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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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 교전국 | |
<colbgcolor=#012169>
영국-스페인 전쟁 ,1585 ~ 1808, |
<colbgcolor=#fff,#191919> 스페인 제국 | ||
335년 전쟁 ,1651 ~ 1986, |
네덜란드 | ||
영국-네덜란드 전쟁 ,1652 ~ 1784, |
네덜란드 공화국 | ||
대북방전쟁 ,1700 ~ 1721, |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 ~ 1714, |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 ||
사국 동맹 전쟁 ,1718 ~ 1720, |
스페인 제국 |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 ~ 1748, |
프랑스 왕국 스페인 제국 양시칠리아 왕국 프로이센 왕국 | ||
7년 전쟁 ,1754 ~ 1763, |
프랑스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스웨덴 제국 스페인 제국 | ||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 ,1775 ~ 1782, |
마라타 동맹 | ||
미국 독립 전쟁 ,1775 ~ 1783, |
미국 | ||
프랑스 혁명 전쟁 ,1793 ~ 1802, |
프랑스 제1공화국 | ||
나폴레옹 전쟁 ,1803 ~ 1815, |
프랑스 제1제국 | ||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1803 ~ 1805, |
마라타 제국 | ||
미영전쟁 ,1812 ~ 1815, |
미국 | ||
제3차 영국-마라타 전쟁 ,1817 ~ 1818, |
마라타 동맹 | ||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39 ~ 1842,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제1차 아편전쟁 ,1840 ~ 1842, |
청나라 | ||
영국-시크 전쟁 ,1845 ~ 1849, |
시크 왕국 | ||
크림 전쟁 ,1853 ~ 1856, |
러시아 제국 | ||
태평천국의 난 ,1850 ~ 1864, |
태평천국 | ||
제2차 아편전쟁 ,1856 ~ 1860, |
청나라 | ||
영국-페르시아 전쟁 ,1856 ~ 1857, |
이란 숭고국 | ||
세포이 항쟁 ,1857 ~ 1858, |
세포이 반란군 무굴 제국 | ||
사쓰에이 전쟁 ,1863 ~ 1864, |
사쓰마 번 | ||
시모노세키 전쟁 ,1863, |
조슈 번 | ||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878 ~ 1880,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줄루 전쟁 ,1879, |
줄루 왕국 | ||
제1차 보어 전쟁 ,1880 ~ 1881, |
트란스발 공화국 | ||
마흐디 전쟁 ,1881 ~ 1899, |
마흐디국 | ||
영국-이집트 전쟁 ,1882, |
아라바 파샤 반란군 | ||
영국-잔지바르 전쟁 ,1896, |
잔지바르 술탄국 | ||
파쇼다 사건 ,1898, |
프랑스 제3공화국 | ||
제2차 보어 전쟁 ,1899 ~ 1902, |
트란스발 공화국 | ||
의화단의 난 ,1900 ~ 1901, |
의화단 청나라 | ||
티베트 침공 ,1903 ~ 1904, |
청나라 | ||
제1차 세계 대전 ,1914 ~ 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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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1918 ~ 1920, |
소비에트 러시아 극동 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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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919,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
터키 독립전쟁 ,1919 ~ 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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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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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전역 ,1940 ~ 1943, |
이탈리아 왕국 나치 독일 비시 프랑스 | ||
동아프리카 전역 ,1940 ~ 1941, |
이탈리아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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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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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제국 | ||
태평양 전쟁 ,1941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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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투 | 교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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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아편전쟁 第一次 鴉片戰爭 ( 정체자) 第一次 鸦片战争 ( 간체자) First Opium Wa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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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000080><colcolor=#00386a,#fefd48> 시기 | 1840년 (선종 20년) 5월 ~ 1842년 (선종 22년) 8월 29일 | |
장소 | 홍콩, 광저우, 상하이, 난징 | |
교전 세력 |
<rowcolor=black>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청나라| ]][[틀:국기| ]][[틀:국기| ]] |
주요 인물 |
빅토리아 여왕 윌리엄 램 로버트 필 조지 엘리엇 찰스 엘리엇 헨리 포팅어 |
선종 도광제 (청 황제) 임칙서 기선 혁경 |
병력 | 영국군: 20,000명 | 청군: 200,000명 |
피해 |
사상자: 1,020명 - 전사자: 69명 - 부상자: 451명 - 병사자: 500명 |
사상자: 18,000명~20,000명 |
결과 | 영국의 대승 | |
영향 |
영국의
홍콩 식민지화 난징 조약 체결 백년국치의 시작 태평천국 운동 발발 중화사상의 약화 |
[clearfix]
1. 개요
영국과 청나라가 영국의 대청 아편 수출을 계기로 벌인 아편전쟁.2. 배경
"...
영국이 바란다면, 물론
동인도 회사의 대반 대신, 국가 관리, 즉 이목을 파견하는 것은 그 쪽의 자유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 청국이 공향을 통해서만 이인(夷人)[1]과 접촉하는 옛제도를 지속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 아닌가."
1834년, 양광총독(兩廣總督) 노곤
1834년, 양광총독(兩廣總督) 노곤
일찍이 서양에게 청은 미지의 이상향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초기 청을 매우 우호적으로 묘사하며 특히 강건성세의 주인공들인 강희제와 옹정제를 고평가하면서 대두되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과 달리 안정적인 하나의 정치체제가 수백 년 동안 이어진다는 것도 유럽인들에게 낭만의 대상이었다. 당시 청의 도자기와 가구, 사상이 시누아즈리라는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당대 서구가 이상적으로 바라보았던 강희제(1661~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5~1795)의 태평성세가 전반적인 이완현상을 겪게 된 것은 건륭 중기인 1775년 무렵부터였다. 이러한 현상은 청나라 내부적으로 몇 가지 사항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
1. 행정체계의 둔화현상
태평성세를 구가하는 기간 동안 황제에게 집중된 권력은 역으로 관료들의 창의성을 억제했으며 누대에 걸치면서 선발되는 관료들 역시 과거시험으로 인해 평균 연령층이 고령화된 데다 과거를 거쳐 급제된 이들은 대부분 민생과 대외정책에 있어 현실 미봉책에 급급했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졌으니 청 말기의 행정체계의 비능률과 침체현상에 더더욱 가속화를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 당대 지식인인 공자진의 비유처럼 "옴에 걸린 사람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 하지는 않고 당장 긁지 못하게 하기 위해 침상에 묶어놓은 것"[2]으로 표현한 것은 청조 말엽의 세태를 정확히 꼬집은 표현이었다.
-
2. 사회전반에 걸친 사치풍조와 부패의 만연
사치를 조장하는 풍조는 건륭제에 이르러 극에 달했는데 황제를 포함한 황족, 고관대작과 부농, 부호에 이르기까지 사치를 일삼았으며 이와 더불어 관료들에 대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단적인 예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군기대신의 자리에 24년을 재직한 화신은 그의 사후 몰수한 가산의 추정액이 당시 정부의 12년치 세입액에 달하였다고 한다.
-
3. 전국 각지에서 청조의 타도를 외치며 들고 일어난 반란풍조와 진압과정
그 중 청조의 권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1796년에 5개성에 걸쳐 약 9년 반 동안 일어났던 백련교도의 난이었다. 백련교 봉기 세력들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3] 통일된 강령이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이런 백련교도의 약점에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10년 가까이 반란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진압군인 만주족 청나라의 무능때문이었다. 청의 전통적 중앙 군사조직인 녹영과 팔기군이 이 시기에 이미 실질적인 전투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한 것은 정규군이 아닌 지주나 지방 신사들이 조직한 일종의 민병대인 향용(鄕勇)과 단련(團練)이었고 이 과정에서 지방 한족의 지역 영향력이 상당히 강화된다.
한편, 같은 시기 유럽권에서는 강희제, 옹정제[4] 청의 성장 둔화[5] 시절과 달리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 사상의 대두로 청은 오히려 구시대적 동양 문명의 표본이 되면서 반(半)문명적 국가로 취급받았으며 그 대표적인 예시로 영국의 급진주의자 존 윌크스는 "중국이 현재 소유한 모든 고대 제도와 유물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중략) 결국 중국은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언제나 패자의 편에 속할 것이다."이라고 평가했고 헤겔은 이러한 평가의 가장 극단적인 면모를 보였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선입관에 의해서 역사를 서술하였기에, 중국은) 자신의 역동적인 역사 발전을 위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요소인 세계사 바깥에 존재한다."
