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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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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 왕국 1923년까지 영국령 인도 제국 정부에게 외교권을 통제당하여 외무는 오로지 영국 통감(British resident)에 의해 행사되었지만, 다른 토후국들과는 달리 내부 행정에 대해서는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였던 보호국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독립한 1923년 이전까지는 간혹 인도 제국의 토후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Imperial Gazetteer of India(1909)
자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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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디지아는 일방적으로 식민지 남로디지아가 자치령을 선포한 것으로,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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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국
Puppet States
이라크 왕국 · 이란 제국*
* 이란 제국 1941년 대영제국과 소련 페르시아 침공 협공으로 점령되어, 영소군 각각이 각 점령지에 주둔하였고 또한 각각의 점령지를 통치하는 분할 통치가 이뤄졌다.
군정
Military Administrations
오가덴 · 에리트레아 · 소말릴란드 · 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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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럽인 도래 이전3. 유럽인의 도래
3.1. 잉글랜드의 개척3.2. 프랑스의 개척
4. 영국령 북아메리카5. 캐나다 자치령6. 영국으로부터의 독립7. 근현대8. 근대 캐나다 원주민의 역사
8.1. 식민지 시대8.2. 레지덴셜 스쿨8.3. 원주민들의 현황

1. 개요

캐나다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유럽인 도래 이전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도래한 사람들은 빙하기 시절 베링 해협을 통해 아시아에서 육로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되지 않지만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고인류학자들은 약 3만 년 전에 처음으로 북아메리카가 인류에게 발견됐고, 1만 5천 년~2만 년 전 대규모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마지막 빙하기를 필두로 아프로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육로는 완전히 끊어졌고, 곧 아메리카 전체로 퍼진 고대인들은 다양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북아메리카 전역에 너무나도 많은 부족과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북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라고 한 단어로 퉁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때문에 식민지 시대 이전의 역사는 짧게 정리하기 굉장히 어려워진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이들 문화는 고인디언(Paleo-Indian, 혹은 Paleo-American) 문화에 기반을 두고 발달했으며, 많은 문명이 현재 미국과 캐나다 일대의 대평원과 오대호 주변, 또한 서부 및 남부 지역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서로 비슷한 창조 신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시시피 호를 숭상하던 애니미즘 정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native-americans-tribe-map.png
<colbgcolor=#d82727>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민족·문화적 분류 출처
12세기경, 온타리오 호수 일대에 이로쿼이 연맹이 결성된다. 현대에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이로쿼이'[1]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로쿼이 연맹의 사람들은 부족연맹을 하우데노사우니(Haudenosaunee; 긴 집에 함께 사는 사람들)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렀다. 이로쿼이 연맹의 거주지는 현재의 미국과 캐나다 영토에 걸쳐 있었으며, 언어와 문화가 유사한 모호크족, 오네이다족, 오논다가족, 카유가족, 그리고 세네카족 총 5개 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이로쿼이 연맹은 히아와타를 비롯한 데가나위다(일명 피스메이커, Peacemaker), 지곤사세 등 각 부족의 평화주의적 지도자들이 결성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연맹이었다. 각 지도자들은 언어적, 문화적인 특성을 깊게 공유하는 다섯 부족들이 서로 함께 평화로운 이웃 사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 하에 연합을 결정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히아와타는 전쟁에 시달리던 다섯 부족의 구성원들을 위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부족장들을 설득하며 연합을 이뤄냈고, 끝내 공포정치와 전쟁을 일삼던 모호크족의 지도자 타도다호까지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히아와타는 '대평화율법'을 선포하여 다섯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진다. 흔히 이로쿼이 외에도 연합의 특성에서 착안해 '오족 연합(Five Nations)'라고도 불리는데, 1722년 투스카로라족이 가입하며 잠시 '육족 연합(Six Nations)'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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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럽인의 도래

지금의 캐나다 땅은 서기 1000년경 바이킹들의 방문 후 한동안 유럽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해와 함께 서유럽 국가들이 '신대륙'에 흥미를 가지고 아메리카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현 캐나다 지역에 관심을 보였다.

3.1. 잉글랜드의 개척


파일:discovery-day-john-cabot-newfoundland-and-labrador.jpg
<colbgcolor=#d82727> 뉴펀들랜드에 당도한 조반니 카보토 출처
1497년, 영어식으로 존 캐벗(John Cabot)이라고도 알려진 이탈리아인 탐험가 조반니 카보토(Giovanni Caboto)는 잉글랜드 왕국 헨리 7세의 재정 지원과 함께 동양으로 향하는 항로 개척을 위해 항해를 떠난다. 오래도록 바다 위를 떠돌던 카보토 일행은 마침내 육지에 도착하지만, 다다른 곳은 동양이 아닌 신대륙이었다. 이에 카보토는 지명을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새로이 찾은 땅)라고 명명한 후 잉글랜드 왕국의 땅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첫 탐험 이후 잉글랜드에 헨리 8세 성공회 창립, 메리 1세 가톨릭 진흥정책 등 온갖 종교, 정치적 혼란이 도래하며 식민지 개척은 잠시 중단되었다.

잉글랜드가 다시 아메리카 대륙 개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엘리자베스 1세 시기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3년에 험프리 길버트(Humphrey Gilburt)를 캐나다 동부로 보냈다. 본래 군인이였던 길버트는 아일랜드 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며 그곳에 식민지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훗날 대서양 너머 신대륙이 부상하며 자신의 못다 한 꿈을 신대륙에 실현하려 했다. 1578년 길버트는 북아메리카 땅을 식민지화하라는 여왕의 명을 받아 지금의 뉴펀들랜드 세인트 존스(St. Johns)에 도착했다. 이후 뉴펀들랜드에는 1610년에 식민지 정부가 세워진다. # 세인트 존스를 여왕의 땅이라 선언한 길버트는 뉴펀들랜드를 떠나 항해를 계속하지만, 항해 도중 배 한 척을 잃는 바람에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대서양 상에서 폭풍을 만나 길버트 일행은 모두 사망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지만, 잉글랜드의 북아메리카 개척은 계속되었다. 길버트를 이어 캐나다 지역을 탐사했던 사람은 제임스 1세 시대의 잉글랜드 탐험가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이었다. 허드슨은 대항해시대의 도래와 함께 동양으로 향하는 항로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자금 지원이 끊겼다. 1609년 결국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향한 허드슨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서포트를 받고 러시아를 지나는 북동항로를 탐사하지만, 북극해의 부빙에 가로막혀 GG를 치고 북서항로로 기수를 돌렸다. 항해를 계속하던 허드슨 일행은 대서양 건너 지금의 노바스코샤 지역에 도착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만났고, 북아메리카 동부 연안을 항해하다 얼마 후 기수를 돌려 유럽으로 돌아갔다.

1610년 이번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허드슨은 곧바로 탐험대를 꾸려 신대륙으로 떠났다. 지금의 래브라도 북쪽에 다다른 허드슨 일행은 자신들이 알던 땅 북쪽에도 널찍한 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자신의 이름을 따 허드슨 만(Hudson Bay)으로 명명한다. 북서항로 개척을 목표로 탐사를 계속하던 허드슨 일행은, 겨울이 되어 바다가 얼어버리자 탐사를 포기하고 육지에 잠시 머물렀다. 이듬해 봄이 되어 얼음이 녹자 허드슨은 다시 항해를 나서려 하지만, 계속되는 여정에 지쳐버린 선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선원들은 허드슨이 자신들의 의견을 무시하려 들자 그를 납치해 먼 바다로 나포해버린 채 영국으로 향했다.

<colbgcolor=#d82727> 17세기의 루퍼츠랜드 출처
허드슨 일행이 발견한 땅은 훗날 찰스 1세에 의해 영국 영토로 선포되고, 그의 외조카인 컴벌랜드 공작 루퍼트(Rupert)의 이름을 따 루퍼츠랜드(Rupert's Land)라 불린다. # 이후 영국 내전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를 거쳐 즉위한 찰스 2세 1670년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를 차리고, 루퍼츠랜드 일대의 모피 독점 거래권을 허용했다. 이들은 탐험가들을 초빙해 캐나다 중서부 내륙을 탐험하며 훗날 식민지가 될 땅을 개척해 나갔다.

