 변영로의 호 ‘수주’는 과거 고려시대의 부평(과 부천)의 행정구역명에서 따온 것이다.
3. 조선
현재의 부천시 지역은 전통적으로 부평도호부의 일부로 취급되었다. 이 지역에 독자적인 이름이 붙고 발전을 시작한 것은 1899년에 경인선 개통에 따라 소사역(지금의 부천역)이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 때 이 지역의 이름은 상오정면[1], 하오정면[2], 주화곶면[3](이상 1914년부터 오정면), 석천면[4], 옥산면[5](이상 1914년부터 계남면[6])이었다.4. 일제강점기
부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4년 조선총독부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당시였다. 원래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는 역사적으로 별개의 행정구역[7]이었으나, 인천부의 영역을 제물포 개항장 일대(현재의 중구, 동구)로 축소시키고, 인천부의 잔여지역인 주안[8], 문학[9], 다소[10], 남동[11], 소래[12], 영종도, 용유도, 덕적도와 부평군 전역을 통합하면서[13], 부평의 부(富)와 인천의 천(川)을 따 부천군(富川郡)이라 명명하였다.[14] 당시 부천군청은 옛 인천부의 관아 소재지였던 문학면 관교리(현재의 남구 관교동)에 설치되었다. 당시 부천군청은 인천도호부관아 건물을 사용했다.- 1914년 당시 부천군의 행정 구역
-
구
인천부 지역
문학면(군청소재지, 현 연수구 및 남구 일부), 남동면(현 남동구), 다주면(현 미추홀구 및 남동구 일부, 부평구 십정동), 소래면(현 시흥시 북부), 영종면(현 중구 영종도 등), 용유면(현 중구 용유도, 무의도, 실미도 등), 덕적면(현 옹진군 덕적면 및 자월면 일부) -
구 부평군 지역
부내면(현 부평구 및 계양구 남부), 계양면(현 계양구 북부), 서곶면(현 서구 중 검단을 제외한 지역), 계남면(현 부천시 중남부 및 구로구 중 안양천 서부지역), 오정면(현 부천시 북부 및 강서구 일부) -
기타 지역
북도면(강화군에서 편입, 현 옹진군 북도면), 영흥면(남양군에서 편입, 현 옹진군 영흥면 및 자월면 일부), 대부면(남양군에서 편입, 현 안산시 대부동 및 풍도동)
추후 서술하지만, 이후 거듭된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옛 인천부 영역이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모두 인천으로 돌아가면서(지금의 시흥시 북부 지역 제외) 지금 영역만으로 보면 왜 (인)천 자가 붙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15] 그렇다고 이름을 부평으로 할 수도 없는 것이, 옛 부평의 중심지( 부평구와 계양구 일대)까지도 인천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은 인천, 부평, 부천이 모두 따로 존재하는 거시기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지금의 관교동에 있던 부천군청은 1940년에 개항장 지역인 인천 욱정(아사히마치, 광복 이후 답동)[16]으로 이전하였다.
1936년과 1940년에 두 번에 걸쳐 문학면, 남동면, 다주면, 부내면, 서곶면이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면적이 축소되었다. 고양군과 비슷한 케이스.[17] 앞서 1931년 계남면이 소사면으로 개칭되고, 1941년 소사면이 소사읍으로 승격되었다.
5. 대한민국
6.25 전쟁 당시에는 백령도와 연평도 일대만 건진 옹진군의 임시 군청을 부천군청 내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1962년 인천시 내(현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에 있던 부천군청을 소사읍 심곡리(현 부천역 남부 NH농협은행 자리, 심곡본동 671)로 이전해 왔다. 기존 소사읍사무소가 부천군청이 되고[18], 소사읍사무소는 인근에 새로 이전하였다.[19] 소사읍과 그 주변지역이 성장하면서 이전한 것인데, 이로 인해 도서지역 주민들은 군청을 오가려면 인천항에서 차량이나 경인선 철도를 타고 다시 내륙의 소사까지 가야 했으므로 더 불편해졌다.1963년~1973년 당시의 부천군 관내도.