중국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인간은 황제의 수레를 끌기 위해 태어났다.
앞으로 그들의 역사는 타자에 의해 그들의 존재가 추구되고 그들의 성격이 탐구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중국의 백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인간은 황제의 수레를 끌기 위해 태어났다.
앞으로 그들의 역사는 타자에 의해 그들의 존재가 추구되고 그들의 성격이 탐구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더불어 유럽권과의 무역 문제도 한몫하고 있었다. 명나라 때부터 유럽 상인들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교역을 했는데[6] 광저우에서의 무역은 1757년 제정된 방범외이장정으로 인해 매우 강한 제한[7], 관료들의 부패, 문화의 차이과 사법권에 대한 인식 문제[8]로 인해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1757년 건륭제는 아예 광저우를 제외한 무역항에서의 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해 버렸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무역항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며 영국 정부는 1792년 조지 매카트니의 사절단을 건륭제에게 파견했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치외법권을 보장받는 차와 생사 생산지역 할양, 안정적인 무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정식 조약 체결, 광저우의 폐단 근절 등을 골자로 한 6대 임무를 받고 공식적으로는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파견되었다. 청나라도 이것을 동아시아 스타일 조공사절로 판단하고 최상의 예우를 다했으나 곧바로 분쟁이 발생했다. 당시 청의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삼배구고두를 해야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당시 매카트니는 영국에게 영국 왕실의 위엄이 손상받지 않는 한 청 측이 요구하는 궁중 예의를 지키라고 명령받았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삼배구고두는 영국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행위로 판단해 결국 영국식으로 한쪽 무릎을 꿇는 수준으로 타협했다. 거기에 청은 이들을 단순한 사절단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이들과 외교 교섭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봤다. 청은 그들을 곧바로 돌려보냈으며, 결국 매카트니의 교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건륭제는 별도의 국서를 보내 6개항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모두 거부하였다. 이에 영국은 재차 사절단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사절단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곧바로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서 취소되었다. 어차피 파견되었어도 청도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려고 온 힘을 쏟았을 시기니 무리였을 것이다.
19세기 초기에 여타 유럽 국가들이 청에서 분쟁을 일으켜 마카오를 점령하거나 상선을 압류하는 등 사고를 치기 시작했고, 이에 불안해진 영국은 다시 사절단을 파견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1816년에 윌리엄 피트 애머스트의 사절단이 도착했으나 가경제는 사절을 원하지 않아 '어조가 공손하면 북경으로 입성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천진에서 연회만 해 주고, 그래도 황제가 사냥에서 돌아오려면 몇 달이 걸린다.'며 되돌려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또 삼배구고두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고 심지어 사절단 내에서조차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결국 최종적으로 북경에는 간신히 입성했으나 황제를 알현하는 데는 실패하고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834년 윌리엄 존 네이피어가 다시 사절단으로 청을 방문했으나 그는 처음부터 영국 상인들을 총괄하는 직책이었을 뿐 별다른 외교적인 권한이 없었다. 심지어 영국은 그에게 가능한 온건하고 우호적인 양해를 유지하며 영국 신민이 중화제국의 법률과 습관을 준수할 의무를 명심하게[9] 하도록 할 것을 명령했지만 그는 제멋대로 기존의 관습을 무시해 어그로를 끌었고, 이 때문에 양광총독 노곤과 마찰을 빚자 노곤에게 영국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노곤은 오히려 군사를 보내어 상관을 포위해 무역을 강제 중단시키고 네이피어만 떠난다면 무역은 재개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네이피어는 마카오로 돌아간 지 불과 1달 만에 병사했다.
이렇듯 영국의 사절단과 청은 서로 갈수록 강경해지고 있었는데 결국 영국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외교 활동으로는 청의 문호를 개방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는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당시 절정에 다다른 영국의 군대를 이용해 무력시위를 해야 한다는 결정의 계기가 되었다.
3. 진행 과정
3.1. 아편 무역
"외이(外夷)의 진흙과 중국의 화은(貨銀)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틀림없이 국내의 인민은 이리저리 유랑하며 사방에 걸식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생업을 잃을 것이다."
가경제, 1799년
가경제, 1799년
3.1.1. 청의 흑자 상황
1781년부터 1810년까지 청에 유입된 은은 무려 4,200만 냥을 넘는 수준이었다.3.1.1.1. 원인1: 청의 덤핑 공세
이러한 압도적인 무역 흑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의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한 가내수공업이 초기 산업혁명을 뛰어넘는 덤핑 수준의 가격 경쟁력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서양 측의 주력 수출품인 공업품은 그렇게 메리트를 보이지 못했고 공예품들은 구매할 여유를 확보하지 못했다. 명, 청 시기 중국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세는[10] 생산 비용에서 임금의 비중이 극단적으로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는 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낮은 인건비가 청 입장에서 공작 기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서 결국 산업혁명을 도입하는 것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거기다 기껏 뚫어 놓은 광둥항을 통해 들어오는 모직물은 중국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유통되었는데 당연히 아열대 지방인 이 지역에서는 땀 흡수나 통풍 기능이 떨어지는 모직물이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이를 대체해야 할 상품은 인도산 면을 사용한 면직물(캘리코)이었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모직물이든 면직물이든 남아도는 인력을 갈아 넣어 만드는 대륙의 가내 수공업이 뿜어내는 위엄 앞에서는 영 좋지 않았다.
결국 청으로 가는 무역선은 평균 90%가 청의 화폐인 은(Silver)을 담고 있었다.
3.1.1.2. 결과1: 동인도 회사의 막대한 적자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청과 무역을 독점하는 동인도 회사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당시 인도를 정복하는 데 막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 동인도 회사는 이러한 부채를 영국의 자본과 인도의 면화와 청의 은을 이용한 삼각무역[11]을 통해서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자국 시장의 침체와 면화를 생산하는 가정이 확산되면서 청은 더 이상 인도 면화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동인도 회사는 막대한 적자를 보게 되었다.3.1.1.3. 원인2: 차(茶)의 수요 폭증
19세기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차(茶)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일반 가정의 월 수입 중 5%가 차를 구매하는 데 사용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의 수요를 이끌어내면서 차 하나가 대 중국 무역의 90%를 독점해 영국이 청에게 한 해 지출하는 은은 무려 28,000톤을 돌파한 상황이었다.[12] 이러한 상황은 영국과 중국 간의 무역이 지속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차 이외에도 도자기와 비단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면서 청 시장은 버릴 수 없는 시장이 되어 버렸다.[13]3.1.1.4. 결과2: 인도의 아편을 청으로 수출
한편 다른 대안으로 영국 마약상들이 인도의 벵골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파르시[14]를 통해 청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다.[15] 당시 청나라는 오래된 평화에 사회 분위기가 이완되었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자리잡아가는 추세였으며 아편의 독성과 해악성에 대한 자료가 미비하던 당시에 아편의 환각 효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3.1.2. 폐해
<colcolor=#00386a> |
아편에 중독된 청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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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저장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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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의 아편굴 |
"
그 냄새가 향기롭고 그 맛이 맑고 달다. 기분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 마주 보고 교대로 흡연하면, 처음에는 정신이 맑아지고 머리와 눈이 깨끗해진다. 계속하면 가슴이 갑자기 확 열리면서 흥이 2배로 증가한다. (중략) 시간이 흘러
베개를 베고 높이 누우면,
만 가지 생각이 모두 없어지고 꿈속에서 헤매는 것과 같으며 영혼이 상쾌해지니 진정한 지상낙원이다."