3.2. 프랑스의 개척


파일:jacques-cartier-1.jpg
<colbgcolor=#d82727> 자크 카르티에의 초상화 출처
프랑스 왕국의 캐나다 식민 역사는, 프랑스령 북아메리카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 누벨프랑스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첫 캐나다 지역 탐사는 1534년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주도한다. 카르티에는 20일간의 항해 끝에 가스페 반도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 "프랑스 왕 만세"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꽂았다. 이것이 프랑스의 퀘벡 개척의 시작이었다. # 카르티에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가스페 반도에 살던 이로쿼이 족의 일파 세인트로렌스 이로쿼이 족(St. Lawrence Iroquoians) 족장 돈나코나의 두 아들을 배에 싣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카르티에의 보고를 받은 프랑스 왕은, 황금 어장과 빽빽한 삼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흥분하여 2번째 원정을 보내게 된다.

1535년 다시 가스페 반도에 도착한 카르티에 일행은 우선 돈나코나의 두 아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원주민들에게 강 상류에 가면 큰 마을과 더욱 더 큰 강이 존재한다는 것을 들은 카르티에는 탐사에 나서고, 지금의 세인트로렌스 강을 발견한다. 강을 따라 항해를 계속한 카르티에 일행은 어느 날 강가의 스타다코나(Stadacona)라는 마을에 도착하게 되고, 현지 원주민들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원주민들은 북쪽 연안을 가리키면서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카나타(Kanata)'라고 했고, 이것이 지금의 국명 캐나다의 유래이다. 그들은 항해를 계속하여 지금의 몬트리올 일대의 마을 오슐라가(Hochelaga)까지 도달했다.

파일:map-voyages-Jacques-Cartier.webp
<colbgcolor=#d82727> 자크 카르티에 일행의 항행 경로[2] 출처
오슐라가 일대의 특성과 원주민들의 언어를 메모한 카르티에 일행은 스타다코나로 돌아가 머물지만, 너무나도 추운 날씨 탓에 선원들 사이에 괴혈병이 도는 바람에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아들들이 아닌 추장 돈나코나 본인을 납치한 채로 말이다. 돈나코나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카르티에 일행과 프랑스 왕에게 카르티에가 발견한 땅 북쪽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사그네 왕국'(Kingdom of Sagney)이라는 신비의 땅이 존재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혹해버린 프랑스 왕은 1541년, 사그네의 보물을 탈취하고 세인트로렌스 강 일대에 영구 정착지를 건설하라는 명령과 함께 다시 한 번 카르티에 일행을 캐나다로 보냈다.

스타다코나에 다다른 카르티에 일행은 스타다코나에서 수 km가량 떨어진 곳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샤를부르-로얄(Charlesbourg-Royal)이라 이름지은 뒤 지역을 요새화한다. 이후 돈나코나가 말한 사그네 왕국을 찾으러 떠나지만, 석영과 황철석 등 당시 기준에서 쓸모없는 광물들만 잔뜩 발견한 채 돌아온다. 그러나 오랜만에 다시 찾은 샤를부르 일대도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주변에 살던 이로쿼이 족이 프랑스인 정착지를 침범하며 충돌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대가 혼란해져버린 것. 결국 카르티에 일행의 세 번째 여정은 상처만을 남긴 채 1542년 프랑스로 귀국하며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국은 퀘벡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머지 않아 리슐리외에 의하여 일백조합인상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가 설립되어 식민지 교역을 독점하였고, 지속적으로 원주민과의 모피 교역을 확장해 나갔다. 당시 프랑스의 교역과 함께 발전한 도시가 몬트리올이다. 이들이 정착한 캐나다 북동부는 훗날 아카디(Acadie)/ 아카디아(Acadia)라고 불리게 된다. 하지만, 야심차게 시작한 식민지 운영은 지나치게 적은 인구로 인해 수월하지만은 않았다.[3] 1660년 당시 프랑스 정착민들의 인구는 겨우 2500명이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상당수의 프랑스 정착민들이 신대륙으로 향했지만, 적응에 실패해 죽거나 프랑스로 되돌아가는 수도 많았다. 오늘날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1천만 명은 초기 정착민 2,600명의 후손들이다.

4. 영국령 북아메리카

4.1. 위트레흐트 조약 7년 전쟁

한편, 루퍼츠랜드 일대에 식민지를 개척하던 영국 프랑스가 차지한 퀘벡과 아카디아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본국에서 캐나다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프랑스 땅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의 거대한 어족자원 역시 탐나는 자산이었다.

1714년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위트레흐트 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주된 조약 내용은 스페인 및 프랑스 왕국의 유럽 내 영토와 식민지를 타국에 할양라는 지시였으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영토였던 루퍼츠랜드와 뉴펀들랜드 섬, 노바스코샤 지역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이로서 영국은 아카디아 전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영국은 한동안 프랑스인들을 계속 아카디아에서 살도록 허락했으나, 얼마 후 7년 전쟁이 일어나자 아카디아 거주 프랑스인들의 충성심을 의심해 모두 쫓아내버렸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프랑스인들은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거나 노바스코샤 일대 케이프 브레턴 섬 및 생피에르 미클롱 섬 등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루이지애나 등 북아메리카 대륙 남쪽으로 추방[4]되었다. 노바스코샤에서 일어난 아카디아인 축출 등의 사건은 캐나다 동부의 아픈 역사의 일부이다.

아카디아가 넘어가고 나서도 프랑스는 퀘벡을 포함한 대부분의 캐나다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1756년 일어난 프랑스-인디언 전쟁으로 나머지 지역마저 모두 영국에게 넘어갔다.

파일:sum1454.jpg
<colbgcolor=#d82727> 아브라함 평원 전투 출처
전쟁 초기 미국 오하이오 지역에서 영국군과 충돌한 프랑스군은 루이 조제프 드 몽캄(Louis-Joseph de Montcalm) 장군의 지휘 하에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영국군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온타리오 지역의 영국 주요 교역소였던 오스위고 요새(Fort Oswego)마저 프랑스군에게 함락당하는 등 전황은 영국에게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영국군은 좌절하지 않았고, 1758년 제임스 울프(James Wolfe) 장군과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역공을 개시했다. 울프의 전장 투입과 함께 루이스버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국군은, 머지않아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을 손에 넣고 퀘벡 공격 계획을 세웠다. 1759년 9월,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영국군은 퀘벡 주의 아브라함 평원으로 들어서고, 울프 장군을 잃는 처절한 혈전 끝에 프랑스군을 퀘벡 시까지 격퇴시켰다. 퀘벡 시의 요새에서 영국군을 방어하던 프랑스군은, 9월 14일 지휘관 몽캄의 전사하자 끝내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한편 살아남은 프랑스군은 몬트리올 일대로 퇴각하며 본국에서의 지원을 기다린다. 당시 캐나다 총독이었던 보드레이유 후작(Marquis de Vaudreuil)은 전투 패배의 책임을 모조리 몽캄 장군에게 돌리며 퀘벡 시를 되찾으려 했다. 1760년 4월 퀘벡의 영국군이 전투 후유증과 괴혈병에 시달리며 골골대던 그 때, 보드레이유는 군대를 이끌고 퀘벡 시로 향한다. 전투 대비가 미비했고 병사들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던 영국군은 전투를 피하고 후퇴하려 하지만, 사령관 제임스 머레이(James Murray)의 지시 하에 전투를 감행한다.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으나, 퀘벡에서 버티기에 들어간 영국군은 한 달 후 키브롱 만 해전에서 프랑스의 수송선을 쳐부수고 넘어온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시도했다. 당황한 보드레이유 군대는 몬트리올로 퇴각해 방어에 들어가지만 사방에서 밀려오는 영국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759년 최후의 보루였던 몬트리올마저 함락되며 퀘벡 전역이 영국의 차지가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파리 조약을 체결하여 공식적으로 퀘벡 일대를 손에 넣었다.

합병 이후에도 퀘벡에 남아 있던 프랑스인들은 영국 왕실에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통치 초기부터 반란 등 충돌이 잦았다. 당시 미국 독립전쟁으로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퀘벡 일대 캐나다 지역이 독립전쟁에서 미국의 편을 드는 것을 우려했고, 이에 1774년에 퀘벡 조약을 맺어 퀘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프랑스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특권을 인정하였다.