1963년 오정면의 오곡리, 오쇠리[20] 및 소사읍의 동쪽 지역(개봉리, 오류리, 고척리, 온수리 등 현재의 구로구 안양천 이서 지역)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었으며, 영종면 작약도가 인천시에 편입되었다.
부천군 시절의 '군민의 다짐'. 여기에 등장하는 곳들(계양산, 소래산, 여섯 섬[21])이 모두 현재는 부천시 관할이 아니다. 다만 '경인간 요충'이라는 문구는 지금도 유효하다.
1962년 소사읍사무소 이전 당시부터 부천시 승격 이전까지 사용된 부천군 깃발.
부천시 승격 이후 1991년까지 사용한 깃발. 현재도 맨홀 뚜껑 등에서 볼 수 있다.
1973년 부천군을 폐지하고 소사읍을 부천시로 승격하였다.[22] 이와 함께 도서지역(영종면, 용유면, 북도면, 덕적면, 영흥면, 대부면)은 전부 옹진군으로 편입시키고[23], 계양면(현재의 계양구 북부)과 오정면(현재의 옛 오정구 지역 및 도당동·약대동·춘의동 일부)을 김포군에, 소래면(현재의 시흥시 북부)마저 시흥군에 편입시킴으로서 아예 바다가 접하지 않은 내륙지역이 전락했다. 이 중 김포군에 편입되었던 오정면은 2년 후인 1975년에 부천시로 재편입되었다.[24] 오정면이 부천에 재편입된 이유는 김포군에 이관됨에 따라 주민들의 행정서비스가 불편해졌다는 불만이 많았기 때문. #
1975년 10월 26일
허허벌판의 중동, 부천시
김기찬의 책 "Lost Landscapes"
1981년 인천직할시 승격 당시, 인천 편입 요구가 있었으나 대구를 제3의 도시로 남기고 싶어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의중[25] 때문에 인천 편입이 무산되었다는 풍문이 있다고 한다. 다만 당시 대구직할시 인구가 약 180만(신규 편입 지역 제외 시 약 160만), 인천 인구가 약 100만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부천을 인천에 편입해도 인천이 대구를 역전하는 것이 빨라졌을 뿐 당장 도시 순위가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1983년 시흥군 소래읍 계수리와 옥길리의 각 일부를 편입했으며, 1988년 1월 구제를 실시하여 중구[26]와 남구[27]의 2개 일반구가 설치되었다. 여담으로 현재 특별시·광역시인 도시들을 제외[28]하고 일반시들 중 최초로 구제가 실시된 도시이기도 하다( 수원시가 1988년 7월 분구된 것에 비해 반 년 앞섰다).[29]
1989년 노태우 정부의 '200만호 주택건설' 정책에 의해 1기 신도시의 하나로 중동신도시가 개발되었으며, 1991년부터 국내 지자체 최초로 '도시이미지 형성작업'에 착수해 자체 마스코트 및 색상, 로고송 등을 확정한 후 1990년대 후반에는 중동신도시의 2차 사업인 상동지구까지 개발되어 부천은 수도권의 대표적인 주거 도시로 변모하였다. 이로 인해 부천의 '공업도시' 이미지는 옛날에 비해 많이 사라졌고 '주거도시( 베드타운)'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1993년에는 기존 중구와 남구를 폐지하고 3구 체제로 재편하였다. 기존 남구 일대를 관할하는 소사구를 설치하고(사실상 개칭), 기존 중구는 둘로 분할해서 원미구와 오정구를 설치하였으며, 남구(소사구)의 경인선 북부지역인 중동, 상동, 소사동 북부[30], 역곡동을 원미구에 편입하였다. 1995년에는 행정구역 경계 미세조정 차원에서 인천 계양구 서운동의 극히 일부가 부천시에 편입되었고, 1997년에는 부천시청이 중동 신청사로 이전됐다. 2016년 7월 4일 일반구를 폐지하고 책임읍면동제를 실시하면서 3구가 모두 폐지되었다.[31]
하지만 부천시는 행정 접근성 약화 및 시민들 간의 소통 장애 등의 사유로 인해 3개 일반구 체제로 롤백하는 '행정구역 변경안'을 냈고 행정안전부가 2023년 5월 19일 승인했다고 21일 밝혔다. # 일반구 체제는 2024년 1월 1일부터 적용되었다.