당연히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방관할 리가 없었다. 1799년 최초의 단속령이 발표되고[16] 1816년부터는 아편 흡연까지 금지되었으나 당시 관료제의 침체와 부패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백련교도의 난이 시작되었을 때 군병들 사이에서 아편이 유통되었고, 관료들은 아편 샘플을 압류품이라고 보고하고 뒤로 빼돌리는가 하면 심지어 밀수 집단과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 될 정도였다. 황실에서도 황족들이 아편을 피웠는데 도광제조차 즉위 이전에는 아편을 흡연한 적이 있었고 아편전쟁 직전에는 건륭제의 후손은 물론 청나라 개국영웅들의 제사를 모시는 철모자왕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귀족가문의 유력한 자제들까지 아편 흡연 혐의로 작위를 박탈당하고 신강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게다가 아편의 진정한 해악은 인간의 도덕심과 이성의 작동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서민들은 아편을 사느라 파산하고 일가족을 팔아넘기는가 하면 상류층은 아편 중독으로 인해 공무 행정 처리에까지 지장을 초래하는 문제가 있었다. 실로 국가 막장·멸망 테크가 따로 없었다. 결국 어느 사이엔가 아편 문제는 청나라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중앙 정부 관원의 10~20%, 지방 관원의 20~30%, 하급 현지 관리들은 무려 80~90%가 아편 흡연을 한다고 추정되는 이상 이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17] 아편 흡연은 청나라에 두 가지 해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1834년 동인도회사의 대 중국 무역 특권이 폐지된 후 아편 무역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로 인해 중국은 한 해에 3천만 냥 정도의 은을 외국에 내보내야 했다.[18]
이러한 상황은 당연히 경제의 축소를 가져왔고 동전과 은의 교환비를 2배 가까이 뛰어오르게 했는데 이는 곧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는 농민들에게 실제적인 세금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동전의 순도를 낮추는 대신 대량 발행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충격에 완전히 대응하는 것은 무리였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편 그 자체의 중독성이었다. 아편의 진정한 효능은 단순 흡연만 하더라도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의존성을 띄게 한다.[19] 게다가 아편은 내성이 강해서 흡연하면 할수록 더 많은 양을 흡연해야 같은 효능을 보게 되는 일이 많아서 경제적 및 신체적 의존성을 강화시켰다. 아편의 흡연은 정신에 매우 심한 악영향을 미쳐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양심과 도덕의 마비시켜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 빈민이 가족을 팔아치우는 일마저 잦게 만들었다. 쉽게 말하자면 백성들이 일은 안 하고 아편에 취해 헛소리나 하고 있으니, 조정 입장에서는 세금이 계속 줄어드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해악이다.
종합적으로 사회 기강의 해이, 은의 유출로 인한 재정난, 농민 생활의 곤궁 등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진위가 우려스럽지만) 1837년 주성열(朱成烈)은 아편으로 인해 유출되는 은이 한 해에만 은자 7천만 냥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마침내 사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된 도광제는 전국 각지의 관리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내놓을 것을 명령하였다.
1836년의 논쟁에서 이에 대한 최초의 의견은 대담하게도 아편의 양성화였다. 합법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궤가 다르고 더 정확히 말하면 아편에 정당하되 비싼 값과 세금을 매겨 점진적으로 근절하고 고위층의 아편 흡연만 금하는 것이었다. 태상시(太常寺) 소경(小卿) 허내재는 아편을 양성화시켜 정규 관세를 징수하고 대신 아편의 거래 수단으로 은을 지불하는 것을 금지시켜 은의 국외 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아편의 가격을 올려서 수요를 떨어뜨려 점진적으로 근절하고, 아편의 원료인 양귀비의 재배를 금지시키며, 일반 백성의 아편 흡연은 간섭하지 않는 대신 병사, 지식인, 관료들의 아편 흡연은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금론(弛禁論)을 펼쳤다.
전현임 양광총독 노곤과 그 후임 등정정은 이금론에 찬성했지만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 체제의 핵심 이념인 도덕성이 있는 군주에게 천명이 내려온다 하여 덕으로 통치한다는 덕치, 인정(仁政)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기는 하였으나 황제인 도광제 입장에서는 천명을 수호해야 하는 황제가 스스로 천명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몹시 껄끄러운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편의 선별적인 단속 금지와 아편 무역의 국가 독점도 실효성이 없다는 원옥린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 허내제의 상소와 함께 아편에 대한 강경 단속을 주장하는 엄금론(嚴禁論)이 대두되었는데 이를 주장한 것은 내각학사 겸 누부시랑(樓部侍郞) 주박(朱博)이었다. 주박은 아편 단속을 완화하는 데 몹시 강경하게 반대했는데 법은 마치 제방과 같아서 조금 훼손이 되었다고 없애버린다면 이를 걷잡을 수 없고, 도둑, 매춘, 도박을 법이 미처 단속하지 못했다고 한들 법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고 하였다. 병부급사중(兵部給事中) 허구 역시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아편 단속을 그만둘 경우 아편 흡연을 막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아편 유통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엄벌에 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결국 도광제는 1836년 9월 엄금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양광총독 등정정에게 아편 단속을 강화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편 단속의 여부가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이금론은 조정에서 주된 의견이었고 엄금론을 주장하는 신하들도 아편 단속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 관료에 의해서 판가름나게 된다.
3.2. 대응: 임칙서의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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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마지막 명신 |
"사생(死生)은 운명에 달려 있고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다."
― 1839년 임칙서, 광동으로 출발하기 직전
1837년에 임칙서는 호광총독(湖廣總督)으로 재임하면서 농업·상업을 개혁하고,
아편을 강력히 단속하고 민간 자율을 존중하며 매우 높은 실적을 내고 있었다. 당시 임칙서는 엄금론을 내세워 아편을 강력히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정책과 그 세부사항까지 이미 마련하고 있었다.[20] 게다가 공자진[21]과 교류하여 경세론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편의 존재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839년 임칙서, 광동으로 출발하기 직전
임칙서는 "법을 지키는 것보다 법을 만드는 마음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입법의 실효성을 따지기 전에 우선은 근본적인 입법 의도를 생각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것은 곧 이금론을 향한 도전이었다. 이금론의 논리대로라면 천자의 아편중독자는 천자의 교화를 포기하는 게 마땅했지만 임칙서는 "모든 백성이 동등한데 어떻게 흡연한 자라고 하여 버려야 하는가?" 라고 일갈했다. 임칙서의 이런 강경한 태도와 그가 제시한 아편 단속 정책에 설득된 도광제는 마침내 아편 무역을 작살내기로 결심한다. 1838년 12월 31일,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22]과 광동수사로 삼았다.
실은 임칙서가 광동에 내려오기 전 아편 무역은 이미 고사 직전이었다. 도광제는 등정정을 시켜 아편 단속을 강화할 것을 명령한 상태였다. 이에 1839년 5월에서 9월까지 아편 무역 금령은 일시로 해제되었는데 이것이 근본이 되는 해제로 예측한 상인들과 아편을 무리하게 비축한 서양 상인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상인들은 아편의 가격을 매우 낮추어 처분하려 했지만 등정정의 강력한 조치로 말미암아 그것도 무리였고 결국 1840년이 시작될 무렵에 아편 무역은 이미 종언을 고한 상태였다.