4.2. 미국 독립 전쟁

1770년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은 캐나다 일대마저 전장으로 만들었다. 당시 미국 독립군은 영국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노바스코샤와 퀘벡 일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자신들과 손을 잡고 같이 미합중국을 이루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꽤나 진지하게 논의되었던 모양인지, 미군은 추후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미합중국에 가입할 식민지 목록에 노바스코샤와 퀘벡을 위한 빈 칸 두 개를 남겨두기도 했었다. 소수의 캐나다인들이 미국 독립을 지지했으나 프랑스계를 포함한 대부분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며, 노바스코샤와 퀘벡 식민지 정부 역시 미국 독립 정부의 제안에 공식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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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퀘벡에서 대치하는 영국군과 미국 대륙군 출처
1775년, 미국 독립군은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와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장군의 지휘 하에 퀘벡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퀘벡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주둔하는 영국군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이 허술했기 때문. 손쉽게 몬트리올을 점령한 몽고메리 장군은 곧이어 캐나다 측 지휘관 가이 칼튼(Guy Carleton) 장군이 피신한 퀘벡 시를 공격하려 한다. 몽고메리 군대는 우선 물자 재보급을 위해 보급병력을 지휘하던 아놀드 장군을 기다렸으나, 메인 주에서 병력을 보트에 태워 강을 따라 빠르게 퀘벡으로 향하려 했던 아놀드 일행은 거센 강물 때문에 빠른 이동은 커녕 대부분의 보트가 침몰하였고, 부족한 물자에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겨울이 가까워지며 폭설이 내렸다. 그럼에도 두 장군은 승리를 위해 무리하게 퀘벡 시 공격을 강행했으나, 결과적으로 크게 패했다.

미국 대륙군은 퀘벡 전투의 패배로 대부분의 병사들과 몽고메리 장군을 잃었으며, 아놀드 장군 역시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한편 성공적으로 퀘벡을 방어한 칼튼 장군과 영국군은 본토에서 온 지원 병력과 함께 대륙군을 몬트리올까지 퇴각시켰다. 계속해서 대륙군을 쫓아가던 영국군은 1776년, 추가 병력을 확보한 미국군과 뉴욕 주 챔플레인 호수 일대에서 맞붙는다. 발쿠르 섬 전투로 알려진 이 전투는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머지않아 또다시 겨울이 찾아오자 칼튼의 군대는 몬트리올로 돌아간다. 그러나 퀘벡 점령 당시 벌였던 대륙군의 횡포 탓에 미국 독립군의 이미지는 크게 추락했고, 소수나마 캐나다에 남아 있던 독립군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게 되었다.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 약 75,000명의 미국 내 왕당파(영국 지지자)들이 캐나다로 피신하면서 캐나다는 명실상부한 친(親)영국 국가가, 미국은 반(反)영국 국가가 되었다. 한동안 총과 칼을 들고 싸우던 두 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롭게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특히 비옥한 캐나다 동부의 토양에 관심을 가진 미국 농부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오기도 했다.

4.3. 식민지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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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1791년 헌법 제정 당시 캐나다 일대 영토 구분 출처
미국 독립 전쟁에서 패배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후 1791년 헌법 (Constitutional Act of 1791)을 제정하여 남은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행정을 재편했다. 영국 의회는 당시 1763년부터 영국령 퀘벡 #이라 불리던 캐나다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를 프랑스계 지역 하류 캐나다(Lower Canada) #[5]와 영국계 지역 상류 캐나다(Upper Canada) #[6] 2개 주로 나누고, 주별로 정부를 형성하여 영국의 허락 아래 자체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을 허용했다.[7] 또한 영국은 부총독(Lieutenant Governor)을 임명해 캐나다로 파견을 보냈고, 부총독은 현지의 행정을 도맡을 장관들을 임명했다. 여기에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차려져 부총독에게 민의를 전달하기 시작했지만, 실질적인 주권은 부총독과 그의 내각에게 있었다.

4.4. 미영전쟁

자국군을 꺾고 독립을 한 미국이 아니꼬왔던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자 영국군 탈영병들을 수색한다는 핑계로 미국 상선들을 맘대로 수색하여 압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더해서 미국인 상인들을 탈영병으로 몰아 영국군에 강제로 징집하거나 프랑스군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씌워 미국 상선들에 발포까지 하기도 했다. 이에 화가 난 미국인들 가운데서 영국과 다시 싸우자는 강경파 여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직 영국령이었던 캐나다에도 반미 여론이 감돌며 두 나라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당시 초강대국 대영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독립 초기 미국에게 다소 무리한 도박이었지만, 미국은 영국이 나폴레옹과 싸우느라 다른 곳에 파견할 여유 병력이 부족한 틈을 타 전쟁을 일으킨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의 본토를 직접 공격하기 어려워 영국령 캐나다가 그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에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했다.

파일:Battle of Tipperance Kutz and Allison print, 1889.jpg
<colbgcolor=#d82727> 영국군의 편에 서서 싸우는 테쿰세 군대[8] 출처
갑작스러운 공격에 영국의 지원 병력이 없던 캐나다는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미국에게 오대호 지역과 토론토, 그리고 몬트리올까지 함락당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전쟁을 터뜨린 미국 역시 준비가 잘 안된 상태였으며, 특히 영국의 지원을 받고 미국의 원주민 탄압에 대항하던 테쿰세가 본격적으로 캐나다 방어를 돕자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미국은 영국 본국이 나폴레옹에 정신 팔린 틈을 타 빠르게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폴레옹을 잡은 영국군이 캐나다로 향하는 걸 허용했고, 본토 군대의 지원에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등에 업은 캐나다군은 순식간에 미군을 몰아낸 뒤 미국 본토를 침공했다.

영국령 캐나다 군은 순식간에 뉴욕을 함락시키고 빠른 속도로 남진,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백악관까지 불태워버렸다. 미국 역사상 워싱턴 D.C.가 적군에게 점령당하고 백악관이 전소한 적은 이때가 유일하다. 하지만 미군의 반격도 예상보다 거셌기에 영국군은 유의미한 승리 없이 각지에서 피해를 입으며 손해를 누적시켰다. 결정적으로 교착 상태가 한창이던 와중에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 섬을 탈출하면서 영국과 가까운 유럽 본토가 또다시 전쟁터로 변했고, 이에 계속되는 전쟁에 지쳐버린 미국과 황급히 종전 협약을 맺으면서 캐나다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4.5. 각지의 반란

상술한 바와 같이 영국령 캐나다는 실질적으로 영국에서 파견된 부총독 및 그의 내각의 독재로 굴러갔는데, 시간이 지나며 이러한 권력구조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특히 하캐나다(퀘벡)의 경우 소수의 영국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계를 제치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많은 프랑스계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상캐나다(온타리오)라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성공회 교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캐나다 식민지 정부가 비(非) 성공회 교파 소속 주민을 차별한 것이다.

이로 인해 1830년대 캐나다 전역에서 수많은 현지 주민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1837년 1838년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퀘벡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곧 무참하게 진압당했고, 온타리오에서도 1836년에 반란이 일어났다가 철저하게 진압당했다. 하캐나다의 반란은 미군의 지원까지 받으며 제법 끈질기게 이어졌지만, 상캐나다의 반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반란 이후 하캐나다에서는 영국군에 의한 보복이 횡행했으며, 영국 정부는 반란을 계기로 하캐나다의 프랑스계를 영국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는 초강경 정책을 도입했다.

4.6. 더럼 보고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잇따른 반란에 놀란 영국 정부는, 제1대 더럼 백작 존 램턴(John Lambton)을 캐나다에 파견해 캐나다 식민지 통치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다. 명을 받고 캐나다를 둘러본 더럼은 영국으로 귀국해 더럼 보고서(Durham's Report)를 발간한다. 보고서의 내용은 영국 정부의 양캐나다 통합 정책에 찬성하지만, 동시에 현지의 민심을 무시하는 식민지 정부와 프랑스어 탄압 정책은 지속적인 반란을 낳을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었다.