2023년, 시 승격 50년을 맞아 시 로고를 변경했다.
6. 여담
오늘날에는 원도심이었던 부평보다 부천이 상권이 더 발전한 상태다. 부천역이 부천시 남부와 시흥 북부의 여객수요를 아우르고, 송내역이 중동신도시와 인천 동남부 지역까지의 여객수요를 커버하면서 상권이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노태우 정부가 1기 신도시로 중동신도시를 개발하면서[32] 부평 지역의 일부 유동인구까지 흡수해 골든 트라이앵글을 완성, 현재는 수도권 서부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을 갖게 되었다.[33] 그야말로 경인선 하나로 인생역전한 케이스. 다만, 그로 인해 중동신도시· 상동지구의 전체 개발면적 중 상업지구 면적의 비중이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주거지구, 공원녹지 등의 면적의 비중이 낮아져, 좁은 주거지구 면적에 많은 인구를 수용함으로써 높은 인구밀도를 야기하고 더불어 낮은 공원녹지 면적으로 쾌적성이 떨어지는 도시환경이 조성됐다는 양면성이 있다.지역신문이나 일부 부천시민들은 여전히 옛 부천군의 영역이 인천 계양구, 부평구를 비롯하여 인천광역시 대부분을 아우르는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부천군과 지금의 부천시는 명칭과 아주 약간의 행정구역(소사읍, 오정면)만을 계승했을 뿐 사실상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설 당시 부천군청은 인천 관교동 인근에 있었으며, 부천군이라는 행정구역이 조선총독부가 마개조해 만들어진 억지에 가까운 행정구역, 사실상 이름은 부천이지만 (뒤에 인천으로 편입되는) 인천의 외곽지역 읍면들을 관할하는 편의상의 행정구역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오늘날의 부천시는 전통적인 인천, 부평 중 하나를 계승한 도시로 보기는 어려우며, 1914년 이후로 전통적인 부평(의 중심지였던 계양구, 부평구 일대)에서 분리되어 소사읍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도시권과 지역 정체성이 형성된 지역이 되었다.
복숭아 재배로 유명해 '복사골'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소사 복숭아'가 ' 대구 사과', ' 나주 배(과일)'와 함께 전국 3대 과일로 유명했으나, 복숭아가 재배되던 성주산 기슭이 1970년대부터 부천시 승격과 함께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상업적 차원의 복숭아 농업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최외곽 농촌지역에서 20여 가구가 100톤도 안 되는 양을 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통계출처 물론 복숭아 '나무' 자체는 여기저기 산자락마다 많이 보이지만 상당수는 그냥 봄에 꽃을 감상하기 위한 조경용이다.
1914년 이후 계남면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고, 소사면, 소사읍을 거쳐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계남면은 현재의 원미구+ 소사구+ 구로구(안양천 서쪽)에 해당된다. 그래서 계남이라는 지명은 이들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천시에는 계남로, 계남고가, 계남초·중·고등학교, 계남공원 등이 있으며, 서울특별시 구로구에도 계남초[34], 계남공원 등이 있다. 2013년 부천 탄생 100주년과 시 승격 40주년을 맞아 김만수 부천시장이 부평도호부청사를 방문하여 부천의 발전을 기원했다. #
2016년에는 부천에서만 막장부모의 최악의 패륜 사건만이 두 번[35]이나 발생했다.[36]
6.1. 구 부천군의 흔적들
구 부천군의 흔적들은 전화 지역번호, 천주교 교구, 법원/검찰청 관할구역 등에 남아있다.- 인천 전화번호 032: 구 부천군 흔적의 대표격. 인천광역시, 부천시는 032를 쓰고, 2000년 지역번호 개편 이전에는 구 부천군 소래면이었던 시흥시 북부(구 소래읍)도 032를 썼고[37], 구 옹진군(옹진군 편입 이전 부천군) 대부면이었던 안산시 대부동은 지금도 032를 쓰고 있다.[38] 구 부천군 도서부를 포함한 옹진군도 1995년 인천 편입 이전부터 032를 써왔다. 사실 부천시가 인천통화권에 들어간 데는 과거에 부천시가 부평전신전화국[39] 관할 지역이었던 영향이 크다.