1839년 3월 10일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아편의 폐해를 다스리지 못하면 광동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임칙서는 강력한 아편 단속을 실시하여 아편 금지령을 위반한 1,600명을 체포하고, 아편 2만 8천근을 몰수하였으며 부패한 관리들도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이런 천하의 임칙서도 외국인 밀수꾼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임칙서는 에머리히테 바텔이 쓴 <국제 법(Law of Nation)>을 입수해 그것을 한역하고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이 문제에 간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와는 별도로 임칙서는 아편 문제만큼은 양보할 생각도 타협할 의지도 전무했다. 3월 18일에 영국 상인들에게 3일 내에 아편을 내놓으라고 명령했고, 아편 무역을 재개할 시에는 상품 몰수는 물론이고 사형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는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23] 결국 3월 21일이 지나자 임칙서는 공행의 상인 2명을 즉시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영국 상인들은 아편 1,036 상자를 자발적으로 넘겼으나, 임칙서는 그 상인들이 아편 20,000 상자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공행의 상인은 체포되었고 임칙서는 3월 24일 병사들을 동원해 공행 내에 있는 영국 상관을 포위하였고 중국 하인들을 철수하게 했다. 포위한지 6주가 지나자 영국 관리였던 찰스 엘리엇은 상인들에게 아편의 소유권을 영국 정부에 양도하면 정부에서 피해를 보상해 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 다음 엘리엇은 양도 문서를 작성해 임칙서에게 전달했다.[24] 마침내 5월 16일 영국 상인들은 아편 21,306 상자(약 1,425톤)를 임칙서에게 양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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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소연(虎門銷煙). |
임칙서는 아편 무역을 제외한 모든 교역을 지속해 나아갈 생각이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엘리엇은 크게 화를 내며 모든 상인들을 철수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이 의사를 미국에도 타진했으며 미국 상인들은 임칙서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편 무역을 철폐했다.[27] 결국, 영국 상인들만 엘리엇의 강요에 따라 강동에서 떠났다. 이윽고 영국 상인들은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편 무역은 님들 사정임. 그리고 청나라가 아편 무역 금지했는데 우리가 왜 신경 써야 됨?"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1839년 7월 12일, 광둥을 떠나 주룽 반도에 정박했을 때 술에 취한 영국 해군 수병 2명이 중국인 농부 임유희(林維喜)와 시비가 붙어 그를 폭행하고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엘리엇과 영국인들은 해당 수병 2명을 체포하여 본국의 군 교도소로 보내며 벌금을 물리고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치외법권을 발동하게 하는 선에서 사건을 호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임칙서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는 주권침해라고 반발하며 영국인들에게 임유희를 살해한 사람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영국인들은 임유희를 살해한 살인범을 인도하지 않고 "영국의 법률에는 외국에서의 죄를 저질렀을 때를 대상으로 한 법이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임칙서는 영국 법을 가져와 그들 눈앞에 들이대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상술했듯 임칙서는 광둥에 부임하자마자 영자 신문, 영국 법, 국제법 등을 간단하게 중국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한 상황이었다. 이런 준비를 통해 영국의 법률상으로도 외국인 살인이 명백한 불법임을 알고 있었는데도 엘리엇과 영국 상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에 화가 난 임칙서는 포르투갈이 소유하던 마카오에서 식량 공급을 중단해 버렸다. 이에 엘리엇은 항의했지만 임칙서는 "우리는 입항을 거부한 적 없음. 살인범부터 인도하면 식량길을 다시 열어주겠음. 하지만 싫다면 배 위에서 굶어죽거나 말거나 님들 멋대로 하삼."라고 항의를 무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의 여러 상선이 식량을 밀매했지만 임칙서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묵인했을 뿐이었다.
8월 26일, 임칙서는 마카오에서 영국인들을 추방했다. 그 사람들은 홍콩으로 가서 영국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영국 상인들 중 일부는 임칙서의 요구를 지금이라도 수용하고, 무역 여건을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광저우로 가고자 했고, 이에 초조해진 엘리엇은 11월 3일, 아편과 상관없는 영국 상선 로열 색슨 호를 포격해 광저우 진입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청군은 영국 상선을 보호하고자 관천배가 지휘하는 청의 수군이 정크선 29척을 내보냈지만 당시 청나라의 군함은 급하게 상선을 개조한 배였던데다가 기본적으로 대포가 형편없었기에 영국 배 2척( 볼리지 호와 히야신스 호) 따위에게 26척이나 격침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 천비 해전(穿鼻海戰)으로 청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나자[28] 경악한 임칙서는 미국 상인에게 서양 대포 300문과 함선을 즉시 구매하고 주민을 동원해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인들은 무역을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임칙서는 "아편만 취급하지 않는다면" 종래 약속을 지키겠다고 답변했지만 영국인들은 이 약속이 '불확실하다'고 거부했다. 결국 베이징에서는 영국과의 무역을 종결하라고 하명했고 1839년 12월 6일, 양광총독으로 임명된 임칙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에 반발한 엘리엇과 영국 상인들은 본국으로 가서 영국 정부에 중국과의 전쟁을 제안했다.
3.3. 개전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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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원정을 요구하는 영국 만평. 만평의 문구는 '우리가 중국을 상대로 해야만 하는 것.'(WHAT WE OUGHT TO DO IN CHINA.) 이다. |
그러나 그럼에도 아편전쟁에 대한 여론은 당대 영국에서조차 비판적이었다. 엘리엇조차도 아편 무역에는 비판적이었고 그는 단지 화물을 보호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로비로 영국에서는 점차 중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쪽으로 여론이 움직이고 있었다. 1839년 10월, 전쟁에 주동적이었던 윌리엄 램 수상을 중심으로 영국 내각은 전쟁을 결의하였고 1840년 2월에는 모든 전쟁계획을 마치고 군비 지출을 위한 예산안을 의회에 표결했다.
이에 대표적인 주전론자인 아서 웰즐리 전 총리는 의회에서 찬성 의견을 내놓았다.
"
패배,
굴욕 또는
치욕이라고는 모르는 나라의 국민이며, 자국민을 위협하는 자에게는 귀를 의심할 정도의 배상금을 받아온 국가의 국민이여, (중략) 50년 공직 생활에서
우리의 국기가 광둥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30살의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29] 초선의원이 진정으로 국기가 모욕당할 때를 성토하자 적지 않은 의원들이 이 전쟁을 비판하여, 투표 결과는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
중국에게는
아편을 금지시킬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편의 무서움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영국의 외무대신은 청나라의 정당한 권리마저 짓밟으며 이 부정한 무역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중략)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우리 국왕 폐하와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중국 영토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국이 식량과 음료 공급을 거부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30] 정부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작전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국의 외무대신은 청나라의 정당한 권리마저 짓밟으며 이 부정한 무역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중략)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우리 국왕 폐하와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중국 영토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그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국이 식량과 음료 공급을 거부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30] 정부는 이 전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 작전 행동이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윌리엄 램 총리는 자신들은 아편무역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이후의 교역과 영국 시민의 안전을 고수하는 것이라는 논법을 펼쳤다. 1840년 4월 10일, 영국 하원에서 청과의 전쟁수행을 위한 예산 투표가 이루어졌고 결과는 271대 262. 비록 표차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을 멈출 수는 없었다. 표결이 끝난 후 글래드스턴은 "262. 우리 영국의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반대파들이 아편전쟁에 반대한 이유는 중국을 주권 국가로 인정해서만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백인의 의무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문명국으로서 중국인들에게 문명을 전파해야 될 의무가 있는데, 과연 아편을 팔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반대파 일부의 '양심'이었던 것. 글래드스턴의 연설에는(위에서는 편집되었지만) '정의는 중국인들의 편에 있습니다. 저 문명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야만인들에게는 정의가 있는 반면, 우리 깨어 있고 문명화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와 정의에 반하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목 또한 들어 있었다. 어찌 됐든 영국 내부에서도 아편 전쟁이 상당한 논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4. 아편전쟁
"역사를 회고하면 아편은 단지 전쟁에 직결되는 원인이지 근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31]"
서중약(徐中約, 이매뉴얼 C.Y.쉬)
서중약(徐中約, 이매뉴얼 C.Y.쉬)
1840년 5월 말까지, 인도양 각지의 영국 해군이 싱가포르로 모이고, 6월 15일에 광저우 앞바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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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산을 점령하는 영국군 |
"대외로 통상을 근절하게 했으나 근절하지는 못했고[37] 대내로는 범법자를 체포했으나 소탕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빈말로 어물어물 넘긴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수많은 파란을 야기했을 뿐이니 생각건대 금치 못할 만큼 참으로 분하고 답답하도다. 그대는 무슨 말로 짐에게 대답하겠는가?
이에 임칙서는 광둥의 관문 1개 세금 중 10%만 사용해도 외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답변했으나 이미 도광제는 임칙서를 향한 신임을 완전히 철회해 허튼 소리라고 강하게 비판한 일변, 영국은 임칙서를 비난하고 아편의 배상과 억울함을 벗겨 달라고 요청했기에 그 사람들의 요청을 들어주면 곧바로 돌아가리라고 오판한 것이다. 즉, 청 조정은 톈진의 군함을 군사 시위가 아니라 하소연하고자 온 집단이라고 엄청난 큰 착각을 한 것이다.