더럼 보고서는 영국 정권계에 큰 논란을 일으켰고, 특히 토리당 인사들을 중심으로 많은 정치인들이 그의 자유주의적 사고관이 담긴 주장을 비판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의 보고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1841년에 상캐나다 정부와 하캐나다 정부를 하나(Province of Canada)로 통합했다. # 영국은 또한 통합 캐나다 정부의 휘하에 서캐나다(Canada West, 온타리오), 동캐나다(Canada East, 퀘벡)이라는 행정구역을 두었고, 이전처럼 총독을 캐나다 현지에 파견하되 행정권은 현지 의회에서 선출한 총리와 장관들이 행사하도록 했다. # 이는 영국 식민지 최초의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 자치정부)였다.[9] 물론 퀘벡 탄압 정책도 완화되어 프랑스어도 다시 허용되었다. 한편, 별도의 식민지가 꾸려져 있던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 뉴브런즈윅에도 캐나다와 동일한 이유로 자치 정부가 만들어졌다.

<colbgcolor=#d82727> 수도로 지정되기 직전의 오타와 출처
양 정부의 통합으로 캐나다는 수도를 다시 정해야 했는데, 온타리오와 퀘벡은 자신들의 영역에 수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캐나다 주 정부는 킹스턴, 몬트리올, 토론토, 퀘벡 시티 등으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빅토리아 여왕의 중재 끝에 온타리오와 퀘벡 중간의 오타와가 수도로 정해지면서 오타와에 정착했다.

이 시기부터 세계 각지에서 캐나다(온타리오, 퀘벡, 동부 지역)로 향하는 이민이 본격화되었다. 마침 아일랜드 대기근이 터지는 바람에 많은 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캐나다로 유입되었고, 영국에서도 수많은 하층민들이나 고아들이 캐나다로 유입되었다. 또한 미국이 여전히 노예제를 유지하던 시기 미국의 몇몇 흑인 노예들도 지하철도 등의 반노예제 비밀결사들의 도움에 힘입어 18세기에 이미 노예제를 폐지한 캐나다로 도망쳤다. 이때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을 다시 잡아들이려 노예 사냥꾼을 캐나다에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캐나다에서 난동을 부려 외교 문제로 번지기도 했다.

4.7. 브리티시 컬럼비아

한편 별도의 정부가 꾸려지지 않았던 캐나다 서부 및 루퍼츠랜드, 북서부 변방 지역에도 이민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은 태평양에 맞닿아있어 온타리오나 퀘벡에 비해 개척이 늦었지만, 제임스 쿡에 의해 영국에서도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이 알려지고 소수의 이민자들이 밴쿠버 섬에 자리잡으면서 이 일대를 관할하는 작은 식민정부가 세워졌다. 얼마 후 브리티시 컬럼비아 내륙 지역에서 이 발견되었고, 이에 따라 내륙으로도 이민자들이 유입되자 영국 정부는 재빠르게 브리티시 컬럼비아 지역에도 식민정부를 수립했다. 한동안 남남이었던 두 식민정부는 밴쿠버 섬 쪽이 재정난을 겪으면서 하나의 식민정부인 브리티시 컬럼비아로 통합되었다.

5. 캐나다 자치령


<colbgcolor=#d82727> 샬럿타운 회의에 참여한 각 지역 대표들 출처
1800년대 들어 미국이 빠르게 발전하자, 영국은 캐나다가 미국에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정, 정치적 통합에 나섰다. 이에 따라 1867년 기존 캐나다 지역이었던 퀘벡, 온타리오에 대서양 일대의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를 더해 총 4개 주로 이루어진 캐나다 자치령이 출범했다.

캐나다에 자치 정부를 수립한 영국 정부는 장차 영국령 북아메리카, 곧 지금의 캐나다 전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길 바랐으나, 서로 다른 경위로 구성된 캐나다 주(온타리오, 퀘벡)와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뉴펀들랜드간의 이해 관계 충돌로 통합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캐나다 거주민들은 미국 미국-멕시코 전쟁을 벌인 다음 명백한 운명 등의 주장을 하는 걸 보고,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이 엄연한 주권국 멕시코를 찍어누르고 땅을 뺏는 행위를 정당화하자 어쩌면 자신들도 멕시코와 똑같은 신세가 될 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10] 여기에 남북 전쟁의 발발과 함께 북군의 아일랜드인 병사들 일부가 영국령 캐나다에 침입해 난동을 피운 것을 계기로,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통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864년,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 정부 대표들은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정부가 있는 샬럿타운에 모여 통합을 논의했고 이중 캐나다 주, 뉴브런즈윅, 노바스코샤는 통합에 찬성했다.

1867년 영국 의회에서 영국령 북아메리카법 (British North America Act of 1867)이 통과되며 대영제국 최초의 자치령인 캐나다 자치령(Dominion of Canada)이 창설되었고, 서, 동 캐나다로 불리던 주는 각각 온타리오 퀘벡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캐나다 자치령은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써 영국 정부의 허가 아래 헌법을 수정할 수 있는 높은 권한을 받았으며, 통합된 각 식민지 정부 역시 자치령 휘하의 주 정부가 되어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국가로써의 캐나다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법안이 통과된 7월 1일은 현재 캐나다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가 공휴일인 캐나다의 날(Canada Day)로 지정되어 있다.

캐나다 자치령은 1870년 허드슨 베이 컴퍼니에 30만 달러를 지불한 뒤 루퍼츠랜드를 매입했다.[11] 캐나다는 같은 해 현 캐나다의 유콘 주, 북서부 준주, 누나부트 준주의 일부가 되는 북서부 지역도 사들이고, 이듬해 머나먼 대륙 반대편의 브리티시 컬럼비아까지 통합한다. 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 통합을 위해 캐나다 정부가 내건 정책은 꽤나 파격적이었다. 우선 브리티시 컬럼비아 영토 내 영국 해군 태평양 기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통합 이전 식민지 정부의 부채를 전액 탕감해주기로 한다. 여기에 10년 내로 대륙 횡단 철도 건설까지 약속해버리자 혹한 브리티시 컬럼비아 정부는 통합을 승인해버린다. 한편 브리티시 컬럼비아 가입 후 2년이 지난 1873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연방에 가입한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는 원래는 캐나다 연방 창설을 위한 회담에도 참여했지만 정작 연방 결성에는 불참했는데, 철도를 놓아준다는 조건으로 1873년 뒤늦게 연방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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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캐네디언 퍼시픽 대륙 횡단 철도의 완공 출처
캐나다 자치령이 이처럼 온갖 혜택을 다 주면서까지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끌어들이려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만약 영국령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태평양과 접한 브리티시 컬럼비아가 미국에 붙는 순간 태평양 해안선은 모조리 미국의 차지가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한창 미국을 견제하던 영국 입장에서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에 어떻게든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캐나다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 자치령은 태평양을 손에 넣지만, 가입 당시 약속한 대륙 횡단 철도 건설을 차일피일 미뤄버린다. 이에 화가 난 브리티시 컬럼비아 정부 내에서 탈퇴 논의까지 오가자, 캐나다 정부는 민간 자본 투자를 받아 캐네디언 퍼시픽(Canadian Pacific)이란 철도 기업을 설립해 가입 14년만인 1885년에 대륙 횡단 철도를 완성했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통합과 함께 캐나다는 영토 확장과 인구 증가를 위해 서부 개척에 나섰다. 우선 메티스인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매니토바 주를 창설하고, 서부 내륙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스캐처원, 앨버타 주가 창설되었다. 이로써 현대 캐나다를 구성하는 10주와 3준주 중 뉴펀들랜드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자치령에 가입했다. 당시 자치령 가입을 거부한 뉴펀들랜드는 캐나다와 별도의 자치령으로 승격한다.[12]

한편 미영전쟁 이후 캐나다와 미국의 관계는 천천히 회복세에 들어섰으며, 양국의 발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주고받았다. 1800년대 초반에는 캐나다 서부에서도 골드러시가 일어나 많은 미국인들이 캐나다로 건너왔었고, 1800년대 후반 부터는 미국의 캐나다보다 훨씬 빠른 산업화로 인해 수많은 캐나다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나기 시작했으며, 1870년대에는 캐나다 인구 약 1/6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또 여러 미국 기업들이 캐나다에 진출하여 캐나다 시장에서 점유율을 넓혀 갔다. 또한 20세기 들어서 캐나다에 라디오가 보급되자 미류 열풍이 불어 라디오 방송 시간의 대부분을 미국 노래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미국 문화의 영향력에 의해 캐나다 현지 문화가 잠식될 위기를 느낀 캐나다 정부는, 자국의 문화 예술 발전을 위해 여러 협회를 창설하고 캐나다 최초의 방송국을 개국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캐나다 공영방송 CBC의 시작이다.