- 천주교 인천교구: 시흥시 북부와 안산시 대부도도 수원교구가 아닌 인천교구 관할이다.
- 법원/검찰청: 지금의 부천시는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 관할구역이다. 1995년 이전에는 그냥 인천지방법원 본원 직할. 단, 시흥시 북부와 안산시 대부동은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수원지방검찰청 안산지청 관할구역이다.
- 계남공원, 서울계남초등학교 (서울 양천구-구로구 경계지역): 서울특별시에 남은 유일한 구 부천군의 흔적. 구 부천군 계남면(후에 부천군 소사읍이 되었다가 1963년 서울 편입)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양천구-구로구 경계지역에 있다보니 목동아파트 조성 이후 고척동-신정동 간 행정구역 경계 조정 이후로 묘하게 구로구 고척동이 아닌 양천구 신정동으로 들어가있다. 부천시 중동신도시에도 계남공원, 계남초·중·고등학교가 있다.
- 17사단의 현재 위수구역을 구 부천군의 잔재로만 보기에는 수도군단, 수방사 개편 이전까지는 경기도 서남권 전체(현 51사단 지역)와 서울특별시 한강이남지역(현 52사단 지역)도 17사단(구 33사단) 관할구역이었다. 시흥시 구 소래읍 지역은 51사단 지역이다.
7. 관련 문서
[1]
오정동, 삼정동, 내동, 약대동, 도당동.
[2]
원종동, 고강동, 여월동, 작동.
[3]
대장동, 서울 강서구 오쇠동, 오곡동.
[4]
상동, 중동, 송내동, 심곡동.
[5]
춘의동, 원미동, 소사동, 역곡동, 괴안동, 범박동, 서울 구로구 항동.
[6]
여기에는 서울 구로구 안양천 서부(궁동, 온수동, 오류동, 천왕동, 고척동, 개봉동. 단, 항동은 앞의 옥산면이었으므로 제외)에 해당됐던 수탄면도 포함됐다.
[7]
지도나 위성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인천도호부의 영역이었던 남구, 연수구, 남동구 일대와 부평도호부(부평군)의 영역이었던 부평구, 계양구 일대는 산줄기로 분리되어 있다. 단, 서구 일대는 부평구, 계양구와 산줄기로 분리되어 있지만 부평도호부 관할이었다.
[8]
지금의 남동구 구월동, 간석동 및 부평구 십정동
[9]
인천도호부 청사가 있는 관교동, 문학동을 비롯하여 학익동, 연수구 일대
[10]
지금의 주안동, 용현동, 도화동, 숭의동 일대
[11]
지금의 남동구 일대(간석동, 구월동 제외)
[12]
지금의 시흥시 북부
[13]
추가적으로 남양군 관할이었던 영흥도, 대부도와 강화군 관할이었던 장봉도 또한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4]
비슷한 사례로,
대전과 회덕에서 한 글자씩 따온
대덕군,
개성과 풍덕에서 한 글자씩 따온
개풍군 등이 있다.
[15]
현재 부천시의 영역 중, 옛 인천부의 영역에 해당하는 곳은 계수동, 옥길동 뿐이다. 그 계수동, 옥길동마저도 1983년 시흥군 소래읍에서 일부를 편입해 온 것이다. 원래 계수동, 옥길동 모두 구한말까지 인천부 관할이었다가 1914년 부천군 소래면에 편제되었고, 1973년 부천군 폐지로 시흥군에 이관되었으며, 1983년 계수리의 일부가 부천시에 재편입되고 나머지는 시흥군 소래읍에 잔류하였으며, 옥길리는 부천시와 광명시에 각각 분할 편입되었다.
[16]
현
신흥초등학교 및 답동성당 근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인천스테이크 자리, 답동 2-3
[17]
고양군 역시 경성부의
성저십리 지역 6개면을 편입해 왔다가,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도로 경성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고양시/역사 항목 참조.
[18]
시 승격 이후 계속 부천시청으로 사용하다가, 1979년 현 원미어울마당(옛 원미구청)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였다.