결국 황제 도광제는 임칙서를 파면한 후 베이징으로 소환하고 직예총독(直隷總督) 기선(만주어: ᠪᠣᡵᠵᡳᡤᡳᡨ ᡴᡳᡧᠠᠨ, 보르지기트 키샨 / 중국어: 博爾濟吉特 琦善, 박이제길특 기선)[38]에게 서양에서 온 야만인 오랑캐들을 잘 다독여서 조공품과 은을 주어서 자신들이 살던 섬나라에 돌아갈 차비로 넉넉히 주어서 돌려보내라고 하명하였다. 직예총독이었던 기선은 북경을 방어할 책임이 있었기에 영국군을 다독이면서 영국군의 태도에 맞춰 주자 협상을 체결할 희망을 품은 영국군이 톈진에서 퇴각하자, 도광제는 고무되어 10월 29일, 기선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840년 12월이 끝나갈 무렵 영국군이 홍콩의 할양과 자신들이 판매했던 아편의 배상금을 요구하자, 그제야 기선은 자신이 보통 골치 아픈 상황에 빠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는 귀항길 여비로 쓰라고 줄 은을 그냥 배상금으로 주면 되고, 애초에 배상금이야 송나라 시기부터 이미 지불한 전례가 있지만 영토 할양은 전통 시각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무려 4000년이란 역사상 국토를 확장시켜 영토를 넓혔고, 조선이나 베트남, 태국, 티베트, 몽골, 위구르, 류큐왕국 등 조공국으로 지배는 해봤지만, 영토를 준 전례가 없었다. 즉 이민족에게 영토를 빼앗긴 적은 많아도 스스로 떼어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효성 문제라기보다는 지금도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강력히 주장하는 모토이자, 국권의 상징, 나아가 중국사 수천년의 아이덴티티인 " 중화사상" 그 자체에 타격을 주는 매우 큰 문제였다. 결국 기선은 영토 할양에 대해 반대하자 결렬되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산 열도의 전염병으로 사상자가 생기는 영국도 그렇게 강경한 자세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영국의 중국 원정 전쟁 동안 전투로 인한 전사자는 대영제국의 우월한 기술력에 힘입어 10명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지 엘리엇의 후임을 포함한 500여 명이 전염병으로 병사했다. 다시 말해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시간이 흘러 1841년 1월 7일, 2차 천비 해전이 벌어져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철갑증기선 네메시스 호가 청나라군이 쏜 구식 포탄을 간지럽다는 듯이 튕겨내며 여유롭게 임칙서가 만들어 놓은 포대들을 상대하고, 나머지 배들이 콩그리브 로켓으로 청군을 상대해 청군은 정크선 15척 중 11척 완파, 500여 명이 전사, 호문진(현 둥관시 후먼진) 포대가 함락됐지만, 영국군은 부상자 38명이 전부였다. 이로 결렬된 협상이 다시 열리고, 1841년 1월 27일에 찰스 엘리엇[39]과 기선 간의 천비 가조약(川鼻 假條約)이 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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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비 가조약(川鼻 假條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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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에서 불법으로 몰수한 아편을 순은 600만 냥으로 배상한다.
너희 경찰 단속반이 압수한 불법제조해서 판 우리 마약 전부 배상해라. - 청의 중요 핵심 항구 5곳을 전부 개항하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정해를 돌려받는다. 단, 세금은 모두 그대로 청 정부에 귀속한다.
- 차후 영국 시민은 청 황제와 맞먹는 동등한 지위를 약속한다.
- 광둥 지역에서의 무역을 전쟁 이전으로 복구한다. 모든 복구비용은 청나라에 귀속한다. ||
2월 19일에 전투 재개에 따라 청군 총사령관으로는 정역장군(靖逆將軍) 혁산[41]이 임명되었으나 정작 혁산은 전투를 회피하고 만사를 부사령관인 참찬대신(參贊大臣)이자 호남제독(湖南提督) 양방에게 의병 40,000명을 주며 일임하였다. 양방은 백련교도의 봉기와 신장 지역의 이슬람 봉기군을[42] 진압한 장수였으나[43] 문제는 그가 대외 관계에서는 무지했고 지휘하는 의병들조차 훈련을 받지못해 기강이 문란한 부랑배와 아편중독자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이었다. 게다가 미신을 신봉한 양방은 영국군의 대포가 청군보다 뛰어나고 정확한 이유가 '양의 기운'을 가진 요술 때문이라는 미신을 그대로 믿은 채 '양의 기운'을 파훼하기 위해서 '음의 기운'을 가진 여자의 생리혈과 오줌 등[44]을 성벽에 바르는 행위를 방책이랍시고 내놓았으며, 베이징에서는 양인(羊人)을 잡는 데는 호랑이가 제격이라면서 선발한, 호랑이 년·월·일·시에 태어난 사람들을 지휘관들로 뽑아서 영국군과 싸우도록 했다. 당연히 대패했지만 막상 자금성에는 전투 전에 미리 작성한 승리 보고서가 도착했고 자금성 황실과 조정은 그 거짓 보고서를 보고 한시름 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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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강을 공격하는 영국군 |
1841년 9월에는 영국 수송선 너버다(Nerbudda)가 홍콩에서 물자를 싣고 중국 북부로 향해 가다가 타이완 남부에서 좌초해서 영국인 선원들이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842년 3월에는 역시 범선 앤(Ann)이 타이완 남부에 좌초해서 선원들이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현지 지휘관은 이를 도광제에게 보고했는데, 1842년 3월 저장성의 닝보 전투에서 영국군이 전사자 없이 부상자만 5명이 생기는 동안, 청군이 500명 넘게 죽는 대패를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도광제는 보복으로 너바다와 앤의 포로들을 처형할 것을 명령한다. 1842년 8월 10일, 포로 192명이 참수형으로 처형되었고 87명은 이후 학대 등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때 포로들은 간부 선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도 식민지인들이었는데, 영국 측은 1인당 100달러의 몸값을 주며 석방을 요구했으나 그때는 이미 포로들이 처형된 뒤였다. 그래서 이 일은 영국 정부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아편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난 후 진상 조사가 벌어졌는데 도광제가 직접 처형을 명령하였음에도 현지 군 지휘관과 행정관의 책임을 물으며 둘을 각각 신장과 쓰촨으로 좌천시키는데에서 처벌을 마무리시켰는데 그 둘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복귀하였다고 한다.
3.4.1. 1842년 8월 29일, 난징조약
난징의 함락이 기정사실화되자 청은 전쟁을 지속할 의지를 상실하였다. 난징은 대운하 건설과 강남개발 이후 문자 그대로 전근대 중국왕조의 경제수도로서 기능해 왔는데, 진강과 더불어 이곳이 함락된다면 장강 경제권과 수도 북경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나 다름 없다. 당장 화북의 인구를 부양하는 것이 강남의 곡물이다. 영국군이 자리만 지켜도 중국인 수천만 명이 아사할 위기에 처하는 것이니, 영국군은 말 그대로 청나라의 심장을 움켜쥔 거나 다름 없었다. 만주로 몽진하여 저항을 이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으나 만주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오랫동안 봉금정책을 하여 개발도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저항의 기반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서유럽 열강보다 더 오래된 적수인 러시아 제국이 호시탐탐 남진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46]청나라 지식인들은 생각보다 빨리 영국이나 프랑스가 원하는 것이 중원정복이 아니라 상업적 이익이라는 것을 알아챘으며 때문에 영토, 그것도 아주 많은 영토를 노리고 있는 러시아를 더 큰 위협으로 꼽은 것이다. 실제로도 서유럽 열강은 칭타오, 상하이, 홍콩, 광저우 등의 무역 거점을 뜯어낸 뒤로는 영토 욕심은 안 부린 데 비해 러시아는 한반도 몇 개가 들어갈 만큼의 어마어마한 영토를 통째로 가져가고도 끝없이 남진하였다.