6.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6.1. 19세기 후반

캐나다 자치령 정부는 1867년 이후 완전한 내정 자치권을 얻었지만, 정작 외교권과 군사권은 계속 대영 제국 정부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본국 정부와 캐나다의 이해관계가 계속 충돌하면서, 남아 있는 외교 및 군사권도 가져와야 한다는 여론이 캐나다에서 일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이 부상하며 점차 아메리카보다는 유럽 대륙에 집중했고, 따라서 가급적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이때 영국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867년 1903년 벌어진 미국-캐나다 국경 분쟁이다.

당시 영국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와 미국 워싱턴 주,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 알래스카 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입장을 많이 들어주며 자기들 멋대로 분쟁을 해결해버렸다. 당연히 이는 현지 캐나다인들의 공분을 샀고, 캐나다 내에서 자주적인 외교와 군사 운용을 향한 목소리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09년 들어 자치령 독자 외무부를 설립하며 점차 영국으로부터 외교권을 가져오게 되었고, 1926년 밸푸어 선언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캐나다가 독자적으로 외교권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밸푸어 선언 발표 직후 1927년에는 워싱턴 D.C. 주재 캐나다 대사관이 문을 열었으며, 당해 체결된 미-캐나다 어업 협정도 캐나다 수산 장관이 직접 서명했다.

6.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은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자주 독립의 여론이 생겨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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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몬트리올 주민들의 징병 반대 시위 출처
전쟁 초기 자치령 주민들은 캐나다가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의무적으로 참전한 사실에 대해 당연히 영국을 도와야 한다며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며 많은 수의 캐나다인들이 전사하였는데도 협상국 병력이 모자라자, 1917년 캐나다 정부는 자치령 일대에 징병령을 내려버린다. 갑자기 내려진 징병령에 캐나다인들, 특히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간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본인들이 자치령 소수민족으로써 영국계와 비교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들과 별 관련도 없는 영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싶어하지 않았다.[13] 여기에 캐나다인 군부대들이 프랑스어를 금지하고 영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등 차별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프랑스계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및 반전 여론이 급속도로 퍼지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전쟁을 계속하고 싶던 정치권은 전쟁에 호의적이었던 영국계 캐나다인들을 등에 업고 징병령을 통과시켜버렸다. 이에 차근차근 쌓여 가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불만이 임계점을 넘어버리며 민족주의 폭동으로 번졌다. 1918년 퀘벡 전역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폭동이 발발했고, 캐나다 정부는 군사를 동원해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1917년 징병 위기(Conscription Crisis of 1917)라고 불린 이 폭동으로 캐나다 사회는 큰 상처를 입었으며, 당시 줄기차게 징병제를 밀어붙였던 캐나다 보수당은 폭동 이후 한동안 퀘벡 지역 선거에서 쓴맛을 봐야 했다.

어찌됐건 캐나다 병사들은 캐나다군이 아닌 영국군으로써 1차 대전에 참전했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여러 번 승리를 쟁취하며 활약했다. 전쟁 당시 독가스가 처음으로 쓰인 제2차 이프르 전투(Second Battle of Ypres)에서, 캐나다인 병사들은 영국군의 지원이 올 때까지 오줌 적신 수건을 코와 입에 댄 채 독가스를 막고 전선을 사수했다. 1917년 비미 리지 전투(Battle of Vimy Ridge)는 처음으로 작전 입안부터 실제 동원병력까지 거의 95% 이상이 캐나다군이었던, 캐나다가 주도한 첫 전투이다. 부활절 다음날인 월요일, 캐나다 병사들은 따뜻한 음식과 럼주로 배를 채우고 전투를 시작했다. 이후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은 1만 5천 명의 본대가 독일군 제1진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독일군의 격렬한 반격을 뚫고 진흙 구덩이, 철조망, 지뢰를 넘으며 전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캐나다 병사들은 최전방 방어선을 넘었는지도 모른 채 제2차 방어선까지 진격하며 독일군을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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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비미 리지 전투 승리에 환호하는 캐나다인 병사들 출처
비미 리지 전투의 승리 이후 캐나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영국군이고 프랑스군이고 왕창 깨졌던 요충지를 비교도 안 되게 적은 희생으로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캐나다 병사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 "Who won at the Vimy?"였을 정도였다. 상술한 여러 번의 전투에서 성과를 거둔 캐나다 병사들은 서로 출신지에 따라 '온타리오 주 파병 군단', '매니토바 주 파병 군단'으로 구분짓기를 그만두고, 하나의 '캐나다군'으로 생각하며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쟁의 활약상은 캐나다 본토에도 널리 퍼져나갔으며, 통합과 함께 상호간에 이질감을 느끼던 자치령 주민들에게 '캐나다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었다. 전쟁 기간 동안 총 60만의 캐나다인이 동원되었으며, 6만명의 전사자와 15만명의 부상자를 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자국에 대한 캐나다인들의 자부심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고, 점차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온전한 자주 국가를 이루자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종전 이후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당시 캐나다 총리였던 로버트 보든(Robert Borden)은 유럽 열강들에게 캐나다의 전쟁 피해를 강조하며 캐나다를 영국 자치령이 아닌 독립 국가로써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를 포함한 주요 열강 지도자들이 승낙했고,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과 함께 캐나다는 국제 사회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캐나다는 국제연맹에도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한편 전쟁이 끝나 가던 1918년, 본국 영국에서의 서프러제트와 함께 캐나다에서도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당시 여성 인권 신장에 호의적이었던 보든 총리는 1917년 우선 전쟁 미망인들과 군인 남편, 아들을 가진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보든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여성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줄 것을 약속하고, 뒤이은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연임에 성공했다. 1918년, 보든은 마침내 퀘벡을 제외한 캐나다 전 지역의 여성들에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했다. 이후 1921년 온타리오에서 캐나다 최초의 여성 의원 아그네스 맥페일(Agnes Macphail)이 당선되고, 1940년에는 퀘벡 주도 완전한 여성참정권을 보장하며 지금에 이르게 된다.

전쟁과 함께 캐나다 자치령은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인정받지만, 행정상으로는 여전히 영국에 소속된 자치령에 불과했다. 이처럼 독립국도, 속령도 아닌 캐나다의 지위는 1926년 들어서야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당시 자치령 총독 줄리언 빙(Julian Byng)이 총리 매켄지 킹(Mackenzie King)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요구를 거부하면서, 캐나다 정계는 자치령 내의 헌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로 왈가왈부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로 크게 데인 매켄지 킹은 당해 제국회의(Imperial Conference)에서 영국 자치령의 지위를 재정의하자는 의제를 올렸고, 논의 끝에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과 함께 모든 자치령이 영국과 동급의 주권을 가지게 되었다. 밸푸어 선언의 내용은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Statute of Westminster)의 제정과 함께 법률로 명시되었다. 이로써 캐나다를 비롯한 모든 영국 소속 자치령이 실질적인 주권 국가가 되었다.

6.3. 제2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의 활약상과 함께 온전한 주권국가가 된 캐나다는, 곧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국회 회의를 통해 연합군으로써 참전을 결정했다. 1943년 12월, 연합군은 이탈리아 전선의 오르토나라는 마을에서 독일 공수부대를 상대로 크게 고전했는데, 좁은 골목과 길거리로 가득한 마을 곳곳에 독일군이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착화된 전투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캐나다군은 쥐구멍(mousholing) 전술을 고안, 캐나다군은 시가지 건물마다 몰래 폭탄으로 구멍을 뚫어 진입로를 만들었고, 도시 전체에 걸쳐 이 과정을 반복한 결과 안전한 통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캐나다군의 쥐구멍 작전은 현대전에서 자주 쓰이게 된다.