[19]
현 심곡본1동 주민센터 맞은편 코모도빌딩(심곡본동 666-4)이 소사읍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20]
현재
김포공항 부지의 일부와 그 일대 농경지에 해당되는 곳이다.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에서 나온 '오쇠동'이 바로 그곳.
[21]
영종면, 용유면, 북도면, 덕적면, 영흥면, 대부면. 참고로 자월면은 부천군 폐지 이후에 분리되었다.
[22]
당초 예정된 시의 명칭은 소사시였다.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읍이 시로 승격되면, 읍의 명칭을 그대로 시의 명칭으로 계승했다. 같은 해
시흥군 안양읍에서 승격된
안양시처럼, 만약 부천군을 폐지하지 않고 잔류시켰다면 '소사시'라는 이름으로 승격되었을 것이다(그리고 훗날
소사구는 다른 이름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부천'이라는 명칭을 남기기 위해 '소사' 대신 '부천'을 시명으로 채택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는 훗날 시흥군 소래읍+군자면+수암면이 '소래시'가 아닌 '시흥시'로 승격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3]
1973년 이전까지 (
6.25 전쟁 휴전 이후 남한령으로 남은) 옹진군은
서해 5도에 해당하는 백령면(대청면은 1974년 신설)과 송림면(현 연평면)의 딱 2개 면만 관할하고 있었다.
[24]
한편 같은 시기에 김포군에 편입된 계양면은 1989년에 인천직할시 북구(현
부평구)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이 일대는 1995년에
계양구로 분리되었다.
[25]
박정희 시절의 서울 추가확장 계획을 폐기하고
광명시 승격을 단행했을 정도로 위성도시 육성을 중시한 그의 기조를 미루어보면, 인천직할시 승격 때 부천을 인천에 합병하기보다는 부천을 서울과 인천의 위성도시로 남기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26]
심곡동 북부(심곡동), 원미동, 춘의동, 도당동, 약대동, 삼정동, 내동, 오정동, 대장동, 여월동, 작동, 원종동, 고강동. 2010년 부천오정경찰서 신설 전 옛 부천중부경찰서의 관할구역이기도 하다.
[27]
심곡동 남부(심곡본동), 소사동, 역곡동, 괴안동, 범박동, 옥길동, 계수동, 송내동, 중동, 상동. 중동(옛 부천중부경찰서 관할구역)을 제외하면 2010년 부천오정경찰서 신설 전 옛 부천남부경찰서의 관할구역이기도 하다.
[28]
참고로 가장 최근에 광역시가 된
울산광역시는 1985년에 구가 설치되었다.
[29]
2016년 7월 4일 일반구를 폐지하면서, 수원시
장안구,
권선구가 가장 오래된 일반구가 되었다.
[30]
소사동 남부는 소사구에 남아 소사본동으로 개칭되었다.
[31]
비슷한 사례로
경상남도
마산시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인구감소로 인해 폐지되었다. 2010년에
창원시로 통합 이후 다시 부활하였다.
[32]
중동신도시는 경인축, 더 나아가 서해안 시대의 경제·상업 중심지로 육성하기 위해 신도시 규모(면적 및 수용인구)에 비해 상업·업무지구의 비중이 굉장히 높게 계획되었다.
[33]
옆 동네인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양구에서도 중동, 상동으로 오는 경우도 많다.
서울 지하철 7호선까지 연장 개통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백화점 이용이 대다수이며, 그외 상권 이용은 적은 편이다.
[34]
엄밀히 따지면
양천구 신정동에 있다. 하지만 원래는 고척동(고척리)의 일부였으나(1910년 지적원도) 이후 행정구역 경계조정으로
양천구 신정동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35]
부천 초등학생 토막 살인 사건,
부천 여중생 살인 사건
[36]
정확히는 둘 다 몇 년 전에서 몇 개월 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2016년에 들어서야 이 사건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37]
다만 구 소래읍 지역 중 과림동 일부는 서울 02를 쓴다.
[38]
사실 대부도 주민들은 아직까지 인천광역시 옹진군 편입을 희망하고 있다.
[39]
현재의 KT부천지사인 구 부천전신전화국은 부평전신전화국에서 분가되어 나온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