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04:53:21

퀘벡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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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트럼블 작, 리처드 몽고메리 장군의 죽음.

La bataille de Québec (1775)
Battle of Quebec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3.2. 영국 정규병-캐나다 민병대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5년 12월 31일 캐나다 퀘벡에서 대륙군과 영국군-캐나다 민병대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전쟁 초반 캐나다를 공략하려던 대륙의회의 무모한 계획을 좌절시킨 전투이다.

2. 배경

1774년 4월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 후, 애단 앨런과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소규모 민병대는 5월 10일 타이콘데로가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아놀드는 몬트리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생 장 요새를 급습해 캐나다에 주둔한 소규모 영국군을 긴장시켰다. 이러한 초반의 선전에 주목한 대륙의회는 캐나다 침공 작전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당시 캐나다의 영국군은 3개 연대에 불과했고, 캐나다 민병대와 많은 인디언 부족들은 영국에 대한 충성심이 미지근했다. 이에 대륙의회는 원정대를 캐나다로 파견해 소규모 영국군을 격파한다면 캐나다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주민들이 호응할 거라고 여겼다.

대륙 의회는 1775년 6월 27일 대륙군 북방부 사령관 필립 슈일러 소장에게 캐나다 침공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발송했다. 또한 의회는 퀘벡 주 전역에 "폭압적인 영국 정부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유포했다. 대륙의회가 승인한 군사계획에 따르면, 슈일러 소장 휘하 3,000명이 챔플레인 호수와 리슐리외 강 계곡을 거쳐 몬트리올을 공략하고 아놀드 휘하의 1,200명이 켄네베크 강 계곡을 거쳐 퀘벡 시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대륙군은 이러한 계획에 따라 그해 9월에 이동을 개시했지만 9월 16일 슈일러 소장이 병에 덜컥 걸려버리자 리처드 몽고메리 준장이 그를 대신해 군대를 통솔했다. 몽고메리는 작전대로 타이콘데로가 요새에서 출발해 챔플레인 호수와 리슐리외 강 계곡을 거쳐 생 장 요새를 공격했다.

한편 아놀드는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서 출발해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진군하면서 10월 말에 퀘벡 시에 인접한 레비 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놀드 휘하 대륙군은 행군 거리를 과소평가했고, 그 결과 가지고 온 물자가 바닥났다. 병사들은 먹을 것이 없자 신발과 장비를 먹었고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거나 굶어죽었다.

이무렵, 캐나다 주지사 가이 칼튼 경은 대륙군이 캐나다로 쳐들어올 거라는 걸 진작에 감지하고 6월 9일 계엄령을 선포한 후 민병대를 소집했다. 그는 몬트리올과 퀘벡에 영국군 소규모 정규부대를 배치시키고 퀘벡에 거주하는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들을 소집해 로열 하이랜드 민병대 연대를 설립했다. 이때 인디언 관리부 담당자 다니엘 클로스, 모호크족 전쟁장관 조셉 브란트 등은 칼튼 경에게 인디언들을 가담시킬 것을 권유했지만, 칼튼은 "인디언들이 뉴 잉글랜드의 백인들에게 온갖 잔학행위를 저지를 수도 있다."며 거부했다. 대신 그는 인디언 50명을 정찰병으로 고용해 대륙군을 감시하게 했다.

이후 칼튼 경은 몬트리올에서 버티면서 대륙군 사령관 몽고메리와 아놀드 간의 전보를 종종 가로채며 적의 작전계획을 파악했다. 또한 그는 대륙군에게 동조해 몬트리올을 대륙군에게 넘기려 한 일부 캐나다인들을 처형했다. 하지만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우월한 데다 민심이 그리 자신을 따르지 않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칼튼 경은 11월 2일 몽고메리의 대륙군이 생 장 요새를 함락시키자 11월 11일 몬트리올에서 철수했고, 대륙군은 이틀 후 몬트리올에 입성했다.

몽고메리 장군은 가급적 민심을 끌어모으기 위해 주민들을 잘 대해주려 했지만, 그로부터 몬트리올 시 관리 임무를 부여받은 데이비드 우스터 장군은 정치 고문 토머스 워커와 함께 가톨릭 교회를 모조리 폐쇄하고 반 가톨릭, 반 프랑스적인 견해를 공공연하게 내비쳤다. 이에 당시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계 이민자들은 대륙군에게 반감을 품었고, 영국군에 가담해 대륙군을 몰아내기로 결심한 이들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11월 13일,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대륙군이 퀘벡 시로부터 약 2km 떨어진 아브라함 평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벽을 부술 대포가 없었고 100개가 넘는 머스킷 총은 오랜 행군과 습한 날씨로 인해 아무 쓸모가 없었으며, 병사들의 옷은 누더기가 된 지 오래였다. 아놀드는 퀘벡 시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퀘벡 시 수비군 지휘관 앨런 매클런 대령은 "우리는 겨울에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식량과 땔감을 가지고 있으며 병력도 충분하다."며 거부했다. 아놀드는 도시를 무력으로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몽고메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 군대를 도시에서 20마일 떨어진 세인트로렌스 강 상류에 배치시켰다.