익히 알려진 오마하 해변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캐나다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다른 연합군 병력과 함께 주노 해변에 상륙한 캐나다군은 상륙한 지 불과 15분만에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해버리고 해변을 점령했다. 캐나다군은 여기서 더 나아가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우회기동으로 차단하고 조여들어가 독일군을 포위 섬멸하였다. 덕분에 영국군은 1시간 먼저 상륙을 시작한 미군보다 더 일찍 해변을 장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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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주노 비치에 상륙하는 캐나다군 출처
캐나다군이 너무나도 빠르게 독일군을 격파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주노 해변의 방어가 허술한 게 아니었냐는 의견도 나오는데, 당시 사상자 수를 보면 골드 해변의 영국군 사상자가 약 400여명, 주노 해변의 캐나다군 전사자가 359명에 부상자가 574명이였고, 소드 해변의 영국군 및 자유 프랑스군은 683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으며, 유타 해변에서는 200여명의 사상자만을 기록했다. 즉 주노 해변은 사상자 수로는 오마하 해변 바로 다음이었을 정도로 저항이 거센 해안이었다. 대전 기간에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14]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만큼 캐나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캐나다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키워나갔다. 종전 이후 캐나다는 UN에 가입하였으며, 1949년에는 마지막까지 별도의 자치령으로 남아 있던 뉴펀들랜드가 주민투표 끝에 캐나다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당시 중립과 평화를 주장하여 영국의 파병 요청을 거절하며 군사, 외교적으로 영국에게서 독립된 자주국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캐나다는 명목상 자치령으로서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킬 때마다 영국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것이 필요했는데, 훗날 1982년 영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캐나다 법(Canada Act 1982)이 제정되고 나서야 영국 의회의 허가 없이 자체적으로 법을 만들고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캐나다는 영국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7. 근현대

7.1. 냉전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이웃나라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도약함에 따라 미국과 국경을 맞닿은 캐나다의 특성상 그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냉전의 양대 축 중 하나인 초강대국이자 20세기 이후 주요 혈맹국인 미국은 캐나다에 있어 냉전 시대 당시 제1우방국이었으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창립 회원국의 일원이 되었다. 자연히 6.25 전쟁에도 미국을 따라 참전했고, 1958년에는 국가간 협력 하에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North American Aerospace Defense Command; NORAD)를 창설하여 항공우주 공동방위조직을 맺었으며, 이에 캐나다의 영공 또한 미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냉전 중반기에 미-캐 관계는 미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냉전 당시 제1세계와 제2세계 내부에서의 다각화가 일어나자 캐나다는 되도록이면 중재 외의 이유로 국제 분쟁에 끼지 않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캐나다 정부에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달라는 둥 캐나다에 소련을 견제할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자는 둥 적극적인 군사적 협조를 요구했다. 여기에 캐나다 정부와 합의 없이 독단적으로 캐나다에 영향을 끼치는 외교적 결정들을 밀어붙이자 양국 사이엔 마찰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이러한 갈등은 베트남 전쟁 때 극에 달했다. 캐나다는 베트남 전쟁 파병을 거부하고 참전을 기피하던 미국인들의 망명을 받아주며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당시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 당신네들 옆에서 사는 것은 마치 큰 코끼리와 자는 것 같군요. 당신들이 아무리 친절하고 얌전한 맹수라고 쳐도 그 옆은 움찔거리거나 잠자는 소리 하나하나가 신경쓰이니까요."라며 대놓고 미국을 비판하는 연설을 한 바 있다. 미국을 코끼리에 비유하며, 미국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행동 하나하나가 캐나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미국을 빗댄 내용이다. 같은 북아메리카 대륙 나라임에도 수시로 의견 충돌을 빚던 캐나다와 미국의 불편한 관계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 시대가 끝나고 나서야 회복세에 들어섰다.

7.2. 퀘벡 독립운동

한편 프랑스계가 주류를 차지했던 퀘벡은 20세기 초까지도 전근대적, 가톨릭적 구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퀘벡의 구시대적인 면모는 1960년대부터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으로 일컬어지는 급격한 근대화, 세속화 과정을 거치며 점차 사라져 갔다.

퀘벡 주는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집권한 퀘벡 자유당(Parti libéral du Québec, PLQ)은 주 정부의 주도 하에 강력한 경제 개발을 실시하며 주 내의 경제 주도권을 영국계로부터 빼앗기 시작한다.[15]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영국계들의 소유였던 수력 발전 회사 '이드로 케베크'(Hydro-Québec)의 국유화였다. 이후 정교분리 정책이 이루어져 오래도록 가톨릭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교육, 의료 부문을 정부가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사회복지 및 노조에 대한 지원도 확대되었다. 또한 프랑스어의 사용이나 프랑스계 문화 보존에 대한 법률이 여럿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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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1970년, 몬트리올을 활보하는 계엄군 출처
상술한 조용한 혁명은 퀘벡의 프랑스계들이 스스로를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아닌 퀘벡인으로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장차 퀘벡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퀘벡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에는 급진파 독립운동 단체인 퀘벡 해방전선(FLQ)이 몬트리올에서 퀘벡 내각 관료인 피에르 라포르테(Pierre Laporte)와 영국 외교관 제임스 크로스(James Cross)를 납치하는 테러리즘을 일으켰다. 10월 위기(October Crisis)라 불린 해당 사건을 두고 당시 총리였던 피에르 트뤼도가 전시조치법을 발동하고 계엄령을 내려 사태를 진압하지만, 라포르테는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FLQ는 해체되었다.

연방정부는 독립 열기를 완화하기 위해 퀘벡에 상대적으로 많은 국회 의석, 문화와 언어 인정, 국영 가톨릭학교 개설 등 여러가지 정치적 편의를 제공한다. 이후 1969년 7월 7일에는 연방정부 주도 하에 공용어에 대한 법이 도입되어 프랑스어가 공식적으로 영어와 동등한 지위에 오른다. 연방정부의 노력 끝에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퀘벡 분리 운동은 주류에서 멀어지고,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로써 1980년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퀘벡 주 분리독립 투표가 이루어진다. 첫 투표는 40:60으로 꽤 큰 차로 부결되었지만, 두 번째(1995년) 투표에서는 49:51로 근소한 차로 독립이 부결되었다. 두 번의 실패에도 계속되었던 독립 운동은 21세기에도 정당정치의 형태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세가 크게 줄었다.

7.3. 현대

1993년 진보보수당의 브라이언 멀로니(Brian Mulroney)가 사임하면서 킴 캠벨(Kim Campbell)이 캐나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의 자리에 올랐으나, 취임 4달만에 진보보수당이 총선에서 자유당에게 참패하며 총리직에서 물러선다. 후임자로 자유당 장 크레티앵(Jean Chrétien)이 총리에 당선되었으며, 퀘벡 블록의 약진과 함께 2차 분리 독립 투표가 이뤄졌으나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근소한 차로 부결되었다. 크레티엥 정부는 코소보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군대를 파병하며 국제 분쟁에 관여하였으나 이라크 전쟁에는 파병하지 않았다.

<colbgcolor=#d82727> 2005년, 시민결혼법 통과를 축하하는 시민들 출처
한편 2003년 온타리오 주가 캐나다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고, 뒤이어 다른 주와 준주들도 동성결혼을 합법화한다. 2005년 캐나다 자유당 폴 마틴(Paul Martin Jr.) 총리 정부의 주도 하에 시민결혼법(Civil Marriage Act) C-38호가 발의되고, 논의 끝에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전국의 동성결혼이 합법화된다. 이로써 캐나다는 세계에서 4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가 되었다.

폴 마틴을 뒤이어 취임한 보수당 스티븐 하퍼(Stephan Harper) 총리는 보수 표심이 강한 앨버타 주의 석유 산업에 투자를 늘렸고, 경제적 이유를 들며 교토의정서를 탈퇴하는 등 반(反) 친환경적 노선을 탄다. 그러나 미국의 셰일 가스 채굴로 저유가 시대가 도래하자 캐나다 경제는 큰 타격을 맞으며 비틀거렸고, 하퍼와 보수당은 민심을 크게 잃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2015년 F-35 도입 관련 스캔들이 터지고 의회가 내각불신임결의을 제출하자 하퍼는 의회해산을 선언한 뒤 총선거를 실시하지만, 결국 자유당에게 참패하고 만다.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든 하퍼는 곧 자리에서 물러나고, 자유당의 쥐스탱 트뤼도가 22대 총리 자리에 올랐다.