장강-황하의 연결이 끊어지자 청나라로선 이를 도저히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협상 2주만에 중영강녕조약(中英江寧條約)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 난징조약(南京條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조약과 이듬해에 맺은 오구통상부점선후조약(五口通商附粘善後條約), 호문조약(虎門條約)과 내용을 요약하면, 자유무역이라는 영국의 숙원이 해결됐다는 사실을 잘 알수가 있다. 난징조약 전문
그런데 난징조약 체결을 보고받은 청 조정은 의외로 이것을 바람직하게 받아들었다. 전쟁 이전보다 높은 관세를 거둘 수 있으며[47] 장강과 주산 열도에서 영국군이 철수한데다가 영국이 할양을 요구한 영토마저도 전략상·경제상 가치가 전무한, 당시로서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홍콩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48] 또한 기존 중국의 대외질서관의 틀 내에서 볼 때, 난징조약은 청 조정에게 있어 정신승리...아니 긍정적으로 해석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사재판권과 치외법권에 대해서는 오랑캐인 서양이 중국 고도의 예법(오륜)을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소한 분쟁에 휘말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협정관세권과 관련해서는 조공국이나 호시국에게도 기존에 시혜적인 입장을 취해 온데다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오히려 높은 관세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49]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청국 측에서 보면 난징조약은 천자가 오랑캐[夷狄]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지 청국은 이것을 조약 체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설령 조약이라고 표현했더라도 청국에게 있어선 전혀 다른 맥락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출처2] 다만 난징조약에서 시혜적인 입장을 취했던 청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오직 배상금 액수와 경제상 요충지인 푸저우의 개항 문제였을 뿐이었으나 과거 영국은 부패한 공행에게[51] 뇌물 일정량을 바쳤는데 이것이 폐지된 것을 계산해 보면 오히려 영국 측의 이득이 큰 셈.
게다가 영국인들이 다른 국가처럼 청을 예속화하는 조약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장기에 걸친 이득을 계산한 것이기도 했다. 무려 인구 4억에 달하는 광대한 시장을 섣불리 건드려 잃는 것보다는 살려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는 더 큰 이득을 가져다주리라 여겼던 것이다.[52]
영국이 내세운 아편전쟁의 표면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영국의 자유무역 권리 수호'로 아편의 무역 유지를 위한 전쟁이 아니었다. 때문에 전쟁 승리 후 체결한 조약들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사달의 핵심이면서도 근본인 아편을 다룬 언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아편 무역은 외면상으론 불법이 되었고 청은 이것을 단속했으나 결과적으로 아편 수입량은 폭증하게 되었다.
조약 체결이 전해지자 여타 열강도 즉시 교섭을 요구했고 청 조정도 이런 열강을 이용해 영국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 교섭에 협력했다. 1844년에 미국과 망하조약(望厦條約)을 체결하고 프랑스와 황푸조약(黃埔條約)을 체결하고 조계를 인정받았고 1858년에 러시아와도 아이훈 조약(愛琿條約)을 체결하였다.
이후에도 서양 다수한 열강과 통상 장정을 체결하였으나 후대의 '중국 근대사의 시작'이라는 평가와 달리 아편전쟁은 중국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이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무역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개항장에서도 역시 이전과 다른 사회/경제적 변화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왜냐하면 애당초 '중국 근대사의 시작'이라는 평가 자체가 '정체된 사회에게 가해진 서구의 충격'을 당연시한 과제라는 전제를 깔고 역사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국이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면 여전히 큰 충격이 한 번 더 필요한 상태인 일변, 과거에는 광저우에서만 무역이 허가되어 수출품·수입품이 모두 광저우로만 오가던 탓에 그곳으로 가는 교통 관련 사업이 자연스럽게 발달했고 그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난징조약을 위시하여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과의 조약 체결 이후 서양과의 교역 출구는 늘어났고 교통로도 자연스럽게 다양화 및 단축되었다.
즉, 난징조약에서 파생된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교통로 발달에 따른 인구이동과 유랑민의 증가였다. 무역 경로가 다변화되면서 자연스레 그에 의지하던 많은 사람이 이동하기 시작했고 혹은 항구 근처로 이주하여 기존 농민들과 대립하는 일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양상은 특히 장강 하류에서 빈번히 나타났고, 이는 곧 청 왕조의 장강 이남에 대한 통치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이 과정에서 공행들이 또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본래 공행이란 청 조정에 돈 주고 허락받아 하는 것이라서 일종의 독점인데 공행을 폐지하니 너도나도 뛰어들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영국이랑 짝짜꿍해서 아편으로 돈 번 공행들은 이 전쟁으로 영국에게 뒤통수맞은격이 되었다.
청 왕조가 궁극적으로 외국과의 관계에서 이권을 양보한 이유도 바로 인구 이동과 유랑민 증가에 따른 국내 불안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었고, 이런 유랑민 문제는 결국 태평천국이라는 극도에 도달한 사태로 폭발하게 된다.
어쨌건 아편전쟁은 서양열강의 압도적인 힘과 청나라가 얼마나 개판이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준 전쟁이었다. 전쟁의 진행을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3.5. 삼원리 사건
아편전쟁이 한창이던 1841년 5월 29일, 광저우 삼원리(현 광저우시 바이윈구)에는 영국군과 청 민중과의 충돌인 이른바 삼원리 사건(Sanyuanli Incident)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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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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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순은 그 이후 대대로 매국노로 찍혀버렸으며 과거 시험 부서의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학생들이 얼굴에 먹물을 뿌리는 등 사람들에게 수시로 곤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삼원리 사건은, 중국이 말도 안 되게 쳐 발린 아편전쟁 기간 동안 외세에 대항한 유일한 민중 봉기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대부분이 중국인이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배우고 있다. 그 위상은 미국에서의 알라모 전투나 벙커힐 전투 정도라고 한다.
4. 영향
결과는 청의 압도적인 대패였으며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과 함께 홍콩을 영국이 식민지로 삼았고 유럽 열강의 국력이 몇몇 식민거점을 만드는 걸 넘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거대한 제국조차 박살낼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본격적인 서양 열강들의 청나라 쪼개기가 시작되었다.제1차 아편전쟁 발발 년도인 1840년은 중화권 주류 역사관에서 백년국치의 시작 년도로, 그리고 제1차 아편전쟁은 백년국치의 시발점으로 본다.
5. 평가
영국이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아편의 해악으로 인해 아편 수입을 막으려는 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때문에 당대와 현재를 막론하고 많은 비난을 받는다.[54]
심지어 당대 반대파조차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라고 언급했다.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총리 중 하나로 꼽히는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때 초선의원이었는데 의회연설에서 “원인이 이렇게도 부정한 전쟁, 이렇게도 불명예가 되는 전쟁을 나는 여태까지 알지 못한다. 광저우 앞바다에 휘날리는 유니언 잭(Union Jack)은 악명 높은 아편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펄럭이는 것이다.” 라고 대차게 깠을 정도다.
모든 전쟁이 더럽고 추악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아편전쟁은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전쟁의 이름은 지명[55]이나 국가나 민족, 사람 이름[56], 혹은 전쟁 기간[57]이 붙기 마련인데 이 전쟁은 이름부터 매우 특이하게 아편이 들어간다.[58] 보통 침략국은 여기저기서 많이 까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 전쟁의 침략국인 영국은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더불어 전쟁 당시에도, 이후에도 두고두고 욕을 먹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전쟁은 아직까지도 영국이 대영제국 시절 저지른 참상 중 가장 어처구니 없는 추악한 행동에 명분없고 부도덕한 전쟁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한국에서 혐성국이라는 별명이 나온 사례들 중 대표격으로 꼽힌다.[59]
대영제국 시절에 온갖 식민지에 저지른 해악이 많긴 하지만 이 사건만큼 주변국들에게 까이는 일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참상은 다른 식민제국도 비슷하게 저지른 경우가 많아서 쉬쉬하지만 주권국가가 마약 단속 나온 것에 반발하여 전쟁까지 일으킨 사례는 수천 년 세계 역사를 통틀어 봐도 아편전쟁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을 두고 중국사의 대가인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는 이 사건을 통해 중국사가 근대로 나아갔다는 충격·반응 패러다임을 주창했으나 오늘날 이러한 시각에 반발하는 중국인들도 많다. 사실상 중국이 혼자서 근대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결과가 중국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전쟁으로 여실히 보여준 청나라와 서양 열강과의 현격한 무력 차이는 중국 밖을 야만으로 간편하게 규정하던 중국인들의 천하관에 큰 균열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만 아편전쟁 그 자체로 벌어진 표면적인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에는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 기점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설도 여럿 제시되고 있다. 항구 5개는 극소수의 외국인만이 거주하였고 그 중의 대다수는 선교사들이었던 데다 영국 측의 자유무역도 청은 경제적 문제로 영국의 수출품의 구매가 어려운 반면, 영국 측이 가지고 오는 게 피아노나 포크 같은 사치품이었다. 오히려 자유무역 탓에 청의 수출 제한이 해제되면서 폭증하는 차 수입을 아편 무역으로 간신히 막아야 할 정도였다. 이후 마약 문제로 크게 데인 기억 때문인지 현대의 중국은 마약범에 대해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 범죄자도 외교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국외송환 요청도 거의 무시하고 사형을 선고하고 가능한 빨리 집행하고 시신을 인계할 정도로 상당한 엄벌주의를 보인다.