12월 1일, 몽고메리가 이끈 대륙군이 아놀드와 합세했다. 하지만 대륙군의 규모는 여전히 1,200명에 불과해 수비대 천여 명이 지키고 있는 퀘벡 시를 공략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이에 몽고메리는 12월 6일 칼튼 경에게 도시의 항복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칼튼은 편지를 읽지 않고 불태우는 것으로 대응했다. 몽고메리는 열흘 후에 다시 편지를 보내 항복을 요구했지만, 칼튼은 묵살하고 지휘권을 도시 수비대 지휘관 앨런 매클런에게 일임했다. 이에 몽고메리와 아놀드는 다섯 문의 곡사포로 퀘벡 시를 포격했고, 대륙군 저격수들은 퀘벡 시의 성벽을 순찰하는 병사들을 사살했다. 그러나 수비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퀘벡 시의 요새화 작업을 수행했다.

이렇게 되자 몽고메리와 아놀드는 매우 초조해졌다. 당시 대륙군에 소속된 병사들 중 다수는 1775년 12월 31일이 지나는 즉시 군역이 해제되는 계약을 맺고 있었고, 그들은 두 지휘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계약일이 만료되는 즉시 집으로 돌아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몽고메리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병사들에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 수비대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공격하겠다고 알렸다. 12월 27일 눈보라가 몰아치자 예정된 대로 공격하려 했지만 예상외로 폭풍이 잦아들자 취소했고, 병사 하나가 탈영해 퀘벡 수비대에게 공격 계획을 알리면서 수비대가 방어를 준비할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윽고 12월 30일,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에 몽고메리와 아놀드는 지금 당장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틀 후에 병사들이 집으로 가버릴 것이므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대륙군의 캐나다 침공 작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퀘벡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대륙군

3.2. 영국 정규병-캐나다 민병대

  • 지휘관: 캐나다 총독 가이 칼튼 경, 앨런 매클런 대령
  • 병력: 1,800명

4. 전투 경과

12월 30일 밤, 몽고메리의 부관 브라운과 리빙스턴은 휘하 민병대를 그들이 맡은 위치로 이끌었다. 그리고 12월 31일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 정해진 위치에 도착한 그들은 신호를 보내기 위해 불을 피웠고, 불꽃을 목격한 몽고메리와 아놀드는 즉시 퀘벡을 향해 진격했다. 아놀드는 퀘벡의 북동쪽 위치에서 공세를 개시했고, 몽고메리의 군대는 남쪽 해안을 따라 진군했다.

몽고메리는 눈이 쌓인 길을 따라 퀘벡 시의 외곽 방어 기지를 향해 내려갔지만,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상황인지라 진격 속도가 지연되었다. 이때 퀘벡 시의 성벽을 순찰하고 있던 보초병들이 눈보라 속에서 왠 등불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 즉시 적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에 퀘벡 시의 여러 교회들의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고, 민병대는 신속하게 소집되어 적을 막을 태세를 갖췄다. 몽고메리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이끌고 전초기지에 주둔한 소수의 적병을 격퇴하고 성벽 앞까지 진군했다가 근거리에서 수비대가 쏜 총에 맞아 즉사했고, 병사들은 삽시간에 수십명의 희생자를 내고 아브라함 평원으로 패주했다.

한편 아놀드의 군대는 썰매에 6파운드 짜리 대포를 매달아 끌고 가는 포병대와 함께 진군해 도시의 외벽을 부수고 도시 내부로 진입했지만 이내 몽고메리를 격파한 수비대의 역공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퀘벡 시 거리가 낯설었고 눈보라가 맹렬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던 병사들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적군에게 사살되었다. 아놀드는 결국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오전 10시경에 병사들에게 퇴각을 명령했지만, 대니얼 모건 대위는 퇴각 명령을 접수하지 못하고 퀘벡 시에서 가망없는 저항을 지속하다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자 항복했다. 이리하여 퀘벡 전투는 대륙군의 패배로 종결되었다.

5. 결과

퀘벡 수비대의 피해는 20명 미만에 그쳤던 반면, 대륙군의 손실은 500명에 달했다. 또한 리처드 몽고메리 준장이 전사했으며 대니얼 모건 대위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항복했다. 이후 아놀드가 이끄는 대륙군은 1776년 봄까지 퀘벡 근방에서 버텼지만 결국 캐나다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했고, 컬튼 경은 패주하는 대륙군을 추격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면서 대륙군에게 협조해 길을 안내해준 주민들을 처벌했다. 그리고 1776년 5~6월 캐나다에 도착한 9,000명 가량의 영국군은 본격적으로 미국을 향한 공세를 개시한다.