아버지 피에르 트뤼도에 이어 총리가 된 트뤼도 총리는 젊고 진보적인 공약으로 그리고 미남이라는 점에서도 세계적 관심을 모았다. 대표적인 트뤼도의 진보적 행보는 남녀 동수 내각, 레지덴셜 스쿨 등 과거사의 사죄, 시리아 난민 수용, 오락용을 포함 대마초 전면 합법화 등이 있다. 또한 향후 5년 동안 적자를 내서라도 돈을 많이 써서 경제를 부양하겠다는, 경제적으로도 과감한 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스티븐 하퍼의 지휘 아래 에너지 산업에 치중했던 캐나다의 경제 구조를 바꾸는 시도로 보인다. 또한 중산층에게 부과하던 세금을 줄이고, 1% 부유층에게 세금을 더 거두겠다고 밝히는 등 사회민주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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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2021년, 코로나19 백신을 접종 받는 쥐스탱 트뤼도 총리 출처
한편,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캐나다 역시도 큰 경제적, 사회적 타격을 받았다. 트뤼도 정부는 강력한 봉쇄 정책 및 백신패스 등 다양한 방역수책을 물색하며 확산세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는 캐나다에도 큰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21세기 캐나다 G7의 일원으로써 안정적인 사회와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거듭났다. 또한 기존의 영국-프랑스계 간의 언어, 문화 평등을 법적으로 보장함과 동시에 개방적인 이민 정책으로 해마다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캐나다의 이민 사회는 현지 문화 적응을 강조하는 강압적인 이민 정책과 달리, 모자이크처럼 여러 민족을 포용하며 다양한 문화가 함께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 일찍이 차별금지법을 통과하여 인종, 성별, 종교, 성적 지향 등 개개인이 각자의 특성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국가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지금의 캐나다는 세계적으로도 인권 의식이 가장 높은 국가이자 다문화주의의 성공적인 선례가 되었으며, 캐나다인들 스스로도 국가적 정체성을 다양성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캐나다의 개방적인 사회 구조는 2010년대 서방 세계의 급속한 우경화에도 꺾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8. 근대 캐나다 원주민의 역사

캐나다에는 유럽인이 진출하기 이전까지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유럽인 도래 이후 원주민들은 서서히 사회 주류에서 밀려나고 차별받았다. 오늘날 캐나다 역시도 원주민 차별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캐나다가 프랑스나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에는 유럽인 교역상들이 원주민 사회에 알코올 중독을 조장하여 원주민들의 삶의 질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캐나다 자치령 시절 이루어진 레지덴셜 스쿨(원주민 자녀들을 기숙 학교에 강제로 집어넣고 가족들과 분리시켰던 정책) 운영의 결과 원주민 사회 내 세대 단절이 일어나 원주민 문화에 매우 큰 손실이 일어나기도 했다.

8.1. 식민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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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영국인과 물건을 거래하는 캐나다 원주민 출처
모피 교역에서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비버 개체군이 포획을 당해 하나씩 없어지면서 교역이 서쪽으로 빠르게 움직였고, 그리하여 모피 포획꾼들이 사람이 손대지 않은 비버 서식지들을 찾아 내륙 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 유럽인들의 모피 요구는 아메리카 원주민 집단들 사이에서 경쟁을 격화시켰다-커져가는 유럽 쪽의 수요에 맞추려고 새로운 포획 구역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유럽산 물건을 얻으려는 경쟁이 또 격화됐던 것이다. 모피 교역은 이렇게 해서 아메리카 원주민 집단들 사이의 전쟁의 성격을 바꾸며 전쟁의 강도와 범위를 늘려놓게 된다. 이 때문에 어떤 집단은 전체가 절멸당하기도 했고 다른 집단은 이전 거주지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유럽과 역사없는 사람들 / 에릭 R. 울프 저

정착 초기 캐나다의 백인 이주민들은 원주민들로부터 모피를 구입하고 그 대가로 술과 총을 주었는데, 총을 사용하게 된 원주민들은 모피 원료가 되는 동물들을 재생 가능한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학살하여 모피 동물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이 필요했던 원주민들은 다시 충분한 양의 모피를 획득하기 위해 이웃 원주민들의 거주지를 점령하고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모피 동물을 사냥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쫓겨난 이웃 원주민들은 노예가 되어 캐나다의 프랑스, 영국 식민지로 팔려갔다.

캐나다 내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 민족이 아닌 탓에 전통적으로 토지의 소유권이나 영토와 관련된 개념이 모호했다. 영국계 개척자들이 캐나다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원주민들과 땅을 공유한다는 계약서를 쓰게 만들었다. 영국인들은 계약 내용을 알리기 위해 원주민 통역사들을 동행했으나, 당시 원주민들은 연합체가 아닌 부족국가를 이루며 살았고 말도 달랐기에 의사전달에 애를 먹었고, 계약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부족했으며, 영국인들은 이를 악용하여 식민지배에 훨씬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을 틀기도 했다.

연금을 받는 대가로 원주민들은 땅을 내주고 보호구역에 물러나 살게 되었는데, 좋은 땅은 백인들이 계약으로 다 차지했다보니 보호구역은 대개 척박한 황무지였다. 계약서 한 번에 원주민들을 영국과 캐나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꼭두각시로 만든 것이다. 거기다 본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목, 수렵, 채집 위주의 생활을 해온 만큼, 보호구역의 존재 자체가 원주민들의 생활을 고달프게 만드는 정책이기도 했다. 결국 원주민들은 주변 RCMP와 인디언 관리당국이 진주한 기지 주변 마을에 의존하며 생활하기 시작했다.

8.2. 레지덴셜 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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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레지덴셜 스쿨의 교실 모습 출처
캐나다에 근대적인 정부 체제가 세워진 이후로 원주민에 대한 정책은 '레지덴셜 스쿨' 등을 통해 원주민의 문화를 말살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16] 당시 캐나다는 영국계를 향한 민족 분쟁과 반란 등 사회 갈등의 빌미 자체를 없애기 위해 국가 구성원 전체가 같은 국가관과 여러 동질성을 공유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영국계 캐나다인의 가치관을 원주민들에게 주입하고자 하였다.

교회, 학교 등을 개조해 만든 레지덴셜 스쿨은 명목상 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이었으나, 실제로는 원주민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백인으로 강제 동화시키는 조직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원주민들을 레지덴셜 스쿨로 회유하는 형식에 가까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RCMP의 전신인 NWMP(North-West Mounted Police)와 자치령 경찰(Dominion Police)들을 앞세워 무력까지 동원해가며 납치 후 입학시켰다. 학교에서 원주민들은 영국식으로 개명하고 영어를 사용하도록 강제되었으며 개개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머리카락이 잘렸고, 옷도 "백인"들처럼 입어야 했다.

학교의 탈을 쓴 레지덴셜 스쿨은 이름이 무색하게 교육 과정이 도합 3~4학년 수준으로 매우 낮았다. 이는 당시 정부가 원주민들을 교육 대상보다는 "비문명적 미개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습보다는 "문화 교정"을 받았으며, 자신의 문화와 관련된 행동을 하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교사 역할을 했던 백인 선교사들은 어린 소년소녀들을 성폭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원주민들은 지금도 백인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시각이 좋지 못하다.

학교를 졸업한 원주민들은 원주민 정체성을 훼손당했지만, 그렇다고 주변 백인 사회에서 동등한 "캐나다인"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았기에 큰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몇몇 원주민들은 자신의 문화와 관련된 행동을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기도 했고, 때문에 원주민 문화가 단절되기도 했다. 원주민 언어 사용자들의 수는 급감했고, 원주민이라는 정체성이 희석됨에 따라 원주민 사회의 협동력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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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공식적인 캐나다의 마지막 레지덴셜 스쿨[17] 출처
어릴 때부터 부모와의 강제로 떨어져 가혹한 1900년대의 기숙사 생활과 문화적 강압, 인종차별, 성폭행을 겪은 원주민들은 대부분 정신적인 충격을 강하게 받았다. 훗날 사회로 진출한 원주민들 사이에서 성격장애 알코올 중독, 조울증 등의 정신질환과 함께 가정폭력이 유행처럼 번지는 계기가 된다. 또한 성폭행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원주민들로 인해 원주민 거주지 일대의 치안 부재와 더불어 여성 인권의 하락을 야기했다.