한편, 아편전쟁 후에도 청의 아편 단속책은 강화됐으나 근본을 때려잡지 못하고 소비자만 제압하는 정책이 결국 큰 실효를 거둘 리는 만무했고 제2차 아편전쟁 직전에는 아편 수입이 몇 배로 증가했다. 흔히 이러한 면모를 보고 도광제의 정책이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도광제는 재위 기간 내내 대(對) 아편 강경책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아편중독자였던 자신도 아편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아편을 딱 끊어버린 강력한 정신력도 가지고 있었으며, 아편전쟁 직전에는 황족들도 아편을 피운다고 가차없이 신강으로 유배할 정도로 초 강경론자였다. 정책 방향이 발본색원과 거리가 멀었을 뿐 위에서 언급했듯 단속책은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영국에서는 오히려 이 전쟁을 너무 쉽게 끝냈다는 비판이 튀어나왔다. 전쟁을 1년만 더 지속해 청 왕조를 궁지로 몰아넣었다면 더 많은 은을 챙겼으리라 애석해했다는 것이다. 이런 불만은 남경조약과 아편 판매에도 불구하고 청과의 차 무역 수지가 나아질 기미가 없자 더 강하게 나타났다. 즉 제1차 아편전쟁의 끝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6. 어록
우리는
귀국이
이곳에서 6~7만여 리[60]나 떨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적의 배가 무역을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은, 이곳에 큰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즉, 귀국에서 가져간 부는 모두 중국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중국인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것이 아닐지언정, 탐욕스럽게 이득을 갈구하는 그들은 타인을 해친다 하여도 상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폐하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 이 편지는 1840년 1월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 편지를 정식 외교 문서로 인정하지 않았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전해지지도 않았다. 다만 타임즈 신문에 실리기는 했다고 한다. #
그럼에도 이적의 배가 무역을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은, 이곳에 큰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즉, 귀국에서 가져간 부는 모두 중국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중국인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것이 아닐지언정, 탐욕스럽게 이득을 갈구하는 그들은 타인을 해친다 하여도 상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폐하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 이 편지는 1840년 1월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 편지를 정식 외교 문서로 인정하지 않았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전해지지도 않았다. 다만 타임즈 신문에 실리기는 했다고 한다. #
262. 우리 영국의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인가!
― 자유당 하원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9표 차이로 개전이 결정되는 결과를 보고 한 말.
― 자유당 하원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9표 차이로 개전이 결정되는 결과를 보고 한 말.
중국 영토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그 법률에 따르지 않는
외국인에 대해 중국이 식량 공급을 거부한 것이 어째서 중국의 죄가 되는지 본인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지, 그 수행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도 못했고, 책에서 읽어본 적도 없었노라고.
국가의 명예는 더럽혀졌습니다. 국가의 불의는 국가의 몰락을 앞당기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영국의 국왕과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 자유당 하원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62]의 의회 연설 中[63]
국가의 명예는 더럽혀졌습니다. 국가의 불의는 국가의 몰락을 앞당기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입니다.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득이 크더라도 그로 인해 영국의 국왕과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 자유당 하원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62]의 의회 연설 中[63]
[1]
청에서 이(夷)라는 명칭은 중국식, 즉
유교
이데올로기에 따른 통치를 하지 않는 국가나 사람들을 통칭하여 이르는 명칭이었다. 청에서는 현재의 외국인과 같은 의미의 명칭으로 썼으나 서양 측에서는 이 명칭을 혐오하였고 결국 2차 아편전쟁 이후 폐지되었다.
[2]
龔自珍, <明良論>, 1814, 閔斗基 外編 , 1981, p.178
[3]
일부 지역에서는 멸청흥한 등 민족주의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조직화를 시도했지만 극히 일부 지역이다.
[4]
강희제 때는 유럽에서 청은 플라톤식 철인정치 국가의 표본으로 극찬을 받았다.
[5]
이러한 성장 둔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정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이로 인한 토지의 과밀화로 만들어진 고차균형의 함정(high-level equilibrium trap)이 제기되었으나 이후에도 인구가 완만하게 상승하고 토지의 과밀화가 농업기술의 발전과 토지의 개간으로 감당이 가능하다는 연구가 나온 후에는 유야무야되었다.
[6]
마카오는 포르투갈이 뇌물 주고 얻은 땅이라 무역항이 아니었다.
[7]
직접 거래를 금지하고 중국인 중개상인인 행상을 통해서만 무역하게 했고 서양인들을 광저우 밖으로는 아예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
[8]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청에서는 살인자를 무조건 사형했다. 청도 이미지 관리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므로 처벌을 상대방 국가에 위임하거나 대상자를 줄이는 것으로 대체하였지만 문명국이라고 자칭하던 서양에서는 기겁할 노릇이었다. 한편 중국인들은 처벌이 너무 관대하다고 불만을 품었다. 웃긴 건 당시 영국에서는 1실링 이상의 절도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렸다. 문명국 부심은 있는 대로 부리면서 자기들도 별로 다를 건 없는
내로남불이었던 것.
[9]
유독 이 문장을 강조되는 이유는 하단의 임칙서 파견 부분을 참고.
[10]
사실 실질적인 인구수 자체는 여타 왕조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명조 말 일조편법이나 청나라의 지정은제를 통해 세금제도가 개편이 되고 인두세가 폐지되면서 백성들이 굳이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도망다닐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당시에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던 많은 백성들이 호적에 이름을 올리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다만, 안 그래도 인구 수가 많았는데 송조대에 1억 인구를 달성한 중국은 청조대에 이르러서는 4억의 인구 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직 증기기관이 발전하기 이전인 초기 산업혁명 시기의 공작 기계의 생산이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중국의 4억 인구는 산업혁명 초기에는 과학기술은 딸려도 인구 빨로 유럽 전체의 생산력과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정도였다.
[11]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삼각무역은 아편전쟁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으며 2차 아편전쟁이 종결된 후에나 활성화되었다.
[12]
사실 이는 '영국 정부' 입장에서 손해는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비용은 민간 상인이 지불하는 것이었고, 오히려 정부가 차가 수입되는 과정에서 세금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왕실의 전체 수입 중 17%가 차의 관세였다.
[13]
인도산 홍차를 들여오면 안 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인도에서 차를 재배한 것은 아편전쟁 이후부터다.
[14]
이 중 유명한 사람이
타타의 창립자 잠셋지 타타였다.
[15]
청에 밀수출를 하기위해 영국은 민간 상인이 중국 밀수업자에게 아편을 판매하도록 허용했다.
[16]
가경제 시기.
[17]
국가 행정 기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18]
3천만 냥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주자면 청나라의 한 해 국가예산이 4천만 냥이었다. 국가예산의 3/4에 해당하는 은을 매년 아편으로 유실한 것이다. 이대로 둔다면 국가 경제가 폭삭 주저앉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19]
다만 이건 개인의 편차가 심해서 오늘날 일반인이
담배 피듯이 아편을 흡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청나라 말기의 관료 유곤일은 하루에 아편을 100mg 이상 흡연하면서도 공무 처리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고 한다.
[20]
일설에 의하면 임칙서는 전도유망하던 형이
아편 중독으로 목숨을 잃은 것을 계기로 아편을 적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21]
청나라의 사상가. 경세론에 깊이 관심을 갖고 사회 기강을 이완할 것을 주장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을 경고했다. 공자진의 시 기해잡시(己亥雜詩)의 125(혹은 220번째 수)는 청 말기의 혼란상을 논할 때 종종 인용된다.
[22]
청에서 특정한 일에 전권을 위임하는 임시 벼슬. 3품 이상은 흠차대신. 이하는 흠차관원이라 한다.
[23]
대신, 임칙서는 아편 1상자당 차 5근을 줄 것을 약속했으나 턱없이 적은 양이었고 실질로 몰수나 마찬가지였다.
[24]
즉, 청나라 자체의 행정 집행을 양국 간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하게 하겠다는 얄팍한 속셈이면서 향후
영국 정부가 아편을 보상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25]
생석회가 물과 접촉하면 발열 반응으로 끓어오르는데 아편은 열에 약하다.
[26]
아편 폐기를 위해 사전에 여러 실험을 했는데, 불태우는 방법은 아편이 완전히 소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7]
당시 미국은
오스만 제국에서 만든 아편을 취급하고 있었다.
[28]
일개 상선 수준의 배에게 국가 해군이 패배하였으니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운 좋게 볼리지 호의 돛대에 포탄이 명중하자 만약 돛이 더 파손된다면 주둔지로 복귀하는 시간이 너무 걸리겠다고 판단한 엘리엇이 이쯤 하고 일단 돌아가자고 명령했기에 당장의 전멸만 간신히 피했을 뿐이고, 영국 해군이 이끄는 본대가 도착한다면 탈탈 털릴 것이 뻔했으니 어떻게든 대비를 해야 했다.
[29]
이후 글래드스턴은 영국 총리까지 오르게 되었고 하층 계급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개혁을 단행,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의회 정치인으로 알려진다.
윈스턴 처칠과 함께 영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로 여겨진다.
[30]
당시 영국 법률은 타국에 체류할 경우 타국의 법률을 준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31]
출처 이매뉴얼 C.Y.쉬 저 조윤수·서정희 역, 『근-현대 중국사 상권 : 제국의 영광과 해체』(서울: 까치글방, 2013), p. 242.
[32]
찰스 엘리엇의 친척으로 그 사촌동생이라는 이야기와 형이라는 이야기가 혼재한다.
[33]
병력 10,000명과 병선 60척, 서양 대포 300문을 확보하고, 11개의 포대를 만들고, 쇠사슬로 주강 하구를 막았으며, 민병대를 소집하고 서양인에게 상금을 걸어 내통자를 차단했다.
[34]
해안포는 군함의
함포보다 높이나 방어력 등 여러 면에서 우세를 점한다. 천하의 영국 해군이라도 이곳에 정면공격을 가했다면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했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35]
정해 총병 장조발은 전사, 정해 지현(사또)
요회상은 자결했다. 원래는 물과 식량만 요구했으나, 요회상이 거부해서 공격했다.
[36]
임칙서의 노력을 과소평가한 안일한 평가였다. 개전 당시까지 광저우를 제외한 타 지역들은 낙후된 무기로 전쟁을 수행했다.
[37]
이것은
영국인들이
미국 상인을 자처하면서 계속 무역했기 때문이었다. 북경에서는 아편 무역이 완전히 근절된 게 아니라고 파악했다.
[38]
몽골인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종군했다.
[39]
조지 엘리엇은 전 해 11월에 건강 문제로 귀국했다.
[40]
몽골 왕공의 후예로 만주족에 편입된 보르지기트 명문가의 금수저 중 금수저였다.
[41]
강희제의 황14자이자
옹정제의 동복 아우였으나 황권다툼으로 사이가 틀어져 핍박받았던 순근군왕 윤제의 후손으로, 도광제에게는 조카뻘이었다.
[42]
위구르인 장게르가 일으킨 반란인데 장게르는 위구르인 1만으로 신장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신장의 4개 도시를 함락하며 신장 남부를 휩쓸 정도로 기세가 강했다. 특히 청나라에서 보낸 진압군 20,000명까지 역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청은 36,000명의 병력을 다시 투입해서야 겨우 진압할수 있었다. 이때 청나라는 소비한 돈이 1,000만냥이었고 동원된 말이 20,000마리 낙타가 10,000마리였다. 하지만 정작 반란의 주범인 장게르는 그가 해외로 도주하는 바람에 잡는데 실패한다.
[43]
양방은 이 반란들을 진압한 공으로 종1품 관직에 과용후(果勇候)의 작위를 얻고, 자금성 안에서 말을 타는 것을 허락받는다.
[44]
사실 중국의 고전소설들을 보면 이렇게 오물로 요술을 파훼하는 장면들이 꽤나 나온다. 특히
수호전만 해도
이규가
나진인에게 도술로 혼이 나면서 감옥으로 떨어졌을때 간수들이 이규를 요괴라며 그에게 오물을 가져와서 부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알고보면 중국의 유서 깊은 미신.
[45]
건륭제의 황11자 성철친왕 영성의 손자.
[46]
아편전쟁 이후에도 청나라의 많은 지식인들이 서유럽보다도 러시아를 큰 위협으로 꼽았다.
[47]
실제로는 착각이고 폭락한 상태였다.
[48]
서유럽 열강은 영토에 대한 욕심은 그다지 없었다. 이들은 제국을 무너뜨리고 정복왕조를 여는 그동안의 이민족(정작 청나라 자신들도 정복왕조지만)과는 전혀 다른 형태, 즉 자본주의로 중국의 문을 두들겼다.
[49]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착각임이 밝혀지고 서양은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간다.
[출처2]
강상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 2007, 논형, p.30~31
[51]
공행도
건륭제 시기부터 청 조정에게 반강제로 뇌물을 바쳐야만 했다. 심지어 난징조약 배상금조차 이 사람들이 일부를 감당해야 했다.
[52]
서양열강은 청조가 멸망하는 걸 원치 않았고 오히려 막으려고까지 했다. 기껏 청조를 제압하고 이것저것 이권을 뜯어냈는데 청조가 멸망하고 다른 세력이 새로 집권할때 그 세력이 서양열강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면 처음부터 다시 전쟁을 벌여 굴복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53]
청 조정과 협상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54]
보통 교역에서 적자가 나면 장사를 관두지 마약을 팔진 않는다.
[55]
크림 전쟁,
포클랜드 전쟁 등
[56]
고구려-수 전쟁,
베트남 전쟁,
한니발 전쟁 등
[57]
백년전쟁,
30년 전쟁 등
[58]
또다른 특이한 이름의 전쟁으로
축구전쟁과
대구전쟁이 있는데 전자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서로 간의 불만이 쌓이고 쌓이다가 월드컵 축구 경기 승패가 기폭제가 되어 터진 것이고 후자는 영국과 아이슬란드가 대구잡이로 인해 영해권 갈등이 벌어지면서 발생한 것이다.
[59]
바로 옆나라에서 터진 일이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인 역사의식이 박혀 있다면 시진핑 시기부터 패악질이 심해진 중국을 싫어해도 아편전쟁에서만큼은 중국은 피해자인 걸 인정하며 영국을 대차게 비판하는 편이다.
[60]
약 23,500km 정도다.
[61]
당대 유럽은 마약의 위험성을 잘 몰랐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여겼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으나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주장이다. 당장 후술할 글래드스턴도 아편을 팔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을 '국가를 불명예로 빠트리게 될 행위'라고 강경하게 비판했고 동시대의 지식인
카를 마르크스 역시
아편을 마약의 대명사격으로 취급한 것은 유명하다. 이 말인즉 시대적 한계로 '마약의 메커니즘이 지금만큼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하면 모를까 정말 당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 아편의 해악이 술보다 적었을 것이라고 여겼으리라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62]
이후 총리가 되면서 1889년에 인도 아편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제정한다.
[63]
지학사 한국사교과서 212페이지에 수록됨.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에게는 아편을 금지할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편의 무서움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국의 외무 장관은 청의 정당한 권리마저 짓밟으며 이 부정한 무역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184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