1840년에 처음 생겨나 백 년 넘게 캐나다의 원주민들을 고통 속에 빠뜨렸던 레지덴셜 스쿨은, 한참 후 1997년에야 마지막 학교가 폐쇄되었다.

2015년 캐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레지덴셜 스쿨을 문화적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고 최소 3,200명의 어린이가 레지덴셜 스쿨에서 학대와 방치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정확한 숫자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아 실제 피해자는 더욱 많을 수 있다고 밝혔다. 레이덴셜 스쿨에서 일어난 학생 사망의 직접적 원인은 학교 내 기록의 미비로 인해 명확하지 않으나, 캐나다 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수가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레지덴셜 스쿨의 열악한 시설 등이 결핵 확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많은 레지덴셜 스쿨 운영진은 이렇게 죽은 원주민들을 대충 매장하고 이름도 남기지 않았으며, 이런 무덤들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오늘날에 들어서야 가끔씩 발견된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2021년 5월 27일, 브리티시 컬럼비아 캠룹스(Kamloops) 지역 레지덴셜 스쿨 건물에서 원주민 어린이의 시신 215구가 발견된 사건으로, 가장 어린 피해자의 나이는 3세였다. 이는 캠룹스(Kamloops)의 원주민 부족인 Tk’emlúps te Secwépemc 에 의해 밝혀졌다. # # 이어 6월에는 서스캐처원의 기숙학교 자리에서 어린이 751명이 묻힌 무덤터가 발견됐다. 캐나다 곳곳에서 규탄·추모 시위와 함께, 레지덴셜 스쿨과 관련이 깊은 교회에 대해 방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종교계의 반성도 계속되어 2022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고 사과를 위해 캐나다를 방문했다.

건국 초기부터 끊임없이 박해받던 원주민들은, 캐나다 사회에 다문화주의가 정착되고 과거사 재조명이 이루어지며 레지덴셜 스쿨의 참상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고, 이를 들어 캐나다 정부도 과거사를 반성하는 메시지를 내기 시작했다. 2008년 6월 11일, 스티븐 하퍼 정부가 처음으로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후 쥐스탱 트뤼도 현 총리도 공식 사과했다. 두 총리는 연설과 함께 레지덴셜 스쿨에서 행해진 모든 악행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사과하였다. 현대 캐나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역사 과정마다 과거 원주민 탄압과 캐나다의 만행을 빠짐없이 가르치며, 선조들이 벌인 잘못을 잊지 말자고 강조한다. 이에 원주민들은 정부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과거사 청산 및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목소릴 내고 있다.

8.3. 원주민들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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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2727> 매니토바의 원주민 보호구역[18] 출처
캐나다 정부는 해마다 원주민 보호를 위해 예산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원주민 보호구역의 생활수준은 낮다. 캐나다의 원주민 보호구역은 오랫동안 국가 인프라 사업에서 소외되어 흙밭에 비포장도로 천지이며, 1800년대에 지어진 낡은 공동주택이 드문드문 지어진 황폐한 모습이다. 인프라 낙후로 인해 물류비용이 높아져 생필품도 대도시와 비교해 적게는 5배, 많게는 20배 이상 비싸고, 치안이 열악하여 펜타닐같은 불법 마약과 매독, 에이즈 등의 성병이 돌고 있다. 주민들은 기본적인 인프라와 깨끗한 물조차 얻지 못한 채 광견병 걸린 들개들, 도박으로 돈을 날린 거지들과 뒤엉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보호구역에서 나오는 순간 연금이 끊기기 때문에 보호구역을 벗어난다는 선택지는 생각하기 어렵다.

캐나다 북쪽의 이누이트들도 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캐나다 이누이트의 실상은 알레시아 아만쿡 바릴 감독의 다큐멘터리 앵그리 이눅(Angry Inuk)을 통해 소개된 바 있는데, 고질적인 기아와 빈곤은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근근이 먹고 살던 물개 사냥(Seal Hunting)도 유럽의 물개가죽 금지로 인해 막혀버렸다. 최근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는 가난의 구렁텅이에 허덕이는 원주민 사회를 구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보호구역 대규모 개편을 공약한 신민당 당수 자그미트 싱은 한 기자가 "세금이 많이 오르지 않겠는가?"라 묻자 "당신에게 다시 묻겠다. 토론토, 몬트리올, 밴쿠버에 깨끗한 물의 공급이 끊겨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반문했다. #

오랜 기간 차별당했던 역사의 후유증으로, 캐나다 원주민들은 아직까지도 다른 캐나다인들에 비해 열악한 삶을 살고 있다. 캐나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 눈물의 고속도로 연쇄살인 사건과 같은 참혹한 일도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원주민 보호구역을 통과하는 캐나다 파이프라인을 두고 논쟁도 거세게 일고 있다. 최근에는 자치 사회를 지탱해오던 생명줄인 연금이 계약상 만기에 달해 아예 끊길 예정이다. 원주민들의 생존권이 위협 받는 문제가 현실화되기 직전이지만, 캐나다 정부와 원주민 커뮤니티들은 마땅한 대안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1] Iroquois. 프랑스어 발음상으로는 '이로쿠아'로 읽힌다. [2] 초록색이 1차, 빨간색이 2차 탐사 경로다. [3] 루이 14세는 당시 인구를 늘리기 위해 '왕의 딸들(Filles du roi)'이라 불리는 약 800명의 여자들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 '왕의 딸들'을 소재로 한 소설이 있다. [4] 미 남부 지역 사람들은 이들을 케이준이라고 불렀는데, 아카디안의 프랑스어 발음 (l'Acadien)이 와전되면서 생긴 호칭이다. [5] 지금의 퀘벡 주 일대. [6] 지금의 온타리오 주 일대. [7] 여기서 상류와 하류라는 명칭은 신분적 의미의 상류와 하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두 주를 지나던 세인트 로렌스 강의 상류와 하류를 뜻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하류 캐나다는 상류 캐나다 보다 북쪽에 위치하여 있으면서 이름에 하류가 들어가게 됐다. 이런 네이밍 센스는 후대 캐나다 고등학생들의 역사 시험을 골치아프게 만들었다(...) [8] 티피카누 전투(Battle of Tippecanoe) 당시 모습이다. [9] 이후 1856년에 오세아니아의 식민지들에도 책임정부가 들어서며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 본토와 같은 민주주의와 의회정치를 누리게 되었다. [10] 그리고 실제로도 저 전쟁 시기의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공약에서도 캐나다의 서해안은 다 먹어치울 야욕을 드러냈다. 결국은 현실적인 이유로 북위 49도 선에서 타협했지만... [11] 허드슨 베이 컴퍼니는 이후 유통기업으로 변화하여 현재도 캐나다의 대기업으로 남아있다. [12] 뉴펀들랜드가 캐나다에 가입한 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9년이다. 대공황으로 인해 지역 경제가 몰락하면서 자치권을 포기하고 직접 지배를 받으며 영국의 지원으로 연명하던 뉴펀들랜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번엔 캐나다에게 손을 벌렸고, 캐나다가 자금 지원 조건으로 연방 가입을 걸자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13]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강제 징병령 이전까지 징병에서 면제되었었던 탓도 크다. 눈 뜨고 일어나보니 총칼을 쥐어주고 전쟁터로 보내버린 것. [14] 원문은 If I had Canadian soldiers, American technology, and British officers I could rule the world. [15] 보수주의 정당이 웬 공공 주도 개발이냐 할 수 있는데, 퀘벡 자유당은 성향상 중도 우파를 표방하나 동시에 일부 정책들이 사민주의 색채를 띠는 특이한 정당이다. [16] "Canada's Forced Schooling of Aboriginal Children Was 'Cultural Genocide,' Report Finds" [17] 누나부트 준주 랭킨 인렛(Rankin Inlet)에 있던 키발리크 홀(Kivalliq Hall)이다. [18] 매니토바 동북부 레드 서커 레이크(Red Sucker Lake) 원주민 보호구역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